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장르가 달라 4권
#아카샤(ākāśa)의 전설
이게 뭔 난리람. 기다란 검은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도착한 바닷가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은 괴물이라는 명칭으로도 표현 불가능할 것 같은 미확인 생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일단, 너무 컸다. 내가 지금 신화의 시작을 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거대했다. 문제는 그 신화의 이름이 크툴루라는 점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아포칼립스의 끝.
하지만 마냥 낯선 것도 아니었다. 그게 더 문제였다.
“저게 왜 여기에….”
아카샤(ākāśa). 유일하게 이름이 붙은 하늘 조각. 그 안에 있던 것들이 바다에서 날뛰고 있었다. 아득한 괴물들. 세상에 기록으로만 남아야 할, 존재해서는 안 될 것들이.
어느 누가 보더라도 크라켄을 연상케 하는 괴물이 거대한 자신의 몸체를 드러내며 날뛰었다. 거대 오징어의 몸짓에 따라 물살이 해일처럼 갈라졌다.
그것을 상대하는 것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형한 올리버 로스였다. 다만 그 하나로는 크라켄을 상대하기 역부족했다.
크라켄과 비교해 보면 드래곤, 즉 올리버 로스는 드래곤 플x이트 아기 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시 봐도 미친 크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카샤의 괴물들 중 바다에 사는 것들만 이곳에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바닷가에 모인 전직자들 대부분이 모두 아카샤를 경험해 봤다는 것.
적어도 저것들이 뭔가를 하면 혼선이 일어날 확률이 현저히 적었다. 괴물의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몇 번을 경험해도 힘든 것이기는 하나, 사람은 생각 못 한 재앙 앞에선 의외로 침착해지는 면모가 있었다.
겪었던 이들은 제법 노련하게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경험 없는 자들은 자신의 옆 사람에 호흡에 맞춰 천천히 감각을 익혀 갔다.
그리고 경험 없는 자들 중 하나인 이호연은 한복 자락을 휘날리며 거대 수룡의 눈을 찢어 버리고 있었다. 마법 계열들이 모두 각자의 지팡이를 하늘로 높게 치켜들었다.
불, 전기, 그 외에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온갖 것들이 얽혀들어 이호연이 눈을 찢어 놓은 수룡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인위적 재앙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둠이 번진 하늘에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빛의 기둥이 깜박거렸다. 아군, 적군, 피아 가리지 않는 그 무차별적인 공격이 이들의 두려움을 엿보여 주는 것 같았다.
별로 좋지 않았다. 저렇게 초반에 힘을 빼는 것도, 침착을 가장한 다급한 손짓들도. 잘못하면 아군이 또 다른 나의 위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차분히 다른 이들의 싸움 형태를 관찰하였다. 바다의 물살을 가르고 나오는 괴물들의 종을 확인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재앙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직은. 아직은 별로 진행되지 않았다. 진정한 재앙은 시작되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맛보기.
“…….”
마법 계열들은 지팡이를 들었고 신체 계열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거나 장비를 걸쳤다. 서로가 서로를 몰라 조금은 조잡하나 제법 준비된 모습들이었다.
주최 측에서 한 무기 갖고 오지 말라는 말을 아무도 듣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는 장비로 풀 세팅까지 한 상태였다. 이런 말 하면 안 되긴 하지만 말 안 들어서 다행이었다.
수룡의 눈을 찢어발기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마법의 줄기를 피해 바람길을 타고 다시 바닷가로 돌아온 이호연의 팔을 잡았다. 곧바로 다시 튀어 나갈 듯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류!”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왜 아카샤의 괴물들이 여기서 날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준비한 이벤트처럼. 전직자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상황에 맞추어 저것들이 나타나는 것이 과연 인위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내 물음에 이호연은 나를 살피던 것을 멈추고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올리버 로스와 싸우고 나서 그를 바다에 던져 버리고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로스가 드래곤으로 변형하길래 뭔가 싶었더니….”
“아카샤의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이거구나.”
그 와중에 너, 올리버 로스를 바다에 던졌어? 그렇다면 올리버 로스는 살기 위해 변형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쫄깃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피 묻은 손을 털어 내는 그를 보며 생각하고 있는데 이호연이 나를 보며 물었다.
“저 괴물들이 아카샤의 보스 격 괴물인 거예요?”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것들은 보스가 아니야. 보스는 따로 있거든.”
“그럼 저건….”
“아카샤 안에서는 저것들이 일반 잡몹이야.”
이호연이 내 말에 경악과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악어와 용을 혼합한 것 같은 괴물 하나에 달라붙은 전직자만 해도 수십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다에는 여러 종의 괴물들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이쪽의 수가 부족해 놀고 있는 것들이 있을 정도로 많고, 다양했다.
나는 아직까지 의문인 것이 타국의 전직자들은 일반 잡몹에도 수십씩 달라붙어야 하는데, 아카샤의 보스 격 존재를 어떻게 없앴는지였다.
물론 사람이 살고 싶으면 뭘 못하겠냐마는…. 아카샤의 보스를 상대할 때, 나도 그때 처음으로 귀문을 열었었다. 열고 나서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사람에게 상대하라고 놔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 괴물이 내가 들어갔던 조각 안에만 있었다는 것이 인류의 축복이었다. 물론 그 대신으로 다른 보스 격의 괴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잠시 옛 기억을 더듬다 앞을 보았다. 조용해야 할 밤바다가 괴물의 아우성으로 요란스러웠다. 파도의 소리가 너무 거칠어 바다의 비명처럼 들렸다.
“하필 바다야….”
바다 위에 있는 것들이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바다 위에 그림자가 없는 만큼 내가 힘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약간의 제약이 많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나 혼자가 아닌 여럿이라는 점에서 그 부분이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람이 여럿이면 불안했다.
크라켄에게 붙들려 바다로 끌려가는 드래곤을 보다가 그림자 속에서 류를 끄집어냈다. 단단한 제등의 감촉을 느끼며 바다 쪽으로 걸었다.
그나마 낮이 아니라 밤인 것이 다행이었다. 밤은 귀신과 도깨비의 시간이며 삿된 것들이 노니는 곳이었다. 도깨비들의 왕이 기꺼워하는 시간.
밤의 하늘이 어두컴컴한 것이 아카샤 안과 똑같았다. 고즈넉한 어둠이 아닌 거친 어둠이었지만, 내게는 어느 쪽이든 익숙했다.
나를 발견한 전직자들이 내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마법 계열들의 눈이 뜨거웠으며 보호자 역할로 온 이들의 눈은 더 뜨거웠다. 가장 뜨거운 것은 손에 총을 쥐고 있는 로웰 콕스였다.
그 강렬한 시선에 집착은 범죄의 시작입니다,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모래 위로 제등의 끄트머리가 질질 끌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래가 갈라지는 소리는 파도 소리와도 비슷했다.
과장된 소문일까, 진실일까. 그도 아니면 축소된 이야기일까.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궁금함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확했다. 노골적이기까지 한 눈빛들을 무시했다.
그림자 줄기가 내 어깨에 두루마기를 걸쳐 주었다. 이호연의 그림자 속에 있던 꼬마 도깨비가 내 그림자 속으로 돌아왔다.
툭하면 저들끼리 소곤소곤. 기회가 있으면 건방 떠는 것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것들도 조용해지는 밤이었다. 내가 죽는 건 곤란하다 이거지.
그림자가 유순함을 흉내 내었다. 랑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내게 덤볐을 것들. 타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마땅해 그림자를 잘근거리며 짓밟았다.
제등에서 작은 도깨비불이 흘러나와 어둠에 덮인 바닷가에 살그머니 불을 피웠다. 앞길을 안내하는 그것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일단, 드래곤부터 건져야겠지?”
이호연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은근히 매정했다.
웃긴 건 올리버 로스가 끌려갈 때 아무도 마법 하나를 사용 안 해 줬다는 거였다. 어차피 저 정도로는 안 죽을 걸 아니, 안 도와주는 거겠지만.
새삼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하구나 싶었다.
“사람 많으면 유일하게 좋은 게 이거지.”
물론 혼자 싸우는 쪽을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 많으면 편리하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모래 사이로 류가 파고듦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짧은 감탄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발밑 그림자가 한데 모아 길게 늘어졌다. 그것은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두려움과 음산함, 어둠을 품고 있었다.
언제나 함께하던 그림자를 빼앗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등이 열리고 쏟아져 나온 푸른 불이 하늘을 덮을 것처럼 일렁거렸다. 하늘 위에 바다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푸름이었다.
그림자를 이끌고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내 모습은 이호연이 말했던 것처럼 바다에서 온 신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과 맞지 않게 잘 차려입었고, 밤 자락 같은 두루마기는 어깨에 걸쳐져 걸음 따라 흔들거렸다. 내 뒤를 따르는 어둠과 내 위에 푸름은 인간의 것이 아닌 힘처럼 보였다.
나는 사람 중에선 가장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류를 앞으로 뻗었다. 그림자가 바다 위를 유영하는 크라켄을 잡아챘다. 여러 가닥의 다리에 붙들린 드래곤을 잡아 뜯듯이 그것에게서 떨어트렸다.
올리버 로스를 대충 모래사장 위로 던져 놓고 크라켄을 하늘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로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재로 변한 거대 문어의 끝을 보며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이 느껴졌다.
불 사자를 옆에 끼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에드워드 로거스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실전으로 보여 줘 봐. 여기 불 마법사 많네.”
실전만큼 좋은 경험은 없지. 어이없어하는 에드워드 로거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다를 보았다.
“…….”
아카샤의 괴물들. 결코 인위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타이밍. 그리고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
누구 짓인지 알 것 같아서 기분이 저조했다. 참 속 모를 인간이었다. 내게서 이름을 받아간 그 남자는.
바다를 점령하는 것이 목적인 듯 꾸역꾸역 물 위로 기어 나오는 것들을 보며 나는 내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평소처럼 뛰어다니기에는 영 불편한 차림새였다.
그럼 정석대로 가야지. 오랜만에 직업에 맞춰 싸워 보기로 했다. 마법사의 장점은 원딜 가능이라는 거였다.
손안의 제등이 내 손짓을 따라 살랑거리고, 푸른 불이 움직였다. 하늘 위 불의 바다가 천천히 형체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창. 괴물들의 살점을 파고들어 살라 먹을 거대한 불의 창이 바다를 덮을 것처럼 타올랐다.
원래 사냥의 시작은 광역기로 하는 거다.
손짓으로 에드워드 로거스를 불렀다. 머뭇거리던 그가 거대한 불 사자와 함께 내 옆으로 왔다. 얌전한 불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런 불 사자를 떨떠름하게 보는 에디에게 말했다.
“너, 아카샤에 들어간 적 있어?”
“아니…. 나는 아카샤 공략 이후에 전직해서….”
그럼 위험한데. 아카샤의 괴물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기이한 능력에 있었다. 잡몹 하나하나가 웬만한 하늘 조각 보스들보다 강력했다.
그나마 내가 불태워 버린 크라켄은 상대하기 쉬운 편이었다. 나머지는 실전 연습용으로는 알맞지 않았다. 그럼 견학이나 하라고 해야겠네.
“지금 내가 하는 거 잘 봐 둬.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니까.”
내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수업이자 본보기라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그래도 보면 좋은 건 맞았다.
내 뒤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바다 괴물들 위에서 뛰놀고 있던 신체 계열 전직자들과 바다 근처에 서 있던 이들을 낚아챘다.
그들을 바다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는 내 행동에 애매하게 바다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이들이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눈치들 빨라서 참 좋은데, 말 걸지 말라는 내 눈치는 왜 못 받아먹었는지 모르겠다.
모래가 바다에 적셔지는 바로 앞에 서서 류를 모래에 콱 박았다. 등에 장식된 구슬들이 맞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등이 흔들거렸다.
몇몇 불과 빛을 다루는 마법 계열들이 만들어 놓은 작은 빛 덩어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두웠던 바닷가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낮 동안 볼 수 있는 하늘이 밤과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거대한 열기가 바다를 증발시킬 기세로 일렁거렸다. 손을 들었다. 가볍고도 성의 없는 손짓에 따라 바다를 뒤엎는 푸른 불의 창이 쏟아져 내렸다. 이 또한 재앙의 한 장면 같은 꼴이었다.
괴물의 몸체에 불의 창이 닿으면 그 부위에 살점이 녹아내렸다. 살을 뚫고 들어가면 내부에서부터 타올랐다. 스친다면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살라 먹었다.
몇몇 것들은 바닷속으로 도망갔으나 푸른 불은 바다에서 타오르는 기이한 불이었다. 바다의 물은 그것들을 막지 못했다.
“탄내….”
바다 위로 괴물의 사체들이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바닷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숫자였다. 멀리 떨어져서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하필 바다였다. 그게 문제였다.
아카샤의 바다 괴물 중 가장 까다로운 것은 따로 있었으며, 저 정도 숫자의 괴물들이 제한된 공간이 아닌 자유로운 바다에 풀어졌으면….
내가 오기 전부터 이 사태가 벌어졌으니 이미 도망갈 것들은 진작에 다 도망갔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강유진을 찾았다.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본 이들이 환호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곧이어 나와 똑같이 낯을 굳히기 시작했다.
자연재해와 다름없는 격의 차이에 순간적으로 상황을 잊었던 이들이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아카샤에 직접 뛰어든 전적이 있는 전직자들이 곧바로 자신들의 보호자를 찾아 재촉하는 것이 보였다.
강유진을 발견한 나도 그녀에게로 뛰어가 말했다.
“당장 이 근처 바다 전부를 뒤져요! 흩어진 것들을 찾아!”
아카샤와 지금의 다른 점. 그것은 환경이었다. 거대하기는 하나, 아카샤의 바다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바다는 아니었다.
생태계 파괴자들이, 천적 없는 바다로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 진정한 재앙의 시작이었다.
대부분이 정보 수집 스킬을 가진 보호자들이 서둘러 바닷가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그림자로 밀어내는 것으로 막았다.
“류? 바닷가 근처로 가야 더 빨리 작업할 수 있어요.”
“가까이 가면 죽어요.”
의아함을 내비치는 것은 강유진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보호자들도 나를 의구심을 담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을 서둘러 뛰어온 다른 전직자들이 챙겨 다시 뒤로 물러났다.
“비전투 계열들은 아카샤에 들어간 적이 없죠?”
“그렇…죠. 방해만 될 테니까.”
절대적 존재들 앞에선 계획 같은 것도 무의미했다. 그 계획을 세울 인물이 가장 쉽게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카샤에 대한 알려진 기록들은 전투 능력을 가진 전직자들의 기억과 기록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직접 들어가지 않고 전해 들은 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하나 말하기에는 너무나 광대하며 끝없는 괴물들의 본거지.
아카샤에는 수많은 괴물이 살았다. 괜히 이름이 아카샤(ākāśa)인 것이 아니었다. 하늘, 우주, 허공이라는 의미는 직관적인 의미일 뿐,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끝없는 괴물의 산지라는 뜻이었다.
또한 아카샤는 아카식(akashic)의 의미도 있었다. 세상에 기록된 모든 괴물과 재앙과 아포칼립스적인 것들의 총합체라는 뜻이었다.
그것들을 말로만 다 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너무 많고, 다양하며 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억지로 떠올리는 기억의 되새김은 정확하지도 않았다.
단편적인 것들만 알고도 아카샤를 질색하는 이들은 알지 못할, 죽으러 들어가는 곳이 아카샤였다. 자신들을 막는 나와 다른 전직자들을 이상하게 보는 그네들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카샤 안에서 전직자들이 왜 그렇게 많이 죽었는지 알아요? 괴물이 강하기만 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곳에는 그 어떠한 괴물이라도 평범한 괴물은 없으며 평범한 환경도 없어요.”
“…….”
“물론 그것들이 죽음의 많은 원인이 됐겠지만, 전부는 아니죠. 정상적인 사고를 버려요. 아카샤는 온갖 말도 안 되는 것들이 튀어나오는 지옥 같은 곳이니까. 모르면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명령에 가깝다 싶은 내 어투와 말에 몇몇은 불쾌한 낯을 했다. 그런 그들을 나는 무시했다.
그곳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곳이었다. 아직, 이 바닷가에서 벌어진 작은 재앙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뒤편에서 누군가가 토악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유진을 데리고 바닷가로부터 멀어졌다. 내 옆으로 온 이호연은 전직자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낯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나를 붙잡는 손이 간절했다. 희게 질린 낯으로 목 졸린 목소리를 내는 그를 보는 내가 무슨 얼굴이었는지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류…. 대체 혼자서 어떻게 해결했던 거예요?”
“…그러게. 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내가 참 대단하게 느껴지기는 하네.”
물론 나도 아카샤를 공략하는 과정만 몇 달이 걸렸고, 몇 번이나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나는 죽으러 그곳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겁도 없지.
지금 상황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모두를 긴장시킨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아카샤의 괴물들이 바다에서만 생존하는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아카샤는, 바다와 산과 들, 그리고 하늘과 초원, 사막, 바위 지대 등 온갖 환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환경에 맞는 온갖 것들이 득실거렸다.
바다에 있는 저것들만 해도 인류가 멸망할 재앙인 것을 생각해 보면 남들 수십, 수백 명 들어갈 때 혼자 그것을 공략한 나는 미친 것 같기는 했다.
“비위 좋아?”
“…네?”
“지금부터는 비위 나쁘면 더 힘들어질 거야. 웬만하면 너도 앞으로 나서지 마. 근접 계열이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타국의 신체 계열들은 뒤로, 마법 계열들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온갖 형형색색 화려한 지팡이들이 바다를 향해 내밀어졌다.
“강유진 씨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최대한 빨리 도망간 것들 위치 좀 찾아 주세요.”
“…빨리 못 찾으면 어떻게 되나요?”
“…아카샤의 괴물들이 가장 짜증 나는 이유는요.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을 가요. 그리고 새끼치기를 하죠.”
“…….”
“번식력이 토끼나 바퀴벌레보다 빨라요.”
천적 없는 지구의 바다면 그 속도는 더 빠를 것이다. 심지어 세포 분열 하는 것들도 있었다. 바글거리는 그것들이 흩어지고 번식하기를 반복하게 된다면 이 땅에 안전한 바다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건 멸망으로 가는 한 걸음이었다.
“후….”
아까 술 안 마시기를 잘했다. 술 마시고 봤으면 바로 다 게워 냈을 것이다. 귓가로 찌익거리는 살점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됐다.
침을 꼴깍 삼키고 바다를 보았다. 몸체의 절반이 넘게 타 있는 수많은 사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살점이 찢어지고 살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손 같은 것이 괴물의 살점을 쥐어뜯었다. 그것은 죽지도 살지도 않은 것들의 배고파 움직이는 갈망의 몸부림이었다.
“나왔다…. 바다 좀비.”
그것은 바닷물에 퉁퉁 불었다가 쪼그라들고 남은 껍데기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외양이었다. 색은 갈색이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고 이끼가 껴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삐걱거리는 것들이 저들보다 먼저 죽은 괴물들의 사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쪼그라들었던 몸이 다시 불어나기 시작했다. 팽창된 몸이 기이했다.
“저게… 대체 뭐야….”
“…기생충이라고 해야 하나.”
강유진이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뒤로 더 물리면서 저것들을 대충 소개해 주었다.
바다 괴물들의 사체에서 태어나기에, 예전에 한번 사체를 다 태워 버려 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저것들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유일한 가설은 사체에도 숨어 있고 물속에서도 숨어 있을 거라는 정도였다.
또한 오히려 잡아먹을 사체가 없으면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운 것들이었다. 비위는 상하나, 저것들을 상대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사체를 태우지 않는 거였다.
먹을 때는 가만히 있으니까.
“광역기 한 번만 더 쏴 주면 안 돼요?”
“안 돼요.”
새파랗게 질린 강유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저것들은 그렇게 사냥하면 안 되는 종이었다. 신체 계열들이 멀리 있는 이유가 있었다.
괴물에게는 각자 알맞은 사냥법이 존재했다. 물론 나 혼자였다면 나 하나만 챙기면 되니 아무렇게나 싸워도 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절하다 싶을 정도로, 바다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게 불리한 전장이었다.
“야, 저거 뭐야….”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뛰어나온 에드워드 로거스가 내 팔을 붙잡아 흔들며 물어보았다. 아카샤에 대해 일부만 아는 이들이 흔히들 보이는 반응 중 하나였다.
물론 저거 말고도 온갖 것들이 있지만, ‘바다’ 하면 생각나는 최악은 저 바다 좀비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 달래기에는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바짝 굳은 에드워드의 어깨를 잡아 돌려 나를 보게 만들었다.
“잘 들어. 저것들을 상대해야 하는 건 마법사야. 광역기는 안 돼. 무조건 마법 한 번에 머리 하나야. 불의 형태는 화살 모양 혹은 총알. 머리 한가운데를 맞혀. 중요한 건 옆에 있는 것들이 위험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거야.”
시범을 보여 주기 위해 푸른 불을 얇게 빚어 가느다란 화살을 만들었다. 불의 화살이 괴물의 사체를 뜯어먹던 것의 머리 하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내 뒤편에 서 있던 마법 계열들이 모두 각자의 능력을 이용한 화살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유경험자들답게 실수는 없었다. 하지만 몇몇 유독 낯을 굳히고 있는 마법 계열들이 보였다. 에드워드 로거스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아카샤 이후 전직을 한 전직자들 같았다. 자신들의 옆에서 바다 좀비를 하나씩 사냥하는 모습을 보며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었다. 불안한데.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슬쩍 뒤를 돌아 바다 위 상황을 살펴보았다. 괴물의 사체가 많은 만큼 제법 시간을 끌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좀비들 숫자도 많았다.
하지 말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로거스가 옆에서 작은 불화살을 만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반드시 머리 정중앙에 맞히라고 설명해 주었다.
“저것들은 시야는 좁아. 그러니까 옆에 있는 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
아, 이런. 뒤에서 어떤 마법 계열 남자 하나가 다른 남자의 멱살을 잡는 것이 보였다. 갉작거리며 좀비가 사체를 먹는 소리 외에는 조용하던 이곳에 울린 소음이었다.
나는 곧바로 로거스를 뒤로 밀며 앞을 보았다. 소리가 멎었다. 사체를 먹던 것들이 우리를 돌아보고 있었다.
저것들이 가장 골 아픈 이유는 내 옆에 있는 것이 공격당했다는 것을 인지하면 단체로 덤빈다는 거였다.
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등에서 쏟아져 나온 푸른 불이 바다와 우리 사이에 거대한 불의 장벽을 만들어 냈다.
내 발밑에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물에 젖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저 좀비들은 불에 잘 타지도 않았다.
물리면 좀비가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물린 자리가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그것을 해결해 줄 치료 계열 하나가 없었다.
“앞으로 나가지 마.”
불의 장벽 너머에서 참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으로 달려들고 있다는 것이 땅의 울림으로 느껴졌다.
뒤에 있던 마법 계열들이 내 불의 장벽에 자신들의 능력을 섞었다. 푸른 불에 언뜻언뜻 붉음이 내비쳤고, 번개가 흘렀다.
빛나는 구가 장벽 위로 나열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한도만큼 작은 마법 화살들을 만드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맞히지 않으면 죽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이호연에게 말했다.
“바타르 좀 찾아서 데리고 와 줘.”
눈 좋은 사람이 필요했다. 내 말에 곧바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그의 한복 자락을 바라보다 앞을 보았다.
타지 않는 것들이 몰려들어 불의 장벽 앞에 모이기 시작하면 저들끼리 얽히고설키게 된다. 자아 없는 것들은 우리를 뜯어 먹고 싶어 제 아래에 뭐가 있든 밟고 올라선다.
짓밟히고 떠밀린 맨 앞의 좀비는 잘 타지 않는 몸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불에 몸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 속도는 느리고 그 자리를 대신 할 것들은 많았다.
그렇게 완성된 좀비 뭉치는 불의 장벽 위로 그 모습을 빼꼼히 드러낸다. 나는 불의 장벽을 더 높였다.
저것들을 없애려면 어차피 머리를 쏴 맞혀야 했다. 하지만 저렇게 불로 막아 놓으면 볼 수가 없으니 맞힐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벽을 없애는 것도 안 된다. 자꾸만 차라리 혼자였다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숨을 깊게 내쉬며 랑에게 배웠던 것을 다시 시도해 보았다. 성공한 것은 두 번. 그나마도 그중 한 번은 랑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한 번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바다 좀비들을 막아선 불의 장벽이 점점 옅어진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당황하는 소리를 냈지만 나는 무시했다. 목구멍이 옥죄는 것 같았다. 원과 세모와 네모. 각기 다른 도형들을 한 번에 그려 내는 것 같은 기분.
장벽 너머에 있는 좀비들이 언뜻 푸른빛이 도는 것 같은 열기의 벽을 두들기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들이 경악한다. 형체는 분명하나 그 색을 옅게 만든 불의 장벽이 완성되었다.
나는 꽥 하고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어려운 것을 해냈다는 뿌듯함보다 피로감이 먼저 몰려들었다. 옅은 근육통이 몸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불투명한 벽 위에 잔잔히 흐르는 붉은 불과, 전기들. 몇몇 사람들이 나를 따라 시도해 보려고 했는지 그것들이 일렁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너, 사람 맞지?”
“이상한 거 묻지 말고 머리나 맞혀. 지금 토할 것 같아.”
역시 이 활용법은 적성에 안 맞았다. 나는 류를 모래사장에 꽂아 몸을 지탱했다. 내 발밑에 그림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길게 몸을 뺐다.
검은 것이 스멀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푸른 장벽 아래서 일렁이다 툭, 툭 튀어나와 좀비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림자 줄기는 하나에서, 둘, 다섯, 열셋,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나 그 구역을 새카맣게 칠했다.
흐물거리며 사라지는 그림자에서 떨어진 좀비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마법 계열들이 좀비의 머리를 꿰뚫는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푸른 불의 장벽을 옅게 만드는 것을 유지하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혼자였으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이 상황에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한 점이었다.
혼자였으면 내 몸 하나 챙기면 그만이니 오히려 불투명한 장벽 만들기 같은 헛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어떻게. 이 많은 사람 내버려 두고 혼자 날뛸 수도 없잖아. 그랬다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것이다.
비전투 계열인 보호자들은 쓸려나갔을 거고, 마법 계열들은 좀비 피하느라 마법 하나 날리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신체 계열들은 살이 부패하는 감각을 무시하며 좀비들의 머리를 터트렸어야 할 것이다.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기로 했다면 편한 것만 추구하겠다는 심성도 버려야 한다는 거였다.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상황이 흘러가진 않는다고 해도.
내가 잘 못 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메꿔 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까. 부족한 점을 메꾸고 살아가는 것이 싫다면 나는 평생 혼자가 되는 거였다.
나는 그게 참 싫었다.
“류!”
생각을 다 잇기 전에 이호연이 사람들 틈에서 찾아낸 바타르를 끌고 내 앞으로 뛰어왔다. 그런데 바타르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상태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 공포.
지나간 과거의 것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서러움이었다.
제대로 숨도 못 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낯을 굳혔다.
몽골은, 아카샤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전직자들을 잃었다. 생존자는 그 안에서 괴물에게 사냥당하는 이들을 보았을 것이다.
나의 친구, 혹은 가족, 그도 아니면 동료였을 존재들의 죽음. 그리고 바타르는 바로 그 생존자였다. 생존자란 살아서도 계속해 생존해야 하는 자들이었다.
나는 앞을 보았다. 제법 많은 수를 처치하기는 했으나 장벽을 없앨 만큼은 아니었다. 신체 계열들이 준비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 좀비들을 다 처치하고 나면 진정한 바다의 골칫거리가 튀어나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선 눈이 좋은 사람이 필요했다.
바다에 피가 번질지, 우리가 서 있는 바닷가에 피가 번질지 결정될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아픔에 허덕이는 상대를 마냥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그런 사실에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나는 그를 불렀다.
“바타르, 바타르!”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그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과 멍한 그의 눈은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를 보여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아니면 내가 그에게 암시를 걸어 생각을 비워도 알아서 움직이게 만들어 주거나,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푸른 불을 열기로만 존재하게 조절하면서 암시를 거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그 정도로 뛰어난 컨트롤 능력이 없었다.
또한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며 어찌 보면 기만이었다. 지금 당장을 보고 행동하기엔 능력도 안 될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부터가 글러 먹었는데 시도도 해 보지 못한 것을 성공할 리가 없었다.
바타르 스스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호연이 바타르의 등을 두들기는 것이 보였다. 컥컥거리는 것이 저러다 기절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기절하지 않았다.
미약한 숨소리를 내면서, 흔들리는 눈을 하면서도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 나름의 발버둥이었다.
“…….”
좀비들이 가득한 바다가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둥실거리며 떠 있던 사체들이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에디.”
내 옆에서 불 화살을 만들던 에드워드 로거스가 내 부름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런 그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잘 들어. 나는 이제 저 장벽을 없앨 거야.”
“뭐? 잠깐, 지금 저걸 없애면―.”
“그리고 이제부터 네가 장벽을 만들 거야.”
나는 좀비 말고 그 뒤에 나타날 걸 상대해야 하거든. 내 말에 에드워드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미쳤어? 난 저런 거 못 해! 여기서 불을 저렇게 다룰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고!”
“알아. 너한테 저런 식으로 장벽을 만들라는 것도 아니야. 좀비들이 넘어오지 않으면서, 다른 마법 계열들이 화살로 쏴 맞혀 버리기 좋은 방식으로 만들라는 거지.”
물론 지금 만든 장벽보다는 머리 맞히기가 힘들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감옥의 창살 형태로 벽을 만들어.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빈 곳으로 머리를 맞힐 거야.”
“말이야 쉽지,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고!”
“…….”
“…난 못 해.”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두려워하는 꼬마였다. 실패보다는 비난이 두려운 꼬마. 차라리 유명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 많은 가능성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나는 달래는 법을 모르고, 이런 상황에 용기를 주는 마법의 말 같은 것도, 승리의 말 같은 것도 할 성격이 못 됐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기에 알맞은 사람이 아니었다.
랑처럼 느긋하게 설명하고 다독이는 것도 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주저앉은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가는 건 할 줄 알았다.
손을 뻗었다.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막아 봐.”
에드워드의 시선이 내 손을 가리키는 쪽으로 움직였다. 해안가의 시작과, 끝. 사실상 바닷물이 들어오는 부분은 그냥 다 막으라는 소리였다.
“미쳤어?!”
“괜찮아.”
“쉽게 말하지 마! 애초에 나는 그 정도로 많은 불을 못 만들어 낸다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다 슬며시 잡고 있던 제등에서 손을 떼었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가 움찔거렸다가 장벽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며 안도했다.
나는 그런 에드워드 로거스의 뺨을 잡아 내 눈을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불은 내가 만들 거야. 넌 내가 만들어 내는 불을 통제해서 가져다 써. 전에 봤지? 내가 평범한 불도 만들어 내는 거.”
“잠깐만…. 나 남의 불을 통제하는 건 아직….”
뭘 말하든 싫다 하는 어린애는 이미 도전하는 것에 질려 버린 기색이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옆에 서 있는 불 사자의 갈기는 자유롭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건 그의 가능성이자 재능이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여기 있는 사람 중 나를 제외하고 통제력이 가장 높은 건 너야.”
에드워드 로거스에겐 나름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는 하나, 그는 불 사자를 다루는 덕분에 남들보다 통제력 자체가 높았다. 불 사자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통제하며 명령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모르는 이들이 쉽게 말하고 낮잡아 보았을 뿐이다.
지금 여기서 내가 알려 준 방식대로 남의 불 뺏기를 시도해 볼 만한 사람은 에드워드 로거스뿐이었다. 난 그 점을 지적했다.
“어차피 너 말고 할 수 있는 사람 없어.”
“…….”
쌕쌕 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망치면 어때. 네가 못 해도 다시 내가 하면 되니까 그냥 대충해. 네가 실패한다고 어떻게 안 되니까.”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대충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 말이란 건,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망쳐도 뒷수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 말이다. 나는 누군가 내게 그리 말해 줄 거라 결코 기대 못 할 말이었다.
에드워드가 내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의 뺨을 잡았던 손을 물렸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 끝에 불을 휘감았다.
“마술사 같다.”
“조용히 해.”
여전히 긴장감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것 같기는 했지만, 어색하게나마 웃을 정도는 된 것 같았다. 나는 제등을 잡지 않은 상태로 불을 만들어 냈다.
푸른 불이 아닌 불을 이렇게 불러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나도 헷갈릴 정도였다. 푸른 불이 아닌 만큼 저 좀비들한테 효과는 더 없겠지만, 다른 마법 계열들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내 손에서 피어오른 붉은 것들이 푸른 불의 장벽을 따라 움직였다. 좀비의 모습을, 바다의 모습을 가리는 거대한 불길은 위험스럽고도 성스럽게 보였다.
푸름이 붉음과 섞이고 붉음에 물들어 가는 과정은 낮과 밤이, 혹은 밤과 낮이 바뀌는 모습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저무는 빛깔이었다.
“통제해.”
내 말에 에드워드 로거스가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갔다. 그의 불 사자가 천천히 바닷가를 향해 걸어갔다.
신사용 지팡이의 끝과 다홍색 눈동자가 바다로 향했다.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소리에 나는 실패했나, 싶었지만 곧이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작 불 사자를 하나 갖고 있다고 영국의 대표가 된 거라면 실망했을 것이다.
주인의 말을 더럽게 안 듣는 거로 유명한 불 사자가 해변을 가린 불과 하나가 되어 뛰어다녔다. 내가 만든 불의 통제권이 그에게 넘어간 것이 느껴졌다.
에드워드 로거스의 최대 장점은 불 사자와 통제력. 그의 문제점은 불 사자와 본인이 쓰는 불을 따로 통제하려 들었다는 점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지금처럼 불 사자를 불에 섞어 사용하면 통제해야 되는 것은 하나가 된다. 물론 크기가 커진 만큼 다루기 힘들어지지만 그간 헛짓거리한 세월 덕분에 그의 통제력은 높아졌다.
장벽은 불이며 그 불은 곧 그의 사자였다.
“됐다.”
떨리는 목소리에 옆을 보았다. 울어? 하고 놀리려다 이번만큼은 놔두기로 했다. 사자의 갈기가 불의 장벽을 오가며 일렁거렸다.
천천히 그것이 모양을 잡았다. 일렁이는 불길 사이사이로 드러난 구멍으로 좀비들의 머리가 보였다.
내가 만든 장벽보다는 못하지만, 충분히 머리를 맞히기 쉬운 구조였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며 푸른 불의 장벽을 완전히 거두었다.
“힘들면 도와달라고 외쳐.”
“그럴 일 없어.”
허세 부리기는. 나는 땀에 젖은 그의 머리를 헤집어 주고 이호연과 바타르에게로 갔다. 바타르는 아까보다 진정된 것 같지만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류, 이다음이 또 있는 거예요?”
이호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샤의 정보는 공략하고 나온 생존자들의 기억이 바탕이다. 그리고 나는 아카샤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물론 타국에 알려진 아카샤의 정보를 접하기는 했겠지만 세세하게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나는 아카샤에 대해 관심이 없어 옛이야기 수준으로만 알고 있을 이호연에게 대강 설명해 주었다.
“아카샤에는 바다가 총 일곱 개야. 괴물들의 패턴은 일곱 개 전부 똑같지. 그리고 각 바다마다 중간 보스 격의 괴물이 있어.”
어디 신화나 전설에 나올 것 같은 바다 괴물들을 물리치고, 좀비들을 물리치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
“크툴루 신화 알아?”
“대충은 알긴 아는데….”
“아카샤는 크툴루 신화의 사실화 같은 곳이야.”
거기에 아포칼립스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죄다 때려 박은 것 같은 곳이지. 불의 창살 너머 바다 위에 떠다니던 괴물의 사체가 모두 없어진 것이 보였다.
그리고 좀비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아카샤를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수선스럽게 움직였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준비해. 이제부터는 신체 계열이 메인이 돼서 싸워야 하니까.”
멈춰 버린 좀비들의 모습에 에드워드 로거스가 당황하다 천천히 불을 물리는 것이 보였다. 없애는 것이 아닌 불 사자의 몸체로 만들어 자신 쪽으로 오게 만드는 점에서 역시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진동이 울린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거렸다. 고장 난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춘 좀비들이 하나씩 바닥에 엎어져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들의 신을 숭배하는 광신도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사체가 된 괴물들의 살점을 뜯어먹고 팽창했던 몸이 다시 쭈그러들었다.
나는 모래에 꽂아 놓은 류를 끄집어내고 바타르의 어깨를 잡아 나를 보게 했다.
“바타르. 정신 차려요. 아니면 몸 통제권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말해요.”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아뇨. 안 해 봐서 모르는데 이참에 해 보려고요. 모르모트 되기 싫으면 정신 차리라는 뜻이에요.”
그가 내 말에 헛웃음을 내뱉는 것이 보였다.
“그게 싫다면 직접 싸워. 언제까지 무섭다고 숨을 수는 없으니까.”
“…좀 더 다정하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가차 없군요.”
“난 누구 다독이고 달래는 거 재능 없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누군가를 달래 주면 안 되거든요.”
내가 달래 주면 내게 기대고 싶어질 테니까. 다독임은 함께 나아가자는 손길일 수도 있으나 그 손의 주인이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이라면 주저앉고 싶어질 뿐이었다.
대충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바타르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주저앉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겠죠.”
“세상은 그렇게 다정하지 않으니까요.”
미숙한 어린아이도 빠르게 성장해야 할 만큼.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저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가늘게 휘는 눈은 우는 것 같았다.
“누구나 투정 부리고 싶은 날엔 그래도 되는 세상이 오면 좋겠네요.”
“…네.”
나의 짧은 대답에 반응하는 건 이호연이었다. 뭐라 말하고 싶은지 머뭇거리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우리를 바타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안색은 여전히 나빴지만, 확실히 아까보다는 많이 진정된 모습이었다.
“바타르, 시력 몇이에요?”
“5.0이요.”
부럽네. 내가 바타르와 짧은 대화를 하는 사이 진동이 멈췄다. 바닷속에서 그것이 천천히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말 안 해도 바타르가 뭘 해야 하는지 알죠?”
“…그럼요. 옛날에도 항상 내가 했던 일이니, 모를 수가 없죠.”
씁쓸한 그의 얼굴을 보다 제등과 등을 분리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등을 하늘 높이 걸기 위해 스멀스멀 움직였다.
“그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요.”
옆에서 나 하는 꼴을 보고 있던 이호연이 하늘로 올라가는 등을 보며 말했다. 류의 날카로운 단면을 허공에 휘두르며 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원딜이 아니라 근딜이거든.”
“그 옷 입고 가능해요?”
“불편한 거지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두루마기에 제대로 팔을 끼워 넣고 바다 쪽을 보았다.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것은 머리였다. 사람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다가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거대한 몸이었다. 해물탕의 해물들이 합쳐진 것 같아! 라고 발랄하게 말하기엔 너무 기괴한 모습이었다.
10개의 새빨간 둥근 눈을 가진 머리는 거대한 문어를 닮았다. 문어를 닮은 머리에 다리는 수십 개였고, 다리 사이 입은 곤충의 입이었다.
몸체는 가시 달린 갑각으로 둘러싸인 네발짐승의 형태를 하였으며, 날개는 박쥐의 날개를 닮았다. 머리 빼고는 바다와 전혀 관련 없는 것 같은 생김새였다.
저것과 우리의 크기 차이는 그 차이를 가늠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굳이 비교하면 꼴뚜기와 코끼리 정도의 크기 차이였다.
에드워드가 내게 물었다.
“저거, 사람이 이길 수 있는 괴물인 거야?”
“이겼으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인류는 옛날에 끝났을 것이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이호연이 호랑이로 변했다. 저 멀리서 모래에 처박혀 있다가 일어난 올리버 로스도 보였다.
지금 여기서 우리 중 가장 거대한 몸짓을 자랑하는 것은 올리버 로스의 드래곤 모습인데도 앞을 보고 나니 참… 앙증맞다 못해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불 사자의 갈기가 흔들렸다. 놀람과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 술사의 심리가 엿보였다. 에드워드가 내 옷자락을 그러쥐며 희게 질린 낯으로 물었다.
“너 저걸 혼자서 죽인 거야? 그게 가능해?”
아무리 허세 넘쳐도 저것에게 ‘겨우’라는 단어를 붙이지는 못한다. 내게도 저 괴물은 쉽기만 한 잡몹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것이 ‘죽을힘을 다해’는 아니었다.
“아카샤는 저것보다 더 대단한 게 많은 판타스틱한 곳이야.”
꿈도 희망도 없는 판타스틱 월드. 처음 저것을 마주했을 때는 정말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한 세 번째쯤에 약점을 찾아내서 그 뒤로는 조금 쉬워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 보게 되는 것들을 겪으며 저것은 그리 힘겨운 고난과 역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여유는 그러한 경험에서 나오는 거였다.
태평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내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질린 얼굴을 했다. 이호연의 경우 조금 어둑한 것이 또 쓸데없는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듯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살짝 웃어 주었다.
눈으로 괴물을 가늠하던 바타르가 나를 불렀다.
“류. 나 좀 위로 보내 주세요. 당신 등 옆이 괜찮겠군요.”
허옇게 질린 낯이 그의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을 보다 그림자에 그를 태웠다. 저 하늘 높이 그림자에 걸린 등 옆으로 그를 태운 그림자가 움직였다.
한 번에 성공하기를 빌지만 그것은 너무 과한 욕심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각국이 자랑하는 재능 있는 자들이기는 하나 이 중 손발을 맞춰 본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중요한 능력은 각자 개인의 능력이 아닌 상대에게 발맞춰 걷는 능력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빛 좋은 개살구이며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밤바다의 서늘한 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움직인다.”
누군가의 그 짧은 말과 동시에 바다 바로 앞 모래사장이 폐허가 되었다. 자신에게 절하던 좀비들을 쓸어 버린 크툴루를 닮은 괴물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한 신화의 대표 격이라 부를 만한 위용이었다. 내게 들려 뒤로 훌쩍 물러나게 된 에드워드의 몸은 바짝 굳어 있었다. 그런 그를 내려 주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크툴루 신화의 사실화라고.”
크툴루를 닮은 그것이 우리를 향해 움직였다. 머리에 달린 문어 다리 수십 개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나는 그 다리 사이 곤충의 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꽉 다물려 있었다.
이 위치에서 저 입을 뜯어 버리거나 부숴 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저것이 스스로 제 입을 열어 줄 리는 없었다. 그럼 결국 더 가까이 가야 한다는 뜻인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몇몇 신체 계열 전직자들이 크툴루를 닮은 괴물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그런 인간들을 관찰하듯 새빨간 눈을 도르륵 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손을 뻗었다. 발밑에서 일렁이던 그림자들이 달려드는 사람들을 각자 하나씩 맡아 묶어 다시 뒤쪽으로 집어 던졌다.
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황당하다는 듯이 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이 서 있던 곳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이전에 기억하던 괴물에 대해서는 잊어요. 그 전보다 빨라졌으니까.”
모래를 뒤집어쓰고 목숨을 구한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물론 약점을 위해선 달려들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물량 공세를 하기엔 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달려드는 이들을 나도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전, 좀비들을 쓸어 버리던 크툴루의 움직임을 보지 않았다면.
괴물은 변화를 맞았다. 분명 예전에 랑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사실임을 보여 주듯 크툴루는 예전에 내가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속도도 그렇지만 외양적으로도 변했다. 예를 들면 저 곤충 입이라든가.
평범한 갈색이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크툴루 입은 푸른빛 도는 은색이었다. 나는 저런 금속의 색을 하나 알고 있었다. 또한 평범한 전직자들은 결코 저것의 입을 열게 만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또 물거나 하면 안 돼.”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호랑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옛날에 한번 호되게 당한 이후로 이호연은 괴물들 물어뜯기를 관뒀었다.
묘하게 떨떠름해 보이는 호랑이의 얼굴이 웃겨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러곤 복슬복슬한 호랑이의 뒷덜미에 매달렸다.
“크툴루의 약점은 입 안에 있어. 5cm가량의 작은 보석이 크툴루의 심장이야. 바타르가 그것을 맞힐 수 있도록 우린 저 입을 부수거나 떼 버려야 해.”
내 말을 듣는 호랑이의 귀가 쫑긋거렸다.
단순히 입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크툴루의 입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술 정도의 괴력을 가진 것은 이호연 하나였다.
어쩌면 이건 진화를 맞이한 괴물을 상대로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거지 같은 이벤트일지도 모른다.
테오그라젠스의 인성이 엿보이는 평가질이었다.
***
호랑이로 변형한 이호연의 등에 타 크툴루의 몸 위를 달리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변화를 맞이한 게 아니라 그냥 진화한 거 아닌가 하고.
일단 옛날에는 저런 거 없었다. 머리에 달린 문어 촉수가 늘어나서 휘둘러지는 거. 저건 명백히 질량 보존의 법칙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우리 쪽을 향해 날아오는 촉수를 보며 그림자를 제등에 감았다.
“계속 달려!”
호랑이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내 아래로 향하게 된 촉수를 향해 류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단면에 감겨 있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며 촉수를 잘랐다.
저쪽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무시한다면 똑같이 해 주면 된다. 채찍처럼 늘어난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연체동물의 다리를 베어냈다.
거대한 다리들이 물에 빠지면서 거대한 물 폭포가 일었다. 어느새 저 멀리서 뛰고 있는 이호연을 확인하고 다리에 그림자를 감았다.
잘려나간 다리가 바다에 빠짐과 동시에 잘린 단면에서 새로운 다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베어냄과 동시에 단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멀리 하늘 위에 걸린 등에서 쏟아져 나온 푸른 불꽃이 단면에 들러붙었다.
바다의 짠 내와 탄내가 섞여 들어갔다. 불이 꺼진 자리에는 새까맣게 변한 단면만이 남았다. 재생이 멈췄다. 분개한 크툴루가 다른 다리들을 휘두르기에 서둘러 그림자를 타고 허공으로 올라갔다.
호랑이로 변형한 이호연은 잔상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공격을 피하며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보다 더한 위험 대상이라고 생각했는지 크툴루의 관심이 이호연에게로 쏠렸다. 이호연에게로 향하는 몇몇 위험스러운 공격들을 불과 그림자를 이용해 비껴 나가게 만들면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마법 계열도 신체 계열도 크툴루를 향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머리와 몸체가 따로 놀게 생긴 크툴루는 그 생김새처럼 머리와 몸체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는 나와 이호연을 경계하지만 이것의 몸은 저 밑에 다른 전직자들을 학살하기 위하여 거세게 움직였다. 박쥐의 것을 닮은 날갯짓에 사람들이 날아가고, 짐승의 것을 닮은 앞발에 땅이 갈라졌다.
이 위에서 나와 이호연이 아무리 많은 위협을 해도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머리. 몸체는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몸체의 공격은 저 아래 전직자들이 알아서 상대해야 했다.
머리와 몸체가 따로 논다는 것은 기괴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이호연이 크툴루의 머리에 다다른 순간 그것이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압도적인 크기인 그것의 거센 움직임에 이호연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멀쩡한 촉수들도, 반쯤 탄 거나 다름없는 촉수들도 발광하듯 움직였다.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튀어나와 그것들을 베어냈다. 태울 시간은 없었다.
저것에게서 이호연이 벗어날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차라리 저 촉수를 타고 곧바로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게 더 나은가. 그림자에서 내려와 크툴루의 몸체를 밟았다. 더 가까이 오면 한번 밟고 머리 쪽으로 넘어가 보려는 순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호연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
언제 이쪽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궁금했지만 갑자기 왜 이러는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의아함에 그를 돌아보니 그는 다급한 얼굴로 바람을 이용해 하늘로 올라갔다.
다급함이 서려 있던 그의 얼굴에서 저 아래로 시선을 돌린 나는 낯을 굳혔다.
“…나 때는 말이야, 저런 거 없었는데?”
진짜,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겪은 것은 이지 모드였나 보다. 하드 모드 크툴루는 패턴이 참 괴랄했다.
몸체의 갑각 위로 보는 것만으로도 꺼려지는 색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그것은 거대한 뾰루지 같은 모양을 취하더니 곧이어 꿀렁이는 액체로 바뀌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닿으면 X될 것 같았다.
크툴루의 갑각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몇몇 전직자들이 급하게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액체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빛들을 반사하며 번들거렸다. 크툴루가 몸을 움직이자 갑각 위 액체가 바닷가 근처로 흘러내렸다.
치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래사장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산성 종류의 물질인 것 같았다. 구멍 주변이 새까맣게 변했다.
갑각 전체가 액체로 번들거리는 것을 눈에 담으며 나는 말했다.
“저거… 바다로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크툴루가 아, 더워. 하고 바다라도 들어가는 순간 저 산성 물질은 순식간에 바다로 퍼질 것이다. 일부도 아닌 저렇게 많은 양의 물질이 퍼져 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다의 물살은 유동적이었다. 저 물질이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퍼질 것이며 역사상 유례없는 수질 오염이 시작될 것이다. 괴물을 해치우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자연재해라는 인간은 손대지 못할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다행히 나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멍하니 크툴루를 지켜보던 이들 중 마법 계열들이 급하게 액체 쪽으로 불길을 드리우는 것이 보였다.
이호연에게 떨어트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크툴루 쪽으로 푸른 불을 쏟아부었다. 다행히 불에 증발하는 종류의 액체인지 산성 물질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단 한 방울의 물질도 바다에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서 쏟아진 푸른 불이 크툴루의 몸체를 스치고 감싸며 거대한 원의 형태를 그려 냈다.
우리가 자신의 유해 물질로 고생하는 사이 크툴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어디 한번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라는 듯이 느릿하게. 그것은 마치 우리를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아카샤 안이었으면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싸울 수 있었을 거다. 게임에서 용사가 괜히 마왕 성이나 고대 던전에서 싸우는 게 아니었다.
거긴 망가트려도 되는 남의 집이니까 거기서 싸우는 거였다. 자기 집이었으면 파밍하겠다고 가만있는 상자를 부수고 벽을 깰 리가 없었다.
“미치겠네.”
저거 빨리 잡고 도망간 생태계 파괴자들도 잡아야 하는데. 뒤쪽 바다를 힐끔 바라보는데 이호연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앞을 보니 우리 쪽을 향해 새로운 촉수가 날아오고 있었다. 열 개의 붉은 눈이 히죽거리면 웃는 것처럼 보였다.
“…….”
피하는 건 늦었다. 공격하기는 애매하다. 그리고 공격해도 되는 걸까, 라는 어이없는 걱정이 들었다.
크툴루의 다리는 여전히 바다 위에 있었다. 저게 지금 몸만 납작하게 낮추어도 갑각에 흐르는 저 액체는 바다에 퍼질 것이다.
여기서 불붙여 봤자 별 소용 없을 거고. 잘못해서 저게 내 공격을 지나친 위협이라고 받아들여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수질 오염이 일어날 거고.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건 너무 내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지금 이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게는 움직임을 붙드는 제약이었지만, 괴물에게는 아니었다.
그림자가 거대한 다리를 묶어 냈다. 그래 봤자 임시방편. 곧이어 다른 다리가 우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푸른 불은 갑각에 흐르는 것을 태우느라 바빴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는 괴물의 다리가, 어둠 속에 피어오르는 내 푸른 불이. 다.
정신없어.
여기 있는 그 무엇도 망가트릴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불리한 존재가 됨을 선언하는 짓이었다.
“…….”
미국이 여기를 모임 장소를 정한 이유는 그나마 이곳이 안전해서였다. 그 안전이란 전직자들이 부숴 먹을 것에 대한 안전이었다.
민간인이 없고, 무너질 건물이 없는 바닷가. 그나마 수습하는 것이 가장 쉬운 곳. 바닷가가… 바다보다는 수습하기 쉽지 않을까?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길을 타고 크툴루의 다리를 피하는 이호연의 마법은 어설펐다. 벌써부터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야로 크툴루가 보였다.
차라리 저거 물 밖으로 끄집어내면 안 되나?
썩어 버린 모래는 삽으로 파낼 수 있지만 바다의 물은 아니다. 어느 쪽을 더 우선시해서 지켜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암시를 걸어서 밖으로 빼낸다면…. 아니야. 암시를 걸 수 있다면 더 확실한 방법이 있어.
“…….”
될까? 약간의 불안감이 들었다. 괴물한테는 해 본 적 없는데. 경험이 없다는 게 망설임이 되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걸. 그 사실이 나를 재촉했다.
이호연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까지 의미 없는 술래잡기와 청소나 하며 시간을 버릴 수는 없었다.
될까 싶은 마음이 반, 해야 한다는 마음이 반. 우리를 향해 내려오던 촉수의 끝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제 다리를 뒤로 물리는 크툴루를 보며 이호연의 귀에 속삭였다.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바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중에 떠 있는 우리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니 한 번에 두 개의 바람을 다루는 것은 역시 무리인 것 같았다.
뒤로 물러나는 촉수에 붙은 불은 여전히 맹렬하게 타오르며 점차 몸짓을 키워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뱀처럼 제가 살라 먹는 것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불안감은 마법의 적. 자신 없음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한계의 벽이었다. 이호연의 얼굴에는 그것들이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말했다.
“그냥 해. 바다에 빠질 것 같으면 내가 건질 테니까.”
에드워드 로거스에게 한 말과 맥락은 같았다. 네가 실패하면 내가 한다. 너의 실패는 모든 것에 무너짐이 아니다.
내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호연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매개체 없는 바람은 까다롭고도 제멋대로였다. 그것을 다루는 이호연은 어설펐다. 그러니 술사의 자신감이 중요한 거였다. 그것은 깨닫고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종류의 재능이었다.
그러나 약간의 요령과 믿을 구석만 있다면 한 걸음 나아갈 볼 용기가 생기는 재능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바다의 어둑함이 푸른 불에 사라졌다. 크툴루의 격한 움직임이 푸른 불을 밀어내고자 했다. 조심스러운 봄바람 같은 것이 푸른 불에 화기를 더했다.
기름 먹인 실을 따라 불이 움직이듯 바람길을 따라 불이 타올랐다. 이호연의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푸른 불을 확인하며 바다 쪽으로 류를 집어 던졌다.
기다란 제등이 흐물거리며 검은 액체처럼 변했다. 바다 위에 새카만 어둠 덩어리가 생겼다.
나는 그것을 보며 작게 웅얼거렸다. 넓게 퍼져 가는 어둠을 보며 크툴루 쪽을 살폈다.
바람을 타고 이동한 푸른 불이 크툴루의 문어 머리 근처를 빙빙 돌며 배회하고 있었다. 열 개의 붉은 눈이 푸름에 홀렸다.
일단 저쪽은 됐다. 크툴루의 눈을 경계하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바닷가 쪽으로 돌아―.”
“아….”
탄식 소리와 함께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어째 불안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우리 쪽 바람이 끊겼다.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푸른 불을 안내한 바람이 그대로라는 점에서 이호연은 본인 몫을 충분히 해낸 거였다.
짠 내 섞인 바람을 타고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유난스럽게 펄럭거렸다. 이호연의 팔을 붙잡고 바닷가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우리 쪽으로 당겼다.
류의 그림자는 여전히 바다 위에서 새카맣게 흔들거렸다. 저쪽은 지금 쓰려고 놔둔 것이 아니니 그냥 두었다. 바닷가에서부터 오느라 제법 시간이 걸린 그림자가 우리를 낚아챘다.
“…아슬아슬했다.”
바로 아래가 수면 위라는 점도 그랬지만, 내 옆에서 바르르 떨리는 그림자의 끝을 보니 여기서 조금만 더 바다 쪽이었으면 그대로 퐁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호연에게는 빠져도 내가 건진다고 말했는데 하마터면 허세로 끝날 뻔했다. 철렁한 심장을 부여잡고 그림자를 타고 땅으로 움직였다.
“집중해. 바람을 꺼트리면 안 돼.”
어둠이 번진 바다 위를 힐끔거리는 이호연에게 주의를 주며 나 또한 밑을 보았다. 질척이는 어둠은 밤에 젖은 바다의 물살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다로 착각될 만큼 순수하고도 강한 생명력을 가진 종류가 아니었다. 손을 까닥였다.
은밀한 그림자 덩어리가 크툴루의 몸을 감싸듯 제 영역을 넓혔다. 다행히도 크툴루의 시선은 다른 전직자들이 끌어 주고 있었다.
요란한 빛들이 어둠에 젖은 바다를 밝혔다. 조금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제일 열심히 하는 것은 올리버 로스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래곤이 어지간히 거슬리는지 크툴루의 집중 공격을 받은 그는 마법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도망 다니고 있었다.
드래곤의 발을 낚아채려던 크툴루의 촉수를 향해 온갖 마법들이 날아들었다.
하늘에 떠 있는 등에서는 여전히 푸른 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크툴루의 시야 바로 앞에서 돌아다니는 푸른 불 또한 그 색이 선명했다.
두 가지의 푸름이 한데로 어우러지는가는 나의 문제였다.
“될까 모르겠네.”
이호연의 전직관한테는 통하기는 했는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가락을 맞부딪혀 딱, 하는 소리를 냈다.
푸른 도깨비의 불은 정신계 마법. 사람을 홀리는 삿된 것들의 장난. 사람을 홀리고 놀린다. 그 힘을 과연 나는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크툴루를 약 올리듯 움직이던 푸른 불의 움직임이 멈췄다. 둥글게 뭉친 불꽃이 환하게 비침과 동시에 크툴루의 새빨간 열 개의 눈 안에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의 움직임이 고장 난 인형처럼, 누군가 경고의 빨간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추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전직자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암시에 집중했다,
손끝이 떨렸다. 이건 이호연의 전직관에게 암시를 걸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아득한 존재의 정신에 감히 간섭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는 거부감이었다.
신경 줄 하나하나가 거부감을 내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내 몸 위로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후.”
다음부터는 절대 괴물한테 암시 안 걸 거야. 속으로 다짐하며 크툴루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내가 저것에게 내릴 명령은 단 하나였다.
곤충의 것과 같은 저 입을 벌리게 하는 것.
크툴루의 심장을 숨긴 푸른빛 도는 금속의 입이 열렸다. 크툴루의 몸이 경련하듯 움직였다. 그것은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는 나를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거북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비틀거리는 다리를 곧게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얇고 긴 그림자의 줄기가 저 하늘 높이 일렁이고 있었다. 끄트머리의 푸른 불은 등대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옆. 등 옆에 서서 불로 만들어진 활과 화살을 손에 건 바타르가 보였다. 작은 인영이 움직였다. 지울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비틀거리던 남자의 눈은 정확하게 괴물의 심장을 보고 있었다.
손이 움직이고, 화살이 활대를 스치고 힘주어 당긴 팔은 뒤를 향해 구부러졌다. 눈은 오로지 한곳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이 화살을 놓았다.
붉은 불의 화살이 크툴루의 입 안에 있을 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의 궤적이 유성처럼 번뜩였다. 바타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의 낯이 굳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일이 꼬였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곧바로 암시를 풀어 버렸다.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헛구역질하는 속을 달랬다.
이럴 줄 알고 보험을 놔둔 거였다.
“…묶어서 끌고 나와.”
내 옆에 서 있던 이호연이 뜬금없는 내 말에 나를 보았다. 하지만 이 말은 그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바다에 퍼져 있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것들이 크툴루의 몸을 붙잡았다. 그것은 진득한 어둠이었으며 삿된 것들의 손길이었다.
어둠들이 크툴루를 붙잡았다.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온 그림자들이 내 아래에서 일렁인다. 바닷가의 어둠이 크툴루를 붙잡았다면, 그것을 바다 밖으로 빼내는 것은 내 발밑의 어둠이 할 역할이었다.
이호연의 손을 붙잡고 바다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뛰었다. 그런 내 행동을 본 다른 전직자들이 눈치껏 바다에서 멀어졌다. 그림자에 묶인 크툴루가 물살을 가르며 모래사장 쪽으로 끌려 나오고 있었다.
등과 함께 아래로 내려온 바타르가 내게로 뛰어왔다. 뭐라 말하려는 그의 입을 막고 나는 딱 한 가지 사실만 그에게 물었다.
“크툴루의 심장은 무슨 색이었어요?”
“입과 똑같은, 푸른빛 도는 은색이요.”
설마설마했는데, 심장까지 진화했나 보다. 그것도 강철의 심장으로. 바타르의 화살은 분명 정확히 심장을 맞혔다. 다만 그의 불이 그것을 꿰뚫지 못했을 뿐이었다.
모래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바다의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이제 수질 오염은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게 다행이었다.
흙투성이가 된 거대한 몸. 위협을 느낀 갑각 위로 그 꺼림칙한 액체 쏟아져 나왔다. 액체가 닿자마자 모래가 녹으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물론 이쪽도 뒷수습이 골 아프기는 하지만 적어도 바다를 뒷수습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림자 줄기를 끊어 내자 다시 발버둥 치는 크툴루의 위로 온갖 마법들이 쏟아져 내렸다.
다굴의 정석을 보여 주는 듯한 눈부심이었다.
“두 번은 입 벌리게 못 할 것 같은데….”
기분은 둘째치고 크툴루가 두 번이나 당해 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 상태로 성공할 가능성도 그다지 높지도 않고. 아직도 뒷목이 오싹거리고 있었다.
굳은 낯을 한 바타르가 말했다.
“벌려도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화살이….”
바타르가 말에는 자책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심장의 자리를 꿰찬 그것의 재질이 문제였다.
“…….”
나는 바타르에게 고개를 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림자 속에서 꺼낸 총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다시 한번만 해 주세요. 입은 어떻게든 벌리든가 뜯어 버리든가 할 테니까 심장을 쏴 맞혀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총이었던지라 바타르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 총의 정체를 대충 말해 주었다.
“같은 금속이니까 통할지도 몰라요. 옛날에… 빌린 건데 한번 사용해 봐요.”
전 천칭 회장님이 그렇게 자랑을 한 물건이니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일단은 같은 금속이니까…. 그리고 마냥 평범한 금속 같은 게 아니기도 하고.
문제는 이제 저 입을 어떻게 하냐는 거였다. 뜯어 버려야 하나? 지금 저 입을 뜯어 버릴 만한 힘을 가진 건 이호연뿐인데….
유일하게 이 금속을 손으로 우그러트릴 수 있는 이호연을 저 안으로 들여보내기엔 크툴루의 얼굴은 너무나 해로운 얼굴이었다.
“…….”
직접 안 가고 떼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페이즐리 오스틴. 그런데 가능할까. 자꾸만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니 생각하는 것들이 죄다 부정적으로 변했다.
크툴루를 집중 공격하는 사람들 중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깜짝 놀랐는지 그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끄악한 그녀의 심장에게는 미안했지만 지금은 이쪽이 더 급했다.
“페이즐리. 단검 소환해서 손 안 대고 어디까지 베어 넘길 수 있어?”
페이즐리는 급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한 듯 버벅거리다가 내게 답했다.
“내가 안 들고 다루는 경우엔 너무 멀리까지만 아니면….”
“그럼 크툴루의 머리에 달린 다리를 피해서 입 가까이로 가져다 댈 수 있어?”
페이즐리의 낯이 어두웠다.
“그렇게 섬세하게는 조절 못 해.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 전에 크툴루의 다리에 단검이 붙잡힐 거야.”
“…….”
곤란하다. 지금 이곳에 모인 전직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크툴루를 다굴하고 있기는 하지만, 심장을 부숴 버리지 않는 이상 쓸데없는 힘 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고민하는 내게 이호연이 물었다.
“저번처럼 그림자를 이용해 기척을 죽이는 건 안 돼요?”
“크툴루는 그거 안 통해, 눈 자체에 상대의 위치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담겨 있거든.”
그림자 속에서 류를 다시 끄집어내며 답했다. 괜히 눈 개수가 많은 게 아니었다. 눈 정도는 그냥 장식용으로 많은 거면 얼마나 좋아.
저걸 어떻게 없애야 하나. 할 수 있다면 깔끔하게 심장만 부수는 것이 나았다.
예전에는 크툴루는 조각내서 죽였던 적도 있는데, 그때 크툴루의 사체가 빠진 바다 자체가 부패하였었다. 이곳이라고 그렇게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곳이 인간의 터전인 이상 우리는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남의 집만큼 사람이 가장 잘 싸우는 환경이 없었다.
“…….”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러한 환경 오염적 문제로 인한 제지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온 힘을 다해 싸워도 모자랄 판에 눈치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다.
다른 전직자들의 공격도 약간씩만 태우거나 견제하는 정도였다. 전력을 다해 싸우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모르거나, 지금 당장 눈앞에 괴물까지밖에 생각 못 하는 이들이었다.
나머지는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만약, 크툴루 때문에 이 주변 생태계가 파괴되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로 돌아가는가. 상식적으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지만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특히 미국이. 어떻게든 누군가는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파괴된 환경을 되살리는 일에는 돈이 들고 그 돈은 책임 있는 자에게서 뜯어내야 한다.
단순 돈으로만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책임자는 욕을 먹어야 했다. 욕먹는 동네북 역할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탓에 나 또한 답지 않게 에둘러 죽이는 법만 찾고 있었다. 원래라면 수백 개의 조각으로 갈라 죽여 버렸을 저것을.
크툴루가 또다시 그 이상한 액체를 꿀렁거리며 내뱉었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환경 오염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다가 여기 해안가 모래가 다 녹아 버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
“…….”
귀문이라도 열어야 하나. 웬만하면 그건 최대한 미루고 싶은데. 여기서 귀문이라도 열었다간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이다. 영역을 열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도 문제지만….
내 몸이 버틸까 싶었다.
조금 전에 크툴루의 정신을 파고들었던 탓인지 그림자 속이 유난히 술렁거렸다. 열어서 좋을 것은 없어 보였다.
왕이 아닌 나는 절대적이지도 숭고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것들의 욕심부리는 입을 제지하는 랑이라는 저지선이 없었다면 내 삶은 더 각박해졌을 것이다.
귀문도 안 되고, 암시도 안 된다. 그럼 저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도 도망간 해양 괴물들이 바다를 신나게 누비고 있었다.
그것들 또한 서둘러 잡아야 한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입가를 더듬으며 아무 말 없던 이호연이 갑자기 페이즐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검, 최대한 길게 만들어서 하나만 주세요.”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뭐 하려고?”
“크툴루 입, 뜯어 버리려고요.”
“…뭐?”
내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며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페이즐리가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진짜 줘?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들어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이호연에게 말했다.
“호랑이로 변해도 문어 다리 못 피하잖아.”
이호연이 속도 면에서 발군인 것은 맞으나 진화된 크툴루보다는 아니었다. 내 말에 이호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바람까지 사용하면 될 것 같아요.”
“너―.”
마법 못하잖아.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이 뭔지 안다는 듯 이호연이 곤란한 낯으로 웃었다. 마법은 얍! 한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크툴루 입 안으로 뛰어들며 사용한다니, 일단 초보 마법사 이호연은 불가능했다. 내 걱정이 무엇인지 아는 듯 이호연이 내게 물었다.
“10분만 크툴루를 못 움직이게 할 수 있나요?”
“10분?”
10분이면… 설마.
“호랑이 말고 용으로 변형할 거예요. 그 모습이 바람을 다루기도 더 쉽고. 가까이 가는 것도 더 쉬우니까요.”
“…….”
“어차피 다들 적극적으로 크툴루 상대를 안 하고 있잖아요. 적극적으로 한다고 해도 쉽게 끝나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심장을 찌르는 거 말고는 이 사태가 안 끝난다는 건 똑같잖아요.”
내가 이 모든 사태를 책임지겠어! 하고 누군가가 외치면 이 사태가 빠르게 끝나기는 할 거다. 그 순간 내가 크툴루를 전부 조각내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호연의 말대로 심장을 찌르지 않는 이상 시간만 질질 끌게 될 것이다.
크툴루라는 자연재해를 상대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소시민들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힘만 센 바보들.
“…….”
나만 바라보고 있는 로웰 콕스는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이 모임에 있어 제법 높은 자리일 텐데. 그녀의 얼굴에는 별다른 어둑한 감정이 엿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이호연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뒤로 빠져야 해.”
내 말에 이호연은 웃는 것으로 답을 돌려주었다.
***
똑같다. 백호라 불리는 용의 형태로 변형한 이호연의 모습을 보며 생각한 것은 그거였다. 호랑이의 산에서 보았던 그의 전직관의 용 모습과 똑같다고.
주변 사람들이 그런 이호연의 모습에 술렁이는 것이 들렸다. 이호연은 호랑이로만 변형이 가능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이호연의 모습을 눈에 새기다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크툴루의 날개를 피해, 몸체의 다리를 피해, 문어의 모습을 한 얼굴 쪽까지 간 것을 보며 류를 들었다.
바타르는 올리버 로스를 찾아 자리를 비운 뒤였다. 페이즐리가 옆에서 긴장한 것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리즈, 긴장 풀어. 그냥 이호연이 크툴루의 입 바로 앞에 도착하면 그쪽으로 단검을 소환해 내면 되는 거야.”
“위치를 잘못 맞추면….”
“손으로 저 입을 뜯어 버릴 힘이 있으니까 괜찮아.”
내 말에 페이즐리가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울리며 올리버 로스가 바타르를 태우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크툴루의 촉수를 피해 날아다니는 백호를 보며 올리버 로스는 제 등에 탄 바타르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얌전히 날았다. 그런 점은 조금 의외였다.
내 옆을 둥실거리며 떠다니는 등에 푸른 불이 어렸다. 그 아래에서 제등을 잡고 이호연과 크툴루에게 집중했다.
류의 단면이 모래를 파고듦과 동시에 크툴루의 거대한 몸집 밑에서 늘어진 그림자가 곧바로 크툴루의 머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백호를 향해 휘둘러지던 촉수가 그림자에 꿰였다. 다음 것도, 그다음 것도. 거대한 가시덩굴 꼴이 난 크툴루의 다리를 피해 이호연이 입 쪽으로 움직였다.
갑각에서 흘러내리는 이상한 산성액을 밑에 있던 마법 계열들이 불을 이용해 증발시켰다. 그런 그들을 노리는 촉수는 신체 계열들이 해결했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선 비전투 계열들이 미친 듯이 바다를 뒤지고 있었다. 강유진 근처에 수많은 구름들이 퐁퐁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준비해.”
“응.”
페이즐리가 이호연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대하기는 하나 크툴루에 비하면 귀여운 크기인 백호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형한 이호연이 제 앞에 일렁이며 나타난 단검을 손에 쥐었다.
“됐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둠뿐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이호연이 단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곤충의 입과 같은 크툴루의 입 중 절반이 잘려나갔다. 귀를 찢을 것 같은 소음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날뛰는 크툴루로 인해 중심을 놓친 이호연이 단검을 떨어트렸다. 저 아래로 떨어지는 단검을 바라보던 이호연이 곧바로 입 쪽으로 달려들었다.
귀와 꼬리가 드러나고, 동공은 세로로 쭉 찢어졌다. 전에는 호랑이의 앞발과 비슷하게 변형되었던 손이 전과는 달리 손톱만 길어지는 것으로 변했다.
벌어진 이호연의 입 안에서 송곳니가 길어진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 크툴루의 입이 잡혔다. 이호연이 그것을 뜯어 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편에서 튀어나온 나는 그의 허리를 잡아 뒤로 물러났다.
내 뒤를 따라온 등에서 튀어나온 푸른 불이 우리의 주변을 감쌌다. 열 개의 붉은 눈이 제 심장을 노리는 자들을 향해 움직였다.
그림자에 꿰여져 있던 촉수들이 저절로 잘려나갔다. 순식간에 자신의 다리를 모두 재생시킨 크툴루가 그것을 우리를 향해 휘둘렀다.
격한 움직임에 이호연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라 아래로 추락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
심장을 노리는 것은 노련한 사냥꾼의 역할.
저 멀리서 날고 있는 드래곤이 보였다. 그 드래곤 위에 작은 인영이 보이고, 언뜻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탕. 짧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크툴루의 입에서 무언가가 번쩍거리며 빛을 쏟아 뱉었다.
죽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저 멀리 흔들거리는 크툴루의 촉수와 갑각의 일부밖에 없지만 느껴졌다.
죽었다.
추락하며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새삼스럽게 크툴루의 크기가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떨어진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아직도 허공이었다.
이호연도 나도 추락하고 있다는 점에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이걸로 소리 지르기엔 우리의 인생은 너무 스펙타클했다.
언제든 안전하게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이에 한몫했다.
뒤로 넘어지기 시작한 크툴루를 보고 있는데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솜털이 느껴졌다. 이호연이 그것을 보며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민들레?”
그의 말대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솜털 같은 것은 거대한 민들레 홀씨였다. 설마 또 새로운 아카샤의 괴물이 나올 징조인가 싶어 걱정하는 그를 보며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애들이 장난치는 거야.”
“애들?”
그의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민들레 홀씨를 타고 날아온 꼬마 도깨비들이 나와 이호연의 품에 안겼다.
“이제 우리도 장난 그만하고 밑으로 내려가야겠다.”
나름 별하늘 아래 추락하는 것이 낭만적이기는 했지만 이제는 추웠다.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락하는 속도가 천천히 늦춰지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휘둘러 아리스토 모멘트, 하고 외친 것처럼. 민들레 홀씨를 품은 봄바람 같은 것이 우리를 감쌌다.
민들레 홀씨들을 손끝으로 툭툭 치다 내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나를 자신 쪽으로 쭉 끌어당기며 그는 웃었다. 때아닌 겨울 바다에 우리 둘만 봄이었다.
홀씨들이 날아왔다. 그중엔 깨비들을 태우고 오는 홀씨들도 있었다. 우리 위로 폴짝 뛰어내리는 애들도 있었고 지나쳐 날아가는 꼬마도 있었다.
민들레 홀씨를 타고 올라오는 꼬마 도깨비 한 깨비를 붙잡은 이호연이 꼬마가 들고 온 상소문을 내게 내밀었다.
“…밑에서 걱정이 심한가 봐.”
상소문에는 구름이 엉엉 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설마 강유진을 표현한 건가?
함께 그림을 본 이호연이 묘한 낯을 하다 내려가는 속도를 서둘렀다. 처음과 비교하면 이제는 마법을 나름 잘 사용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앗.”
마무리가 문제지. 또 사라져 버린 바람을 느끼며 그림자를 끌어 올렸다. 안전하게 그림자 위로 착지한 우리는 그림자가 만드는 징검다리를 밟으며 밑으로 내려갔다.
크툴루는 우리가 나름 낭만을 즐기는 사이 완전히 뒤로 넘어져 있었다. 정말, 크기가 장난 아니었다.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을 헤치고 강유진이 뛰어나왔다. 그녀는 우리를 붙잡아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빨리 안 내려와! 걱정했잖아요!!”
강유진에게 붙잡힌 우리는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이호연은 나름 배려한 건지 몸을 낮춰 주고 있었다.
“강유진 씨, 뚝. 우리 무사하고 크툴루는 죽었고 다친 사람도 없…나? 어쨌든 우리는 안 다쳤어요.”
“이 안전 불감증들아!”
“저는 나름 제 안전에 대해 매우 민감한데요….”
변명했는데, 아무래도 안 들리나 보다. 강유진 씨를 토닥거려 주며 우리 쪽으로 뛰어오는 페이즐리와 에드워드, 바타르를 보았다. 올리버 로스는 멀찍이서 어색하게 서성거렸다.
눈물이 터진 강유진을 끌어안으며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도망간 것들 위치는 찾았어?”
“찾기는 했는데, 정확한 위치 추적이 가능한 사람이 우느라 정신이 없어.”
“…그래.”
다시 묻지 않아도 누굴 말하는 건지 잘 알겠다. 우느라 정신없는 강유진에게 말했다.
“뚝. 일단 할 일은 해야죠.”
“어차피 류는 바다에서 힘 제대로 못 쓰잖아요! 딴 사람 보내!”
“내가 간다고 한 적 없는데요?”
나도 좀 쉬자. 잉잉 울며 구름 조각을 에드워드에게 던지는 강유진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책임 물을까 봐 깔짝거린 사람들이 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쉬고. 남들 일할 때 놀자, 하는 생각을 하며 강유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렇게 누가 걱정해 주는 것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았다.
***
연회가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내 계획은 당연히 무산되었다. 아카샤의 괴물이 미국에 바다에서 나온 사건은 그랬구나, 하고 넘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아카샤에 들어갔던 사람만이 그 안의 괴물들의 모습을 보았기에 이번 사건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전설을 실제로 본 사람들의 흥분감을 보고, 듣고, 느끼며 나는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그날 영상 찍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때문에 과거 아카샤를 홀로 공략했던 나에 대한 말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만 사는 괴물들만 해도 그 정도라는 다른 전직자들의 발언 덕분이었다. 또한 아카샤에는 그것들이 사는 바다가 총 일곱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은 이번 일에 있어 아카샤의 괴물이 나온 나라가 아닌, 그런 괴물들을 힘 모아 물리친 전직자들이 모였던 모임을 주최한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 했다.
뭔가 되게 이름 긴 초점이었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다. 도망갔던 괴물들을 붙잡는 것이 다소 늦어졌기에 미국의 수산업이 꽤나 힘들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제발, 전직자들 전부를 모아서 할 국제 기자 회견에 참석해 달라는 이들의 요청을 차마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못했다.
거절했다가 무슨 뒷말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고, 내게 매달려 부탁하는 한국 담당 직원이 울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도포와 두루마기 등 장비를 제대로 갖춰 입어 연회가 열렸던 장소에 도착한 나는 보이는 풍경에 표정을 구겼다.
그냥 두루마기 하나로 퉁치자는 내 말에 제발 풀 세트로 입어 달라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화려하게 꾸며져 있던 전과는 달리 깔끔하게 정리된 연회장 안 전직자들을 보며 나는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런 나를 본 이호연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조금… 쪽팔려서.”
어째 나만… 너무 눈에 띈다.
모두가 같은 부탁을 들었는지 전통 의상을 입었던 전과는 달리 다들 장비를 풀 세트로 입은 상태였다. 원래부터 장비를 입지 않는 이호연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평범한 옷이기에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나 이거 알아.
모두가 사복을 입고 놀이공원에 왔는데 나 혼자 말 잘 듣고 교복 입고 왔을 때의 뻘쭘함.
교복 입고 수학여행 간다고 해서 챙겨 입었더니 모두 사복을 입고 와서 나 혼자 아이덴티티 뚜렷했던 쪽팔림.
이건 그런 종류의 뻘쭘함과 상당히 비슷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게도 내가 너무 튀었다. 남들은 갑옷 입고 로브 입는데 옆에서 나 혼자 도포에 두루마기였다.
알록달록하고 RPG 고수처럼 번쩍번쩍한 사람들 틈에서 나 혼자 새까맸다. 판타지 세계에서 검은 머리는 주인공뿐이라는 클리셰의 정석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먼저 연회장 안에 들어와 사진을 찍고 있었던 듯한 기자가 나를 발견하곤 밝은 얼굴로 달려왔다. 기자가 물었다.
“전 세계 전직자들이 모였던 이번 모임과 아카샤의 바다 괴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남들 서양 판타지를 찍을 때 혼자 동양 판타지를 찍는 기분이네요.”
“…네?”
쪽팔린다고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말들을 삼켰다.
“취지가 좋았다고 생각하며, 아카샤의 괴물을 다 함께 힘을 모아 물리친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눈을 끔벅이는 기자에게 인사하고 이호연과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발견한 에드워드가 쪼르르 뛰어와 내게 말했다.
“왜 이제 와?”
“오기 싫었거든.”
솔직한 내 대답에 에드워드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남동생이 있었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부들거리는 금발을 쓰다듬는 내 손을 에디 어린이가 쳐냈다.
“애 취급하지 마.”
투덜거리는 것 치곤 묘하게 들뜬 기색이었다.
“신나 보이네?”
“신나긴 무슨.”
입꼬리나 움찔거리지 말고 말하렴. 뭐 때문에 기분 좋은지는 알 것 같았다. 연회 날 밤의 영상이 퍼지면서 에드워드 로거스의 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논란이 된 불 사자를 통제하는 모습, 해안가 전부를 막아 내던 불의 장벽. 물론 후자는 나라는 약간의 편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애교였다.
아무도 모르는 뒷사정이기도 하고.
“너도… 멋있었어….”
에드워드가 이호연에게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가 말을 걸지는 몰랐는지 이호연의 얼굴에 조금 당혹스러운 감정이 돋아났다.
어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들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 계열들의 눈빛이 아주 뜨거웠다.
“…….”
로웰 콕스는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바다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크툴루의 사체를 두고 걸어가는 나를 보며 소름 끼치도록 환하게 웃길래 한 번 더 찾아올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한국으로 튀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류, 류.”
이호연이 내 옷소매를 잡아 쭉쭉 잡아당겼다. 자기 좀 도와 달라는 구원을 요청하는 목소리였다. 뭔가 싶어 그들을 돌아보니 에드워드도 간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들을 보다 헛웃음을 내뱉었다. 둘이 대화할 건덕지가 떨어졌으니 어떻게든 해 달라는 뜻이었다.
크툴루에게 달려드는 모습 덕분에 또다시 유명인이 된 이호연이 낯가리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귀와 꼬리는 숨긴 상태였지만 쫑긋거리는 귀가 환상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소란스러운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어떻게 기자 회견을 하나 싶었는데, 기자들은 의외의 방법으로 기삿거리를 타갔다.
돌아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거였다. 기자들과 친하지 않은 전직자들은 기자들의 지나친 친근함에 얼떨떨한 모습을 보이다가 묻는 말에 열심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누구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효과는 좋았다. 저렇게 한 사람 콕 집어 옆에 서서 물어보면 대답 안 하기 힘들었다. 마치 옷가게에서 점원이 말을 걸면 뭐라도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호연을 붙잡고 슬쩍 그림자를 사용해 기척을 죽여 버렸다. 기자들이 그런 우리 쪽을 멍하니 보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
크툴루의 심장을 맞힌 것으로 유명해진 바타르 또한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좋은 건 원래 잘 배워서 따라 하는 거다.
그날 가장 많은 조회수를 차지한 기사의 제목은 아카샤(ākāśa)의 전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