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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랑이 (21/34)

#모지랑이

한참을 침대에서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불에 가려진 맨살이 시원해서 기분 좋았다. 다시 잠이 들려는 순간, 나를 끌어안고 있던 이호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따라 일어나려는 나를 이호연이 다시 눕혔다. 왜 그러나 싶어 그를 보니 이호연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내 목에 손을 대었다.

“왜 그래?”

“착각인가 싶었는데…. 류, 열나요.”

열?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잘 모르겠는데…. 그런 내 손을 그러쥐며 그가 말했다.

“손도 뜨거워요. 얼굴도 조금 붉고. 혹시 모르니까 일단 밥 먹고 약부터 먹어요.”

그리 말하며 내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스러웠다. 듣고 보니 열나는 게 맞는 것도 같았다. 어쩐지 유난히 손에 닿는 것들이 다 서늘하게 느껴지더라.

침대 옆 협탁에서 구급상자를 꺼낸 이호연이 그 안에 들어 있던 쿨 패치 하나를 꺼내 내 이마에 붙여 주었다.

“앗, 차가….”

생각보다 차갑네.

“쿨 패치 붙여 본 적 없어요?”

“그렇지? 애초에 열난 적이 거의 없으니까.”

나는 건강 체질이거든. 솔직히 열이 난다고 하는 지금도 뭐가 그렇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되려 이호연이 유난 떠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죽 끓여 오겠다고 나가는 이호연을 따라 나간 것에는 이런 안일한 생각이 바탕이 되어 그런 것도 있었다. 이호연은 조금 곤란한 낯을 하기는 했지만 내게 쉽게 져 주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곳에 내가 있다는 점에 내심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중에 주세진이 보면 혼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다. 이호연의 불안 증세에 내가 불을 지른 것 같았다.

날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죽을 끓이는 그의 뒷모습은 그 행위를 하는 것에 있어 상당히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호연은 오랫동안 혼자 살았는데, 만약 그가 아프면 누가 그를 간호해 주었을까.

“…….”

식탁 위에 팔을 올려 그 위에 엎드렸다. 깜박이는 시야에 잡히는 뒷모습이 조금 슬프게 보이는 건 열이 나서 그런 건가. 식탁은 시원했다. 그래서 내가 열이 나는구나, 하는 게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혼자 아팠으면 조금 많이 서글펐을 것 같았다. 그럼 혼자서 옛적의 일들을 삭여 온 사람은 어떨까?

그것이 슬픔이든, 분노든, 억울함이든 아주 오랫동안 홀로 삭이면 랑처럼 되는 건가. 웃는 낯으로 비틀리고 어딘가 망가진 그런 모습으로.

랑은… 혼자 그 공간 안에 갇혀 무슨 생각을 하며 지금의 내게로 당도한 걸까. 수많은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그것이 랑 본인일지라도.

맛있는 냄새가 났다. 달걀이 들어가 조금 노르스름한 죽은 뜨거웠고 맛있었다. 그것을 먹다 보니 생각은 더 깊어졌다.

…적어도 이렇게 아플 때 돌봐 주는 사람은 없었겠지,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주관적인 감정에 휩싸여도, 객관적인 위치에 서 있는 지금도 나는 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결국은 타인이고 남임을 이렇게 증명해내는 꼴이었다.

죽과 약을 먹고 거실에서 쉬고 있는데 손님이 왔다. 뜬금없는 손님의 정체는 나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 옆에 서서 함께 인터폰을 확인한 이호연이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밖에 눈이 오는지 하얀 눈송이가 검은 코트를 걸친 어깨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것을 툭 건드리는 내게 예쁜 연분홍 빛깔의 작은 상자를 내밀며 주세진이 말했다.

“열나?”

“그냥요. 골 아플 일이 많아서 머리가 과부화 됐나 봐요.”

내 말에 주세진이 낯을 조금 찌푸렸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마치 내 집이라도 된 것처럼 어서 들어오라고 그들을 재촉했다.

주세진의 뒤편에 서 있던 강유진이 약간의 걱정스러움을 담은 얼굴로 내게 제법 커다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갈아입을 옷들이요.”

그녀는 코트를 입은 주세진과 달리 롱패딩을 입었기에 머리 위에만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며 말했다.

“우리 집은 아니지만, 어서 오세요.”

강유진과 시시덕거리는 사이 부엌으로 들어간 주세진과 이호연이 무언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부러 그 안에 끼어들어 무슨 얘기 하냐고 묻지는 않았다. 이마에 붙인 쿨 패치를 떼고 앞머리를 손으로 흐트러트렸다.

주세진이 건네준 케이크 상자를 거실 테이블에 두고 강유진이 건네준 봉투 안 내용물을 보았다.

“누가 골랐는지 알 것 같네요.”

“길드장님은 절대 안 고를 물건이죠.”

강유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봉투를 소파에 두었다. 나란히 소파에 앉은 우리는 그간의 근황들을 주고받았다.

“상호, 수능 잘 봤대요?”

“아뇨. 애초에 공부 안 했는데 잘 보면 이상한 거죠.”

역시. 취업했으니 대학 안 가도 되지 않냐고 슬쩍슬쩍 이야기 꺼낼 때부터 공부에서 손 놨을 줄 알았다.

“강유진 씨는 휴가 반납하고 일했다면서요.”

“놀면 뭐 해요. 딱히 할 것도 없고, 우리 집에 길드장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재미도 없고.”

이 사람도 참 트루 러브였다. 휴가 자진반납이라니. 어정쩡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강유진이 방긋 웃음 지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길드장님이 미안해서 더 자주 보러 오거든요.”

“…약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고 해 주세요.”

주세진은 연애할 생각이 없는 것 같던데. 그걸 강유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영 허술해 보여도 전직 해커이자 이 시대 최고의 정보꾼이었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케이크 먹자고 해맑게 웃으며 상자를 여는 모습과는 매치되지 않는 특징이었다.

주세진 쪽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러니까 최대한 강유진을 피해 다니려고 하고, 일부러 말투도 더 딱딱하게 하고.

문제는 일 특성상 길드장인 주세진과 정보꾼인 강유진은 계속 마주 볼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 둘은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

듣기로는 주세진이 강유진을 스카우트했다던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강유진이 에클레어를 들이밀었다. 그것을 냠, 물었다.

“맛있어요?”

“밀푀유 찜.”

“앗, 그럼 라즈베리 내 거.”

여기 케이크 맛있네.

우리끼리 멋대로 이거 내 거, 저거 내 거 하고 있을 때 이야기가 끝났는지 이호연과 주세진이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그림자를 이용해 부엌에 있는 접시와 포크를 가지고 왔다. 실생활에 쓰이는 편리한 활용을 처음 본 두 사람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떨떠름해 보이는 주세진의 얼굴과 우왕, 하는 강유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에클레어를 한입 더 베어 물고 손에 묻은 크림을 핥아 먹었다.

“근데 오늘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케이크랑 옷 주려고 왔을 리는 없고.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각자의 앞으로 나르는 검은 그림자 줄기를 지켜보던 주세진이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주세진과 강유진의 시선이 오고 갔다. 심각한 이야기인가. 손에 쥐고 있던 에클레어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강유진이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허공에 던졌다.

익숙한 아공간의 마법진이 반짝거리며 그려졌다. 그 안에서 두 가지의 물건을 끄집어낸 강유진이 그것들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건….”

푸른 빛이 어린 은색의 금속이 테이블 위에서 위험스레 빛났다. 내가 강유진에게 넘겼던 페이즐리의 단검과 복도에서 주운 금속 덩어리였다.

“이게 뭔지 알아냈어요?”

내 질문에 강유진은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금속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에요. 생산부에도 물어봤는데 이런 건 본 적이 없대요.”

“그럼 출처도 알 수 없는 건가요?”

“합법적인 공식 루트로는 알 수 없죠.”

비합법적인 비공식 루트로는 알 수 있다는 소리였다.

“노아 이스벨라하고 만난 이후 로웰 콕스를 따라가면서 그녀에게 구름을 붙여 놨거든요.”

“그럼 루트는 미국인가요?”

내 물음에 강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안에서 구름이 몽실거리며 피어올랐다. 구름이 도넛 모양으로 바뀌며 그 안에 영상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는 로웰 콕스가 어떤 남자에게서 상자를 받아 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상자 안에는 단검, 총, 총알 등 다양한 무기들이 담겨 있었다.

상자 안을 살피던 로웰 콕스가 눈앞의 남자에게 말했다.

“이걸로는 안 돼요. 재질은 좋으나 기술력까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 쪽에서 제련할 수 있게 원상태 그대로 주십시오.”

“너희의 기술로는 못 다루는 물건이라고 저번에도 말했잖아. 그냥 만들어진 거 갖고 가는 게 어때?”

귀찮음이 가득한 남자의 말에 로웰 콕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특유의 비즈니스적 미소를 짓고 말없이 남자를 보았을 뿐이다.

남자는 쯧, 혀를 차더니 상자 안에 있던 단검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잘라 냈다.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피는 나지 않았다. 옷가지가 떨어짐과 동시에 드러난 잘린 팔은 푸른 빛 도는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로웰 콕스에게 넘겼다.

“이걸로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꼬리 잡힌 건 알아, 너?”

후드 아래 숨겨진 눈이 정확히 이쪽을 보았다.

“우리 쪽 머저리는 이게 평등한 거라고 하는데 난 그런 거 잘 모르겠거든?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그렇지? 하고 이쪽을 보고 남자가 말함과 동시에 영상이 끊겼다. 마지막으로 잡힌 모습은 남자가 달려드는 것이었다.

손을 들어 구름을 흐트러트리며 강유진이 말했다.

“루트는 로웰 콕스예요. 제공자…인 저 남자의 정체는 알 수 없었고요.”

“…….”

그 사람. 로웰 콕스.

금속의 제공자보다도 그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반쯤 맛 간 눈으로 나를 보며 웃던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을 마주 봄과 동시에 한국으로 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조금, 많이 무서운 얼굴이었다. 가능하다면 나를 납치 감금시킬 것 같은 눈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신을 숭상한다거나 경애한다거나 그런 눈이 아니었다.

그건 익숙하고, 낯설며 내가 아주 싫어하는, 그런 눈이었다. 에클레어 내려놓기를 잘했다. 옷자락을 움켜쥐는 내 손을 따라 옷에 구김이 갔다.

손에 케이크 같은 게 들려 있었다면 뒤처리가 힘들었을 것이다.

주세진이 그런 나를 보다 테이블을 두들겼다. 시선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내 생각의 흐름을 끊어 내는 짧은 소음이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봤는데 최종적으로는 너희 둘이 필요해서 왔어.”

“우리 둘이요?”

내 되물음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샤의 크툴루 괴물의 입을 가지고 왔다면 더 다양하게 실험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갖고 있는 건 단검과 이 쇳덩어리뿐이라 다른 실험은 빠르게 끝났거든.”

“아…. 그거.”

크툴루의 사체에 대한 권리는 미국에게로 넘어갔다. 정확하게는 로웰 콕스에게로 넘어간 것 같지만. 참견하기 싫어 가만히 있었는데 입만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다.

조금 전 보았던 영상으로 보아 아마 그녀는 그 입으로 무기 제련과 관련된 실험을 할 것이 뻔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솔직히 말하면 그 무기들은 괴물용에 가깝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괴물용이 맞기는 했지만…. 그 괴물이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전직자들.

이건 누가 봐도 전직자를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들에 가까웠다. 거슬리는 마음이 표현된 것 같은 거스러미를 손톱 끝으로 긁어내었다.

그것을 완전히 뜯어내기 직전 주세진이 손을 뻗어 페이즐리의 단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쇳덩어리를 향해 단검을 내리쳤다. ‘캉’ 하는 소음이 울리며 금속 위로 단검이 꽂혔다.

“…….”

그것을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금속 덩어리에 단검을 꽂아 내리는 순간의 팔 근육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저기서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면 완전히 절단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그 이상의 힘을 기대하는 것은 신체 계열이 아닌 주세진에게 바랄 수는 없었다.

단검을 뽑아 테이블에 내려놓은 주세진이 이번에는 품에서 검은 단검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 위로 내리쳤다.

나는 그것을 집중해서 보았다. 옷 아래 근육의 움직임. 손등에 힘이 들어간 핏줄, 자세, 위치. 그 모든 것이 조금 전과 비슷했으나 결과는 다 상해 버린 검은 날이었다.

“보다시피 같은 재질의 금속이 아니라면 타격을 전혀 받지 않아.”

나는 손을 뻗어 금속 덩어리를 집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니 금속 위로 조금 눌린 손자국이 생겼다. 나는 그것을 이호연에게 넘겼다.

이호연은 내가 했던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내가 남긴 자국보다 더 깊은 자국이 생겼다. 평범한 철이었다면 진작에 우그러져야 하는 압력이었다.

“저 검 말고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괴력인가 보네요.”

내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대체 뭘까. 영상 속 남자의 팔 또한 이것과 같은 재질로 보였다. 손에 잡히는 그것의 감촉은 시렸다. 열이 오른 손으로 만져서가 아니었다.

금속 자체에 무언가 이상한 힘이 서리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살펴보던 나는 도중에 행동을 멈췄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기색을 기민하게 살피던 강유진이 내 생각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비와 푸른 불꽃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던 검은 석판이 그나마 이 금속과 가장 비슷한 재질이라고 할 수 있죠.”

“…….”

왜 나와 이호연이 필요하다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단순히 힘으로 하는 실험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등이 그림자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내 키보다 기다란 그것이 어둠을 품고 튀어나왔다. 그림자가 금속을 낚아채 허공으로 띄웠다.

테이블이 무너질까 걱정하지 않고 그대로 류를 휘둘러 금속을 베었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소음이 집 안을 울렸다. 쨍하고 목이 움츠러드는 그런 소리였다.

“…별로네요.”

말을 맺음과 동시에 류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림자로 흩어져 사라진 제등 아래. 그림자가 붙들어 맨 금속에는 깊게 베인 자국은 남았으나 페이즐리의 단검으로 찍어 누를 때보다는 옅었다.

이건 정말 좋지 못한 결과였다.

주세진과 내 완력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형편없다 못해 말도 안 되는 결과물이었다. 그것을 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주세진이 입을 열었다.

“완력 차이를 고려해 보면 이름이 붙은 무기 정도는 되어야 이 금속에 흠집 하나를 낼 수 있다는 거겠지.”

“…….”

이름이 붙은 무기는 내가 알기론 한국에는 네 개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내가 들고 있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제등, ‘류(流)’.

비전투 계열 중 생산 능력을 가진 이들은 많았지만 이름이 붙을 정도의 무기를 만드는 이들은 없다시피 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네 개 중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단 하나.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낸 본인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제작법은 다시 미궁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외국에 그 수가 많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름이 붙은 무기가 단 하나도 없는 나라도 꽤 많았다.

만들지 못한다면 전직관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국가 단위로 따지는데도 네 개밖에 없지.

그리고 말이 무기이지 실제로 무기 노릇을 하는 건 내 것을 포함해 생산 계열 전직자가 만든 것까지 포함해 두 개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금속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 또한 두 개라고 보아야 했다. 페이즐리의 단검은 예외로 두기로 하고.

“…그 무기 이름이 프레데터죠? 피 빨아 먹는 칼.”

“맞기 한데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하찮게 느껴지잖아요….”

강유진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유일하게 사람의 손에 만들어진 이름이 붙은 무기 치고 평가가 원래부터 낮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이 붙은 무기는 주인을 가리기에 주인 아닌 자는 만지지도 못한다. 그건 주인과 각별한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름 있는 무기의 특성상 위험한 만큼 그 성능도 좋은데, 이것도 주인이 있어야 평가할 수 있는 거였다.

프레데터는 소유주가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 장식품이자 전시용 물건이었다.

주인이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이 무기는 유일하게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그런지 조금 이상했다.

주인이 아닌 자가 잡으면 빈혈로 쓰러진다. 류를 다른 사람이 만지면 살갗에 불이 붙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프레데터는 피를 빨아 먹히는 것, 즉 빈혈만 참아 내면 일단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주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다 잡아먹는 저주받은 검이었다.

주인이어도 빈혈, 아니어도 빈혈. 오기로 계속 잡으면 목숨이 간당간당하고. 계륵 같은 이것은 결국 전시되는 것으로 그 가치를 다하게 되었다.

다른 생각으로 빠지는 나를 주세진이 다시 집중시켰다.

“어쨌든 로웰 콕스와 거래한 남자의 정체가 문제야. 그걸로 대량 학살 무기라도 만들면 그것만큼 재앙이라 불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나마 그 정도의 기술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다행이었다. 로웰 콕스가 그 금속을 다룰 수 있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

이름 있는 무기라…. 몇 안 되는 물건인 만큼 소유주 또한 누구인지 유명했다. 아닌가, 원래 유명한 사람이 갖고 있어서 더 빨리 알려진 건가?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를 생각하다 주세진에게 물었다.

“이예린 씨한테 들고 가서 한 번만 내리쳐 보라고 하면 안 되겠죠?”

“…아스트로노미는 별자리 판이야. 무기가 아니라.”

“나도 알아요.”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러고 보니 저번 만남에서 이예린이 본인 입으로 예언을 다루는 능력이 전과 달리 더 좋아졌다고 했다.

그럼 이름 있는 무기의 주인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던 이예린이 아스트로노미를 지금은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차분하게 빛나던 황금색 눈이 생각났다. 그래 봤자 무기용으로는 사용 못 하겠지만. 다음에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눈을 굴려 금속에 난 흠집들을 살펴보았다.

저 이상한 금속은 높은 확률로 테오그라젠스와 관련 있을 것이다. 검은 석판과 비슷하다는 점에서부터 의심을 안 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한 게 같은 재질이거나 기본 공격력이 뒷받침되는 이름 있는 무기라니. 너무 불리한 싸움이었다.

네 개 중 하나는 주인이 있어도 사용 불가. 하나는 별자리 판이라 무기 아님 판정. 그리고 하나는 내 거고.

마지막 하나의 소유주는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주세진의 무기도 무기라 부를 수 없는 지도 형태의 물건이었다. 이름이… 오페리움이었나.

무기도 아닌데 왜 무기라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 귀한 것은 알겠지만.

주세진과 이예린이 길드장이라 불리기에 무리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이름 있는 무기의 소유주라는 이유도 있었다.

이예린은 바지사장 겸 얼굴마담이었지만, 어쨌든.

특히 주세진의 것은 사용하는 만큼 그 주인이 책임져야 하는 몫이 있었지만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판을 뒤엎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다를 게 없던 지옥도의 판도를 그렇게 바꿀 수 있었던 거겠지.

고민만 남은 휴가 중 맞은 상사의 방문은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게 맛있는 케이크밖에 없었다.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것들 위로 스며드는 푸른 빛은 소름 돋는 구석이 있었다.

“…….”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사람 손에 들어가지 않아도 위험한 물건이었다.

***

피에 물든 병아리색 머리가 바닥 위로 흐트러졌다. 폐가 찢어지는 것 같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겨우 내뱉은 숨결에는 짙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주홍빛 머리가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챘다.

“쓸데없는 짓을.”

여자가 그녀의 손을 내쳤다. 손이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녀와 함께 바닥을 뒹구는 것은 익숙한 물건들이었다.

새 시작을 축하한다며 리블로 넘어올 때 함께 온 애들이 그녀에게 선물해 준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의 위로 저런 것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거대한 어둠이 스멀거렸다. 이곳은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마치 방 하나가 통제로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손끝만을 간신히 움찔거리는 그녀의 앞으로 둔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들어 올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름다운 별자리 판이었다.

심해 위에 수 놓인 금색의 별들이 반짝거렸다. 별자리 판을 두른 기이한 금색 조각들이 둥실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아스트로노미였다.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있나 싶은 무기.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처럼 자리만 차지한 것이었다.

여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별자리 판 위로 그녀의 손이 올라갔다.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은 여자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주홍색 머리는 길었고 눈동자는… 사람이 맞나? 눈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개로 조각난 각기 다른 색유리를 한데 모아 짜깁기한 것 같은 눈동자였다.

“너, 누구야….”

그녀의 질문에 여자는 눈을 깜박였다. 기울어지는 고개를 따라 기다란 주홍 머리가 움직였다. 드러난 목덜미에는 크게 베였다가 꿰맨 것 같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무표정한 낯의 여자가 말했다.

“예언가. 그 입을 열어 미래를 말해라.”

“…싫은데.”

“…그래?”

“!”

“그럼, 말 안 듣는 도구는 필요 없지. 그렇지?”

지금, 뭐였지.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시야가 데구루루 굴렀다. 숨을 들이켬과 동시에 정신이 들었다. 손을 들어 목을 더듬었다. 제대로 붙어 있었다.

환상? 아니야. 순간적으로 정말 목이 잘려나갔어.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아스트로노미의 위에 올려져 있었다.

주홍 머리의 여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지독하게 무서운 와중에도 그녀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살아서는 돌아간다. 그거면 된다.

별의 관측자가 된 뒤로 그녀의 예언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

지금 뭔가 기분이… 이상했는데. 주세진과 강유진을 배웅하고 뒤도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이함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짚이는 것이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순간적으로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다.

걸리는 것이 없었다.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강유진이 주고 간 봉투 안을 살펴보았다. 내가 밖으로 안 돌아다니는 성격인 것을 눈치챘는지 거의 다 집 안에서 입는 옷들이었다.

보들거리는 잠옷을 만지작거리다가 내 옆에 앉은 이호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세진은 부모님들에게 믿음을 주는 뭔가가 있나 봐.”

“?”

“너희 집에서 머무는 거 말이야. 엄마가 ‘길드장님이랑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이랬거든.”

너무 쉽게 허락해 줘서 조금 놀랐다. 주세진이 어른들이 좋아하는 타입인가? 전에도 생각했지만, 나중에 상견례 같은 거 가면 프리 패스겠네.

흘러내리는 후드티 소매를 접어 주는 이호연의 모습을 보다가 봉투를 들고 일어났다.

“나 옷 갈아입고 올게!”

“갑자기요?”

“계속 네 옷을 빌려 입고 있기도 그렇잖아. 사이즈가 맞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너도 이거 좋아할 것 같거든.”

봉투를 흔들며 하는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웃어 주고는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웃고 있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눈을 감고 그림자로 연결된 꼬마 도깨비들의 정신을 엿봤다. 부모님 옆에 붙은 애들에게는 문제없었다.

그럼 조금 전 느꼈던 그 기분은 뭐였지?

묶어 두었던 머리를 풀며 봉투 안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몸에 닿는 감촉은 부드럽고 기분 좋았으나 찝찝했다.

미국에서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께름칙한 기분을 느낀 바다에서 아카샤의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설마 또 그런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특정 장소로 가야 한다는 그런 종류의 감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부모님에게도 문제없고, 주세진과 강유진은 방금 봤고. 커넥터도 조용했다. 공략 팀 사람들한테 안부 문자라도 돌려 볼까. 너무 유난인가?

잠시 고민하다 일단 밖으로 나왔다. 뒤집어쓴 후드 위로 기다란 귀가 달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문 여는 소리에 나를 돌아본 이호연이 눈을 끔벅거렸다.

“귀엽지?”

머리 위에 토끼 귀를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호연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옆으로 가서 앉으니 토끼 귀를 쭉쭉 잡아당겨 보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싶었다.

흘러내리지도 않고 딱 맞는 잠옷을 입으니 나도 편했다. 재질이 수면인지라 보들보들한 것도 좋았다. 흰색이라 밥 먹을 때 뭐 묻을까 봐 걱정스럽긴 하지만.

“토끼, 좋아해?”

“동물은 웬만하면 다 좋아요. 특히 작은 동물들은 귀여워서 더 좋고요.”

“…그렇구나.”

과거의 산신도 소동물을 좋아하니 변종 여우를 데려다가 키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간과 시대를 뛰어넘는 한결같은 취향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내 토끼 귀를 잡아당기는 이호연의 손을 잡아 내렸다. 모자 쓰고 있으려니 불편했다.

후드를 벗어 버리는 내 행동에 이호연이 아쉬운 낯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키득거렸다.

그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

지금… 분명 들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누군가의 속닥임. 손을 들어 어깨를 짚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짚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드워드 로거스가 말했다. 내게 속닥이는 그것에게 답하지 말라고. 어쩌면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등에서 달랑거리는 토끼 귀를 톡톡 건드는 이호연을 내버려 두고 핸드폰을 들었다.

“뭐 하게요?”

“확인 절차?”

이호연이 내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나는 그저 웃었다. 뭔가 잘못돼 가는 것 같다는 기분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데.

이상할 정도로 그 속닥임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그것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지금도 그랬다. 난 도저히 그 속닥임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애매하게 웃는 나를 이호연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보았다. 그냥 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지, 뭐. 그런 그를 보며 애써 가볍게 생각했다.

누구에게 걸까 하다가 제일 위에 있는 박상호에게 걸기로 했다. 원래라면 김수혁이 제일 위여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핸드폰엔 김수혁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물어보는 걸 깜빡했었다. 딱히 따로 연락하는 것도 아니고. 짧은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박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상 걸기는 했지만 할 말이 없던 나는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시험 잘 봤니?”

―…나빠요!

빽 소리 지르는 박상호의 목소리 외에도 낄낄거리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함께 있는 듯했다.

그럼 리블 팀은 문제없다는 거네. 나는 찡찡거리는 박상호에게 추가 합격을 기다려 보라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이호연이 뭐 하는 거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인간관계는 상당히 빈약해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상대가 얼마 되지 않았다.

“…….”

그런데 왜, 안 받지?

몇 번 더 걸어 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발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예린에게 전화 걸던 것을 멈추고 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전화를 받은 강유진은 아직 밖이었는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여보세요?

“이예린 추적 좀 해 주세요.”

―네?

“빨리요. 그냥, 이상한 건 아는데….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잠깐만요.

전화가 끊겼다. 그림자 속에서 끄집어낸 두루마기를 잠옷 위로 입었다. 아무 일도 없는 거면 내 마법사의 감이 AS가 덜된 거고, 정말 무슨 일이 있으면….

생각을 다 잇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 너머 강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넥터 위치는 일단 이예린 씨 자택이에요.

“…….”

내 단순 착각이었나?

“…그 커넥터, 집 안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그건 아니긴 한데, 보통은 집 안에서 다 커넥터 풀어 놓으니까 이상한 건 아니죠.

강유진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나 또한 매일 커넥터며, 핸드폰이며 집 안에 가만 놔두었지 들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류, 무슨 일 있어요?

“이거, 진짜 불법적인 일이라 부탁하기 싫은데요. 혹시 이예린 씨 집 안도 살펴볼 수 있어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잠깐 화면 너머가 웅성거리더니 다른 목소리가 화면 너머로 들렸다. 주세진이었다.

―무슨 일인데.

“…진짜 이상하게 들리는 건 아는데요. 갑자기 뭔가 불안해져서요. 이 느낌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 진짜, 내가 아주 많이 후회할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느낀 그런 감정에 다시 매몰될 것 같았다.

“…확인 좀 해 주세요.”

주세진이 강유진에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기다리는 동안 꼬마 도깨비 하나를 이예린의 집으로 보냈다.

별일 아닌 거면 이예린에게 사과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차라리 사과하는 쪽을 바라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고, 방 안에 시계 초침 소리가 울렸다.

똑딱이는 바늘의 발걸음을 뚫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류, 잘 들어요.

강유진의 목소리였다. 꼬마 도깨비가 이예린의 집 근처에 다다른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예린 씨 집 안이 뭔가 이상해요. 안을 살펴볼 수가 없어요.

베란다를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한 꼬마 도깨비가….

“…이따 다시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졌다. 내 발밑에서 일렁인 검은 그림자가 내 몸을 삼켰다. 내게 손을 뻗는 이호연에게 뭐라 말해 줄 정신이 없었다.

끊겼다. 이예린에게 보낸 꼬마 도깨비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평소라면 그림자의 세계 안에서 내게 깐족거렸을 것들이 오늘은 얌전히 있었다. 푸른 불이 길을 안내했다.

암흑의 세상을 건너 도착한 곳은 이예린의 집 베란다였다. 꼬마 도깨비와의 연결이 끊어진 그 부근이었다.

손을 뻗어 베란다의 차가운 유리문을 만져 보았다.

“…….”

이상한 기분이었다. 유리창 너머에 보이는 거실은 저번에 보았던 것과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는 이 풍경이 진짜 내가 보는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 손끝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유리문에 닿았다.

나는 주춤거리며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푸른 불이 넘실거린다. 살라 먹고 지나가 자리에 남은 것은… 암흑이었다.

“이건 또 뭐야….”

유리창 위로 남은 검게 번진 어둠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

“눈치가 빠르네. 벌써 올 줄은 몰랐는데.”

여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알 것도 같은데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 안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지금 느껴지는 고통이 진실로 그녀의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종류의 것인지 환상통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가.

그러면서도 그녀의 손 하나는 아직도 아스트로노미 위에 놓여 있었다. 정확히는 묶여 있었다. 손톱 끝에 금박으로 만들어진 별자리 하나가 스쳤다.

말만 무기지, 무기 역할도 못 하는 장식품이 이 순간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몰랐다. 그녀는 눈을 굴려 여자를 보았다.

어디에 정신이 팔린 것인지 여자는 저 너머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기류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잔상을 남기고 사라지는 황금색의 기류를 눈에 담음과 동시에 목구멍이 타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영역을 연 마법사의 대가였다.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너무 편했나? 그래서 실력이 퇴화했나? 원래라면 아무리 아파도 어떻게 해서든 영역을 열었는데.

죽는 게 무섭지 않았는데. 이제는 죽을 만큼의 기력을 다해도 영역을 열 수가 없었다. 그것이 굳이 따지자면 좋은 일이라는 걸 아는데 이 순간에는 조금, 많이 곤란했다.

여기에 그 사람이 있었으면 나와는 참 달랐을 텐데.

그녀의 머릿속으로 새까만 인영이 떠올랐다. 새삼 새침한 얼굴로 짓궂고 영악한 사람. 어딘가 비틀려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웃는 낯을 흉내 내고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

내 예언이 틀렸나?

그녀는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틀린 것 같았다.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예언을 하라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아스트로노미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둠 너머를 바라보던 여자가 다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땅에 닿을 것 같은 주홍 머리가 하얀 옷자락과 함께 흔들거렸다. 겉모습만 보면 악마보다는 천사에 가까웠다.

오히려 색감만 보면 그 사람이 악의 무리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말을 하면 그 새침한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눈에 훤해서, 그녀에게 뭐라 말대답할지 궁금해져서….

누구도 구원해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구원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한 어린 영웅. 가장 자유롭고도 얽매여 있는 사람.

그녀를 보면 화가 난다던 그 말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화 안 나냐고 묻고 싶은데.

“…….”

이렇게 끝? 진짜면 너무한데. 거기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내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글쎄요. 할 수 없다고 이미 전제하에 둔 당신보단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툭하면 비꼬고. 일부러 못되게 말하고. 다 알면서. 그런데 그 밉살맞게 굴던 말이 그녀를 살렸다.

여자가 그녀 쪽으로 몸을 낮췄다.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정말 이게 끝이라면 그건 너무 억울했다.

결코 성격 좋다고는 못할 사람. 그럼에도 맥없이 주저앉는 그녀에게 그 삐뚤어진 성격으로 막말해 준 사람. 그녀의 인생이 글러 먹었다고 말해 준 사람.

적어도 한번은 나도 당신한테 밉살맞게 굴어 봐야 억울하지 않지 않은가?

그 생각을 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팔 근육이 당겨지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여자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기다란 주홍색 머리카락이 허공에 흔들거렸다.

“왜 이렇게 무거워 진짜… 팔 빠져 죽겠네.”

아스트로노미는 한쪽 팔로 들고 휘두르기엔 만만치 않은 무게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다.

맞은 부위를 붙잡고 주저앉은 여자를 보며 그녀는 웃었다. 헛웃음이 실실거리는 웃음으로 바뀌는 데에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느 힘법사 말대로 힘이나 기를걸. 그럼 한 대 더 때릴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한 거 배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법을 쓸 때는 조금의 타격도 없던 여자가 아스트로노미에 맞고 쓰러진 걸 보니 기분은 좋았다.

이래서 당신이 매번 주먹부터 나간 거였나?

“귀찮게 구는군,”

“피 흘리면서 그런 말 해 봤자 하나도 안 멋져.”

여자의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을 잡지 않은 반대 손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일렁거렸다. 아, 이번에는 진짜 끝인가?

“…….”

아니다. 그녀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너, 뒤에.”

여자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주홍 머리 너머 어둠 속에 피어오르는 푸름을 보았다. 여자는 그런 그녀의 시선의 방향도 무시했다.

딱 전형적인, 뒤통수 맞기 좋은 고집 있는 성격이었다. 숨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히죽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성격 나빠진 건 다 당신 때문이야.

제일 성격 나쁠, 일부러 못되게 굴고는 하는 새침데기 공주님. 본인은 그렇게 불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으나 그녀는 그렇게 부르는 게 좋았다.

은근히 싫어하는 그 별명을 부를 때 질색하는 모습이 재밌었어. 그 순간만큼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그러니 그녀 또한 그냥, 평범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목소리가 귀를 타고 선명하게 들렸다.

“너, 뭐 해?”

“!”

여자가 뒤를 도는 것과 동시에 작은 손이 여자의 머리를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아스트로노미로 여자의 머리를 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쁜 숨 사이로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진짜 미치겠다. 검은 두루마기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토끼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다 왔어요?”

그녀의 물음에 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았다. 제 차림에 그닥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 어떠냐는 듯한 얼굴을 보니 결국은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그녀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서 이곳을 나간다.

“저 여자, 때려 주세요. 나 괴롭혔어요.”

“옛날 성격으로 돌아왔네요?”

그 태연한 말에, 심각한 상황을 뒤로 두고 뭐라 답할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는 류도 원래 그런 성격 아니잖아요? 가끔은 지나치게 비꼬고 비틀어서 말하는 것도, 과하게 가볍게 구는 것도.

그 모든 행동들이 나처럼 자기방어적인 행위잖아요. 그러고선 본인은 아닌 척.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가볍게 굴고 뭐든 괜찮다는 듯이 굴지.

저러다 한번 터지면 나처럼 될 텐데. 말 없는 그녀를 의아한 듯 바라보는 얼굴은 말갛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앓는 소리가 들렸다. 주홍 머리 여자의 몸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류와 같은 사람을 잘 알았다. 본인과 비슷하니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흐리게 말했다.

“저 사람이… 내 인성을 죽였어요.”

세상이 당신의 무언가를 죽인 것처럼. 그래서 당신 성격이 그런 것처럼.

그녀의 말에 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에 드리워진 의심의 그림자는 금세 사라졌다. 그러고는 여자의 이마에 흐르는 피와 피가 묻은 아스트로노미를 가리켰다.

“많이 폭력적으로 변하기는 했네요.”

“아, 그건 류를 엿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말에 류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왜 갑자기 팀 킬이냐고 투덜거리는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류를 보며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생각보다 내가 많은 걸 할 수 있었다고요.”

“?”

모르겠다는 얼굴. 그 얼굴을 보며 그녀는 히히 웃었다. 류는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슬며시 웃었다. 아무렴 어떠냐는 표정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고는 손을 들었다. 그것은 지휘자같이 섬세하면서도 흐느적거리며 성의 없었다.

박살 나고 널브러져 있던 가재도구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흘러나왔다. 마치 어둠이 거는 말 같은 그것들은 제 주인의 손 아래에서 거칠게 일렁거렸다.

기다란 제등이 류의 손에 쥐어졌다. 등이 흔들거리며 옅은 푸른 불을 뱉어 냈다.

“그래서 넌 누구야?”

부들거리며 일어나는 여자가 주홍색 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여자의 시선은 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푸른 불꽃.”

그 말에 반응하듯 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약간의 짜증스러움이 담긴 얼굴이었다. 류의 주변을 배회하던 까만 것들이 저들끼리 속삭이듯 술렁거렸다.

그러곤 슬그머니 그녀에게 오더니 그녀의 손을 휘감았다. 손 위로 어둠이 번졌다. 그것은 무척이나 차갑고, 손대기 싫은 음울함이 담긴 손짓이었다.

“!”

류를 불러 그림자가 뭔가 이상하다 말하려는 순간 아스트로노미가 흐릿하게 빛났다. 그것 위에 올려진 손이 움츠러들었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아스트로노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게. 그리고 무언가, 무언가 변했다.

시계는 움직이고 세상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별자리 판이 깨어나면 운명이 움직이고, 별이 예언가에게 속삭이는 말.

손끝에 닿은 별자리 판이 처음으로 그녀의 손안에서 깨어났다.

아스트로노미(Astronomie). 천문학을 타고 흘러든 별의 예언들이 반짝였다. 그것을 눈에 담고 입에 담아 소리 내어 보았다.

“운명의 실, 실 잣는 아이. 별을 보며 노래하는… 어느 예언자의 꿈. 그리고….”

비밀을 지켜. 알려 주지 마. 이건 너만 알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작은 선물이야.

“…누구에게?”

…왕이 되지 못한 어린 공주에게. 비밀을 지켜. 안 그러면 너를 끌고 가 버릴 거야. 저 깊은 어둠 속으로.

***

저건 또 왜 저래?

이예린의 손에서 빛을 내뿜는 아스트로노미란 멋들어지고도 긴 이름을 가진 별자리 판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여자 눈 돌아갔다.

각기 다른 유리 조각을 엮은 것 같은 눈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에 있는 커다란 흉터가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기울이고 이예린 쪽을 보는데, 그냥 무서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제 머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팔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목이 돌아간 거였다. 그런데 그걸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교정한다는 점에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양부터 인간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진득한 거부감이 있었다.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라는 느낌이 섬뜩하게 등줄기를 훑었다.

발끝에 닿을 것 같은 주홍색 머리는 신비한 느낌이 들게 했다. 하얀 천 자락으로 만들어진 옷은 언뜻 보면 성스럽게 느껴졌다.

“…분위기가 뭔가 익숙하네.”

특히 하얗고 성스러운 옷을 입었다는 점이. 제대로 돌아온 목을 더듬는 여자는 가만히만 있으면 성스러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눈은 계속 보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굳이 따지면 마치 보석 같아 보였다. 성녀 같은 차림새와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눈. 보석과 함께 어우러진 베일도 그렇고.

고정 관념이기는 하나 누가 봐도 신을 모실 것 같은 비범한 차림새였다. 그리고 그 신의 이름은 테오그라젠스.

나는 아스트로노미 위로 얼굴을 들이밀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뭐라 중얼거리는 이예린을 확인한 뒤 앞을 보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저 여자를 상대해야 하는 건 알 것 같았다.

“너, 테오그라젠스 알아?”

내 물음에 여자는 눈을 깜박였다.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다채로운 유리 조각을 품은 눈이 언뜻 반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름은 마티입니다.”

“내가 물은 건 네 이름 아닌데?”

시비조에 가까운 내 말을 분명 들었음에도 마티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예린을 가리켰다.

이예린은 무엇을 하는지 중얼거리며 아스트로노미 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먹먹하게 들려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뒤엣것을 제게 넘겨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두고 무슨 물건처럼 말하는 것을 보아 저쪽도 성격이 꽤나 좋지 못한 것 같았다.

“싫으면?”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예상외로 유한 대답이었다. 쉽게 포기할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여자의 눈이 번뜩였다. 각기 다른 색깔의 유리 조각을 엮어 놓은 것 같은 눈의 색깔이 변했다.

완연한 주홍빛. 하지만 그 색의 농도가 조각마다 달랐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원래 상대가 저런 식으로 뭔가 있어 보이게 변하면 꼭 내게 불리한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이쪽도 뭔가 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영역을 다룰 줄 아는 이예린이 저 꼴이 났다는 것은 저 불청객의 실력이 꽤 좋다는 뜻이었다. 테오그라젠스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점에서 애초에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머리카락이 잘린 것 외에는 별다른 부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이예린의 입가 주변은 피로 흥건했다. 외상을 입히지 않고 내상만 입힌 것과는 무언가 달랐다.

뭔가… 굉장히 성가시고 짜증 날 것 같은 능력을 갖고 있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서둘러 이예린의 어깨를 두들겨 그녀를 불렀다. 별자리 판을 뚫어져라 보던 이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예린 또한 무언가 위협스레 변한 상대를 눈치채고는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낑낑거리며 아스트로노미를 끌어안은 이예린이 다급한 얼굴로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 여자,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목이 잘려서 굴러갔는데 다시 원래 자리에 있는…. 아무튼 환상은 아닌데 분명 내 목이 잘려 나갔어요!”

목이 잘려? 눈으로 훑어본 이예린의 목은 멀쩡했다. 오히려 잘렸던 흔적이 있는 것은 저쪽. 도대체 무슨 능력을 갖고 있길래.

여자의 주변으로 유리 조각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을 눈으로 살피며 우리가 서 있는 이 공간 자체를 관찰해 보았다.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는 결코 아니었다. 공간 자체의 주인이 저 여자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영역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제등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테오그라젠스, 알아?”

“…….”

“질문 바꿔 줘? 네가 천공 섬에서 넘어온 테오그라젠스의 사도 중 하나야?”

“…나의 신은 전능합니다.”

“?”

“그러니, 그렇게 함부로 입에 담지는 마십시오.”

여자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기다란 흰 천 자락이 여자의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만 보면 내가 성녀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 같았다.

색 조합이 가져오는 고정 관념이었다. 나는 딴생각을 관두고 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푸른 불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작은 해일을 닮은 불을 여자를 향해 내리쳤다. 그것을 보며 여자가 눈을 감았다.

“?”

저건 또 뭐야?

여자의 주변을 맴돌던 유리 조각 안으로 푸른 불이 빨려 들어갔다.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푸른 불이나 그걸 또 좋다고 탐욕스럽게 푸른 불을 삼키는 이상한 조각이나.

둘이 싸우는 이상 이 이상의 행동은 의미 없었다. 푸른 불을 거두었다. 불꽃 때문에 푸르게 환해졌던 공간에 다시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마치 우주를 떠다니는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밟고 서 있는 것은 벽이 무너진 이예린의 집 방 한구석이었기에 인지 부조화가 심각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외에는 어둠밖에 없던 공간 위로 유리 조각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투명하고도 다채로운 색을 품고 있었다.

또한 크기와 형태가 내게는, 아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상당히 익숙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천체의 움직임처럼 주변을 맴돌던 유리 조각들이 뚝, 멈췄다.

여자가 눈을 떴다. 투명한 유리 조각 안으로 색이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푸른 바다와 우거진 숲. 소복한 눈과 열기의 용암. 어느 들판의 초원과 황폐한 황무지.

저거 아무리 봐도….

나는 아스트로노미를 끌어안은 이예린을 둘러업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밟고 있는 살림살이, 다 망가져도 돼요?”

“…아깝지만 우리의 안전과 목숨이 먼저 아닐까요.”

옳은 선택이다. 등이 열리며 푸른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이예린의 몸에 불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푸른 불 위로 올라탔다.

색이 입혀진 유리 조각에 익숙한 빛무리가 서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으나 어둠 위에서 둥실거리며 떠 있었다.

저 유리 조각. 설마 했는데 역시 하늘 조각이다. 단순 생김새뿐만 아니라 게이트를 연상케 하는 빛무리를 내뱉는다는 점에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미친….”

내 입에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유리 조각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자세가 불편해 켁켁거리는 이예린을 바르게 안아 들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절로 헛웃음과 비틀린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유영하는 여자를 보았다.

“네가 원인이야? 하늘 조각, 괴물. 다 네가 한 짓이냐고.”

내 질문을 가장한 화에 여자는 내 짜증을 돋우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의 신께선,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만 기다리며 가만히 있기에는 무료하다 하였습니다.”

“…….”

“신께선 내게 공간을 다룰 능력을 내려 주셨지요. 그분의 몸과 같은 하늘은 매개체일 뿐. 통로를 만드는 역할은 저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말은 하늘 조각을 이용해 괴물들이 넘실거리는 곳을 내가 사는 세상과 이어 버린 범인이 저 여자다, 이거네?

숨을 뱉었다. 달려들기에는 내 품에 안겨 있는 이예린이 걸렸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저 여자한테 달려들어 정신을 놓고 싶었다.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머리는 생각을 비우도록.

“…….”

하지만 지금은 덤비는 거 말고 다른 것을 할 차례였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나 혼자가 아닌 이예린을 둘러업고 있는 지금은 싸움을 최대한 피해야 했다.

손안에 잡히는 이예린의 옷자락을 쥐어뜯듯이 그러쥐며 입을 열었다. 싸우는 건 안 된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정보라도 얻어야 했다. 이성적인 생각 따위, 멀리 던져 버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그럼 괴물은 어디서 만들어지는데?”

“다른 이가 만듭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하긴 그런 괴물들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공포였다.

“그게 누군데.”

“당신이 굳이 알 필요 없는 자입니다.”

예의 바르게 사람 인내심 불 지르는 타입이었다.

“알 필요 있으니까 말하는 게 어때?”

“…궁금하시다면야 말하지 못할 것은 없지요.”

유리 조각에서 기어 나와 덤비는 것들을 푸른 불로 감아 태워 버렸다. 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대화를 가장한 견제를 하는 지금도 여자의 조각 안에서 괴물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대한 몸들에 비해 게이트의 입구가 좁아 여럿이 뭉쳐 있는 것에 불을 질렀다.

맥없이 타 버리는 괴물을 힐끔거리며 여자가 말했다.

“그자의 이름은 다윈. 당신께서도 이미 아는 자입니다.”

“내가 이미 안다고?”

“당신을 신데렐라라 하더군요.”

아, 둘리. 누군지 알겠네. 역시 그 자식도 사도였구나.

그런데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여자는 내가 묻는 것들을 술술 알려 주었다. 여전히 괴물들을 끄집어내는 것을 제지하지는 않았으나, 뭐라고 해야 하지.

나를 상대하는 것은 성의 있었으나 나와 싸우는 것 자체는 성의가 없었다.

이예린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그런 여자의 모습에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차별 어쩌고 하는 것을 보아 내가 오기 전까진 이런 대화조차 성립되지 않았던 듯했다.

대화가 끊기자 여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카샤라고 하던가요. 그 안에 사는 것들을 데리고 와야 당신께는 심심풀이가 되겠군요.”

“필요 없는데.”

손을 뻗는 여자의 팔을 어둠 속에서 삐쭉 튀어나온 그림자로 꿰뚫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무감한 낯으로 제 팔을 꿰뚫은 것을 바라보던 여자가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는 않군요. 응용력은 뛰어나나 통제가 아닌 찍어 누르는 방식을 사용 중이라 그런 것 같은데.”

여자가 말하는 것은 그림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통제가 아닌 찍어 누르는 방식. 내 명령은 따르지만, 언제나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는 것들.

조금 놀랐다. 저 여자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에서부터 그것을 구별해 냈다는 점까지. 굳은 나를 두고 여자가 말을 이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아직 온전하지 않아 그런 건가.”

“…….”

“그럼, 얘기가 달라지는데.”

“……!”

지금, 뭐….

등에서부터 시작돼 길게 이어지던 푸른 불줄기의 중간 부분이 끊겼다.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에 무언가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면이 드러난 것처럼 끊겼던 푸른 불이 다시 유유히 흘렀다.

“…뭐지?”

뭔가 지나간 것 같기는 한데. 류를 잡고 있는 쪽의 팔을 돌아봤지만 멀쩡했다. 뭘 한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네. 팔이 분리되어야 하는데.”

“…….”

이예린이 목이 잘렸다가 돌아왔다고 했었지. 그리고 저 여자 스스로 자신은 공간을 다룬다고 했다.

“아,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겠네.”

언젠가 오정인이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길드 차원에서 받는 훈련 중 요새 공간을 이용한 공격법을 배우고 있다고.

쉽게 말하자면 공간 이동이 실패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상대의 신체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분리하는 방식이라고 했나. 결국 실패했다고 했었는데…. 그걸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 이예린이 겪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목과 몸을 분리했다가 다시 되돌려 놓기. 이론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 사이의 연결을 끊어 놓지 않았다면 가능하다.

내 팔이 잘리지 않은 건 두루마기 때문인 것 같고. 자세히 보니 검은 옷자락에 옅은 흠집 같은 것이 나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가 엉켜드는 것처럼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 두루마기 밖으로 튀어나온 부위였다면, 예를 들어 소매 밖의 손목 같은 부위였다면 손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는 거네.

“…….”

당해 보니까 알겠다. 공간을 다룬다는 것은 사기였다.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당한다.

상대가 별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솔직히. 처음으로 이길 자신이 없어졌다. 아카샤의 보스 몹을 봤을 때보다 더.

제 손을 꿰뚫은 그림자 줄기를 잡아 빼내며 여자가 나를 보았다. 주홍색 눈동자는 따스한 빛깔에 맞지 않게 스산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돼.”

“그쪽 인성이?”

“아니. 당신의 애매한 강함이. 단순히 계승하지 않아서는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다.”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뀐 여자의 말투가 불안했다.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았다.

여자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였다. 꿰뚫렸던 손등에 다시 새살이 차올랐다. 미친 회복 능력이었다.

여자는 멀끔해진 자신의 손을 들어 손가락 틈새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애매하면 안 돼.”

“?”

“네가 그러면 나는 망설여지잖아.”

“…뭐가?”

“나의 신에 대해서. 전능한 만큼 무관심하고. 언제나 저 너머 나락을 보시던 분, 날 지옥에 빠트리고 낙원으로 구원하신 분. 원망스럽도록 절대적인 분.”

여자가 손을 맞잡았다. 이마에 가져다 대며 고개 숙인 여자가 신에게 기도라도 하듯 말했다.

“지옥과 낙원은 한 걸음 차이. 어긋난 소원 들어주시는 나의 신은 어디 있나. 하나는 다시 태어났고, 하나는 새로 태어났다. 나비의 소원에서 시작된 기이한 이야기.”

“…….”

“푸른 불아, 타올라라. 어린아이 손에서 타올라라. 민가를 태우고 수풀을 태우고 숲을 태우는구나. 사람들 모여든다. 아아, 푸른 불아, 너는.”

“!”

이런. 류를 잡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타난 여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제등으로 막아 낸 여자의 손은 사람의 손보다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

기다란 손톱이 눈 바로 앞에서 흔들거렸다. 주홍색 눈을 번뜩이며 여자가 말했다.

“지옥을 열까, 낙원을 열까. 그도 아니면.”

이예린이 몸을 비틀어 여자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자는 제 뺨을 베고 지나간 것을 무감각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상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게 선택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예린을 내려놓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푸른 불이 여자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에 붙었다.

여자는 불붙은 모습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등을 붙잡은 여자의 손에도 불이 붙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마주 보는 얼굴은 불 속에서도 무표정했다. 고통 자체를 못 느끼는 건가?

“적어도 지금은 없는 것 같구나.”

발을 들어 올려 여자의 명치를 찍어 눌렀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이 분명함에도 정작 여자에게선 밭은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한 발로 서서 비틀거리는 사이 이예린이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여자의 왼쪽 눈을 찌른 검이 이예린의 손에서 벗어났다. 손에 쥐고 있던 제등을 놓았다.

“꽉 잡아요.”

내 말에 이예린이 내 목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비틀거리는 몸에 힘을 줘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렸다. 불 위에서 비틀거리던 다리가 회전축이 되었다.

반대쪽 다리는 곧바로 여자의 관자놀이를 걷어찼다. 곧바로 중심을 잡아 여자의 눈에 박힌 검을 잡아 뽑았다.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눈에 난 상처를 보며 욕을 짓씹었다.

단검을 여자의 손목에 박아 넣으며 여자가 놓지 못한 류를 잡아 들었다. 더 이상 물건을 쥐는 용도를 다하지 못하게 된 손을 눈에 담으며 제등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자는 맥없이 끌려왔다. 손목에 박은 단검을 다시 뽑아 반대쪽 손목을 베었다. 다리를 들어 여자를 걷어차자 기능을 상실한 손으로는 뭘 할 수 없었는지 드디어 여자의 손이 제등에서 떨어졌다.

여자의 불붙은 몸이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 푸르게 빛나는 몸체는 눈에 띄었다. 단검을 고쳐 잡고 그 불덩어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나는 숨을 내쉬고 이예린을 고쳐 안았다. 본인의 힘으로만 내게 매달려 있으면서 무게가 제법 나가는 아스트로노미까지 들고 있어야 했던 이예린의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

죽었나? 불의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보이는 푸른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산 건지 죽은 건지도 모르겠는 몸이 이렇게 쉽게 죽을 리 없기는 하지. 저렇게 활활 타올라도 여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저건 죽일 수 없는 무언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일단 여기부터 나가자.

푸른 불이 다리를 만들어 냈다. 이예린에게 꽉 잡으라고 한 뒤 그 위를 달렸다. 유리 조각에서 튀어나와 덤비는 것들은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 공간은 얼마나 넓은 건지 매캐한 탄내가 코끝을 스치다가도 금세 사라졌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피하자 그것들은 저들 주인이 만든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나는 낯을 찌푸렸다.

저것들이나 우리나 똑같이 이 공간의 미아가 된 처지였다.

“망했네.”

이 공간 자체가 그 여자의 것이라 그런지 가도 가도 출구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공간을 찢고 이곳으로 들어와 이예린이 있는 곳까지 온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공간에 끝이라고 할 만한 데라도 알면 뭐라도 해 보겠는데…. 모르겠다. 이 안에서는 모든 감각 기관이 빙글빙글 돌아가기만 하는 나침반처럼 변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앞으로 가는 것인지, 옆으로 가는 것인지. 일직선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암흑이었다.

“어떻게 나가는 건지 예언이라도 해 보면 안 돼요?”

아까 여자에게 당한 것에 대한 후유증인지 멀미인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이예린이 고개를 간신히 끄덕거렸다.

“그 전에 이거 자세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이래선 못 해요.”

그녀의 말에 어깨에 둘러업고 있던 자세를 고쳤다. 손에서 제등을 놓자 등이 일렁이며 내 옆에 살포시 떠올랐다. 안정적으로 두 팔로 안아 들자 이예린의 얼굴이 그제야 좀 살 것 같다는 듯 변했다.

피가 쏠려 벌게졌던 얼굴도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품 안에 아스트로노미로 손을 올린 이예린의 눈에서 황금빛 기류가 어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이젠 아스트로노미를 다룰 수 있게 된 건가?

프레데터와 함께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던 것을 생각하면 축하할 일이었다. 지금 이 상황까지 우리를 이끌고 온 게 저것 때문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보면 마냥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온다.”

앞으로 향하던 걸음을 뒤로 물렸다. 푸른 불의 다리를 찢어발기며 튀어나온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불에 타 버려 뭉텅이로 잘린 머리카락 사이로 목에 난 선명한 흉터가 보였다.

또한 어깨에 박힌 단검 하나도.

어째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은 흉터 하나씩 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 눈을 감은 여자가 하나 남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역시, 가망이 없나?”

여자가 말했다. 불에 타오르는 자신의 모습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주홍빛 눈 하나가 또르륵 굴러 내려갔다. 여자의 시선이 금빛이 서리기 시작한 아스트로노미로 향했다. 목적이 명확한 눈을 보며 나는 언제든 달려나갈 수 있게 다리에 힘을 주었다.

검푸른 별자리 판 위로 황금색의 별자리들이 떠올랐다. 이예린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하고 되물으니 이예린은 진짜, 하고 답했다.

“…여기서 나가면 휴가 연장해 달라 해야지.”

내 말에 이예린이 곧바로 내 목에 팔을 휘감았다. 품 안에 아스트로노미의 빛이 흐려졌다. 딱딱한 별자리 판에 눌린 어깨가 아팠다. 이예린을 한 팔로 안아 지탱하며 제등을 다시 손에 쥐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허공 위 푸른 불이 사그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덜거리는 손목이 흔들거렸다.

내 발 하나 간신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불 위에 서서 제등을 똑바로 세웠다. 등이 흔들림과 동시에 이 어둠 속까지 기어들어 온 것들이 속닥이기 시작했다.

통할까 모르겠네.

“귀밀레, 귀밀레.”

하룻밤 사이에 돌다리를 놓을 수 있는 기이한 것들의 공간이 다른 것의 공간 위로 덧씌워졌다.

여자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공간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귀교(鬼橋)를 타고 넘어오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의 공간에 그보다 더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삿된 것들을 안내한 푸른 불이 둥실거리며 그 어둠을 희미하게나마 밝혔다.

하얀 입김을 뱉으며 덜덜 떠는 이예린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꼬마 도깨비들을 불러내 그녀의 옆에 서게 했다.

연결이 끊겼던 깨비 하나도 무사한 모습으로 이예린의 곁을 지켰다.

“이건, 제법 괜찮은 능력이네요.”

“…….”

여자의 말투가 다시 존댓말로 바뀌었다. 자꾸만 나를 평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전투력 측정기도 아니고.

여전히 몸에 붙은 불을 끄지 않으며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주홍색이었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여자가 손을 뻗어 그림자의 벽을 만졌다. 정확히는 너덜거리는 손을 들어 갖다 댄 것에 가까웠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이 튀어나와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너덜거리는 것을 잡아당겨 일어나는 흉한 꼴에 나는 낯을 굳혔다. 하지만 정작 그 손의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이 오늘 겪은 모든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래야 하는 걸까요?”

“뭔 소리를 하는지 아까부터 모르겠는데.”

“그런가요? 그렇군요.”

여자가 팔을 흔들어 검은 것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아쉽게 다 잡은 것을 놓친 것들이 입맛을 다시는 기색이 느껴졌다.

자신의 다리를 옭아매는 것들에게 질질 끌리면서도 끝까지 내 앞으로 걸어온 여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냥 그런 이야기랍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신께선 언제나 나락의 아래 웅크린 것만을 생각하지요.”

고민하다 류의 날카로운 단면을 휘둘러 여자의 목을 베었다. 여자는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팔 위로 제등이 박혔다. 곧바로 다리를 들어 여자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의외로 맥없이 맞은 여자가 비틀거렸다. 완력이나 순발력이 부족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일부러 맞았거나, 혹은 피할 생각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인 듯했다.

어둠 속으로 하얀 옷자락을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은 여자가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종인 나비는 신에 의해 망가진 제 삶이 ‘지난날’로서 기록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삿된 것들이 여자의 몸을 꿰뚫었다. 상처에선 여전히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이제는 의심이 들었다. 저 몸이 진짜 몸이 맞기는 한 것인지.

치료라도 됐다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고 안 죽고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저 몸 자체가 가짜인 건 아닐까?

“어느 날 무료한 신께서 우리를 불러다 소원을 빌라 하셨지요. 우리는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흉내 낸 작은 베풂이었을까요.”

뒤편에서 이예린이 아스트로노미를 살펴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의 목표는 이 여자의 공간을 빠져나가는 거였다.

“누군가는 따스한 집을 얻었고 누군가는 세상에 다신 없을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천공 섬에 풀이 자라고, 바다가 생기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었습니다.”

손을 뻗어 여자의 목을 낚아챘다. 바닥을 향해 내리치는 내 손길에 따라 여자의 몸이 흔들거렸다. 그럼에도 여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료한 신께서 유흥거리를 찾으니. 천공 섬은 새빨간 염료로 덮인 듯 그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지요. 푸줏간에서나 맡아지던 진한 피 냄새가 어딜 가든 맡아졌습니다.”

“…….”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신께선 살아남은 아이 열둘을 향해 말씀하셨지요. 소원 하나를 빌어 보라고. 하여 나는 누구에게서나 도망 다닐 수 있는 능력을 달라 하였습니다.”

자신의 목을 틀어쥔 내 손을 여자가 툭툭 건드렸다. 기능을 상실한 손은 그런 식으로 내 손을 붙잡고자 하였다. 그 힘없는 몸짓을 부러 뿌리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손길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다음번에도 살아남을 지혜를. 누군가는 그 누구의 손에도 죽지 않을 능력을. 누군가는 상대가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원했지요.”

여자의 눈이 어딘가를 바라보듯 멍해졌다. 흐릿해진 동공 때문에 여자의 눈이 더더욱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의 권리. 기꺼이 가족을, 친구를, 이웃을 짓밟고 살아난 우리에게 베풀어진 작은 권리였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여자는 내 물음을 무시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종. 나비.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이던 시간에도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그는 색다른 소원을 빌었답니다.”

“…나비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아나 봐?”

이건 예상 못 한 건데. 스멀거리는 어둠이 여자의 몸을 휘감았다. 여자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신께 말했습니다. 생에 단 한 번 신에게 총구를 들이밀 기회를 달라. 당신께선, 당신의 종자가 내민 총구를 결코 피해서는 안 된다.”

“……!”

“나비는 첫 번째 생에서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지요. 어리석을 것들을 인도하여 신에게 대항하고자 하였습니다. 신께 소원을 빈 아이들 중 다섯이 그때 죽었지요.”

“네 신은 그딴 소원을 들어줬고?”

“그분은 전능하시며, 무관심하고, 무료함에 즐거움 하나 더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래 놓고 다시는 방종한 것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겠다며 또 다른 하나를 잡아먹겠다고 하냐? 그렇게 비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실패하였고, 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생에 단 한 번 있는 기회는 이미 실패로 돌아갔으니까요.”

“…….”

“나비는 기억과 한을 놔두고 혼만을 보내 자신이 다시 한번 새 삶을 얻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운명에 목줄이 채워진 작은 나비가. 그 과정에서 도깨비들의 왕과 거래가 오갔다 하지요.”

“…무슨 거래.”

“가여운 여우, 다시 태어나 살아갈 길에 나비가 간섭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도깨비들의 왕은 나비의 혼을 이끌어 다시 태어나게 해 주었지요.”

“…….”

“그는 인도자. 그에게는 남의 운명에 간섭하는 타고난 재능이 있지요. 그것은 그 뱀 같은 혀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길 잃은 것들이 쫓아오게 만드는 그 힘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걸 랑이 안 도와주면 내 인생에 간섭할 거라고 협박했다는 거네.

“…….”

자신의 전직관이자 전생이나 다름없는 남자를 보며 희게 질린 낯을 하던 쥬가 생각났다. 내게 네 삶이 네 삶 같냐고 하던 말도.

한숨이 나왔다. 그건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도 아닐뿐더러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은 숙제였다.

여자의 어깨에 박힌 단검을 뽑아 목 아래에 들이밀었다. 피가 묻지 않아 깨끗한 검 위로 나와 여자의 얼굴이 담겼다.

“왜 굳이 다시 태어난 건데.”

“그야, 생에 단 한 번만 신께 총구를 들이밀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번 생은 실패하였으니 새로운 생을 시작해야 기회 또한 따라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

“왜 굳이 태어나는 걸 선택해서 멀쩡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죽게 했냐고.”

테오그라젠스는 종교 단체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늘이 무너지던 날. 그 하늘의 무너짐의 시작에 무료한 신의 이름을 단 종교가 관련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주교. 주교의 아들. 타고 올라가는 생각의 끝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진짜 나는,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는 운명에 잘도 놀아나는구나.

무정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는 여자에게 물었다.

“하늘을 무너트린 건 나비지?”

“…모든 것의 시작은 길을 앞서는 인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맞다는 소리를 참 길게도 한다.”

짜증 나게. 손에 쥐고 있던 단검에 조금 힘을 주었다. 칼을 타고 느껴지는 감촉이 선명한데,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색감이 없어서 그런가.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가장 비현실적인 건 내 눈앞에 여자였다.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라는 것들이었다. 다 알면서 죽임당하고, 희생하고 이곳으로 왔다는 이들.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광신도적으로 저들의 신을 따라서라기엔 여자가 그렇게 제 신에게 목매는 것 같지가 않았다. 심지어 첫 번째 종이라는 놈은 제 신을 죽이는 것이 목표고.

무슨 생각인 걸까, 이 사도라는 것들은.

“그럼 너희는 그걸 다 알면서 그 나비의 말을 따라 세계를 넘어서 여기 왔다는 거야? 너희 신 모시려고?”

누가 봐도 그 첫 번째 종이라는 나비의 말은, 그들을 이곳으로 넘어오게 하는 그의 방식은 제게 방해되는 신의 사도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는데도?

여자가 내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검은 어둠 위에 흐트러진 주홍빛 머리가 어둑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사도입니다. 사도 된 자가 신을 모시지 않는다면 무엇 합니까. 나비의 행동은 소원의 결과물일 뿐 그 또한 신의 종이지요.”

“…….”

“신을 모시지 않는 우리는, 무슨 가치가 있지요? 그러기 위해 살아남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우리인데.”

그렇게 말하는 눈앞의 여자는, 분명 무표정인데도 처음으로 조금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진짜 별생각을 다 한다 싶어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보기엔 너희 다 미친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지요. 미친 자들 사이에서 살면 누구나 미친답니다. 취하거나, 미치거나. 그러지 않으며 살 수 없는 낙원에서 웃는 방법이 뭔지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여자가 팔을 들어 내 뺨을 제 손으로 툭, 툭 건드렸다. 그것은 자신을 똑바로 볼 것을 요구하는 몸짓이었다. 눈 돌리지 말고, 눈 감지 말고. 뒤에 숨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게 하는 여자의 얼굴은 다시 무감하게 느껴져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얼굴 자체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은 괴리였다.

눈을 돌려 버리려는 나를 보며 마티는 말했다.

“푸른 불꽃이 되실 분께선 계승 이전에 스스로를 마주 보는 법부터 익혀야겠군요. 지금의 당신은 신은커녕 사도 하나조차 이길 수 없답니다.”

확신하는 어조만 아니었다면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 여자의 말을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대꾸했다.

“…신을 모신다고 하는 거에 비해 꼭 내가 그 신을 죽여 버리기를 바란다는 것처럼 말하네?”

“신을 죽일 건가요?”

“…….”

내 말에 곧바로 답하는 답이 조금 이상했다. 애써 끌어올렸던 비틀린 웃음이 맥없이 사라졌다. 저걸 뭐라 해야 할까.

진심 어린 호기심? 아니면 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논하는 이를 향한 힐난?

어느 것이든 달갑지만은 않을 터였다. 제 물음에 답 없는 나를 보던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로 코앞에 드리워진 얼굴이 잘 만든 밀랍 인형 같은 느낌을 주었다.

“후회하실 텐데요.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랍니다.”

손을 들어 여자의 얼굴을 뒤로 밀었다. 그와 동시에 밑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줄기들이 여자의 몸을 붙잡아 끌어당겨 내게서 떨어트렸다.

그녀의 몸은 하찮게 여겨지는 장난감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곧이어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검은 그림자 줄기를 타고 깊은 어둠 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무대 위에서 쫓겨난 인형이 관절을 까닥였다. 그것을 발끝으로 꾹 누르다 몸을 틀었다. 뒤돌아 걸어가는 나를 보며 여자가 말했다.

“다음에는 진짜 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온전해지시기를 신께 빌겠습니다.”

“…….”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관절이 분리된 인형이 그곳에 있었다.

여자의 머리가 하얀 천 자락을 뒤집어쓰고 내 앞으로 굴러왔다. 발치에 닿는 그것이 공 같은 것과는 전혀 달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머리만 남은 인형이 말했다.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랍니다. 모셔야지요.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랍니다. 모셔야지요.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랍니다. 모셔야지요.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니랍니다. 모셔야지요. 신은….”

“계속 들으면 미칠 것 같은데, 입 좀 다물면 안 돼?”

“…….”

내 말을 끝으로 여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여자의 눈이 천 자락 사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가만히 마주 보는 시선의 끝. 여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예언가를 이용하세요. 미래를 엿보고 나면 감히 신께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거랍니다.”

“…시끄럽다고.”

천 자락을 잡아 끌어당겼다. 기다란 천 자락에 엉켜버린 머리 또한 나를 따라왔다. 여전히 피는 없었다.

깨끗한 하얀 천 너머 생경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손을 타고 넘어왔다. 사람을 닮은 머리가, 그 감촉이, 이 상황이 모두 다.

이상하고 이상해 꿈에 빠지는 것 같았다. 여자가 하나 남은 눈을 깜박였다. 그것을 눈에 담으니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그것을 애써 내리누르며 물었다.

“너희 사도들은 다 너 같아?”

“글쎄요. 각자가 조금씩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너 같은 게 둘은 아니면 좋겠다.”

너 같은 게 둘이면 내가 진짜 미쳐버릴 것 같거든.

손에 쥔 머리를 놓았다. 내 발밑에서 솟아난 그림자 줄기가 여자의 머리를 꿰뚫고 저 멀리 가져갔다.

그것을 지켜보다 뒤를 돌아 이예린을 챙겼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역을 열고 난 뒤부터 여자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러더니 기어이 저딴 꼴이 되어 그딴 취급을 받고도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조금 전만 해도 그렇게 죽여 버릴 것처럼 굴었으면서.

그림자 너머는 여전히 저 여자의 영역인 것 같았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이예린의 예언대로만 된다면.

이상할 정도로 피로감이 몰려드는 눈을 꾹 눌렀다 뗐다. 단순히 영역을 열어서라고 하기엔 저번보다 더 피곤했다.

깜깜해지는 눈꺼풀 사이로 반짝이는 별빛이 보였다. 아스트로노미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황금빛의 별자리들이 움직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는 인사부터 할까요? 그림의 떡이던 무기를 다룰 수 있게 됐네요.”

내 말에 심각한 낯을 하고 있던 이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기뻐 보이는 낯이 아니었다.

“…사실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문제였나. 별자리 판 쪽으로 몸을 기울여 보았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봐도 모르겠다. 나는 괜히 그것이 몸에 닿을까 싶어 한 발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일단 나가서 알아봐야죠.”

이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팔로 원을 만들면 비슷할 크기의 별자리 판은 평범한 마법사 이예린 씨가 들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대신 들어 주고 싶었지만 이름 있는 무기들은 자신의 주인 아닌 자가 자신을 잡는 것을 거부했다.

류는 불꽃이 일고, 프레데터는 피 빨아 먹고, 주세진의 오페리움은 랜덤으로 아무 곳이나 보내 버리던데.

“만져 보면 안 되겠죠?”

“호기심에 목숨 걸지 말아요.”

이예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 아닌 자에게 벌주는 저 무기들의 특징은 무기들이 가진 능력과 관련이 있었다.

아스트로노미의 능력이 정확히 판단된다면 만졌을 때 일어날 부작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능력의 종류는 예언이겠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예상할 수 없었다. 보기에는 예쁘긴 참 예쁜데.

눈으로나마 아스트로노미를 즐기며 이예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가는 방법 좀 알겠어요?”

“음…. 시간이 13시까지 있다는 가정하에 4시 37분에 분침이 있을 방향.”

“…지금 12시가 어딘지도 모르는데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로노미의 13개의 별자리는 뱅글뱅글 돌 뿐이었다. 이예린이 울상을 지었다.

“내 무기는 왜 이따위예요? 주세진 씨는 자기 무기를 되게 잘 다룬다던데.”

비교 대상이 주세진인가. 확실히 주세진은 오페리움을 잘 다루기는 했다. 잘 다루기만. 그것을 뒷받침할 신체가 없어서 문제인 거지.

피 토하며 쓰러지는 경우도 잦았고, 한 번은 나 때문이었고. 그 옛날 사고 쳤던 것을 생각하다 시무룩해진 이예린을 달래 주었다.

“그쪽은 본인 전직관에게 제대로 배웠으니까 그렇죠. 이예린 씨도 어쨌든 그거 다루게 됐으니까 전직관한테 가서 알려 달라고 졸라 봐요.”

“류도 전직관한테 배웠어요?”

“나야 뭐…. 그런데 내 무기는 들고 휘두를 줄만 알아도 절반은 가는 거라서요.”

둔기처럼 휘두르든 칼이나 창처럼 쓰든, 어쨌든 대충 쥐고 흔드는 법만 알아도 절반은 간다. 물론 원래 사용법은 그게 아니지만.

이예린은 절반은커녕 이해조차 못 한 제 무기를 보며 한탄 어린 얼굴을 했다. 저러다가 귀한 무기 집어 던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거 무기 분류는 지팡이 아니었어요?”

한숨을 내쉬던 이예린은 뒤늦게 내 말에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에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팡이.”

“…지팡이는 마법 보조 도구지 뭔가를 패는 용도의 둔기가 아닌데요.”

“쓰는 사람 마음이죠, 뭐. 그리고 사람 키만 한 지팡이들은 솔직히 둔기 아니에요?”

에드워드의 신사용 지팡이처럼 짧거나 작지 않은 이상 거의 다 둔기의 용도를 충분히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이예린 씨도 아스트로노미로 그 여자 머리를 쳤잖아요.”

내가 그 여자 머리에서 피 나는 거 분명 봤…는데? 우리는 대화를 나누던 것을 멈추고 동시에 아스트로노미를 보았다.

별자리 판의 구석 부분에는 핏자국이 작게 눌어붙어 있었다.

뭐야? 이예린이 손을 뻗어 붉은 자국을 더듬어 보았다. 약간 끈적이는 그것은 비릿한 향이 났다. 아무리 다시 봐도 피가 맞았다.

“…바꿔치기 같은 건가?”

아니면 분신술? 본인 입으로 진짜 몸이 아니라고 밝히기는 했는데. 그럼 언제 바뀐 거지?

설마 공간 능력?

“…….”

공간을 다룬다는 것을 확실히 내가 가볍게 생각한 듯했다.

리블 길드에는 공략대의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연구하는 팀이 따로 있었다.

능력은 주어지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룰지는 결국 그 힘의 주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다양하고 폭넓은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이상과 이론 중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진 것이 오정인의 공간 능력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발. 이상과 이론, 그리고 현실의 벽은 두꺼웠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감각이 이해 못 했다. 오정인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쓰린 얼굴을 했었다.

그런데 만약 그 여자가 오정인은 알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존재라면…. 그건 곤란했다.

생각이 잠시 다른 곳으로 빠지자 그 잠깐을 안 놓치고 그림자에 숨은 것들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예린 뒤에서 스멀거리는 그림자 줄기를 짓밟고 이예린을 안아 들었다.

그녀 또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는지 굳은 낯으로 내게 말했다.

“류의 영역은 뭐랄까…. 성격 나쁜 것 같은 게 닮았네요.”

나쁘면 나쁜 거지, 나쁜 것 같은 건 또 뭐람. 그리고 내가 저딴 것들이랑 닮았다니. 모욕이다.

“자꾸 그러면 다시 내려놓을 거예요.”

“어, 방향 바뀌었다. 이번에는 8시 23분 방향.”

“…….”

내 말을 무시한 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게 어디냐고요.

애초에 저 별자리 판을 어떻게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설렁설렁 걷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내 영역 밖은 그 여자의 공간이고. 일단 이예린의 말대로 내 영역을 불러와 시간을 끄는 것에 대한 목표는 달성했지만.

이대로 시간만 끌 수는 없는데. 솔직히 말하며 목구멍 안쪽이 점점 쓰려오고 있었다. 명치도 아리고.

울컥거리며 넘어오는 것을 삼키는 나를 보며 이예린이 물었다.

“류, 마법사의 감도 다시 살아났다면서요. 감이 말해 주지 않아요?”

“나보다 감 좋은 사람이 왜 그래요.”

“한도 초과했어요.”

“나도 이예린 씨의 위험을 감지하느라 한도 초과인데요.”

그리고 그 감이라는 게 조금… 이상한 쪽으로 발달해 버려서 이런 상황에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한다고 발동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는 길 알아? 내 시선을 느낀 꼬마 도깨비들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다시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저절로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선명했던 주홍빛의 존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 죽이고 보내 줄 의향이 생겼으면 밖에 있는 공간도 처리하고 갈 것이지. 자신을 마티라고 소개했던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를 생각하면 저절로 열이 뻗쳤다.

“…재수 없어.”

“지금 나한테 한 말은 아니죠?”

“아니에요.”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자존심도 상했다. 제대로 싸워 본 것도 아닌데 못 이긴다는 확신이 섰다. 그 점이 분했다.

전직한 이후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굳건한 믿음이 조금 흔들렸다.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순간 이예린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니 이예린이 어느 한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은 그림자 벽에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영역을 열어요, 그 안에서 시간을 끌면 우리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요.’

조금 전 이예린이 내게 속삭인 말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저걸 누가 했는지도 예상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의 영역의 틈을 비집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은 단 하나였다. 공간. 공간의 일부를 다루는 영역의 상위 능력인 공간 그 자체.

그리고 현재 그 공간의 능력을 사용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누구인지야 뻔했다.

그것을 향해 뛰어가 그 부근의 영역을 흩트려 놓았다. 밝은 빛이 흘러들어옴과 동시에 튀어나온 손이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 손길을 따라가면서 영역을 지워나갔다. 저 멀리서부터 내 것과는 다른 어둠이 기어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

역시, 짜증 나.

깨져 버린 공간의 틈새를 넘어 건너가자 보인 것은 내 손을 붙잡은 오정인, 그리고 뒤편에 서 있던 이호연과 주세진, 강유진이었다.

긴장한 낯의 오정인이 우리의 얼굴을 보고는 맥이 풀린 얼굴을 했다. 그녀 또한 영역을 비집는 종류의 능력 활용은 처음이었던 듯했다.

실패했다면 위험했겠지만, 그녀로서는 도전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뒤에 서 있는 이들의 안색이 별로 안 좋은 것을 보니 이 방법을 사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걱정과 말들이 오고 갔을지 예상이 가는 것 같았다.

안도하는 낯의 그들을 보며 이예린을 내려 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호연이 뛰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이호연에게 설명도 안 하고 뛰쳐나왔던 것이 떠올랐다. 쓰려오는 목 안쪽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

내 사과에 대답 없는, 놓으면 끝이라는 듯 온 힘을 다해 끌어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호연이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는데, 알아서 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날에 집에 쳐들어가 사람 간담 서늘하게 해 놓고 바로 나와서 이런 짓을 벌인 내가 그냥 죄인이었다.

얌전히 안겨 눈만 굴리며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훑어보았다.

오정인이 허공에 찢어 놓은 것 같은 공간의 틈새를 닫는 것이 보였다. 이예린은 주저앉아 헛구역질했다.

사실 나도 좀 죽을 것 같았다. 이래서 영역 열기 싫은 건데. 안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나오고 나니 기운이 쭉 빠지는 게 딱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조금 울렁거리던 속도 더 안 좋고. 목구멍이랑 명치도 더 쓰리고 아렸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이예린이 한 방에 대미지가 오는 구조면 나는 도트 대미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 피를 토해 내는 이예린의 등을 두들겨 주는 강유진을 보며 자꾸만 올라오는 비릿한 맛의 그것을 애써 삼켰다.

여기서 피까지 토하면 정말 최악이었다. 이호연의 등을 두들겨 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모습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저게 뭐야.

“미친….”

뻥 뚫렸다. 말 그대로 뻥. 이예린이 검게 변한 피를 토해 내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 광경을 보았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주세진에게 물었다.

“저 기절해도 되나요?”

“…….”

뭐라 말 못 하는 주세진을 대신해 강유진이 말했다.

“아스트로노미는 상자 같은 데 넣고 기절해 주세요.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어차피 아무도 안 훔쳐 가는 돌덩이….”

취급 참 너무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설명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아무리 영역을 열었다고도 해도 이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았는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시야가 자꾸만 꺼멓게 죽었다.

“…….”

그 여자 때문인가. 지금 여기서 잠들면 이호연 또 울지도 모르는데. 그건 싫은데…. 말을, 하고, 서….

“나, 잠깐만 잘래…. 걱정하지 말고….”

“류?”

나를 부르는 이호연의 목소리를 끝으로 눈이 감겼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이 픽 쓰러지는 이예린을 강유진이 붙잡는 것을 언뜻 본 것 같았다.

***

“…….”

잘 잤다. 그리고 망했다. 침대에 기대어 잠든 이호연을 본 순간 생각했다.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루마기는 곱게 개 의자에 걸쳐져 있었고 나는 예의 토끼 귀 달랑달랑 달린 잠옷 차림이었다.

이마에는 이호연의 집에서 붙였던 것과 똑같은 쿨 패치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더듬다가 뜯어냈다. 침대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그것을 버렸다.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 이호연의 위로 조심히 덮어 주었다. 깊이 잠들었는지 그는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가만 보면 예민한 것 같으면서도 잠들면 깊게 잠들었다. 누가 건들거나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언제 잤냐는 듯 굴기는 하지만.

눈을 스치며 살랑이는 하얀 머리칼을 치워 줄까 하고 손을 뻗었다가 관두었다. 괜히 그랬다가 잠만 깨울 것 같았다.

손을 다시 물리는데 그런 내 손을 이호연이 잡았다. 자는 줄 알았는데 언제 깼담. 살그머니 올라간 눈꺼풀 사이로 회색 눈이 반짝거렸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야?”

“류가 눈 떴을 때부터.”

뻐근한지 목을 주물 거린 이호연을 보며 나는 눈치를 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미안.”

“…….”

“화났어?”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화났지? 화났지? 맞는 것 같은데, 하면 싸우자는 뜻이겠지. 근데 진짜 화난 것 같은데.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던 이호연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잠겨 있기는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나는 그 차분함 속에 숨겨진 애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답지 않게 남 눈치를 보는 거지.

노골적인 애정과 편애였다. 그 대상인 이호연이 그것을 선명하게 느낄지는 잘 모르겠지만.

잡힌 손의 손가락을 까닥거리다 힘을 풀었다. 이호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화난 거 아니에요. 이예린 씨가 일어나서 한 말도 다 들었고, 급했다는 것도 다 아니까.”

“…….”

“그냥,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걱정했어요.”

“…응.”

“너무 위험한 짓을 하지 말아 줘요.”

겨우 한다는 말이 저거다. 그런데 나는 그 ‘겨우’ 취급하는 말에 그가 원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약속은 못 해, 만약 너랑 관련되어 있으면 더 위험한 짓도 할 거 같거든.”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열었음에도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한 이호연이 내 손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고개를 숙였다.

“이 와중에 그 말이 내심 좋아서 내가 쓰레기 같아요.”

“아냐.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럴 때 쓰는 말 아니잖아요. 그리고 웬만하면 정말 위험한 짓을 하지 말아요. 그렇게 다 가볍게 넘기려고도 하지 말고.”

마지막 말은 너무 작아 듣지 못할 뻔했다. 이번에도 나는 답하지 않았다.

이호연 또한 내가 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흐릿한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나 왜 기…, 잠들었는지 알아?”

“그건….”

“내가 말해 줄게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강유진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주세진과 이예린이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이예린은 잘린 머리칼을 다듬었는지 어제보다 깔끔해진 단발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이예린이 손을 흔들거렸다. 그와 동시에 팔에 꽂힌 링거 줄이 함께 흔들렸다. 그것을 발견한 주세진이 잽싸게 흔들던 손을 저지하는 것이 보였다.

멀뚱히 바라보다 강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주세진이 과보호할 인물이 하나 더 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류가 기절한 이유는요….”

“기절 안 했어요. 잠든 거예요.”

삐쭉거리는 내 말에 강유진이 눈을 끔벅였다. 이예린은 옆에서 어이없는 얼굴을 하다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런 그녀를 잠시 노려보았지만, 이예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네, 뭐. 어쨌든 기…, 가 아니라 잠든 이유는 갑자기 확 오른 열 때문도 있는데 갇혀 있었던 공간 자체가 원래 살던 곳과 다르기 때문이에요.”

“?”

“그러니까 물에 사는 물고기한테 물 호흡기 들려주고 물 밖에서 뛰어놀게 한 다음 물로 돌려보낸 것과 같다는 거죠.”

저게 뭔 소리야. 나는 그런 뜻을 담아 강유진을 보았다. 이예린도 뭔 소리야 하는 눈으로 강유진을 보고 있었다.

조금도 이해 못 한 당사자 둘의 시선에 강유진은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 쉽게 말하면 류와 이예린 씨는 간신히 숨 쉴 정도의 호흡기만 달고 물속에 들어가서 허우적거렸다, 이거죠. 장비 하나 없이 심해에서.”

“그럼 죽지 않아요?”

“보통은 죽죠. 두 사람 다 참 튼튼하네요.”

역시 사람은 튼튼하고 볼 일인 것 같았다. 여전히 잘 이해는 못 하겠지만… 적응 못 한 곳에 있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서 그랬다는 것 같은데.

대충 땅 멀미와 비슷한 건가?

“그럼 어제 이예린 씨가 피 토한 것도 그래서예요?”

답은 강유진이 아닌 피를 토한 당사자, 이예린에게서 돌아왔다.

“아뇨. 그건 내가 영역 열려다가 계속 실패해서….”

내 묘한 시선을 느꼈는지 이예린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내 실력 부족이 아니라 그 여자의 공간 안에서 영역이 안 만들어진 거라고요.”

“…그런데 나한테는 시켰어요?”

“…내 감이 그렇게 말해서.”

성공했으니 상관은 없지만. 우리의 대화를 들은 이호연이 이예린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이예린이 그런 이호연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 둘의 묘한 신경전을 끝낼 겸, 이 모든 사태의 원인도 좀 알 겸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왜 이예린 씨를 찾아간 거예요? 뭘 자꾸 내놓으라고 하던데.”

내 물음에 링거 줄이 거슬린다는 듯 그것을 힐끔거리던 이예린이 어둑한 낯을 하며 말했다.

“나도 잘 몰라요. 무슨 예언을 하라고 자꾸 재촉하던데….”

예언. 역시 생각했던 대로구나. 예언 말고는 이예린을 노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끝까지 아스트로노미 위에서 이예린의 손을 못 떼게 했던 것도 그렇고….

그럼 아스트로노미는 예언과 관련된 능력이라는 게 확실한 건가. 그래 봤자 주인 아닌 자가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짐작이 안 가는 건 똑같았다.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던 이불을 각지게 개어 침대 위로 올려놓은 이호연이 내 어깨 위로 두루마기를 걸쳐 주었다.

이불에 각이 진 게 신기했다. 잠시 그것을 보다 이예린에게 물었다.

“아스트로노미가 예언 도구라고 확정 난 거예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써먹는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잘 모르면 물건의 원래 주인한테 가 보면 되죠.”

“그건 그런데…. 에스텔리니움이 잘 알려 줄지가 문제네요.”

한숨 쉬는 이예린을 보며 나는 이름 참 길다 하는 생각을 했다. 무기도 그렇고 닉네임도 그렇고 하다못해 전직관 이름마저 길었다.

말하다가 혀 꼬이겠다.

“길드장님은 어떻게 배웠어요?”

강유진이 주세진에게 물었다. 시계를 보며 시간을 보던 주세진이 그녀의 물음에 여상한 낯으로 말했다.

“애초에 쓰라고 주었던 물건이니 사용법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알려 줬습니다. 이헤른에게 있어 그 일은 공적인 일이었으니까요.”

여전히 강유진에게만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였다. 강유진은 그런 것마저도 좋다고 여기는 것 같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강유진을 보다 입을 열었다.

“공적이기만 하면 다 알려 줘요?”

내 물음에 주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두고 야박하게 구는 사람은 아니니까.”

내 시선이 이예린 쪽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이예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친절하게 야박한 사람이요. 류의 전직관은요?”

“…다 퍼 주면서 의뭉 떠는 사람이요.”

그래서 참 얄밉고, 잘 모르겠는 사람.

한번 만나러 가야 하는데. 랑을 생각해도 감정이 술렁거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그랬다.

내 손을 슬며시 쥐는 이호연의 행동을 보면 아닌 것도 같지만. 그가 보기에 나는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거겠지.

바로 옆에서 그리 말리니 나 또한 망설여지게 되는 거다. 동시에, 솔직히 말하면 이런 상태로 가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기만. 거짓말. 알면서 서로 외면하는 장단 맞추기.

“…….”

분위기가 묘하게 어둑해졌다. 나는 묘한 낯으로 나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내가 이상한 얼굴이라도 했나?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 보았지만, 그냥 내 얼굴이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떠오르는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았다.

내 시선의 주인공이 된 강유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그러나 싶었다. 뭔가 뻘쭘한 기분에 물이라도 마시기 위해 침대 옆 협탁 쪽으로 걸어갔다.

“아. 그런데 그 마티라는 테오그라젠스의 사도, 강해….”

강유진의 말은 벽을 후려친 내 주먹이 만들어 낸 소음에 끊겼다. 앗, 나도 모르게.

“…요?”

조심스레 말을 끝맺는 강유진을 보며 나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하늘 조각 자원을 섞었나 보다. 단단하네. 벽을 후려친 손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움푹 팬 벽을 보며 주세진이 말했다.

“벽에 화풀이하지 마.”

“…수리비 제 월급에서 까 주세요.”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

태연하다 못해 익숙한 것을 보니 이런 일을 자주 겪었던 듯했다.

근데 리블 공략 팀 중에는 신체 계열 둘밖에 없는데? 이나연이랑 이호연…. 그 둘이 그렇게 자주 벽 부수는 타입인가?

아닐 텐…. 음. 아닐 거다, 아마도. 확신하기엔 이호연이 마냥 착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나연 또한 ‘나연이는 참지 않긔’ 타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행동을 옆에서 보고 있던 이예린이 물었다.

“혹시 못 이긴 거 분해서?”

“애초에 그거 진짜 몸도 아니었거든요?”

이기고 진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죽지도 않고 달려드는 인형을 뭔 수로 쓰러트리라고.

툴툴거리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묘한 낯을 했다. 그건 주세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이호연은 내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 했고 주세진은 다른 이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뭐야, 갑자기?

“?”

“우리 휴가, 연장됐어요. 내일까지로.”

아, 맞다. 휴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호연이 눈을 휘며 웃었다.

“놀러 갈래요?”

“갑자기?”

내 물음에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을 거예요.”

급작스러운 계획이 재밌을지는 모르겠지만 웃고 있는 이호연의 얼굴은 충분히 재미있기는 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주세진과 한 눈빛 교환은 무엇이었는지 수상했지만.

내 손을 잡은 이호연을 데리고 일단은 그의 집으로 이동했다.

뒤늦게 퇴원 절차를 밟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이호연이 입원해 있던 곳과 비슷한 걸 보면 길드 사옥 내 병실인가?

거기면 중간에 사라져도 상관없었다.

일단은 이호연의 집에 도착했다. 안전하게 거실에서 튀어나온 우리는 신고 있던 신발부터 벗었다.

“근데 우리가 나가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아?”

연예인 병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이호연 얼굴이랑 머리카락 색은 너무 유명했고 나는 도촬범 덕분에 신상까지 털렸다.

게다가 아카샤의 전설이니, 뭐니 영상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내가 이번 휴가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만 보낸 이유는, 집을 사랑하고 집 밖으로 원래 나가지 않아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나갈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진짜로.

이호연은 나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내가 의자에 걸어 놓았던 강유진이 사다 준 바지와 자신의 기모 후드 티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거는 왜….

설마 진짜 나가자는 건가?

“사람들은 의외로 다른 사람 잘 못 알아봐요. 특징만 안 보이면.”

“그…렇지.”

이호연도 염색 하나 했다고 자유롭게 대학교 안을 돌아다녔었다. 태연하게 동명이인 운운했던 그의 모습을 회상하는 사이 이호연이 갈아입으라 말하며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다가 일단은 옷을 갈아입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잘못한 게 있으니 일단 순순히 따라가기야 하겠지만.

“…….”

모르겠다. 이호연의 심리까지 생각해 보기에는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놀자고 하니까 그냥 놀기로 했다.

계속 정신없었으니까, 이것도 그리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잠옷 차림이었다. 토끼 귀를 한번 쭉 잡아당기고 욕실에서 씻고 푸른 불을 불러와 머리에 물기를 없앴다.

낙낙한 후드티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밖으로 나왔다. 검은 캡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 이호연은 내가 씻는 동안 염색을 했는지 머리가 까맣게 변해 있었다.

눈은 회색이었지만 안경을 쓰니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눈에 안 띄는 정도였다.

내가 두고 간 롱패딩을 입혀 주고 내 머리에 하얀 캡 모자까지 씌워 준 이호연이 내 앞으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작은 상자 안에는 안경이 가득 들어 있었다.

“무슨 안경이 이렇게 많아?”

“생각보다 잘 부서져서요.”

“?”

자신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하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말없이 안경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그것을 살펴보며 이게 그렇게 잘 부러지나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안경이 뚝, 하고 부서졌다. 부러진 게 아니라 부서졌다.

“엇…. 나, 나 부술 생각은 없었는데….”

당황하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태연한 낯으로 내 손에 있는 것을 가져가고 새 안경을 쥐여 주었다.

“안경 사러 간 날에 계산하자마자 부서트리는 거 보고 세진 형이 곧바로 추가 구입을 해 줬거든요.”

“…….”

주세진의 선견지명인가. 이번에는 조심히 들어 안경을 썼다. 생각해 보니 전직 이후 안경처럼 잘 부러지고 망가지는 물건을 손에 쥔 횟수가 손에 꼽았다.

동그란 안경을 쓴 나를 보며 이호연이 웃었다.

“잘 어울려요.”

“…너도.”

안경 쓰니까 되게 말 잘 듣는 모범생 같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좀 새롭기도 하고.

“근데 우리 뭐 해?”

“평소에는 못 해 보던 거.”

이호연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캡 모자의 툭 튀어나온 부분이 서로 맞부딪혔다. 눈을 깜박이는 나를 보며 회색 눈이 휘어졌다.

“해 보고 싶었던 거 있어요?”

너랑 하면 다 새로울 것 같은데. 말을 삼키고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이렇게 평범하게 입고 평범한 모습으로 나간다고 하니까…. 좀, 새로웠다.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당연했으나 당연하지 않게 됐던 것들이니까.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기분 풀어주려 애쓰는 모습이 좀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 최선을 다하고 혹여나 그때 그럴걸, 하고 후회하지 않으려 하는 그 모습이.

그래서 그냥 좋다, 하고 웃었다.

***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잘 지었다.”

나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잖아. 학교를 둘러보며 하는 내 말에 이호연이 옆에서 낮은 웃음을 흘렸다.

“평지에 있다는 게 제일 부러워. 우리 학교는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래서 매일 아침 죽어 나갔지.

“내가 다니던 학교도 언덕에 있었어요. 경사가 심해서 눈 오면 위에서 밧줄 던져 주기도 했고.”

“우린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 눈 오면 쓰레받기 들고 나가서 운동장에서 눈싸움했었어. 막 방송부에서 점심시간 끝났으니까 그만 들어가라고 하고.”

교문 주변에 쌓인 눈을 살짝 잡아 손으로 꾹꾹 눌러 보았다. 평소에는 못 해 봤던 거 하러 가자고 해서 뭔가 했더니 정말 못 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들러 볼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둥글게 뭉친 눈 위로 다른 눈 뭉치를 올려 주며 이호연이 웃었다. 미니 눈사람을 살펴보다가 교문 옆에 놓았다.

“내가 다니던 곳은 무너졌다고 해서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가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일부러 가지도 않았다. 지옥도 이후 이사해서 원래 살던 동네랑 제법 거리가 멀어진 것도 있지만.

겨울바람에 차갑게 굳은 학교의 명패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설마 박상호 마중 나가자는 핑계로 고등학교에 오게 될 줄이야. 수위 아저씨가 외부인을 막지 않을까 싶었지만, 눈이 마주친 아저씨는 어여 들어가라며 손짓만 했다.

“…뭐지?”

우리야 좋다만. 얼떨결에 입성한 고등학교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내 손을 잡고 이호연이 앞으로 걸었다.

“매점 갈래요?”

“뭐야, 진짜 학생 같아!”

이러니까 진짜 기분 이상하다.

신기한 것은 복도를 걷는 내내 마주친 선생님들은 에휴, 한숨 한번 쉬고는 지나간다는 점이었다.

“??”

뭐지, 진짜? 의문은 급식실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매점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아하. 수능 끝나서.”

교복 안 입은 학생들이 수업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매점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이러니까 우리도 의심 안 받지.

그럼 수위 아저씨는 우리가 지각한 학생들이라고 생각한 건가? 기다란 롱패딩 입은 모습이 언뜻 보면 학생들과 비슷하기는 했다.

“뭐 먹을래요?”

“나 맛타.”

롱패딩 안쪽에 쟁여 놓은 잔돈을 꺼내 맛타 두 개를 샀다. 전자레인지 앞에 바글바글한 학생들 틈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이건 1분 30초 돌려야 맛있다?”

“난 2분 돌렸는데….”

“그럼 너무 뜨겁지 않아? 안에 치즈도 흘러나오고.”

“전자레인지가 옛날 거라 성능이 별로였거든요.”

얘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다 됐다. 비닐을 겹쳐서 빵을 들어 올렸다. 하나씩 나눠 먹으며 운동장 걸으니 진짜, 옛날로 돌아온 것 같았다.

쭉 늘어나는 노란 치즈에 묻는 빨간 소스도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옛날에 애들이랑 진짜 자주 먹었는데. 애들이랑….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르니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급식 먹고 나면 애들이랑 운동장 산책을 했어. 막 운동장 빙글빙글 돌고. 우리 학교는 산 일부를 밀어내고 지은 학교라서 구령대 뒤쪽으로 산이 있었거든. 그래서 가을 되면 운동장에 상수리도 떨어져 있었다?”

고양이 가족이 산책하러도 와서 체육 시간에 피구를 하다가 말고 구경하고. 비 오고 난 뒤에 말랑한 땅에 찍힌 새랑 고양이 발자국도 귀여웠고.

“재밌었는데….”

정말로. 김이 폴폴 나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밖으로 나왔으니 좀 식었을 줄 알았는데 속이 뜨거웠다. 입이 조금 뎄는지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런 나를 가만 내려다보던 이호연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난 남고여서 점심시간이 좀 거칠었어요.”

“왜?”

“뛰느라요. 빨리 안 가면 밥이 없었거든요.”

그게 뭐야. 낄낄거리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웃었다.

“축구도 열심히 했어요. 그게 뭐라고 그렇게 목숨 걸고 했나 싶기는 하지만, 그때는 옆 반한테 지면 하루 종일 꿍얼거리는 애들도 많았어요.”

“너도 그랬어?”

“어땠을 것 같아요?”

이호연의 고등학생 시절이라. 문득 그의 방에서 봤던 사진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에 지금보다는 앳된 얼굴, 친구들과 찍은 사진.

친구라. 그러고 보면 이호연이 친구를 만나러 간다거나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깨달았지만, 부러 그 사실에 관해 물어보지는 않았다.

변해 버린 것들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은 살아남은 현재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미덕이었다. 티 내지 않고 웃었다.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들이 이뻐하는 공부 잘하는 학생인데 노는 것도 열심히 했을 것 같은 인기 많은 오빠?”

“…….”

앗, 얼굴 빨개졌다. 맛타를 베어 먹는 이호연을 보며 나는 낄낄 웃었다.

“나는 어떤 학생이었을 것 같아?”

“놀 거 다 놀고 연애도 할 거 다 했는데 성적은 잘 나오는 교복 안 입고 다니는 학생.”

“…….”

“류는 교복 안 입고 체육복에 후드티를 입었을 것 같아요.”

내 학창 시절 훔쳐봤나? 교복 안 입었던 건 어떻게 알았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웃었다.

짹짹거리다 날아가는 참새 덕분에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 평화 속에 있으니 자꾸만 먼지 낀 추억들이 떠올랐다. 이게 추억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을 줄도 몰랐다. 그때는 그랬다.

“…….”

추운데, 손안의 빵은 따끈따끈해서 겨울 운동장 산책을 좋아했었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산책을 했고.

생각해 보면 학생 때는 항상 입에 뭔가를 물고 있었다. 딱히 배고프지 않아도. 조금 심심하다 싶으면 매점을 갔다.

점심시간에 배드민턴으로 선생님들이랑 내기도 하고 그랬다. 급식이 별로면 컵라면 사 먹고, 급식 먹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다니고. 학창 시절의 절반은 먹는 거였다.

나머지 절반은 기억하려 해도 흐릿할 정도로 평범했고. 그렇지만.

“…좋았는데.”

그때의 걱정거리는 기껏해야 성적, 대학, 친구 관계가 전부였다. 쟤가 그랬네, 얘가 그랬네. 말들은 많았지만 정작 대놓고 싸우는 애들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 우리는 그 묘한 기류만으로도 머리 아팠고, 고민거리였다. 세상이 무너질까 말까는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

이호연의 손에서 빈 봉지를 받아 들고 함께 불태워 버렸다. 옛날에는 이런 것도 없었지.

반 가서 버려야겠다는 생각이나 했는데.

이제는 나를 이루던 모든 것들이 다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미친 자들 사이에서 살면 누구나 미친답니다. 취하거나, 미치거나. 그러지 않으며 살 수 없는 낙원에서 웃는 방법이 뭔지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짜증 나. 자기가 뭐라고 다 안다는 듯이 말해. 그런데 그 말에 무어라 반박해야 했는지 아직까지 알 수가 없었다.

고장 난 세상에서 나 혼자 멀쩡하거나, 멀쩡한 세상에서 나 혼자 고장 난 것 같은.

나 혼자만. 나 혼자만 다른 것 같은 그 기분. 나는… 나는 나 나름대로 나를 놔두고 제멋대로 바뀌는 세상에 적응했다. 그래서 웃고, 떠들고, 말할 수 있는 거였다.

그 방법이 외면이라든가, 회피라든가. 과정은 상관없었다. 결과물인 내가 괜찮으니까,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된 거였다.

겨울 하늘은 우중충했다. 햇빛이 없어 살 안 탄다고 좋아했고, 그래도 자외선은 있다는 대화를 했었다. 그것들은 모두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사진이라도 많이 찍을 걸 그랬나.”

그래 봤자 지옥도를 겪으며 다 날아갔겠지만, 그래도. 더 많이 찍었다면 지금보다 아쉬움이 덜 했을 것 같았다.

“…있잖아. 나 하늘이 무너지던 날에 친구들이 다 죽었어.”

“…….”

“그날, 졸업 기념으로 애들이랑 여행을 갔거든? 즐거웠던 것 같은데 사실 잘 기억이 안 나.”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뭘 봤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 순간을 도려내 버린 것처럼 말이다.

다만 정신 차려 보니 예약했던 숙소에서 한참 먼 장소에 있었고 내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기절했다. 다시 깨어나서 보게 된 세상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집에 가고 싶었어. 그래서 열심히 걸었던 건 기억 나. 그러는 와중에 여러 사람을 만났어. 별로… 좋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

스탠드에 앉아 발을 까닥거렸다. 그런 내 옆에 이호연이 앉았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 멀리 구령대가 보였다.

“정말 여러 사람을 만났어. 처음부터 위협적인 사람도 있었고, 친절한 척하던 사람도 있고. 날 버린 사람도, 내가 먼저 버린 사람도 있었어.”

“…힘들었겠네요.”

“음…. 맞아. 힘들었어. 그래서 그런가. 전직하기 전에 있던 일들은 좀 뜨문뜨문해. 그때는 전직도 못 해서 기억에 손도 못 댔는데.”

그만큼 잊고 싶었다는 것인지. 그저 시간에 흐름에 따라 잊힌 것인지.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선명한 것들도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 태반인데 잊은 것들은 얼마나 좋지 않을지 별로 기억해 내고 싶지 않았다.

이호연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헤매면서 돌아다니다가, 그러다가 죽고 싶어서 하늘 조각에 뛰어들었어. 아픈 것도 싫고, 괴물한테 잡아먹히는 것도, 같은 사람인 전직자들한테 죽는 것도 싫었거든.”

“…그렇게, 전직하게 된 거예요?”

“응.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좋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

“…그래서 널 밀어냈어. 사람이 싫었거든. 그 눈이 싫었어. 내게 뭔가를 바라는 그 눈들이.”

그런데 네 눈은 너무 예뻤어. 네가 바라는 것들이 너무 달콤했어. 그 누구도 내가 음식을 먹기를 바라거나 치료하거나 쉬는 것을 바라지 않았거든.

그리고, 그와 반대로 내가 슬퍼하거나 자책하거나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난 떨지 마.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가 전직하기 전이었던가. 왜 그 사람을 그렇게 챙겼더라…. 썩 좋은 만남도, 이유도, 헤어짐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닌가. 처음부터 나쁘지는 않았던 것도 같고.

무릎을 끌어모아 안았다. 그 위에 뺨을 기대어 이호연을 보았다. 안경이 눌려 조금 불편했다. 자연스럽게 기울어져 떨어지는 하얀 캡 모자를 이호연이 받았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자랐는지는 모르겠어.”

“…어렸죠.”

“응, 어렸지.”

말이 좋아 스물. 그래 봤자 졸업식 치른 지 하루밖에 안 된, 생일로 따지면 미성년자였던 어린애. 손이며 발이며, 심지어 거울에 비치는 얼굴도 한참 앳됐던 어린애.

거울 속 내 모습은 그때와 똑같아서 내가 아직도 그 지옥도에서 뱅뱅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다. 이제 곧 스물셋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가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다. 성인 아닌 성인이었던 내게 사람들은 참 많은 것을 바랐다.

애답게 어른 말이나 잘 들을 것을. 이제는 애가 아니니 스스로 제 몫을 하기를. 말대꾸하지 말기를. 의견을 내기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기를. 뭐라도 하기를.

어린애로서, 어른으로서 행동과 생각을 하기를. 그건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지.

그래서 매번 끝이 안 좋았나?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관계는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그래서 내 대인 관계는 역으로 퇴화해 버렸다.

내 남은 인간관계 중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되고 유대감 짙은 것은 이호연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불안한 거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위험한 짓 같은 건 하지 마.”

“…너와 관련된 거면 더 위험한 짓도 할 거야.”

“…….”

“우리 둘 다, 알겠다거나, 하지 말라거나 못 하잖아요.”

그런 내게 너는 가장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건 조금 슬프게 느껴지는 집착 어린 동질감이었다.

이호연이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검은 캡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주 닿은 피부의 겉면은 차가웠다.

“…우리 둘 다 참 말 안 들어.”

내 말에 이호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맞아. 그러게야. 말로 약속한다고 그걸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기엔 우린 나이를 너무 먹었고, 세상이 그리 안전한 게 아니니까.

약속이란 결국은 상대를 안심시키는 작은 장난질일 뿐이었다. 떨어진 모자를 주워 겉에 묻은 흙을 툭툭 털던 이호연의 행동이 멈췄다.

이호연이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얼굴이 시뻘게진 채 버벅거리며 버퍼링 걸린 박상호가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어….”

“안녕?”

“안녕은, 안녕은 무슨! 둘이 왜 여기 있어요?! 아니, 애초에 왜 여기서 연애하고 있는 건데!”

의외로 바른 생활 어린이네. 롱패딩 속에 마이까지 챙겨입다니. 저거 무지 불편한데.

“고등학교 구경. 수능 끝난 고3인 줄 알고 아무도 안 말리더라고. 근데 우리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어?”

“매점에서 전자레인지 돌리고 있는 거 보고 설마 했죠!”

이야, 눈 좋다. 그걸 또 알아보네? 다들 알아보지 못하길래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롱패딩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그런가? 나는 이호연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모자를 들어 다시 머리에 썼다.

“너 맛있는 거나 사 줄까 해서 데리러 왔지.”

“…갑자기?”

“너 수능 끝난 겸. 그리고 옛날에 한번 밥 사 줘야지 생각은 했거든.”

박상호 덕분에 엄마가 숨어 있던 벙커의 위치도 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다. 사 줘야지, 사 줘야지 했는데, 일 터지고 까먹기를 반복하느라 정작 실천하지는 못했다.

“혹시 급식 먹을 거야?”

“그렇…죠? 근데 보통 점심 사 주겠다고 학교 찾아와요?”

아니. 사실 너는 핑계고 우린 학교 구경이 목적이거든. 생글거리며 웃는 나를 보며 박상호가 주춤거렸다.

“근데 지금 수업 시간이라 나 들어가 봐야 하는….”

“거기 누구야! 교실 들어가, 얼른!”

박상호가 당황한 얼굴로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선생님과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다 우리의 손을 잡아당겼다.

“교실 가서 얘기해요!”

“교실에 들어가도 돼?”

“아, 빨리!”

낑낑거리는 것이 불쌍해 슬그머니 일어나 주었다. 검은 모자를 다시 쓴 이호연도 박상호를 따라 걸어 주었다.

얼떨결에 건물에 들어와, 얼떨결에 교실까지 들어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박상호의 자리 앞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

뭐지? 이 상황. 웃긴 건 반 애들 중 아무도 우리를 보며 뭐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학교 애들이 자주 놀러 오거든요.”

“그 학교 이름 앞에 ‘대’ 자 붙는 경우도 있었어?”

“…….”

박상호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엎드려 버렸다. 그 모습에 나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 짝꿍이네.”

“그러게요.”

3살 차이 나는 이호연과 나는 원래라면 대학교 외에는 같은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고등학교 짝꿍도 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평소에는 못해 보던 거 다 해 보는 날이었다. 불이 꺼졌다. 빔 프로젝트가 내려오며 그 위에 검색 창이 떠올랐다.

교실의 컴퓨터를 손에 넣은 학생 하나가 자리에 앉은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영화 뭐 볼래! 1번….”

진짜, 옛날이랑 똑같네. 나는 우울한 기쁨을 느끼며 이호연에게 기대었다.

***

어쩌다가 여기서 이러고 있게 됐더라.

영화 두어 편을 보고 나니 점심시간 종이 쳤다. 박상호에게 나가서 밥 사 줄까 물어보는데 꼬마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급식 맛있는 거예요!”

“그럼 다음에 사 주지, 뭐.”

“그러지 말고 누나랑 형도 밥 먹고 가요.”

“…응?”

당황하는 우리를 데리고 박상호는 뛰었다. 일단 뛰니까 따라는 가는데, 같이 먹자고? 급식을?

“3학년 1반 17번이랑 21번이라고 말하면 돼요.”

“…우리가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학교 안 나온 애들이라 먹어도 돼요. 걔네한테 허락도 받았어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이호연과 눈을 맞추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뒤에서 빨리 가라는 재촉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눈치 보다가 일단 식판을 들었다. 진짜 별 경험을 다 해 본다.

결국 박상호와 마주 앉아 급식을 먹고, 매점을 들러 그의 입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물려 준 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서 손에 쥐여 주었다.

“밥은 나중에 사 줄게. 오늘은 이거 먹으면서 시간 보네.”

“고맙습니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박상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소리 내 웃었다.

나오는 길에 있던 정수기 앞에서 혹시 모르니 오늘까지 먹으라며 이호연이 해열제를 넘겼다. 그것을 물과 함께 삼키고 그에게 말했다.

“급식 맛있더라. 잘 나오네.”

“좀 놀랐어요. 너무 잘 나와서.”

“놀랄 정도였어?”

“음…. 내가 학교 다닐 때 가장 충격받았던 반찬이 김치만 두 종류 나왔을 때였어요.”

“김치만 두 종류? 급식의 반찬은 보통 세 가지인데…. 그럼 셋 중 두 개가 김치였던 거야?”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했거든요. 가끔 벌레….”

“그만.”

그런 거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내 말에 이호연이 입을 다물었다.

“학교 구경도 다 했고, 얼떨결에 급식도 얻어먹었네.”

이제 또 뭐 하지. 고민하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물었다.

“물고기 좋아해요?”

“어…. 먹는 거, 보는 거?”

“보는 거.”

보는 거 좋아하…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족관 갈래요?”

수족관? 눈을 깜박이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손을 잡았다. 건물을 빠져나와 언덕을 내려갔다. 수위 아저씨가 우리를 힐끔 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기 이전 평범한 학창 시절에 그리했듯 버스를 탔고, 지하철을 탔다. 그림자로 이동하면 간단할 것을 그는 부러 귀찮은 수단을 썼다.

그렇다고 싫었다는 건 아니지만.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버스 안은 고즈넉했다. 지하철 안도 그랬다. 우리는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살피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래서인지 정말 평범한 학생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의 고생을 더 해 도착한 수족관은 조금 요란스럽다가도 한적해지고, 사람이 몰리다가도 다시 고즈넉해졌다.

“…….”

얼굴에 푸름이 드리워졌다. 쇼핑몰 센터 안에 있는 아쿠아리움의 투명한 벽 너머 물고기 떼가 움직였다.

감탄이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손을 뻗어 유리 벽 위로 툭 올려 보았다.

유리 벽 너머의 차가운 물이 느껴졌다. 푸르게 일렁이는 물밖에 없어서 그런지 이 부근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조용한 그곳에선 작은 노랫소리가 울렸고 내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의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다른 곳에 비해 다소 밝은 곳엔 하얀 눈 위를 아장아장 걷는 새끼 펭귄이 있었다. 소란스러운 곳엔 현장체험 학습을 온 듯한 어린이들이 줄지어 걷고 있었다.

안내도도 보지 않고 걸음 가는 대로 다다른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유리 벽 너머는 무섭도록 푸르렀고, 물살에 흔들거리는 해초는 쓸쓸한 느낌이었다.

그것을 눈에 담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평소에 못 해 봤던 거 해 보자고 한 거야?”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모자에 눌린 안경을 고쳐 쓰고 있던 이호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를 보다가 텅 빈 유리 벽 너머를 보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푸르른 물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그리고?”

“…그냥, 시간도 생겼으니까 우리도 남들 하는 것처럼 다녀 보고 남들 누리는 것도 누려 보고 싶었어요.”

‘남들 하는 것처럼 누린다.’라. 생각해 보니 남들처럼 일상을 누리고 살았나? 하고 질문하면 답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기는 했다.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맨날 학교, 집, 게이트만 돌아다니고. 스승의 날 때 놀러 갈 고등학교도 없고. 이런 문화생활도 같이 할 사람도 없었다.

일상의 대부분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할 사람이 생기고 나서는 하늘 조각 공략에, 테오그라젠스에,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정말 인생 재미없게 사는구나 싶었다.

재미없다기보단 고달픈 것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콧잔등 위를 누르는 안경을 벗어 조심히 접었다. 손안에 쥐고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약속을 했었거든요.”

“…나랑?”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 놓고 기억 못 하는 내 모습에 상처받을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나보다 이호연의 낯이 태연했다.

“사실 나 혼자만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에요.”

“무슨 약속이었는데?”

“류가 그랬거든요…. 나중에 눈앞에 무너진 건물들이 다시 세워지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남들 하는 것처럼 똑같이 즐기고 살고 싶다고.”

“내가?”

“응. 그래서 예를 들면 뭐 하고 싶냐고 물었었죠. 고등학교에 가서 졸업한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점 음식도 사 먹고 싶고, 수족관도, 영화관도, 맛집도 가고 싶다고 했어요.”

하나같이 다 평범하고 소소한 거였다.

“그래서, 이 사태가 진정되고 다시 건물들이 세워지고 옛날처럼 돌아가면… 나랑 같이 가자고 했어요.”

“…….”

그리고 나는 잠적했다. 아마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처럼 이호연 혼자만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

아주 가끔. 이런 순간이면 그때 도망가 버린 것이 후회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차마 ‘그때로 돌아가면 도망가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또다시 도망칠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거 없이 내 일상을 위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내게 이호연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전에 술 마셨을 때 나한테 언제 제일 서운했냐고 물었었죠?”

그랬던가. 언뜻 기억이 나는 것 같기는 했다. 손 뿌리쳤을 때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난… 류가 기억을 지우고 난 다음이 제일 서러웠어요.”

“…그때도 부작용이 있었어?”

감정의 거세 이후에도 부작용이 있었다. 기억을 건드는 일에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었다.

“기억을 건들고 나면 류는 어딘가 멍하게 변했어요. 지우지 않은 기억에도 혼선을 느꼈죠.”

“내가, 그때 너한테 상처 주는 말을 했어?”

“아뇨. 그냥 나 혼자 상처받은 거였어요.”

웃는 얼굴로 이호연은 눈을 감았다. 내 눈에는 서러워서, 그리고 그 서러움을 들키기 싫어 눈을 감은 것처럼 보였다.

하나, 둘, 셋.

짧은 시간이 지나 다시 눈을 뜬 그는 푸름이 스며든 회색 눈으로 나를 보았다.

“기억을 지우고 난 뒤 곧바로 말을 걸면 내가 누군지 잘 못 알아보더라고요. 나는 그게 무서워서 자꾸만 말을 걸었어요.”

“…….”

“내가 너무 귀찮게 해서 솔직한 심정이 나왔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했든, 진심은 아니었을 거야.”

자신의 말을 끊으며 조금 다급하게 끼어드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웃었다. 그 웃음은 기쁨 섞인 곤란함으로도, 슬픔 섞인 안도로도 보였다.

그 웃음을 보며 나는 물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내가 너를 기억해야 해?’라고 했어요. 그래서 무서웠어요. 그 물음에 난 대답할 수가 없었거든요. 난 류에게 그렇게 의미 있는 존재도 아니고, 잊어도 상관없는 사람인 게 맞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지 마.”

중얼거리듯 내뱉는 내 말에 이호연은 상황과 맞지 않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류가 사라지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요? ‘나를 잊었으면 어떡하지.’였어요. 다시 만났을 때도 무서웠어요. 나를 잊었나 하고.”

그의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변형 게이트 연결 현상이 일어났던 날. 그 게이트 안에서 나를 본 이호연의 반응이 어땠는지.

목이라도 졸린 것 같은 음성으로 나를 부르던 그의 눈이 어땠는지. 나는 그걸 왜 가볍게 넘겼던 걸까.

우리는 지독하도록 일방적인 관계였다. 그리고 난 그 관계에서 언제나 우위였고 갑이었다. 언제든 눈 돌려도 되고 떠나도 되는 무정한 사람이 나였다.

내가 너무 중요해서, 나 먼저 좀 살고 싶어서 무시하고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그래 놓고 그 애정에 내심 기대고.

참, 이기적이고 못됐다 진짜.

그때 나는 어렸고, 그래서 더 이기적이었다. 내가 먼저였다. 회색 눈은 예뻤지만, 자세히 들여다볼 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아주 먼 시간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넘어 지금에 와서야 나는 내게 그리도 다정했던 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곪고 무뎌져 흉이 된 것과 마주 보았다.

“나, 한 번도 너 잊은 적 없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이호연을 잊은 적 없었다. 다만 잊지만 않았을 뿐 의미 부여 역시 하지 않았다. 그때 그런 애가 있었지. 내게 이호연은 그런 사람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미 졸업한 지 한참 지난 고등학생 시절, 같은 반에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는 정도 말이다.

그 무정함이 되려 상처라는 걸 지금은 알고 있었다.

이호연은 눈을 질끈 감는 내 모자를 벗기고 손안에 쥔 안경마저 가져갔다.

눈을 떠 그런 이호연을 보았다. 자신이 쓰고 있던 안경마저 벗어 제 주머니에 넣고 모자를 벗은 그가 내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그의 입이 열렸다.

“나는 이기적이었어요.”

“…….”

“그때의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하는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날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원했어요.”

“이기적이지 않아.”

“나 또한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서 기억됐다는 자신도 없으면서 그냥 나를 잊지 않아 주기를 원했어요.”

우리는 이기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적이었다. 모자와 안경으로 내심 가려졌던 얼굴이 푸른 물빛 아래 드러났다. 선명하고도 흐릿하게.

“넌, 잊기 싫은 좋은 사람이었어.”

“…기억 속에서 잊히기 싫은 사람이었어요.”

“기억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힘들면 잊어도 돼요.”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호연을 말할 것이다. 나와 가장 비슷한 삶을 살았으며 가장 비슷한 곳에 서 있던 사람.

내 행동의 정당성을 설명하지 않아도 내 손짓 하나의 의미마저 어림짐작할 수 있는 사람. 죽음을 원하는 지경까지 몰려 본 것마저 비슷한 동류.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비슷해서 존재 자체가 상대의 상처일지도 몰랐다. 상대의 어둠은 나의 어둠과도 같았다.

그랬기에 나는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라는 이호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고, 이호연은 내 팔에 흐르는 피를 눈치챘다.

그랬기에 나는 이호연이 죽지 않기를 바랐고, 이호연은 자신의 죽음을 방해한 나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버렸고 너무 잘 이해해 버렸다. 그래서 네가 좋아, 하고 서로에게 말하는 거였다. 이기적이고 못되게도 나는 네가 정말 좋았다.

“또 기억에 손대거나 하면 너 잊지 말라고 내 뺨이라도 한 대 쳐.”

“잊지 말라고 매달리기는 할게요.”

내 뺨에 짧게 키스하고 물러나려는 이호연을 붙잡았다. 물고기 없는 이 부근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없는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유리 벽 속에 갇혀 사는 것들처럼 구경거리가 될 걱정은 없었다. 차라리 기억이라는 것도 저렇게 가둬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예쁘고 보기 좋은 것만 골라내어, 저 새파랗고 예쁜 물속에 풀어 놓고, 보고 싶을 때마다 들여다본 다음에 마음에 안 들면 채에 건져 내보내고.

숨이 오가고 시각적 추위를 끌어내는 이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온기도 오고 갔다. 답지 않게 숨이 차 우리는 색색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족관에 활짝 열린 벽면으로 상어 한 마리가 들어왔다. 그것은 자신뿐인 영역을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색색의 고운 물고기들도 머리를 들이밀었다. 큰일 났네.

“너 큰일 났어.”

이호연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댄 나는 눈을 휘며 말했다. 잡아먹히고 뼈 한 조각 안 남을 상어의 밥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안 놔줄 거야.”

네가 내 입속으로 들어왔어. 포식자의 위치는 제멋대로다. 호랑이가 여우를 안 잡아먹고 기른 것처럼.

다정한 호랑이는 여우가 고집을 부린 대로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보내 줬지만. 나한텐 그런 다정스러움은 없었다.

“싫다고 말해도 이제 평생 내 옆에 있어야 해.”

내가 너를 보고 울고, 네가 나를 보며 우는 관계의 끝으로 몰리게 되더라도, 이제는 안 놔줄 거야.

아니, 어쩌면 지쳐 버린 내가 또 널 놔 버릴 수도 있지만, 이젠 네가 나를 놓으면 안 되는 거야.

“잊지 말고, 날 놔주지도 말아요.”

물고기 떼를 헤집던 상어는 입을 열었지만, 그 무엇도 삼키지 않았다. 이미 배불리 먹고 온 것인지 그도 아니면 아름다운 물고기 떼가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휴가의 추억은 아름답게 포장된 아쿠아리움 같았다.

***

손안에 쥔 들꽃의 줄기는 가느다랗고 질겼다. 살랑거리는 하얀 꽃의 잎들을 뜯어 홀홀 날려 보냈다.

맨발에 스치는 풀잎과 마른 땅의 푹신함이 생경했다. 저 멀리 오색구름이 일렁이는 호수가 보이고 그 아래 언제나 자리 잡았던 남자는 보이지 않고 수양버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무와 풀 사이 곱게 피어난 개나리 가지를 뜯어 호숫가로 갔다. 자리에 앉아 호수 안으로 흙투성이가 된 발을 집어넣어 퐁당거렸다.

꽃가지를 얼굴에 가까이 갖다 대 향을 맡아 보았다. 옅은 봄의 향이 느껴졌다. 꽃가지에 달린 작은 개나리꽃들을 뜯어 물 위로 날려 보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은 노란 꽃을 보니 어릴 때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병아리들이 봄날 개나리 사이로 봄나들이 가는, 짧고 가벼운 동요였다.

발랄한 악기 소리가 없어서 그런가. 노래가 옛 기억과 달리 우울한 것 같았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노란 꽃들을 발을 움직여 흩트려 놓았다.

물살 따라 움직이는 것들을 보며 다시 음절을 흥얼거렸다. 몸이 흔들거렸다. 짧은 노래는 금세 끝나 버렸다.

“오랜만이에요.”

나는 웃는 낯을 지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댕기 끈으로 대강 묶어 놓은 머리가 주르륵 풀렸다. 역시 비단 끈은 머리 묶기엔 영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새카만 신라 시대의 옷을 입은 랑이, 옆이라고 하기엔 조금 먼 거리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보는 순간 그때의 감정이 북받쳐 올라 엉엉 우는 거 아닌가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울지 않았고 랑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날 봤던 일그러진 얼굴도 아니었다.

무감하다고도 표할 수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송이 남은 개나리를 뜯어내 다시 호수 위로 던졌다.

아주 어릴 때는 이 짓을 놀이터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서 했었다. 빙그르르 도는 작은 노란 꽃이 너무 예뻐서, 다시 내려가서 줍고 던지고를 반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예쁜 마음도, 고집도, 욕심도 없었다. 이제는 놓는 법을 알기 때문이었다.

텅 비어 버린 가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랑 쪽으로 던졌다. 힘없이 그의 옷자락을 툭, 치고 떨어진 가지가 애처로웠다.

되바라지다 못해 시비 거는 것이 명백한 나의 행동에 랑은 몸을 낮춰 가지를 줍는 것 외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 안 내요?”

“겨우 이런 거로 네게 화를 낼 리가 없지 않니.”

“관대하시네요.”

하지만 놓는 법을 안다고 다 놓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상했다. 내 머릿속은 차분한 것 같은데 행동과 말은 아니었다. 평화롭고도 따스한 햇빛에 취할 것 같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새까만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런 그를 나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아한 도깨비 왕의 손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가지가 들려 있다는 것이 왜 이렇게 화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

암시는 무슨. 감정은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이 제일 무서운 거였다. 괜찮다는 자기 최면은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기억은 모르겠으나 감정을 다룬 암시는 약했다. 너무. 잔잔함은 잠시뿐.

안 우는 게 어딘가 싶었다. 근데, 이제는 화가 나는데. 심술궂은 마음이 슬픔을 밀어냈다. 이제는 옆이라 부를 수 있는 곳에 랑이 서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목 아파요. 내가 계속 올려다봐야 해요?”

“그럼 안 되지.”

랑은 내 말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로 몸을 낮추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 그의 멱살을 잡아당겨 그대로 호수에 빠트려 버렸다.

첨벙이는 물이 내게도 튀었다. 하지만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내가 만들어 내지 않은 푸른 불에 의해 증발하였다.

그래서 나는 더 화가 났다. 흠뻑 젖은 꼴로 호숫가에 앉아 머리를 쓸어 넘기는 랑이 전과 다를 게 없어서.

이 와중에도 내게 친절하게 군다는 것이 같잖게 느껴질 정도로 전과 다를 것 없는 그 모습이 싫어서. 자신을 노려보는 나를 보며 랑은 그저 가만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호수로 돌아가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나는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랑이 가지를 든 손을 들었다. 물 위를 휘저은 가지 위로 둥실거리며 떠다니던 노란 꽃이 들러붙었다.

내가 뜯어내 버렸던 꽃이 다시 가지에 붙어 있었다.

물살을 헤집고 내 앞으로 온 그가 내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내 발을 잡아 물로 씻겨 주었다.

엉켜 있던 흙이 물살에 쓸려나갔다. 풀물 든 발이 다시 제 색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손에 쥔 가지를 부러트렸다.

과거가 어찌 됐든 나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를 보았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행동은 내게 미안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랑은 원래 저랬다. 옛날부터 저랬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나는 거야.

그의 손에서 발을 빼냈다. 부러진 가지를 그에게로 던졌다. 랑의 이마를 맞고 떨어진 꽃가지가 호수 위에서 둥실거렸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다 알잖아요. 원래부터가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왜 입 꾹 다물고 아무 말 안 해요?”

“…뭐라 말해야 네가 울지 않을지 몰라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어.”

울어? 내가? 거짓말. 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이겨 먹듯이 랑은 내 앞으로 걸어와 내 눈가를 쓸었다. 정말 내가 울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내 뺨이라도 한 대 치면 조금은 분이 풀릴까.”

“때린다고 화 풀리는 사람 아니에요, 나는.”

“그렇지. 아가, 너는 착한 아이야.”

“누가….”

“그러니. 내게 소리 지르고 패악을 부려도 모자를 지금, 장난 같은 화풀이나 하는 것이지.”

“…….”

화풀이할 생각 없었다. 패악 부릴 생각도 없었다. 나는, 대화하려고 했다. 잔잔해진 감정은 무서울 정도로 온유해서 마주 봐도 될 것 같았다.

감정은 제멋대로다. 봄날 피는 꽃보다도, 성큼 찾아 왔다 떠나는 오뉴월의 손님보다도 기약 없는 것이었다.

감당하기 싫어 내쫓아 버리고 싶어지는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랑이 괜한 소리를 해서다. 깜빡이는 눈꺼풀의 움직임을 기다렸다는 듯 뚝, 하고 떨어지는 소금 덩어리 같은 것을 랑이 닦아 냈다.

내가 어떻게 잘라낸 감정인데 이렇게 쉽게 돌아와. 진짜 짜증 나.

짜증 서린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꼴 보기 싫게.

“왜 안 달래요? 이제 다 들켰으니 하기 싫어졌어요?”

“네 옷자락마저 젖을까 하여 그러지.”

“손가락 하나 까닥이는 거로 말릴 수 있으면서 핑계 대지 말아요.”

“…내가 달래 주어도 되는 거니, 아가?”

그의 물음에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을 없던 것으로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그래도 대화할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그의 옷을 쥐어뜯다시피 쥐는 나를 보며 랑이 호숫가에서 나와 나를 안아 올렸다. 등을 도닥이는 손길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옷자락을 타고 서서히 사라지는 푸른 불길이 보였다. 목을 조를 듯이 꽉 껴안는 내 행동에도 랑은 제지하지 않았다.

수양버들을 향해 호숫가를 빙 둘러 걷는 랑의 걸음은 규칙적이었다. 흔들거리는 기다란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우는 왜 죽었어요?”

그 남자의 말은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본인 입으로 자기는 정확하게 모른다고 했고, 원래 당사자들만 아는 이야기가 숨어 있기 마련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의 입에서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닌 각자의 시점에서 본 이야기였다. 진실에 가까울 시점.

그 시대에 서서 가장 많은 것은 보고 들었을 주연의 입이 열렸다.

“…왕에게, 칼을 들이밀었거든.”

“…….”

“겉으로 알려진 바로는 내 수하였으니 그 끝을 마무리하는 것 또한 나였지.”

그럼 산신도, 여우도 다 랑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거네.

“여우는 왜 왕을 죽이려고 했는데요?”

“산신을 죽게 했으니까. 산신은 여우가 핍박받았으니까. 여우는 임종의 딸이 누명을 씌웠으니까.”

“임종의 딸이 여기 사는 귀신 언니예요?”

그래서 내가 그 귀신 언니랑 이야기 좀 나누면 맨날 끼어들어 훼방 놓았던 건가. 그래 놓고 내 시중은 그 귀신이 들게 했으면서.

“저 스스로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미쳐버리고 말았었지. 미쳐 버린 딸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던 임종은 딸을 다시 한번 왕에게 팔아넘겼다.”

“…….”

임종의 양자로 들어간 여우가 임종의 딸에게 해를 입혔기에 여우를 수하로 두었던 비형랑의 위신이 추락했다고 했던가.

기록은 승자와 산 자들의 것이다. 그럼 임종은 자신의 딸은 어차피 미쳤으니 승자의 흠 없는 기록 거리로 바쳐 버린 건가.

“여우랑 산신은 무슨 관계였어요?”

“여우에게 산신은 부모이자, 친우이며, 스승이자 세상 전부였지. 또한 둘은… 연모의 정이 오가던 사이였고.”

아, 거기까진 예상 못 했는데. 움찔거리는 나를 다시 도닥거리며 랑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산신은 여우를 보낼 수밖에 없었어. 제 손으로 죽이거나 멀리 보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거든.”

“왜요?”

“신이라 불리며 자연의 흐름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자가 되레 그 흐름을 방해하는 존재를 키워 버렸으니 선택해야 했던 것이지. 하여 안면 있던 내게 여우를 맡겼다.”

“…랑은 여우랑 무슨 관계였는데요?”

내 물음에 그의 걸음이 멈췄다. 이건 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거였다. 껴안은 상태라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거침없이 물어볼 수 있었다.

“…글쎄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수하와 그 수하를 거느리는 자였지.”

“그런 거 말고….”

“또한 지나치게 한 수하만 편애하는 것처럼 보였겠지. 어쩌면 모든 일의 원흉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걸지도 모르겠구나.”

“…….”

“임종의 딸은 나와 혼약이 약속된 관계였거든.”

설마…. 생각을 다 잇기도 전에 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거라. 우리 둘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였으니.”

“랑이 먼저 이상한 소리를 했잖아요.”

“임종이 여우를 양녀로 들였던 것은 내가 언제나 그 여우를 편애했기 때문이니까. 그는 언제나 차악을 생각해 두는 자였거든.”

랑이 나를 내려 주었다. 버드나무 잎이 요란스럽게 흔들거렸다.

“여우와 임종의 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 둘의 끝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지.”

“어떻게 됐는데요?”

“길달문(吉達門)에 묶여 있던 여우를 임종의 딸이 풀어줌과 동시에 얼굴에 커다란 흉을 얻었지. 그 뒤로 천천히 미치기 시작했던 것 같구나.”

묶여? 여우가? 왜? 머리를 스치는 기다란 버드나무 가지를 손으로 밀어주며 랑이 말했다.

“그 또한 그네들의 계획이기는 했으나, 여우가 임종의 딸을 살려 주었던 것은 확실하지. 목을 뜯어 버릴 수 있음에도 얼굴을 헤집는 것으로 끝냈으니.”

목을 뜯는다라. 다른 건 다 모르겠는데 성질머리나 힘은 시대를 뛰어넘어도 똑같다는 건 알겠다.

“다만, 임종의 딸이 왜 여우를 도중에 풀어주었는지는 나 또한 모른단다.”

“…그럼 이건 제일 중요한 질문인데요. 랑은 그 둘을 죽이고 싶었어요?”

“…….”

“이것만 대답해 주면 이제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게요.”

진심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끝나 버린 과거의 일도. 랑이 내 인생을 건드려서 만들어 냈다는 꽃길 프로젝트 같은 그것도.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됐든, 나는 하늘이 무너지기 이전까지 남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살아왔다. 그것이 랑이 만들어 낸 것들이라 해도 그때의 모든 것들이 그의 손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친구 딸이라고 같이 놀라 해도 그거 말 듣는 나이 지난 게 언제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마냥 랑이 만들어 낸 인생인 것도 아니었다.

기반을 다져 줬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난 나의 부모님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러니 그 문제는 별로 상관없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그가 이대로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싶었지. 가능하다면.”

“…그럼 됐어요.”

하나, 둘, 셋. 단 세 걸음.

고작 그 세 걸음 만에 그의 바로 앞에 다다랐다. 이것이 우리 사이의 거리감이었다.

“나를 그 여우랑 구별 못 해서 그렇게 잘 해 줬던 거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내 말에 그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맥이 풀린 것 같은 흐릿한 낯을 했다.

“…그럴 리가. 아가,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여우와 혼동한 적이 없단다. 내가 한 약속은 그때 이루지 못한 그 아이의 말을 다음 생에라도 이루어주는 것이지 널 돌보는 것은 아니었거든.”

랑이 어깨를 타고 흐른 내 머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여우의 말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그 아이에겐 산신이 세상 전부였으니까.”

“…….”

랑의 시선은 날 향하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매번 버들 나무 아래에 앉아 호수 저편을 바라보며 짓는 얼굴이었다.

“신선님들 사는 곳에만 있다는 오색구름이 한가득 둘러싼 고래등만 한 집에서.”

그의 말에 나는 움찔거렸다. 익숙한 곳의 묘사였기 때문이다.

“비단잉어 사는 연못 구경하고, 복숭아꽃 핀 정자에서 약과 먹고.”

“…….”

“버들 나무 아래에서 낮잠 자며 살겠다는 그 아이의 말 어디에도 나는 없었지. 그 모든 것을 함께할 이는 내가 아니라 산신이었거든.”

“…이호연, 그러니까 산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도 랑이 간섭한 거죠?”

그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 또 괜한 시간 흘려보내며 놓치지 말라고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 주었지. 물론 그자 스스로 너를 다시 만나겠다며 격을 버렸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말이다.”

랑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의뭉스러운 것이 아닌 그저 웃는 낯이었다.

“그러니 너도 그 애를 아주 많이 아끼고 보듬어 주렴. 그리고 이번 생엔, 반드시….”

“…어?”

내 손을 놓은 랑이 내 어깨를 밀었다. 등 뒤로 빛무리가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게이트가 왜? 놀라 눈을 크게 뜬 내 앞으로 허공이 일렁이더니 익숙한 것이 튀어나왔다.

[시ㄴ 은 죽이⑇ ㄱᅟᅥᆺ이 아⑆ ⸎ㅱ는 것.]

시스템 창? 랑의 발밑에서 피어오른 불이 시스템 창으로 달려들었다. 필터링 되어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온전한 글자들이 드러났다.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닌 모시는 것.]

시스템 창 너머 랑이 웃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신은 죽이는 것이 아닌 모시는 것이다. 그걸 꼭 기억하렴. 아가.”

그의 뒤편에서부터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랑의 푸른 불꽃이 이곳을 전부 태워 버릴 것처럼 거칠게 움직였다.

하늘이 깨졌다. 숲이 일그러졌다. 이 공간 자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아득한 것이 이곳을 간섭했다.

[ᐙ]

[ㅊᅟᅡᆽ았다. 또 다ㄹᅟᅳᆫ 하나 ᐕ]

테오그라젠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랑의 공간을, 하늘 조각을 빠져나왔다. 웃는 낯을 굳히고 뒤 도는 랑의 뒷모습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

내 앞에 오색구름 떠다니는 하늘을 담은 조각 위로 선명한 잔금들이 생겼다. 그 위로 손을 올려 보았다.

하늘 조각 위로 거대한 마법진 같은 것이 떠올랐다. 가운데에 떠오른 둥근 것을 다섯 개의 조각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들의 위에는 한자와 격자무늬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마법진과는 달랐다.

“…랑?”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조각 위로 글씨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랑이 보낸 메시지 같은 게 아니었다.

[너ㄴ 조ㄱᅟᅳᆷ만 ㄷㅓ 기다려.]

[푸른 불꽃아.]

테오그라젠스, 무료한 신이 내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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