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신을 ⑇⸎는 방법 (23/34)

나만 장르가 달라 5권

#신을 ⑇⸎는 방법

다음 날 이호연과 함께 급하게 돌아온 주세진은 창백한 얼굴로 강유진과 나에게서 상황 보고를 들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두 번 커넥터에도 잡히지 않은 괴물들이 도시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둘 다 아카샤의 괴물들이었다고?”

머리를 짚는 주세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를 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왔다.

문 바로 옆에 서 있던 이호연과 눈이 마주쳤다. 문을 닫고 그의 옆으로 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부모님은 어떠셨어?”

“아버지가 전직이 취소되셨더라고요. 본인께선 차라리 속 편하다고 좋아하시지만….”

이호연의 말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멍하니 벽만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세진, 무리했지?”

“그렇죠. 오페리움의 반작용은 온전히 형의 몫이니까.”

그걸 며칠 쉬고 사용한 것도 아니고 연속으로 사용했으니.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이 생각났다.

“이름 있는 무기들은 왜 그렇게 하나씩 이상한 구석이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나마 류는 얌전한 편이었다. 주세진의 오페리움은 주인 잡아먹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반작용이 심하고.

프레데터는 진짜로 손대는 사람 잡아먹고, 아스트로노미는… 사용법은 배웠으려나. 이예린에게 들은 바로는 타격감 하나는 끝내준다고 했었다.

나와 똑같이 옆에 쭈그려 앉아 나를 보던 이호연이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옥상 정원이라도 갈까요?”

“그럴까.”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우리를 감싼 그림자의 어둠 끝에 이번에는 안전하게 옥상 위에 다다랐다.

옥상에 마련된 고양이 집에서 살며시 나온 고양이들이 애옹거리며 이호연에게 매달렸다. 그중 유난히 하얗고 예쁜 고양이를 안아 든 이호연이 그 애를 내게 안겨 주었다.

흘러내리는 것 같은 고양이를 받쳐 안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찬 바람에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보들보들한 털에 눈을 감고 뺨을 비비다 멈추었다. 고개를 드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가 내 품에서 도망쳤다.

그것을 바라보다 그대로 뒤로 누웠다. 그림자가 내 몸을 받쳐 들었다. 시야에 조금 흐릿한 감이 있는 하늘이 보였다.

“…그거 알아? 이제 곧 올해 끝난다?”

나는 한 살 더 나이를 먹을 것이고, 새로운 것을 겪을 것이고 옛일은 더 멀어져, 곧 머릿속에서 흐려질 것이다.

손을 하늘로 뻗었다. 내 손에서 흘러나온 푸른 불이 장난스러운 낙서를 흉내 냈다. 구름과 별과 달. 깜찍한 얼굴의 호랑이…. 여우.

손을 휘저었다. 불 그림이 사라졌다. 이호연을 손짓해 불렀다. 내 옆으로 온 그가 조심스럽게 그림자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 살 더 먹으면 뭐 할 거야?”

“류랑 벚꽃놀이 갈래요.”

우문현답이네. 힘 빠진 웃음소리 내는 나를 보며 이번에는 이호연이 물었다.

“류는 뭐 할 거예요?”

“나는 벚꽃잎을 잡아서 너 줄 거야.”

“류가 갖는 게 아니라요?”

“응. 너 줄 거야.”

“…왜요?”

왜긴 왜야.

“너 꼬시려고.”

“…….”

그래서 네가 날 못 놓게 하려고.

“넘어올 거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나는 웃었다. 아직은 먼 봄나들이를 상상하며 웃는 우리의 분위기는 온유했다.

아직 피지도 않은 꽃나무를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전혀 반대되는 나무 하나도 생각났다. 사람을 잡아먹고 울고 소리 지르게 만드는 것이.

“…….”

오늘 아침 길드 사옥으로 오기 전 입원한 서정은을 찾아갔었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부은 눈과 젖은 자국 남은 소매로 내가 오기 직전까지 울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뭐라고 말해 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위로가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행이라고 하는 건 기만 같았다.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싶다가도 왜 사과해야 하는지가 알 수 없었다. 말뿐인 것을 입에 담기에는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닫고, 시간을 죽였다.

병실을 떠나는 내게 가만히 손을 흔들어 주는 서정은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남은 내게.

그런 내게 누군가 어떤 말이라도 해 주었다면 나는 살아남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그럼 내가 어설프고 서툰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하는 그런 생각.

사람들이 내게 바라지만 않고 내가 바라는 것을 물어봐 주기라도 했다면 나는 조금 더 능숙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우는 사람에게 뭐라 말이라도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리 지르는 내게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러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남 탓인 생각을 해 보다가도 결국은 내가 문제였냐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르겠다. 정말.

옆을 보았다. 햇살이 눈 부신지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 이호연이 보였다. 내가 죽으려고 하늘 조각에 뛰어들기 전에. 내가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너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망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그 망상을 입에 담지 않았다.

요란스럽게 옥상 문이 열렸다. 큰 소리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고양이들이 도망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다급한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천칭 팀의 공략 대원이자, 전 천칭에서 이예린의 감시 역을 맡았던 남자. 천칭이라는 기업이 무너짐에 따라 리블로 넘어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남자는 내 팔에 매달렸다.

“지금, 지금 당장 내려가야 해요!”

“무슨 일인데요?”

“길드장님,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공략대 대장!”

이예린.

나는 남자를 밀치고 바로 뛰었다. 이호연이 그런 내 뒤를 따라왔다. 옥상에서 가장 가까운 꼭대기 층은 주세진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다급하게 달려나가는 주세진과 강유진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따라 뛰었다.

주세진이 향하는 곳은 기숙사가 있는 층이었다. 비상계단을 건너 내려온 층의 복도에서 의료팀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향하는 방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손민경이 피가 튄 얼굴로 우리를 향해 외쳤다.

“빨리 와요!”

나는 주세진을 제치고 뛰었다. 사람들이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 주었다.

“…….”

이예린. 샛노란 병아리색 머리가 손민경의 무릎 위에서 흐트러져 있었다. 눈과 코와 입, 귀에서 피가 흘렀다.

그녀의 손에는 아스트로노미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아스트로노미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푸르스름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별자리 판 위로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그것을 장식하던 금색의 별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름이 있는 무기가 망가졌다고? 대체 왜?

그리고 이예린은 왜 저런 상태인 거지? 저번처럼 습격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주변은 이예린의 피 외에는 멀쩡했다.

당황하는 나를 발견한 황금색 눈이 빛났다. 이예린의 힘없는 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가…까이….”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목소리와는 정반대였다. 자세히 보니 피가 검은색에 가까웠다.

마치 저번 습격에서 이예린이 영역을 여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토해 낸 피처럼.

그제야 아스트로노미를 쥔 그녀의 손이 의심스러워졌다. 설마 이 피가 전부 반동으로 인한 건가?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나는 몸을 낮췄다. 이예린이 더 가까이 오라 말했다. 고개를 숙였다. 피 묻은 손이 애처롭게 내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끌어당겼다.

귀를 그녀의 입 바로 앞으로 가까이했다. 예언가의 말이 내 귓가에 속삭여졌다. 그녀가 속삭이는 말들을 귀에 담은 나는 당혹스러움에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

재촉하듯 황금색 눈이 나를 보았다. 잠시 망설이다,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이호연과 주세진도 뒤로 물러났다.

“…믿을게요.”

내 말을 들은 이예린이 피 묻은 입술로 미소 지었다.

나는 마지막 빛을 쥐어짜는 것 같은 아스트로노미를 눈으로 훑었다. 주인 아닌 자가 감히 제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하는 이름 있는 무기.

이예린은 내게 말했다. 아스트로노미 위로 손을 올리라고.

예언가가 말하는 건데 믿어야지, 뭐. 사람을 물린 건 나를 제지시킬까 봐 한 행동이었다. 한편으론 제지시킬 것을 알았기에 한 행동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정말 화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예린이 흩어질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나는 황금빛 기류를 흘리는 망가진 별자리 판, 아스트로노미의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내 행동에 여기저기서 무어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쿵 하고 무언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귀로 들리는 소리 같았으며 몸이 느끼는 땅울림 같기도 했다. 세상의 흐름이 느릿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

세상의 색이 사라졌다. 온통 검은 세계에서 우리는 하얀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자의 가슴 부근은 붉은 실들이 엉켜 있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것이 심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색감을 갖고 있던 모두가 지금은 같았다.

그러나 내 심장을 이루는 실은 푸르렀다. 다른 곳은 남들과 모두 같으나 심장은 아니었다.

다른 색을 띠는 것들은 내 심장뿐만이 아니었다. 내 목에 걸린 하늘 조각은 오색빛깔이었다. 이호연의 목 언저리에 숲의 색이 보였다.

그리고 내 아래에 자리한 이예린은 황금빛이었다. 아스트로노미와 함께.

선이 지워진다. 실로 이루어진 모든 사람들이 어둠에 잡아먹혔다. 남은 것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어둠이 이번에는 푸름도 오색빛도 잡아먹었다. 이로써 이 공간에 색은 둘밖에 없게 되었다. 대조되는 흑백의 색.

손을 주먹 쥐어 보았다. 불안정한 그림처럼 내 몸을 나타내는 하얀 선이 흔들렸다. 이대로 흩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그런 불완전함이 느껴졌다.

그런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다.

“…내 앞에 나와서 말해요.”

어디선가 흘러온 얇은 황금 실 같은 선이 내 앞에서 구축되기 시작했다. 기다랗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번뜩이는 황금색 눈동자.

손에는 많은 반지가 있었고, 팔에도 팔찌가 주렁주렁했다. 목에는 세 개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으며 그중 하나에는 커다란 보석이 달려 있었다.

옷차림은 천 자락을 겹겹이 쌓아 보석 핀으로 고정한 것 같은 차림이었다. 화려한 깃털과 꽃, 그리고 보석으로 치장된 터번을 쓴 여자.

맨발로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의 발목에서 원형의 발찌가 흔들렸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추측은 할 수 있죠.”

답해 보라.

답은 뻔했다.

“아스트로노미의 원주인이자, 이예린의 전직관. 별의 관측자, 에스텔리니움.”

내 대답에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려한 차림새에 눌리지 않는 화려한 외양의 미인이었다. 그녀가 내게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녀의 몸에 장식된 금속품들이 요란스럽게 짤랑거렸다. 그것들의 울림 사이로 에스텔리니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래를 엿보러 온 아이야. 너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있단다.

미래를 엿보러 와?

의아함이 담긴 내 얼굴을 보았는지 에스텔리니움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운명이란 수많은 선들의 종착점. 예언가란 그중 가장 가까운 선의 끝을 엿보여 주는 자들. 그것을 행하는 이들은 실을 따라 여행하고 헤매는 길 잃은 존재들.

사막을 헤매는 이들에게도 길을 알려 주는 별 하나가 존재하지만, 운명의 모래밭에서는 그런 것조차 없다.

인간이란 저 자신이 살고자 모든 것을 이용하는 자들. 그것은 운명 또한 마찬가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손을 들어 실을 더듬고 따라가며 옳은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일 뿐이니. 우리는 운명의 장사꾼, 실 잣는 자들.

우리와 같은 존재가 만든 작품을 사는 것은 너와 같은 자들. 적절한 대가만 치른다면 너는, 가장 올바른 정도(正道)를 걸을 것이며 혹은, 사도(邪道)로 스스로 빠져나가거나 할 수도 있지.

선택은 너의 몫이란다.

미래를 보여 준다고….

순수한 진실일까, 거짓이 뒤섞인 불투명한 친절일까. 고민은 길었지만 이 공간에서 그것은 이미 의미 없는 생각들이었다.

내가 선택할 것은 하나였다.

“…어떤 미래라 할지라도 볼 수 있는 건가요?”

내 물음에 에스텔리니움은 미소 지었다.

말했잖니. 나와 같은 자들의 작품을 사는 것은, 바로 너와 같은 자들. 적절한 대가만 치른다면 너는 이 실의 끝을 엿볼 수 있단다.

그녀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금색과 하얀색으로 뒤섞인 수많은 선들이 어두운 이 공간을 채웠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짧았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길었다.

또한 어떤 것들은 서로 엉키기도 했으며 어떤 것들은 서로가 뭉쳐 곱게 땋아 내린 것도 있었다.

에스텔리니움이 손을 내밀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실들이 한데 모여 가지런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잘 정리한 실뭉치를 보는 것 같았다.

에스텔리니움이 그중 하얀 실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하얀 실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금실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양손 가득 실을 올린 에스텔리니움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전의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길을 걸으면 되는 것이고, 마음에 든다면 그 길을 따르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예언. 운명을 엿봐 흐름을 희롱하는 자들의 잔재주.

에스텔리니움이 손에 쥔 것들을 모두 놓았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실들이 다시 검은 공간을 어지럽게 메워 나갔다.

골라 보렴. 네가 걸을 길을. 혹은 걷지 않을 길을.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머뭇거렸다. 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선택 못 하는 나를 보며 에스텔리니움이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뒤에 선 그녀는 내 손을 잡아 실들을 향해 내밀었다.

오래 생각하지 말렴. 네가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미래는 수백, 수천 개로 갈라지고 나뉘며 엉켜드니까.

생각을 비워. 가장 본질에 가까운, 근원에 가까운 것이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이며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것일 터이니.

자. 선택하렴. 가장 많은 운명의 실을 쥐고 태어난 아이. 수천의 실 가닥이 엉켜드는 삶을 가지고 살아갈 아이야.

내가 가장 바람과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 그건….

손을 뻗었다. 손등을 간질이는 실 가닥을 지나, 손끝에 엉켜드는 실뭉치들을 무시하며 가장 깊숙이 숨겨진 것을 손에 쥐었다. 얇고 하얀 실 하나가 손에 잡혔다.

에스텔리니움이 내 손에 쥐어졌던 실을 가져갔다.

이것을 보여 주면, 너는 이 길을 따를지 아닐지를 선택할 수 있겠지.

푸른 불꽃, 구심점, 요람. 나비가 인도할 것들을 모으는 세상의 기원이자 종말이 될 작은 불씨. 너는 어떤 미래를 엿보고 싶니. 내가 만든 작품을 산 너는 어떤 길을 걸을까.

그것을 우리는 지켜본다.

황금색 눈이 감긴다. 눈 주변마저 화려한 보석과 그림으로 얽히어 있는 그녀를 보다가 남은 실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어떤 미래라도 엿볼 기회. 아스트로노미의 사용법이 이거였다. 그야말로 이름 있는 무기라는 명성에 걸맞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대가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민하는 나를 보며 에스텔리니움은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내 앞에 저 예언자는 별의 관측자이자, 천공 섬의 주민.

이미 한번 테오그라젠스를 상대해 본 적 있는, 신에게 대항한 자들 중 하나. 그들의 끝은 어땠는가.

실패했다. 푸른 염료로 표현되었던 노아 이스벨라의 세계의 비밀이 떠올랐다. 무료한 신의 사도 마티와 또 다른 하나, 그리고 랑이 한 말도 떠올랐다.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닌 모시는 것.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운명의 실은 선택의 끝이 어떤지 보여 주는 장치였다. 만약에, 천공 섬의 주민들이 테오그라젠스를 죽이는 걸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어둠과 실뿐인 공간 안에서 생각과 생각이 이어졌다. 에스텔리니움의 손에 들려진 실의 길이가 짧아졌다가 길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지금 모든 ‘만약’을 엿볼 기회를 앞두고 있었다. 그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 그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었다.

나를 이루는 하얀 선이 불안정하게 흔들거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나는 에스텔리니움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미래를 보여 줘요.”

네가 바라며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니? 그것을 입에 담아보렴. 말은 힘. 네가 말함과 동시에 이 실은 더 정확하고 확실한 미래를 엿보여 줄 거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동시에 가장 두려워할 미래. 그건….

“내가 엿보고 싶은 미래는… 테오그라젠스의 죽음 이후.”

내 말에 예언가는, 웃었다. 끌어 올려지는 입꼬리. 감은 눈. 밤하늘 별 위에서 춤추는 별과 같은 움직임.

무수하게 퍼져 있던 선이 정리된다. 예언가가 실 잣는 노래를 부르니 그녀의 손아귀에 저절로 모여든다.

하양과 금빛이 뒤섞이고 남은 것은 아주 예쁜 하늘색. 그 선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내 앞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별의 관측자, 예언가 에스텔리니움이 노래했다.

총총총, 뛰어가는 어린 별아. 사막 끝을 찾아 헤매나. 아니, 나는 바다를 건너 저 너머로 가지.

하늘색 선이 내 목을 감았다. 팔을 감고 어깨를 스치고 허리에 걸쳐졌다가 다리로 흘렀다. 실투성이 된 나를 보며 노래는 이어졌다.

길 잃은 별아. 어딜 그리 가느냐? 길 안내할 실 잣기 이곳에서 이뤄지는데. 운명의 실 잣기. 베일을 만들까. 모래를 건널 양탄자를 만들까.

손가락 하나하나에 얽어지는 하늘색 실을 보며 나는 눈을 깜박였다. 하얀 선으로 이루어졌던 내 몸에 푸른 빛이 돌기 시작했다.

심장 부근에 다시 푸르게 빛나는 실들이 엉켜 들었다. 그 광경이 마치 심장을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천 개의 낮을 지나 천 개의 밤을 건너. 수많은 별무리 아래 잠드는 아이. 운명아, 움직여라. 밤하늘 건너온 귀인. 아이가 엿보는 저 너머 예언가야, 아이의 눈을 가려라.

에스텔리니움이 내 뒤에 섰다. 그녀의 손이 내 눈을 가렸으나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라 눈이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천공 섬을 건너 하늘 타고 내려온 이야기. 아이야, 너는. 감당할 수 있겠니. 네 귀에 속닥이는 별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렴.

네 눈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것이 너의 미래. 너의 삶. 너의 모든 것일 터이니.

실 가닥이 움직인다. 하늘색 색실로부터 시작된 색의 물듦은 어둠밖에 없는 이 공간을 차분히 메꾸어 나갔다. 푸르게 변한 공간 안으로 새로운 색들이 다시 물들어졌다.

귓가에 예언가가 속삭였다. 저것이 너의 미래.

“…아.”

운명의 실 끝에는 내가 궁금하던 것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색감들이 사라진다. 텅 비었다. 금색 실 가닥으로 얽혀진 에스텔리니움이 다시 내 어깨를 짚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란다.

“잠….”

뒤를 돔과 동시에 내 몸을 이루던 선들이 흐트러졌다. 도망갔던 선이 돌아오고 색이 입혀지고 어둠이 물러났다.

“!”

돌아왔다. 피비린내가 나고, 눈앞에서 색들이 보이고, 선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내 손목을 붙드는 감촉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손은 여전히 아스트로노미의 위에 놓여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식은땀이 온몸을 흠뻑 적셨다. 이호연이 내 어깨를 잡고 무어라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멍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이예린의 목소리만이 뚜렷하게 들렸다.

“봤…어요?”

그 말에 답해 주기도 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여기는 꿈속인가? 흐릿한 잔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예스러운 복식을 입은 하얀 머리칼의 여자가 숲속을 달린다. 그녀의 뒤를 하얀 머리칼의 남자가 뒤쫓는다.

여자가 잡혔다. 깔깔거리며 웃는다. 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장면이 바뀐다. 이번에는 어느 귀한 댁 같은 곳이다. 하얀 머리칼의 여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중을 받는다. 즐거운 듯 웃다가도 이야기가 끝나면 조금 우울해한다.

다른 화려한 차림새의 여자가 들어온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눈다. 뒤늦게 들어온 여자의 표정이 마냥 좋지는 않다.

그런데 이번에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믐달의 밤. 숲속을 달리는 하얀 머리칼의 여자. 그 뒤를 쫓는 자들. 여자가 뒤를 돈다, 눈이 마주쳤나 싶을 때쯤. 여자가 뛰던 것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어느새 우리의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어둠뿐이었다. 하얀 머리칼의 여자가 말했다.

미래를 엿보았다면 과거도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차가운 손이 얼굴을 쓸고 눈을 쓸고 귓가에 닿았다.

그러니 이제 말해 봐. 내 말에 대답해.

새까만 검은 눈동자를 눈에 담으며 나는, 입을 열었나? 말을 했나?

‘귓가에 속닥이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답하면 안 돼.’

누가 내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네가 그 속닥임의 주인이야?

자, 말해 봐.

말하면 안 돼.

말해.

답하면 안 된다고….

대답해!

누가 그랬더라? 정신이 멍하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입을 열었다. 짧은 음절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

나는 눈을 떴다.

“…….”

방금… 꿈인가? 무슨 꿈이었더라? 뭔가 이상했는데.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몸에 힘이 없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만 간신히 움직였다. 설마, 아스트로노미의 반동인가?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그것을 발동시킨 것에 대한 반동은 이예린에게. 그리고 아스트로노미를 이용해 운명의 실 끝자락을 확인한 것은 확인한 장본인인 내게 반동이 오는 구조인 것 같았다.

이게 에스텔리니움이 말한 미래를 엿본 대가인가?

몸에서 힘을 빼고 천장을 보았다. 반동으로 인한 거면 시간만이 약이었다. 하룻밤 자면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하고. 두어 밤 정도 자면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향해 눈을 굴리니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이…호연….”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서둘러 내게 뛰어온 이호연이 나를 받쳐 일으켰다.

옆에 놓여 있던 물컵으로 내게 물을 넘겨준 그는 내가 영 삼키지를 못하니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난 나대로 어이가 없었다. 뭔 물도 제대로 못 마시나 싶었기 때문이다. 입가에 흐른 물을 제 소매로 닦아 준 이호연은 제 입으로 물컵을 가지고 갔다.

“…….”

침묵 속에서 내가 간신히 물 삼키는 소리만이 울렸다. 맞닿은 입술로 그가 천천히 물을 넘겨주었다. 정말 별걸 다 해 보네.

꺼끌꺼끌했던 목구멍이 아까보다 훨씬 매끄러워졌다. 얕은 숨이 입 밖으로 흘렀다.

“…어?”

내가 덮고 있던 이불 위로 둥근 자국들이 생겨났다. 입술을 짓씹으면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닦아 주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거칠게 제 눈가를 문질러 닦아 내는 이호연을 보며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흐윽…. 윽….”

“…어, 저기…. 콜록, 저….”

“흡, 어디, 어디 아파요?”

울다가도 내가 하는 기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 드는 이호연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호연의 눈에서 계속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갑, 자기 쓰러져서…. 나는, 진짜 잘못되는 줄 알고….”

“…….”

“나보고는… 흑,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어떡해. 어떡해. 나까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빨개진 눈가가 쓰려 보였다. 서럽게 우는 이호연을 보니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아스트로노미에 손댈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러려고 나보고 물러나라고 한 거지!”

“…….”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나는 왜 생각 안 해 주는 건데!”

진짜로 화…났나 봐.

뭐라고 말하든 변명이었다.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호연은 자신의 말에 지레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이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만….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그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선 내게 등 돌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뭔가 내 귀 옆에서 쿵, 하고 북이라도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그랬는지는 잘 모르나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이는 게 전부인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인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리에 엉킨 이불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넘어지면서 닿았는지 협탁 위에 올려놓은 유리컵이 떨어졌다.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나를 껴안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

내가 바닥으로 넘어졌다면 닿았을 자리, 나를 끌어안은 이호연이 밟고 있는 자리에 시리게 빛나는 유리 파편들이 보였다.

내 몸은 굳었고 이호연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참았던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이호연이 내 어깨를 잡아 제게서 떨어트렸다.

“안 다쳤어요?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 아니, 일단 침대로….”

내 몸을 살피다가 안아서 침대에 올려 주는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미약하기 그지없을 힘일 텐데 이호연은 그런 내 손을 떨쳐 내지 않았다.

이호연은 조금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보았다. 이내 어딘가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다친 데 있나 확인부터 해요.”

“미안해.”

“…….”

“가지 마. 가지 마.”

화…내지 마.

“…류?”

옮았나 보다. 내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들이 시트를 물들였다. 작은 물웅덩이 모양이었다.

이호연이 내 뺨을 잡았다. 손끝으로 연신 내 눈가를 닦아 냈다.

“류? 왜 그래요, 응? 어디 아파요?”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숨이 막혔다. 무언가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화내지 마. 나한테 화내지 마. 네가 화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네가 화내면. 나한테 화가 나면 나는.

“류? 울지 마요, 제발. 응? 나 안 갈게요. 여기 있을 테니까 제발 울지 마요.”

“…흐윽…읍….”

도망가고 싶어져.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아.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난 그냥 화내기 싫어서 나갔다 오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말아요.”

“…화, 화내지 마.”

“류….”

화내지 마. 가지 마. 아니, 가. 제발 가. 다 싫어. 왜, 왜 나한테 화내? 아냐, 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가지… 마….”

“안 갈게요. 응? 여기 있을 테니까 제발 그만 울어요. 그러다가 또 쓰러져요.”

가지 마. 화내지 마. 화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런 말, 이제 안 할게요.

“…….”

무슨 말?

“!!”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속이 메스꺼웠다. 휘청이며 쓰러지는 나를 받아 든 이호연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류? 나 좀 봐요! 류! 유하연!”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머리가 아파서, 너무 서러워서. 나는, 내가 잘못한 거야?

이호연이 나를 안아 들었다.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는 그의 품속에서 보는 형광등이 어지러웠다. 머릿속에 드리워진 커튼이 팔랑이며 그 안을 내보였다.

화내지 마. 울지 마. 시끄러워. 그리고… 유난 떨지 마.

유난 떨지 마. 그 말을 언제 들었더라? 그 사람이 왜 나한테 화를 냈더라? 그 사람이 누구였더라?

‘…래서 난, 죄책감이 들어요. 혹시 진짜일까 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마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이랑 계속 함께 다니는 거야, 라고. 안 그러면 내가 미칠 것 같아서.

반절의 진심. 반절의 진실을 담아 한 내 말에 당신은 말했다.

‘유난 떨지 마.’

‘…….’

‘유난 떨지 말라고. 너만 힘들어?’

그때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왜 내 말들이, 내 슬픔과 죄책감과 그 서러움들이 유난이라는 말로 매도당해야 하는 거였지?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사람 기분을 잡쳐?’

그 뒤로 말이 더 오고 갔고, 당신은 기어이 일방적인 화를 냈다. 그 화 속에 담긴 말들이 너무 아파 나는 입 다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화를 내거나 말대꾸하면 당신의 화는 더 아파졌으니까. 그건 말로서도 이루어졌고, 시간이 지나면 물리적으로 그러했다.

‘…그러게 왜. 왜 날 화나게 만드는데. 내가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네 어리광이라도 받아 줘야 해? 제발…. 제발 사람 화나게 좀 하지 마.’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해. 할 수 있는 말은 어차피 하나였는데.

‘…네.’

당신은 항상 화만 냈다. 나는 그게 싫은데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것은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었다. 그런데.

책임감이라는 게 이렇게 서러울 수가 있는 걸까 싶었다.

서럽고, 서럽고, 서러워서 도망치고 싶은 나는 유난스러운 걸까. 화를 내는 당신을 화나게 만든 내가 잘못한 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비틀리고 잘못돼 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것은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화밖에 낼 줄 모르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저 밖의 것들과는 다른 나와 같은 사람이며, 사람 중에선 그나마 내게 가장 안전한 존재였다.

당신은 가끔 손을 올리고 소리를 지르고. 더 가끔은 물건을 집어 던졌지만 나를 죽일 수는 없었다. 당신의 다리는 당신이 나를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항상 화가 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확정 난 삶. 함께했으면서 함께할 수 없게 된 자신을 책임지기 싫어 버리는 것을 택한 다른 사람들.

자신이 더 이상 누굴 죽이거나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의 온기는 그리워 남은 어린애 하나. 당신은 나를 이용해 삶을 연장했고, 나는 당신의 화를 먹으면서, 그래도 사람인 존재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 함께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를 좀 먹고 몸이 아닌 다른 것을 전부 죽인다 한다 해도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사치인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내가 제일 먼저 버렸던 것은 자존심이나 수치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이 화를 내며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했고. 화내지 말라 빌었고. 비틀거리는 당신한테 가지 말라고 했고. 그냥 가 버리라고 하고 싶었고.

그래도 난, 말이 통하고 나를 해치지 못할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혼자 있는 순간에는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버틸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당신이 화를 내어 그 말과 행동으로 나를 상처 주고 아프게 만들고 대답을 요구하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를 학대했다.

때리라고 내버려 뒀다. 그거 좀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과 함께한다는 점부터가 이미 잘못된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나는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이게 옳다는 기분도 들었다.

죄책감. 책임감. 인간성. 당신의 다친 다리는 내게 그 모든 것을 요구했다. 날 서서히 말려 죽이는 당신의 화가 되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줬다. 그건 참 개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한 옳은 일을 할 때는 잘못됐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을 두고 도망가는 것. 그때 내가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다. 스스로 당신 옆에 있어 놓고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게 너무 우습고 슬퍼서 울었다.

해방감이라는 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있는 걸까 싶었다.

아, 나는 정말. 착하거나 좋은 사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의 죄책감과 책임감과 인간성은 결국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것들을 내 위로 못 두는 사람이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맛보고 싶다면 밑바닥까지 떨어져 보면 된다. 가식도, 동정도, 내숭도 없는 온전한 사람의 면모를 느껴 볼 수 있으니까.

그건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나는, 화를 내는 당신에게 가지 말라고, 가라고 했으면서 내가 도망쳤다.

당신이 누구였는지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이 아니라 당신‘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도망을 친 건 나였으니까.

눈을 떴다. 더듬는 기억이 길게만 느껴졌는데 아직 우리는 복도를 뛰는 중이었다. 힘없이 고개를 드니 이호연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네가 나한테 화 안 내면 좋겠어. 아니, 아무도 나한테 화를 안 내면 좋겠어.

그러면 나는 또 그 화에 가만있다가, 가만히, 가만히 있다가. 혼자 못 참고 도망가 버릴 테니까.

타인의 화에 맞대응하는 건 이제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화라는 감정이 오갈 만큼의 관계를 맺는 것도 싫었다. 나는 그 서럽던 감정들을 다시 느끼는 것이 이제는 싫었다.

그래서 툭하면 ‘괜찮다’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그 말을 하면 어떤 형태의 감정이든 선이 그어지고, 어떤 사람이든 선이 그어졌다.

그 말을 하면 아무도 그 선 이상을 넘어오고자 하지 않았다.

“…나 괜찮아.”

“안 괜찮아요!”

“…….”

그런데 넌 자꾸 내가 안 괜찮다고 해. 그래서 네가 가끔은 좀 싫어. 넘지 말라고 쳐 놓은 선을 자꾸 넘어서.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넘어와 놓고 네가 화가 나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는데. 도망가는 것 말고는…. 이제 모르겠는데.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축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급한 얼굴로 뛰던 이호연이 일단은 걸음을 멈췄다.

머릿속이 깨끗했다. 정신이 맑았다.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것을 마주했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울하고, 근사하거나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그랬다. 정말, 그냥 그랬다. 이제는 옛날얘기일 뿐이니까.

처음으로 풀린 암시의 결과물에 대한 내 감상은 그 정도였다. 아. 괜찮다고 말 못 할 정도는 아니구나.

어찌 된 것인지 몸을 짓누르는 것 같던 감각도 사라졌다.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걱정 가득 담긴 회색 눈을 보며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미안. 화내지 마.”

마지막 말은 앞의 말보다 작고 흐렸다. 나는 이번에도 잘못된 것을 하며 옳다 느끼고, 옳다 하는 일을 하며 잘못됐다는 기분에 빠질까?

“그건, 이제 됐으니까 일단 힐러한테….”

“아냐. 안 가도 돼.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두어 밤은 지나야 돌아올 줄 알았던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한밤중 여우의 장난에라도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수군거렸다. 나는 이호연의 어깨를 톡톡 쳐, 내려 달라고 요구했다.

잠시 고집부리던 이호연은 재촉 어린 내 손짓에 결국 나를 조심히 내려 주었다. 맨발에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선뜩하도록 선명한 감촉이 이쪽이 현실이라는 것을 더 확실히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왜 갑자기 암시가 풀린 걸까. 아무런 징조도 없이.

“…….”

이게 그건가? 대가. 에스텔리니움이 말한 미래를 엿보는 것에 대한 대가. 그런데 왜 하필 내가 지워 버린 기억이 대가라는 걸까.

그 생각을 하자 누군가 내 귓가에 속닥이듯 어떠한 말이 떠올랐다. 미래를 엿보았다면 과거도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고.

흰 선으로만 구성되지 않은 온전한 나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내 가까이에 있는 이호연에게만 들릴 정도인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트로노미는 내게 운명의 끝, 실의 끝자락을 엿보여 주었어.”

그것을 마주 본 나는 무력함을 느꼈다. 헛웃음이 나왔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야. 모시는 거야. 이 말뜻은 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어.”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해요.”

이호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예린이나 주세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막 걸음을 옮기려는 나를 이호연이 붙잡았다.

“?”

“맨발이잖아요. 추워요.”

“아….”

멍하니 내 발을 바라보는 나를 이호연이 다시 안아 들었다. 조금 전과 달리 차분히 나를 안아 드는 모습에 복도에 서성이던 직원들은 안심하기라도 한 건지 곧 제 갈 길을 가며 흩어졌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나는 여태껏 입을 다무는 나 때문에 생긴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배려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호연이 왜 내게 딱 맞게 행동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괜찮다는 내 말을 부정하는 것과 입 다문 내게 굳이 질문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의 걱정이자 마지막 자제심이었다. 그 이상 내가 그어 놓은 선을 넘으면 내가 도망치리란 걸 어렴풋이 눈치챈 그의 자제심.

그렇게까지 나를 눈치챈 네가. 나조차 제대로 모르는 내 행동의 의미를 눈치채는 네가, 나는 역시 조금 싫은 것 같았다.

쭉 이어진 복도를 걷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그곳은 병실이었고, 나는 그 병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나를 한 팔로 안아 들고 문에 노크를 한 이호연이 문을 열었다. 내가 있던 병실과 달리 환하게 불이 켜진 병실 안에는 주세진과 강유진 그리고 이예린이 있었다.

이예린의 모습을 본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이예린이 웃었다.

“나름 멋지지 않아요? 투톤으로 염색한 것 같아서 나는 마음에 드는데.”

“…….”

샛노란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바깥쪽의 머리는 그대로였으나 안쪽의 머리카락이 모두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개성 넘치는 이 시대에 더 개성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나는 나름 마음에 드니까.”

이예린의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의 손에는 완전히 박살 난 아스트로노미가 들려 있었다.

“부디 내 예언이 최고의 예언이었길 바라요. 그렇게 피 토하는 예언은 처음이었거든요.”

“최고의 예언이었어요.”

나를 의자에 앉혀 준 이호연이 담요 하나를 들고 와 내 무릎 위에 덮어 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힐끔 보다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은, 지금은 이 일부터가 먼저였다.

“아스트로노미는 내게 운명의 끝,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의 결말을 엿보여 줬어요.”

“무엇을 봤나요.”

“…나는. 테오그라젠스의 죽음 이후를 봤어요.”

내가 본 것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수백, 수천 개의 운명 중 하나. 기어이 내가 신을 죽인 이야기의 마지막.

“그곳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내 말에 집중하던 이들의 낯이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뭐라 답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피곤함에 깜빡이는 눈을 하며 천천히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러다 잠이 들었다. 몸이 아직 제대로 회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잠들어 있던 병실의 천장이 보였다. 부어서 저릿한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알게 된 것들을 차분히 되짚어 보았다.

노아 이스벨라의 세계의 비밀. 둘로 나누어진 원래는 하나였던 존재들. 그것은 균형이었다.

내가 본 미래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이 세상의 균형의 추이자, 세계의 일부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맞물려지지 않는 균형 속에 또 다른 하나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하늘이자 세계요, 땅이자 세계인 그 두 신의 존재의 부정으로.

랑과 또 다른 하나가 내게 한 말은 경고였다.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인 신을 죽이는 방법을 실행하지 말라는 경고.

그것의 결괏값을 직접 눈으로 보니 차마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한 운명의 실이 존재했다는 것은 내가 신을 죽이는 것에 성공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 신격을 지닌 존재를 죽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나를 행동하지 못하게끔 했다. 테오그라젠스는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서 그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또한 천공 섬의 나비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신, 테오그라젠스를 죽이고자 했던 건가?

완연한 보랏빛 눈을 휘며 성자와 같은 얼굴로 자애롭게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알았냐 알지 못했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만약에 테오그라젠스의 죽음이 모든 것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고자 했던 거라면.

천공 섬의 나비는 잠재적 적이나 다를 게 없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다시 얻기 위해 새로 태어난 존재. 그는 이번에도 제 신의 목을 원하고 있었다.

손을 쭉 내밀어 시야에 담았다. 운명의 끝자락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테오그라젠스를 어떻게 죽인 걸까. 신이란 존재가 죽을 수 있는 것인가.

방법을 안다면 뭐라도 생각날 것 같은데.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온 햇빛이 내 손 위에서 따스하게 반짝였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호연이 나를 보며 잠시 멈칫거리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안녕.”

내가 아스트로노미로 인한 반동으로 쓰러지고, 과거의 기억을 헤맨 이후 우리는 어딘가 어색하게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멋대로 잠들어 버리지 않았다면 조금은 이 어색함이 덜했을까 싶었다. 머뭇거리다 들어오는 그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나를 걱정하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도 않고 몸이 가는 대로 행동한 나에 대한 화 때문인가 싶기에는 오히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의자를 끌고 와 앉은 이호연이 들고 온 가방에서 통 몇 개와 수저를 끄집어냈다.

“죽 만들어 왔는데 지금 먹을래요?”

“나 이제 정말 괜찮아. 환자 아니라니까.”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뭐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반응에 잠시 멈칫거린 이호연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아스라이 흘러들어온 햇빛이 하얀 머리칼과 속눈썹 위에서 노닐었다. 반짝이는 금실과 은실의 조화 같았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환자 취급을 받기엔 현재의 내 몸 상태는 너무나 멀쩡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며칠은 갈 것이라고 생각한 아스트로노미의 반동이 사라지며 오히려 전보다 몸 상태가 좋아졌다.

피로함에 지쳐 잠든 사이 남들 몰래 내가 있는 곳에 들렀던 이예린에게 잠에 젖은 목소리로 그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는 이예린의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부러워 죽겠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보며 나는 웃었다.

혹시 그녀는 뭘 알지 않을까 했지만, 이예린의 표정 말투 등을 보았을 때 따로 숨기는 점은 없는 듯했다.

다만 내가 옛날에 있었던 일을 보게 되었다고 했을 때는 영 좋지 못한 얼굴을 했다.

‘과거를 보는 건 미래를 보는 것보다 더 위험해요.’

‘보통 반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미래는 수백, 수천 갈래의 가능성 중 하나를 기어이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죠. 그 노력 부분에서 대부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과 같아요.’

‘…….’

‘반면, 과거의 것은 단 하나. 그것을 엿보았다면 대가는 더 지독하죠. 그것도 예언자가 아닌 당신이 그것을 엿보았다면. 아마 어떤 식으로든 몸에 변화가 일어나거나, 무언가 바뀌거나 할 거예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이예린에게 차마 사실대로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 말하며 슬며시 웃는 나를 그녀는 한숨 쉬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남들 눈을 피해 병실을 나서는 그녀를 보며 알 수 없을 사실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본 과거는 두 가지라는 걸.

하나는 내가 지워 버린 기억. 그리고 또 하나는 아주 먼 옛날 어느 하얀 여우의 이야기.

그것은 내게 답하라고 했다. 그 여우의 말에 내가 입을 열었는지 아닌지가 불분명했다. 둘 중 무엇이 더 안 좋은 선택인지도.

다만 몸 상태가 멀쩡해지다 못해 오히려 전보다 좋아진 것 같은 것이 신경 쓰였다. 긍정적 변화로 인해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한없이 무거워질 것만 같았다.

“…….”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마냥 비현실적이게만 느껴지는 전생의 과거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 믿기지도 않는 전생이라는 것이 내 삶에 뿌리내려져 있었다.

랑이 말했다. 여우와 약속을 했다고.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추상적으로 답해 주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여우와 비형랑의 약속. 그 약속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정말 내게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약속의 주체는 내가 아닌 그 여우였으니까.

슬며시 눈을 뜨니 어정쩡하게 죽을 담은 통과 숟가락을 들고 있는 이호연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내가 자는 건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나 보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서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게 구는 와중에도 걱정의 기색을 못 지웠다. 그 얼굴을 보니 집에다가 연락 못 하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다가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 뒤처리 하느라 못 간다고 해 두었다. 괜한 걱정을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니 나는 남을 걱정시키는 짓만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인생 막사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가끔은 내가 나를 너무 막 대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죽을 휘적거리다가 입에 넣었다. 계란죽인가. 맛있었다.

하지만 이 찜찜하고 애매한 분위기 때문인지 대강 넘겨 버린 그 일에 대해서 걸리는 게 많아서 그런지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몇 숟갈 먹다 내려놓는 나를 보며 이호연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것을 힐끔 바라보던 나는 슬그머니 숟가락 위로 시선을 돌렸다.

“…….”

“…….”

뭘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숟가락에서 손을 떼었다. 그런 내 손을 바라보던 이호연이 나를 대신해 숟가락을 집었다.

그러고는 한 숟갈 뜨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흔들리는 시선은 최대한 내 눈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가 내민 것을 받아먹었다. 그렇게 몇 번 반복된 죽 먹여 주기를 받아들이며 나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가 한다면 그것은 당연하게도 대화였다. 우리는 상대가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해서, 혹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도 묻지 않는 것을 배려라고 믿었다.

우리 두 사람의 유대감은 대화보다는 함께했다는 것으로 쌓아 만들어졌다. 그래서, 말 몇 마디로 행동 몇 가지로 금세 망가질 수도 있었다.

걱정하고 심지어 화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래야 하니까, 라는 이유로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호연은 그런 내게 뭐라 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회피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툭툭 건드려 기어이 펑 하고 터질까 봐 두려워서 하는 도망이었다.

난 이호연의 말대로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 행동이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행위인가.

설령 네가 상처받거나 내가 상처받는가는, 솔직히 말하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상처 그것 좀 받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으니까. 죽지는 않지만 그게 어떤 기분인지 잘 알면서 나는 그렇게 행동했다.

‘류는… 가끔 지나치게 선을 긋는 것 같아요.’

그 말. 그건 단순히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다 알고 하는 말이었다.

너는 여기까지. 이 이상 넘어오지 마.

이호연이 말했던 선은 내가 그에게 그어 놓은 선에 대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 선이 무서워 내게 화낼 줄 모르는 것도 모르고. 혹여 자신이 화를 내면, 내가 그어 놓은 선 이상으로 감정싸움이 일어나면 내가 도망갈까 무서워하는 것도 모르고.

유난 떨지 마. 그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처음부터 유난스럽게 굴 이유 자체를 만들지 않는 거였다. 그건 생각보다 쉬웠다.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 화가 나는 일에 그저 괜찮다고 한다면. 어떤 관계든 쉽게 버리고 떠날 수 있게 선을 긋는다면 애초에 그럴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버릇처럼 똑같이 행동했다.

그래서 너는 내게 항상 맞추려고 하고, 먼저 매달리고,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싶은데도 잡을 수 없었던 거였다. 옛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화를 내지 않는 네 모습에 마냥 좋다고 웃으면서 너에 대해 깊은 고민 한번 해 본 적 없던 나는 참 멍청했고.

내 잘못이었다. 빈약한 인간관계 같은 것도, 내가 사람을 상대할 때 진중하게 대한 적 한번 없이 그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넘겨 버린 그 모든 것들이.

웃으면서 밀어내는 나를 보며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그랬듯, ‘네’라는 답밖에 없게 만든 것도.

지나친 관대함은 폭력과도 같았다. 처음부터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니 너도, 나도 할 수 있는 답이 하나였을 뿐이었다.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 뭔지 알면서도 나는 몰랐다. 왜 다시 만난 부모님이 내게 한 번을 제외하고는 언성을 높인 적조차 없는지. 왜 내게 간간이 조심스럽게 구는지.

나는 나를 가장 먼저 버렸고, 그래서 조금 많이 일그러졌다. 그걸 그냥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지, 뭐, 라고 생각하면 다 편했다.

내 잘못이었다.

“화내도 괜찮아.”

뜬금없는 내 말에 이호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화, 안 났어요.”

“…차라리 네가 나한테 화를 내면 좋겠어.”

“…….”

자조적인 것에 가까운 내 말에 이호연은 눈을 내리떴다. 햇빛에 으스러져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 모습이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던 이호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무서워요.”

“…….”

“…내 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워요. 언제든 사라질 수 있어서, 그래서 무서워요.”

“차라리….”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버텼다면, 조금만 내가 겁내지 않았다면, 그랬으면 많이 달라졌을 텐데.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망상일 뿐이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는 닿지 못할 망상. 그것을 더듬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난 가끔 네가 싫어.”

“…….”

“괜찮다고 말하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잖아.”

묻어두면 겉으로 보기에는 대충 멀쩡해 보이는데. 내 말에 이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괜찮은 적 없었잖아요.”

아닌데, 아니라고 말을 못 하겠다. 결국 난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번복했다.

“…이기적인 말인 거 아는데, 난 네가 화 안 내면 좋겠어.”

네가 정말로 내게 화가 나는 순간이 오면 난 정말 안 괜찮을 것 같거든. 네가 내게 그런 식으로 화낸다면 난,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것 같아.

또다시 잘못된 것을 하며 옳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도 싫고, 옳은 일을 하면서 잘못한 것 같다는 연민에 빠지기도 싫어.

한없이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내 말에 이호연은 흐리게 웃었다.

“그럼 우리 다 이기적인 걸로 해요.”

“너는 왜?”

“이제…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하면, 가지 말라고 붙잡아 늘어질 거니까요.”

통과 숟가락을 침대 옆 협탁에 놔둔 이호연이 내 위로 엎드렸다. 다리 위로 흐트러진 하얀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도망가지 말라고 해도 돼요?”

“안 도망갈게.”

“도망가려고 하면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돼요?”

응. 도망 못 가게 붙들고 늘어져도 돼. 나도 그럴 거니까. 네가 나를 못 견디고 떠난다고 한다면 나는 너를 도망 못 가게 할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앞으로 걷거나 뛰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다.

누군가 봤다면 우리 둘 다 어딘가 일그러졌다고 할지도 모를 대화였다. 하지만 우리 둘이 좋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게 가볍게 넘겨 버리면 안 될까.

시선을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서성이던 인기척이 물러났다. 익숙한 그 인기척을 쫓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우리는 어딘가 일그러져 있기에 서로를 알아보고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살렸고, 너는 내게 다가왔다. 인제 와서 이런들 뭐 그리 이상할 일일까.

애틋하도록 비틀렸고, 슬프게도 사랑스러운 감정이었다.

***

내가 의료실에 입원해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다고 쉬는 동안 생각 외로 세상은 다시 조용해져 있었다.

여전히 전직을 취소당하는 황당한 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피 말리듯 줄줄이 떨어지던 하늘 조각 테러는 멈췄다.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도시 한복판에 괴물이 얍, 하고 튀어나오는 일도 사흘 동안 없었다고 한다.

나는 기자들의 카메라 및 장비를 박살 내 버린 것에 대한 영수증을 주세진에게서 받았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다 한숨 내쉬는 것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수증을 본 나는 가벼운 헛웃음을 지었다. 이참에 최신으로 싹 갈아엎었나 보다. 다행히도 무리가 가는 금액은 아니었다

리블에 들어오기 전 홀로 하늘 조각을 공략해 벌어두었던 비상금으로 그것을 해결했다.

의외였던 건 내 인성 논란 기사라도 써 내릴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는 점이었다. 기사 안 쓰는 대신 장비를 비싼 거로 고른 건가 싶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박살 내지 말라는 주세진의 잔소리를 듣는 것으로 그날 있었던 일은 마무리되었다.

방을 나가려는 내게 주세진이 말을 걸었다.

“아, 잠깐만….”

“?”

“…아니야. 나가 봐.”

뭔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주세진에게 오정인의 닉네임이 무엇인지 알려 줄까 하다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에 조용히 방을 나왔다.

방문에 기대어 서니 방 안에서 서성이는 주세진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역시 끼어들지 않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병실 앞에 서서 들어오지 않았냐고 물어봤자 서로가 곤란해질 뿐이었다. 하려다가 만 말이 뭔지도 대충 알 것 같고.

아마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 심리 상담을 제안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걱정을 알았으나, 싫었다. 그냥 싫었다. 나는 나를 온전히 돌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기에, 당분간은 그저 이렇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나를 마주 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어딘가 무섭고, 모든 게 꼬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대로 몸에 힘을 풀자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림자가 나를 삼켰다. 잠시 어둠을 눈에 담다 별스럽게 굴지 말자 다짐하고 이예린이 있을 병실을 향해 걸었다.

제 병실에 스르르 나타나는 나를 보며 이예린이 눈을 끔벅거렸다. 협탁에 놓인 망가진 아스트로노미에 한번 눈길을 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내게 이예린이 말했다.

“집이었으면 가택 침입이에요.”

“…….”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참 가볍게 굴었었지. 어쩌면 사람에게 선 긋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어 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나를 보며 이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슬며시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여긴 집 아니잖아요. 그런데 집수리는 다 끝났어요?”

“아뇨….”

이런, 괜히 말했네. 몸을 흔들거리며 발장난을 치다 이예린에게 말했다.

“테오그라젠스를 죽이면 이 세상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했잖아요.”

내 말에 이예린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나와 아무 말이나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어떤 주제든 나와 가볍게 대화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예린뿐이었다.

“그렇죠. 그런데 류가 신을 죽이는 걸 진짜 성공시켰다는 것도 놀라웠어요.”

나처럼 가볍게 굴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내가 좀 잘났거든요. 푸른 불꽃이라잖아요.”

화형이라도 시켜서 죽였나 보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그대로 뒤로 누웠다. 내 등에 다리가 깔리자 이예린이 끄악 소리를 냈다.

“어떻게 생각해요?”

“류 인성 파탄 났다고요.”

“테오그라젠스 말이에요.”

죽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말 그대로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흥으로 사람을 납치해 학살의 밤을 일으키는 신을 어떻게 모신단 말인가.

뭔가 방법 없나. 이예린이 입 속에 넣어 주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본인도 입 속에 과일을 쏙 집어넣었다.

이 자세 나름 편하네. 나른해지는 정신에 눈을 감았다. 그런 내 옆에서 뭔가 톡톡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슬쩍 눈을 떠서 보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이예린이 보였다.

괜찮은 척하면서 피 토하던 엊그저께보다 훨씬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 잠들면, 이호연한테 데리고 가라고 연락 넣어 줘요.”

“…가끔 보면 호랑이의 공주님 사랑은 정말 절절하구나 싶어요.”

“그래요? 내가 봐도 그런데.”

그래서 가끔 미안하고, 죄스럽다.

“둘이 잘 어울려요.”

“…….”

이예린의 말에 눈을 떴다. 나를 보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다 천장을 보았다. 그런 내게 이예린은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이호연 쪽이 져 주는 관계다, 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더라고요.”

“유감이네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람.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황금색 눈이 햇빛 아래 선명하게 빛났다. 그 눈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전 천칭 회장의 암살 같은 거요?”

주세진도 아직까지 물증 없고 심증만 있는 완벽 범죄인데.

“쉿.”

옛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이예린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확인 차 떠본 보람이 있었다. 나는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요. 대충 파악이 되더라고요. 류 성격이 어떤지.”

“욕할 거면 말하지 말아요.”

“욕은 아니에요. 그냥… 사람이 참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정을 잘 안 준다?”

욕 같은데.

미묘해지는 내 얼굴을 보며 이예린이 낄낄거렸다. 그런데 정확하기는 했다. 정이 없다기보단 선을 긋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남의 말을 아예 안 듣는다 싶을 정도로 잘 안 져 준다. 그런데 가만 보면 매번 이호연 쪽이 져 주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류가 져 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보여요?”

“네. 내가 보기에는 그래요.”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기 좋은 말이네.

몸을 뒤틀어 옆으로 돌자 이예린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번에는 내가 낄낄거렸다.

투덜거리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던지던 이예린의 낯이 서서히 굳어 가지만 않았다면 그 상태로 낮잠이나 잤을지도 모른다.

“이거…. 이거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뭔데요?”

진짜 내 인성 논란 기사라도 나왔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예린이 건네는 폰을 받아 기사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글을 읽을수록 내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기자들이 내 인성 논란 기사를 쓰지 않은 건 그런 사소한 것을 기재할 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영국에 나타난 아카샤의 괴물.

현재 에드워드 로거스는 중상이며 페이즐리 오스틴은 의식 불명 상태로….」

내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삿거리가 많았다.

「올리버 로스의 패배. 아카샤의 거대 괴물 앞에 무너진….」

「몽골의 끝이 다가오는가? 아카샤 공략으로 인해 전직자가 거의 없는 몽골에 다가온 위협….」

「이번 일로 인해 나라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판단되는 가운데….」

「땅의 반절을 잃은 것과 다름없는 현 러시아 사태에 대해….」

「인류는 제2의 지옥도를 맞이하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의….」

“…….”

무료한 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 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왜 하필 우리는 신에게 놀아나는 것들이 되어야 했던 걸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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