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내 손에 쥐어진 하늘 조각을 살펴본 강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이런 케이스는 본 적이 없어요.”
“역시 그런가요.”
하늘 조각의 위에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진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금이 간 조각 위에는 반쯤 지워진 문구가 흔적을 남겨 두고 있었다.
강유진이 핀셋으로 조각을 들어 조심히 펜던트 안에 집어넣었다. 은색 줄에 달린 조각이 흔들거렸다.
“아공간 반지 안으로도 안 들어간다고 했죠? 일단 목걸이 형태로 만들어 줄 테니까 이렇게 들고 다녀요.”
“고마워요. 솜씨 좋네요.”
“제가 좀 다재다능하죠.”
목에 걸린 차가운 조각 위를 더듬다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강유진이 의자를 돌려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걱정거리 있어요? 얼굴이 반쪽이 됐어. 밥은 잘 먹고 다니죠?”
“저 아까 닭 칼국수에 밥 한 공기까지 먹었는데요? 디저트는 밀푀유.”
밀푀유는 두 개나 먹었었다. 항상 그랬듯 리블의 사내 식당 음식은 참 맛이 좋았다.
“활동량 보면 더 먹어야 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런가. 생각해 보니 다른 리블 팀 사람들도 엄청나게 먹었던 것 같기는 했다. 활동량으로 따지고 들면 안 먹은 건 맞네.
“혹시 모르니까 어디 안 좋은지 정밀 검사나 건강 검진이라….”
삑―. 삑―. 삑―.
“…또?”
“미치겠네. 오늘만 몇 번째야.”
강유진이 끄앙 소리를 내며 머리를 헤집다가 뒤로 넘어갔다. 입을 헤벌리고 잠시간 넋 놓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구름을 불러왔다.
“A가 하나 B가 둘. 일단 B 하나는 천칭 팀 보내고, 다른 B는 다른 길드에 연락하고 A는….”
“갈 거니까 그렇게 울상 짓지 말아요.”
“…류랑 리블 팀, 지금 공략하고 돌아온 지 30분밖에 안 됐어요. 지금 또 가면 노동청 신고감이에요.”
“하지만 지금 A급으로 판정 난 하늘 조각을 공략할 만한 사람들도 우리밖에 없죠. 내가 알기론 다른 길드의 공략 팀도 대부분 다른 조각 공략에 들어갔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강유진이 괜히 우는소리를 내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끝없는 하늘 조각의 사람 피 말리기가 사흘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전부터 하늘 조각이 떨어지는 빈도가 늘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요즘 들어 그 횟수가 급증하고 있었다.
때문에 랑의 공간으로 가는 하늘 조각을 강유진에게 보여 주는 것도 사흘이나 걸렸다. 손목에 걸어놨던 머리끈을 빼 머리를 올려 묶었다.
옷 안 갈아입기를 잘했네. 두루마기 휘날리며 달리는 내 모습이 익숙해진 리블의 직원들이 나더러 지나가라며 복도 벽 쪽에 바짝 붙어 주었다.
휴게 공간에 늘어져 있다 일어난 리블 팀은 내 등장에 멍한 얼굴을 했다.
“하하하하. 돌겠네.”
손민호가 중얼거렸다. 선잠이 들었던 것인지 이나연이 하품을 하며 오정인의 목에 매달렸다. 내 손을 잡은 이호연이 손민호의 등에 손을 갖다 댐과 동시에 오정인이 이동했다.
피로에 눈이 가물가물한 상태인 오정인이 이동하기 위해서는 서로 신체가 맞닿아 있어야 했다.
“…지금 우리 오늘 이거 세 개째였나.”
손민경이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평범한 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테니 오히려 다들 저 정도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새벽에 하나, 점심쯤에 하나, 그리고 오후에도 하나. 자다가 하나 더 나오는 거 아니겠지?”
“와, 그렇게 말하면 꼭 그렇게 되더라.”
“설마….”
오정인과 이나연의 말을 들으며 이호연과 눈을 마주쳤다. 요새 들어 갑자기 늘어난 하늘 조각 공략 횟수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인력난과 체력이었다. 나는 아직 말짱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조각 공략을 하면 사람인 이상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공략부터, 스겜 부탁합니다아….”
박상호가 하품하느라 쩍 벌어진 입으로 말했다.
병아리도 지금 사흘째 결석계를 쓰는 중이었다. 강유진 말대로 노동청 신고감이기는 하지만 신고하기도 참 뭐했다.
잘못하면 목숨이 오가는 문제를 두고 무조건 내 편의를 찾을 수는 없는 거였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힘들면 나 혼자 다녀올까요?”
내 물음에 이호연이 옆에서 움찔거렸다. 자신한테 기대는 손민호의 머리를 밀쳐 버리던 손민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말했다.
“그건 아니죠. 저흰 조별 빌런 같은 사람들 아니에요.”
“혼자 다녀와도 되는데.”
“류도 사람인데 힘든 건 똑같죠. 몸 안 힘들다고 정신적으로까지 안 힘든 건 아니잖아요.”
간질거리는 속내를 숨기고 애꿎은 하늘 조각을 살펴보았다. 커다란 조각 위에는 눈 부신 빛을 내뿜는 게이트가 연결되어 있었다.
“…….”
마티. 테오그라젠스의 사도이자 하늘 조각을 매개체로 게이트를 연결하는 역할. 요즘 들어 계속 떨어지는 조각이 그녀와 관련이 있으려나.
아니면….
손을 들어 목 부근을 더듬었다. 은색의 얇은 체인 줄 끝에 걸린 하늘 조각은 예쁜 장신구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여기서 고민하고 있어 봤자 나오는 건 없었다. 일단은 공략부터.
***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공략을 끝내고 출출하니 간식을 털러 식당 가자는 리블 팀을 따라 복도를 걸을 때였다. 주세진 휘하에 비서님과 몇몇 사람들이 바쁘게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업 팀이라고 해야 하나, 리블의 다양한 사업 및 다른 길드와의 일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 직원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끼엥 하는 얼굴로 뛰어가는 비서님을 붙잡아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그게….”
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우리 전부를 데리고 주세진의 방으로 갔다. 간식 털려다가 길드장과 대면하게 되는, 다른 직장이었다면 심장 쫄깃해질 경험이었다.
머리를 짚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주세진은 우리를 보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비서님을 보는 눈에 담긴 의미가 얘네가 왜 여기 있나요? 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을 까먹고 있던 박상호가 슬그머니 뒷걸음질했다. 왜 그러나 싶었지만 그를 뒷걸음질 치게 만든 원인일 주세진은 그런 그의 상태를 모르는 듯싶었다.
뭐 잘못했나?
눈이 마주치자 박상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음으로써 내게 아무 말 안 하기를 원하는 시그널을 보냈다.
그런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다 그냥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남의 일에 크게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쟤가 잘못 해 봤자 뭐 얼마나 크게 잘못했겠어, 하는 생각도 있었다.
주세진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앉아. 어차피 알게 될 거, 지금 듣는 것도 좋겠지.”
“?”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쪼르르 소파에 자리 잡고 앉은 우리의 시선을 마주 보며 주세진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전직자 관리 정부 기관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던 거 다들 기억하지?”
주세진을 미국으로 보내 버린 다음 뚝딱, 해 버리려다가 실패했던 그거? 갑자기 그거는 왜…. 설마 정말로 만들어졌나?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주세진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만들어지지 않아.”
“네?”
내 되물음에 주세진은 복잡한 낯으로 다시 말해 주었다.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모든 계획이 다 취소됐어. 처음부터 다시 계획해야 할 판이니 일단은 미뤄 두겠다는 심보겠지.”
“왜요?”
그 난리를 쳤으면서 인제 와서 안 만든다고?
“…사흘 동안 공략만 하고 있었으니 모를 수밖에 없지.”
작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린 주세진이 천천히 이 일의 전말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최근 하늘 조각이 떨어지는 횟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기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이미 전직한 사람 중 그 전직이 취소되는 사람들이 생겼지.”
“전직이 취소되었다고요?”
이나연의 물음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 취소라니. 그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다.
“기현상에 해당하는 사람은 일반 전직을 한 이들이며 그중에서도 전직관에게 재능 평가를 좋지 못하게 받은 이들이야. 다만 전직이 취소됐는지 아닌지는 당사자만 아는 일이지.”
“아….”
그래서 기관이 만들어지는 게 취소됐구나. 전직 취소됐다고 말하면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는 초기의 목적처럼 전직자를 감시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전직이 취소가 되나? 상위 호환으로 재전직은 되지만 취소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 건에 대해 이야기하자 주세진의 낯이 더 안 좋아졌다.
“전직이 취소된 사람들 앞에는 시스템 창이 나왔다고 했어. ‘당신은 자격 미달. 미약한 힘은 가질 필요 없는 것 아닌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해.”
“…약 올리는 말투가 뭔가 익숙하네요. 이모티콘은 없었대요?”
“…있었어.”
테오그라젠스다. 테오그라젠스가 또 다른 하나가 안배한 전직에 간섭해서 다시 그 힘을 뺏어가 버린 거야.
일반 전직자, 그중에서도 재능 평가가 낮은 사람들만 골라서 가져갔다는 건 간섭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건가.
그런데 갑자기 왜? 왜 그런 게 가능해졌지?
‘[ㅊᅟᅡᆽ았다. 또 다ㄹᅟᅳᆫ 하나 ᐕ]’
“…….”
당했나? 테오그라젠스의 목표는 또 다른 하나를 집어삼켜 다시 하나가 됨으로써 온전해지는 거였다.
공략해야 하는 조각이 늘어난 것도, 전직을 취소당한 것도 무료한 신의 간섭일 것이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간섭할 수 있는 범위가 늘었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혹시 아는 사람 중에 앞서 말했던 사람들과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 봐. 위험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주세진의 말에 리블 팀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몇몇은 낯을 굳혔다. 그들 중엔 이호연도 있었다. 그는 주머니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주세진이 말한 조건에 맞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명 있었다. 서정은.
“일단 오늘은 다들 퇴근해. 더 이상 공략해야 하는 하늘 조각은 없으니까.”
“자다가 불려올 것 같은데 여기서 자도 돼요?”
슬그머니 손을 들고 묻는 김수혁의 말에 주세진은 영 좋지 못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테오그라젠스를 노동청에 신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호연이 내게 와 어깨를 톡톡 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본가에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버지가 전직자라고 했었지. 내가 데려다줄까?”
내가 알기로 이호연의 부모님은 저 멀리 땅끝 마을에서 살고 계셨다. 지옥도 당시 그나마 괴물이 덜 나오던 곳이 땅끝 마을이었기에 그곳으로 가셨다고 했었다.
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주세진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보내 주면 되니까.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뵈려고 했었고. 아무래도 직접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니까.”
“왕복하고 쓰러지는 건 아니죠?”
“…그 정도 거리는 문제 안 돼.”
그런가. 내 기억 속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저한테 얍얍 해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오정인이 옆에서 손을 들며 말했다.
“땅끝 마을이 어딘지 알아요?”
“…앗, 맞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내 말에 오정인이 시선을 피했다. 길치, 방향치이신 분께 맡기기엔 불안한 거리였다.
그만 나가 보라는 주세진의 말에 걸음을 옮기다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는 이호연에게 웃어 주며 말했다.
“나도 오늘은 우리 집에 들어갈 거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내 말에 안도한 듯 이호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혁이 경악한 얼굴로 우리를 보며 물었다.
“둘이… 같이 살아요?”
“어…. 그런가?”
같이 산다기엔 나 쟤네 집에서 일주일도 안 머물렀는데. 그마저 최근 사흘은 리블 사옥 내 기숙사에서 잤다.
김수혁은 이호연을 노려보며 익, 익, 하는 소리를 내다 달려나갔다. 주세진은 한숨 내쉬었고 이호연은 귀찮은 얼굴을 했다.
“지금 바로 가자.”
주세진의 말에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호연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고 방을 나오자마자 달려나가 김수혁을 붙잡았다.
“으억!!”
“우리, 얘기 좀 할래요?”
놀라 동그랗게 떠진 붉은 눈을 보며 나는 웃었다. 우리 사이 무슨 사이, 대화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대화를 꼭 해야 하나요?”
“내가 보기엔 필요성이 절실한 것 같은데요.”
달리는 우리 둘이 스쳐 지나갔던 리블 팀이 뒤편에서 걸어왔다. 대충 김수혁에게 파이팅 하는 자세를 취한 그들은 그렇게 우리를 마저 스쳐 지나갔다.
“구해 주고 가!”
“우린 식당 루팡이 되기 위해 떠나야 해! 내일 봐!”
해맑은 오정인의 인사에 김수혁이 몸에서 힘을 쭉 뺐다. 김수혁을 붙들어 매고 그에게 물었다.
“걷기 힘들면 안아 줄까요?”
“…둘러업어 주세요.”
원한다면야. 복도 달리는 것으로 남은 체력이 방전된 마법사를 둘러업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서 만난 직원들이 그런 우리를 보다 태연한 얼굴로 다시 걷는 것이 보였다.
이게 그렇게 평범한 일상의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기도 웃기지만, 여기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좀 비범한 것 같았다.
***
대화 단절을 원하는 몸짓인가?
휘핑이 잔뜩 올라간 초코프라페를 입에서 떼지 않는 김수혁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좀 더 기다려 줄까 하고 앞에 놓인 딸기프라푸치노를 먹었다.
어둑한 옷차림에 전혀 안 어울리는 하얀 휘핑크림 위에 딸기 시럽이 가득 뿌려져 있었다. 직원이 서비스라면서 한가득 뿌려 주었다.
응원은 덤이었다. 옷으로 판별되는 아이덴티티는 이럴 때 좋았다.
길드 사옥 내 카페에선 내가 두루마기를 입든 드레스를 입든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내 앞에 김수혁은 로브 뒤집어썼는데, 뭐.
직원 혜택으로 받은 맛난 음료에 케이크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으며 김수혁을 보았다. 내 앞에 있는 초콜릿 케이크가 사라질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다.
김수혁 앞에 있는 당근 케이크를 뺏어 먹으니 그는 아예 그것을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안 도망가는 거 보면 대화할 의지는 있는 것 같은데.
“아, 혹시 나, 지금 무서워요?”
불의 감각이라는 것이 내 마음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었다.
김수혁으로선 내가 바로 앞에서 당근 케이크를 뺏어 먹는 것이 호랑이에게 당근 바치는 토끼의 심정일 수도 있었다.
내 물음에 간신히 컵을 입에서 뗀 김수혁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맨날 내가 있을 때면 있는 듯 없는 듯 굴던 것과 마찬가지로 급소심해진 모습에 곤란한 웃음만 나왔다.
빨대로 컵 안을 휘젓다가 그에게 물었다.
“나 싫어해서 그래요?”
“그, 어…. 안 싫어해요…. 그때는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불 마법사들이 갖는 그런, 좀 같잖은 자존심…?”
불 마법도 아닌 정신계 마법의 매개체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심리? 에드워드 로거스도 그랬지.
그쪽은 나름 받아들인 것 같기는 하지만.
바타르가 이상했던 것이지 에디와 김수혁이 정상인 거였다. 물론 정상적인 거라고 갑자기 시비 걸면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 날 좋아한다고 했던 그거 때문에 그런가.”
내 중얼거림을 들은 김수혁이 테이블이 덜컹거릴 정도로 몸을 움찔거렸다. 누구 친구 아니랄까 봐 놀라는 포인트가 똑같은 거 같았다.
“…포기했습니다.”
“그래요?”
“넵. 옛날에 마음 접었습니다.”
시뻘게진 얼굴로 말하는 김수혁을 보며 나는 웃었다. 곤란하다는 듯 제 머리를 헤집는 것이 순진하다 하면 순진하다고 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우리 처음 만난 거 길드 내에서가 아니에요?”
김수혁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다. 물론 본인이 한 말이 아니긴 했지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김수혁을 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머리카락까지 붉은 불 마법사는 드문데도.
제 머리끝을 만지작거린 김수혁이 슬그머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옛날에, 일반 전직자일 때 만났어요.”
진짜 만난 적이 있었구나. 언제지? 고개를 기울이는 나를 보며 김수혁이 말을 이었다.
“기억 안 날 거예요. 그때는 머리가 이런 색도 아니었고, 그렇게 눈에 띄는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아….”
확실히… 불 마법사 자체는 흔했다. 머리카락 색도 평범한 색이었던 당시면 기억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길게 심호흡을 한 김수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류가 날 구해 줬었어요.”
“그래서 좋아했어요?”
“아뇨. 그때는 그냥 X나 멋있고 무섭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고요. 농담이 아니라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어요.”
거참, 솔직하네. 떨떠름한 내 얼굴을 보며 김수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음…. 내가 좋아하게 된 건 그다음이에요. 그때 나는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배신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다 괴물한테 죽을 뻔했을 때 류가 짠! 등장한 거예요.”
“…….”
부끄러울 정도로 클리셰적인 등장이었다. 내 얘기였지만 나는 무감한 심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적이 너무 많아 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배신한 자식 목을 이렇게 탁 잡고 죽은 괴물의 입 속으로 집어넣었어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제 목을 틀어쥐는 시늉을 한 김수혁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비슷한 짓을 하도 많이 해서 잘 모르겠다.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사람 괴롭히는 게?”
그거 반한 게 아니라 흔들 다리 효과로 인한 착각 아니야?
내 의문이 무엇인지 대강 눈치챘는지 김수혁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뇨.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사람을 응징한다는 거요. 원래 그런 배신을 당해도 똑같이 갚아 주는 거 힘들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행한다는 것은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은 결과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낡은 기본 지팡이를 들고 주저앉아 나를 보던 흔한 불 마법사.
“난 그때 류가 신체 계열 전직자인 줄 알았어요.”
“…친구는 닮는다더니.”
“네?”
되묻는 김수혁에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빨대를 집어 자신의 음료 위 가득 쌓인 휘핑크림을 헤집었다.
“그때 진짜 무서웠거든요. 그리고 화가 났었어요. 나는 앞으로 그 순간에 느낀 공포를 평생 갖고 사는데 이 자식은 아니겠구나 싶어서. 내가 저 자식을 죽여도 정작 달라지는 것도 없겠구나 싶어서.”
“…….”
“근데 덜덜 떨면서 괴물 이빨 붙잡고 기어 나오는 그 자식 모습 보니까 답답한 게 풀렸었어요. 머릿속으로는 그 녀석 목을 잘라 버리는 것까지 생각했었는데….”
“…….”
“손이 떨려서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 자식이 괴물 입 속으로 들어갈 때도 사실 무서웠어요. 그놈이 죽을까 봐. 난 생각은 해도 남을 죽일 용기 같은 거 없었거든요.”
그게 정상이었다. 침묵하는 나를 보며 김수혁이 웃었다.
“언제든 내가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 살면서 그랬다는 점에서 나한테 화도 났어요. 그런데 류가 나타났잖아요. 딱 무섭기만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벌줬잖아요.”
“나랑 원수 사이인 것도 아닌데 죽일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예쁘게 잡혀 있던 크림은 뭉개졌다. 초코 시럽과 뒤섞여 원래의 색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을 보며 그는 말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좋아했어요. 적당히 벌주고 같은 짓 못 하게 겁주면서 그 옆에서 칼 들고 덜덜 떠는 나한테는 사람 죽일 각오 없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해 줘서요.”
“…출제자의 의도를 잘 맞혔네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하는 내 말에 김수혁은 지금까지 봤던 웃음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 고민했어요. 결과적으로 나는 멀쩡한데 저 사람은 죽어야 할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는가. 그런데 지금 안 죽이면 나중에 내가 죽는 거 아닐까.”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때 안 죽여서 다행이다.”
흐릿해진 웃음을 보며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내가 말렸다고 김수혁이 그 이후에도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후엔 적절한 각오 정도는 생겼을 테고, 상대의 목숨의 무게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 정도면 그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최소한의 선을 보는 눈은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겠지.
“근데 류가 불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되니까 뭔가 막 기분이 그렇더라고요. 부럽고 멋있는데 슬프다? 질투 난다고 해야 하나.”
“원래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내 말에 김수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료를 쭉 들이켠 김수혁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호연이랑은…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걔, 류 되게 좋아해요. 내가 옆에서 봐서 알아요. 변형 게이트 안에서 두루마기 뒤집어쓰고 돌아온 날에 걔가 웃었는데…. 나 그렇게 웃는 모습 처음 봤어요.”
“…….”
“왜 그렇게 실실거리냐고 물으니까, 류가 자기를 기억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하나가 뭐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
뻘쭘하다는 듯이 제 머리를 긁적이던 김수혁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자꾸 이상하게 굴고 좀 그런 건… 미련도 있는데 나한테는 놀러 오지 말라고 자기 집 위치도 반년 가까이 제대로 안 알려 줬으면서, 류는!”
김수혁이 테이블을 쾅 쳤다. 그러고는 손이 아픈지 엎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가벼운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엎어진 자세 그대로 김수혁은 찡얼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친구인 건 맞는데 맨날 나한테 선 치는 게 느껴졌거든요.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걔는 사람이라면 죄다 선 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난 더 친해지고 싶어서….”
“집 비번도 알려 줬는데 이호연은 집 주소도 제대로 안 알려 준 게 서운했던 거예요?”
내 말에 김수혁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걔는 사람한테보다 동물한테 더 친절해요. 회사 옥상 정원에 사는 고양이들한테 하는 거 반만 해 줬으면 나도 안 서운했을 거예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나름 이호연 편을 드는 말을 했다.
“호랑이는 영역 동물이라 그렇다고 생각하면 편해요.”
“…사실 걔 집 가는 건 옛날에 포기하기는 했어요. 뭐, 요즘에는 전보다 벽치는 것도 덜하고.”
김수혁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 덕분이라는 건가. 엎드린 상태로 나를 올려다보던 김수혁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이제 안 그럴게요.”
“이제 끄아앙거리며 안 도망 다닐 거예요?”
“그렇게 귀여운 소리 낸 적 없어요.”
나는 김수혁의 손을 잡아 흔들거렸다.
“근데 그거 알아요? 난 그렇게 오지랖 넓은 사람은 아니라는 거. 원래 그렇게까지는 안 해요.”
“?”
“말하다 보니까 생각나서요. 눈에 띄었거든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시선을 끈 건 한 명이었어요.”
“…….”
“실력 좋은 마법사라고요.”
김수혁의 표정이 환해졌다. 불사자를 다루는 법을 익힌 후 에드워드 로거스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당근 케이크는 내 거.”
“…한입만 주세요.”
나는 키득거리며 그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김수혁이 포크에 찍힌 케이크를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나는 웃고 있던 낯을 굳히며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어?!”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트린 다음 그 아래에 숨었다. 유리창이 깨지며 그 조각들이 테이블을 맞고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포크를 들고 멱살 잡힌 채 멍하니 있던 김수혁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포크가 쨍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게 무슨….”
김수혁의 말에 나는 대답할 틈이 없었다. 민간인인 카페 직원들과 다른 리블의 직원들을 감싸던 그림자를 풀어 그들의 허리를 잡아 문 앞에 내려 주었다.
“그대로 뛰어서 나가요!”
어벙한 얼굴을 하던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침착한 얼굴로 달려나갔다. 하필 주세진 없는 날에 이게 뭔 일이야.
박살 난 유리로 된 벽면을 보았다. 앞으로 걸어가 벽을 짚고 밖을 내다보니 저 밑에 작은 인형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도로 한가운데가 기다란 모양으로 박살 나 있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차가 엉키었는지 충돌 사고 난 차들이 사람들의 도주를 막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 사태의 범인은 보이지 않았다. 전직자가 저지른 테러인가?
그 잠깐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빨리 밖으로 나가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아는데….
“…그런데 왜 난 아닌 것 같지.”
내 옆으로 뛰어온 김수혁이 그런 내 말에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마법사의 감보다는 더 본능적인, 몸에 새겨진 감각에 더 가까웠다.
손을 내밀어 그림자에서 슬며시 나온 제등을 들었다. 내 발치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내 주변을 맴돌았다.
“뭐 하려고요?”
“쉿.”
눈에 안 보이고, 기척을 죽였거나 숨죽이고 있거나. 하늘 조각의 자원을 섞어 만든 벽을 부수고 도로에 저 정도의 크레이터를 남길 만한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자꾸 내 시야는 그쪽으로 향했다.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림자가 내 의지를 따라 움직였다.
사옥의 벽을 따라 움직이듯 스멀거리던 것이 추락하듯 빠르게 아래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뭔가가 그림자에 박혔다.
“뭐야?”
연보라 빛 액체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 아래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불태워 버렸다.
잠시 고민하다 김수혁에게 잘 지켜보라고 하고 창고로 들어가 밀가루를 들고 나왔다.
“류?”
포대를 찢어 그대로 밑으로 쏟아부었다. 그림자에 박힌 자리에 밀가루가 소복이 쌓였다. 그것은 거대했고 꽤나 익숙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카멜레온?”
김수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낯을 굳혔다. 저게 왜 여기 있어?
그림자를 이용해 그것의 사지를 묶어 내 앞으로 끌고 왔다. 저 밑에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발 그 핸드폰 내려놓고 도망부터 가 주면 좋겠다. 나는 한숨 한 번을 내쉬고 자신을 하얗게 칠한 밀가루의 색을 밀어내고 서서히 제 색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말했다.
“아카샤의 숲에 서식하는 카멜레온이에요.”
“지금 뭐라고….”
김수혁이 굳은 낯으로 내게 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나는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도 지금 이게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푸른 불을 일으켜 그것을 태웠다.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죽이는 것이 그렇게 까다로운 괴물은 아니었다.
허공에서 펼쳐지는 불 쇼에 저 밑에서부터 올라온 요란스러운 소음이 들렸다. 그쪽을 바라보다 시야를 내렸다.
커넥터는 조용했다. 무서울 정도로.
***
깜깜해진 창밖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낮잠 잔다고 기숙사 들어갔다 다시 나온 리블 팀은 또렷해진 눈으로 새카맣게 탄 거대 카멜레온의 사체를 보고 있었다.
강유진이 다른 연구원들과 차트를 들고 사체를 살피다 내게 물었다.
“커넥터가 울리지 않은 게 확실한가요?”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진의 주변으로 구름들이 넘실거렸다.
“지금 괴물을 뱉을 만한 하늘 조각은 없어요. 그나마 있는 것들은 모두 공략 중이고. 게다가…. 아카샤의 괴물이라니.”
“카멜레온은 아카샤의 숲에 사는 잡몹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투명화하는 것 외에는 별 능력이 없거든요.”
하지만 아카샤의 것이 버젓이 도시 한복판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저것의 눈 하나가 건장한 성인 정도의 크기였다.
도로에 생긴 홈은 아마 꼬리로 내리친 흔적이었을 거다. 만약 건물에 계속 매달려 있지 않고 사람들 있는 쪽을 걸어 다니기라도 했으면….
그다음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도 테오그라젠스의 짓일까. 아니면 마티, 그 사도의 짓일까.
“…….”
어쩌면 다른 존재가 범인일 수도 있었다. 괴물은 어디서 만들어지냐는 내 질문에 마티는 다른 이가 만들었다고 답했다.
‘그자의 이름은 다윈. 당신께서도 이미 아는 자입니다.’
신데렐라 타령을 하던 둘리.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자의 능력이라고 했다. 마티의 역할은 괴물이 있는 곳과 이곳을 잇는 통로를 만드는 것.
그 다윈이라는 놈은 굳이 통로가 없더라도 곧바로 도시 한복판에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가?
사도의 능력은 무료한 신 테오그라젠스에게 빈 소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 다윈이 사도라면 도대체 어떤 소원을 빌었기에 그딴 걸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게 된 건지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다.
애초에 저런 것을 만들어 내는 소원을 빌었다는 점에서 제정신은 아닐 것 같았다.
대부분이 그로테스크하게 생긴 괴물들의 외관을 생각해 보면 상대가 이야기를 나누며 하하 호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더 이상의 괴물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아요.”
강유진이 구름 쪽을 한번 힐끔 보고는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옅은 한숨을 내쉬고 눈 사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이런 이상한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옥 기숙사에 남겠다는 몇몇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림자 속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집에서 자려고 했던 가벼운 마음은 무게감이 달라져 있었다.
부모님께 붙여 둔 꼬마 도깨비들에게 별다른 신호가 오지 않을 걸 보면 문제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자꾸만 카멜레온의 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불안하네….”
손을 들어 목에 걸린 하늘 조각을 더듬었다. 랑도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고.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은 하나였다.
하늘이 무너지거나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테오그라젠스가 또 다른 하나를 붙잡지 못했을 거라는 것.
또 다른 하나가 시스템 메시지라도 보내 주면 좋을 텐데.
고민을 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익숙한 내 방의 벽에서 빠져나와 불을 켰다. 두루마기와 도포를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실로 나가자 함께 TV를 보고 계시던 부모님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셨다.
“언제 왔어?”
“나? 방금 왔지.”
가까이 다가가 근처에 앉으니 부모님의 그림자 속에 있던 깨비들이 그림자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아빠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런 아빠를 보다 엄마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엄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걔랑은 재밌었어?”
“재밌을 거 뭐 있나. 요새 조각 공략하느라 바빴는데.”
“안 그래도 뉴스에서 그 이야기 나오고 있던데. 오늘 너희 회사에서도 괴물 나왔다며.”
그 괴물 화형시킨 게 눈앞에 있는 자식이랍니다. 엄마에겐 미소 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엄마는 내 미소에 묘한 얼굴을 했다.
그나저나 아빠가 삐진 건 역시 이호연 집에서 자고 와서인가? 뭐라 말해야 아빠가 삐진 게 풀릴까 생각하는데 엄마가 내게 물었다.
“밥은 잘 챙겨 먹었어? 애 둘이 라면으로 밥 때운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호연이 요리 잘해. 맛있었어.”
“너는 안 도왔어? 놀러 갔다고 얻어만 먹지 말고 좀 돕지.”
“걔가 나보고 부엌에서 나가라고 했는데….”
내가 하는 꼴을 몇 번 옆에서 지켜보던 이호연은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자기가 혼자 요리하겠다고.
그렇게 많이 망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정도면 그냥저냥 먹을 수 있는 정도 아닌가?
집밥보다 맛있던? 하고 묻는 엄마에게 웃는 낯으로 시간을 끌다 말했다.
“집밥은 고향의 맛. 거기서 먹은 건 외지의 특식 같은 거지. 서로 다른 맛있음이야.”
“말은 잘하지.”
“…….”
이 점은 랑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하나. 이렇게 좋은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날 수 있게 손써 준 거를. 그러니 어서 빨리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삐진 거 풀라고 아빠를 툭툭 치는 엄마를 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고민하다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두 사람에게 보낸 메시지 중 먼저 답장이 돌아온 건 이호연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웃다가 엿보려는 엄마를 피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쯤 다른 한 명에게선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
뭐지? 화면을 귀에서 떼고 확인해 봤지만, 연결이 끊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다시 화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집중해서 들으니 색색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어디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언니?”
서정은은 내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스피커로 돌려놓고 곧바로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도포의 끈을 다 묶을 무렵 드디어 상대의 음성이 들렸다.
-하연아….
“…….”
-나, 나 좀 살려 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커넥터를 확인했다. 기계는 여전히 조용했다. 뛰어나다 할 수 없다고 해도 서정은은 전직자였다.
같은 전직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녀에게 사람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전직을 취소당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애초에 서정은에게 문자를 보낸 것부터가 혹시나 해서였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주세진이 말한 조건에 해당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어디예요?”
-학교…. 여기가…. 모, 모르겠어…. 정신없이 도망 다녀서. 서관인 건 알겠는데….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커넥터로 강유진에게 연락을 넣었다.
-괴물이…. 이상한, 이상한 괴물이 갑자기 생겨서….
“어떻게 생겼는데요.”
-눈이 하나야. 엄청 마른 사람 같은 몸을 가졌고, 붉은색인데, 근데 팔이 여러 개였어…. 그, 그 팔에 애들이….
“…그 괴물이 붙잡은 사람들 피를 빨아 먹었어요?”
내 질문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틀어막고 내는 소리였다.
나는 낯을 굳혔다. 서정은이 말하는 것들을 한데 모아 엮으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왜, 자꾸 아카샤의 괴물들이 도시를 활보하고 있는 거지?
머리를 쓸며 고민했다. 서정은은 그것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전직을 취소당했건 아니건. 눈에 띄어서도 안 된다.
도망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부터가 불가능할 테니까.
“잘 들어요. 절대 소리 내면 안 돼요. 화장실 같은 데 숨어 있는 거면 당장 나와요. 그리고 물이 존재하는 곳 근처는 피해. 정수기 같은 것도 다 피해야 해요.”
-흐읍… 응… 윽.
“신발 신었으면 벗어요.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아야 해요.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까….”
-그, 애들이…. 애들이 죽었어….
“…정신 똑바로 차려요. 시체 보면 건들 생각도 하지 말고. 아니, 시체 쪽으로는 가까이 가지도 말아요.”
아카샤의 숲에 사는 피 빨아 먹는 나무 인간.
그건 물이 흐르는 모든 길목에 있는 것들을 감지해 낸다.
또한 자신의 양분이 된 사체에 작은 씨앗을 남긴다. 그 씨앗은 괴물의 작은 눈이자 귀였다. 사람 많은 곳엔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게 학교에 나타났다.
-나, 나도 죽는 걸까…. 갑자기 전직이 취소됐다는 시스템이 떴어…. 그러고는 그 이상한 게….
“…….”
안 죽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서정은의 위치만 정확히 알았다면 곧바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었다. 내가 먼저 서정은을 발견하냐, 그 나무 인간이 서정은을 발견하냐. 서정은이 내가 자신을 찾아낼 때까지 얼마나 잘 숨어 다니냐.
꼬마 도깨비 중 둘을 다시 부모님께 보내고 나머지를 전부 학교로 보냈다.
***
무서워. 무서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아. 서정은은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소리 내면 눈앞에서 죽은 애들처럼 죽어 버릴 것 같았다.
화장실에 숨어 있는 거면 당장 나가라고 했다. 그녀는 지금 화장실 칸막이에 숨어 있었다. 나갔다가 오히려 빨리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류인, 유하연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덜덜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손안에 핸드폰은 목숨줄이었다.
일단 지금 자신이 몇 층인지, 아니면 무슨 교실에 있다든지 말할 거리라도 찾으면 유하연이 그녀를 찾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적막한 복도에 피비린내가 풍겼다. 그 향의 근원지는 바닥에 쓰러져 몸에 이상한 가지들이 하나씩 난 애들이었다.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소리 내지 말라고 했어.
자신도 죽냐는 소리에 유하연은 답하지 않았다. 그 불안한 무응답이 오히려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전등이 꺼져 어두웠다. 핸드폰을 켜자니 그 괴물이 달려들까 무서웠다.
정수기의 흐릿한 불빛이 보였다. 걷던 것을 멈추고 다른 길로 틀었다. 물을 피하라고 했어. 차라리 빈 강의실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은가?
하필이면 본관이 아니라 서관이었다. 원래라면 올 일이 없던 곳이라 건물 구조마저 낯설었다. 그리고 그건 유하연도 마찬가지였다.
이 학교는 지옥도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다시 만들어졌다. 한번 무너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하연은 그런 학교를 겨우 반년밖에 안 다닌 신입생이었다.
그것도 서관은 들러 볼 일도 없는 경영학과 1학년.
미궁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서정은 본인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겨울의 복도는 스산하도록 추운데 목덜미에 땀이 고였다.
또 길이 나뉘었다. 앞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옆에 새로운 길로 갈 것인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망설이는데 저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았다. 앞에, 저 멀리 뭔가 어둠 속에서 일렁거렸다.
입을 틀어막은 손 사이로 그녀의 발이 보였다.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신발…. 벗으라고 했는데.
몰랐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와 숨소리에 신경 쓰느라 이 조용한 복도에 울릴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덜덜 걸리는 손을 뻗어 신발에 손을 올렸다. 헛손질에 신발이 벗겨지지 않았다. 제발, 제발 좀 벗겨져라.
신발 끈을 꽉 매는 게 아니었다. 헐겁다고 다시 묶는 게 아니었다.
어둠 속에 일렁이는 작은 붉은색은 그 괴물의 눈이었다. 나를 봤나? 못 봤나? 지금 움직여도 되나? 안 움직여도 죽는 거 똑같지 않을까?
몸을 더 낮췄다. 카디건을 벗어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추위인지 공포인지 몸이 떨렸다. 카디건에 달린 단추는 방해였다.
그대로 복도 바닥을 쓸며 기었다. 고민하던 샛길로 빠져 벽에 몸을 기댔다. 신발 끈을 풀어 발을 옭아매던 것을 빼 버렸다.
“…….”
그것을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몸을 낮춰 움직였다. 반대편 벽으로 움직여 복도에 놓여 있던 커다란 화분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왔다. 커다란 화분, 거기에 심긴 화초의 기다란 풀잎 사이로 붉은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놔둔 신발을 챙겨가는 기다란 마른 가지 같은 팔이 보였다.
서정은은 스스로 숨을 틀어막듯 입을 막았다.
심장 소리가 요란스러워 들키면 어떡하지? 덜덜 떠는 몸 자체가 소란스러워 들키면 어떡하지?
찌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신발이 뜯어졌다. 땡그랑거리며 카디건 단추들이 복도 바닥을 굴러다녔다. 바닥을 뒹구는 그것들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살았다.
숨죽이는 자신과 달리 질질 끌리는 소리를 마음껏 내며 괴물이 이곳을 벗어났다.
“……!”
튀어나오려는 숨을 다급히 틀어막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벽을 짚고 일어났다. 차가운 복도를 걷는 그녀의 발 아래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발 어디든 좋으니까 유하연에게 설명할 수 있는 장소가 나왔으면 했다. 중간중간 양말을 적시는 비릿한 것들을 애써 무시했다.
정수기나 화장실 근처는 피했다. 미궁에 갇혀 횃불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기분으로 그녀는 뛰었다. 교실, 교실. 서관에 올 일 없는 1학년도 알 만한 교실.
혹은 층수를 알 만한 단서가 될 교실.
“…찾았다.”
영상 미디어 3. 문 위에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서관에 영상 미디어 3이면 옛날에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4층.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소리 내지 않게 조심히 닫았다.
곧바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문에 기대어 핸드폰을 드는데 익숙해졌던 피 냄새가,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
왼쪽 어깨에 나뭇가지가 자란 학생이 문 바로 옆에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시체 보면 건들 생각도 하지 말고. 아니, 시체 쪽으로는 가까이 가지도 말아요.’
사람이 살면서 후천적으로 갈고닦을 수 있는 것을 그녀는 개인적으로 감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무너지기 이전에는 맹탕 소리 듣던 그녀도, 지옥도를 겪으며 변했으니까.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시체가 있는 반대편인 왼쪽으로 몸을 던졌다.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하지만 둔탁한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의 핸드폰은 공중에 떠 있었다. 아니, 꿰뚫려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예의 그 마른 나무 같은 팔이었다.
***
어둠이 드리워진 학교 건물에 그보다 더 음산한 그림자들이 일렁거렸다. 내 걸음을 따라 쪼개졌다가 다시 갈라졌다, 합쳐지고 뒤섞이는 그것들을 보며 나는 푸른 불을 불러왔다.
“…….”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푸른 불을 보고 내게 달려드는 나무 인간을 향해 류를 집어 던졌다. 제등에 꽂혀 벽에 박힌 것을 보며 손을 올렸다.
푸른 불이 일렁이며 마른 가지가 타올랐다. 커넥터를 타고 강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관, 동관, 디자인관을 비롯한 건물들. 그리고 도서관이나 대강당 같은 기타 다른 곳으로도 모두 사람을 보내 놨어요.
“인원이 되던가요?”
-타이밍 좋게 천칭 팀이 공략 끝내고 돌아왔거든요. 다른 길드에도 도움을 요청했고.
벽에 박힌 류를 뽑아 내며 물었다.
“생존자는요?”
-…그나마 밤이라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현재로선 생존자는, 본관에 둘. 다른 곳을 다 합치면 다섯이에요.
“…….”
겨우 반년이었지만 나는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 야밤에 뭐 그리 할 게 많은 건지는 모르지만 적지 않은 수가 돌아다닌다는 것은 알았다.
복도에 늘어진 잔가지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캠퍼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죽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었다.
남은 생존자는 알고 있었다. 서정은을 빨리 찾아야 한다.
***
“헉…. 헉….”
지금껏 참아왔던 숨을 모두 뱉어내기라도 하듯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온 숨결이 목구멍을 괴롭혔다.
손안에 쥔 단검을 천천히 뽑아냈다. 나뭇가지 위로 선명한 칼자국이 남았다.
유하연이 저번 지하철 벙커에서의 일이 고마웠다며 주었던 선물이었다. 그때는 이런 비싼 거 못 받는다고 했었는데, 헤어질 때 주머니에 넣고는 도망가 버린 유하연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검날의 재료인 붉은 돌의 영향으로 칼로 찍어 내린 부근부터 천천히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전직한 상태였다면 저 가지를 잘라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더 이상 그녀는 전직자가 아니었다. 무력하고, 손에 든 무기조차 제대로 활용할 수나 있나 싶은 민간인이었다.
칼을 앞으로 내밀고 뒷걸음질 쳤다. 괴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건가?
아냐. 이렇게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면 유하연의 목소리가 그렇게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계심을 풀지 않고 조금 더 물러났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저것을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 괜한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내 위치를 알려야 해.
나뭇가지를 살펴보다 창문 쪽으로 뛰었다. 커튼을 잡아당겨 모두 뜯어냈다. 칼로 그 위를 긋자 커튼에 불이 붙었다.
그것을 창문을 열어 창틀에 걸었다. 도깨비 공주 류는 푸른 불을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한 불을 다루는 자들은 불 자체에 예민했다.
제발…. 제발….
저게, 나를 죽이기 전에 알아차려 줘.
천천히 뒤를 돌았다. 문이 열린다. 붉은 눈이 그녀를 보며 가늘어진다. 불붙은 자신의 팔을 잘라낸 괴물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
“…불?”
어디서? 갑자기? 손안에 쥐어진 나무 인간의 몸을 반으로 뜯어 버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창문을 열어 몸을 내밀었다.
안 보여. 서관은 기역 자 모양의 건물이었다. 이쪽 창문으로 안 보인다는 건…. 긴 복도를 돌아갈 시간이 없었다. 창틀 밖으로 나와 그림자를 이용해 하늘 위로 길을 만들어 냈다.
뜬금없이 불이 날 리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나무 인간에게 불을 만드는 능력은 없었다.
“…….”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단검. 용암 지대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붉은 돌로 만든 단검. 서정은에게는 내가 주었던 단검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갑자기 눈에 띄는 짓을 했다는 건….
인기척을 죽이라는 내 말을 무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긴급 구조 신호잖아.
옥상으로 향하게 한 길을 따라 뛰었다. 옥상을 넘어 반대쪽을 살펴보았다. 저 아래, 불붙은 커튼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유리창이 깨졌다. 튀어나온 나무 팔을 본 나는 그대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
아프다. 하지만 그녀만 아픈 건 아니었다.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나뭇가지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일반인인 지금 그녀의 힘으로, 평범한 칼이었다면 아무리 온 힘을 다해도 낼 수 없는 기다란 잔상이 나무 위로 새겨졌다. 손이 찢어지더라도 칼을 꽉 잡은 가치가 있었다.
창문과 벽을 부수며 달려든 이 괴물의 힘이 없었다면 생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처이기도 했다.
스스로 제 팔에 상처를 내고 불을 지른 꼴이었다. 부릅떠진 붉은 눈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헌터도 아니고, 이제는 전직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맹탕, 어딘가 만만한 애 소릴 듣던 이전 평범한 시절의 본인도 아니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봤으면 누구나 놀랐을 명백한 도발을 담은 미소였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굴어서는 지옥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괴물의 팔에서 피어오른 불에서 탄내가 났다.
단검을 돌려주려 연락한 그녀에게 유하연은 딴소리만 했다.
‘근데 그 단검에 재밌는 기능이 하나 있어요.’
‘그럼 더 비싸다는 거잖아!’
‘뉴비에게 소매 넣기 하는 고인물이라고 보고 그냥 받아요.’
그 가볍던 대화에서 유하연은 전혀 가볍지 못한 내용을 말했다.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정은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뒤편에서 바람이 불었다. 이 괴물 덕에 벽이 뻥 뚫려 있었다.
괴물이 달려든다. 가깝다. 어린아이가 집어 던져도 맞힐 수 있는 거리였다. 서정은은 지금껏 그녀의 목숨을 연장해 주는 것과 다름없던 단검을 괴물의 눈을 향해 던졌다.
목표는 눈이 아니었다. 괴물이 수많은 팔들 중 하나를 휘저어 단검을 막는다. 퍼석한 마른 가지에 단검이 꽂혔다.
그것을 보며 서정은은 웃었다. 그리고 외쳤다.
‘던지면서 시동어를 말하면 펑! 하고 터져요.’
‘…너무 위험하잖아.’
‘언니 성격상 웬만하면 안 할 것 같은 말이니까 괜찮아요.’
‘무슨 말인데?’
‘시동어가 뭐냐면요.’
“나가 죽어, X발!!”
서정은은 말을 내뱉자마자 뻥 뚫린 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과격하네…’
‘일부러 그렇게 골랐어요. 정말 빡치거나 죽기 직전 아니면 욕 안 할 것 같았거든요.’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한 것치고 생각보다 입에서 욕이 쉽게 나왔어. 그렇게 말하면 너는 뭐라고 할까.
4층 높이였다. 잘하면 살 수도 있었다. 적어도 저 괴물한테 붙잡히는 것보단 살 확률이 높았다.
바람에 머리가 흩날렸다. 서정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챔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캐해석을 참 잘해. 그렇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흔들거렸다. 눈을 떠 위를 보았다. 기다란 제등을 벽에 박아넣고 벽에 발을 디딘 유하연이 그녀를 한 손으로 안아 들고 있었다.
“욕 쓰는 거 처음 봤어요.”
“…흐읍…. 흐엉, 나, 나, 진짜….”
“뚝. 내가 복수해 줄게요.”
휘영청 떠오른 둥근 달 아래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기다란 머리카락마저 너무 멋있어서 눈물이 났다.
살았다. 이제 정말 살았다. 마음대로 숨 쉬고 울어도 되는 시간이었다.
***
확실히… 전과는 달라졌다. 불편할까 고쳐 안는 내 목을 끌어안는 압력이 민간인과 다를 게 없었다.
날 위해 힘을 뺐다고 하기엔 지금 같은 상황에 누가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게다가 죽다 살아난 건데.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지금 힘이 그녀의 힘 전부였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뻥 뚫린 벽으로 활활 타오르는 나무 인간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벽에 박힌 류를 뽑았다.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등이 열림과 동시에 푸른 불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나를 향해 팔을 휘두르는 나무 인간에게 웃어 주었다. 팔에 붙은 푸른 불이 빠르게 몸체를 타고 움직였다.
쿵쿵거리며 타오르다 쓰러지는 것을 보며 제등을 잡은 손을 놓았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서정은을 양팔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안아 들었다.
벽을 밟고, 높다란 나뭇가지를 밟고, 창틀을 밟으니 어느새 지상이었다. 화려한 푸른 불 쇼를 보고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의료 팀이 보였다.
손민경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베테랑인 이들이었다.
“다음에는 더 좋은 단검 선물해 줄게요.”
“또 욕을 시동어로 삼지는 말고….”
“…….”
대답 없이 웃는 나를 보며 서정은은 눈물범벅인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존댓말 쓰는 거 이제 그만해.”
“나름 유교 문화를 지켜본 건데.”
“안 어울려.”
“그래 그럼.”
역시 유교는 패션으로만이었다. 흘러내린 두루마기를 다시 어깨에 잘 걸치며 서정은에게 말했다.
“단검 기대해.”
의료팀 사람들에게 서정은을 맡기고 다시 건물로 들어왔다. 폴짝폴짝 벽을 타고 뻥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는 나를 보며 의료팀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이 들렸다.
쭉 들여다본 강의실은 엉망이었다. 반절은 내가 서정은에게 준 단검 때문인 것 같기는 했지만.
문 근처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시신 하나가 있었다. 눈도 감지 못한 시신의 눈을 감겨 주고 어깨에 돋아난 가지를 태워 버렸다.
“…….”
운이 좋았다. 서정은은 정말 운이 좋았다.
서관의 건물을 뒤엎었던 음산함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기다랗게 늘어져 있던 그림자들이 모두 돌아왔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강유진에게 커넥터 연결을 했다.
“…….”
-…….
“서관. 생존자 하나.”
-…상황 종료. 생존자 모두 구출. 건물 내 남은 괴물 모두 소탕 후 복귀하세요.
연결이 끊어진 커넥터를 바라보다 내 앞에 시신을 안아 들었다. 문을 열고 복도를 걸었다. 그림자를 이용한다면 금세 옮길 수 있는 시신들이 복도에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림자를 이용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전부. 직접 안아 들어 옮겼다. 중간부터 의료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시신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오고 가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나는 어둠밖에 안 남은 학교의 복도를 걸었다.
그날 생존자는 도합 여덟이었으며 사망자는 일흔셋이었다. 통계적으로는… 적은 수였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
마지막 시신을 의료팀에게 인도하며 고개 든 내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번쩍이는 플래시였다. 그들을 저지하는 이들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기자 하나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
그놈의 생각.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내 생각이 언제 그렇게 궁금했다고.
나는 손을 들었다. 그들의 발밑에서 일렁이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그들의 카메라와 마이크를 부쉈다.
당황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주춤하는 모습을 보며, 굳어진 낯을 보며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중에 촬영하고 기사 쓰세요. 죽은 사람 추모하고 난 다음에 해도 안 늦으니까.”
말 없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박살 난 장비들을 가리켰다.
“저건 나중에 나한테 청구하시고요.”
저 멀리서 강유진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친 그녀에게 나는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다시 건물로 돌아갔다. 지독한 비린내가 났다.
손을 튕겨 푸른 불티를 그 위에 올렸다. 붉은 것들만 살라 먹을 푸른 불이 천천히 움직였다.
“안 사라지네.”
불이 사그라진 복도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 듯 어질러져 있었지만 붉은 것들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피 냄새만큼 진하고, 역겨우며 오래가는 건 없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절대 돌아다니지 말고, 존재 자체를 하면 안 되는 아카샤의 괴물들이 자꾸만 나타났다.
하늘 조각이 떨어지는 횟수가 늘었다. 전직을 취소당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괴물들이 자꾸만 어디선가 나온다. 사람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태’. 이게 정말 사태라고 부르는 게 맞는 일인가.
배가 침몰하기 전에는 쥐들이 탈출을 꾀한다. 비가 오기 전에는 하늘이 어두워진다. 사람이 화를 내기 전엔 낯을 굳힌다.
하늘이 무너지기 전엔 하늘에 금이 갔다. 그 모든 것에 맞는 단어는 사태가 아니라 ‘전조’였다.
나는 왜 이 모든 것들이 이후의 일을 속삭이는 전조처럼 느껴질까.
괴물은 변화를 맞이했으나 사람은 아니다. 테오그라젠스의 간섭이 심해졌다. 앞으로 어떤 이상한 일이 더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이 전조라는 가정하에, 이 이후 일어날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쩔쩔매는데?
나는 감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만 장르가 달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