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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는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요? (19/34)

#휴가는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요?

이래서 사람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하는 건가 봐.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생각했다. 이제야 좀 휴학한 대학생 같은 기분이었다.

주세진은 미국에 갔다 온 나와 이호연, 강유진에게 일주일 휴가를 주었다. 잘 먹고 놀다 오라더라.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다행히도 주세진이 공항 통제를 해 주었기에 나는 곧바로 마중 나왔던 부모님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직자가 아닌 부모님과 그림자로 이동해도 되나 하는 걱정은 주소 위치만 제대로 안다면 만능 치트키인 오정인 덕분에 해결되었다.

미국에서 있었던 아카샤에 대한 일은 당연히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집 안에 콕 박혀 있던 나에게는 내 이야기임에도 먼 나라 이야기와 다를 게 없었다.

주세진도 이번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가능하면 집에만 있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말 안 해도 놀러 나갈 생각은 없었다.

평화로운 휴가 3일 차. 따뜻한 이불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린 나는 눈을 끔벅이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고민의 종류는 잉여스러운 지금의 모습과 달리 제법 중대한 고민이었다.

“…….”

나비. 이제는 쥬라는 답지 않게 깜찍한 이름을 갖게 된 그 애.

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결심이 선다면. 문제는 내가 결심이 섰는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고민 상담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나비와 테오그라젠스. 랑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내게 공감하며 함께 고민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상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죽었다 살아난 내 감은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고 있지만 나비는 존재 자체가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원망을 숨기지 못하는 눈을 하면서 좋다고 하는 것도 웃겼다. 그게 어딜 봐서 애정이 넘치는 눈이란 말인가. 그것은 애정보단 더 어둑하고 질척이며 적대적인 것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비교 대상이 옆에 있다 보니 쥬의 눈이 오롯한 애정이 아니라는 것이 티가 났다. 꽃신을 들고 나타난 것도 영 마음에 걸리고.

둘리면… 호잇이둘이면둘리였나, 그 닉네임을 쓰는 놈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와의 대화를 되짚어 보면 그 둘리가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사도는 전직관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사람처럼, 그러니까 그 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 있는 상태로 넘어왔다는 뜻이 되고, 그럼 쥬는….

걘 대체 뭐지? 사도라고 하기엔 조금 다르다. 연관 없이 자라다가 얽히게 됐다고 하기엔 그의 과거가 걸린다.

주교의 아들과 신의 첫 번째 종.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쥬가 다른 사도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천장을 보며 눈만 깜박이다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내 행동에 내 몸에 기대고 있던 꼬마 도깨비 중 몇몇 깨비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 괜찮아?”

아프다고 힝힝거리는 꼬마들을 끌어안아 주었다. 말랑말랑한 것을 품에 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너희는 랑의 죄악이 뭔지 알아?”

내 물음에 품에 안겨 있던 깨비들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것인지, 알지만 답하지 못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죄악과 내가 관련되어 있다면, 랑이 내게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대해 주는 이유도 미안함에서 비롯한 행동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페이즐리에게서 받은 단검은 강유진에게 넘겼으니 그 재질에 대한 결과물만 기다리면 된다. 노아 이스벨라가 말한 세계의 비밀 덕분에 푸른 불꽃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보면 차례대로 퍼즐이 맞춰지고 있는 것 같은데 속이 갑갑했다. 내가 걷는 길이 맞는 길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꼬마 도깨비 하나가 책상에 올려놨던 하늘 조각을 들고 와 내게 내밀었다.

“…….”

나는 그것을 작은 손에서 빼내어 다시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지금은, 아니, 아직은 랑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회피가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

펭귄의 허들링처럼 내게 달라붙는 꼬마 도깨비들의 행동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내 입꼬리는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내가 도망가도 세상의 시간은 흐르고, 나와 랑의 결말 또한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

“안녕.”

손안에 한가득한 검정 봉지를 흔들며 인사했다. 문을 열고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있던 이호연이 당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류? 갑자기 무슨 일로….”

“놀러 왔어. 나랑 술 마시자.”

“…네?”

술이라는 내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 안에만 있어서 그런지 전부 내린 앞머리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의문을 담아 도르륵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떨결에 내 손에 있던 검정 봉지를 받아 들고 들어오라며 뒤로 물러나면서도 얼굴에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오늘 엄마, 아빠 안 계시거든. 혼자 집에 있으면 우울할 것 같아서 놀러 왔어.”

“아….”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전직하고 나선 우울할 때 집에 이상한 게 보이더라고.”

“……?”

태연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호연이 다시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편안한 옷차림에 검정 봉지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상대하기 귀찮기도 해서 여기로 왔지.”

“…웃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떨떠름한 어조로 말하며 이호연이 내가 사 온 것들을 정리했다. 두 봉지에 담긴 내용물이 죄다 초록색 병인 걸 보며 이호연이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호연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에 술을 다 집어넣은 그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귀신 같은 것도 봐요?”

조금 전에 한 말이 신경 쓰였나 보다.

“귀신인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일렁거리기는 게 보여. 집이 옛날 집이라 그런가?”

지금 사는 집은 외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집으로 한옥을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지옥도 이전에야 평범한 아파트에 살았지만, 하늘 조각이 떨어지며 아파트 자체가 다 무너져 내렸기에 지금 사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사는 데 불편함은 없지만, 전직 이후에 우울하거나 하면 영 이상한 것이 보여 집터가 안 좋은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귀신이랑 도깨비를 다루는 쪽이라 그런 능력이 생긴 것 같아. 너는 그런 거 없어?”

“하나 있기는 해요. 그런데 저거 오늘 다 마실 건 아니죠?”

“강유진이 그랬어. 간 건강할 때 마시는 거라고.”

“못된 거 배우지 마요. 속 다 버리겠네.”

좀만 있으면 강유진이랑 어울려 놀지 말라고 잔소리하겠다. 작게 키득거리던 나는 소파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능력이 생겼는데?”

“류도 이미 많이 봤을걸요? 고양이한테 인기 많아지는 능력이요.”

아, 그거. 부럽던데….

“강아지한테는?”

“강아지는… 오히려 어색한 사이로 만드는 것 같던데.”

어색한 사이는 뭐람. 내외하나? 그는 의아해하는 내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하곤 내가 벗어 놓은 외투를 챙겨 들었다.

“낮술을 할 건 아니죠?”

“갑자기 술 먹자는 이유는 안 물어보네?”

“그냥, 그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고민 있을 때 술로 해결하는 건 나쁘다는 것만 기억해 두고요.”

“…….”

내가 고민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으려나. 옛날에 나랑 같이 술 먹은 적 있나.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 이호연은 가볍게 웃음 지었다.

“같이 술 마신 적은 없어요. 류는 나 상대도 안 해 줬잖아요.”

뼈 있는 말이었다.

“…미안. 그래도, 지금은 제일 먼저 네 생각 했는데.”

“…….”

아, 좋아한다. 살랑이는 꼬리를 보며 소파 위에 다리를 올려 웅크리고 앉았다.

“술 싫어해?”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요. 류는… 저번에 보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미국에서 먹었던 걸 말하는 듯했다. 별로 못 먹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쓴맛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 오늘 사 온 것들도 전부 과일 맛이고.

그때 그건 향만 달지 입 안에 넣으니 써서 안 먹었던 거였다. 내 옆에 앉아 안주로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는 이호연 위로 올라타 그에게 늘어져라 기대며 말했다.

“나, 자고 가도 돼?”

“…….”

내 등에 손을 올려 마주 잡아 주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재워 달라는 것에 별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다 깨면 내 위에서 헬롱, 하면서 몸을 흔들거리는 희뿌연 것을 보기 싫어서였다. 무서운 건 아닌데 보고 있으면 내가 살짝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 도깨비들이 그것들한테 인사해 주는 걸 보고 내가 미친 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혼자 있을 때 같은 지붕 아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이따 봐서요.”

재촉 어린 내 눈빛에 이호연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내 귀에는 이따 봐서 허락해 주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가 내게 져 줄 미래가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았다.

“안주는 같이 만들자.”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부엌에서 뭐 먹을까 대화하는 이 순간이 아스라이 들어오는 저 창의 햇살처럼 눈 부시고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근데, 사실 나 요리 못 해.”

프라이팬을 꺼내던 이호연이 내 말에 나를 돌아보았다. 내 손에는 달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요리의 종류가 아니라 세게 쥐면 깨질까? 였다.

이미 생각하는 것부터가 글러 먹었다.

요리는 영 적성에 안 맞기도 하고, 사실 해 본 적도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가정 시간에 한 잡채 만들기와 머핀 만들기? 심지어 머핀 만들기 할 때는 이미 다 계량된 재료를 썼다.

심지어 그게 고2 때니까, 한 4년 전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수능 내용도 가물가물한데 요리법이 기억 날 리가 없었다.

내 손에 있던 달걀을 가져가며 이호연이 말했다.

“요리 못하는 거 원래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옛날에…식자재를 찾아도 류가 그걸 제대로 조리해 먹는 걸 본 적이 없었거든요.”

“…….”

그걸 다 기억하는구나. 대단하긴 한데 왜 그런 쓸데없는 걸 기억하는 건가 싶었다. 떨떠름해 하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불 마법을 다룰 줄 알면서 왜 조리해서 안 먹나 싶었어요.”

“내가 너희 쪽으로 합류하기 전에 나름 요리를 해 보려고 했는데 지옥에서 올라온 요리 시리즈만 찍었거든. 간편식이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참 다행이었지.”

“아. 딱 한 번 류가 직접 요리한 거 본 적 있기는 해요.”

“어땠어?”

“요리는 색깔을 맞춰 만드는 게 아니에요.”

“…….”

별로였구나. 대충 어떤 결과물이었을지 예상이 갔다.

그래도 그 당시 빈약한 식단을 체험하며 나름의 장점이 생기기는 했다. 그전에는 조용히 까탈스러웠던 입맛이 굉장히 프리해졌다는 점이었다.

먹고 안 죽는 정도면 입 다물고 먹을 정도로. 입맛 까다로우면 살지 못하는 환경이었으니 당연한 변화이기는 했다.

“그래도 조리해야 하는 것만 아니면 나름 잘 먹고 다녔어.”

“합류하기 전까지는 혼자 다녔다고 들었는데, 음식 수급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응? 아냐 그거. 오히려 혼자 다닐 때가 나는 더 잘 챙겨 먹었는걸. 남들이랑 같이 다닐 때 오히려 못 먹었지.”

내 말에 이호연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 변화는 너무 짧아 순간적으로 잘못 봤나 싶었다.

“…그랬어요?”

“응.”

달걀을 까 그릇 안에서 숟가락으로 휘휘 젓는 이호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런 내 행동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그의 움직임은 매끄러웠다.

“그럼 그때 보통은 뭘 먹고 다녔어요?”

“삼각김밥이나 냉동식품, 아니면 통조림? 녹이고 굽기만 하면 되는 음식들은 생각보다 구하기 쉬웠어. 정 조리된 음식 먹고 싶으면 랑한테 가면 되는 거였고.”

“…밥도 줘요?”

“정확히는 거기 사는 귀신 언니가 차려 주는데, 맛있어.”

랑한테 배고프다고 했다가 12첩 임금님 수라상이 튀어나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심지어 맛있었다. 그 귀신 언니, 장금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랑은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네.

문득 든 생각에 눈을 깜박였다. 혼자 먹는 것이 뻘쭘해 랑에게 약과 하나라도 내밀면 그는 웃음 지으며 너 많이 먹어라 하고 다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

그래서 최대한 알아서 끼니를 때웠던 것 같다. 밥은 맛있고, 그곳은 편하고 안전하지만, 밥을 먹을 때면 나 혼자 넓은 상 앞에 앉는 것이 거북했으며 죄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등 따신 곳에서 맛난 밥 먹을 때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서 뭐 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숟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남들 고생할 때 나 혼자 편하게. 그건 숨이 막히는 사실이었다. 정성껏 차린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번, 내가 내 능력을 잘 다루지 못하고, 밖에서 음식 구하는 것에 요령 없던 시절에만 그곳에서 밥을 먹었다. 그 이후에는 굶어 죽는 거 아닌가 싶을 때만 가서 밥을 먹었다.

그런 내 행동에 대해 랑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배가 고프다 하면 상을 차려 오라고 하고, 이야기나 나누자 하는 핑계로 자신 앞에 앉혀 놓고 다과를 먹게 했다.

호랑이의 산에서 서바이벌을 하며 식자재를 직접 구해야 했던 이호연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대접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요리 잘하네.”

랑에 대한 생각을 하니 푸른 불꽃에 대한 것들도 떠올랐다. 애써 그것들을 잊으며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뚝딱 완성된 계란말이를 보았다.

옥수수 통조림을 까고 있던 이호연이 내 말에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자취도 오래 했고, 군대에서 취사병이기도 했거든요.”

“취사병이었어?”

“…그거 하면 포상으로 휴가 준다고 해서 했는데.”

“…….”

너, 휴가 모아 놨다가 못 쓰고 제대했잖아. 뚝 하고 끊긴 대화에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고, 이호연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요리는 하나씩 완성되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콘치즈를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내 입 안에 이호연이 콘치즈를 조금 넣어 주었다.

“맛있다.”

“또 뭐 만들어 줄까요?”

부엌에 늘어놓은 재료는 많았고 이호연은 요리를 잘했다. 이번에는 뭘 만들어 볼까, 고민하듯 재료를 살피는 그의 모습이 새로웠다.

나는 패기롭게 나도 해 보겠다며 계란을 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어…. 탄다….”

“…보고만 있지 말고 움직여야죠.”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어설프게 요리하는 나를 뒤에 바짝 서서 도와주는 그의 손짓은 능숙했고 나는 가만히 그의 손길 따라 손을 놀리다가도 간간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모양은 조금 이상하지만 맛은 좋은, 혹은 모양은 멀쩡한데 약간 맛이 요상한 음식들을 만들어 낸 뒤에야 나는 깔끔하게 요리를 포기했다.

전자는 중간에 이호연이 개입해 그나마 겉보기에 멀쩡한 음식이었고 후자는 이호연이 도와주다가 그가 안 보는 사이에 내가 더 손댄 요리였다. 역시 요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내가 만든 음식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접시에 있던 요리를 한입 먹었다.

차마 맛있다고는 못할 음식을 먹는 그의 모습에 결국 나도 소리 내어 웃었다.

“…….”

이런 평화로움이 좋으면서도 나는 가끔씩, 그때 나 혼자 맛난 밥 먹을 때처럼. 문득문득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회피하는 자신을 향한 질책이었다.

하하, 웃는 웃음소리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

과일 향이 강했다. 달달한 척하다가 쓴맛을 남기는 술을 꼴깍 삼키고 치즈가 가득 들어간 계란말이를 입 안에 넣었다.

안주를 많이 먹게 해서 배부르니 술을 못 먹게 하겠다는 고도의 수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식이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내가 만든 돈 주고는 안 사 먹을 음식들은 이호연이 죄다 먹어치워 버렸기에 내 입에 들어오는 것은 멀쩡하고 맛있는 것들밖에 없었다.

슬쩍 내가 만든 음식을 집으니 이호연이 곧바로 자신의 입으로 넣어 버렸다. 못 먹게 하는 걸 보니 내가 만든 게 별로 사람 먹을 게 못 되는 건가 싶었다.

자신이 만든 베이컨을 돌돌 만 감자를 내 입에 넣어 주고는 옆에 놔둔 물병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는 듯했다.

색깔은 완벽했는데. 간장 너무 넣었나?

약간의 아쉬움을 속에 담고 입 안에 들어온 음식을 씹었다. 입에 술잔보다 젓가락 들어오는 횟수가 더 많았다. 이게 아닌데….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이호연은 다정한 어조로 내 입에 음식을 열심히 날랐다.

“속 버리니까 안주도 먹어요.”

“…취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수단에 더 손이 가는 것 같아.”

맛있는 건 좋은데 이래서 오늘 취하기는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 말에 매콤한 골뱅이 무침을 내밀던 이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술 한 잔을 꼴깍 삼킨 나는 그에게 기대며 말했다.

“남한테 말하기 영 껄끄러운 것들이 있는데, 혼자 삭이기는 싫거든. 그렇다고 남한테 말하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취하면 더 원하는 쪽으로 알아서 할 것 같아서 술 마시자고 해 봤지.”

그래서 목적은 취하는 것이고, 지금 이 술자리는 목적을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손안에 쥐어진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가만 내려다보던 이호연이 내 머리 위로 자신의 머리를 툭 기대며 물었다.

“말하고 싶은 게 많아요?”

“…….”

말하고 싶다기보단 말할 것들이 많았다. 나비도 그렇고 랑도 그렇고. 혼자 삭이는 것이 아닌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하는 것들. 하지만 그것들을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면 거북함이 먼저 들었다.

특히 랑을 생각하며 드는 감정과 생각은 잘라내야만 해결되는 엉킨 털실처럼 내 속을 꼬이게 만들었다.

당신을 믿지 않아요, 라고 말은 하지만 정말 그런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람 간에 오고 가는 감정의 가짓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기대했나, 걱정했나, 좋은가, 싫은가, 원망하는가.

나에게 랑은 거대한 나무와 같았다.

수백, 수천 개의 가지로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나무. 그 가지 하나당 걸린 감정의 열매의 종류가 모두 달라서 그 아래 서성이는 나는 어느 열매가 내 열매인지 알지 못했다.

어떤 감정을 손에 쥐고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하는지 알기엔 내가 너무 어리고, 인간적이었다. 그렇기에 서투른 나의 선택은 회피였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이호연이 갑자기 잔에 술을 붓더니 연속으로 석 잔을 마셨다. 뜬금없는 자작에 갑자기 왜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다.

그런 내 모습에 이호연은 갑자기 마신 술이 썼는지 인상을 조금 찌푸리다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툭, 말을 내뱉었다.

“같이 취하면 더 말하기 쉬울 것 같아서요.”

“…….”

엉뚱한 배려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웃음이 났다.

우리는 안주 먹던 것을 멈추고 술로 배를 채웠다. 얼마나 마셨더라, 생각하면 모른다는 답만 나올 때쯤이었다.

은근슬쩍 테이블 밑에서 살그머니 나온 꼬마 도깨비들이 안주를 하나씩 훔쳐 가는 것이 보였다.

취했는지, 취하는 것이 목적이라 그런 것인지 우리 둘 다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 마주치면 귀여운 척하고 음식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맥없이 웃는 걸 보니 우리 둘 다 취한 것 같았다. 아닌가? 안 취했는지 고민하는 걸 보면 안 취한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 같고 귓속은 뜨끈뜨끈했다. 머릿속은 멀미하는 것과 비슷하기도 했다.

약간의 알딸딸한 정신으로 이호연을 보았다. 술잔을 입에 대고 있었는데 눈가와 볼이 발그레한 것이 이쪽도 좀 취한 것 같았다. 단내 나는 술이 입술을 적시다가 비틀거리며 입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살랑이는 꼬리를 낚아채 앞으로 끌고 와 만지작거리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너어는, 나한테 제일 서운했던 게 언제야?”

나는 취하면 며칠째 내 속을 꼬이게 하는 고민거리를 말할 줄 알았다. 랑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그 말로 설명 못 할 생각과 감정들을.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달리 내 입에서는 영 엉뚱한 질문들이 나왔다. 우리 한번 비밀을 말해 보자 해 놓고 너부터 말해 보라는 심보였다.

재촉의 의미로 손에 쥐여진 꼬리를 쭉쭉 잡아당겼다. 눈을 끔뻑이던 이호연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회색 눈을 덮는 눈꺼풀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과일 향 소주 특유의 약간 끈끈함이 묻어나는 입술이 달싹거리다 말을 흘렸다.

“…내 손을 뿌리쳤을 때.”

너무 많아서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많아서 언제인지 모르겠어!”

아니면 그 순간순간 모두가 전부 서운했다는 걸까. 이호연은 푸스스 웃었다. 노곤하게 풀린 얼굴이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울었어?”

“아니야…. 안 울었어요.”

“그러면…. 응.”

내 머릿속은 맑은 것 같았다. 되묻고 싶은 것도 또박또박 정리되었다. 그런데 나는 하던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 내 모습에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어 발그스레한 뺨을 꾹 찔렀다.

“내가 언제부터 좋았어?”

졸린 건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호연이 약간 초점이 흐릿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냥, 자꾸 눈이 가고, 남들은 이만큼 신경 안 쓰이고, 안 챙겼는데, 자꾸…. 그냥….”

“그냥?”

“…좋아해서, 다 좋은 것 같은데요.”

웃긴 건 둘 다 발음은 정확하다는 거였다. 살짝 어물거리는 것도 같았지만 내가 듣기에는 둘 다 정확했다.

나는 이때부터 그냥 입 다물고 자는 게 제일 좋은 상태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했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친 나는 내가 그래 놓고 꽤나 손이 아려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아파….”

졸다가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이호연이 곧바로 내 손을 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온기 서린 바람이 붉어진 손바닥을 식혔다. 그런 그의 정성스러운 모습을 보며 나는 물었다.

“나 좋아?”

뜬금없는 물음에 이호연은 놀라지도 않고 곧바로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너 좋아!”

“…정말?”

“응!”

발그스름한 눈매에 묘하게 반짝이는 회색 눈으로 나를 보며 정말이냐고 묻는 이호연을 보니 나는 내 감정을 증명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테이블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를 펴고 이호연 위로 올라탔다. 제 허벅지 위에 앉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눈만 깜박거렸다.

“나는, 너 좋아! 그리고 호랑이도 좋아해!”

“알라딘 봐서?”

맞아! 어릴 때 알라딘이 좋았어. 그런데 사실 나중에 다른 영화 더 좋아했는데….

방긋방긋 웃던 나는 얼마 안 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좋아하는 동물이 호랑이에서 다른 걸로 바뀐 걸 잊고 있었다. 나는 나빴어…. 축 처진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이호연에게 말했다.

“사실, 중간에 호랑이보다 드래곤이 좋아졌는데에…. 그래도 지금은 네가 좋으니까 다시 호랑이가 좋아!”

맞아. 다시 좋으니까 괜찮아! 자기 합리화와 정리가 한번에 끝났다. 사실 내가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뭐랬더라?

“…그럼 올리버 로스가 좋아요?”

“걔가 왜 나와?”

왜 말이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술에 취한 호랑이는 내 말이 서러웠던지 침울해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걔는 검은색이 아니야. 투슬리스는 더 작단 말이야!”

“투슬리스가 누군데요?”

“내가 좋아했던 드래곤! 초등학교 때 봤는데에, 그래서 마법사 했어.”

“…네.”

내가 뭐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호연이 왜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대화였다. 우리는 상대가 하는 말이 뭔 뜻인지도 모르면서, 본인이 지금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얀색이 좋아.”

“…그럼 나도 좋아?”

“응!”

“그럼….”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마가 툭, 하고 닿았다. 깜짝이야. 내 바로 앞에 있는 회색 눈이 참 예뻤다.

“키스해 주면 안 돼요?”

내 바로 앞에서 하얀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회색 눈과 어우러진 그 움직임은 안개 낀 새벽에 하얀 나비 같아 보였다.

그게 예뻐 보여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응응, 대답한 나는 손을 들어 하얀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런 내 행동에 이호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나를 끌어안았다. 마주 닿은 몸이 따뜻했다. 술에 섞인 단내가 누구에게서 나는 것인지 헷갈렸다.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키스가 끝난 건 이호연이 실수로 친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이 쏟아지며 내 발끝을 적셨기 때문이다.

도르륵 굴러가는 술병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나는 갑작스러운 차가움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과일 향 나는 소주에 흠뻑 젖은 안주가 보였다. 맛있게 먹은 감자 베이컨 돌돌…. 어쨌든 그거였다. 감자가 죽었다. 끄앙, 하고.

그것을 보던 나는 쌕쌕거리며 숨을 내쉬는 이호연에게 말했다.

“나는 고구마보다 감자가 좋아.”

“감자가 좋아요?”

“응! 그래서 옥수수가 불쌍해.”

나보다는 덜 취해 있던 것인지 이호연이 내 말에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열변을 토했다.

“감자랑 고구마랑 옥수수는 다 구황 작물인데 왜 자꾸 옥수수만 왕따시켜?”

“…취했어요?”

“안 취했어.”

취한 사람한테 취했냐고 물었을 때 취했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 취했다. 억울해진 나는 그에게 삐쭉이며 말했다.

“왜 취했냐고 해? 안 취했는데 취했냐고 물으면 안 취했는데 취했냐고 물어서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안 취해서 취했냐고 물으면 안 취했는데 취한 것 같잖아.”

“…그런가?”

“맞아.”

“그렇구나….”

이호연은 내 말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호랑이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의 몸에 등을 기대는 자세로 바꿔 앉았다.

내 앞에 있는 건 이호연의 잔이었다. 내 잔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 손을 뻗어 이호연의 잔을 내 앞으로 갖고 왔다. 잔 안에 술이 찰랑거렸다.

“그거 내 건데….”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이호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내가 호랑이 거를 뺏어 먹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거 내 거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고민하면서도 나는 충실히 안에 있던 술을 홀랑 마셔 버렸다.

이호연이 투정 부리듯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웠다.

“삐졌어? 삐졌어?”

“안 삐졌어요….”

거짓말.

그래서 바닥에 놓여 있던 다른 소주병을 들고 와 다시 그의 잔에 따랐다. 이번 거는 청포도 향이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입 안에 넣었고 삐쭉거리고 있는 이호연의 머리를 잡아, 내 앞으로 끌고 왔다. 고개를 들어 다시 입을 맞췄다.

내가 넘긴 술을 꼴깍 삼킨 이호연이 조금 흐른 술을 혀로 핥아먹었다. 혀가 되게, 빨갰다. 잘 익은 자두의 색처럼.

그는 아까보다 더 발그스레해진 얼굴로 다시 내 목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렸다. 커다란 강아지가 했으면 귀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는 고양이인데…. 몰라. 나는 손을 올려 하얀 머리칼을 잔뜩 헤집었다. 고양이 털 감촉이 좋았다.

“있잖아요…. 나, 속인 거 있는데에….”

“뭔데?”

술에 젖은 감자 돌돌 베이컨을 손으로 집었다가 에비, 하며 다시 내려놓았다. 복숭아 향 나는 투명한 액체가 손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나, 귀랑 꼬리이…. 그거…. 사실 진짜 아닌데….”

“진짠데, 그거.”

“아니야…. 그거 데코야…. 세게 잡아도 안 아파아….”

어라. 아닌데. 그거 진짜던데. 나는 몸을 틀어 앉아 하얀 머리 위에 쫑긋 서 있는 호랑이 귀를 잡았다. 쭉쭉 잡아당겼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다 뒤로 넘어가는 나를 이호연이 받쳐 주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말했다.

“이거 봐! 진짜자나.”

“그거 장식이에요. 진짜 아니야. 네가 귓속말할 때 호랑이 귀 쪽에 하는 게 귀여워서 말 안 했는데요….”

“왜 진짜가 아니야?”

“그러게요….”

왜 진짜가 아닐까. 진짜인데 진짜가 아니래. 나는 이호연의 뺨을 잡아 나를 보게 만들었다.

“그럼 나 좋아하는 것도 진짜 아니야?”

“그건 진짜 맞는데에….”

진짜? 진짜? 되묻는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됐지, 뭐. 나는 그의 얼굴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있자나….”

“네에….”

“있자나, 자나….”

“네, 네에…?”

“이건 진짜 중요한 질문인데, 사실 안 중요해서 안 물어봤지만 진짜 사실은 중요해서 물어보는 건데.”

비틀거리다 이호연의 어깨를 짚었다. 회색 눈이 슬그머니 감기는 게 보여 그의 귀를 꽉, 깨물어 주었다.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찔한 그가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왜 물어요?”

“…까먹었어.”

뭐더라. 보들거리는 하얀 머리칼에 뺨을 비비적거리다가 생각나서 다시 몸을 떼었다. 귓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이호연이 그런 내 행동에 다시 나를 보았다.

“왜에, 이름으로 안 불러? 류는 닉네임인데. 이름으로 불러 봐.”

내 요구에 그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잠기운을 떨쳐 내려는 건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다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귓가를 살짝 깨물었다.

“…연아.”

낮은 목소리가 나른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설렜다가도 내 이름은 연이 아니라 하연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땡, 땡이라고 말하며 호랑이 귀를 잡아당겼다.

“연아, 연아….”

“하연이라니까.”

“그치만… 이쪽이 더 좋은데….”

고집불통 호랑이.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자꾸만 연이라고 불렀다. 귓속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그를 떨어트리고 얼굴을 보았다.

곤히 잠든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품에서 내려와 옆에 앉았다. 아이 잘 잔다, 하고 중얼거리며 가슴팍을 토닥거렸다.

“…나도 네가 정말 좋아.”

끌어모아 안은 무릎에 뺨을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말랑거리는 뺨을 괜히 찌르며 괴롭히다가 툭, 하고 힘 빠진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해 보았다.

“네가 정말 정말 좋아서… 무서워.”

가끔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거든. 내가 도망가면 너는….

“…….”

목말라. 옆에 있던 청포도 향 나는 물을 마셨다. 와, 물병이 초록색이야. 아냐, 이거 물병 아니야. 맞아, 물이 아니라 술이지. 근데 왜 술은 술일까?

혼자 머릿속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이어졌다. 입에 들어오는 것들이 쓰고 달아서 계속 마셨다. 텅 비었다.

나는 술병, 물병? 아냐, 술병. 어쨌든 그것을 내려놓고 다시 무릎에 뺨을 기댔다.

그 자세로 잠깐 선잠이 들었다가 깼다. 나는 혼자 지레 놀라 옆에서 자고 있는 이호연에게 말했다.

“나 안 잤어!”

“…아.”

내 목소리에 깼는지 이호연이 얼떨떨한 모습으로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붉은 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졸음기 어린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안 잤어요?”

“응. 안 잤어.”

나는 당당해.

이호연이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머리를 긁적거린 그가 옆에 놔두었던 물병을 들어 그 안에 담겨 있던 물을 마셨다.

“…얼마나 마신 거지.”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듣다가 잔 두 개로 예술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사라졌던 내 잔이 뿅하고 나타났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작은 장난이었다.

잔 두 개를 거꾸로 뒤집어 쌓고 있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취했어요?”

너 발음 되게 또박또박하다. 나도 그런데. 아닌가? 아냐, 나도 그래.

근데, 나는 안 취했는데…. 아냐. 사실 취한 것 같아. 잠과 술로 정신없는 머리가 생각을 멈췄다. 쨍강, 소리를 내며 두 개로 분리된 소주잔 두 개를 보다 이호연에게 물었다.

“…들켜써?”

“…들켰어.”

이호연이 부들거리며 불쌍한 쿠션을 터트릴 것처럼 손안에 쥐었다. 왜 저러나 싶었다. 쿠션을 괴롭히는 나쁜 아이.

***

“…….”

돌겠네. 나는 멍하니 누워 생각했다. 침대는 폭신하고 이불에선 햇빛 냄새가 났다. 이 방 주인이 평소에 얼마나 깔끔하게 사는지 알 것 같았다.

끄앙, 소리를 내며 한참을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렸다.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침대가 너무 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어제 일은….

“모르겠다.”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호연의 침실 안에는 정작 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는 이 방 주인의 발에는 절대 맞지 않을 작은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나는 유난히 폭신한 아이보리색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고 방문을 열었다.

방문에 딱 달라붙어 빼꼼 얼굴만 내밀어 본 거실은 내 예상과 달리 깔끔했다. 누가 치웠는지 알 것 같아서 잠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살그머니 거실로 나왔다. 창을 타고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실 소파 위에서 담요 하나 안 덮고 자고 있는 이호연이 보였다.

제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 자는 그는 깊게 잠들었는지 내가 바로 옆에 설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씻고 잤는지 어제와 옷이 달랐다. 근데 얘는 이 겨울에 왜 반팔을 입고 자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리 집 안이라 해도 침실도 아니고 거실이면 추울 텐데.

“…원래 벗고 자나?”

가능성 있는 것이 저번 미국에서도 이호연은 윗옷을 벗고 있었다. 그때도 밑에는 잠옷인데 윗옷은 아니었다. 벗고 자면 뭔가 더 편한가?

살짝 올라간 윗옷 사이로 보이는 살결에서 눈을 뗐다. 참 유해한 호랑이였다.

침대로 가서 자면 좋을 텐데. 들어가서 자라고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내가 옮겨 주기로 했다. 힘든 것도 아니고, 못 할 건 없었다.

안아서 들어 올리기 위해 이호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어깨에 손이 닿음과 동시에 이호연이 눈을 떴다. 잠귀가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져 있었다.

“…어?”

어라, 하는 사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호연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얼떨결에 놀란 나도 내 손목을 붙잡은 이호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이좋게 서로를 붙든 우리는 순간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에게 위협적인 기세를 흘렸다.

“…….”

“…류?”

잠이 덜 깼는지 흐릿했던 초점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내 얼굴을 보다가 서로 얽혀 있는 손을 본 이호연이 서둘러 손에서 힘을 뺐다.

“…안녕. 잘 잤어?”

손을 뒤로 감추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슬쩍 본 손목에 벌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둘 다 비슷한 악력으로 서로의 손목을 잡은 거 같은데 나만 그랬다. 맷집 딸리는 마법사의 설움이었다.

“…….”

옛날에도 이런 적 있던 것 같은데. 예나 지금이나 잘 때 건드리면 깜짝 놀라는 것은 여전했다. 그때는 어버버하다가 사과하는 이호연한테 대꾸도 안 했는데 이제는 아침 인사를 했다.

여전한 것이 있지만 바뀐 것 또한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러 더 밝게 웃었다.

“더 자라고 침대에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잠 다 깼어요.”

그래도 침대에서 더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살짝 하얗게 질린 얼굴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손목이 그에게 보이지 않게 조심하며 이호연을 안아 들어 올렸다.

그런 내 행동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이호연이 내게 서둘러 말했다.

“정말 잠 다 깼어요!”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숙취 때문이에요.”

아, 현실적인 이유였다. 나는 그의 말에 다시 소파 위로 그를 내려 주었다.

힘든 건 아니었지만 체급 차이 때문에 드는 게 조금 애매하기는 했다. 다리가 너무 길었다.

다시 손을 뒤로 감추며 잽싸게 푸른 불을 불러와 자국을 없애 버렸다. 완벽 범죄였다.

“류는 숙취 없어요?”

“새내기는 그런 거 몰라요.”

22살이기는 했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일단 나는 파릇파릇한 게 죽어 가기는 하지만 어쨌든 1학년이었다. 휴학까지 했지만.

이호연은 숙취 때문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영 속이 안 좋아 보였다. 희게 질린 얼굴이 안쓰러웠다.

“강유진의 말이 사실인가 봐. 스물넷부터 한 살씩 먹어 갈수록 내 몸이 예전 같지가 않은 걸 느끼게 된다던데.”

하필 이호연은 딱 스물다섯이었다. 내 말에 이호연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 모습에 나는 웃었다가, 그런 날 보고 조금 삐진 것 같은 호랑이를 달래 주었다.

“그래도 넌 영원한 내 아기 흰사슴이야.”

“…그런 이상한 건 어디서 보고 따라 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아빠한테 한 말인데. 너는 내 아기 꽃사슴이라고.”

“두 분이 낭만적이시네요.”

“늦었어.”

내 말에 이호연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사실 나도 엄마한테 저 얘기를 들었을 때는 질색했다. 대체 어느 세기말 감성이냐고.

아빠는… 싫지 않아 보이더라.

“그나저나 진짜로 여기서 자고 갈 줄은 몰랐는데.”

내 말에 이호연의 몸이 굳었다. 사실 그에게 자고 가도 되냐고 물었지만, 적당히 놀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무 잘 잤다.

이호연이 아까보다 더 핼쑥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부모님께 외박 허락은 맡았어요?”

“…허락했을 것 같아?”

“…….”

“농담이야. 애초에 안 물어봤거든.”

그게 더 문제 있지 않냐는 듯한 이호연의 시선을 피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어차피 부모님은 내 외박을 모른다. 반쯤 일어난 자세였던 이호연이 바르게 앉고 나를 보았다.

“…밥 먹고 가요.”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저은 그의 얼굴은 해탈한 것 같았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어제 말했잖아. 우리 엄마 아빠, 여행 가셨어. 내일모레 와.”

내가 여행 티켓 끊어 드렸거든. 부모님은 걱정하시다가도 오랜만에 두 분이 데이트하라는 내 말에 내심 기분 좋았는지 집 잘 지키라 하고 떠나셨다.

물론 두 분의 그림자 속에 깨비들을 숨겨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말에 이호연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 가셨다고는 말 안 했는데요….”

앗, 내가 그랬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생글생글 웃는 낯의 나를 보며 그는 포기한 듯 한숨 내쉬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끝냈다.

부엌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가면 물었다.

“내일모레까지 여기서 재워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할 거지?”

“…류.”

“그럼 대신에 나랑 놀아 주는 건?”

“그건 돼요. 같이 술은 안 마실 거지만.”

“…술 마시자고 안 할 거야.”

냄비를 꺼내는 그를 보며 나는 삐쭉거렸다. 놀리기는. 본인도 같이 취했으면서.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내는 이호연을 보며 혼자 사는데 참 잘 먹고 사는구나 싶었다.

어제 요리할 때 보니까 웬만한 식재료는 모두 집에 구비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자취하게 된다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이호연이 쌀을 씻으며 내게 말했다.

“부모님 오실 때까지 인스턴트로 밥 때울 거면 놀러 와서 밥 먹고 가요.”

“와. 주세진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이호연의 집에 오기 전, 주세진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휴가 잘 보내고 있냐는 안부 차 인사였다. 부모님이 여행 가셨다는 말을 들은 주세진은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을 거면 길드에 나와서 밥 먹고 가라고 했다.

솔직히 혹하기는 했다. 음식이란 차리기도 귀찮고 치우기도 귀찮은 존재였다. 길드에 가면 남이 해 준 맛난 밥만 먹으면 되니 나쁠 게 없었다.

그런데 둘 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 보면 내 이미지가 어떤지 참 궁금해졌다. 내가 그렇게 안 챙겨 먹는 이미지는 아닌 것 같은데.

특히 강유진과 비교 해 보면 그래도 내가 더 잘 챙겨 먹지 않나? 컵라면 냠냠 먹는 강유진을 생각하며 이호연에게 고춧가루를 내밀었다.

“숙취는 무슨 느낌이야?”

“평생 모르고 살고 싶은 느낌이요.”

그런 것 같기는 하네. 사과 토끼 같은 예술적 능력이 필요한 것 빼고는 원래부터 요리를 잘하는 이호연은 뚝딱 아침상을 차렸다.

나는 그 옆에서 알짱거리다가 수저와 그릇 옮기기 정도만 했다. 심지어 그림자로 옮기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1학년 때 술 많이 마셨어?”

마주 보고 앉아 먹는 아침이 뭔가 어색해 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 보았다.

같이 밥을 먹은 적은 많지만, 가정식은 처음이었다. 어색함의 이유가 메뉴 선정의 문제가 아니라 장소 선정의 문제 같기는 했지만.

이른 아침에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한다는 것은 상당히 묘한 일이었다.

“빠질 수 있으면 빠졌죠. 그때는 술을 뭔 맛으로 마시나 싶었거든요.”

“성인 되기 전에는 안 마셨어?”

“…수학여행 가서 한 모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한 모금보다 더 마셨던 과거 있는 나는 입 다물고 아침을 먹었다. 대충 내 침묵의 의미를 알았는지 이호연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집에 가 봤자 할 것도 없고 어쩔까 고민하는 내게 이호연이 더 놀다 갈 거냐고 물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꼬리는 솔직했다.

힘없이 흔들거리는 하얀 털 뭉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물가물한 기억 사이로 저거 가짜라고 고백하던 이호연의 말이 생각나는 것 같기는 한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호연이 넘겨주는 새 칫솔을 받았다.

“옷은… 그냥 옷장에 있는 거 아무거나 꺼내 입어도 돼요.”

침실에 있는 욕실을 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말했다. 입고 온 옷이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마냥 편한 옷인 건 또 아니었다.

거실에 있는 욕실 쪽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방문을 닫았다.

“진짜 티 난다.”

입에 칫솔을 물며 옷장 안 옷을 살펴보았다. 어떤 게 이호연이 고른 거고 어떤 게 주세진이 고른 건지 보자마자 알 것 같았다.

깔끔하게는 입으나 편한 거 위주로 입는 이호연은 후드티나 맨투맨, 트레이닝 복을 골랐을 거고. 셔츠, 니트 종류는 누가 봐도 주세진의 취향이었다.

미국에서 입었던 옷들도 다 주세진이 골랐던 것 같은데. 인제 보니 옷장에 있는 옷이랑 그때 입은 옷이랑 스타일이 똑같았다. 한결같은 취향이었다.

대충 옷을 끄집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 뒤 머리를 감았다. 입고 왔던 옷은 아공간 반지 속으로 넣어 버리고 들고 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크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안 맞았다. 허벅지의 반을 가리는 티셔츠를 보다 바지를 보았다. 일단 욕실에서 입었다간 끝단이 다 젖을 것 같았다.

고민하다가 슬쩍 방문을 열어 거실을 내다보았다. 그새 다 씻었는지 이호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문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반바지 있어?”

“반바지요?”

“너무 길어서 안 맞아.”

의아한 얼굴을 하던 이호연이 그제야 키 차이를 생각해 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왔다. 옷장에 반바지가 있기는 한 듯한데, 여기 오면 안 되는데.

“어, 오는 건 안 돼.”

“?”

“나 바지 안 입었어. 위에만 입었어.”

내 말에 걸음을 멈춘 이호연이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버벅거리던 그가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서랍에 반바지가 있기는 한…. 잠깐, 잠깐만요!”

다급한 부름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이호연은 새빨개진 얼굴로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며 말을 잇지 못했다.

“…….”

보통, 서랍에는….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왜 이호연이 말을 잇지 못하는지 깨닫고 말았다. 이런.

이걸 어쩌나, 생각하며 그림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휘적거리는 손에 두루마기가 잡혀 나왔다. 이거나 걸칠까?

상의 자체가 크기는 했지만 원피스라 부르기엔 짧은 길이였다. 그래도 이걸 걸치면 대충 가릴 건 다 가려질 것 같았다.

까만 두루마기에 손을 집어넣고 거울 앞에 섰다.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앞섶과 옆선이 모두 트여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뛰어다닐 일도 없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고름을 묶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내 행동에 이호연은 잠시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종아리 부근에서 흔들거리는 긴 두루마기를 입은 것을 보고는 안심했다.

“놀랐어?”

“놀리지 마요.”

뾰로통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런 이호연의 반응에 키득거리며 작게 웃었다.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뭘 할까 하다가 이전에는 못 했던 이야기나 마저 하기로 했다.

별스러운 이야기는 없었다. 휴가라는, 전에는 없던 환경 아래에서 있기 때문인지 우리는 일상적인 것들을 대화의 주제로 내놨다.

신경 줄이 느슨해지고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는 그런 가벼운 이야기들. 오히려 그런 점이 별스럽다는 점에서 내 인생 참 다사다난하구나 싶었다.

우리가 미국에 가고 바로 다음 날에 수능 봤을 박상호의 근황이라든가, 어제 먹었던 것들 중 제일 맛있었던 것.

각자의 대학 1학년 생활이 어땠는지. 그리고 입에 올리기 조심스럽고도, 사실은 별거 아닌 지옥도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휴가는 즐거웠다. 그리고 옛것으로 남아 버린 이야기들은 조금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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