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서린 기도
찬 바람 부는 겨울을 색으로 표현하라 한다면 먼지 낀 회색과 실바람 같은 옅은 하늘색, 그리고 무채색을 들 것이다.
그런 겨울의 색감과 어울리지 않는 봄날 병아리 같은 색감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황금색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곱게 휘어졌다.
“이거 무단 침입 아니에요?”
“이예린 씨가 초대해 주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해요?”
“기꺼이 초대해 드려야죠.”
뻔뻔스러운 내 말에 그녀는 웃었다. 흐리고도 선명하게.
베란다에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이예린이 뒤로 물러났다. 난간 위에 앉아 있던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날이 차네요.”
“그러게요.”
눈을 감고 찬바람을 느끼는 이예린은 못 본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전에는 보는 사람이 얼떨떨해질 정도로 과하게 밝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아마도 이쪽이 원래 성격이었겠지. 안으로 들어가자며 손짓하는 그녀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꽃신이 흐물거리다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언제 이사했어요?”
“꽤 됐죠. 리블의 길드장님이 워낙 친절하잖아요.”
주세진이 나서서 이사시켰다는 거면, 이예린이 리블로 왔을 때라는 소리였다. 뭐든 간에 주세진이 나섰다는 건 그녀의 옛집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소리일 것이다.
하긴 계약서부터가 그 모양이었는데 사는 곳이 정상적인 곳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전의 집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집은 평범했다. 평범하게 따스하고 평범하게 사람 사는 흔적이 이곳저곳에 보였다. 이예린 또한 평범한 공간에 녹아 버린 평범함 그 자체 같아서, 그래서 나는 말했다.
“보기 좋아요.”
“그래요? 우리 애들은 내가 전이랑 너무 다르다고 낯설어하던데.”
“전 회장님이 만들어 준 천칭 길마라는 이름 뒤에 숨었던 것보다 지금 모습이 더 보기 좋은데요, 뭐.”
“…듣기 좋은 말이네요.”
이예린이 부엌으로 가더니 유자차 두 잔을 가져와 하나를 내게 넘겼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을 삼켰다.
그런 나를 보던 이예린이 물었다.
“휴가 아니었어요?”
“휴가였죠. 그런데 실컷 놀았더니 할 게 없어서 일이나 하려고 찾아 왔어요.”
“내가 아니라 주세진 씨를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 알면서 떠보는 건 안 바뀌네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전부터 이예린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엇갈리는 바람에 이제야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혹시나 했던 의심은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이예린을 보는 순간 확신이 되었다.
예언가 이예린이 일부러 나를 피했다.
나를 피해 하늘 조각을 공략하러 들어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은 많고 그녀의 팀원들은 빠르게 해결하는 능력이 없으니까.
“예언 능력이 전보다 더 좋아졌나 봐요?”
“맞아요. 심리적인 문제가 있었던 건지 상담받고 환경도 바뀌니 능력도 달라지더라고요.”
“기능 활성화된 예언 능력으로 내 미래라도 봤어요?”
“…전에는 예언의 주인이 옆에 있어야 예언을 했는데, 이제는 아니거든요.”
“…….”
“맞아요. 나는 류, 당신의 것이자 나의 것인, 그리고 이 세계의 것인 미래를 엿보았어요.”
그림자 줄기가 흘러나와 컵을 받아 들었다. 부엌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확인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예린은 그런 내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다 들고 있던 컵의 테두리를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많은 것을 보았어요. 류와 이호연. 푸른 불꽃과 나비라는 운명의 선. 열세 개의 별이 속삭이는 운명. 귀인의 삶을 타고 태어나 스스로 버린 자와 스스로의 격을 버린 자. 이 세상을 이루는 두 개의 신적인 인격.”
“…….”
“내게 듣는 게 의미가 있나요? 예언은 확신을 던져 주는 불씨일 뿐이에요.”
확신을 던져 주는 불씨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예언일지라도 듣는 자에게 그것을 믿을 마음이 없다면 점쟁이의 헛소리 취급을 할 테니까.
결국은 자신이 믿고 싶은 사실에 확신을 더하는 조미료인 것이다.
옛적에 물어 놓고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을 물었다. 나는 조금 더 또렷한 답을 듣고 싶었다.
“당신의 전직관은 왜 당신을 내게 보냈나요?”
내 물음에 이예린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미칠까 봐. 죽을까 봐. 내가 가장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선택지를 쥐여 준 거죠. 또한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높은 길을 점지해 준 거예요.”
그건 무언가를 위한 계획의 일부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이 서린 행동이었다. 삐딱한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사람이네요.”
내 말에 이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전직관들을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았었다. 무의식적으로도 그랬다.
하늘 조각의 괴물들처럼 알 수 없는 기이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맞았다. 무료한 신을 위해 죽기 싫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었다.
과거의 우리이자 미래의 우리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미래를 바꿀 작은 불씨가 필요했다.
“예언은 확신을 던져 주는 불씨라고 했죠? 나는 그 불씨가 필요해요.”
내 결심을 나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등을 떠밀어 주기를 원했다. 이예린은 흐릿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의 주변에 황금빛 빛이 일렁거렸다. 반짝이는 작은 열세 개의 별이 떠올랐다. 저것은 별자리일까? 아무려면 어떤가. 저것에 담길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였다.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닌 떠밀어 줄 예언의 증표. 환한 대낮에 성스럽다고 할 수 없는 곳에서 떠오른 샛별이 나의 길을 안내했다.
***
황혼 녘의 하늘은 아름답고도 참담했다. 그것이 그 눈부신 붉음 때문인지 구멍 난 하늘의 아쉬움 때문인지 확실치 않았다.
다만 참담해서 아름다웠다. 깨져서 더 빛나는 것들이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과거의 것이기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하늘이 아름다웠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하늘의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어둠이 황혼의 하늘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검은 도화지 위에 예쁜 그림. 무너져가는 종말의 세계에서의 마지막 빛.
그리고 그 아래 황혼보다는 여명에 어울리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한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복장이 여전했다.
“안녕, 공주님.”
하이얀 입김이 흘러나오는 입을 끌어 올리며 그가 말했다. 쥬. 내가 지었지만 낯선 이름이라 입 밖으로 그 이름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좀 더 걸릴 줄 알았어. 결심이 서는 거 말이야.”
“질질 끌 건 없으니까.”
그가 의심스러운 것은 맞으나 그것이 나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또한 죽었다 살아난 감이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니 어쩌겠는가.
나를 재촉하듯 간간이 들리는 속삭임과 함께 에드워드의 말이 생각나고는 했다. 그 속삭임에 답하지 말라고. 그것이 나를 미치거나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해도 결국은 나의 감.
나의 감은 듣는 쪽을 선택했다.
마법사의 감은 일종의 예언. 예언가인 이예린도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했다. 운명이 나를 떠밀었고, 나는 별자리의 길을 따라 걸었다.
떠밀렸으나 그 위태로운 별을 밟아 넘어오기로 한 것은 나였다. 그러니 결국은 나의 선택이며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황혼에 물든 바다가 우는 소리를 내었다. 왜 하필 바다인가 싶다가도 왜 하필 그 많은 바다 중 이곳인가 싶었다.
저 멀리 동굴이 보였다. 인적 드문 이곳은 이호연과 이야기를 나눴던 바로 그곳이었다. 몸을 숙여 한 움큼 모래를 손에 쥔 그가 그것을 바람에 흩날려 보내며 내게 말했다.
“신을 상대해야 하는 영웅이 된 기분은 어때?”
비꼬는 것에 가까운 어조. 비틀린 웃음. 그러나 눈을 다정하리만치 휘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가 싫어할 법한 말을 했다.
“신을 죽인 자의 다음을 이행하는 기분이 어때?”
“그 자식 얘기는 하지 마.”
얼굴이 굳었다. 그도 나도 상대가 싫어할 주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를 찔렀다. 동족 혐오이자 자해에 가까운 행위였다.
일그러진 얼굴은 바다에 빛무리가 반짝이듯, 슬그머니 사라졌다. 웃는 낯을 꾸며 낸 그가 내게 말했다.
“이제 곧 만날 거니까 나에게만 집중해 줘.”
손에 묻은 모래를 털고 내게 성큼 걸어오는 그의 뒤편으로 바다의 짭짜름한 향이 맡아졌다. 그 향에 뒤섞인 꽃향기 또한 코끝을 스쳤다. 인위적으로 강한 향이었다.
“나는 네가 불행하기를 바라.”
“…….”
그래, 저런 눈빛이었다. 날 좋아하니 이호연과 비교하는 말이 싫다 하면서 나를 저렇게 보았다. 저게 어딜 봐서 애정인가.
“또한 네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
하나 온전한 애정이 아니라고도 못 할 눈빛이었다. 하늘색에 보랏빛이 차오른다. 황혼은 우리 위에 있고 여명은 내 앞에 있었다.
밤은 그의 눈부처가 비친 내 눈에 있었다. 반대되는 해의 시간이 어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무릎을 꿇어 성스러운 것이라도 된다는 듯 내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차라리 도망가기를 바라.”
그 모습은 마치 죄악을 고백하는 성자의 얼굴이요, 신께 비는 가련한 신도의 자태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지.”
내 손끝에 그의 눈 밑 검은 나비 문신이 닿았다. 매끄러운 나비의 위로 흉터의 감촉이 느껴졌다.
“네가 도망가도 내가 찾아낼 거야. 나는 나비고, 너는 불꽃이니까.”
운명이라는 짧은 음절은 사람을 설레게 하고 낭만적인 기분을 들게 한다. 하지만 죽었던 마법사의 감을 되살릴 정도로 질기고 지독하게 얽혀든 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아로새기면서도 그렇다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차라리 네 눈으로 마주 봐, 너도 결코 도망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
끊어 내지 못한 미련이자 악의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나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 어깨를 짚었다. 귓가에 작은 나비가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네가 끝을 봐야 해.”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이름을 지어 준 이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혼과 여명이라는 비슷한 듯 반대되는 두 가지가 내 앞에서 함께하였다. 웃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화에 사무친 얼굴도 아니었다.
실로 진실된, 그 어떤 감정 하나 서리지 않은 빈 가지 같은 얼굴. 감정이 거세당한 성자의 얼굴이었다.
“너….”
뭐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뗐으나 정작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의미 없는 말이 소리의 형태로 튀어나온 나의 감정이었다.
그런 내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을 들어 제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쉿, 비밀이야.
한 걸음 멀어진 그가 제 목에 걸어 두었던 것을 끄집어냈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것은 하늘 조각이었다.
“붉은색….”
히든 게이트의 하늘 조각은 제각기 형태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저런 황폐한 붉은 하늘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네가 좋아.”
“…….”
“가끔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 눈을 돌리고 싶고, 웃는 낯을 보면 그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고. 행복하다는 듯 굴면 그 행복을 깨부수고 싶은데….”
“…….”
“그럼에도 나는 네가 좋아.”
그가 말했다. 불행하기를 바라고,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고, 도망가기를 바란다는 내게, 저주 같은 말을 늘어트리면서도 그는 또다시 좋아한다는 소리를 한다.
악의적인 애정이었다. 애정이란 탈을 쓴 악의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도망가.”
그가 손에 쥔 것을 놓았다. 손가락 두어 마디 될까 싶은 작은 조각이 붉은 빛무리를 내뿜는 거대한 게이트가 되었다.
그것은 사람 하나를 통과시켜 줄 것 같은 크기인 것은 같았으나 느낌이 달랐다. 건너려는 이를 통과시켜 주는 것이 아닌 홀라당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물었다.
“도망가지 않는다면?”
“…….”
내 물음에 그는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것 같은 웃음을 언제 흘렸냐는 듯 그는 예쁘게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게 손을 뻗는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모래사장을 황금빛으로 빛나게 만드는 황혼의 신기루도 아니었다.
“날,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건 그가 말했듯. ‘그럼에도’였다. 그럼에도 내가 좋다는 그런 감정의 잔해였다.
나는 그것에게서 눈을 돌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또한 굳이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더 이상 황혼의 하늘이 존재하지 않았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하늘을 품은 하늘 조각이 있었다. 나는 그쪽을 향해 발을 뗐다. 누군가 내 귓가에 속닥인다.
한 발자국 더. 한 발자국 더. 저 손을 잡아. 세상의 비밀. 너는 푸른 불꽃.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 저 안에 있어. 네 운명의 시작은 어떤 하찮은 비밀을 품고 있을까.
그림자가 술렁인다. 내 발목을 잡고 늘어져라 버티던 것들이 뚝뚝 끊어졌다. 손이 닿았다.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았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흐느적거리듯 팔을 내버려 두며 걸었다.
미소가 사라진 교주의 아들, 나비, 성자의 얼굴을 한 신을 배반한 자가 말한다. 비밀이 내게 속삭인다.
“가자, 지옥으로. 나와 함께.”
붉음이 나를 잡아먹었다.
나는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길 잃은 것들의 인도자, 신의 궤적을 좇는 자
무릎 꿇고 빌어먹는 생을 탐하는 자
너는 푸른 불꽃
길 잃은 것들의 구심점, 요람
누가 그대를 무릎 꿇리리
우리는 삶과 죽음의 가림막, 기원과 종말의 인도자
가장 성스럽고도 괴이쩍은 존재들
누구보다 인간에 먼 신의 종자, 누구보다 인간에 가까운 귀신의 아이
불을 붙이오, 내가 끌 테니
불을 보고 걸음 한 이들 모두 길을 잃을 터다
날갯짓에 홀려라. 어리석다
우리는 길 잃은 자들의 낙원
그 낙원의 이름을
아로새기는 자
푸른 불꽃과 나비
우리가 써 내려가는 종말의 이야기
***
하늘은 붉고 기이한 검은 기류가 흘렀다. 황폐한 땅에는 풀 한 포기 존재하지 않았다. 발에 채는 돌 조각의 흔적을 더듬어 가 보니 머리가 잘린 석상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리라를 들고 잘린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모양이었다. 그 밖에도 석상은 다양했다. 부러진 대검을 든 자, 머리를 빗는 여인, 자루를 쥐고 엎드린 남자.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으나, 그것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회색빛의 빛바랜 석상은 모두가 무너진 얼굴로 울고 있었다. 석상에서 시선을 떼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으로 쓸면 불그스름한 먼지가 묻어날 것 같은 하얀 신전.
금이 가고, 좀먹고, 심지어 일부가 무너졌으나 바래지 않은 크기와 위용은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이는 이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이런 꼴일지라도 말이다.
그래 봤자 무너진 성전과도 같은 이곳에 현재 살아 움직이는 것은 나와, 쥬.
그리고 저 앞. 작은 하얀 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로 멀리 있으나 그 존재감만큼은 선연한 자, 새하얀 신관복과 베일을 뒤집어쓴 남자뿐이었다.
사라진 신앙을 더듬어 끌어안고 품에 가둔 마지막 신도.
만약 우리가 신을 모시러 온 경건한 자들이었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사라진 영광을 애통해하는 눈물이나, 동시에 만난 인연에 기쁨으로 가득한 눈물을.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나도, 내 옆에 서 있는 이도 경건하지 않으며 저 앞에 있는 자는 제 신을 배반한 자다.
감흥을 느꼈다면 그건 되려 기만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진 하얀 베일은 땅에 끌리듯 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이는 외양은 다른 전직관들이 그러하듯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다. 언뜻 드러나는 얼굴의 하관이 창백한 느낌을 주었다.
기다란 소매에 슬그머니 나온 하얀 손은 아무렇지 않게 신에게 총을 겨눈 자답지 않게 희었다. 신의 피를 손에 묻힌 자 같지 않게 순백, 그 자체인 남자였다.
아직까지 내 손을 붙들고 있던 쥬의 손을 놓았다. 그런 내 행동에 쥬가 잠시간 내 손을 도로 꽉 잡았지만, 그런 자신의 행동에 지레 놀란 듯 그는 곧바로 내 손을 놔주었다.
금세 희미해진 온기와 감각이 남은 손에서 눈을 떼고 신관복을 입은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무너진 성전. 천장은 없고, 금이 가지 않은 바닥도 없었다. 기둥은 멀쩡한 것보다 흔적만 남은 것이 더 많았다. 차라리 멀리서 보았을 때가 더 나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꼭 누군가의 무너진 자존심 같다고.
볼품없고 남은 것도 없지만, 그나마 남은 것들을 끌어모은 황량하고 거대한, 피 묻은 먼지뿐인 자존심.
“…….”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무료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장난감에게 상처 입은 어느 신의 마지막.
발끝에 채는 돌이 굴러가는 소리만이 이곳을 울리는 소음의 전부였다. 과거의 영광이자 빛바랜 영광들을 지나 걸음을 멈추었다.
섬세한 세공이 가미된 제단. 그 위를 굽어보는 석상. 이 공간에 들어와 보았던 그 어떤 석상보다 양호하면서 또한 비참한 모습을 한 석상이 제단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피를 뒤집어쓴 무료한 신, 목이 잘려나간 테오그라젠스의 석상이었다. 누가 저렇게 해 놨을까. 악의인가, 실수인가. 지키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방치한 것인가. 이미 답을 아는 의문들이 머릿속에 흘러넘쳤다.
비틀린 신앙심을 품고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던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움직임은 무척 느릿했고,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위협당하는 기분이었다. 무자비한 살인마를 눈앞에 둔다 해도 이 정도로 사람의 모든 신경이 예민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서 등을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러는 순간 그가 내 목숨을 거둘 것만 같았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어 옆을 보았다. 희게 질린 낯으로 무던한 얼굴을 하려 노력하는 쥬의 모습이 보였다. 두려움으로 물든 낯은 숨길 수 있어도, 손의 잔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명백히 자신의 전직관을 겁내는 모습이었다.
“…….”
겉모습은 무해하다. 새하얀 옷자락만큼이나. 또한 그렇기에 위험스럽다. 저 하얀 옷에 붉은 자국이 묻는다면 그 어떤 색감의 옷보다 눈에 띌 테니까.
저 남자는 웃는 낯으로 신을 모시고 웃는 낯으로 그 신에게 총을 들이민 자였다. 또한 웃는 낯으로 자신이 배신한 다른 사도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자이기도 했다.
위험해. 내가 봤던 그 어떤 존재보다 가장 위험하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타고난 자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 가장 지독해질 줄 아는 자였다.
발밑의 그림자가 술렁이며 일렁거렸다. 당장이라도 저 남자의 목을 잘라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손에 땀이 맺혔다.
남자의 음성이 삭막한 성전을 울렸다.
“귀하신 분이 오시기엔 이곳은 상당히 초라하군요.”
남자의 음성은 설핏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는 자신과 이 장소를 낮췄으나, 그게 도리어 경계심을 부추겼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자리는 두려움에 떠는, 그런 어쭙잖은 어린애가 앉아서는 안 되는 자리이니까요.”
“…….”
“내 기대를 충족하는 그대가 그리 나를 경계하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슬프답니다.”
하얀 베일이 흔들리며 남자가 뒤를 돌았다. 베일을 이루는 레이스 조각들이 거미줄처럼 느껴졌다.
흐릿한 실 가닥 사이로 그의 얼굴이 언뜻 비췄다.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나는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 표정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놀라움과 예상했던 것이 맞았을 때의 그 어딘가.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남자는 눈을 휘었다.
“역시 예상은 했나 보군요. 조금 더 놀랄 줄 알았는데.”
남자의 머리카락은 회색이었다. 레이스 베일 아래 곧게 뻗어진 머리칼이 어깨를 조금 넘어 흔들거렸기에 색을 착각할 일은 없었다.
눈은 노아 이스벨라의 푸른 선 그림 중 유일한 보라색이었던 것처럼 선명한 라일락 빛깔. 어설프게 푸른 눈과 뒤섞인 쥬의 눈과는 달랐다.
“관찰은 끝났나요?”
자신을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나를 보며 그는 물었다. 얼굴에 드리워진 베일을 걷는 손이 느긋했다. 손에 걸려 벗겨진 베일이 더러운 바닥을 구르며 불그스름한 먼지에 뒤섞이는 것이 보였다.
하얀 얼굴은 매끄러웠고, 고왔다. 눈 밑에 흉터나 진한 검은 나비 문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성자의 얼굴.
내 옆에 선 쥬의 얼굴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예상했다는 듯 그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요. 내가 그 아이의 얼굴인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내 얼굴을 닮은 것이니.”
“…….”
아주 오래전 랑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여운 아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 온전하게 자신의 자아를 성립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
그것이 쥬를 평하는 랑의 말이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한 걸까. 얘의 어느 점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걸까. 답을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노아 이스벨라가 보여 준 세상의 비밀, 그중 나비의 마지막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랑이 왜 가엽다고 한 건지도.
‘나 또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나의 신, 테오그라젠스. 허나 이리 또 실패할 수는 없지요. 하여, 나는 다시 시작할 겁니다. 완전한 새로운 몸으로. 꿈결 자락에서 다시 시작할 겁니다.’
닮은 얼굴은 우연 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다정하게 웃었다. 조금도 얄미운 구석 없는 그의 웃음에서 이 남자가 쥬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떤가요?”
그러나 내게 손 내밀어 말하는 자의 웃음의 다정은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바라는 것이 있는 자의 흉내 낸 다정함을 구별할 정도의 눈은 있었다.
경계를 풀지 않고 남자에게 말했다.
“나한테 친절하게 구네요. 마치 뭔가 바라는 게 있는 사람처럼.”
내 말에 그의 웃는 낯이 더 진해졌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도 참 영리하고 눈치 빠르군요.”
다시, 태어나도?
남자가 나를 보며 눈을 휘었다.
“시대가 바뀌어서 다행이지요? 안 그러면 진작 죽었을 테니까. 그 옛날처럼.”
“…….”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잠시 주춤했던 나는 그 행동을 멈추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도 그래서 죽었잖아요? 아, 기억하지 못하나?”
그는 하얗고 고운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며 가엾은 어린양을 달래는 말투로 말했다.
“삿된 것들의 왕께선 오래전 세 가지의 실수를 했지요. 자신이 데려온 작은 여우가 얼마나 영리한지 알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란 얼마나 욕심 많고 어리석은지 몰랐다는 것.”
“…….”
“또한 본인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자인지 알면서도 잠시나마 외면했다는 것.”
“…그게 랑의 죄악인가요?”
“죄악이라…. 그것을 죄라 해야 할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습니다. 바람의 희롱에 한낱 나뭇잎이 떨어진다면 그게 과연 바람의 잘못일까요? 산사태로 인해 죽은 인간의 목숨은 산의 잘못인가요?”
“…….”
“하지만 바람을 억지로 불러일으킨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자의 잘못이고, 산사태를 인위적으로 일으킨 자가 있다면 그 또한 그자의 잘못이지요. 그렇게 따진다면, 네, 그분은 잘못한 게 맞군요.”
지금 날 비웃는 건가? 다정을 흉내 내던 낯이 비틀어졌다. 날 보며 웃는 미소가 마치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렇게 보나요? 그분이 잘못한 거라고 정의 내린 것은 당신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군요.”
“내가 뭘 아는데요.”
“모르나요? 뭐, 모르는 게 당연하기는 하지만.”
그의 손끝이 툭툭, 뺨 위를 치는 것이 느껴졌다. 저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알면 이리 고집부리지 못하죠. 당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를. 오로지 당신 하나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거부하고 도망 다니다니.”
남자가 손을 내려 내 손을 잡았다. 신에게 죄인을 이끌고 가는 것 같은 성스러움이 그의 손에서 일렁거렸다.
내 뒤에 선 쥬의 빛나는 물과는 격이 다른 성스러움이었다.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그것은 곧이어 맥없이 풀렸다. 남자의 말 때문이었다.
“알려 줄까요? 오래된 이야기. 어쩌면 당신을 이루는 모든 것의 시작일 이야기를.”
그림자가 내 발목을 움켜쥐었다. 물어뜯듯이 늘어지는 그것들은 명백히 나를 말리는 손짓이었다. 그것은 나를 위한 행위일까, 아니면 저들의 왕을 위한 행위일까.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곱씹다 그 어둠을 떨쳐 냈다.
“처음부터 그거 듣자고 여기 온 거야. 비꼬지 말고, 빙빙 돌리지도 말고, 똑바로 얘기해.”
“이제야… 저울추가 조금은 맞춰지겠네요.”
남자의 손을 떨쳐 냈다. 내 행동에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중얼거리며 고민하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이 땅에 아주 기이한 아이가 태어났죠. 그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었고, 살아 있으나 죽음에 더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당신도 아주 잘 아는 도깨비들의 왕. 그의 이야기죠. 그 시절에는 온갖 기이한 것들이 사람 사는 곳을 들락날락 넘나들며 살았죠. 도깨비와 귀신. 산신과 어느 여우처럼. 그 여우는 미물로 태어나 산 하나를 호령하던 산신의 귀여움과 보호를 받고 살았답니다.”
그가 말하는 여우가 무엇일지, 그간의 정보들로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우가 나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꿈같은 내 헛말이 사실이라 증명해 주는 꼴이었다. 속이 어떻든 일단은 그의 말에 집중했다.
“평범한 여우는 아니었습니다. 말했다시피 산신님 보호 아래 살던 여우였으니까요. 그 여우는 너무 오래 살았고, 인간으로 둔갑도 할 줄 알았답니다. 산신이 그 여우를 너무 아껴서, 짧은 생을 사는 미물을 아주 오랫동안 붙들어 매었으니까요.”
“…….”
“그래서 과거에 이런 소문이 돌았더랍니다. 여우가 호랑이 없는 굴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산다. 허나 이는 뭣 모르는 이들의 입을 타고 와전된 사실이었지요. 실은 산신이었던 호랑이가 여우를 왕 노릇 시켜 주는 거였는데 말이죠.”
남자가 나를 데리고 제단 앞으로 갔다. 쥬는 멀찍이 떨어져 서서 그런 우리를 지켜보았다. 나를 제단 위에 앉힌 남자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 혹은 성서를 읊는 성자처럼 입을 열었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그 소문에 궁에 살던 어린 도깨비들의 왕 또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인연이 만들어졌지요.”
“…….”
“그즈음에 여우가 사람이라는 것에 많은 관심을 보였거든요. 운이 나빴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의 손에서 일렁인 물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노아 이스벨라의 푸른 선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내레이션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점과 선뿐이었던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입체적으로 만들어지는 물이 있다는 점이었다.
“도깨비들의 왕께선 그저 어린 여우가 영리한 것이 기특하고 귀여워 기회를 주었을 뿐이죠. 지금이라면 모를까, 그 당시엔 그분 또한 어렸고, 귀하신 산신님 보호 아래에서만 자란 여우는 적의에 대해 무지했죠.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물이 일렁이며 백호를 만들어 냈다. 이호연의 또 다른 변형체이자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용의 모습이었다.
“다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산신이 왜 순순히 여우를 보내 주었는지.”
“…….”
“산신이라 불리던 이는 아주 오래된 옛것이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에 지친 그것은 호랑이의 모습을 빌려 산의 주인이 되었으나 그 신령스러움은 하얀 털 색으로 남아 있었죠.”
용의 모습이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 앞에 동그랗게 떨어진 물 덩어리가 천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어린 여우가 호랑이 앞으로 툭 떨어졌지요. 겉모습은 미물의 것을 따왔으나 그 본질은 땅의 미물들과 같지 않은 이 앞에 떨어진 것이 그 여우의 운이었지요. 아니면 홀랑 잡아먹히지 않았겠습니까?”
“…….”
“나름 재미있게 풀어나가려는 건데, 반응이 없으니 아쉽군요.”
“…얘기나 계속해요.”
“그러죠. 아기 여우는 어미를 잃었고, 하얀 털빛을 가진 변종이었지요. 산신의 눈에 그 어린 것의 죽음이 훤히 보였더랍니다. 하여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기로 하였지요.”
호랑이와 여우의 모습이던 물이 사람으로 바뀌었다. 성인 남성과 어린 여자아이를 흉내 낸 두 개의 물 덩어리가 사이좋게 손을 잡았다.
“산신의 입장에선 가여운 여우를 죽기 전까지 돌봐 주며 무료함에 여흥 하나 더한 것일 뿐이었죠. 다만 그 선택이 기이하게 작용했습니다. 한낱 미물이었던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호랑이를 따라 사람으로 둔갑할 줄 알게 되었거든요.”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물 덩어리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산신은 어린 여우에게 인간의 옷을 입히고, 말을 가르쳤지요. 본성밖에 없는 미물 속에 유일하게 저와 비슷한 어린 여우가 산신의 눈에 얼마나 어여쁘게 보였겠습니까.”
“…….”
“여우는 무럭무럭 자라나, 너무 오래 살고 말았습니다. 산신이 길러서 그런 것인지 더 이상 그것은 변종 여우 따위가 아닌 게 되어 버렸죠. 오히려 신령스러운 무언가에 더 가까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남자가 손을 뻗어 두 개의 물 덩어리를 손으로 뭉개 버렸다. 그 모습에 움찔거리는 나를 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 어그러진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은 오래전의 당신이니까.”
“…….”
“산신이 불쌍한 어린 여우를 죽게 놔두거나, 여우가 더 이상 일반적인 여우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죽이거나. 그도 아니면 여우가 무료한 산에서 산신과 오순도순 사는 것에 만족하거나 해야 했습니다. 여우는 영리하였으나 산신이 만들어 준 꽃밭과도 같은 세상에 살아 악의를 몰랐죠.”
남자가 내 손을 잡아 땅에 스며들기 시작한 물웅덩이 쪽으로 올려 두었다. 축축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물의 흔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질척거렸다. 먼지와 뒤섞여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꺼림칙한 감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을 떨구려 하니 그는 힘주어 내 행동을 막아섰다. 노려보는 내게 돌아오는 것은 웃음뿐이었다.
“여우는 악의를 몰랐고, 위협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고자 온 도깨비들의 왕이 한 말에 홀라당 넘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랑이 뭐라고 했는데요.”
“사실 그분의 말 자체는 별말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사람 사는 것에 대해 궁금해하는 귀여운 여우에게 기회나 한번 줄까,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산신의 생각이나 한번 바꿔 볼까. 그런 의도였으니까요.”
남자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고 손을 빼 왔다. 땅에 스며들어 가던 물웅덩이가 다시 흐물거리며 움직였다.
“도깨비들의 왕은 여우를 자신의 수하, 길달(吉達)이라 칭하였습니다. 영리한 여우가 얼마나 일을 잘했던지, 왕은 당시 아들이 없었던 각간 벼슬의 임종(林宗)에게 여우를 양자로 들이라고 했지요.”
그의 말을 듣던 중 나도 모르게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이의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군요. 여자아이인 여우가 왜 양자로 들어갔을까요?”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듯이 물이 내 손목에 묶였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떨쳐 내는 나를 보며 그는 말했다.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 기록은 산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길달(吉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비형랑 설화를 찾을 때 함께 나왔던 이름이었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가자 비형은 귀신들을 부려 길달을 잡아 죽였다. 그리하여 도깨비 무리는 비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달아나게 되었다.’
몇 줄로 구성된 그 짧은 이야기 하나가 내 모든 것의 시작이라 남자는 말하고 있었다.
“임종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고, 여우는 임종의 양자가 아닌 양녀로 들어갔습니다. 아가씨가 된 여우는 임종의 딸과 친구가 되었고, 둘은 친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냈죠. 거기서 적당히 즐기다가 유흥을 청산했어야지요. 여우는 왜 그러지 않았던 걸까요?”
남자가 손을 움직였다. 생각보다 빠른 몸놀림에 반응하기도 전에 목이 움켜쥐어졌다.
“…이거 놔.”
남자가 슬며시 힘을 주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나를 보며 그는 평온한 얼굴을 하였다.
“아쉬워서 말입니다. 여우가 그때 즐길 거 다 즐겼다 하며 산으로 돌아갔으면 귀하신 푸른 불꽃께서 그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으로 변하지 않았을 텐데.”
“…….”
“기껏 그 자리를 버려 가며 되살린 것이 이런 어린애라니.”
“그 어린애가 네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이 말했던 거나 잊지 마.”
“…이야기부터 끝내지요. 잘 들어요,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하니까.”
내 목을 놔준 남자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쥬의 팔을 잡아, 내 앞으로 끌고 나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그는 무력한 몸짓으로 제단 앞에 주저앉았다.
그런 쥬를 재미난 것 보듯 보던 남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시대의 아가씨들은 으레 그렇듯 귀한 곳에 시집 보내는 용도였습니다. 아주 귀한 신분이면 모를까, 애매하게 귀한 신분이었던 임종의 딸은 혼사의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가씨의 눈에 자유로운 여우가 얼마나 부러웠을까요.”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예술가처럼 그가 양팔을 벌렸다. 남자의 물 인형들이 벌떡 일어나 내게 인사했다.
“사람이 아니기에 법도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존재. 제멋대로 굴어도 꾸중 듣지 않는 아이. 자신은 결코 하지 못할 온갖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하던, 당신.”
얼굴을 가린 여자가 하나. 여우 귀를 단 여자가 하나. 그리고 어느 남자가 하나.
“그래서, 도왔던 거겠죠. 친자매처럼 지내던 여우를 배신했던 거겠죠.”
“…….”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을 보아하니 제 이야기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그쪽이 하는 말 대부분이 카더라잖아.”
“…….”
“사실 그쪽도 잘 모르는 거 아니야?”
“…뭐, 틀린 말은 아니죠. 누구의 시선으로 보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지고 난 수많은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을 뿐이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인들의 시선으로 본다면 또 다른 이야기일 테지만… 아쉽게도 나 또한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는지라.”
남자가 손뼉을 짝 쳤다. 얼굴을 가린 여자를 흉내 낸 물 덩어리가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당신은 모르는 이야기를 제가 알고 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마세요.”
손을 들었다. 물 덩어리가 다시 일렁이며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새로 만들었다.
“어느 날 왕은 여우가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눈치는 빠르나 사람 간의 간계와 관계를 모르는 여우는 알면 안 되는 것까지 알아내고 말았거든요.”
왕관을 쓴 물 덩어리가 여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서 왕은 여우의 죽음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핑계가 필요했어요. 여우는 성제의 아들인 비형랑의 수하. 이유 없이 죽이기에는 영 껄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왕과 주변 사람들이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새롭게 만들어진 호랑이의 모습을 한 물 덩어리가 있었다.
“하여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죠. 호랑이 사냥은 예로부터 영웅을 상징했습니다. 나라의 큰일을 할 젊은이들은 증거로 호랑이 가죽을 바치곤 했죠.”
“…설마.”
“이들이 노린 것은 총 세 가지였습니다. 여우, 산신. 그리고 이도 저도 못 하는 애매한 신분인 성제의 아들 비형랑.”
얼굴을 가린 여자가 다시 나타나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여자가 여우를 가리켰다.
“아쉽지만, 여기서부터 저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한답니다. 그저 기록을 통해 아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 기록이라고 하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거나 변형된 것이 많아서요.”
“…장난치지 말고 아는 거 다 말해.”
내 말에 남자의 손이 얼굴을 가린 여자를 가리켰다.
“임종의 딸은 임종이 양자로 들인 길달에게 해를 입었다. 명예를 잃었기에 죽었다. 이로 인해 비형랑의 위신은 크게 상하였고 그는 다시는 정무에 손댈 수 없게 되었다.”
남자의 손이 이번에는 호랑이에게로 향했다.
“감히 자신이 아끼는 것에게 누명을 씌운 인간의 괘씸함에 산신은 그들을 사냥하였다. 그런 인간들의 왕자나 다름없던 비형랑은, 왕자이기에 산신을 사냥하였다. 하얀 호랑이 가죽은 크게 상했던 비형랑의 위신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그를 왕의 충실한 신하로 만들어 주었다.”
“…뭐?”
“제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에 충격받은 길달, 산신의 여우는 비형랑을 저주하며 그가 보는 앞에서 자결하였다.”
물 덩어리들이 모두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어느 남자를 흉내 낸 물 덩어리가 홀로 일렁거렸다.
“비형랑은… 잘 모르겠군요. 기록으로 남기도 전에 스스로의 격을 깎는 행위를 하며 사라졌거든요. 그의 최후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방식은 이미 알지요? 육신을 죽이고 혼만이 남아 또 다른 하나와 거래를 했답니다.”
“…….”
“여우를 다시 만나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고 했다는 것만이 내가 아는 전부랍니다. 산신은 어찌 된 것인지 모르나 그 당시의 기억과 한을 놔두고 다시 태어났죠. 그게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요?”
그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랑. 랑.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남자가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임종의 딸은 죄악으로 인해 성불하지 못하고 비형랑의 옆에서 시비 노릇을 하고 있다지요? 귀한 아가씨가 자신이 죽게 만든 이의 시중을 들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네요. 아무리 다시 태어났다 해도 그 본질은 같은데.”
“…….”
“기분이 어떤가요? 도깨비 왕의 심장을 찌르고 싶은 격한 감정은 안 드나 보군요. 기껏 힘들게 말했는데 아쉽네요.”
어떻냐고? 모르겠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남의 얘기 같은데, 그게 내 얘기라서 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 내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였다. 랑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 그건 소름 끼치도록 기분 나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지금 여기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게 상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노아 이스벨라가 한 말. 그 말의 결과물을 이 남자가 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단은 진정해야 한다. 격해지지 말고, 차분하게.
“…왜, 내가 지금 당장 달려가 랑에게 따지거나 그를 죽이지 않아서 아쉬워?”
비틀린 웃음이 나왔다. 나를 보며 히죽 웃는 낯이 싫었다. 남자가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에게 속닥거렸던 것처럼 내 귀에 속삭였다.
“푸른 불꽃이 되실 귀하신 분. 차라리 미워하는 게 마음 편하지 않나요? 어차피….”
그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내 손을 누군가가 잡지 않았다면, 그 잡은 이의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울 것 같은 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
익숙한 목소리. 검은 머리카락이 한들거렸다. 그건 내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날 붙잡은 손이 천천히 힘을 풀다 완전히 나를 놔주었다.
“남의 아이에게 헛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는가, 욕심 많은 것아.”
“…워낙 비천하게 태어나 바닥을 기고 살아 제대로 배우지 못한지라, 그만 귀하신 분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나 보군요.”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지금 당장 보고 싶으면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 여기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
지금 바로 나타나면 저 말이 전부 사실 같잖아요. 그렇게 내 눈을 피하면, 정말 모든 게 진실인 것만 같잖아요, 랑.
아, 차라리.
그냥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다.
랑은 평소와는 달랐다. 그의 옷이 신라 시대의 한복이라서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기이한 것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흐릿하기만 하던 그의 존재감이 지금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내 눈을 맞추지 않고 등을 보이는 그가 이토록 낯선 적이 없었다.
“랑.”
내 부름에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그를 불렀다. 아니, 도리어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를 불렀다.
랑. 그 짧은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모순적이게도 힘겨웠다.
그가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사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전부 사실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랑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 하나였다. 아닌가? 보기 싫은가? 모르겠다. 보면 다, 알 것 같은데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멋대로 날뛰어 내 멋대로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게 그가 바로잡아 주면 좋겠는데.
왜… 날 보지 않아요?
쥬가 내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본 남자가 빙긋 웃으며 랑에게 말했다.
“딩신의 아이가 애절하게 부르는군요. 뒤돌아봐 주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남자의 말에 나직한 웃음을 흘린 랑은 심사가 꼬인 어조로 말했다.
“…네 혀를 잘라야만 그 말을 멈출 건가.”
“아이에게 좋은 것 귀한 것만 보여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고생을 하며 키우셨는데.”
덜덜 떨리는 손이 이상했다.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저 남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말하는 본인도 정확하지 않다고 했는데.
날 붙잡은 손을 떨쳐 냈다. 날 붙드는 것 같은 그림자의 손길을 피해 걸었다. 검은 옷자락을 손안에 움켜쥐었다.
“랑, 랑, 나 좀 봐요. 랑, 우리 얘기 좀 해요.”
그런 내 행동에 그가 드디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자신의 옷소매를 잡은 내 손을 털었다. 그건, 명백한 거부였으며 단절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가.”
“…싫어요.”
“아가.”
“싫다고.”
왜 날 안 봐요? 왜 날 안 돌아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밀쳐진 아이가 엄마에게 안아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랑을 다시 붙잡았다.
“랑….”
날 좀 봐. 날 보고 얘기해. 나한테 직접 설명하란 말이야. 또 의뭉 떨지 말고, 제발…,
제발….
이상했다. 머리로는 저 남자의 말에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이야기 속 비형랑이 내게 크나큰 해악을 끼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나는.
서럽지?
알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눈앞이 희뿌예졌다. 이상했다. 전생이니, 뭐니 이야기해도 길달, 산신의 여우는 내게 딴 사람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감정 이입이라고만 하기엔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왔다.
쓸데없이 흐르는 것을 문질러 닦아 내며 랑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내가 미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난, 랑의 죄악이라길래 거창한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 남자 말 중에 랑이 크게 잘못한 건 없잖아요.”
“…….”
“그리고, 그래 봤자, 그거 전생이라면서요. 지금 나랑 전혀 상관없잖아. 내가 보기에도 랑 잘못 아니라고. 그러니까….”
난, 괜찮아. 울지 마. 웃어. 유난 떨지 말고, 괜찮으니까. 제발.
뺨을 타고 흐른 것이 작고도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황폐한 땅을 적셨다. 목이 조이는 것처럼 아팠다.
“울잖니, 아가.”
“나 보고 말해요.”
“기억 못 해도 알잖아. 그러니 우는 것 아니겠니.”
“…아니. 난 몰라.”
내가 아는 건 비형랑이 아니라 랑이니까. 어린 여우 꾀어서 데리고 갔다가 죽게 했다는 성제의 아들이 아닌, 랑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몰라.
랑이 나를 돌아봐 주기를 원했다. 지금 이 순간 마주 보지 못하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모르겠다. 이 사람을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겠다.
그런 나를 쥬가 다시 붙잡았다. 랑에게서 떨어트리며 그가 내게 말했다.
“넌 그 말을 듣고도 네 전직관한테 매달리고 싶어? 멋대로 남의 인생에 간섭한 자식한테 매달리고 싶냐고!”
“…….”
“넌 네 인생이 네 인생 같지? 아니. 그거 다 네 전직관이 만들어 준 인생이야. 사랑받는 외동딸. 즐겁던 학교생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지옥도의 영웅. 너한테 절절매는 연인. 그거 다 네 전직관이 만들어 준 거라고!”
“…….”
“네가 이뤄 낸 것도 만들어 낸 것도 없는 남이 만든 인생이야. 그런데 뭐가 좋다고 네가 매달려! 왜 화를 안 내!”
색색거리며 숨을 내쉰 쥬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의 비틀어진 마음이 엿보이는 순간이었으며 동시에 내 마음이 비틀어지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소리 내어 웃은 그는 어떻게 하면 나를 상처 줄 수 있을까 지금껏 고민이라도 했다는 듯 나를 콕콕 찌르는 말들을 내뱉었다.
“죽은 것들을 다루시는 분께서 자기 때문에 죽은 여우가 어느 집에서 다시 태어날까 손대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 풍족하고 사랑받을 집을 고르고 골라 집어넣었겠지. 네 부모도 네 전직관이 골라 준 거라고!”
“…조용히 해.”
“뭘 조용히 해? 이해가 안 돼? 그 좋은 머리 갖고 왜 이 쉬운 걸 이해 못 하냐고!”
“조용히 하라고!”
“…….”
네가 말 안 해도 아니까 제발 닥치라고. 날카로운 말에 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비틀려진 마음은 내가 받은 상처에 취해 남을 상처 입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이, 제멋대로 날뛰다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네가 원했잖아.”
“……”
“내가 다 알아 버리는 걸, 너처럼 비참하고 불행하길 원했잖아.”
“…….”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 네가 날 여기로 데리고 와 놓고 왜 인제 와서 그래? 왜, 너랑 동질감 느끼면서 손잡고 위로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니까 화나?”
선을 넘었다는 걸 아는데, 입이 계속 움직였다. 남을 상처 주는 방법만큼 쉬운 게 없었다. 말이란 너무도 제멋대로에 쉽게 뱉어져서,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순간엔가 말릴 새도 없이 비수가 되어 날아간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상처 입은 저 얼굴을 보면 내 상처가 조금은 옅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참 이기적이고도 저급한 마음이 스스로를 추스르는 방식이 추악했다.
“…난 네가 아니야. 내게 위로받을 생각하지 마. 그럴 일은 내가 죽을 때까지 없을 테니까.”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네가 먼저 했잖아, 라는 핑계 속에서 내 입은 너무나 제멋대로였다. 네가 어떤 표정을 했는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등을 돌렸다. 여전히 내게서 등 돌린 랑을 향해 한 발자국 걸어갔다.
너는 내게 화풀이했고, 그래서 나도 네게 화풀이했다. 우리 둘 다 글러 먹었다.
“…비형랑이 여우를 죽였어요?”
“…….”
“산신, 호랑이도 죽였어요?”
“…….”
“랑은 나를 죽일 건가요?”
그제야 뒤도는 랑이 참 야속했다.
“왜… 죽였어요?”
오랜만에 보는 그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성제의 아들이며 네게 누명을 씌운 이들의 왕자이자, 산신의 손에 의해 죽어 가는 이들의 아들이요, 자식이요, 어버이가 되어야 하는 이니까.”
그의 말은 변명이라기엔 너무나 서글펐다. 듣는 내가 비참해질 정도로.
“…그렇구나.”
내가 내뱉은 짧은 말로 정리되었다.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하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여우는 결국은 남이고, 애초에 그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냥, 사회생활 해 본 적 없는 여우의 실수였다. 시대가 그러니 그럴 수 있는 거다.
산신은…. 거기까지 생각하기엔 지금, 내가 정신이 없었다. 그냥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여우는 죽었다. 비형랑은 지켜야 하는 것이 많은 신분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그럼 됐네. 정리됐다. 옛날 일이고, 어쨌든 다시 태어난 거라는 나는 기억 안 나고. 사는 데 문제없고. 그러니까, 다 된 거잖아.
내가 괜찮다잖아.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미쳤나 봐.
“지금 내가 운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랑.”
“…….”
“이건 그냥, 나도 몰라. 왜 우는지 몰라요. 근데 나는 괜찮거든요. 진짜로. 거짓말 아니고, 진짜.”
“…….”
“…그러니까 그런 얼굴은 하지 말아요. 뭐가 됐든 나는 사랑 받으면서 잘 컸고, 뭐가 됐든, 일단 다 된 거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우리.”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보면 난 그렇게 불행한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다. 괜찮아야만 한다. 안 그러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지금 여기서 괜찮지 않다고 해 버리면 지금까지의 내 삶을 모조리 부정하게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그러겠다고 마음먹어도, 항상 이런 식이지.
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라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나 결국 격해진 감정이 튀어나왔다.
“뭐가 문제인데요? 뭐가 됐든 당사자인 내가 됐다고 하잖아!”
“아가….”
“그럼 내가 용서한다고 말할게요. 그럼 된 거죠? 그러니까 이상한 죄악이니, 뭐니, 그런 소리는 그만하고….”
“…….”
“그냥 다 없던 일로 하면 안 돼요?”
원래대로 돌아가요, 우리. 찾아가는 내게 의뭉스럽고도 짓궂게 굴던 그때로 돌아가요. 이제 곤란한 질문도 안 할 테니까, 제발.
안 그러면 우린 마주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외면하고 화가 나는 사이가 돼야 하잖아요. 나를 그런 얼굴로만 볼 거잖아요.
난 그렇게 끝내 버려야 하는 관계가 익숙하지 않고, 그렇게 끝내야만 하는 관계가 싫어요. 그러니까.
“내 용서를 받아들여요. 그리고 다 없던 일로 해요.”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지 않니.”
“왜 못 해요? 왜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건데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손을 뻗어 랑의 팔을 붙잡았다. 시선은 위로 올리지 않았다. 지금은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보면 내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걸리는 게 많아서 계속 괜찮지 않다고 하는 걸까. 내가 뭐라고. 그 옛날의 내가 뭐라고.
왜 내가 그 옛날의 것들을 감내해야 하는 건데.
“…나랑 무슨 약속 했어요?”
“…….”
“말해요, 랑….”
“…겁에 질릴 필요도, 바닥을 길 필요도 없이, 너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삶.”
“…….”
그거, 나랑 처음 만난 날 한 말이잖아. 과거에 들었던 말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참해질 줄 몰랐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그 옛날 나일 뿐, 지금의 나는 아닌 건가. 그럼 지금의 난 대체 뭐야?
쥐고 있던 옷자락에서 손을 떼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지금껏 간신히 유지하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 랑을 믿지 말라는 소리 엄청 들었어요.”
“그래….”
“나는 안 믿는다고 말했는데, 사실 믿었어요.”
그래서구나. 지금 이 기분은 그래서였어. 전생이니, 뭐니 그게 나한테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이렇게 미친 것처럼 눈물만 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건, 이 서러움의 이름은 배신감이었다. 당신이 내게 어찌 이럴 수 있나, 하는 그런 뻔한 감정이었다.
“나한테 잘 해 준 것도, 친절하게 대한 것도. 배고프다 하면 챙겨 주고 앉혀서 얘기 나누고, 아프면 돌봐 주던 것도, 다…. 그냥, 나한테 했던 게 모두 내가 그 여우여서였어요?”
지금껏 내 것인 줄 알았던 애정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게 나를 무너트렸다. 아무것도 없는 지옥도의 삶에서 나는 내 유일한 보호자나 다름없던 그를 내 생각보다 더 좋아했다.
그래서 슬펐다. 그냥 그랬다. 여우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은 옛날이야기인 것처럼 내 이야기도 그냥 그런 거였다.
그에게 있어 ‘나’는 내가 아닌 전생의 그림자였을 뿐이었다. 그러면 나도 그를 이제 밀어내면 되나? 남이라고 선을 긋고 밀어 버리면 되는 건가?
그게 그렇게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거였나? 난 아닌데. 난 그런 거 못 하는데.
아,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안 되는 것을 가능케 하고,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는 방법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끌어모아 단번에 불 질러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사라지게 만드는 거다. 그렇게 하면 나도, 랑도 모든 게 쉬워질 것이다.
내 발밑에서 스멀거리며 흘러나오는 푸른 불을 랑이 제지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말했다.
“놔둬요.”
“아가….”
“놔두라고 했잖아!”
왜 그렇게 봐? 왜 랑이 그렇게 나를 봐요? 다 싫다고 하면서 이것도 싫으면 그럼 나는 어쩌라고.
짜증 나. 싫어. 그냥 다. 도망이나 가고 싶다.
왜 당신은 그렇게 제멋대로인데, 나는 그러면 안 돼? 왜, 왜, 왜!
서러운 마음이 너무 쌓여 더 이상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된 순서부터 차례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나는 그것을 굳이 닦지 않았다. 억지로 참지도 않았다. 이 감정이 다 흘러내려 사라지기를 바랐다.
“…다음에 볼 때는 웃으면서 봐요. 남의 일을 이야기한 것처럼.”
“…….”
“안녕. 랑.”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뒤돌았다. 쥬의 손을 붙잡아 무작정 달렸다.
여기서 나갈래. 나가서 생각할래.
그런 내 귓가로 이 공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에게 유린당한 삶이란 어찌나 환상적인지.”
붉은 하늘을 보면 토할 것 같았다. 나를 잡아먹을 듯이 내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수군거림이 시끄러웠다.
“남는 것은 무엇인가. 풍족한 증오요, 애틋한 설움이다.”
내게 말없이 끌려 오던 쥬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코앞에 빛무리를 뱉어 내는 게이트가 보였다.
나를 상처 주고 내게 상처받은 그는 서로의 상처에 대해 침묵했다.
“아이야, 울지 말아라. 너의 신은 네 우는 모습 원치 않으신다.”
숨이 찬다. 겨우 이 정도 뛰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이 희부옇다. 미치다 못해 눈도 멀었나 싶었다.
“아이야, 웃어라. 신께서 원하신다. 웃지 못하겠다면 가면을 쓰거라.”
게이트 앞에서 달리던 것을 멈췄다. 뒤돌아보고 싶으면서도 뒤돌고 싶지 않았다.
“신께 기도를 바치나, 그분은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아니하신다.”
랑이 제지시켰던 푸른 불을 다시 이끌어 냈다. 한번이 어렵지 그다음이 어려울까. 보기 싫으면 외면하면 된다.
잊고 싶으면 잊으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산다면 몇 번이든 반복할 것이다.
“나의 기도는 사랑이라 부르는 증오다. 나의 기도는 깨져 버린 것들의 증오다.”
아니야. 다시 다 잊는 건 싫어. 하지만 이딴 것들에 취해 빌빌거리는 것도 싫어. 그러니까 이건….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아주 살짝, 조금만 손대는 거였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거세시켜 버리면 나는,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설령 나의 것이라 할지라도.
“신이여 나의 증오를 받아 나를 축복하소서. 나의 신은 내가 원치 않는 축복만 내리시는구나.”
빛무리가 사라진 하늘 조각에 내가 비쳤다. 흐릿한 잔상에 가까웠지만 어두컴컴한 붉은 하늘을 담은 하늘 조각에 내가 비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나의 기도는 증오 서린 기도이니라.”
내 눈에 푸른 기가 돌았다. 그런 내 행동을 옆에서 가만 바라보던 쥬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광대의 웃음을 귀에 걸 것이니.”
정신이 조금 멍한 것 같았다. 눈을 깜박였다. 머리와 생각이 따로 노는 건가. 아니, 감정이 따로 노는 거지.
“나 홀로 가면을 썼구나. 그것은 비극을 숨긴 희극의 가면일 것이다.”
이제 괜찮아. 눈물이 멎었다. 나를 바라보는 쥬를 돌아보며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웃어 주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은 이들이 처음으로 제대로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웃었고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나의 웃음, 기도를 받으십시오.”
언제나 잘 웃던 그는 정작 내 웃음에는 웃어 주지 않았다. 그의 입이 열린다. 뭐라고 하려는 걸까.
“신이시여.”
“신이시여.”
비슷한 목소리가 섞여 든다.
“나는.”
“나는….”
쥬가 눈을 질끔 감았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나를 보며 일그러진 얼굴을 하였다.
“웃을 것입니다.”
“웃지 않을 겁니다.”
그의 주변으로 성스럽도록 빛나는 나비 떼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의 심장을 향하여 겨눠지는 종자의 총구를.”
“당신의 심장을 향하여 겨눠지는 종자의 총구를.”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에 보랏빛이 사라졌다. 완연한 하늘색 눈이 나를 보았다.
“받아들이소서.”
“감당하소서.”
쥬가 내 손을 붙잡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랬듯이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당신의 끝이 머지않았습니다.”
“당신의 시작이 머지않았습니다.”
입술이 떨어졌다. 올곧은 하늘색 눈이 나를 보았다.
“나의 신이여.”
그것은 누구를 향한 기도였을까.
***
“어….”
정신이 멍하다. 대문 앞에 서서 한동안 멍하니 나무의 결을 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부작용이 심하네. 기억을 지운 것도 아니고 감정 부분에 암시만 걸었을 뿐인데.
비틀거리며 걷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더라.
쥬가 집 앞으로 데리고 와 줬던 것 같기는 한데…. 모르겠다.
생각하는 거 귀찮아. 졸졸 쫓아오는 꼬마 도깨비들을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이 집이 원래 이렇게 컸던가. 오늘따라 너무 낯서네. 마당을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집에 있기 싫어.”
이것도 부작용인가. 느리게 눈을 끔벅이다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없는 벽을 향해 걸었다. 벽에 일렁이던 그림자가 나를 삼켰다.
“귀찮게 굴면 죽여 버릴 거야.”
내 말에 옆에서 일렁이던 것들이 뒤로 물러났다. 푸른 불이 피어올라 길 안내를 도왔다. 그것을 따라 걸었다.
잡아먹힐 것 같은 어둠이 오늘따라 포근해 보였다. 이 속에서 눈 감고 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빨리 나가자고 나를 재촉하는 꼬마 도깨비들의 손짓을 따라 걸었다. 익숙한 문이 보였다. 지금 새벽인데 벨 누르면 실례 아닐까?
아닌가. 눌러야 하나. 모르겠네. 손을 뻗어서 도어락을 열었다. 전에 이호연이 알려 줬던 번호를 눌렀다. 삐삑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게 더 무례한 건가?”
중얼거렸지만 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나는 현관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 꺼진 거실이 어두웠다.
이곳에 온 게 몇 번 되지 않지만, 매번 환했는데.
처음 보는 풍경에 급작스럽게 눈물이 났다. 미쳤나 보다. 나는 가볍게 생각하며 그것을 문질러 닦았다.
기껏 암시를 건 게 무색하게 왜 이런 일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모르니 다시 암시 걸기도 애매하고.
다시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내버려 두고 걸었다. 방문을 열었다.
익숙한 침실도 어두컴컴해서 나는 울었다. 웃음도 나왔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어떻게 하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로 갔다. 익숙한 하얀 머리칼이 보였다.
“…….”
호랑이한테 물리면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아.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이호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늦은 반응이 내 입 밖으로 나왔다. 이호연이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톱 끝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위치해 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떨어졌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나를 눈에 담음과 동시에 이호연의 몸이 굳었다.
“어, 아파….”
뺨이 따끔거려 손을 들어 뺨을 더듬어 보았다. 눈 바로 아래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 아파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류…?”
어둠 속에서도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보였다. 이호연이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 지금 실명할 뻔한 건가. 진짜 위험했네. 근데 왜 이렇게 남의 이야기 같지. 암시가 서툴렀나.
“류…. 류…. 왜 여기. 아니, 일단 치료부터….”
덜덜 떨리는 손이 내 얼굴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어깨를 잡았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했다. 놀랐나 봐.
나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
“괜찮아.”
괜찮아. 말을 반복하는 나를 보며 몸을 일으킨 이호연의 낯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곧바로 침대 옆 무드 등을 켰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내게 이호연이 물었다.
“류…. 기억, 건드렸어요?”
“아니.”
“그런데 왜….”
“나 옛날에도 이랬어?”
“…….”
이랬구나. 이렇게 이상했구나. 이제야 이호연이 어떻게 내가 기억을 지웠음을 확신했는지 알 것 같았다.
“걱정 마. 기억을 건든 건 아니야. 그냥 감정 조절이 안 돼서… 한번 해 본 건데 부작용인가 봐. 자꾸 눈물이 나.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참 이상하지. 이유 없는 눈물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잠들었다가 깨서 그런지 마주 닿은 맨살이 뜨근뜨근했다. 얼음이 그 온기에 녹듯 눈물은 또 방울방울 떨어졌다.
“자고 갈래요?”
“그래도 돼?”
“자고 가요. 응? 제발. 어디 가지 말고, 당분간 여기 있어요.”
불안해하는 그를 보며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를 침대에 눕힌 상태로 두루마기를 벗겨 낸 그는 이불을 끌고 와 내 몸 위로 덮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이호연이 떠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내 몸이 떨리고 있었다. 추운가? 아닌데.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기 시작한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당연하지. 너도 알아야 하는 일인걸.”
네가 그 이야기 속의 산신이라는데, 너도 알아야지, 이 일을. 그동안 이호연이 자신의 전직관에 대해 얼마나 궁금해했을지를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쥬를 만나 그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던 일. 신을 배반한 성자의 옛이야기들. 산신과 여우와 비형랑의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랑의 이야기를 할 때는 눈에서 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정말, 이제는 귀찮게까지 느껴지는 행태에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이호연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속상해요?”
“모르겠어. 근데 이제는 괜찮아.”
“울잖아요.”
“그러게. 나도 왜 우는지 모르겠어.”
너는 괜찮아? 하는 내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내가 이상한 거 맞네. 그런 내 속내를 꿰뚫기라도 한 듯 이호연이 곧바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류는 괜찮으면 안 돼요.”
“…왜?”
“괜찮지 않으니까요.”
“…그, 런가?”
어물거리는 내 대답에 이호연이 다시 나를 꽉 끌어안았다. 토닥거리는 손짓은 나를 잠재우는 것이 목표인지 조심스럽고도 다정하며, 슬펐다.
“한숨 자고 나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예요.”
“…응.”
이마에 짧게 키스해 주는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흐르는 눈물이 마지막이기를 바랐다. 안 그러면 내 행동에 대한 의미가 없어지니까.
***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은 이호연의 잠든 얼굴이었다. 그의 말 대로 한숨 자고 났더니 훨씬 상태가 괜찮아져 있었다.
“…안 우네.”
암시가 제대로 먹혔나 보다. 기억은 선명한데 그 순간의 내 감정은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을 보는 듯했다. 객관적인 사실을 보는 것처럼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기분, 딱 그 정도였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을 글자로 읽고 받아들이는 것 같은 기이함이었다. 공감하며 함께 울어 주더라도, 그게 내 이야기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암시의 부작용 같던 멍한 정신도 지금은 맑았다. 이호연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자주 쓰면 안 될 것 같아.”
어제의 격한 감정에 대한 기억은 선명한데 소름이 끼치도록 남의 이야기 같았다. 어제와 너무 다른 지금 상태에 대해 인지 부조화가 올 것 같았다.
너무 자주 쓰면 미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차분해진 머리가 문제 될 만한 점을 빠르게 짚었다. 이제야 좀 안 이상하네.
꼼지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내 위에 얹어진 팔을 보며 다시 몸에서 힘을 뺐다. 나 때문에 밤잠 설친 이호연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따끈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눈을 감고 생각했다.
랑의 죄악이 무엇인가에 대해 듣고 나니 모든 의구심이 풀렸다. 나와 이호연의 이상한 전직은 전생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젠 하다 하다 전생까지 나오는구나 싶었지만, 신도 있는데 뭐 어떤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과거 산신이었던 이호연과 그 산신의 비호 아래 자랐던 여우인 나. 우리는 그때의 영향을 받아 남들과는 다른 전직을 했다.
나는 내게 무언가 약속을 했다는 랑과. 이호연은 과거 죽음을 맞이한 산신이 혼은 보내고 기억과 한만을 남긴 상태로 만들어진 존재와.
굳이 따지면 이호연과 그의 전직관은 동일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니까 이쪽이 내 쪽보다 더 복잡하네.
아, 그래서 이호연의 전직관이 나에게 관대했던 거구나. 이제야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본인이 애지중지하던 여우라 그런 거였다. 정작 이호연은 왜 그렇게 싫어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건 이호연 본인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찾아가서 물어봐야 하나.”
랑과 여우의 약속까지 완벽하게 알아내는 것이 깔끔해서 좋을 것 같은데. 랑이 말한 것은 너무나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문제는 잔잔한 내 감성은 그냥 가자고 주장하지만, 이성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찾아가는 것은 역시 아니었다. 랑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나저나 그 귀신 언니가 임종의 딸이라고 했지. 그 언니가 그럼 내 전생을 아주 잘 안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다.
“…….”
감정의 거세는 잘한 것 같았다. 차분해진 머리는 하나하나를 깔끔하게 분리하고 정리했다. 슬며시 눈을 떠 보았다.
환해진 침실은 어젯밤 일이 꿈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꿈을 꾼 것 같아.”
암시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깨지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때까지 어제의 감정을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시간차 공격이 될 것인지 타격이 없을 것인지는 내게 달렸다.
지금으로선 아무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괜히 길드와 정부 측에서 정신계 마법사 하나 구하려고 그 노력을 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깼어?”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깜빡거리며 천천히 떠지는 눈을 보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내 행동에 잠시 멈칫거린 이호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깨자마자 잠긴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묻는 걸 들으니, 간밤에 내가 얼마나 민폐였는지 새삼 느껴졌다. 정말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사용 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어디 산골 깊숙한 곳에 가서 다 정리하고 나오든가.
“어제는 부작용 때문이었던 거지, 지금은 정말 괜찮아.”
“…….”
“그나저나 이렇게 일어나니까 기분 묘하다.”
말 돌리는 내 행동에 이호연은 아스라이 눈 부신 햇빛 같은 웃음을 지었다. 웃음으로 가려 봤자 그 아래 있는 슬픔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 말에 그는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게요. 아침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네가 해 주는 거면 다 좋아.”
“나도 좋아요.”
주어를 붙인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시선으로 빠진 주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에 작게 키득거리다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런데 나 정말 당분간 여기 있어? 이제 진짜 괜찮은데.”
“…가능하다면 남은 휴가 동안 여기 있으면 좋겠어요. 더 머무는 게 가능하면 그러면 좋겠고.”
“…….”
그건 나를 위해서야 너를 위해서야?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엄마는 허락하지만, 아빠는 울 거야.”
“…형한테 부탁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주세진이 만능 치트키이긴 하지. 이호연의 농담에 나는 웃었다. 자리에 다시 누워 이불과 함께 이호연을 끌어안았다.
조금 덥다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야. 이거 정말 만약인데 내가 또 기억을 지우거나 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를 끌어안고 있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어떤 의도를 갖고 묻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불안해하면서 티 안 내려 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날 끌어안으면서도 몸에 힘을 풀 생각 따위 없어 보이는 너에게 어디까지 선을 그어도 되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이호연은 말없이 나를 더 끌어안을 뿐이었다. 답하지 않는 두려움과 간절한 매달림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나는 붕 뜬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나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추가 되기를 바랐다. 멋대로 날아가는 풍선이 되도록 그 추를 끊어 줬으면 좋겠다. 아니, 현상 유지를 위해 나를 그냥 두기를 원했다.
나는… 뭘 바라는 걸까.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지우고 감정을 죽인 그 수많은 나날을 지내며 내 안에서 나 자신이 분리되어 버린 건지. 내가 낯설고, 내가 어려웠다.
그러니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내가 아니라 눈앞에 이호연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답이 없는 이의 하얀 머리카락을 헤집다가 눈을 감았다.
잠은 비겁하면서도 가장 이상적인 도피처였다.
내가 잠들고 다시 깨어나면 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랑이나 속삭여 주고, 태연한 낯으로 키스해 주면 좋겠어.
그러면 나도 네 장단에 맞춰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 테니까.
얽어진 손을 꼼지락거리다 선잠이 들고. 깨면은 빛바랜 거울 같은 네 눈을 보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을 나도 따라 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
부러 말하지 않은 것을 삼키며 나는 너를 꼭 끌어안았다. 네가 나를 아주 많이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