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시안룰렛 (25/34)

#러시안룰렛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제법 풍요로웠다. 팅커벨 사건에서 부서진 건물 같은 건 없었고 거대 카멜레온이 부숴 먹은 도로는 애저녁에 복구됐다.

차가운 유리 벽에 이마를 툭 대고 바깥을 구경했다. 아무리 이상한 일을 겪고 아카샤의 괴물 같은 것이 튀어나와도 사람들은 애써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붉은색과 초록색이 세상을 덮는 날이 성큼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설레기에는 내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

어젯밤, 바타르에게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그는 본인은 잘 있으며 생각할 것이 많아 연락이 늦었다고 말했다.

또한,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엇이 미안하냐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에게 묻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오늘 아침 뉴스에서 몽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연속되는 아카샤의 괴물들의 공격과 타국과 비교하면 확연히 전직자의 수가 적은 몽골의 특징.

그 둘이 엮임으로 인해 몽골은 나라의 기능을 잃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무정하다 싶은 얼굴로 남의 이야기를 하던 앵커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도와달라고 하지.”

그래서 나랑 친구 하자고 했으면서.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왜 그랬을까. 도와달라고 했다면 도와줬을 것이다.

푸른 늑대와 하얀 사슴의 이야기를 하며 내게 손 내밀던 남자는 끝까지 내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나마 희소식은 페이즐리 오스틴이 깨어났다는 거였다.

영상 통화로 보게 된 그녀는 첫 만남에 비해 핼쑥해진 얼굴로 에드워드와 함께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중에 놀러 오라고 말했다.

멍때리는 내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범인은 이호연이었다. 그에게서 음료를 받아 들고 소파에 늘어져라 기댔다.

내 옆에 쪼르르 앉아 있던 꼬마 도깨비들이 나를 따라 소파에 기댔다. 건너편에 앉은 이호연 옆에 있는 꼬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호연이 꼬마 도깨비들 앞에 놓인 책을 보며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이 한글 배우기 상급?”

내 옆과 그의 옆에 앉은 애들 거였다. 책을 들고 살펴본 이호연이 그것을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두 장 풀었네요.”

“두 장이나 푼 거야.”

원래는 한 장도 못 풀었으니까. 정확한 문장 쓰기 위주의 우리 아이 한글 배우기 상급을 원래는 풀지 못했다. 단어 위주의 중급까지였지.

꼬마 도깨비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 감정 표현을 한 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저것을 다시 꼬마들에게 내밀었다.

전과는 달리 꼬마들은 그것을 풀었다.

왜? 무엇이 달라졌기에. 꼬마 도깨비들이 성장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뜬금없었다.

여전히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단순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그날 분명 웃었고.

눈싸움하는 것처럼 꼬마 도깨비들을 바라보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어봤자 꼬마 도깨비들은 나는 몰라용, 아무것도 몰라용 하는 얼굴로 도리어 내게 되묻는 것처럼 빤히 바라볼 게 뻔했다.

꼬마 도깨비들이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이호연과 나란히 복도를 걷는 내내 내 신경은 목에 걸린 하늘 조각에 쏠려 있었다.

조각에 그려진 마법진이 옅어졌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다.

손에 쥔 컵 안의 음료를 빨대로 빙글빙글 돌리는데 복도 너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주세진의 비서님이었다.

무슨 일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쪽을 보았다. 두리번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던 비서님이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내 쪽으로 뛰어왔다.

볼일이 나였나?

“……?”

“지금, 지금 당장 도망가세요!”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숨을 고르던 비서님의 낯이 굳었다. 그것을 보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요?”

“…로웰 콕스.”

내가 떨어트린 컵을 옆에 있던 이호연이 받았다. 나는 질색하는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때 그 바닷가에서 날 보며 웃던 로웰 콕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류를 만나러 왔다고 했습니다. 일단 길드장님이 시간 끌고 있기는 한데….”

“저 도망갈래요.”

“가세요. 어서.”

어. 늦었나? 곧바로 이호연의 손을 잡고 도망가려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몇 발자국 걷다가 멈추는 나를 비서님이 의아한 얼굴로 보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곤란한 낯으로 웃어 주었다.

“늦은 것 같아요.”

비서님은 내 말에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뒤로 비즈니스적 미소를 덧씌운 얼굴의 로웰 콕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쪽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전 별로.”

“여전하시군요.”

내 바로 앞에 선 로웰 콕스를 눈에 담으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전과는 달랐다.

눈 밑에 자리 잡은 진한 다크서클 때문에 퀭해 보였다. 손은 수전증처럼 살짝 떨리고 있었고, 살이 내린 얼굴에는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그리고 전보다 더 위험스러워진 저 눈. 전에는 대충 남들 보기에 문제 될 것 없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광신도를 연상케 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입을 뗐다.

“미국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여기 계세요?”

“아, 그거. 직장을 관뒀거든요.”

“…왜죠? 좋은 직장인 것 같던데. 권력도 있고 직급도 높고.”

“하지만 나라에 묶여서야 당신은 온전한 나의 신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

지금 뭐라고…. 당황하는 나를 보며 로웰 콕스가 웃었다. 내게 뻗는 손을 이호연이 제지했으며 어느새 나타난 주세진이 로웰 콕스의 어깨를 짚었다.

“길을 잃으셨나 보군요.”

“둘이서 대화하고 싶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로웰 콕스 씨.”

“시간을 내주세요. 둘이서 대화하고 싶습니다. 그래 주실 거지요?”

주세진의 말을 전부 무시한 로엘 콕스는 오로지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슬쩍 주세진을 보니 그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나 또한 이 사람과 단둘이 오붓하게 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로웰 콕스에겐 물어보고 싶은 것은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만약 대화한다고 하면 내게 무슨 이득이라도 있나요?”

내 물음에 로웰 콕스의 목이 기울어졌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보는 얼굴이 섬뜩했다. 고개를 다시 바로 한 그녀가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주세진과 이호연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건….”

“단둘이 대화하고 싶습니다.”

푸른 빛 서린 은색의 철로 만들어진 총구. 주세진의 낯이 굳었다. 눈이 마주친 그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나를 뚫어져라 보는 로웰 콕스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한국은 아직 총기 소지 금지 국가인데.”

“의미 없는 법을 아직도 붙잡고 있군요.”

“그 의미 없는 것이 많은 의미를 만들기 때문이죠.”

내 말에 그녀는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로 관심 없어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 당신은 제법 관심이 많지 않나요?”

자신만만하네.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관심이 있든 없든. 단둘은 안 되는데요. 제가 낯을 좀 가려서.”

“…….”

“단둘이 아니면 대화는 해 줄 수 있는데. 아니면 난 그쪽이랑은 대화도 안 할 거거든요.”

“왜죠?”

로웰 콕스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본인이 얼마나 내게 괴기스럽게 굴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잊은 건지, 아니면 정말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건지 로웰 콕스의 의중을 가늠하며 새삼스럽게 쭉 위아래로 살폈다.

“…….”

옛날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저렇게 변한 걸까. 자신을 훑어보는 나를 보며 로웰 콕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장소는 제가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데요. 모르는 장소에서 대화하면 긴장해서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 것치곤 타국에서도 말 잘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때보다 더 낯가린다고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단둘이 아니라면 괜찮은 것 같았다.

애초에 저쪽에서 안 된다고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아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 같았다.

“어디서 대화할 건데요?”

“제가 모시죠. 옆에 계신 분과 리블의 길드장님도 함께 가실 겁니까?”

“네.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다수가 아는 사람이어야 심적으로 편하네요.”

로웰 콕스는 꺼냈던 총을 다시 재킷 안에 넣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주세진에게 속삭였다.

“강유진 씨한테 우리 추적 좀 해 달라고 하세요.”

“이미 연락 넣었어.”

행동력 무지 빠르네. 불안한 얼굴로 우리를 보는 비서님에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옥 건물을 나온 우리는 로웰 콕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강유진의 신나는 카트라이더의 강렬한 기억과 다른 안전한 운전 솜씨였다.

“그런데, 운전면허가 국제 운전면허인가 봐요?”

“글쎄요.”

“범죄네요.”

“사실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조수석에 앉은 주세진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일단 내 옆에 앉은 이호연은 눈빛만 봐도 경계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달랐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로 떠들썩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갈수록 유동인구가 줄었으며 건물의 수가 줄고 끝내는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은 곳으로 변했다. 도로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비탈길을 달리며 로엘 콕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당신을 신이라 부른 점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으시군요.”

“노아 이스벨라에게 들은 것이 있어서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분이 있었네요.”

“…….”

차가 점점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우거진 나무들이 햇빛을 가렸다. 룸미러를 통해 로웰 콕스와 눈이 마주쳤다.

“하늘이 무너지고 제가 깨달은 진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금만큼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진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세상이 온전했을 때의 이야기였죠.”

“…….”

“절대적인 가치는 바로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힘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재능이 없었거든요.”

“…그런 당신의 깨달음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나다, 이 말인가요?”

“네. 가장 강하고,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절대적 존재. 노아 이스벨라가 말한 테오그라젠스도 왜인지 당신은 이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예언가 해도 되겠네. 운명의 실 가닥 중엔 내가 테오그라젠스를 죽이는 결과도 있었으니 그녀의 예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미묘한 내 얼굴을 보며 로웰 콕스는 눈을 깜박이다 휘었다. 웃는 눈이 나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꽤나 섬뜩한 일이었다. 그 대상이 내가 탄 차의 운전사라면 더욱더.

“앞 좀 보면 안 될까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기요?”

“아무리 강하더라도 당신 또한 평범한 사람인데…. 그 강함이 과연 영원할 것인가.”

“…….”

차가 멈췄다. 로웰 콕스가 운전석을 열고 나가더니 뒷좌석을 열어 나를 보았다.

“강함의 기준은 완벽한 무기인가, 완벽한 사람인가. 저는 그 두 가지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답니다.”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차에서 나왔다. 이호연과 주세진도 차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 우리를 산속에 숨겨진 컨테이너 박스로 안내하며 그녀는 계속해 이야기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총의 물질이 무척이나 흥미롭고도 나를 설레게 했습니다. 마치 당신을 처음 봤던 날 느낀 감각과 비슷했죠.”

싫다, 정말. 점점 구겨지는 내 얼굴을 봤음에도 로웰 콕스의 얼굴은 연신 웃는 낯이었다.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소파와 테이블만이 존재했다. 단조롭다 못해 썰렁한 구성이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음에도 로웰 콕스는 우리 앞에 차를 내놓았다.

찻잔을 들고 그 안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그것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세진의 잔과 로웰 콕스의 잔을 잡아 두 개를 서로 바꾸었다.

“드셔 보세요.”

“…이런. 아쉽군요.”

로엘 콕스는 제 앞에 놓인 주세진의 잔을 들어 바닥을 향해 기울였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가 차가운 철 바닥 위로 웅덩이졌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걸까, 이 사람은.

나는 이호연의 찻잔을 들어 뒤로 던져 버렸다. 내 찻잔은 로엘 콕스의 뺨을 스치며 벽에 부딪혀 깨졌다.

“허튼짓하지 말고. 우리 대화나 하죠?”

내 말에 로웰 콕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재킷에 넣어 둔 총구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로웰 콕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있어 당신은 너무나 완벽해 보였습니다. 특히 아카샤의 괴물을 실제로 보게 된 날 제 불안감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

“허상인 줄로만 알았던 신이 눈앞에 존재한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 아시나요? 그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답니다. 그래서 최고의 무기나마 만들고 싶었지만….”

로웰 콕스가 총구 위를 손으로 훑었다.

“불행히도 그건 안 되더라고요.”

“그 총 어디서 났어요?”

“…이것을 제게 준 자의 이름은 스티브. 신기한 자였습니다. 몸 자체가 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이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더군요.”

“그럼 그 사람을 신으로 생각하면 됐을 텐데요. 왜 내가 당신의 신이죠?”

내 물음에 로웰 콕스는 정말 그걸 모르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강함과 기준이 조금 달랐으니까요. 내 눈에는 보입니다. 그자의 강함은 온전한 본인의 강함이 아닙니다. 그자는 단단한 것에 가깝지 강하다는 것은 아니지요.”

“기준이 참 명확한 신앙이네요? 정작 그쪽이 신이라고 하는 나는 평범한 사람인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나의 신을 모욕하는 말이에요.”

“…….”

노아 이스벨라가 그런 말을 했다. 로웰 콕스의 신의 얼굴은 나일지언정 그 신의 이름은 무엇일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 말뜻을 지금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어떤 신을 믿느냐는 어쩌면 도박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마지막까지 남아 나를 구원할 자라 믿습니다.”

“…만약에.”

그 도박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라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는 로웰 콕스에게 그런 것을 물으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의 신 노릇을 하기는 싫었다.

“난 당신의 신이 아니에요.”

“당신은 나의 신이에요.”

“아니라고.”

“당신은 나의 신이에요. 나를 구원할 거야. 나를 다시 그 진창에 빠트리지 않을 거야. 나를….”

“난!”

“…….”

로웰 콕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라 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말했다.

“당신을 구원하지 않아. 과거에도 그런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얇은 가면 같던 그녀의 웃음에 금이 갔다.

머리를 헤집으며 뭐라 말하던 그녀가 테이블 위에 놔둔 총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곧바로 그림자로 로웰 콕스의 목을 찌를 듯이 겨눴다. 하지만 로웰 콕스의 총구가 향한 곳은 그녀 자신이었다.

“왜요?”

“…….”

“왜?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럼 나는 누가 살려 줘요? 그럼 나는 누가 살려 줘? 내가 왜 살았는데…. 왜. 왜. 왜. 왜.”

주세진이 우리보고 물러나라 말했다. 우리의 앞을 막은 주세진의 손에는 어느새 품에서 꺼낸 작은 맥가이버 칼이 들려 있었다.

흐릿한 형광등 아래에서 빛나는 칼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구원받을 생각 하지 말고 스스로 살 생각을 해요.”

“그게 됐으면 신에게 매달려 볼 생각을 했을까요?”

“…….”

그것도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팔자에도 없는 신 노릇을 해 줘야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앞으로 걸었다. 주세진과 이호연이 그런 나를 제지했지만 그런 둘에게 고개를 저었다.

로웰 콕스의 바로 앞에 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날 봐요.”

“…….”

“당신 눈에 내가 그렇게 신적인 존재로 보여요? 나는 누구를 구원하거나 할 정도로 선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에요. 난…. 난 그냥 당신처럼 기어이 살아남은 사람일 뿐이에요.”

그게 진실이다.

내 말에 로웰 콕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이없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허무에서 비롯한 탄식 같기도 했다.

헛헛한 웃음을 흘리던 그녀는 조금 지친 낯을 들어 말했다.

“하…. 하하…. 내가 우습죠?”

“…….”

“왜, 그런 말을 해요? 나처럼 그냥 살아남은 사람일 뿐이라고 하면… 그럼 난 어떻게 하라고.”

그녀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두 손으로 본인의 얼굴을 마구 헤집으며 그녀가 말했다. 번들거리던 눈은 멍하게 풀려 있었다.

“나도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

“당신도 옛날에 신한테 매달려서 살려 달라고 외친 적 있나요?”

“글쎄요.”

“난 많아요. 그런데 어떤 신도 답해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이 나타난 거야. 아카샤를 없앤, 제멋대로 날뛰던 전직자들이 하나의 목표를 갖고 움직이게 만든 당신이!”

“…….”

“내 눈에… 그 강함이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당신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모를 거야.”

주세진이 내게 듣지 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그의 말을 무시했다. 로웰 콕스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신이 있다면… 당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 신이 아니라 하네요.”

“나는….”

“그럼 나는 어떻게 하죠?”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쉰 로웰 콕스가 소파 위로 털썩 앉았다. 뽀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발에 채는 총을 다시 집어 든 그녀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웃었다.

“당신이 내 신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럼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

주세진을 옆으로 밀치고 앞에 있던 테이블에 발을 걸어 들어 올렸다. 로웰 콕스 쪽으로 기울어지는 테이블 위로 구멍이 뻥뻥 뚫렸다.

소파가 밀리는 소리와 총소리가 컨테이너 박스 안을 울렸다. 얼얼한 귀를 어루만지며 그녀를 보았다.

그림자에 붙들린 로웰 콕스의 총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며 그런 그녀의 목에는 어느새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 주세진의 맥가이버 칼이 닿아 있었다.

주세진은 화가 난 표정으로 로웰 콕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할 생각하지 마시죠.”

그의 말에 로웰 콕스는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맥없는 목소리로.

“…그러죠.”

총알은 테이블을 뚫고 그 뒤편의 벽을 뚫었다. 그것을 눈으로 살피다 다시 로웰 콕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어딘가 멍하고도 허탈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 도박은 틀렸나 보네요.”

“…그 스티브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이 와중에도 내게서 정보를 빼가려고 하는군요. 뭐…. 좋아요. 알려 드리겠습니다.”

눈을 꾹 감았다 뜬 로웰 콕스는 입꼬리만 끌어 올린 얼굴로 말했다.

“그자와 거래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일차원적인 강함이 없다면 죽던 시대는 끝나고 우리는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되었죠. 사회에서의 강함은 권력으로도 이룰 수 있었죠.”

“…….”

“그래서 저는 권력을 차지했고, 그것이 충족되자 일부나마 일차원적인 강함. 즉, 힘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이 무기였다는 거구나. 미국이 유난히 무기 산업에 공을 들인 이유에는 이 사람의 입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바람을 국가의 것으로 만들어, 로웰 콕스는 나름 자신의 꿈에 다가갔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 봤자 로웰 콕스는 평범한 사람. 그런 그녀가 어떻게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를 찾아 그 금속을 손에 얻었는가.

그게 아니라면 나오는 결과는 하나다.

“스티브, 그 사람이 먼저 접근했나요?”

“예. 제 욕구를 알고 있더군요. 재능 없는 제가 강해질 방법은 무기였습니다. 그들은 제게 본인들이 이 세상에 섞여 살 수 있는 돈과 신분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이란 건…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

“알고 계셨군요. 예. 맞아요. 나는 제법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돈과 신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나의 신은 당신이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니까요.”

마티의 능력은 공간. 다윈은 정확하지 않으나 괴물을 만들어 내고, 스티브는 기이한 금속 재질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이렇게 되면 아직까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도는 한 명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나를 보며 로웰 콕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끝까지 제게는 별 관심이 없군요.”

“…사람들은 애초에 타인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나의 신이니까요.”

“그렇다면 더더욱 나는 당신을 보지 않아요. 나는 신이 아니며 당신의 신이 될 생각도 없으니까.”

또한 그 신이라는 것들은 애당초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붓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수많은 무언가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되어 기억에 남고 그것의 눈에 들기를 바란다면… 자신을 놓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내 말에 얕은 웃음을 흘렸다. 무엇을 바라고 나와 대화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림자에 묶인 몸을 비틀어 보다 소용없는 것을 깨달았는지 맥없이 축 늘어졌다.

“…그쪽이 뭘 바라고 나를 찾아왔는지는 궁금하네요.”

“그것 참, 자비로운 물음이군요.”

“비꼬지 마세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에 설설 기며 살았던 내가 이번에는 신의 비호 아래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지.”

“…….”

‘이번에는’? 왜 이 말이 이렇게 걸리는 거지. 눈살을 찌푸리는 내게 작은 속닥임이 들렸다.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라고.

낯을 찌푸리다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죠?”

내 물음에 축 처져 있던 로웰 콕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웃음을 찾는 듯, 설움을 찾는 듯 움직이던 몸이 뚝 멈췄다.

고개 든 광신도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죠. 그날은 성인의 탄신일로 모두가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까요?”

“…….”

“하얀 눈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온통 새빨개질 크리스마스에는 사람들이 울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찾아 헤매겠군요.”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오랜 고객에게 주는 서비스라며 그자가 일러 주더군요. 그런데 당신은 내 신이 아니라 하니…. 이제는 모르겠군요. 난 다시 한번 살아남을 자신이 별로 없거든요.”

축 처진 머리를 따라 그녀의 머리카락이 축 처졌다. 그 사이에서 언뜻 보이는 눈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손을 휘저으니 로웰 콕스를 붙잡고 있던 그림자들이 사라졌다. 바닥에 주저앉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일부러 날 여기로 데리고 온 거죠?”

“…나만, 나를 제일 먼저 구원해 주기를 바랐으니까요.”

“허튼짓했네요.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뒤도는 나를 향해 로웰 콕스가 소리쳤다.

“한 번만!”

“…….”

“그냥 한 번만, 내가 너의 신이노라.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이 모든 감정을 떨쳐 내고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런 말을 해 주면 안 되나요?”

“말하고 나면 뭐가 달라져요?”

“…….”

“나한테, 신한테 매달려 빌어 본 적 있냐고 했죠? 있어요. 하늘이 무너지고 전직도 못 한 상태에서 당장 죽기 직전까지 몰렸을 때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울었어요.”

“…….”

“근데 그거 소용없더라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허상을 상상하고 혼자 위로하는 거였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왜 내가 신이기를 바라는지.”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길 잃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던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그게 무슨…. 나는, 당연히….”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비틀린 것들을 내뱉었다.

“당신이 말하는 구원이 정말 구원이라고 생각해요? 난… 아닌데. 당신도 아닌 것 같고.”

내가 신을 가장 많이 찾았을 때는 무력하고 약해 죽거나 죽이거나의 기로에 섰을 때였다. 살아남으면 눈물이 났다.

누가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 주기를 바랐다. 용서받은 가해자가 되어 뻔뻔스럽게 살고 싶었다.

이렇게도 이기적인 나를 두고 신이라니. 비틀린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용서받지 못했기에 내 기억을 지웠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로웰 콕스에게 진정 필요한 신은 본인을 지켜 주는 무력의 신이 아니었다.

죄책감에 짓뭉개지고 용서 구할 상대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처음부터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존재를 원하는 거였다.

주세진이 내 어깨를 잡았다. 로웰 콕스와의 대화를 단절시키려는 그를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인제 와 전직자들이 민간인들을 자진해 구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그때. 내가 죽인 모든 것들을 용서받기 위한 몸부림.

그래 봤자 누가 용서해 주는 것도 아니지만 기분이나마 용서받는 것 같은 착각 속의 안도.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는, 다른 이들의 인정 섞인 눈빛에서 얻는 저급한 만족감.

“…….”

사실, 테오그라젠스니 뭐니 그렇게까지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신이니 뭐니 나랑 뭔 상관이냐 싶었다. 솔직한 말로는 무시하고 싶었다.

나는 대단하신 의무감도 없고, 정의도 없었다.

만약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테오그라젠스가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면 나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 사후 테오그라젠스가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했다면, 그 또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테오그라젠스가 나타났고. 나는 로웰 콕스의 말 대로 가장 강하기에 무료한 신을 알아내고 저지하려는 것뿐이었다.

그게 가능한 것이 나밖에 없으니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용사나 영웅은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살고 싶은 누군가의 이야기와 과정일 뿐이었다.

나 또한 다를 게 없었다.

그로 인해 상관없는 이들에게서 용서를 받고, 과거의 일은 과거로 묻힌 채 나 스스로가 느끼는 수치심과 죄책감은 영원히 묻혀,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이… 그렇게 살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구원하지 않는다. 내가 누굴 용서할 처지가 아니었다. 난,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을 하기엔 난 너무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요.”

주저앉은 저 사람과 나는 그리 다를 게 없었다.

“…돌아가요. 무슨 일이 난 것 같으니까.”

신을, 자신을 용서해 줄 사람을 잃어버린 이를 놔두고 그곳을 나왔다. 둥실거리는 구름을 들고 서 있던 오정인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기 전 열린 문틈 사이로 떨궈진 총을 잡아 장전하는 로웰 콕스를 보았다. 로엘 콕스는 말했다. 신을 정하는 것은 어쩌면 도박과도 비슷하다고.

나를 신으로 택해, 로웰 콕스의 일생일대의 도박은 실패했다. 로웰 콕스에겐 잔인한 결말이고, 또한 그래서 안타깝지만, 그건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당장에 달려가 저 총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그 질문에 가장 올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남의 선택에 함부로 끼어들어 헤집은 내가 책임질 것들에 대해 나는 또다시 그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힐 것이 뻔했다. 잘못한 것, 옳은 것. 옳은 것, 잘못된 것.

스스로 끝내겠다 하는 이를 말리는 것이 마냥 옳은 일일까. 그 뜻을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하는 것이 잘못되기만 한 걸까.

오정인의 손을 잡고 일그러지는 공간의 틈새로 들어가는 순간 어렴풋이 총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도박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묻지 못한 물음의 답을 나는 끝까지 모르고 싶었다.

***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사옥의 옥상으로 변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난간을 향해 뛰어갔다. 예쁘게 장식되었던 커다란 트리가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넘어지고 짓밟혔다. 비명 소리에 귀가 아팠다. 멀미라도 나나.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손끝만 움찔거릴 뿐 움직이지를 않는 나를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내 귓가로 그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둘이서 도망갈까요?”

“…어디로?”

“아무 데나.”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물끄러미 저 아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실없는 소리. 이제 그만 움직이자.”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는 나를 이호연은 순순히 풀어 주었다. 그런 그를 돌아보며 나는 흐리게 웃었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제등을 들고 등에서 흘러나온 푸른 불꽃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박살 난 도로의 틈을 헤매며 괴물을 피해 뛰어다니는 사람이 보였다.

불 위에서 뛰어내려 그 괴물의 머리를 류로 찍어 눌렀다. 피 묻은 제등의 끝을 살펴보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사람을 보았다.

“살… 살려 주세요, 제발….”

“저기 건물로 들어가세요.”

“저 좀,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저 죽을지도 몰라요!”

바로 코앞인데. 선명하게 살려 달라 외치는 다른 사람의 비명도 들었을 텐데. 뭐라 말을 할까 하다가 귀찮아져 입을 다물었다.

주저앉아 손만 뻗는 사람을 그림자로 잡아 일으켜 건물로 데려다주었다. 로비에는 리블의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다시 나가 보려는 나를 그 사람이 붙잡았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밖에 괴물도 많고, 언제 괴물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저 사람들도 전직자예요. 리블에는 공략대 말고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전투 가능한 전직자들을 많이 뽑아 놨으니까….”

“저 사람들이 당신보다 더 강한 건 아니잖아요! 그냥 여기 있어요. 여기가 제일 사람 많고, 공격당하면 제일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고….”

“…….”

지금 내 앞에서 사람의 목숨을 재는 건가? 이 장소의 숫자는 몇, 저기는 몇. 할 줄 아는 건 본인 목숨을 구걸하는 것밖에 없으면서 다른 사람 목숨은….

아, 짜증 나.

신경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사고라도 치는 거 아닐지 걱정되었다. 거북한 속을 참고 나를 붙드는 이에게 말했다.

“놔주실래요?”

화내지 마.

“그러지 말고….”

“놔주세요.”

제발 화내지 마.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나를 보며 그 사람은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자의 눈이었다.

무력하고 약한, 도움만을 바라야 하는 사람. 잠시 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건물을 나왔다. 속닥임이 들렸다.

화가 나니?

“별로.”

이제는 답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내 반응에 상대는 키득거렸다.

아닌 것 같은데. 환멸 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

“참견하지 말고 속닥거리지도 마.”

나한테 말 걸지 마.

이 사태를 빠르게 진정시킬 방법을 알려 줄까?

“…….”

내 어깨에 걸쳐져 있던 양팔이 움직였다. 턱을, 뺨을 톡톡 치고 지나간 하얀 손이 내 눈을 가렸다.

네가…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면, 나와 비형랑의 약속이 이행된다면 다 해결될 거야.

“…….”

시끄러워. 애초에 그건….

그러니 인제 그만 받아들이렴. 너도 알잖아. 우리의 약속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사실을 외면해 봤자 네게 좋지 않아.

좋지 않다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렇게 미칠 것 같은데 이후에는 어떨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약속이라고 해 봤자 뻔했다. 그것을 입에 담는 것조차 싫었는데 지금은 의외로 쉽게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푸른 불꽃.”

그것은 내 말에 긍정했다.

맞아. 푸른 불꽃. 도깨비들의 왕이 자신의 격을 스스로 버리며, 귀신도, 산 것도 아닌 것이 된 이유. 그건 나를 위한 자리야.

“왜…”

도대체 왜 그딴 약속을 한 거야. 네가 나라면, 정말 네가 내 전생이니 뭐니 그런 거였다면….

…약속했거든. 훗날 직접 알아내 보렴. 우리의 약속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내 눈을 가리던 손이 사라졌다. 살짝 멍한 상태로 눈을 끔벅거렸다. 내게로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늘어지는 몸을 따라 손에도 힘이 풀렸다. 이대로 눈을 감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손끝에 간신히 매달린 제등을 다시 들어 올렸다.

머리를 빙빙 돌리며 수십 개의 팔과 다리로 뛰어오는 괴물의 머리를 그림자가 잘라냈다. 머리가 잘려나가도 멈추지 않고 달려오기에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잘라 버렸다.

꿈틀거리는 잔해를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일단, 보이는 괴물을 죽이고 사람이 보이면 가까운 건물로 대피시키고.

가능하다면 리블 사옥에 데려다주고, 그리고, 그리고….

매달리면 달래고, 설득하고, 어리광을 받아 주고. 그 일방적인 기대심에 또 나는 죽어가고.

“…….”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하지? 잘 모르겠다. 애당초 이 짓거리를 하기 싫어 도망갔던 거 아닌가?

그럼 나는 되게 모순적인 사람이네. 용서받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 돕다가 힘들다고 도망가고, 다시 일을 하다가 지금처럼…. 그럼, 또 도망가나?

“…와. 나 진짜 미쳤나 봐.”

지금 무슨 생각 한 거지? 제등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류는 무력하게 땅을 굴렀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여우 때문인가? 환각과 환청이 사실은 정말 내가 미쳐서 보이는 잔상인 건가? 생각할수록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정신 차려야 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해서도 의문을 가져서도 안 된다. 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뭘 어떻게 행동하든 저들 원하는 대로, 입맛대로 행동하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누가 억지로 내 감정을 쥐어짜 내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거슬렸다. 삭였던 감정들이 막힌 둑이 터진 것처럼 급작스럽게 몰려들었다.

소리가 들렸다. 지긋지긋한 환청 같은 것이 아닌 선명한 산 사람의 목소리였다.

“살려 주세요! 저기요! 살려 줘! 제발!!”

“…….”

움직여야 하는데 몸이 늘어졌다. 왜 그 여자는 마지막까지 사람을 건드려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살려 달라는 건,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자들이 하는 말이었다. 이젠 모두가 내 얼굴만 보면 그 소리를 할 것이다. 그건 익숙하고도 여전히 숨이 막히는 소음이었다.

그 살려 달라는 소리가 이젠 듣기 싫은 것 같다는 게, 제일 미칠 것 같은 점이었다. 이젠 모르겠다. 이게 내 감정인지, 그 여우가 헤집어 놓은 감정인 건지.

날 향해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그의 뒤엔 새카만 갑각류의 외피를 두른 괴물이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귀가 먹먹했다. 남자가 외쳤다. 살려 달라고. 아. 구해 줘야지. 손을 뻗었다. 괴물의 몸에 푸른 불이 붙었다. 제 뒤의 괴물이 죽은 것도 모르고 남자는 계속해 뛰다가 넘어졌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뒤를 돈 남자가 제 뒤의 괴물이 불에 타고 있음을 확인하며 안도했다. 앓는 소리를 내고, 나를 노려보았다.

“왜 빨리 안 도와줘요! 그리고 뭘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 재밌어? 재밌냐고!”

“…….”

“사람이 살려 달라고 하는데, 그걸 다 보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지금 나더러 사과라도 하라는 건가. 나더러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어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는 이제 손을 들고 내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다 귀찮다. 정신이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짜증 나. 머리가 아팠다. 모르겠다.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이 움찔거리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어?”

뺨에, 뜨거운 것이 튀었다. 나를 향하던 손가락이 없어졌다. 남자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끔벅이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확 들었다. 꿈에서 깬 것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급작스레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 뭐였지? 울며 소리 지르는 남자를 놔두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바닥에 박힌 총알 하나가 보였다.

“…일단 저기 길드 건물로 가세요. 치유 계열 의료진들 많아요.”

울음소리와 앓는 소리가 섞인 괴성을 흘리던 남자가 손을 꽉 붙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나보고 혼자 가라는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지금 나보고 뭘 어쩌라고. 정신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화할 의지는 생겼다.

“정확히 손가락만 맞히는 솜씨로 머리를 못 맞힐 리가 없잖아요. 누군지 몰라도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냥 가세요.”

내 말에 남자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씩씩거리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살피다 바닥에 박힌 것을 끄집어냈다.

푸른 빛 서린 은색의 총알이었다. 손끝에 힘을 줘 봤지만, 살짝 우그러질 뿐 그 이상은 상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봤다고,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재질이었다.

“…….”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상대가 기척을 아주 잘 감추는 타입이거나, 아니면 아주 멀리서 총을 쏘아도 표적을 놓치지 않게 눈이 좋거나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의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바타르.”

그날 미국에서, 나는 그에게 총을 돌려받지 않았었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총알은 그 총 안에 들었던 것과 똑같았다. 직접 봤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바타르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왜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림자가 술렁이다 내 쪽으로 달려드는 괴물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

눈을 뜨고 저 멀리 있는 건물을 보았다. 소리는 저곳에서 울렸다. 건물의 창에서 무언가 작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햇살에 비친 그것이 반사하는 빛은 시렸다. 거기 있구나.

하나, 둘, 셋.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푸른 불의 안내를 받아 그 건물로 갔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림자 속의 푸른 불들이 오늘따라 색이 더 진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밟고 선 공간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평소라면 끈덕지게 달라붙고는 하던 것들이 어둠 속에 몸을 감추었다. 뭔가가 또 변하고 있었다.

나를 두고 세상이 멋대로 굴러가는 것처럼.

벽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나를 상대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가는 눈은 웃지 않았다.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요.’

그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바타르의 뒤로 햇살이 눈 부셨다. 그랬기에 반대로 그의 얼굴은 어둡게 보였다. 손안에 쥐어진 리볼버 형태의 총이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났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나는 슬며시 웃는 낯을 지었다.

“여기서 뭐해요?”

내 물음에 바타르는 멍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도 어딘가 아린 얼굴을 했다.

나는 기다렸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한 그 유일한 행위가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도 알았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서 이젠 옳은 길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햇살 아래 그늘진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요. 나는 여기서 무얼 하는 걸까요.”

한참 만에 나온 답은 본인을 향한 의문이었다.

깨진 창을 타고 들어온 햇빛 한 줌은 따스했으나 이 넓은 방을 다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한 발자국 그에게 걸어가니 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의 뒤편으로 날뛰는 괴물과 무너지는 세상이 보였다. 그것을 눈에 담다 내 앞에 선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짓는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길래, 나도 웃음을 거두었다. 우리 둘 다, 지금 이 상황에 이렇게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아, 우리는 이제 전과는 전혀 같지 못하겠구나. 수상쩍게 친구 하자 하던 그때처럼도. 총을 쥐여 주며 할 수 있다 하던 그때처럼도. 우리는 결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구나.

“…하.”

가셨던 웃음이 다시 튀어나왔다. 뭔가를 붙잡고 다 집어 던지거나 깨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다 모른 척하고 도망이나 가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다.

그럴 수가 없었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오해하는 거라고 말해 볼래요?”

“…뭐가 됐든, 당신 생각이 다 맞을 겁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해요?”

“…….”

답하기 곤란할 때 침묵하는 거. 나도 자주 쓰는 방법이기는 한데, 직접 당해 보니 알겠다. 말 없는 침묵이 주는 그 짜증과 알 수 없는 서러움을.

“난, 이런 전개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이해가 안 되잖아요. 왜, 아니, 어떻게. 당신을 죽음으로 모는 쪽의 편을 들죠?”

고향도, 사람도, 다 사라지게 만든 것의 쪽에 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해하는 것이 그냥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바타르는 애써 지은 것 같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뭐? 어처구니없어하는 내 얼굴을 보며 바타르는 살짝 몸을 틀었다. 그의 손이 햇살에 달궈진 유리를 더듬었다.

“당신에게 있어 하늘 조각이니, 괴물이니, 크게 의미가 없지 않나요? 그것들은 당신을 죽이거나 하지 못하잖아요. 당신을 죽이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죠. 그래서 도망갔던 거 아닌가요?”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요.”

“아뇨.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직접 그랬냐, 간접적으로 그랬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후자가 더 악질 아닙니까?”

그는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얼굴에 살짝 드리워졌던 햇빛이 다시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사도라고 하더군요. 그들 앞에서 나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바타르.”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류.”

“…….”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하죠. 그걸 알기에, 그러니 당신도 참고 사는 거죠.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럴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난, 이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요.”

왜. 왜 다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어야만 살아남는 게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냥 좀 살면 안 되나. 제발 그냥 좀 살면 안 되는 건가.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그냥 살았으니까 살아남는 거잖아요.”

“…….”

머리가 아팠다. 누가 머릿속을 헤집는 것처럼. 낯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바타르가 말했다.

“…당신은, 어리군요. 정말 어려요. 단순히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알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당신은 스스로를 살펴보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도 모르잖아요.”

“…….”

“당신은 살아남은 게 아니라, 계속 도망치고 있는 겁니다.”

바타르가 내게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내가 주었던 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끝을 움직였다.

탄창 돌아가는 소리가 작고도 요란스러웠다.

“이 안에는 몇 개의 총알이 들어 있을 것 같은가요?”

“…지금 나랑 러시안룰렛이라도 해 보자는 거예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장단을 맞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이 간절해 보여서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존재고, 내게 있어 사람과의 어울림이란 상대에게 맞춰 주는 거였다.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는 사람의 장단에 맞춰 주지 않는 것이 무서워졌다.

또다시, 잘못된 일을 하면서 옳다는 생각이 들까 봐 무서웠고, 옳은 일을 할 때 잘못됐다는 생각을 할까 봐 무서웠다.

살면 살수록 무서운 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정석대로라면 하나겠지만, 바타르가 따로 한 번을 쓰지 않았다면 두 개가 들어가 있겠죠.”

다섯 개의 총알이 들어가는 오연발 리볼버. 하나는 전 천칭 회장의 머리였나, 심장이었나, 그곳에 있을 거고. 한 발은 미국에서 바타르가 썼다.

그리고 조금 전 남자의 손가락을 날릴 때 하나. 내 말을 들은 바타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석대로 하나가 들었습니다. 내가 이미 하나 썼거든요. 나의 고향에서.”

“…그런가요.”

“네. 난… 당신에게 참 감사해요. 미국에서 아카샤의 크툴루를 해치우던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당신을 모를 거예요. 당신이 내게 기회를 줬으니까, 내 평생의 한을 풀어 줬으니까.”

“그런 말을 할 거면 총을 내려놔야죠.”

손가락이 움직였다. 총에서는 맥 빠진 소리만 날 뿐 연기도, 총알도, 소음도 없었다.

“이 총에서 총알이 나오는 단 한 번의 순간까지 내게 뭐든 물어보아요.”

그건 누구를 위한 문답일까. 당장 달려들어 그를 제압할 자신은 있었다. 그다음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왜 여기 있어요?”

“돌아갈 곳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음이 한 번 더 울렸다. 한 질문에 한 번씩이었다. 저 총에 맞는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사할 것 같지도 않았다.

바타르는 내게 살아남은 것이 아닌 계속 도망치는 중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나는 도망가지 않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아니,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난 도망가고 싶었다.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그런 곳으로.

그러나 내 입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지금 밖이 왜 저러는지 아는 거 있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세계의 비밀. 이 세상의 신이라는 테오그라젠스 때문이지요. 사도들이 무언가 할 거라고 하더군요.”

금속 고리를 잡아당기는 손은 떨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이 떨렸다. 이걸로 세 번째.

문득 노아 이스벨라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은 왜 신을 믿는지 알아요? 절망밖에 없는 나의 삶에 아득한 존재의 등장은 나를 구원해 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에요.’

“…….”

바타르. 몽골. 그리고 지금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는 그의 말.

로웰 콕스.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사람들.

아득한 존재 앞에 서면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느껴지고, 다 해결될 것 같은 그 안도감. 풍요로움.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에게 본인을 바쳤나? 그게 의미가 있나?

“당신의 신은 누구인가요?”

아는 것을 묻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이 있었다. 그건 바타르와 로웰 콕스의 믿음 같은 거였다.

내 질문에 바타르는 웃었다. 얼굴 근육이 움직임과 동시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 나왔다.

“…테오그라젠스.”

“…….”

“죽은 나의 형제와 친구와 가족과 동료들의 영혼을 욕보여서라도 되살려, 내게 쥐여 줄…. 나를 죽이는 신. 나는 돌아갈 곳이 필요합니다. 나의 고향은 나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 물음에 바타르는 다시 걸쇠에 손을 걸었다. 하지만 차마 그것을 다시 당기거나 하지는 못했다.

얼결에 도박 한번을 더 성공한 꼴이 되었다. 이제는 의심이 들었다. 저 총에 총알이 들어 있기는 한 것인지.

“지금에 와서 과연 그 질문이 의미가 있을까요?”

“…….”

“이제 확률은 반반이군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안전하게 나를 죽일 것인지 마지막 도박을 할 것인지 정하세요.”

나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뒤편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괴물 하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조차 내가 가야 할 곳은 너무나 많았고, 내가 필요한 이들은 내 몸을 전부 쪼개어 나누어 줘도 부족할 지경으로 많았다.

그것을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테오그라젠스가 당신 소원을 제대로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틱, 틱. 작은 소리가 울렸다.

“나를 이루던 모든 것이 누구의 손에 죽어야 했는지 명확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 신을 내 신으로 삼겠다고 말하면서…. 그냥. 나도 이젠 모르겠어요.”

“…….”

“의미가 있나요?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세상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죠. 저항도, 분노도, 슬픔도.”

“…….”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이젠 잘 모르겠네요. 정말로 모르겠어요. 이 모든 게 다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지.”

총구가 움직였다. 로웰 콕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가져다 댔다.

“마지막 한 발은 제게 양보해 주실 건가요?”

“바타르.”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눈이 휘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도박이 아닌 마지막 질문을 그가 가져 버렸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나요?”

“너무 어렵잖아요, 질문이.”

“그런가요. 그럼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나요?”

어떤 어른. 그 질문을 하기엔 내 나이가 알맞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생각들을 끄집어낼 수는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입만 열어 상대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그런 게 궁금해요?”

“네. 당신 같은 사람은 어떤 것을 바랐을지 궁금해요.”

‘당신 같은 사람’. 나는 그렇게 따로 정의해야 할 정도로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뭐라 답할까 고민하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글쎄요. 구슬 아이스크림 쌓아 놓고 맘껏 먹는 그런 어른?”

“장난치지 말고요.”

“진짜예요. 그런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그리고 뭐가 됐든. 지금 같은 모습을 원하지는 않았겠죠.”

아주 사소하고 흔하고 평범한 삶보다는 특별한 것을 원하던 시절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또한 그 특별한 것들 중엔 지금의 내 모습 같은 것 없었을 것이다.

그의 뒤에는 눈 부신 빛이 있었고,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의 뒤편에는 새까만 그림자가 일렁이고 나의 낯은 햇살이 어루만졌다.

모든 것이 반대되는 이런 이상한 세상 따위… 원했을 리가 없잖아.

“당신은 왜 사람은 구하나요?”

왜냐니.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다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햇살이 눈 부셔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냥요. 그냥… 내가 그게 맞다고 믿으니까.”

바타르가 내 말에 웃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럼 내 마지막 부탁도 그냥 들어줄 수 있나요?

나는 말했다. 친구니까 그냥 들어줄게요.

가는 눈을 더 가늘게 휘며 바타르가 웃었다. 그의 입이 열리고 부탁이라는 이름 아래 흘러나온 말들이 내 귓속에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이 나를 가장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망쳤었잖아요. 그러니 말리지 말아요.”

“…….”

“이게 나의 도망이에요.”

탕.

그의 도망을 알리는 탄성이 조용히, 그러나 요란스럽게 퍼져나갔다. 도망은 위험하고도 무모한 모험이었다.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혼자가 될 것을 각오로 한, 오로지 나를 위한 모험.

처음으로 나는 그 도망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숨 막히게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너지는 그의 몸을 따라 내 안에서도 무언가 무너지고 있었다. 다시는 되살릴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아무리 끼워 맞추려고 해도 누더기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

방에 있던 커튼을 뜯어 바타르의 몸에 덮었다. 유리창에 언뜻 비치는 내 얼굴은 무감했다. 그 사실이 조금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데 뒤편에서 누군가 내게로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뿐하다 싶은 걸음걸이가 익숙해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명백히 자신을 무시한 것에 가까운 내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말을 걸었다.

“또 암시라도 걸려고?”

마치 저번 만남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한 태연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 말은 어조와 관계없이 시비에 가까웠다.

아닌가. 그의 말이 고깝게 들리는 것이 그냥 내 문제일까 싶기도 했다. 손에 닿는 약간은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팔랑이는 커튼의 천 자락을 훑다 입을 열었다.

“아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이상 기억이나 감정에 손대는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딱히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도, 이호연도, 잊힐 바타르가 안쓰러워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것만이 이유였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난 또 그럴까 봐 말려야 하나 고민했네.”

그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이 어땠을까,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딱 그 정도로만.

푸른 하늘 아래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이라도 난 걸까. 그곳을 눈대중으로 살펴보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검정 일색인 차림새가 낯설었다. 그 차림새에 대한 나의 감상은 간단했다. 낯설고, 안 어울리는 것 같고. 지난날 보았던 편한 차림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

나는 그 감상을 솔직하게 말했다.

“옷이 평소랑 다르네.”

그는 내 말에 슬며시 웃었다.

“나름 격식을 차려 본 거야. 오늘 많은 사람이 죽을 테니까.”

“…….”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다는 점에서 눈앞의 그 또한 제정신은 아니었다. 눈살을 찌푸리다 고개를 돌렸다.

비인간적인 면모를 두고 뭐라 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를 비난하는 대신 의문을 뱉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 말에 그는 웃음을 흘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웃지 말고 말을 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건 짜증을 담은 감정이기도 했고, 약간의 경멸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하기를 원함은 감정이 섞인 것이 아닌 진실한 바람이었다. 말하지도 않고서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들이 싫었다.

할 말 많은 얼굴로 입을 다무는 것도 싫었다. 이제는 그런 얼굴들을 보기만 해도 지쳤다. 나 또한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모든 것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이름으로는 안 불러 주는 거야?”

“…우리가 살갑게 이름 부르는 사이는 아니지.”

“그런가? 그런데 그거 알아? 넌 나한테 너무 매정해.”

“…….”

“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네가 지은 내 이름의 뜻을 알아볼 생각을 했을 거야.”

매정하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 이름, 뜻도 뭐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갖다 붙인 거야.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거기다 네가 뭔 뜻을 부여하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잖아.”

“이것 봐. 끝까지 나한테 더 못되게 굴지.”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니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금 의미 없는 화풀이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정말 그런 거라면… 정말 갈 데까지 가는구나 싶어질 것 같았다. 피곤과 서러움이 얼굴에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손에 비벼진 눈이 조금 아렸다.

그런 나를 가만 바라보던 쥬는, 내 옆으로 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어 내 행동을 저지했다.

붙들린 손을 쳐냈다. 맥없이 떨궈진 자신의 손을 보던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이 날이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말에 결국 나는 그의 말에 답했다.

“무슨 날.”

그런 내 반응에 그는 조금은 만족스럽고, 조금은 후회하는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무료한 신 테오그라젠스가 불그림자에 숨은 또 다른 하나를 잡아먹을 날. 늦어도 내일을 넘기지는 않겠지.”

“…….”

반사적으로 목 부근을 더듬었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하는 짓을 옆에서 바라보던 쥬가 천을 들추었다. 그런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내 손보다 그의 손이 더 빨랐다.

햇살 아래 작은 먼지가 한 올 한 올 날아다녔다. 그 아래 바타르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고, 햇살 아래 있어서 그런지 따스해 보였다.

잠시 동안 그런 바타르의 얼굴을 바라보던 쥬가 입을 열었다.

“성자들은 보통 이럴 때 기도라도 외우지? 그런데 나는 테오그라젠스의 성자라 그런 거 못 하겠네. 내가 여기서 기도문이라도 외우면 그건 이 사람에 대한 기만이자, 너한테는 시비일 거 아니야.”

“…….”

“나랑 대화도 하기 싫어? 네가 자꾸 그러면 난 네가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내놓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럴수록 넌 나를 더 싫어하잖아.”

“…넌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저를 노려보며 제 말에 대꾸한 나를, 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복잡스러운 저 감정을 정의 내리지 못했다.

매번, 내가 정의 내리기도 전에 그의 눈이 꾹 감기었다 다시 뜨이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에게 있어 격해지는 감정은 신기루 같았다.

쥬는 웃었다. 히죽거리는 것 같은 웃음은 의미 없는 허상이었다. 또한 가면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장 익숙한 얼굴이었다.

“공주님. 마지막 사도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지?”

“왜. 알려 주기라도 하게?”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전보다 흐릿해진 하늘색과 선명해진 보라색이 섞인 그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내 물음에 그는 바타르의 위로 다시 천을 덮었다. 천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웃고 있는 입꼬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럴까? 난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공평한 것 같다고 하는 놈도 있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햇살 아래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의 머리카락이 전보다 더 옅어진 것 같았다. 툭 건들며 재와 먼지가 되어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를 이루는 색깔들이 전과는 다르다는 것이 그제야 눈에 보였다.

그는 손을 들었다. 목을 더듬는 그의 손 아래 무언가 스쳐 지나간 것이 보였다. 그것들을 살펴보며 나는 말했다.

“너는 누구의 편인지 모르겠어.”

“…그야, 나는 내 편이니까.”

“…….”

일순,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로 웃고 있었다.

그 당연한 것들을 누구보다 누리지 못한 내 눈에 그의 웃음은 숨이 막혔다. 뭐라 말하려는 내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으로 쥬는 내 말을 막았다.

“공주님은 머리 좋고 눈치 빠르니 몇 가지 힌트만 주면 금방 알아차릴 거야. 그렇지?”

“…빨리 말하기나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장단 맞추기밖에 없었다. 책임 못 질 거면서 이 이상 끼어들 수는 없었다.

침묵과 회피. 도망을 선택한 내게 그는 입을 열었다.

“노아 이스벨라의 전직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전직관들은 모두 천공 섬의 주민들이야. 그 엉망진창인 세상에 학자 같은 고상한 직업을 갖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뭐?”

잠깐만. 그럼 노아 이스벨라의 전직관은 어떻게….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천공 섬에서 진리를 따지고 잴 수나 있었을까? 저 살기도 바쁠 텐데? 책을 들 시간에 무기를 드는 것이 더 나은 환경 속에서 말이야.”

“…….”

“이 정도만 말해도 알 것 같지 않아?”

가능한 경우가 하나 있었다. 내일 당장 죽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 천공 섬에서 그러한 위치에 선 자들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였던 마티가 내게 말했었다.

‘신께선 살아남은 아이 열둘을 향해 말씀하셨지요. 소원 하나를 빌어 보라고….’

‘누군가는 다음번에도 살아남을 지혜를.’

테오그라젠스의 사도.

“…하.”

결국 우린 그것들 손에서도 놀아난 거였나?

“사도….”

내 중얼거림을 들은 쥬는 정답이라는 듯 빙긋 웃었다.

웃어? 그 모습에 저절로 삐딱한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지만, 지금은 저런 시비조에 일일이 반응할 때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안 되잖아. 왜, 사도가 우리를 도와. 사도는 테오그라젠스를….”

그 잘나신 신을 모시겠다고 저들을 희생해 여기까지 온 자들인데. 역시 세상의 비밀이네, 뭐네 했던 그 모든 이야기 자체가 함정이었나?

하지만 그것을 함정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그게 내게 해가 되는 내용도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혼란에 빠진 나를 보며 그는 웃었다.

“테오그라젠스는 무심하지. 그래서 가끔 그 사도들은 영 이상한 생각을 품고는 해.”

“…….”

“사도라고 해서 신을 좋아할 거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버려. 나를 봐. 그 신의 첫 번째 종이 신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존재잖아.”

신에게 총구를 들이밀기 위해 다시 태어난 자. 하지만 문제는 그 존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췄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눈앞의 존재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품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정보 없는 상대가 누구인가가 더 중요했다.

어차피, 무슨 생각이든 내게 해가 된다면…. 결국엔 내가 싸워 없애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나비 또한.

“…다른 사도들도. 테오그라젠스의 죽음을 원해?”

“글쎄. 나라고 남의 속을 들여다보는 재주는 없거든.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지. 그것들도 생각은 할 줄 안다는 것.”

쥬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톡톡 쳤다. 그런 다음에는 손을 내려 심장 부근을 덮었다.

“하지만 생각은 할 줄 알아도 그 생각을 하는 몸은 신의 것이지. 사도란 존재들이 신을 모시지 않으면 뭘 하겠어. 의미 자체가 없어지는 거잖아.”

“…….”

“싫든 좋든. 잘못됐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생각이 있든 없든 사도로서의 삶을 선택한 자들은 신에게 충실해야 하는 거야.”

“그럼 너는?”

“…….”

그는 내 말을 무시했다. 일부러 눈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답하기 싫은 것은 자연스럽게 모르쇠 하는 그 모습에 속이 꼬였다.

그런 내 속내를 마냥 모르지는 않으면서, 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빼내기 위해서라는 듯 사도에 대한 정보를 푸는 그 모습을 보며,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 저 말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짜증 나는 점이었다.

“그놈 이름은 레코디아야. 사도 중에선 가장 특이한 놈이고. 예상했다시피 테오그라젠스에게 지식에 대한 자유권을 빌었어. 남의 피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지식을 바랐다, 신기하지?”

“…….”

“레코디아는 스스로를 학자라고 칭해. 그리고 학자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지식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의도가 어떻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들은 허투루 흘려들을 내용이 아니었다. 다만 레코디아라는 사도는 조금 이상했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노아 이스벨라의 전직관이 되었다는 것이. 그를 통해 내게 자신의 지식을 넘겼다는 것이.

노아 이스벨라는 세상의 비밀을 모두 넘겨준 이후 자신의 전직관이 사라졌다고 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사도로 돌아가서 그런 거였다.

신을 모시지 않으면 존재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사도들. 어찌 됐든 그 사도 중 하나인 레코디아. 낯을 구기는 나를 보며 쥬는 눈을 휘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 뿐, 레코디아는 제법 신실한 사도거든. 말했잖아. 걔는 어차피 사도야. 그리고 여기로 넘어온 사도들 중에 걔가 제일 테오그라젠스에게 충실할걸?”

“…그래서 너는?”

이번에는 답을 피하지 않을 것인지 그는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보여 주었던 불안정함은 또다시 숨겨졌다.

“나? 글쎄. 어떤 것 같아? 공주님이 보기에 나는 신실한 성자야?”

다만 그 대답은 두루뭉술했다. 신실하다는 말만큼 그와 안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바타르에게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쥐었던 부근에 구김이 간 걸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느릿하고 진득하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먼지가 나풀거리는 천 자락을 보았다.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화도, 분노도, 짜증도, 모두 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별로 이해가 안 가. 이 남자는 왜 죽은 거야?”

지켜봤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배려 따윈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화낼 기운도 없던 나는 선선히 답했다.

“화가 나니까.”

그래 화가 나니까. 나의 말에 그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이 계속해 질문했다.

“테오그라젠스를 신으로서 경외하는 마음을 품은 건?”

“화가 나니까.”

반복되는 내 말에 그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하라고 한 말이 애초에 아니었다. 또한 내가 바타르라는 사람을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바타르라는 인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의 질문에 답하는 나의 말은 그저 내가 겪었던 것을 기반으로 생각한 짐작을 입으로 뱉는 단어의 총합일 뿐이었다.

사람은 분노하면 자신을 분노하게끔 만든 상대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면, 지속적으로 분노는 쌓이는데 해결할 수 없다면, 그때부터 분노는 공포가 된다.

분노가 공포가 되고, 경외가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분노에 괴로워하고. 그렇게 망가지는 거였다.

끝나지 않는 악순환에서 바타르는 나름의 저항을 하고 도망간 셈이었다.

다만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그렇게 내게 화풀이하듯 굴고 가면 안 됐다. 먼저 친구를 하자고 말했으면서. 그렇게….

‘당신은 스스로를 살펴보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은 살아남은 게 아니라, 계속 도망치고 있는 겁니다.’

끝까지 알 수 없는 말만 하다 가고.

신경 줄이 파르라니 날 서는 기분이었다.

오늘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다. 쥬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죽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에 나는 가장 알맞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어둠보다 까만 옷. 내 옆에 있는 남자보다도 더 새까만 차림새를. 마치 이러한 상황을 대비해 언제나 준비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

시선을 내려 바타르를 보았다. 깨워서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한테 화풀이하고 갔냐고. 왜 나한테, 나한테만 그런 거냐고. 아니 마지막은 아니었다.

그런 말은 해선 안 됐다. 내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면서, 그런 원망을 하다니. 그래선 안 됐다.

하지만… 그가 내게 화풀이했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만이 화풀이였던 것이 아니다.

내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평생 기억하게 만드는 것도 화풀이였다. 남한테 다 떠넘기고 자신은 도망가는 것만큼 화풀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행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받아들이고, 그를 이해하고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다. 나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미련을 이곳에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먼지에 뒤섞여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며 사라졌다.

나를 올려다보는 쥬는 웃고 있지 않아, 그의 말처럼 나름 신실하게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처럼 검정 일색의 옷차림이라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입에 담았다.

“넌, 테오그라젠스의 종을 하기엔 너무 이기적이야.”

“…….”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너는 성자라는 이름에 별로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야.”

내 말에 그는 알 수 없는 낯을 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 바타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손안에 피어오른 작은 불씨가 천 자락 위로 올라갔다.

먼저 친구 하자고 다가와 놓고 바타르는 내게 무리한 부탁과 화풀이만 남긴 채 떠났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화풀이 당한 상대를 두고 떠난다. 타오르는 불과 사라지는 것들의 재는 우리 사이의 모든 것들을 지워내는 과정이자 흔적이 될 결과물이었다.

사람의 관계란 신기한 거였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다가도 금세 회복하기도 하고, 영원할 것 같으면서도 순식간에 덧없어지고는 했다.

다만 그것들에는 선이 있었다.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선.

쥬는 선을 넘었고, 나도 넘었다. 처음부터 삐걱거렸던 우리의 관계는 이제 되돌아간다 한들 제자리걸음일 뿐인 실패작이 되었다.

지금처럼 애써 대화를 한다 해도, 그 잠깐의 시간마저 서로에게 날이 서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대화를 했다. 그리고 나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날,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고.

둘 중 누가 더 선을 넘었냐는 이제 의미 없게 되었지만, 변명 그 이하도 이상도 될 수 없는 그 말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다만 그것을 입에 담기에는 난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넌 이기적이라고 한 마지막 말 정도가 내 용기의 전부였다. 우리는 절대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없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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