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꼴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든 감상은 하나였다. 정말 끝났구나.
뒤도는 몸을 따라 움직이던 검은 천 자락이 참 무심했다. 뒤 한번을 안 돌아보는 모습이 그리 매정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재가 되어 버리는 남자의 끝을 그녀 대신 지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뻔뻔스럽게 군다고 해도 차마 기도는 못 하겠더라.
“…후.”
피곤했다. 답지 않게 차려입은지라 불편했다.
시원하게 트인 창 너머 세상은 아름답다고 하기 힘든 꼴이었다. 자그마하게 난 구멍을 더듬어 보았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에 손끝이 베였다. 피 맺힌 유리가 햇살 아래 반짝였다.
이 작은 구멍 사이로 빠져나간 총알이 그녀에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였길래 친히 이곳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리에 찔린 손에서 피가 흘렀고, 그는 그것을 치료하지 않았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눈에 담았다.
“뭐가 좋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어.”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녀는 그를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지켜봤다. 뻔뻔한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순간순간 피로한 낯을 하던 것도 보았다. 그는 언제나 지켜보았다. 나설까 하는 순간적인 마음이 들어도 오로지 지켜볼 뿐,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이기적이어서 성자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엔 그녀도, 영웅 노릇을 하기엔 알맞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희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사람을 구하겠다고 떠났다. 붙잡아 납치해서라도 그 꼴이 보기 싫으면서도 동시에 눈길이 갔다.
극은 절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나비와 푸른 불꽃. 테오그라젠스와 또 다른 하나.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과거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종지부였다. 공주님이 평생 공주님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언젠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현실에 안주할 수 없으니, 아래로 내려가기 싫다면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자리에 있는 자니까.
그게 싫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녀를 밀어서라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게 그 잘나신 나비라는 이름에 맡는 역할이었다.
“…네가 나를 많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진심이었다.
네가 싫어. 네가 좋아. 복잡스러운 감정이 섞여들었다.
꼴 보기 싫고 불행하면 좋겠는데, 막상 우는 거 보면 영 별로다. 그러니까.
차라리 도망가.
전할 수 없는 말을 홀로 중얼거려 보았다.
***
지옥도를 겪으며 내가 가장 기분 엿 같았던 것은 간절한 손을 외면하고픈 나의 인성에 대한 고찰을 할 때였다.
사람의 도덕심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거였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옥상으로 대피해 있던 사람들이 꽃가지의 꽃잎처럼 애처롭게 떨어졌다.
그들을 그림자로 낚아 안전한 곳에 내려 주었다. 엉엉 울며 나를 간절하게 보는 시선들에 숨이 막혔다.
커다란 붉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괴물의 목을 잘랐다. 뭐라 이름 붙이기도 뭣한 형체의 괴물을 태웠다. 죽이고, 태우고, 죽이고.
반복되는 행위에 정신이 점점 멍해지는 것 같았다. 간간이 마주치는 다른 전직자들이 나를 경외시하듯 바라볼 때면, 그 시선에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진짜 싫다.”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내게 달려들던 괴물들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림자가 다시 내 발밑으로 스르륵 돌아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걸음을 옮기고 질척이는 괴물들의 피를 밟을 때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로웰 콕스 때문인지, 바타르 때문인지 생각이 너무 많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짓밟고 사람들을 구하고, 괴물을 죽이는 것만 반복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바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도망가고 싶어?
속닥이는 그 질문의 어조는 비꼼이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실시간으로 머릿속에 사는 또 다른 내가 말 거는 것 같은 이 상황 때문에 더 빨리 지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물음을 무시했다. 쥬와 대화를 한 건물을 나온 이후부터 속닥임이 끝없이 들려왔다. 여우는 그런 나를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계속 물어보았다.
도망가고 싶어? 도망가고 싶어?
“…왜 묻는데, 그런 거.”
지금 막 괴물에게서 구출된 남자가 나를 의아한 낯으로 보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망으로 해결되는 건 없더라고.
“저쪽으로 쭉 달려서 도망가세요. 같이는 못 가 드리고요.”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내게 인사를 하고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끌어 올렸던 입꼬리를 다시 늘어트렸다.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듯 속닥이는 여우에 대한 감정이 점점 비딱해졌다. 귀찮고, 말을 거는 횟수가 늘수록 머리도 아팠다.
“나한테 이제 말 걸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저절로 내 입이 다물어졌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긴 것처럼 신경이 한쪽으로 쏠렸다.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 무얼 그리 볼 게 있다고 그러는 것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
저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곳으로 가.
속닥이는 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여우의 사담인지, 마법사의 감인지, 이젠 긴가민가했다.
“…….”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그 이상한 감 같은 거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손에 쥔 류를 바닥에 질질 끌며 무너진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불쑥 튀어나오는 괴물의 안면을 잡아 벽으로 집어 던졌다.
몇 번 더 그 짓을 반복하며 걸었다.
홀리는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걸으며 누군가가 속닥이는 이게 맞다는 말을 듣고, 그 말에 안도하고.
그렇게 다다른 끝에서 마주한 존재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답답한 숨을 길게 내쉬는 것밖에 없었다.
건물의 뒤쪽으로 빙 돌아서 걸은 내가 보게 된 것은 사람이었다. 원래라면 달려가 달래고 상태를 살핀 뒤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내 손 안에 쥐어진 무기가 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보는 순간 알았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아니구나, 하고.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이 상황에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걸터앉아 책을 보겠는가.
물론 그것만으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단정 지은 것은 아니었다. 경험으로 쌓인 몸의 모든 반응이 말하고 있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고.
마치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라는 것들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온유했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은 섬세했고 살짝 내리깐 눈은 신실해 보였다.
하얀 옷.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라는 것들은 꼭 입고 있는 그 하얀 천 자락 같은 옷과 유리 조각이 나뒹구는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맨발.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책. 저 홀로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우리 쪽 모지리는 이게 평등한 거라고 하는데 난 그런 거 잘 모르겠거든?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강유진의 구름으로 보았던 로웰 콕스와 금속을 거래하던 자가 말한 모지리. 쥬가 말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을 공평하다고 말한 놈.
신에게 지식의 자유를 달라 청한 살아남은 아이들 중 하나.
“…레코디아.”
내 말에 중성적인 외양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 빛이라는 표현에 알맞은 색의 긴 머리가 흔들거렸다.
과연 제일 신실하다더니, 남자가 입은 건 지금껏 보았던 옷 중에 가장 성화에 나올 법하기는 했다.
하얀 천 자락을 엮어 만든 것 같은 옷은 마티 때도 느낀 것이지만, 옷만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무너진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지자 종말을 앞두고 내려온 마지막 선처럼 보였다. 혹은 선으로 위장한 최후의 악이든가.
그는 내 부름에 책을 덮었다.
그 느릿한 모습을 보며 천천히 남자를 관찰해 보았다. 그의 분위기는 검이 아닌 펜을 드는 사람의 표본 같았다.
검 따위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학자 같은 모습이나, 그 펜으로 수백, 수천을 학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감상에 수긍하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이렇게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군요.”
“…당신이 레코디아 맞죠?”
그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온화한 얼굴은 지금까지 보았던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 중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더욱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180° 돈 놈보다 360° 돈 놈이 더 위험했다. 겉모습에 속기엔 지금까지 보았던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은 겉껍질만큼은 모두 선해 보였다.
자신을 경계하는 나를 보면서도 그의 얼굴 위에 놓인 평온은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확신하면서 남에게 묻는 것은 그리 좋다고는 볼 수 없는 행동입니다. 특히… 당신은요. 회피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군요.”
그놈에 회피. 오늘만 몇 번 듣는 건지 모르겠다.
설령 정말로 내가 회피하는 것을 즐겨 하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저것들에게 그런 충고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
바로 공격할까?
입만 나불거리며 사람의 성질을 긁고 자극하고 도발하는 것이 저것들 특기일지도 몰랐다.
괜한 소리 들어 또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기 전에 자유롭게 움직이는 저 입을 틀어막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손안에 감기는 검은 제등을 들어 올리는 내 모습에 레코디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작은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맨발을 하얀 천 자락이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 그런데 이건 죽을까? 만약에 마티처럼 죽일 수 없는 몸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라면 이곳에서 괜한 힘을 빼는 것이 되었다.
이길 수 있나, 없나 같은 문제는 와닿지 않았다. 죽일 수는 있는 존재인가가 더 신경 쓰였다. 바로 앞까지 걸어오는 자신을 피하지 않는 나를 그는 천천히 살펴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평범한 갈색 눈이었다. 그가 나를 관찰하듯 나 또한 그를 관찰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상대였다.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이군요.”
어떠한 의중을 담고 하는 말일까. 고민하다 어쩌면 고민 자체가 의미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그는 내 물음에 모든 것을 답할 것 같았다.
입을 뗐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 물음에 모두 답하기라도 해 줄 건가 보죠?”
“못할 것도 없습니다.”
예상했던 답이었다. 세계의 비밀마저 노아 이스벨라를 이용해 퍼트린 자. 그는 공평과 평등이라는 이름 하에 정보를 알리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공격의 의사가 없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묻는 것에 제대로 답하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이 생경할 지경이었다.
온화한 갈색의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아이를 대하는 듯 조곤조곤한 말씨로 그는 말했다.
“자, 무엇이 궁금하지요?”
정말로 순수하게 질의응답의 시간을 갖자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가 테오그라젠스의 사도이며 내가 푸른 불꽃인 이상 그런 평온한 시간은 가질 수 없었다.
뭘 바라고 하는 행동일까. 의도가 무엇일까.
뭐든 물어보아도 된다는 태도.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서부터 의문을 느꼈다.
끝이 매번 꼬이기는 했으나 직접 보았던 사도들은 첫 만남에선 모두 내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을 거라는 듯이 굴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무해하다 못해 수상스럽도록 친절했다. 레코디아와 나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제등을 휘두른다면 곧바로 목을 베어 버릴 수 있는 거리였다. 일부러 저 자리에서 걸음을 멈춘 걸까. 만약 정말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얕보였거나, 저 새끼가 겉모습과는 달리 꽤나 거만하거나. 나를 무시하는 상대의 행위가 기꺼운 것은 아니나 자존심 뻗대며 부러 불리한 상황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당신이 취하는 행동에 대한 저의가 궁금해요.”
“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밑에서 일렁이던 그림자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하는 짓들이 위선으로 보여서요. 무슨 의미로 그러는 건지 궁금하네요.”
내 말에 레코디아는 웃었다. 조금은 유쾌하다는 듯한 웃음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360° 돈 타고난 또라이인가 싶었다.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군요. 역시 당신은 어려요.”
“…….”
“아. 내 말에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어리다는 건 사실이랍니다.”
바로 앞까지 천천히 걸어온 그는 제등을 잡지 않은 내 반대 손을 잡았다. 잠시 움찔거린 나는 그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에게 눈 맞춰 주는 어른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세상을 구축하고는 하지요. 그러고는 그 세상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세상의 모든 법칙이 아이의 것. 그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을 하지요.”
“…….”
“당신의 눈에 나의 행동은 위선이며 기만이며 알 수 없는 행위이지요. 당신에게 있어 우리란 당신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존재들입니다. 그렇지요?”
어디 한번 더 말해 보라는 듯 바라보니 그는 곤란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당신은 어린 거예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은 눈치가 없는 것도, 머리도 나쁜 것도 아닌 그저 받아들일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그쪽들을 받아들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말하네요?”
“글쎄요. 그건 알 수 없는 거랍니다. 가장 모순적인 존재로 살며 모순적으로 구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처럼요.”
“…….”
“이 땅에서 가장 모순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요. 나와 당신과 당신이 어울려 살고자 하는 것들이 무엇이 그리 다른지 생각해 보아요.”
뭐가 다르냐니. 그거야 의문 자체를 느끼지 않는 당연한 점이었다. 외양이 비슷해도, 주고받는 말이 통하더라도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달랐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
레코디아는 나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말없이 나를 기다렸다. 그런 그의 태도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
천천히 얼굴을 굳히는 나를 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에 쓸린 하얀 옷자락이 조금 더러워져 있었다.
그는 제 손을 들어 가슴에 올렸다. 살짝 내리뜬 눈 사이로 보이는 갈색의 눈동자에 생기가 어려 있었다.
“자, 말해 보아요. 무엇이 그리 다르죠?”
입을 뗐다가 다시 다무는 나를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우리는 당신과 다르지 않아요. 나의 모순은 당신의 모순이며 나의 정의는 당신의 것과도 닮았습니다. 나의 도덕성 또한 당신과 많이 다르지는 않을 테지요.”
“…….”
“노아 이스벨라가 보여 주었던 것을 보았음에도 당신은 우리가 미지의 존재라고 생각했죠. 천공 섬의 주민들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결코 당신과 같지 아니하다 여겼습니다.”
“그건….”
“왜죠? 사도란 그 주민들 중 살아남은 자들일 뿐인데요. 우리는 힘을 얻어 살아남은 당신과 그리 다를 게 없답니다. 되레 따지자면 당신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존재 아닌가요?”
입을 꾹 다문 나를 보며 그는 흐리게 웃었다. 저와 내가, 사도라 부리는 자들과 내가 닮았다고, 다를 게 없다고 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천공 섬의 주민들인 전직관들을 사람이라고 인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그들을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저들과 닮았다는 소리는 결코 유쾌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말로 설명 못 할 본질적인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보다는 괴물에 더 가까운 무언가로….
“복잡한 얼굴이군요. 간단하게 생각하도록 해요. 당신은 사람이고, 당신에게 매달리는 자들 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사람입니다.”
“…….”
“다만 누가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냐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다를 뿐이죠.”
궤변이다.
“…가장 비인간적으로 굴면서 말은 잘하네요.”
“그건 조금 억울한 말이군요.”
내게서 몇 발자국 물러난 그가 다시 빛의 입자를 불러왔다. 그것은 손안에 모이더니 작은 책으로 변했다. 책이 펼쳐졌다.
그 안에 빼곡하게 차 있던 글자와 종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덕지덕지 붙여진 것처럼 어지럽게 들러붙은 종이 위로 글자들이 달려들었다.
글자는 종이 위에서 일그러졌고 무너졌고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그림이 되었다. 그림 속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는 살고자 하는 것.”
전쟁터 속 적에게 칼을 들이미는 병사. 자신이 살고자 친우에게 독을 먹이는 자. 살고자 제게 칼을 휘두르는 자를 계단에서 미는 아이.
“그렇다면 나와, 우리와 당신은 가장 사람답고 인간적인 것 아닌가요?”
손을 들어 종이에 불을 붙였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제 작품을 눈으로 훑으며 레코디아는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내게 위선적이며 모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듯이 굴었지요.”
탄내가 진동했다. 재들이 날아들어 책 속으로 되돌아갔다. 그것들은 다시 종이와 글자로 재구성되었다.
“나는 사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사람입니다.”
“…….”
“그러하기에 나는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살고자 발버둥 쳤으며 그것의 결과물이 사도라는 이름이었죠.”
“…….”
“나의 행동이 모순이라 생각하나요? 아니요, 나의 행동은 가장 인간적인 행동입니다. 내 삶이 충족되었기에 다른 이를 되돌아보는 거지요. 마치 당신처럼요.”
레코디아는 저를 노려보는 나를 이질적이기까지 한 온화한 얼굴로 보며 말했다.
“당신이 부정하든 아니든 나는 사람이며, 사람이기에 옳은 일을 하는 겁니다. 비록 나 자신은 옳지 못할지언정.”
궤변…이었다.
“그게 세상의 비밀을 말하는 거였다?”
“그렇죠. 삶을 바라는 것은 이 땅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같으나, 사람이기에. 사람이니까.”
“…….”
“당신은 당신을 죽게 만드는 것들을 옳다는 이유로 살리고, 나는 말하는 겁니다. 그게 맞는 거니까요. 당신이 그러듯 나 또한 그런 겁니다.”
길고 긴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의 말은 틀린 점이 없다고. 틀렸다고 하기엔 나를 관찰하고 써 내려간 이야기들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순적이며 위선자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저들이 나와 같은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맞는 거라, 옳은 거라 행하는 모든 것들이 내 의지였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것들은 내가 사람이라면 해야 하는 것들이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내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으며, 그것이 나의 정의로부터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그저 그게 맞는 행동이었으니까.
나는 저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며 넘겼다.
같은 사람이라 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제쳐 놓고서.
레코디아는 그 속내가 어떻든 사람으로서 옳은 일을 했다. 세계의 비밀을 말해 신에게 대항할 준비를 하게 했으니까.
동시에 레코디아라는 사도는 신에게 있어 가장 충실한 종이었다. 그는 옳은 일을 할지언정 신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여전히 신을 모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옳고도 틀렸으며, 나는 혼란을 느끼는 거였다. 하지만.
“…….”
손을 들었다. 술렁이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움직여 남자를 포박했다. 몸 쓰는 것에는 재주가 없는지 레코디아는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붙잡혔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럴 뿐이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사도가 아닌 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테오그라젠스의 편이 아니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사도고, 나는…. 내가 그 대척점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걸 멈추는 것도 아니었다.
저자의 말대로 나는 이번에도 옳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할 것이며 그것은 저것들의 죽음이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를 붙잡은 어둠을 힐끔거리는 얼굴에 곤란함은 없었으나 온화한 척하는 거만함 또한 없었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내 물음에 그는 나를 보았다. 자세히 뜯어볼수록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런다고 내가 너랑 손잡고 쎄쎄쎄나 하면서 테오그라젠스 편을 드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나요?”
같은 사람? 나는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짧고 간결한, 비웃음에 가까운 내 웃음을 보며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같은 사람 죽이고 질질 짜고 덜덜 떨던 건 옛날이고. 평범하게 죄책감을 느끼고, 슬퍼할 줄 알았던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건 굳이 따지면 너희지.”
그런데 인제 와서 내게 죄책감을 논하다니. 이것보다 희극적인 일이 있을까.
헛웃음을 내뱉는 나를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우리가 한 짓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요. 그저 세상을 조금 각박하게 만들어 보았을 뿐인걸요.”
“…….”
그걸 ‘조금 각박’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아니면 그저 날 자극하기 위한 단어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의 말대로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이 건든 직접적인 것들 중에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처럼 ‘조금 각박해진’ 환경에 맞춰 행동했을 뿐일 테니까.
사람이란 그의 말대로 약간의 계기만 있어도 태도가 돌변하는 존재였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이 이상 그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게 왜 각박하게 만들어. 네가 말했잖아. 사람은 살고자 한다고.”
“…….”
“너도, 나도.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도. 아무도 그때의 것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어. 결국 다 살아남은 사람들이니까.”
인제 와서 옳다고, 맞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하는 우리 전부가 위선자이며 모순적인 존재인 거니까.
땅에 끌리는 제등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내리치니 제등에 날카로운 부분이 레코디아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마티 때와는 다른 선명한 붉은 피가 뺨에 튀었다.
적어도 눈앞의 이 사도는 진짜 자신의 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 말을 할 생각은 하지 마. 내가 묻는 것. 그에 맞춘 네가 알고 있는 것. 그것들이 네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야.”
“…….”
나를 보는 눈이 거슬렸다.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티와는 다른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간간이 보이는 갈색 눈이 싫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넘기면 후에 좋지 않을 거예요.”
“네 알 바는 아니지.”
그리고 난 이미 무척 좋지 못해.
지금껏 보았던 이들 중 가장 사람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사람이라 칭하는 그가 참 싫었다.
“만약 제가 인제 와 당신의 말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벌걸 다 궁금해하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는다.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어깨에 박힌 기둥이 더 깊이 들어갔다. 손끝을 타고 섬뜩한 감각이 올라왔다.
“너희 사도들이 죽기는 하는 몸인지 실험이나 해 보겠지.”
“…….”
“네가 그랬지?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악감은 없냐고. 있어. 그런데 그 죄악감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야.”
인간성, 죄책감, 책임감. 그 모든 것들이 날 흔드냐 묻는다면, 아니었다. 난 거기까지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었다. 그것들이 유쾌하고 마냥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들일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손끝은 섬뜩함을 느끼고, 내 목은 타는 듯한 갈증을 일으켰다.
그래서 특히나 싫은 거였다. 사람과 다를 게 없는, 자신이 사람이라 주장하는 이 사도가. 레코디아가.
레코디아는 말없이 나를 보았다. 손끝을 움찔거렸고, 저를 붙들어 맨 그림자들에게서 팔을 빼내고자 했다. 힘없는 반항 같은 움직임이었다.
무력한 보통의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움직임.
“…….”
하지만 어깨를 비틀고 신체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명확한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는 기어이 팔 하나를 빼내었다. 그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제지하지 않는 내게 레코디아는 기어이 빼낸 손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비틀린 팔은 기어이 내게 닿았다. 미적지근한 것이 뺨에 묻어났다.
“불쌍한 사람.”
“…….”
“당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그리고 최후에 가장 많이 망가질 거예요. 그런 당신의 옆에 남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불행해지겠군요.”
“…닥쳐.”
“아닌가요? 스스로도 아니까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것 같은데.”
“…….”
“당신은 이기적이에요. 그러니 살아남을 겁니다. 내가 그랬듯. 그리고 깨닫겠죠. 살아남기 위해 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을. 이 또한 내가 그랬듯.”
뭘 안다고.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며 그가 웃지 않아서, 그 말이 더더욱 사실인 것만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감정을 따라 그림자들이 술렁거렸다. 어둑한 것들이 내 발밑에도 드리워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다급한 숨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랑이 말했다. 지나치게 격해지지 말라고. 아무리 화가 나고 슬프더라도 감정에 최후의 저지선을 만들어 두라고. 불완전한 나는 그러지 않으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고.
“!”
제등을 타고 기어 온 그림자 줄기가 손목에 감겼다. 그것을 떼어 내려 했지만 되레 그것은 더 엉켜들었다. 입에서 저절로 욕설이 나왔다.
오늘따라 화가 많았다. 짜증이 많았다. 머리가 아팠고,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와중에 여우는 속삭이고, 사람이라 주장하는 자가 내 앞에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몰아붙였다.
한번 격해진 감정은 자제하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어둠 속에 스며든 것들은 신이 났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나를 감싸려 드는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레코디아는 제멋대로 날뛰듯 일렁이는 그림자들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에게선 도주의 기색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인제 와 감정을 다시 죽이고 저것들을 다스릴 자신은 없었다. 이젠 나도 내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적어도 이 남자는 죽이는 것.
그런 나를 제지하듯, 방해하듯 그림자들이 나를 붙잡았다. 팔에 감기고, 손을 잡고, 목을 틀어쥐었다.
손을 들어 목을 움켜잡은 것들을 떼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등에 닿은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억센 힘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강제로 내 몸을 틀어 뒤를 보게 만들었다. 내 바로 눈앞에 손을 내미는 삿된 것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 이건 정말로 위험하다.
“……?”
그것을 느끼는 순간, 무언가 하얀 것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둔해진 몸은 그것이 눈앞에 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이 스쳐 지나간 곳을 시작으로 검은 그림자 줄기의 힘이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눈을 깜박이다 나를 지나쳐 간 것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레코디아의 팔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급작스러운 물건의 등장에 잠이 깨듯 격해졌던 감정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에 따라 간을 보듯 알짱거리던 그림자들도 뒤로 물러났다.
숨을 들이마셨다. 손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이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추웠다. 단순한 계절의 추위가 아닌 뼛속까지 시린 느낌이었다.
“…….”
위험했다. 스쳐 지나간 화살 같은 게 아니라 내가 다루던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위협이 되었다. 흔들거리는 등에서 그제야 푸른 불꽃이 슬며시 기어 나왔다.
사람이 아닌 귀신을 무서워해야 한다던 랑의 말뜻을 절절하게 깨닫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침을 삼키고 땀이 밴 손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류는 여전히 레코디아의 어깨에 박혀 있었고, 반대쪽 팔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림자가 제멋대로 날뛰는 순간 그 또한 피해를 보았는지 몸에 잔상처가 늘어나 있었다.
제 팔에 박힌 것을 살펴보는 그를 놔두고 뒤를 돌았다. 저 멀리 멀쩡한 건물 위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머리카락 색 정도는 구별이 되었다. 이 거리에서도 모를 수가 없는 색이었다.
“아….”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나왔다. 하얀색. 나와는 대조되는 짧은 하얀 머리칼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뭘 알고 쏜 걸까, 아니면 단순 우연이었을까. 남들이 보기엔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 능력에 본인이 당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맞았다.
더 안정적으로 쏠 수 있었음에도 내 주의를 끌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던 화살이 머릿속에 지속적인 잔상을 남겼다.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내게 겨눴을까. 넌 뭘 알고 있는 거야.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았다.
탄력감이 몸을 적셨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간신히 두 발로 서서 버티는 기분이었다.
몸을 바로 했다. 타르처럼 흐물거리는 그림자의 속박 아래 여전히 얌전히 묶여 있는 레코디아가 보였다. 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마티의 눈과 달리 평범한 갈색 눈이 상대를 가늠하는 것을 더 어렵게 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언제 그리 팽팽하게 굴었냐는 듯 그림자는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성경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그는 손을 들어 제 어깨를 파고든 제등을 뽑아냈다. 새파란 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태웠다.
피와 상처를 뒤집어쓴 신의 사자는 나를 보며 말했다.
“적어도 나의 신께선, 스스로를 속이게끔 하지는 않지요.”
“…….”
“그것이 비록 무정함에서 이뤄진 것일지라도.”
작은 빛의 입자와 함께 그는 수백 장의 종이가 되어 사라졌다. 그런 그를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맥없이 바닥을 구르던 류는 곧이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피곤했다. 힘들었다. 서 있을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의 시야에 피와 먼지와 하얀 화살 하나가 들어왔다. 손을 뻗어 그 차가운 금속을 더듬다 손을 거두었다. 지친다.
류와는 달리 나는 그림자에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았다. 엉망이 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먼지와 잔해와 함께 그렇게 있었다.
여전히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손을 들어 목에 걸린 것을 뜯어냈다. 얇은 은색의 줄이 펜던트의 구멍을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펜던트 안에 들어간 하늘 조각을 눈으로 훑었다.
글자는 사라졌고, 이상한 진 같은 것도 없어졌다. 오색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담은 그것은 여전히 예뻤다.
“…나한테 뭘 바란 거예요.”
그래서 모르겠다. 언제나 평온한 이것처럼 언제나 알 수 없는 랑을,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불완전했다. 언젠가 예언의 말처럼 푸른 불꽃이 될 테지만, 동시에 나는 아직 불티에 불과했다.
아직 왕이 아닌 나는 사도를 죽이지도 이기지도 못한다. 이렇게 쉽게 흔들리고 이리도 쉽게 무너졌다.
여우와 비형랑의 약속은 이뤄질 수밖에 없는 약속이었다. 내가 푸른 불꽃이 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내가 랑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은 살고 싶다면 이뤄야 하는 목적이었다.
푸른 불꽃이 아니면 이것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푸른 불꽃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걸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세상은 나만 두고 흘러간다. 나는 그 세상의 움직임에 맞춰 달음박질해야 했다. 아무리 숨이 막히고 지친다 해도.
손을 움켜쥐고 그 안에 불을 일으켰다. 하늘 조각을 감싸던 펜던트는 타 버리고 그 안의 것만이 남았다. 손에 힘을 주니 날카로운 단면이 손바닥을 찔렀다.
슬며시 배어 나온 붉은 것이 손바닥을 적시고 손목을 쓸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릿한 아픔이 싫고도 안쓰러운 기분이 들어 웅크려 안았다.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신에게 매달리는 이들이 조금 이해가 돼서, 비참했다.
‘내가 이곳에 있었음을 아무도 모르게 해 줘요.’
바타르는 내게 그리 말하며 부탁했다.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완벽한 도망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도망가고 싶었다. 아주 멀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그런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류.”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른 덤불처럼 버석했다. 꾹 감았다 떠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색. 조금은 어둑해진 하늘 아래 그의 하얀 머리칼은 낮의 구름을 연상시켰다. 그의 얼굴이 어쩐지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화살을 집어 올렸다. 끝에 핏방울이 묻어나는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활 잘 쏘더라.”
“…실수, 실수로 그랬어요. 손이 미끄러져서.”
“그래?”
몸을 틀어 그를 보았다. 잘 모르겠다. 애써 끌어당긴 입꼬리는 어색했고 눈에서는 불안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말을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있잖아….”
“…….”
“아니야. 역시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걸어가 그의 손에 화살을 돌려주었다. 멀어지는 내 손을 그가 다급하게 잡았다.
“무슨 말 하려고 한 거예요?”
“…그러게. 뭐였더라. 까먹었어. 미안.”
아무리 지금 내가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도 이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옛날. 그가 괴물들 틈새에서 눈을 감으며 내게 했던 말과 비슷한 그 말을 그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그리고 최후에 가장 많이 망가질 거예요. 그런 당신의 옆에 남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불행해지겠군요.’
그 말을 내뱉으면 내가 너의 불행임을 인정하는 것 같으니까.
그건 싫었다.
***
그의 손을 잡고 돌아온 길드의 사옥은 입구부터가 번잡스러웠다.
우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끌어안는 부모. 애써 밝은 낯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의 사람들.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섞여들어 끝내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그들의 시선을 피해 이호연은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서 눈만 끔뻑였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원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류.”
“응.”
“…괜, 찮아요?”
괜찮냐고? 나는 어딘가 멍한 정신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거, 못 하겠다.
“아니.”
“!”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그를 보며 나는 웃었다.
“안 괜찮아.”
이젠 도저히 괜찮다고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괜찮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걸 인정하니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쉬운 말이 뭐 그렇게 어려웠나 싶어서 우스웠다.
별스럽게 구나, 유난스럽게 구나, 바뀌는 것 하나 없는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 미련스럽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머뭇거리는 이호연을 두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딜 가나 했더니 강유진이 있는 연구실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여전히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안 가?”
이호연은 굳은 얼굴로 내 옆으로 왔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웃었다. 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마. 나도 일단은 입을 다물고 네가 아는 사실을 캐내지 않을 테니까. 누구를 위한 것일지 모를 침묵을 지키며 우리는 걸었다.
여전히 입구만큼은 수상스러운 강유진의 연구실에는 오정인과 이나연도 있었다. 나를 발견한 강유진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바로 내게로 왔다.
“다쳤어요?”
“나요?”
내가 다쳤던가?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니 이나연이 옆에서 자신의 뺨을 콕 찍는 행동을 취했다.
손을 들어 그녀가 가리킨 곳을 더듬으니 끈적한 붉은 것이 묻어 나왔다.
“아, 맞다.”
피 튀었었지. 손등으로 볼을 문질렀다. 그런 내게 강유진이 물티슈를 내밀었다.
“내 피 아니에요.”
“그럴 것 같기는 했어요.”
“그런데 누구 피인지는 헷갈리기는 하네요.”
“네?”
강유진의 되물음은 웃음으로 넘겼다.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다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굳은 낯으로 말없이 서 있었다.
“아. 혹시 그 화살 저번에 강유진 씨가 만든 석궁 화살이야?”
내 질문에 이호연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궁….”
“?”
오정인이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돌아보니 오정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이나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석궁 쐈어?”
“그러고 보니 그 석궁 원래….”
이나연이 받은 거였다. 이호연에게 말을 걸던 이나연이 내 말에 나를 돌아보았다.
“이호연이 갑자기 석궁을 뺏어서 가 버렸거든요.”
“그래요? 실수로 쐈다고 하던데.”
내 말에 이나연은 의아한 얼굴을 했고 오정인은 묘한 얼굴을 했다. 슬쩍 돌아보니 이호연은 더욱 낯을 굳히고 있었다.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경쾌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시선을 돌리니 범인은 강유진이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을래요?”
“그럴까요.”
강유진의 옆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 옷자락을 이호연이 다급하게 잡았다. 그가 나를 이렇게 잡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게….”
“말 안 해도 돼. 널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어.”
네가 하는 일이 대부분 네가 아닌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아니까.
“…무서워하지 마.”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겨우 그 정도였다.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텅 빈 손을 움켜쥐는 그를 보다가 다시 몸을 틀었다.
강유진은 그런 우리를 모른 척하며 구름을 불러왔다. 둥글게 도넛 모양으로 변한 구름 안에 지옥도와 엇비슷한 풍경들이 떠올랐다.
“일단 인명 피해 자체는 크지 않아요. 크리스마스이브라 거리에 사람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만큼 전직자들도 많았으니까요.”
“다행이네요.”
“류는 별일 없었어요?”
태연한 듯 묻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역시 마냥 해맑은 것처럼 보여도 은근 무서운 사람이었다. 별일이야 많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말을 골랐다.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를 만났어요.”
강유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레코디아에 대해 말해 주었다. 다만 그가 말했던 ‘사람’에 관한 것과 ‘나’에 대한 것은 빼고.
“내 개인적 감상을 말하라고 한다면 360° 돈 것 같았어요.”
“360°면 제자리인데요.”
“타고난 또라이 같다는 뜻이에요.”
강유진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기록하는 그녀를 보다 구름 안을 채운 풍경들을 보았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심하지 않다고 했다.
부모님 쪽으로 보내 놓은 깨비들 또한 문제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것들을 풀어내기 위한 한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손바닥 안을 더듬어 보았다.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뺨을 닦을 때 썼던 물티슈로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남에 피가 튀었던 것에 불과했던 뺨과 달리 손바닥은 아팠다.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푸른 불을 불러왔다. 작은 상처는 순식간에 불 아래에서 사라졌다. 전과는 달리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지금 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가도 되나요?”
“어딜요?”
내 말에 강유진이 곧바로 물었다. 나는 손을 뻗어 구름 속 영상 하나를 가리켰다.
“최초로 발견되었던 전직관이 있는 곳.”
한 번쯤은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유진은 고민하는 낯으로 영상 속에 조그마하게 비친 낡은 도장을 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다른 건물들과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가는 것 자체는 상관없어요.”
“그럼….”
“그런데, 그게 꼭 류여야 할 필요는 없죠.”
“…….”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를 보는 눈동자는 생기로 반짝였다. 나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해요.”
“류.”
“내가 푸른 불꽃이잖아요. 그러니까 가야 해요.”
내가, 오로지 나만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야 한다.
“대신에 혼자는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내가 길드장님처럼 류에게 지휘를 내리거나 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혼자 죽으러 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혼자 보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죠.”
그리 말하면서 강유진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기분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유진은 힘주어 내 손을 맞잡더니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류는 거기 가려면 내 손을 뿌리쳐야 해요.”
“……?”
“그리고 나는 연약한 후방 계열이죠. 류가 힘껏 쳐 내면 난 뼈 나가요.”
뭐 이런 협박이 다 있어….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면서도 강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아도 매번 묻지 않았잖아요. 지금도 이전에도. 가끔은 나한테도 좀 져 줘요, 류.”
“…….”
차마 답하지 못하고 눈을 피하는 나를 보며 강유진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손은 붙잡은 상태였다.
“…사실 이렇게 말한다 해도 류가 나를 안전하게 뿌리칠 방법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냥 곧바로 나가 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나는….”
“이렇게 힘 뺀 내 손을 쳐 내지 않는다는 것이 류가 져 주는 최선이라는 것도, 나는 알아요. 그 얼굴에 져 버린 내가 먼저 손을 놔줘야 할 거라는 것도.”
“…….”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사람 마음 아프게.”
맥 빠진 웃음을 흘리며 강유진은 손을 놓았다.
“류가 나보다 나이 많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한국 와서 는 거라곤 길드장님을 따라 나이 어린 사람한테 져 주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
“…….”
“…그래도 혼자는 가지 말아요, 류.”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강유진은 몸을 틀며 말했다. 단호한 어조로 그녀는 말했다.
“호연이랑 같이 가요. 류도 알다시피 난 융통성 있고, 생각보다 당신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같이 가면 보내줄게요.”
단호하다면 단호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건가 싶기도 했다. 리블이라는 공략대에 들어와 주세진과 이호연을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마주한 것은 강유진이었으니까.
공략대보다도 더 먼저 만났고, 더 먼저 마음에 들었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이호연보다도 먼저 만난 것은 그녀였다.
아카샤의 조각에서 나오던 나를 발견한 것은 그녀였으니까. 그때의 강유진은 내게 물었었다. 괜찮냐고. 그때의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말했었다.
가까이 오는 그녀를 피했다. 그때, 나를 걱정하는 이에게 말하지 못한 것을 지금에 와서야 한데 뭉쳐 말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내 말에 강유진은 뒤돌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모습에 결국 나 역시 맥없이 웃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강유진은 보았다. 그 누구보다 정보망이 넓고 그것만 두고 따진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이에게 걸린 거였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강유진은 내 얼굴을 분명 보았음에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어쩌면 길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강유진이 나를 모르는 척해 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새까만 석판 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나비와 푸른 불꽃. 종과 왕. 인도자와 구심점.
우리가 써 내려가는 종말의 이야기.
그것은 낙원. 낙원은 종말. 그 둘은 무엇이 그리 다를까.
“나는 잘 모르겠어.”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원래라면 이곳을 돌아다니고 있어야 할 생산부의 직원들도 연구자들도 지금은 모두 없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여전히 새까맣고 거북했다. 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유리가 고온의 불에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속닥임이 들렸다.
약속을 지킬 시간이 다가와. 너는 나. 나로 인해 태어난 존재.
네 삶이 네 것 같냐고 소리 지르던 쥬의 말이 섬뜩하도록 선명하게 와닿았다. 속닥임은 이어졌다.
약속을 지켜야 해. 거부하지 마. 네가 거부한다고 하여도 때는 오니. 여우와 비형랑의 약속.
그것은….
“푸른 불꽃.”
겁에 질릴 필요도 바닥을 길 필요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삶.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어.”
여전히.
꾹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자 그 안에 쥐어져 있던 유리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받아들이고, 나는 또 무언가를 버려야 했다. 살고 싶은 마음을 받아들여 나를 버렸듯.
그림자에서 슬며시 머리를 내민 류를 잡았다. 높게 치켜들어 석판을 향해 내리쳤다. 검은 것 위에 아로새겨진 것들이 무너지고 퇴색되었다.
이건 그저, 가벼운 화풀이였다. 그래, 아주 가벼운 화풀이.
자상이 새겨진 검은 석판을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바닥을 뒹구는 조각은 챙기지 않았다.
소중하다고 다 움켜쥐기에는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놓아야 할 것을 이번에도 나는 선택해야 했다. 귓가로 소리가 들렸다. 그것들은 환청에 가까운 소음이었다.
징 소리가, 흥겨운 저잣거리의 이야기가. 왈패들의 거친 입담이. 누군가가 말한다. 꼭두각시놀음하는 놀이꾼. 재주꾼. 꾼들이 다 모였구나. 이것은 누구를 위한 놀자판인가.
판의 주인이 속닥인다. 아득하고도 나를 이죽야죽 약 올리는 소리.
결국은 이렇게 되는 이야기.
“…결국은 이렇게 되는 이야기.”
내가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한들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법 한번이 없었다.
땅에 끌리는 제등을 들고 발에 채는 잔해들을 넘어 걸었다. 걸음 한 번에 한 번씩 짓밟히는 그림자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것을 눈에 담고 의심하다 신경을 껐다. 원래부터가 내 것이 아닌 힘이었기에 인제 와 이상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저 지금은 저게, 날 지탱하던 저 힘이 거짓은 아니라고. 내게 위협이 될지언정 결코 나를 무너트리진 않을 절대적인 힘이노라, 하고. 그것만 증명해 준다면….
그걸로 만족할 것이다.
방을 나오자 문 바로 옆에 서 있던 이호연이 보였다. 그는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검은 석판의 잔해들을 눈에 담다 말없이 나를 보았다.
“갈까요?”
“응.”
우리는 매일매일 살기 위해 움직였다. 지금도 옛날도.
***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둘이서 돌아다니니 생각나는 것은 옛날의 일들이었다.
그때도 우리는 이렇게 둘이서 움직였다. 여럿이서 돌아다니는 것은 되레 우리에게 있어 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밖에 없는 것 같은 세상이 너무나 한적해 외롭게 느껴졌다.
“며칠 뒤면 새해야.”
“그렇네요.”
“응.”
우리는 또 나이를 먹고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을 확인받을 것이다. 첫해의 해가 비추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다채롭게 빛나는 세상이면 좋겠다.
다시 한번 마주한 회색빛 도시는 어둠 속에서 쓰러져 가는 종말처럼 보였다.
그 종말의 길을 더듬으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신체 계열 전직관은 여전했다. 그의 주변 풍경 또한 과거의 것과 같아 더욱 그렇게 보였다. 금이 간 벽에서 떨어진 회색 가루가 바닥을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창문은 깨졌고 많은 사람이 사는 것처럼 북적이던 것이 무색하게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정말 그 옛날 내가 이곳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
발에 채는 유리 조각을 쭉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볼 때마다 주변이 엉망이네요.”
내 말에 그는 묵묵부답 앞만 보았다. 여전히 사담 따위는 나누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인제 와서 그런 것이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런 전직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움직였다. 이호연이 나를 의아하게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가지런하게 놓여 있던 수련용 목검을 발로 찼다.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무너지는 그것의 끝에 닿은 것은 낯을 찌푸린 전직관이었다. 이호연이 뒤늦게 내 어깨를 짚었다. 돌아보니 그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남이 보기엔 뜬금없이 시비 건 것과 다를 게 없으니 충분히 그럴 만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시비 건 거 맞았다.
“옛날에도 이랬었죠?”
“…….”
“계속 그렇게 말 안 할 거예요?”
대화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테오그라젠스. 천공 섬. 그리고 당신들.”
하나하나 나열하자 그는 그제야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네가 그거 어떻게 아느냐는 듯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그것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나예요.”
내가 싫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러니 말해요. 입 다물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뒤에 서서 우리만 앞으로 내몰지 말고, 아는 게 있으면 다 말하라고요.”
괴물이 뛰노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것처럼 굴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들은 우리를 통해 자신들의 기회를 쟁취한 거였다.
저들은 뒤편에 서서 우리가 자신들이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기를 바라며, 그렇게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노려보며 말하는 나를 보며 그제야 그의 입이 열렸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낯설고, 처음 듣는 것처럼 생경했다.
“전직을… 했군.”
“네. 살려고 기어이 했죠.”
“영원히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요?”
내 질문에 그는 어딘가 복잡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살피며 곰곰이 생각하다 혹시나 해서 입을 열어 보았다.
“아, 혹시 그때 말한 장르가 다르네, 뭐네, 그 말 때문에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되레 혼란이 일었다. 설마 진짜 그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전직을 안 시켜 준 게 맞았다는 건가?
그 장르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단호한 전직관의 얼굴은 결코 장난 같은 것 따위 모른다는 듯이 우직했다. 정말로 그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나를 전직시켜 주지 않았던 거라면….
그 장르라는 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가벼운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에 관하여 더 물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 문제 말고 다른 것이 더 중요했다.
“전직자들의 전직 취소 말이에요. 당신들이랑 관련이 있나요?”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왜 줬다가 뺏는 건데요?”
“…애매한 힘을 가져 보았자 앞으로 내몰리고 마는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할 것이 눈에 훤하기 때문이다.”
“…….”
강유진의 가설이 맞는 걸까. 그녀는 사람을 가리기 시작한 전직관들의 태도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 같다고 했다.
헛된 죽음 외에는 길이 없는 자들을 골라내는 준비 단계 같다고 했다.
굳이 따지면 그들이 벌인 일이 우리에게 해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도움이 되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가장 바라는 자들은 우리가 아닌 저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하나였다. 내가 저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것처럼 저들 또한 우리를 같은 사람이 아닌 낯선 무언가로 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
그렇기에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이용해 최후를 보려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걱정.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저들만의 승리를 위해 얼마든지 우리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저들의 죽음이 저들의 의지가 아니었듯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과정에 본인의 의지가 있었을까 싶었다.
테오그라젠스와 또 다른 하나. 그 둘의 차이점은 눈을 감았느냐 감지 않았느냐였다. 눈을 감은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편이었으나 파고들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반대쪽은 생각할 것도 없고.
또 다른 하나는 방관자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가 우리를 도와주는 이유는 방관하기 위함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당신들이 전직관이 되는 것에 있어서 본인의 의지는 있었나요?”
한자리에 머물며 움직이지 못하고, 하늘 조각 안에 갇혀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그 안에 홀로 살아야 하는 삶을 그들이 과연 진실로 원했을까.
영원히 한곳에 머무르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정해진 말만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이들은 정말로 원했을까.
“나는….”
말끝을 흐리다 입을 다무는 그에게서 더 이상 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결국은 다 신이라는 것들의 손에 놀아난 것뿐이었다.
이 이상 여기 있어도 다른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들었다. 이호연 또한 내 옆에서 날 따라 그것을 정리했다.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전직관이 입을 열었다.
“너는 여전히 전직할 수 없다. 적어도 내 눈에는 여전히 그리 보여.”
“…….”
그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내게 그는 말을 이었다.
“너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달라. 그렇기에 너는 전직할 수 없어.”
“그거, 내가 푸른 불꽃이라 그런 거예요?”
“푸른 불꽃?”
“…….”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묵직한 얼굴에 담긴 것은 의아함이었다. 푸른 불꽃이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로써 천공 섬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게 명확해졌다. 그럼 정말로 그 장르…라는 것 때문이라는 건데.
푸른 불꽃과 관련된 게 아닌 이상 관심은 잠깐이었다. 우리가 말없이 검을 정리하니 그 또한 금세 무관심해졌다. 가지런히 놓인 검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푸른 불꽃을 모른다는 건 그것과 내가 전직을 하지 못했던 것이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강유진의 가설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게 된다.
전설의 용사가 될 자질을 가진 이가 초보 검사로 전직 못 할 리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왜 전직 못 했던 거지?
꺼졌던 호기심이 다시 살그머니 피어올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를 돌았다. 무정한 눈으로 문만을 바라보는 전직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나한테 그랬잖아요. 장르가 다르다고.”
“그랬지.”
“그거 무슨 뜻이었어요?”
그의 시선이 이호연 쪽으로 미끄러졌다. 그에 따라 나도 이호연을 보았다. 갑자기 자신에게 몰리게 된 시선에 이호연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감이 떠올랐다.
“가까운 사인가?”
“사귀니까 가족 빼면 제일 가까운 사이죠.”
“그렇다면 내보내는 것이 좋겠군.”
“?”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말이야.”
이호연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건가. 이호연의 눈치를 살피니 그의 얼굴에 거부감이 슬며시 드러나 있었다. 그 말을 하기엔 적절한 시기는 아니었다.
차라리 며칠 전에 이곳에 왔다면 이호연 또한 순순히 나가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옆에서 떨어지거나 날 혼자 둘 것 같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그냥 말해 주세요.”
인제 와서 뭘 숨기고 애쓰기도 애매했다. 그걸로 힘 빼는 것도 좀 피곤하기도 하고. 일견 무력하게 느껴지는 내 목소리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그건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며 갈망이자 한낱 미물도 가진 삶에 대한 열망이다.”
누가 했던 말이랑 비슷하네. 예상했던 답이지만, 막상 들으니 속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쓰린 것도 같았다.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지. 그러나 그곳에서 멈추고자 하는 이들은 없다. 언제나 그 이상을 바라지. 한계를 마주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과정이다.”
“…….”
그는 손을 들었다. 제 손안에 무언가 있기라도 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기회일 뿐이지. 기회란 간절한 이들에게 답을 준다. 삶에 대한 열망도 그와 비슷하지. 그런데 너는 모든 것이 다르더구나.”
“…내가요?”
“열망한다 치기에 텅 비어 있고, 어영부영 살아남아 이곳에 다다랐다고 하기엔 간절했다. 모두가 살고자 나를, 우리를 찾아오지만 너는 무언가 달랐다.”
“…….”
“목적도 바라는 것도 다르니 걷는 길도, 결과도 다르다. 그러니 너희네 말들로 ‘장르’가 다르다는 건 이런 너를 두고 하는 가장 올바른 말이 아닌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목이 콱 메는 기분이었다. 전직을 하기도 전부터 남들과 뭔가 달랐다고 말하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당신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존재 아닌가요?’
정말 난, 평범한 사람보다는 ‘사도’와 더 닮았나? 와, 그건… 진짜 싫다.
손안에 쥐어져 있던 수련용 목검이 박살이 났다. 나뭇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손에서 목검을 빼내는 다급한 손길을 느끼며 탄식을 뱉었다.
“…아.”
내보낼걸. 무력을 써서라도 그냥 내보낼 걸 그랬다.
손을 살펴보던 이호연은 별다른 상처가 없음에 안도하고는 그제야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표정이 바뀌는 걸 보니 빈말로도 좋은 얼굴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호연은 몸을 틀어 전직관을 보았다.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런 경우가 류 혼자였나요?”
“……!”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그에게서 나왔다. 약간의 불안감을 품고 전직관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말할까 말까 고민이라도 하듯 시간을 끌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았지.”
뭐?
“그럼….”
“그렇다고 모두가 너와 비슷한 이유로 전직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
솟아올랐던 기분이 맥없이 쓰러졌다.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내 얼굴을 지켜보던 전직관은 손을 들어 이호연을 가리켰다.
“하지만 나는 저자도 전직시키지 않았을 거다. 너와는 다르지만, 그러나 비슷한 이유로.”
“…….”
“많은 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중 많다고 하긴 힘드나 명백히 존재하는 이들이 얻은 것 없이 돌아갔다. 그중 너 또한 있었다. 그 모두가 너와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이유가 너와 같았던 것도 아니었지.”
“…….”
“추구하는 것이 모두가 다르고 바라는 것 또한 모두가 다른데 거절하는 이유가 같은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그…렇죠.”
“네가 추구하는 것이 삶에 대한 열망은 아니었다. 우리는 살고자 하는 이들이기에 그런 너에게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상은 너의 바람과 맞닿아 있었나 보군.”
그것이 푸른 불꽃의 자리.
강유진이 물었던 전직의 조건이자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는 것.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르고 싶은데 부를 수 없는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랑.
만약 내가 바라는 것이 그 이상이라는 것에 맞닿아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난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는 걸까. 내가 그 여우의 환생이든 아니든?
“……?”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무언가 더 생각이 이어지기 직전 전직관이 우리를 내쫓았다.
“인제 그만 나가라.”
“어….”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 우리를 밀어냈다.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지만, 일단은 그의 손을 따라 움직여 주었다. 우리를 건물 밖으로 내몬 전직관은 주변의 풍경을 훑고는 어딘가 아린 얼굴을 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에 가장 근접한 존재가 너라고 했나?”
“네, 뭐…. 그렇죠.”
“그렇다면 하나만 내게 약속해다오.”
“어떤걸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
“어쩌면 우리의 실패는 그의 그러한 점에서부터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그라는 건….”
“나비. 신의 첫 번째 사도. 우리에게 신을 죽이자 속닥이던 자. 우리를 이끌고 신에게 대항했던 자.”
그가 말하는 수단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엎질러진 푸른 염료 사이 엿보였던 푸른 낙서들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모여 있는 자들을 이끄는 재주는 있었지만, 새로이 모으는 재주는 없었지. 그러면서 있는 것을 아끼는 법을 몰랐다.”
“…….”
“그런데 너는 그와는 달리 주변에 무언가 많이 모일 것 같구나.”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내 질문에 그는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주 옅고 희미했지만, 명백히 웃음이었다.
“아주 오래된 것들의 작은 재주일 뿐이지.”
“…….”
나비는 인도자. 푸른 불꽃은 구심점. 어쩌면 그가 말한 것들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을 잇다 결론을 내렸다.
“난 사람 다루는 데 재주가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남들을 앞으로 내몰지는 않을게요.”
어차피 그 앞은 내 자리일 터였다. 그러니 그의 부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닫히는 문 틈새로 보이는 백발 노장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앞으로 그는 누군가가 찾으러 와 줄 때까지 또다시 이 건물 안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 기회라는 게 애초에 누구를 위한 기회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
차가운 것이 뺨에 닿았다. 끔뻑거리고 있던 눈이 놀라 크게 뜨여졌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뾰로통한 얼굴을 한 강유진이 보였다.
“들어가서 좀 자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눈 밑이 새카매요.”
그녀의 말에 손을 들어 눈 밑을 더듬어 보았다. 당연하게도 묻어나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눈에 담긴 피로가 손끝까지 전염된 기분이었다.
손끝을 문지르다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여차하면 카페인 약이라도 먹죠, 뭐.”
강유진은 내 말에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몸에 안 좋은 건 다 하네요.”
그녀의 말에 난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약 말고 이거나 먹으라고 강유진이 준 것은 피로 회복제였다. 이거나 저거나 그렇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도 강유진은 단호했다.
병 안에 담긴 것은 마시고 난간에 기대어 밑을 내려다보았다. 피난민처럼 로비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피곤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러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확인한 강유진이 나처럼 난간에 기대며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옛날보단 양호하죠?”
“비교도 못 할 정도죠.”
“부모님을 이쪽으로 안 모시고 와도 괜찮겠어요?”
“그쪽에도 이것저것 해 놓은 게 많아서 괜찮아요. 그리고….”
난 이런 순간이면 부모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면서도 가장 보기 싫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말하다 말고 침묵하는 나를 강유진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피로가 뭉쳐 뻑뻑하게 느껴지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나라에서 지정한 안전 가옥 수준만큼의 방비가 된 곳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불안은 술렁였다. 태풍에 휘말린 바다 위 배 같았다.
배가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흔들릴 때마다 승선객들은 불안을 느낄 것이다. 육지에 다다를 때까지 버티기엔 그들의 불안은 해일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었다.
눈을 떴다. 몇몇 삶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에게 나는 구명줄 같은 것일 터였다.
“장르가 다르다는 건 뭘까요?”
“?”
급작스러운 내 질문에 강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신체 계열 전직관과 했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들려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강유진은 금세 답을 들려주었다.
“나는 좀 알 것 같아요.”
난 들어도 잘 모르겠던데. 고개를 틀어 그녀를 보았다. 내가 저에게 집중하자 강유진은 천천히 제 생각을 읊어 주었다.
“일종의 이런 거죠.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겪어도 어떻게 느끼냐가 사람마다 다르죠. 그 다름이 그 전직관의 말을 빌려 장르가 다르다고 하는 거죠.”
“잘 모르겠어요.”
“그 전직관이 삶의 열망이라는 표현을 했죠? 그건 아마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른 이야기일 거예요.”
몸을 바로 해 강유진을 보았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피력하는 내 행동을 보며 강유진은 난간 위를 손으로 톡톡 쳤다.
“신체 계열은 직접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라고 보면 되고, 치유 계열은 무언가를 죽이기보단 살리고 싶은 열망이 바탕이라고 본다면…. 그 전직관의 이야기가 마냥 틀리지만은 않게 돼요.”
“그럼 난 별로 살고 싶지도 않고, 누굴 살리고 싶지도 않아 전직을 못 했다는 뜻이 되나요?”
“음…. 그렇게 부정적인 건 아니고, 그냥… 똑같은 삶에 대한 열망이라고 해도 그 열망의 종류가 다르다는 뜻이죠. 똑같이 ‘괴물 새끼를 죽여 버리고 싶어.’라는 열망이라 해도 그 종류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모르겠는데….”
“같은 사랑이라도 플라토닉이냐, 에로스냐 다르잖아요.”
이게 그거랑 같은 맥락일 수가 있나? 죽이고 싶은 거면 그냥 죽이고 싶은 거지.
이번에도 내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눈치챘는지 강유진이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닐뿐더러 그 정도 다르다는 것에 타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만 됐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강유진이 입을 여는 것이 먼저였다.
“같은 사람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평가를 하잖아요. 그건 두 인물이 상대에게 느끼는 호감의 종류가 다른 것과도 같죠.”
“…….”
“음…. 나와 길드장님의 사이를 예시로 두자면 난 로맨스지만 길드장님은 정치물을 바탕으로 한 생존 성장물 같은 거라는 거죠.”
뭔가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애매했다. 그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강유진은 설명을 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은 남자 주인공이지만, 길드장님 인생에서 나는 능력 좋은 부하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거죠. 같은 것을 보고 겪고 느끼며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전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전에 말했었죠? 전직의 조건에 관하여. 그 전직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제 좀 앞뒤가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런가. 강유진과 주세진을 두고 한 비유는 잘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직에 가져다 붙이면 여전히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강유진은 손뼉을 짝 치며 내 시선을 끌었다.
“우리 손씨 남매를 예로 들어 볼까요? 류 주변에 있는 전직자 중에 신체 계열 전직자에게 거절당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 그 둘이니까요.”
손민호 쪽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손민경 쪽은 확률이 높기는 했다.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 싫어하는 사람이 뛰어다니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신체 계열 쪽에 재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강유진이 말했다.
“민호가 그러더라고요.”
“?”
“하늘이 무너지고 난 뒤 가장 절실하게 느낀 건 자신들은 결코 괴물도 죽이지 못할 것이며 사람도 죽이지 못할 거라는 거였대요.”
“…….”
“그래서 그 둘은 배운 것을 토대로 살아남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았어요. 하나라도 살리는 것. 한 사람이 살 때마다 본인들 삶도 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해요.”
남매는 나란히 치유 계열 전직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무력함을 느꼈다. 살리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괴물들로부터 지켜 낼 힘이 없었고, 그 급박한 환경 속에서 빠르게 누군가를 살리기에는 재능이 부족했다.
자신의 한계를 맛보았기에 둘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가장 잘 알게 되었고, 재전직하게 되었다. 사람을 지키는 쪽으로, 살리는 쪽으로.
생각을 더듬다 입을 열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전직이라는 게 정말 장르 찾기랑 비슷하기는 하네요.”
강유진의 말대로 그 둘은 살고 싶고,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치료를 택했고 그 열망을 바탕으로 전직한 것이니까.
누군가는 괴물을 직접 죽이는 것을, 누군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을. 방향성은 다양했고 그에 맞춰 사람들은 전직했다.
“강유진 씨는 그럼 뭘 바랐어요?”
“저요? 전, 음…. 아마 정보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좀 더 안전한 장소. 먹을 것이 있는 곳. 사람이 모이는 곳. 그런 거요.”
“…….”
그럼 내가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직접적으로 괴물을 죽이기를 바라지는 않았었다. 마법 같은 특별한 힘을 원하지도 않았다. 손씨 남매처럼 누굴 살리고 싶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뭘 바라서 랑을 만나게 된 것일까. 당신의 이상과 나의 바람은 어떻게 맞닿아 있던 걸까.
만약에 내가 그 이상이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푸른 불꽃은 어떻게 되는 거였을까. 신에게 대항할 푸른 불꽃이 없을 이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난간을 잡고 팔을 쭉 폈다. 웅크려 있던 근육이 늘어나며 찌뿌둥한 것이 풀렸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왜 그렇게 좋아해요?”
주어는 없었지만, 강유진에게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의 남주인공이라는 존재를 묻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강유진은 눈을 깜빡이다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몰라요.”
“…몰라요?”
“그럼 류는 호연이 왜 좋아요?”
“…몰라요.”
뻘쭘한 느낌이 들어 괜스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꼬았다. 그런 내 행동을 지켜보던 강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이유를 알면 그게 사랑이겠어요? 무엇을 갖다 붙여도 사랑스러우니까 사랑이고 정작 이유를 물으면 답할 말이 없으니 사랑인 거죠.”
“…길드장님이 사랑스러워요?”
그건 좀….
“원래라면 더 밀어내야 하는데 능력이 너무 좋아서 차마 날 밀어내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죠. 그래서 난 계속 능력 좋은 부하나 하려고요.”
“…….”
“그거라도 없으면 옆에 설 구실이 없잖아요.”
그 사람은 인생에 로맨스라는 장르를 넣을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은데. 그걸 강유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보다 리블이라는 길드에서 더 오래 몸담은 그녀가 더 잘 알면 잘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좋다고, 그녀는 지금 말하고 있었다.
“화이팅.”
그거 말고는 딱히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강유진은 히히 웃는 것으로 내 말에 답했다.
실없는 웃음이었다. 다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그런 웃음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하듯 주세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웃음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일러 주기 위해 불렀는데 내가 영 집중을 못 하니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봐?”
그의 손에 들린 낡은 지도를 힐끔거리다 어깨를 으쓱였다. 모른 척하려는 내 모습에 주세진은 단호한 얼굴을 했다.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 놔주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사랑스럽대요.”
“…뭐?”
“좋겠다고요.”
옆에서 이호연이 매우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주세진은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낯을 굳혔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 여길 보면….”
“마음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
이제야 좀 대화할 마음이 생겼는지 주세진은 머리를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쉬는 시간이라고 말하며 얼버무렸다.
자리에 앉으며 주세진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본인을 사랑스럽다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아요?”
“…….”
답 없는 걸 보니 누군지 아는 것 같았다. 하긴 이 길드에 주세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제 강유진밖에 없기는 했다.
그 전에 주세진에게 마음 있던 직원들은 모조리 마음 정리하고 오라며 휴가를 받았었다.
가끔가다 휴가 간 곳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 정말 마음 접다 못해 새 사랑을 얻고 오는 이도 있었고.
대부분은 이미 휴가 확정 난 순간부터 마음 정리를 했다. 안 접으면 다음 순서는 휴가가 아니라 권고 사직일까 봐.
주세진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위치가 그런 오해를 만들었다. 휴가 갔다 왔는데 마음 안 접었으면 권고 사직. 당연하게도 그런 식으로 잘린 직원은 없었다.
그런 주세진의 철벽 방어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바로 강유진이었다. 듣기로는 휴가 가서 주세진에게 줄 선물을 사 왔다고 한다. 그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든 휴가를 거부했고.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를 보며 나는 맥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유진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능력이 있기에 그 구실로 주세진의 옆에 서는 거였다.
주세진은 이미 제 인생에 로맨스라는 장르를 넣을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건 꽤나 삭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회색 눈이 예쁘게 휘었다.
“…….”
우리는 죽음을 곁에 둔 자들, 언제 죽을지 몰라 감정이 엮이는 건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를 좋아하는 게 쉬운가?
그 힘든 걸 하는 이를 싫어하는 게 가능한가.
“그거 힘들던데.”
적어도 난 그랬다.
싫어하는 건 힘들고, 좋아하지 않는 건 더 힘들었다. 나는 그랬다.
***
이예린이 예언을 했다. 그 말을 전해 주는 주세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 내용은 몰라도 그리 좋은 예언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녀는 나와 단둘이 대화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에 응했다.
방안은 커튼이 드리워져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동시에 밝았다. 모래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황금빛 기류 때문이었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별을 담은 눈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예린이 입을 열었다.
“선명해졌어요.”
“뭐가요?”
“류의 예언.”
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로 가 그 옆에 앉았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내 모습에 이예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나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상실을 겪을 거라고 했었죠?”
선명해졌다는 게 그거구나.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 내 반응에 이예린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왜 그렇게 태평해요?”
“글쎄요. 그냥… 예정된 일로 느껴져요, 이제는.”
더 이상 그쪽에 쏟아부을 여력도 없고. 손을 들어 황금빛의 기류를 헤집어 보았다. 수증기로 이루어진 구름을 만지는 것처럼 감각 없이 통과되었다.
나 하는 꼴을 지켜보던 이예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류. 괜찮은 거 맞아요?”
“안 괜찮아 보여요?”
그러면 그게 맞는 걸거다. 이예린의 낯이 굳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설핏 웃어 주었다. 예언이 선명해졌다는 건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수백, 수천 갈래의 가능성을 가진 그 많은 것들 중 상실의 실을 움켜잡은 것은 나일 테니까.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아스트로노미를 통해 보았던 운명의 실 자락은 정말 많았다. 세상을 전부 뒤덮을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이제 그 문제로는 실 한 가닥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 외에 선택지가 이제 없다.
“말하지 말아요. 지금 당신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든, 당신이 엿본 것이든. 나한테도 다른 사람한테도, 아무한테도 그거 말하지 말아요.”
“…….”
“이예린 씨가 그걸 다른 사람한테 말해 봤자 그 사람들이 누구일지 뻔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게 와서 묻겠죠. 괜찮냐고. 그럼 난 또 흔들릴 거예요.”
“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예요. 내가 마음먹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예요. 이 이상은 자신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이상 날 흔들 계기를 만들지 말아 줘요.
이예린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래서 난 부러 더 밝게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휘면 웃는 낯이 완성되었다.
날 끌어안는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마주 닿는 온기가 따뜻했다. 짧아진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
침대 옆 창문. 저 멀리 널따랗고 아직 해가 나지 않은 하늘에 점점이 박힌 것들이 보였다. 그것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져, 그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가 되어서야 그게 날벌레 따위가 아님을 알았다.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나는 결국, 살아남겠지. 그게 운명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
철이 든다는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날 혼내는 사람들의 말에 담긴 마음을 모두 이해하게 되면 그때 철드는 것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 철이 드는 거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 성격대로 살지 않는 순간 철이 드는 거라 하는 사람 또한 있었다.
어쩌면 그건 주인공보단 옆에서 손뼉이나 치는 조연들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맛볼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런 동화 속에서.
조용했다. 세상이 이전에는 이렇게 조용하다는 것을 몰랐다. 사람 없는 거리는 몇 시간 전만 해도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알록달록했던 것들이 쓰러져 가는 회색 무저갱이가 되었다. 이곳에 홀로 서 있다면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다.
그림자는 조용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바짝 쫓아왔고, 손을 뻗으면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자리를 넘보는 음험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 섞인 살덩어리가 떨어지고 울려 퍼지는 소음에 그제야 세상이 다시 요란스러워졌다. 무정한 학살자처럼 괴물들의 목을 베어 넘기는 내내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
무너지는 도시 너머, 건물 사이로 해가 드러나고 있었다. 옅은 주홍빛을 닮은 그것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이 부셔 손을 들었다.
입에서는 하이얀 입김이 흘러나왔지만, 뺨 위로 스며드는 온기는 따스했다.
이것이 옛날과는 다른 점. 꿈이 아니라는 증거.
구멍 난 것 주제에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며칠 전이였다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얀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얼굴에도 옷에도 모두 묻어나 있었다.
손을 들어 닦아 주려다가 내 꼴도 그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이 까매 티가 안 났을 뿐이었다. 제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바라보다 그것을 바닥에 끌었다.
길게 이어지는 붉은 선에서 눈을 떼고 입을 열었다.
“이 부근은 다 정리한 거지?”
내 물음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야 사람들이 보였다. 지치고 고된 얼굴들이 모두 붉었다.
하늘 위에선 여전히 불꽃놀이라도 하듯이 별들이 팡팡 터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상으로 하나씩 추락하는 것들이 맥없이 죽어갔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낫다. 그치?”
“…그렇죠.”
괴물이 전과는 약간씩 다르다고는 해도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어차피 저것을 죽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전과는 달리 체계는 확실히 잡혀 있었다. 어중이떠중이처럼 몰려다니는 것도 아니고. 인명 피해도 확실히 적고.
“찾았습니다!”
누군가가 외친 말에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남은 괴물의 흔적을 찾던 이들이 한곳으로 몰렸다. 나와 이호연 또한 그들의 곁으로 갔다.
힘 좋은 이들이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그림자를 이용해 그들을 도우니 몇몇이 내게 고개를 까닥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 그들에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피소 겸 벙커의 입구가 드러났다. 장치를 조작하니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례로 나오는 이들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으나 두려움은 없었다.
오로지 안도감뿐. 옛날이었다면 같은 사람을 봐도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정말 옛날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
입구로 올라오는 소리가 작았다. 그 안을 슬쩍 내려다보니 작은 꼬마가 사다리를 힘겹게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바로 아래에서 그런 아이를 불안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
제등을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낮추었다. 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작은 얼굴에 박힌 눈이 깜박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아이를 잡아 밖으로 꺼내 주었다.
“아.”
아이의 하얀 옷에 피가 묻은 것이 보였다. 내 손에 묻어 있던 것이 그쪽으로 옮겨간 거였다. 내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발견한 아이가 제 옷에 묻은 것을 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한 기분이었다.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미안. 묻었네.”
내 말에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고맙습니다!”
“…그래.”
사람들의 신원을 물어보고 적는 소리가 적막한 이곳을 울렸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따금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자신과 아이의 신원을 읊고 있었다.
몇몇 전직자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괴물이 튀어나오지는 않을지 둘러보고 있었다.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 쪽도 조용한 걸 보니 비행 가능한 괴물을 다 잡은 듯싶었다. 신원 확인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던 것 같던 아이는 마냥 기다리는 것이 심심했는지 어느새 주저앉아 돌을 쌓으며 놀고 있었다.
할 일도 없고 해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몇 살이야?”
“여섯 살!”
저에게 관심 준 것이 기뻤는지 아이는 방긋방긋 웃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신원 조회를 하느라 아직 바빠 보였다.
아이가 방심한 사이에 돌무더기가 쓰러졌다. 아이는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그것들을 다시 쌓았고, 그것은 다시 무너졌다.
“좀 더 납작한 거로 해야지.”
아이를 대신해 납작한 돌 하나를 집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로 이러고 놀아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울지 않고 착하게 있는 아이랑 노는 건데 괜찮겠지 싶기도 했다.
어느새 내 옆으로 온 이호연도 아이의 돌무더기 쌓기에 동참했다. 때에 맞지 않는 평화로움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평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정갈하게 쌓여 있던 돌무더기가 무너졌다. 돌 사이에 올라가 있던 조그마한 돌멩이들이 굴러떨어졌다. 아이가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요란스럽게 들썩이던 땅은 가뭄 난 것처럼 선이 쫙쫙 그어지더니 곧이어 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탱탱볼이 튕겨 나가듯 땅 위에 서 있던 이들이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
아이를 끌어안고 딛고 서 있던 땅을 벗어났다.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싱크홀 난 것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짧은 단말마 같은 비명이 울렸다. 활짝 열려 있는 벙커의 입구 안쪽에서 무언가 탕, 탕, 탕, 탕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건 안쪽을 이루는 철로 만들어진 벽이 우그러지는 소리였다.
품에 안긴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섞여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무너지는 땅에서 물러나려고,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림자를 이용해 사람들을 잡으려고 한 순간 땅이 들썩이며 기울어졌다. 시멘트 가루와 작은 돌들이 잔뜩 굴러다니던 바닥이 기울어지기까지 하자 균형감각과는 별개로 발이 미끄러졌다.
“……!”
몸이 추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무언가를 붙잡기에는 품 안에 아이가 안겨 있었다.
작은 아이가 이 높이에 떨어져 고스란히 제 몸이 부딪힌다면 어디 한 군데 잘못될지도 몰랐다. 뻗으려던 손을 다시 안으로 굽히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잔해로 남아 있던 건물 외벽에 어깨가 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아릿한 통증에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감겼던 눈을 뜨자 순간적으로 세상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흔들거리는 시야 사이로 내게로 뛰어오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류, 괜찮아요?”
“…괜, 찮아.”
날 일으켜 세우는 이호연의 손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히 세게 박았는지 어깨가 보통 욱신거리는 게 아니었다.
함께 박았는지 어질거리는 머리를 흔들고 어깨를 더듬었다. 내 손이 향하는 곳을 본 이호연의 낯이 굳었다.
훌쩍거리는 아이의 등을 도닥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 그래도 폐허 같던 곳이 더 심각해져 있었다. 재앙이라도 일어난 꼴이었다.
여기저기 앓는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을 꺼내느라 소란스러운 곳도 있었다.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감이 안 가는 모습이었다.
그건 이호연도 마찬가지인지 거칠게 머리를 쓸며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민간인을 다시 벙커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갑자기 왜 이 지경이 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다행히도 괴물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괴물 없이 가능한 현상일 리가 없었다. 어깨에 걸쳐 놨던 두루마기를 벗어 아이의 위로 덮었다. 작은 몸이 검은 옷자락에 감추어졌다.
“나와요.”
내 말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허둥거리던 이들이 뒤로 물러났다. 흔들거리는 시야를 바로잡고 다리를 들어 그대로 건물의 잔해를 발로 찼다.
그 아래에 깔려 있던 사람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함께 왔던 치유 계열 전직자가 다급히 치료하기 시작했다. 잔해 밑에 깔려 있던 다리를 보며 나는 익숙함을 느꼈다.
위험해질까 봐 품에 안은 아이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오정인은?”
내 물음에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안 좋아요. 지금 그쪽도 같은 상황이라 이쪽으로 못 온대요.”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공간계열 전직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거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무너지지 않은 튼튼한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하늘 조각 안의 자원을 섞어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일단 진정하시고….”
“어떻게 하냐고요!”
“살려 주세요, 제발!”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외치며 전직자에게 매달리는 민간인을 통제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심지어 혼란스러워하는 민간인들을 달래고 지시를 내려야 할 전직자들도 정작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함께 왔던 타 길드의 전직자 중 한 명이 내게로 와 어깨를 붙잡았다. 하필이면 조금 전 외벽에 부딪힌 곳이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통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하나요? 아니면, 아니면….”
“일단 그쪽부터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남자는 내 말에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깨달았는지 목을 움츠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니 아픈 티를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 안의 아이가 내 옷섶을 꽉 쥐었다. 살짝 목이 졸렸다. 내색하지 않고 아이의 등을 도닥였다.
“최대한 평평한 땅을 찾아서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요. 머리 위로 떨어질 만한 게 없는지 확인하고, 다친 사람이 있다면 치료부터 해요.”
“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남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인원을 데리고 한 번에 이동하는 게 더 위험해요. 돌발 사고가 날 확률도 높고.”
“…….”
“본인 길드 사람들 모두 통제할 자신 있나요?”
“…….”
남자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침묵이 잠시 이어졌지만,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눈빛 한 번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는지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의 일 순위는 민간인이에요. 그리고 이탈자를 챙길 만큼 박애주의자도 아니에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제 길드 사람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는 전직자들과 함께 민간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져 있던 이들은 누군가 통솔하기 시작하자 순순히 그들을 따랐다.
나는 전직자들의 기색을 살피며 내심 안도했다. 적어도 도중에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돌발 사고는 상황이 통제되지 않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거였다.
울다 지쳤는지 조용히 훌쩍거리는 아이를 다독이며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다들 낯빛이 어두웠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아이의 어머니가 보였다.
떨어지는 잔해에 맞았는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무시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간절해 보였다. 서둘러 아이의 어머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보이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희게 질렸다가 내 품에 안긴 아이가 두루마기 사이로 얼굴을 내밀자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이의 끌어안은 채 손이며 얼굴을 살펴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흘러내린 두루마기를 다시 아이에게 잘 덮어씌워 주었다.
“…….”
왼쪽 손을 올려 꾹 쥐었다. 어깨의 욱신거림이 손까지 타고 흘렀다. 아이를 감싸느라 정작 내 몸은 버린 꼴이었다. 어쩔 수 없었음을 알지만 곤란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선.
땅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전처럼 땅이 갈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땅을 울리던 진동은 마치 이 밑에서 무언가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이동했다.
발끝으로 그것을 더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땅과 건물을 무너트리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환해지던 세상에 다시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건 단순히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온 탓이 아니었다. 밝게 비추던 해를 무언가가 가렸다.
그림자에서 천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는 제등을 손에 쥐며 숨을 내쉬었다. 피로 들어찬 것처럼 오로지 새빨갛기만 한 수 개의 눈동자가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시리게 푸른 빛을 내는 은색의 금속이 그것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움직였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각자 본인 길드에 연락 넣어요. 지원을 보내 달라고.”
“그건, 우리끼리는 저 괴물을 죽이지 못해서인가요?”
“아뇨.”
내 대답에 여자는 조금의 기대감을 담아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기대감을 허물었다.
“도망 못 가니까 부르라는 거예요.”
실망감으로 물든 얼굴이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당신이 있더라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 사람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함께 도망치는 쪽이 아니었다.
“내 몸은 하나예요. 괴물 상대하면서 날뛰는 저것 밑에 있을 사람 전부를 구하는 재주는 없어요. 그렇다고 저걸 두고 당신들을 데리고 도망만 가는 것도 안 될 일이죠.”
“…….”
낯빛이 굳는 그녀를 보다 모여 있는 사람들 쪽을 가리켰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민간인을 구출하고 괴물들 정리하느라 이미 다들 지쳤어요. 거기다가 조금 전의 일 때문에 부상자도 많아요. 내가 저 괴물을 상대하는 동안 눈먼 공격이 날아든다면 이 중에 그것을 피해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본인들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임에도 그녀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이 주는 씁쓸함에 매몰되었을 뿐이었다.
“당신은, 같이 안 가나요?”
“…….”
그녀가 질문하는 사이에도 괴물은 먹이를 노리며 수 개의 눈을 굴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건물 잔해 뒤에 숨어 괴물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난 도망치는 쪽이 아니에요.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죠.”
“…….”
“나랑 같이 다니는 조건으로 최우선 명령권이 내게로 넘어온 거 알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을 살피던 것을 멈추고 몸을 틀자 모두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내가 할 건 저 괴물을 사냥하는 것.”
말을 마치곤 손을 뻗어 내 앞에 선 여자를 가리켰다.
“당신들이 할 건 저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
“…….”
“도망치는 것도 못 하겠다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가장 이상적인 해결법은 오정인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이쪽으로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저들에게는 도망치는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망쳐 봤자 금세 잡힐 것이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무리 최우선 명령권이 내게 있다고 해도 저들은 내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저 괴물 아래에서 버티라는 말에 곧바로 ‘네’라고 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거였다.
어느 쪽이 살 확률이 더 높을지.
전직자들은 자신들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몸을 낮춘 상태로 아주 살짝 목을 빼 하늘을 채운 괴물을 보았다.
“하나만 말해 주세요.”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던 치유 계열 전직자가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서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우리끼리 버틴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나는 그의 질문에 기다 아니다 답할 수 없었다. 하나는 희망 고문이 될 것이고 하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기를 죽이는 짓이었다.
아직도 어질거리는 시야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을 골랐다.
“…제가 최대한 시선을 끌 거예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게 유인도 할 거고요.”
하지만 그래봤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거대한 뱀의 현상을 한 저것에게는 문제 되지 않는 것일 테니까. 내게 질문한 이도 그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람들은 도망치는 쪽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 주는 입장인 전직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몸을 낮춘 상태로 그들은 천천히 제 몸을 가다듬었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로 이루어진 뱀의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눈 부셨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도 시리게 빛나는 저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저게 절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종류의 괴물이라는 것 또한.
붉은 수 개의 눈을 가진 괴물의 머리 위로 하얀 것이 휘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너무 멀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게이트 역할을 하는 하늘 조각이 없어도 언제든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 에드워드 로거스의 기억 속에 있던 남자.
누군가가 히죽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웃음은 울음소리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