#영웅은 죽지 않아요
프레데터는 이름 있는 무기라는 명성에 알맞지 않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거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한 손으로만 휘둘러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깨가 아팠다. 왼쪽 팔 전체가 영 좋지 않았다. 외벽에 부딪힐 때 뼈가 상한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류 자체를 들고 휘두르는 것이 힘든 건 아니었다. 다만 제등의 기장이 길어 한 손으로 잡고 휘두르기엔 중심이 맞지 않았다.
오른손을 주로 쓴다고 해도 왼손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었고, 숨이 찼다. 어질거리는 시야는 덤이었다.
제등의 단면이 뱀의 목 뒤에 박혔다. 그것을 더 깊숙이 박으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뱀이 몸을 뒤틀었다.
매달리려고 해 보았지만 거친 몸짓을 버티기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깨의 뻐근함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결국 제등을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내 밑으로 커다란 호랑이가 뛰어들었다. 그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그 위로 올라갔다.
오른손을 들어 손끝을 튕겼다. 뱀의 목덜미에 박힌 류의 등이 열리면서 푸른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은색의 몸체 위로 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하지만 여전히 별 효과는 없었다.
역시나 이 뱀은 로웰 콕스가 거래하던 그 철과 같은 재질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그 물질.
“…뱀 새끼 주제에 왜 팔까지 달려 있는 건데.”
뱀의 몸에 맞지 않는 두 개의 팔이 지상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것의 팔에 푸른 불이 붙었다. 괴물의 팔은 거대한 푸른 불 속에서 휘적거리다 재가 되어 쓰러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팔은 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와중에 거지 같은 것은 저 팔은 계속해서 재생한다는 거였다.
재가 되어 스러졌던 팔이 다시 자라났다. 뱀의 몸체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다시 머리 쪽으로 내달리는 호랑이의 위에서 나는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을지. 못 죽이겠다면 이 뱀이 마음껏 행동하지 못하게 저 눈이라도 어떻게 해 버려야 했다. 하지만 현재 가장 높게 올라간 곳은 목덜미 정도였다.
불이나 그림자를 타고 곧바로 괴물의 머리 위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 뱀이 자신의 눈앞에 내가 나타나면 곧바로 눈을 감아 버리고선 독을 뿜어냈기에 고생한 것만 두 번이었다.
바람에 휘적거리는 옷고름의 끝자락을 눈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껏 상한 적 한번 없던 옷이었다. 그런데 이 뱀의 독이 닿는 순간 옷고름의 끝이 너덜거렸다.
그것을 보고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은 안 된다. 그렇다면.
뱀의 눈을 노리는 방법은 저것의 뒤로 넘어가는 법밖에 없었다. 수 개의 눈이 나를 못 볼 위치에서 끝내야 했다.
저 아래에서 흘러든 검은 그림자들이 뱀의 몸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최대한 날뛰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멀리는 못 데리고 가도 적어도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후.”
뱀의 몸으로 올라오느라 애먹는 사이 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것은 사라졌고. 몸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이제는 원래 하지도 않던 멀미까지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안 좋아질 수가 있을까 싶었다.
호랑이의 몸을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중심을 잡아 일어났다.
“…….”
여전히 마땅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더 안 좋아질 것도 없었다. 그러니 조금 위험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끝을 내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울렁이는 속에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도박을 하나 해 보려고 하는데.”
뱀의 몸을 감싼 비늘 모양의 철이 일어났다. 이호연은 그것을 피해 요리조리 뛰었다.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나중에 너무 화내지는 마.”
“!”
나를 보려 뒤도는 호랑이를 두고 그의 위에서 뛰어내렸다. 뱀의 몸을 붙잡고 있던 그림자 줄기 중 몇 개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것들을 징검다리 삼아 뛰었다. 다시 제 머리로 곧바로 달려드는 나를 보며 뱀이 다시 붉은 수 개의 눈을 감추었다.
뒷덜미에 박혀 있던 류가 타르처럼 흘러내리더니 내가 밟고 선 그림자로 합류해 다시 형체를 갖추었다.
그것을 잡아 그림자 위에서 뛰어내렸다. 제 위로 떨어지는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뱀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렸다. 번뜩이는 송곳니에서 흘러나온 초록색 액체가 나를 향해 튀었다.
등의 문이 열리며 푸른 불꽃이 흘러나왔다. 시야가 푸름에 잡아먹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의 장벽 너머를 가늠해 보았다.
도박이 성공하면 곧바로 뱀의 입 안이 보일 것이고, 실패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독에 당할 것이다.
성공 혹은 실패. 그 중간은 없다.
내 앞에 드리워진 저 불을 거두면 있는 것은 붉은 살점일까, 초록빛의 독일까. 뱀 쪽으로 달려드는 푸른 불을 뚫고 언뜻 익숙하지 않은 색감이 드러나는 것을 본 순간.
“……!”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움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을 돌렸지만, 그것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서둘러 푸른 불을 거두었다.
불에 타 사라지는 초록빛 독이 보였다. 그리고 푸른 불과 함께 독은 없애는 작은 물의 나비도.
그것은 시야에 잡히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
생각을 뒤로하고 제등을 앞으로 내밀었다. 온 힘을 다해 쭉 내밀어져 있던 뱀의 혀에 제등을 박았다.
쭈뼛 선 혀가 몸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매달려 있던 나 또한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똑같았다.
몸을 틀어 거대한 이빨을 피하고, 발을 들어 그것들을 걷어찼다. 그 반동을 따라 혀에 박혀 있던 제등이 빠졌다.
초록빛 독이 흐르는 목구멍을 발로 차 뛰어올랐다. 미끄러운 액체에 잠시 비틀거리느라 높게 뛰어오르지는 못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피가 흐르는 혀는 입천장에 바짝 붙어 있었다.
제등을 혀뿌리 바로 뒤에 박아 넣는 순간 뱀이 머리를 치켜들고 제 안을 괴롭히는 나를 방해하기 위해 온몸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행동을 따라 발이 허공을 휘저었다.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몇 번이나 제 몸을 휘두르던 뱀은 곧 버둥거려 봤자 아무 소용 없고, 되레 제등이 제 몸에 더 깊숙이 박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행동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얌전히 중력의 영향을 받은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몸이 추락하는 선뜩함을 느끼는 순간 어깨에 가해지는 압력이 느껴졌다.
어둑한 시야로 새빨간 뱀의 내부가 보였다. 바로 옆으로 초록빛 독액이 흐르고 있었다.
“…제등이 내 키보다 커서 다행이네.”
고개를 들어보니 거의 다물려지다 만 입이 보였다. 그 희미한 틈새로 들어온 빛이 지금 내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저보다 큰 먹이를 먹을 때 그것을 일단 입 안에 넣고 숨통을 조이듯 뱀의 목구멍이 조여 오고 있었다. 그것을 제등이 막고 있었다.
팔에 힘을 줘 제등 위로 올라탔다. 내 발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나무의 결을 보며 손을 등 위로 올렸다.
구슬 장식들이 맞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등이 열리며 쏟아져 나오는 불이 뱀의 내부를 타고 쏟아져 내렸다.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괴물이 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확실히 이번 공격은 효과가 있었는지 뱀의 몸체가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여 오던 목구멍이 벌어지고 희미하게 열려 있던 입 또한 활짝 열렸다.
벌어져 있는 입을 보며 발에 힘을 주었다. 이빨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타르처럼 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류를 곧바로 다시 형상화해 손에 쥐었다. 뭉툭한 콧등을 밟고 다시 벌어지는 입을 힘주어 밟으며 나를 보는 부릅뜬 눈을 향해 달렸다.
수 개의 눈 중 가장 중심에 있던 것을 향해 제등을 찍어 눌렀다.
깊숙이 박힌 제등으로부터 시작된 그림자 줄기들이 남은 눈들을 안쪽부터 진득하게 괴롭히다 제 몸을 드러냈다.
반항하려는 뱀의 얼굴을 향해 힘주어 발을 구르자 그 위로 약간 파인 자국이 생겨났다. 고통은 확실하게 느끼는 것인지 뱀의 움직임이 그 발 구름에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뱀의 눈과 입에서 검은 줄기가 한가득 나오고 그것보다 더 많은 수의 줄기가 뱀의 내부를 완전히 헤집어 놨을 때.
마치 썩은 나뭇가지가 한가득 삐져나온 뱀 형상의 화분 같은 것이 햇살 아래 드러났다.
드디어 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몸을 비틀던 괴물의 마지막은 죽기 싫어 몸을 뒤트는 비틀림이었다.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멈춘 뱀의 머리를 살펴보다 제등을 뽑았다.
호랑이의 모습에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호연이 내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화내려나, 걱정하는 내게 그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너무 멀어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은 대충 보였다.
“…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곧바로 제등을 뒤로 돌렸다. 제등을 들고 선 오른팔에 압력이 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쥬와는 다른 완벽한 보라색, 천공 섬의 나비보다 더 진하고 어두운 그런 보라색의 눈동자와.
“와. 이걸 막네?”
눈물이 고인 것처럼 반짝이는 눈이 반달같이 휘었다. 제등에 막힌 것은 단검이었다. 예의 그 푸른빛 서린 은색의 철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다리를 들어 남자의 다리를 걷어찼다. 의외로 맥없이 넘어지는 남자의 심장을 향해 제등을 찍어 눌렀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하지만….
“…….”
“이상하네…. 레코디아는 네가, 죽이는 흉내도 못 낼 거라고 하던데.”
“…….”
“하하, 이상한 얼굴. 신기해? 안 죽어서?”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풀고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남자는 제 심장에 꽂힌 제등을 손으로 더듬었다. 곧바로 그의 손에 푸른 불이 붙었다.
“이것 좀 빼 주면 안 될까? 너무 깊이 박혀서 안 빠져.”
가느다란 팔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멈추었다. 툭 떨어진 제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라색 눈에 웃음이 서렸다.
“아니다. 안 빼 줘도 돼. 대신 내가 재밌는 거 보여 줄까?”
그는 자신의 팔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내 옆으로 뛰어온 이호연이 날 끌어안으며 눈을 가렸다.
끊어지는 온갖 것들의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보지 말아요.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손을 올려 그의 손을 잡았다. 내 눈을 가린 손의 떨림이 간절했다. 인제 와서 저런 것을 본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유난이었다.
그의 손이 떨어졌을 때 보게 된 것은 바닥을 구르는 제등과 그 옆에 서 있는 남자.
그리고 뱀의 머리 위를 가득 메운 붉은 피였다.
“…….”
말없이 그것을 보는 나를 보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 앨리스. 난 다윈. 네가 밟고 선 이것. 이 세상의 절반을 메꿔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괴물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는 너도 무서워했을 것들의 주인이야.”
그는 양손을 들었다. 그의 소맷자락에서 작고 기다란 하얀 뱀이 기어 나왔다. 그것에게 뺨을 비비며 다윈은 말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죽일 수 없는 불멸의 존재.”
팔을 내려 뒷짐 진 그는 기쁘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만났다. 푸른 불꽃…이 될 작은 불티. 있잖아, 너 말이야.”
탕!!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다윈의 움직임이 멎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와 이호연은 몸을 굳혔다.
다윈은 제 가슴 부근을 더듬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가볍게 넘겨 버리는 그와 달리 내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 소리는 분명 총소리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나한테 집중 좀 해 주면 안 돼? 아, 이거 때문에?”
다윈은 피가 묻어나오는 제 가슴팍을 슬슬 문지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괜찮아. 방금 말했잖아. 나는 불멸의 존재라고.”
“…….”
“걔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꼭 쓸데없는 짓을 한다니까. 네가 생각하기엔 그 애는 왜 그러는 것 같아?”
“…누굴 말하는 건데.”
내 물음에 그는 새삼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네가 이름을 지어 준 애 하나 있잖아. 너한테 미움받기는 싫다는 좀 이상한 애.”
그가 말하는 게 누군지 알았다. 어떻게 들어도 지금 다윈의 입에서 나오는 건 쥬였다. 그렇다면 총을 쏜 것도 그라는 뜻인데….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고민하는 나를 훑어보던 다윈이 말했다.
“근데 계속 거기 있을 거야, 너?”
다윈이 가리키는 것은 이호연이었다.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보라색 눈을 가진 남자를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나도 푸른 불꽃이랑 단둘이 대화해 보고 싶은데. 그러니까 넌, 쟤랑 놀아.”
“!”
뱀의 비늘이 일제히 일어섰다. 우리가 중심을 잡기 위해 비틀거리는 사이 아예 넘어져 주저앉은 다윈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그를 노려보다 그림자를 불러와 그 위에 섰다.
“잡아!”
이호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 내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던 이호연이 다급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따라 나 또한 손을 거두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방금까지 우리의 손이 있던 곳을 뚫고 지나갔다.
“스티브! 멀리멀리 데리고 가!”
다윈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비늘의 틈새에서 튀어나온 한 남자가 이호연을 붙잡았다. 변형된 이호연의 손이 저를 붙잡은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칠판을 긁는 것 같은 듣기 싫은 쇠의 울음소리가 번져 나갔다. 목에 쭉 그어진 상흔을 입은 남자가 이호연을 보며 말했다.
“안 통해, 그거. 난 다른 의미로 안 죽거든.”
강유진이 보여 준 영상 속 로웰 콕스와 거래를 하던 남자였다. 뱀의 밑으로 떨어지는 둘을 보며 당황하는 내게 다윈이 말을 걸었다.
“이제 우리 대화 좀 해 보자. 나도 너랑 대화해 보고 싶었어. 우리는 너한텐 아주 관심이 많거든.”
“…그것 참 쓸데없는 관심이네.”
“그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 재밌는 것만 보여 주는데.”
그는 손을 올려 제 가슴팍을 헤집었다. 이호연이 눈을 가려 준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아니, 재생되는 것에 가까웠다.
“자, 이거 봐. 이거 누가 쏜 건지 알겠지?”
그가 내민 것은 작은 총탄이었다. 내게 있어 총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많았다. 그런데 이제 총 하면 생각나는 사람 중 살아 있는 건 한 명이었다.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던 작은 나비가 떠올랐다. 흐릿한 생각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걔는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너도 그렇지?”
그의 손에서 튕겨 나간 총탄이 저 아래로 떨어졌다.
누가 할 소리를. 내가 보기엔 쟤나 걔나 그냥 다 똑같이 뭔 생각인지 모르겠는 놈들이었다.
발밑에서 스멀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한 다윈이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우리 쓸데없이 힘 빼지 말자. 나 안 죽어. 무려 그 신께서 들어주신 소원인걸.”
확실히, 심장을 직접 찔렀음에도 그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막막하기 그지없는 사실 확인이었지만, 건진 것도 있었다.
그를 제외한 사도들은 불멸은 아니라는 것. 모두가 불사라면 굳이 저놈이 그것을 자랑하듯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그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각자 본인의 방식으로 살아서 도망간 것이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 남자는 정말로 불사라는 소리가 되는 건데. 내구도 자체는 튼튼하지 않았다. 신체 능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아직 저 밑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괴물의 수가 늘어나면 곤란해지는 건 내 쪽이었다.
“뭔 대화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건데.”
오정인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인질이나 다름없는 저 사람들이 없어야 뭘 해 보든가 할 수 있었다.
이호연이 떨어진 쪽을 힐끔거리다 다시 다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나랑 대화할 마음이 생긴 거야?”
싱글벙글 웃는 낯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을 굴리며 주변의 것들을 훑어보는 나를 보며 그는 흠흠, 헛기침을 내뱉고는 밝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너랑 만나면 다 이상해져서 돌아오더라고.”
“?”
“마티는 잡생각이 많아진 것 같고. 레코디아는 원래 이상했는데 더 이상해졌어. 어린 나비는 이런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말이야.”
그가 제 가슴 부근을 가리켰다.
“왤까? 네 무엇이 그리 특별하고 대단해서 다들 영향을 받는 걸까?”
“…….”
“네가 푸른 불꽃이라서 하기엔 넌 그래 봐야 불완전한 불티일 뿐이고. 너라는 사람 자체가 특별나다고 하기엔 내가 보기엔 언제 정신을 놓고 망가져도 이상할 것 없는 불쌍한 어린애거든.”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이 하고픈 말을 이어 했다.
“그래서 내가 또 생각을 해 봤어. 아무리 밉게 행동해도 주목받고, 도망쳐도 다시 무대에 세워지는 너는, 정말 동화 속 주인공 같구나, 하고.”
“허….”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저놈은 에드워드의 기억 속에서도 동화 타령을 하던 미친놈이었다.
“그렇기에 너의 눈물은 성장의 발판이고 웃음은 행복의 지름길이겠지. 그래서 말이야, 난, 난…. 아. 짜증 나.”
“뭐?”
흐느적거리던 기색이 돌변했다.
“난 동화가 좋아. 얼마나 예쁜지 몰라. 그래서 다 부숴 버리고 찢고 망쳐 버리고 싶어.”
“…….”
선뜩함이 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다윈은 손을 들어 내 왼쪽 팔을 가리켰다.
“후크 알아? 이제부터 넌 후크야. 난 피터 팬이고. 내 세상을 무너트리는 너는 이제 악당이야.”
그게 뭔 헛소리야.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에 젖은 보라색 눈이 어둡게 번들거렸다.
“난 싸우는 게 싫어. 무섭잖아, 그거. 그러니까 다 죽으면 난 안 싸워도 되잖아 그렇지?”
“…….”
“그 역할은 얘네들이 대신해 줄 거야.”
아주 쉴 틈을 안 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강유진 말대로 시간 났을 때 조금이라도 잤을 것이다.
괴성에 가까운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춤을 추는 것처럼 뱀의 머리 위를 휘적거리던 다윈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내 동화가 싫다면 어디 한번 다 부숴 봐. 너는 앨리스야. 너로 인해 사건은 터지고 일상은 무너지지. 이번엔 도망갈 곳도 없을 거야.”
그림자가 일렁이며 내 손으로 흘렀다. 제등이 형체를 갖추자마자 남자를 향해 던졌다. 어깨에 검은 나무가 박혔음에도 웃는 낯은 변하지 않았다.
“어디 한번 날 찾아봐.”
다윈은 어깨에 제등이 박힌 상태로 추락했다. 끄트머리로 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고 기다란 것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다시 요란스러워졌다.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는 것들이 먹이를 찾듯이 아래를 훑어보고 있었다. 땅에서 솟아오른 괴물들은 무자비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삼키려 들었다.
다시 불러들인 류에서 등을 떼어 냈다. 그림자에 달랑달랑 매달린 그것을 하늘 위로 올려보냈다. 등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불꽃이 하늘의 괴물을 집어삼켰다.
“…찾으러 간다고 한 적 없는데.”
내 불과는 다른 붉은 불이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외 다양한 마법들이 번쩍이는 것도 보였다. 지원이 왔다.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쓸데없이 시간이며 힘만 뺏는 숨바꼭질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뒤편을 보니 괴물과는 다른 새하얗고 거대한 용의 현상을 취한 백호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다윈이 사라졌던 부근을 한번 살펴보았다. 저 혼자 열심히 숨으라지. 다른 사람들만 안 건들면 상관없었다.
일렁이는 그림자를 다리에 감았다. 힘껏 힘주어 뛰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멀리도 갔다 싶었다.
몸에 맞지 않는 거대한 건틀릿을 손에 끼고 마구 휘두르는 남자가 보였다. 그나마 멀쩡한 건물 위에 발을 디디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용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땅이 갈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구름처럼 시야를 가리는 먼지 덩어리 사이를 보았다.
아마 이호연을 끌고 갔던 상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웬만하면 하지 않으려는 용의 모습이라는 건 그만큼 상대가 버거웠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는 건 동시에 상대가 이리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것을 반증하는 의미였다.
모든 것이 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들이 백호를 노리고 솟아올라 있었다. 마치 은으로 된 가시덤불 숲을 보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
다른 의미로 안 죽는다고 했었지. 그게 무슨 의미일까.
먼지구름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아래 드러난 것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호연과 그런 그에게 붙들려 바닥에 처박힌 스티브라는 이름의 사도였다.
그가 팔에 끼우고 있던 거대한 건틀릿은 박살 난 상태로 뒹굴고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그런 그들의 옆으로 이동했다.
어둑한 그림자가 내 주변을 맴돌았다.
“더럽게 안 죽네….”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잔상처가 난 그의 몸에서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이호연에게 붙잡힌 남자는 히죽이며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넌 나 못 죽인다고. 힘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그 상태로 말해 봤자 별로 믿음은 안 가는데.”
“!”
놀라 크게 뜨인 눈이 내게로 향했다. 이호연은 내가 온 것을 알았는지 슬쩍 돌아볼 뿐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다윈 놈이 너한테 졌냐?”
“안 쫓아갔는데?”
“…….”
“어디 있는지 모르는 놈 찾으러 가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놈부터 처리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어정쩡한 얼굴을 보니 당연히 내가 다윈 쪽을 찾으러 갈 거라고 생각했던 듯했다. 이게 무슨 규칙이 정해진 게임 같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1:1로 싸울 이유는 없었다.
내 발밑에서 흘러간 그림자들이 스티브의 사지를 묶었다. 그가 묶인 것을 확인한 이호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살짝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에 서둘러 뛰어가 팔을 잡았다.
“많이 다쳤어?”
“그냥 조금….”
조금은 무슨. 잘 나지도 않던 상처가 이 정도로 많이 났는데. 낯을 굳히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겉으로 보기에만 심각해 보이는 거지 그냥 긁힌 상처들이에요.”
“…이따가 제대로 치료받아.”
“류가 먼저 치료받으면요.”
그의 시선이 진득하다 싶을 정도로 내 왼쪽 어깨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고 제등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너, 안 죽는다고 했지.”
“글쎄다.”
“다윈이었나. 그놈처럼 재생 능력인 건 아닌 것 같고.”
제등을 잡고 그대로 스티브를 향해 휘둘렀다. 사람의 몸에선 날 수 없는 금속 재질의 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강유진의 영상 속에서 그는 로웰 콕스에게 자신의 팔을 잘라 건네주었다. 몸 자체가 그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면….
발을 들어 남자의 뺨을 툭 쳤다.
“야. 입 벌려 봐.”
“왜, 그 뱀새끼한테 그런 것처럼 내 입 안에 불이라도 쏴 보게? 근데 어쩌나. 난 그런 장난감이랑 다르게 진짜 철 자체인데.”
“해 보면 알겠지.”
그림자에 묶인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진한 회색빛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재밌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 말고 너랑 좀 놀아 볼 걸 그랬다.”
“그 꼴로?”
“설마. 아, 이참에 너 나랑 한번 제대로 놀아 보자. 어차피 지금 이 몸은 버리려고 했거든.”
“뭐?”
히죽거리며 웃던 남자의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색을 빼앗기는 거처럼 그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던 몸이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
뒤편에서 무언가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틀어 손을 내밀었다. 제등 위로 무언가가 내리쳐졌다. 가해지는 압력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변형된 이호연의 손이 내 앞으로 휘둘러졌다. 남자의 몸 위로 길게 이어진 상흔이 생겼다. 저 정도로는 소용없었다. 몸을 틀며 팔을 비틀었다.
제등을 바닥에 박고 비틀거리는 남자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관자놀이를 맞아 돌아가는 머리를 이호연이 붙잡았다. 처박히는 몸을 향해 제등을 내리쳤다.
검은 나뭇결을 타고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듯 일렁이는 푸른 불이 스티브의 몸 안쪽을 채울 것처럼 타올랐다.
그림자에 걸려 허공에서 불을 내뿜던 등이 더더욱 환해졌다.
얕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을 느끼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내 허리를 이호연이 낚아채 훌쩍 더 뒤로 물러났다.
우리가 방금까지 서 있던 곳에 칼날이 휘둘러졌다. 가만히 있었으면 목이 잘려나갔을 위치였다.
“더럽게 안 죽네.”
나도 모르게 조금 전 이호연이 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흐느적거리며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 류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
상했다. 검은 제등의 끝부분에 흠집이 가 있었다. 항상 곧고 부드럽게 정리되어 있던 나뭇결에 거친 잔가시가 일어나 있었다.
“조심해.”
“…….”
“잘못하면 소중한 무기 못 쓰게 된다? 내가 몸이 좀 단단해서 그런 연약한 나뭇조각을 들이밀면 안 되거든.”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바닥을 뒹구는 철 덩어리 하나를 집더니 상흔을 입을 자리에 가져다 붙였다.
그것은 스며들 듯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상처 난 부위를 메꾸었다. 색이 빠져 죽은 것 같던 부분에 천천히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자, 봐 봐. 나도 안 죽는다니까.”
“그러게. 안 죽네.”
제등을 놓았다. 내 손을 타고 굴러간 류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 하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호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아무리 이 이상 힘주어 휘두르고 찔러봤자 얕게 들어갈 것이다. 상대를 죽이는 법은 회복할 틈도 없이 곧바로 즉살시키는 것.
분하지만 류로는 안 된다. 이름 있는 무기로는 안 된다. 아니, 정확히는 애초에 무언가를 베는 용도의 재질이 아닌 나무로는.
발끝에 고이는 그림자를 눈으로 더듬었다. 통할까 모르겠지만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이호연 데리고 멀리 도망가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도울 수도 있는 거고.
힐끔 주변을 둘러보니 더 이상 무언가 무너지거나 터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지 않고 다들 제대로 도망을 간 듯싶었다.
어차피 상대해 봤자 죽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이것저것 쓸 수 있는 수단을 다 써 보기엔 내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던 등이 푸른 불을 뱉어 내며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을 두 손에 쥐니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불의 열기로 인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지랑이로 흔들거렸다. 스티브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허상을 상대로 싸우는 그를 보며 이호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아는 듯한 눈치였다.
“우린 돌아가자.”
“저건….”
“몇 시간 동안은 저러고 있을 거야.”
이호연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발밑에서 기어 나온 그림자가 우리를 감싸기 위해 슬그머니 움직였다.
스산하도록 차가운 그것이 우리에게 닿기 전 끊어지지 않았다면 나름 좋은 마무리였을 것이다.
“……!”
누군가 숨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그림자를 중간에서 가르고 지나가는 은색 철의 잔상을 눈에 담으며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목구멍 안쪽이 뜨거웠다. 누군가가 명치를 세게 친 것처럼 아팠다. 이호연이 다급한 손짓으로 날 붙잡았다.
“찾았다.”
그의 팔을 잡으며 몸에 힘을 주었다. 뒤도는 나를 감싸 안으려는 이호연의 손 사이로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스티브의 모습이 보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순간 사이로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안 것일까. 왜 환각이 깨졌지? 이제 어떻게 하지?
바로 뒤에는 우리를 베어 버릴 것 같은 칼날이, 바로 앞에는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스티브가 있었다.
변형된 이호연의 손이 칼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게 보였다. 길어진 손톱이 칼날을 긁어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이딴 잔재주, 나한테는 안 통해!”
기울어지는 몸을 받치는 몸이 단단했다. 비틀거리는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지럽던 시야가 조금 전보다 더 흔들거렸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크고 하얀 손이 붉게 번져 가는 것이 보였다. 어지러운 시야에 가장 선명하게 잡히는 것은 은색의 금속과 일렁거리는 그림자였다.
그림자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손을 뻗고 저들이 쥐여 주는 것을 잡으라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손을 뻗었다.
얇은 그림자 줄기가 내 손에 감기었다가 잽싸게 몸을 뺐다. 손안에 잡히는 차가운 것. 그게 무엇인지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것을 꾹 쥐고 눈앞에 보이는 자의 눈을 향해 휘둘렀다. 힘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었다.
상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잽싸게 피했고 내가 휘두른 것은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명백한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그제야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페이즐리가 몰래 쥐여 줬던 아주 작은 단도였다.
뒤로 물러난 스티브가 제 뺨을 더듬으며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새겨졌다.
“네가 그걸 왜….”
앞으로 기울어지는 내 몸을 이호연이 붙잡았다. 나는 손안에 잡은 것을 놓치기라도 할까 싶어 손에 힘을 주는 것에 집중했다. 속이 너무 아팠다.
작은 단도가 내 손안에서 번뜩였다. 그것은 예의 푸른 빛을 흘리며 섬뜩함을 자아냈다. 스티브의 시선은 그 단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제 뺨을 더듬던 것을 멈추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하나 있단 소리를 들었지. 내 것과 같은 것을 만드는 인간이 있다고.”
“…….”
“이상하다. 죽었으면 그게 만든 것들도 다 사라져야 하는데…. 다윈, 그놈은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쯧.”
혀를 찬 그는 귀찮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곧 약간의 비웃음을 담아 나를 보았다.
“근데 그 조막만 한 거로 뭘 어쩌게? 지금 너, 네 다리로 서 있는 것도 못 하는 거 아냐?”
그의 말대로였다. 시야는 어질거리고 몸은 축 늘어졌다. 이 상태로 싸우는 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었다. 굳이 싸울 이유도 없고.
이호연의 팔을 잡고 애써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스티브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맞아. 근데, 이 상태로 너랑 싸운다고 한 적도 없어.”
“뭐?”
검은 그림자가 스티브의 몸을 묶었다. 급작스럽게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에 잠시 비틀거리던 그는 그 상태로 우릴 향해 팔을 휘둘렀다.
사람의 팔과 같은 형태던 그것은 기다란 칼날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날 붙잡은 이호연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런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를 보는 얼굴에 다급한 의문이 서렸다.
“움직이지 않는 게 답이야.”
그게 우리가 택할 가장 올바른 선택. 마법사의 감이 속닥이는 선택권. 이토록 선명한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스티브의 칼날이 휘둘러지며 만들어 낸 바람이 뺨을 간질이는 순간, 망설임과 고민을 담은 총성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칼날이 조각나 바닥을 굴렀다. 놀란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 정신 나간 자식이….”
분노에 찬 스티브의 시선이 총성이 난 곳을 향해 돌아갔다. 나 또한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뜻 회갈색의 머리카락을 본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드디어 찾았네.”
“늦었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안도감이 들었다. 내 말에 오정인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슬며시 웃어 주고 다시 앞을 보았다.
“…….”
그 대단하신 운명으로도 너에 대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 운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상대는 처음부터 어긋난 단추처럼 이미 늦어 버린 관계였다. 그래서 생각보다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빨리 가요.”
나는 또 너를 두고 떠나는 것을 택했다. 너도 이걸 회피라고 할지 조금 궁금했다.
다시 우리를 돌아보는 스티브의 시선을 마지막으로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익숙한 이들이 우리에게로 뛰어왔다. 평소와 달리 피곤과 불안이 엉겨 붙은 얼굴의 강유진에게 오정인이 무어라 말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들을 눈에 담으며 날 끌어안듯 잡고 있는 이호연에게 말했다.
“나 멀미 나.”
“네?”
“어지러…워.”
이제 못 참겠다.
바닥과 천장이 거꾸로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귓속이 먹먹하고 속이 매스꺼웠다.
***
산들바람이 뺨을 스쳤다. 스스스스 우는 수양버들의 울음소리가 시리게 느껴졌다.
얼굴로 내리쬐는 햇살의 온기는 따스한데 나는 추위에 떠는 어린 짐승처럼 몸을 웅크렸다.
손에 닿은 여린 풀잎을 뜯어냈다. 손에 풀물이 들고 코끝에는 물에 젖은 흙냄새가 스쳤다.
선명한 감각들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아, 이건 꿈이구나.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과거의 것. 이제는 감히 꿈꾸어도 되나 싶은 무서운 옛것의 기억.
‘아이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다정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몸을 더욱 웅크릴 뿐이었다. 상대의 목소리에 녹는 것이 아닌 더욱 춥다는 듯이.
비단옷에 묻은 흙 자국들이 지워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잊혔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런 나를 상대는 다시 한번 불렀다.
‘아이야.’
재촉 어린 부름에 결국 눈을 떴다.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지는 몸에 힘을 주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간절하다 싶을 만큼 손안에 풀잎을 쥐었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상대의 이름을 나도 모르게 입에 담았다.
랑.
마주치는 새까만 눈에 담긴 감정의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나를 보고 있노라 물을 수가 없었다.
한심하게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멸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에 매몰되어서. 내가 하고픈 말이 입 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나는 살려 달라고 하고 싶었다. 어떤 의미로의 바람인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살려 달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나는 그것이 절대 입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
이대로 햇살에 녹아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면 이렇게 춥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겨울바람 속 하나의 촛불이 된 것 같은 이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다.
맥을 못 추는 내게 랑은 물었다.
‘지우고 싶은 것들이 있구나.’
‘…….’
‘더듬는 것만으로도 속이 아려와 다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있어.’
‘있다면요?’
그럼 당신이 뭐 어쩌게요. 예민해진 신경 때문인지 혀끝에 저절로 날이 섰다. 조금만 더 있으면 괜한 이에게 화풀이할 것만 같았다.
‘지울 수 있다면 그것들을 모두 묻어 버리겠구나.’
‘…그런 것들이 너무 많아서 곤란할 지경이에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소금기를 머금은 물이 눈 속을 헤집고 달구었다. 너무 많이 뜨거웠다.
몸을 낮춘 랑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검은 옷소매에 눈물이 묻었다. 여전히 담담하도록 다정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너는… 한없이 이기적인 아이구나.’
‘…….’
‘슬픔도 후회도 설움도 모두 다 지우고 나면 남는 게 무엇 있을까.’
‘…….’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 것이 과연 의미는 있을까.’
내가 잘못됐다는 소리인가, 그런 고민을 했다. 랑의 말은 나를 타박하는 말로 들렸다. 나에게로 향하는 비난이었다. 그의 말을 더듬으면 생각했다.
이제껏 받아야 했던 나의 벌을 지금에 와서 그가 내리는 거라면, 그 벌은 생각보다 다정한 종류라고.
욕도 아닌 말뿐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서럽고 화가 났다. 그럼 정말로 내가 잘못한 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뻔뻔스럽게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내게 랑은 말을 이었다.
‘네 이기심은 너를 살림과 동시에 네게 이유 모를 평생의 슬픔을 안길 거다.’
‘…….’
‘허나 아이야. 나는 너를 말리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그렇게 죄지은 자처럼 고개를 수그리지 마렴.’
랑의 손이 내 얼굴을 들게 했다. 나는 의아함과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나의 말은 결국은 배부른 몽상가들의 허상 같은 것이지. 그들은 이해 못 할 것이 바로 너의 행동과 감정이고.’
‘랑?’
‘그러니 아이야. 아가. 이리로 오렴. 그렇게 혼자 매몰되지 마렴.’
차가운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눈 위를 덮었다.
‘네가 가장 지우고 싶은 것. 그것은 내가 직접 지워 주마. 네가 조금 더 자란 후, 네가 너 자신을 마주 볼 용기가 생기거든 그때 꺼내 보렴.’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된다 하면 내가 책임을 지면 되지. 네가 지우고 싶은 그것을 마주 볼 때까지. 그것을 지우기 위한 지금의 순간마저도.’
‘…….’
‘네게 필요한 시간만큼 내가 감당하마. 그러니 아가. 좀 더 이기적으로 굴렴. 더 이기적으로 굴어. 너는….’
당신의 이상과 나의 바람은….
***
“…….”
뭐라고 했더라…. 정신이 멍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가 조금 멍멍한 것 같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속이 들끓는 것 같았다.
“일단… 옷부터…. 조심…. 팔….”
띄엄띄엄 들리는 목소리를 더듬어 보다 눈에 힘을 주었다. 천근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눈이 부셨다.
“…뭐, 해?”
옷고름을 잡아당기며 풀던 이호연이 내 목소리에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희게 질린 낯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이호연이 제지했다. 그런 그에게 고개를 저으니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를 말렸다.
“그냥 좀 누워 있어요.”
평소와 달리 안경을 낀 손민호였다. 숨을 내쉬며 다시 몸에서 힘을 뺐다.
“어디야, 여기?”
“사옥 병실이요.”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있었지. 성실하게 답해 주는 이호연의 눈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을 더듬어 보니 대충 내가 쓰러졌던 건 기억이 났다.
“류, 겉옷 좀 벗길게요. 치료를 받아야 해서….”
고개를 끄덕이니 이호연이 곧바로 옷고름을 마저 풀었다. 손민호가 받쳐서 일으키라고 하자 이호연은 곧바로 그의 말에 따랐다.
반쯤 안긴 상태로 앉으니 그제야 주변이 좀 제대로 보였다. 아까는 느껴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기척이 문밖에서 느껴졌다.
그쪽으로 고개를 틀자 눈앞이 다시 어질거렸다. 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것이 올라왔다. 점점 낯을 굳혀 가는 나를 눈으로 훑으며 손민호가 말했다.
“뱉어요.”
그는 준비했다는 듯이 하얀 천 뭉텅이를 내 입가 쪽으로 내밀었다. 입을 열어 그것을 뱉어냈다. 새까맣고 붉은 피가 하얀 천을 적셨다.
“…피가 까만데요.”
“알면 좀….”
“…?”
“됐어요. 일단 어깨 쪽 좀 볼게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포 안에 받쳐 입었던 반팔 소매가 걷어졌다. 그의 손을 따라 나도 시선을 돌렸다.
얼룩덜룩하게 물들고 퉁퉁 부은 어깨와 팔이 보였다. 가관이었다.
손민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영 좋지 않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이건… 엑스레이 찍어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골절인 건 확실하네요.”
“골절이면….”
“뼈가 부러졌다고요. 그리고 경미한 뇌진탕. 스킬 반동으로 인한 내상.”
“……?”
스킬 반동은 그렇다 치고 뇌진탕? 의아함이 서린 내 얼굴을 보며 손민호가 제 머리를 가리켰다.
“이마에서 피난 건 알아요?”
“저요?”
“네. 쓰러지기 직전에 어지럽다고 했죠? 그전에도 어지러움을 느꼈거나, 시야가 흐려졌거나 하는 증상이 있었을 테고. 아마 어깨를 부딪칠 때 같이 박은 것 같은데.”
머리도 박았…었나? 그러고 보니 머리도 아팠던 것 같다. 혼란에 빠진 나를 보며 손민호가 설명을 이었다.
“간혹가다 너무 세게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그 순간이 가물가물한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그 상태로 괴물을 잡고 싸우고….”
“…….”
“이쯤 되면 정신력이 강한 건지, 단순히 오기였는지 모르겠는데요. 골절, 뇌진탕 말고도 내가 보기엔 피로 누적도 있거든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떨떠름해진 내 얼굴을 눈치챈 손민호가 유들유들한 평소와는 달리 언뜻 화가 난 기색으로 말했다.
“사람은 과로로도 죽어요. 류가 하는 짓들을 보면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고요.”
“그렇게까진….”
“기본 체력이 좋다고 해도 그건 전부 전직 빨이에요. 체력이 받쳐 준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류 몸은 일반인에 더 가까워요. 무리한 거 맞다고요.”
체력이 받쳐 주면 어쨌든 괜찮은 거 아닌가? 몸에 무리가 간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고개를 기울이며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손민호가 안경을 빼고 눈 사이를 꾹 눌렀다. 마치 잔소리하기 직전의 주세진과 비슷한 기색이었다.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몸 너무 막 쓴다는 생각 안 해요?”
“그렇게 막 쓰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기준이 남다르시네요, 거참.”
“…….”
“가끔 보면 본인한테만 모럴리스 한 거 몰라요? 본인 몸한테 최소한의 도덕심은 좀 가지라고요! 최소한의 위기의식을 갖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손민호는 머리를 헤집더니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마법사의 감 같은 반 미신에 가까운 것만 믿고 설치지 말아요.”
“…안, 설쳤는데요.”
“그렇다는 인간이 맨정신으로 뱀 입에 뛰어들어?”
“그건, 다른 사람들 대피시키느라 그런 거잖아요.”
“그렇게 남한테 보이는 안전 의식을 본인한테도 좀 적용하라고요!”
“…….”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내가 왜 손민호와 이런 대화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잘 알겠는데, 그냥 그러겠다 하면 되는 것도 알면서 자꾸만 말대꾸하는 내 심정도 모르겠다.
입만 벙긋이는 나를 보며 손민호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그건….”
나는, 다른 사람을…. 난, 난…. 숨을 색색 내쉬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손을 뻗었다. 손민호를 밀어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손민호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이어 다시 닫았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깨와 팔이 아파 나는 몸을 수그렸다.
정작 뭐라 할 줄 알았던 이호연은 조용하고, 생각도 못 한 상대가 화를 냈다.
정확히 말하면 화는 아니지만….
흘러내린 도포를 움켜잡았다. 언제나 단단하게 나를 감싸던 검은 옷이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너덜거리는 고름의 끝을 눈으로 더듬었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삭아 버린 것 같은 꼴이었다.
“일단, 치료부터 해요. 동생은 지금 다른 곳에 불려 가서 없고, 저보다 뛰어난 치료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기 못 와요.”
“…알아요.”
그건 에드워드 로거스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손민경까지 불려 갔다는 걸 보면 그만큼 치료해야 할 상대가 많아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최대한 입이 열릴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겠지.
주세진이 그것을 허락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이곳으로 피신 왔을 어느 높으신 분들은 찬성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편이 더 편했다. 적어도 내 상처에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은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았다.
하얀 빛이 어린 손이 등을 쓸자 쓰리던 속이 잔잔해졌다. 그의 손은 서서히 움직여 팔에 닿았다. 앓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상처가 천천히 치료되는 감각이 선뜩하도록 선명했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내 등을 이호연이 두들겨 주었다. 골절된 팔에서 거리가 있는 손끝부터 천천히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손가락, 팔목, 팔, 팔꿈치. 어깨 부근부터는 나도 모르게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따스하고 아팠다. 뜨겁게 찜질을 하는 것 같다가도 시렸고, 놀란 근육이 삐걱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뼈. 빈 부분이 매워지고 다시 붙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이 정도의 중상을 치료받는 건 처음이라 몰랐다. 치유 계열의 스킬은 애초에 만능이 아니었다.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잽싸게 끝내 버리는 손민경의 능력이 특별한 거지 원래는 이게 정상이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몸이 덜덜 떨렸다. 목 뒤가 서늘했다.
멍이 빠지는 팔을 보며 손민호가 말했다.
“원래라면 골절은 치료를 받은 뒤에도 몇 개월 동안 물리 치료랑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관리해 줘야 해요.”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요.”
공들여서 치료할 시간은 없었다. 일단은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놔야 했다. 손민호는 복잡한 얼굴을 하며 머리를 헤집었다.
“제대로 치료 안 받으면 나중에 고생할 거예요.”
“난 매는 나중에 맞자는 편이라서요.”
낯이 굳는다. 한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 그가 옆에 놔두었던 파란 테이프를 손에 집었다.
“왼쪽 팔은 최대한 쓰지 마세요. 억지로 굽히는 것도 안 되고 무리하게 비트는 것도 안 돼요.”
그냥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될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손민호라고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력은 해 볼게요.”
“노력만 하지 말고 실천도 좀 해요.”
“…….”
조용한 병실에 테이프 뜯는 소리와 가위질 소리가 울렸다. 이호연은 여전히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상한 침묵이었다.
되레 손민호가 더 걱정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이호연을 보았다. 무표정한 낯의 그는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시선을 내려 그의 손을 보았다. 붕대가 감겨 있는 손이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힘이 맥없이 빠졌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 처치가 끝났다. 존재감이 확실한 새파란 테이프 아래 팔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팔을 들고 몇 번 움직여 보았다.
테이핑으로 인해 당기는 느낌은 들었지만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잡고 있던 이호연의 손을 놓고 어깨를 주물렀다. 확실히 조금 전보다는 덜 아팠다.
검은 도포를 다시 꿰입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옆에 걸린 작은 거울을 보았다.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것을 뗐다. 못마땅하게 나를 보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 혹시 진통제도 있어요?”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요.”
손민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팔을 잡아 입을 열었다.
“진통제 가져다주는 김에 다른 것도 가져다줄 수 있어요?”
“어떤 거요? 여긴 병원은 아니라 모든 약품이 다 있는 건 아닌데….”
“아마 있을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은 손민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어디다 쓰게요?”
“쓸데가 있어서요.”
나를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손민호는 곧이어 포기했는지 기다리라고 말하며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는 나와 이호연만이 남았다.
이호연의 어깨를 잡아 내가 누워 있던 침대에 앉혔다. 순순히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그의 기색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치료받고 있지 그랬어.”
내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호연은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아파 보여요?”
“그…렇지?”
“난, 이쪽이 더 아파 보이는데.”
그는 손을 들어 내 어깨를 가리켰다. 일견 음울하게도 보이는 회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옆을 툭툭 두들겼다. 옆에 앉으라는 그의 신호에 나는 얌전히 따랐다.
“내가 지금 제일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요?”
“…뭔데?”
“류가 위험한 것과 아닌 것을 인지하는 선이 점점 얇아지는 거요.”
“…….”
상처 난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담담한 얼굴과는 맞지 않는 떨림이 전해졌다.
“위험한 건 그냥 위험한 거예요. 거기다가 ‘괜찮을 것 같아’ 하는 생각을 더하지 말아요.”
“…….”
“그 생각을 하는 게 어려우면 내가 똑같이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 봐요. 기분이 어떤지.”
아, 알겠다. 지금 이호연은 화가 나 있었다. 담담한 얼굴과 가라앉은 기색으로 최대한 억눌렀을 뿐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을 깨달으니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런 내 손을 이호연이 더 간절하게 붙잡았다.
“도망가지 말아요.”
“…….”
“…도망가지 마, 제발.”
천천히 숨을 고른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나를 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죠?”
“…무슨 생각하는데.”
“가능하다면 이 모든 게 다 끝날 때까지 어딘가에 가둬 버리고 싶다는 생각.”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생략된 주어가 나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위험하지도 않고, 안전한 곳에 가둬서… 도망도 못 가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끝에 끝까지 몰린 것 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을 덤덤한 눈으로 훑어보다 물었다.
“…그다음엔?”
“…….”
“가두고 나서. 그다음은?”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이호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못 들은 거로 해 줘요.”
“…….”
“그냥, 그냥 하나만 약속해 줘요. 내가 무서워할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거 하나만 약속해 줘요.”
“그런 약속은 못 해. 알잖아.”
“…빈말이라도 해 주기를 원했어요.”
나도 빈말이라도 할 수 있기를 원했어. 하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기만의 용도로 쓰일 약속마저 우리는 할 수 없었다. 그저 후회하지 않게, 지금 당장에 붙잡을 건 너밖에 없노라 말하듯이 붙잡는 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우리 둘이 대화할 시간을 줄 생각이었는지 손민호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겨우 약 몇 개 가지러 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팔을 당기는 낯선 테이프의 느낌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 아주 오래전에 있던 일인데 난 그것을 잊고 있었어.”
“…….”
“그리고 저번 아스트로노미 때문에 쓰러졌을 때도 꿈을 꿨어. 그것도 잊고 있던 옛날 일이고.”
나를 돌아보는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서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을 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건 커튼을 드리우는 거랑 같아. 감당할 때가 되면 난 그것을 거두지. 쓰러질 때마다 옛날 일이 하나씩 기억나고 있어.”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생각보다 무섭거든. 다음에는 뭘 기억하게 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지. 이 와중에도 기억 안 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일지.”
“…….”
“하나씩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순간이 끝이 멀지 않았다고 알려 주는 것 같아.”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그림자들은 여전히 내 틈을 노리며 술렁였다. 도깨비들은 여전히 꼬마였다.
나는 사도 하나를 압도적으로 이긴 적 한 번이 없었다. 제자리에서 헤매는 나를 두고 다른 것들의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마주 보아야 할 것들이 조금만 더 내게 여유를 줬으면 싶었다. 아니면 이호연이 말한 대로 어디 안전한 곳에 갇히거나.
끝에 다다라서야 나는 진실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볼 수 있었다.
“…난 한 번도 괜찮은 적 없었어.”
그래. 단 한 번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나를 앞으로 미는 사람들보다 나는 어렸어.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들보다 힘이 없었고. 그러면서도 나는….”
한없이 이기적이라, 살고 싶으면서도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것들이 버거웠다.
그래서 옳은 일을 할 때면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잘못된 일을 할 때는 옳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에 다시 한번 빠져 있었다. 손을 들어 목을 더듬어 보았다. 목이 허전했다. 겨우 그 며칠 걸고 있었다고 허전함을 느꼈다.
랑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 내가 잘못된 것을 택할지 옳은 것을 택할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결과가 무서운 건 똑같았다.
눈을 뜨고 볼 현실에 있을 것이 결국 누군가의 새빨간 피라는 것이 변하지 않았다.
“무서웠어. 매일 무서웠어. 한 번도 괜찮은 적 없었어. 뭘 선택하든 괜찮지 않았어.”
괜찮은 척은 끝났다. 이제 내가 괜찮을 때까지 대신 버텨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괜찮아야 했다. 무너지고 쓰러지는 순간에도. 그건 영웅의 설정값 같은 거였다.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 틀어박혀 죽어가는 것을 관두고 학교에 다녔다.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괜찮아야만 했다.
모두가 그러하니 나도 그래야 했다. 흘러가는 시간에 발맞춰 움직였다. 그게 이토록 내 숨을 막히게 하고 지치게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곪아가고 있었다. 그것의 시작은 한 번도 제대로 치료한 적 없는 상처로부터였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묻어 버린 그런 상처. 방치된 것들, 방치할 수밖에 없던 그런 것들.
이제 와 한번에 몰려드는 그것들.
먹먹해진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괜찮지 않으면 안 돼요?”
“…….”
“살아남는 것도 버거운 세상인데 괜찮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하지만 나는 괜찮아야만 해. 너도 알잖아. 가장 앞에, 가장 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내가 죽을 것 같다는 듯이 굴면 그런 나를 볼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할지.
너도 마찬가지면서. 너는 내게 나 하나는 괜찮기를 바란다. 그런 너의 친절과 애틋한 애정이 좋으면서도 싫은 거였다.
“…왜 네가 울어.”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 주려다가 다시 거두었다. 여전히 손이며 옷소매며 벌건 것들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눈으로 다 봤으면서 이호연은 내 손을 끌어당겨 뺨을 묻었다.
“울보.”
“…아니에요.”
“거짓말.”
언젠가 랑이 나를 달랬던 것처럼 몸을 숙였다. 그의 이마에 내 이마가 닿았다. 옅은 피 냄새가 풍겼다. 그나 나나 피에 절어 이 피비린내가 그에게서 나는 것인지 나에게서 나는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둘 모두에게서 나는 거면 상관이 없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나랑 하나만 약속할래?”
“네.”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바로 대답해.”
“뭐든 상관없어요.”
“…네가 그럴수록 난 더 이기적으로 굴지도 몰라.”
마주 닿았던 이마의 온기가 멀어졌다.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회색 눈이 나를 직시했다. 그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어요.”
“…….”
“내가 지쳐 떨어지더라도, 계속 날 써먹든 비참하게 만들든 상관없으니까…. 떠나지 말아요.”
“…….”
“나는… 날 버리는 것이 옆에 있을 수 있는 조건이라 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였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부모나 절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는 못한다. 아무리 절절한 사랑이라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복잡스럽게 섞인 그의 감정인 만들어 낸 결과였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거부하지도 못했다.
기어이 바라는 말을 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나중에 도망치려고 하면… 한 번은 붙잡아 줘.”
나는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 나를 붙잡아 주기를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도망쳤던 그때에도. 누구보다 앞서 괴물의 앞으로 뛰어들던 순간에도. 하늘 조각에 몸을 던지던 그 날도.
심지어 그 사람을 두고 도망가던 그 날의 그 순간에도.
도망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를 쥐여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
정말로 이호연이 나를 붙잡는 날이 기어이 오면,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또다시 도망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없이 이기적이라 그것을 원했다. 내가 뿌리칠 것을 알아도 붙잡아 줄 사람.
괜찮아지기 위해 도망가는 것 말고, 나도 그냥 안 괜찮아도 사는 걸 택해 보고 싶었다.
적어도 후자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추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이 너이기를 바랐다. 그러니.
“…사랑해.”
내가 줄 수 있는 건 결국 사랑 놀음. 무형의 그 감정. 겨우 이런 것에 만족하는 너는 바보. 그게 또 좋은 나도 바보다.
원래 그렇게, 그냥 그렇게 사람은 살아가는 거였다.
나만 장르가 달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