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에 홀린 어릿광대 (17/34)

#달에 홀린 어릿광대

거울에 비치는 나를 보았다. 얌전 떠는 양갓집 규수 같은 모습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저고리의 고름을 다듬으며 강유진에게 말했다.

“안 도망가니까 그렇게 불안한 얼굴 하지 말아요.”

“…솔직히 믿기지 않지만 진작 도망칠 수 있는 거 옷 갈아입을 때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믿기기도 하네요.”

논리에 기반한 믿음이었다.

그녀의 말에 난 설핏 미소를 지었다. 목을 간지럽히는 깃을 정리했다. 누구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참 단아한 척하면서 화려한 한복이었다.

“연회의 콘셉트가 손 많이 가고 식상하네요.”

내 투덜거림을 강유진은 내가 입은 한복 이야기를 하며 못 들은 척했다.

“그거 챙기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구겨지거나 망가질까 봐 얼마나 애지중지 챙겼는지 모를 거예요.”

아공간 장신구에서 끄집어내는 거 다 봤는데. 강유진은 뻔뻔하게 생색을 냈다. 흘겨보는 내 시선에 강유진이 헷, 하고 웃었다.

아공간에 넣은 수많은 물건 중 하나를 잊지 않은 것도 노력이라면 노력이었다. 다 입었냐 묻는 강유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거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금색 실로 화려한 수가 놓인 검은 치마가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넓게 퍼졌다.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라니. 모나미 스타일 색감 조화였다.

웬만하면 실패하기 힘든 색 조합이기도 했다. 허리에 묶는 기다란 끈을 예쁘게 리본 모양으로 묶어 길게 늘어트린 강유진이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반묶음으로 할까요?”

“마음대로요.”

뭘 해도 별로 상관없으니까. 내 말에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는지 보였다. 정작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시큰둥했다.

이번 연회의 콘셉트는 각국 나라의 전통 의상 입기였다. 그걸 당일 아침에 알려 줄 줄은 몰랐다. 주최 측이 아니라 강유진이. 적은 내부에 있었다.

“미리 알려 줬으면 도망쳤을 거잖아요.”

태연한 낯으로 그리 말하는 강유진에게 나는 사실 정정을 해 주었다.

“안 알려 줘도 도망가죠.”

어쨌든 유종의 미, 예의 등 이것저것 갖다 붙인 이유 때문에 나는 도망가지 못했다. 솔직히 당장 도망이야 갈 수 있지만. 내 행동으로 인해 곤란해질 사람들을 위해 애써 참았다.

하얀 향낭과 함께 장식된 노리개의 실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강유진의 인형 놀이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음 같아선 편하게 도포에 두루마기나 걸치고 가고 싶었지만 그건 싸우자는 의미의 전투복이었다. 인제 와서 귀찮아질 수는 없었다.

옆머리를 붙잡고 쫑쫑 땋았다가 다시 풀고 디스코 땋기로 다시 시도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한국에 갈 수 있는 거죠?”

“별일 없으면 그렇겠죠.”

강유진이 오른쪽 옆머리를 길게 땋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놓으면 안 된다는 말은 덤이었다. 왼쪽 옆머리를 디스코로 땋는 그녀를 보다 눈을 감았다.

확 놔 버릴까. 묘한 충동심이 들 때쯤 내 손에 쥐어졌던 머리가 그녀의 손을 다시 옮겨졌다. 눈을 떠 거울을 보니 반 묶음으로 묶인 머리가 보였다.

한복에 어울리는 하얀 실과 금색 실로 자수가 놓인 검은 댕기를 들고 온 강유진이 그것을 뒷머리에 묶는 것이 보였다.

“댕기 묶는 법도 알아요?”

“검색하고 왔죠. 그나저나 류, 한복 잘 입네요? 고름 묶는 것도 안 헤매고.”

“자주 입었거든요. 여자 한복이든 남자 한복이든.”

랑이 내게 지어 준 한복만 몇 벌인지 모른다. 불 장난하다 태워 먹은 것들도 많았지만. 이래저래 그에게는 받은 것이 많았다.

“…….”

무슨 전남친도 아니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랑과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거스러미 하나 보이지 않는 손가락 끝을 보다 풍성한 치맛자락에 숨겼다.

전날 이호연이 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손톱깎이로 죄다 다듬어 놔 뜯을 것도 없었다.

상자 안에 잔뜩 있는 뒤꽂이를 고르던 강유진이 슬쩍슬쩍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 푸른 불꽃에 대해선―.”

“나중에요.”

“…….”

“그거, 지금 말고 그냥 나중에 이야기해요.”

거울 속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 판판하고도 차가운 유리를 손끝으로 툭 쳤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쟁이의 얼굴이었다.

작은 하얀 꽃 무리 모양의 장식을 내 귀 옆에 꽂아 주며 강유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중에, 얘기할까요….”

“네.”

나중에. 언제일지 모르나 나중에.

그녀와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어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 만남도 이것보다는 발랄하고 즐거웠다. 꼭 내가 망쳐 버린 것 같았다. 아닌 걸 알면서도.

“신발은 원래 있는 거로 신을게요. 색도 잘 맞고.”

검은 꽃신에 발을 넣었다. 익숙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다 방 한편에 있는 소파에 얹어 놓은 두루마기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거 챙겨 가려고요?”

“우리 애는 안 싸운다고 한 국가가 단 한 곳도 없었잖아요. 이렇게 다 모이는 건 또 처음이고.”

혹시 모르는 거니까. 내 옆에 서서 올바른 패션이 아닙니다, 하는 강유진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대충 장옷이라고 생각해요.”

“그거 두루마기잖아요.”

“두루마기나 장옷이나 뒤집어쓰면 그게 그거지.”

“다른 건데요.”

“전 그렇게 고증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이건 내 예상이지만 주최 측이 말한 대로 순순히 장비랑 무기 다 두고 나온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지나쳐 거울을 보았다. 옅은 화장을 한 얼굴이 조금 낯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꾸미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얌전한 규수처럼 보일 것 같기는 했다. 단정하게 꾸민 모습이 꼭….

“무슨 선보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툭 튀어나온 내 말에 옆에서 장신구 담은 상자를 정리하던 강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물둘이 무슨 선이에요. 나도 선은 안 보는데.”

“이제 스물셋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 봤자 이십 대 초반인 건 똑같잖아요. 간 건강할 때 술 많이 먹어요. 스물넷부터 한 살씩 먹어 갈수록 내 몸이 예전 같지가 않은 걸 느끼게 될 테니까.”

참 좋은 거 가르쳐 준다. 강유진의 말에 웃으면서도 내 눈은 여전히 거울을 향해 있었다. 스물둘.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 외모가 그렇게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열 살과 열다섯 살은 확연하게 다르지만 열다섯 살과 스무 살은 생각보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스물과 스물둘 또한. 앞으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이렇게 많이 변했나 싶을 때는 언제쯤 올까.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가. 거울에 보이는 얼굴은 예쁘게 꾸미고 화장까지 해 놔서 그런지 열아홉 막바지에 바쁘게 놀러 다니던 그때와 똑같은 것 같기도 하고, 졸업식에서 웃고 있던 그때와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던 갓 스무 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갔다. 가만히 거울 속 나를 보다 눈을 돌렸다. 차마 거울 속 나에게 이만하면 그 거지 같은 세상에서도 잘 컸어, 라는 말을 못 하겠다. 자라지 않은 것 같으니까.

어깨에 걸친 것을 만지작거리다 강유진에게 말했다.

“난 연회장 이호연이랑 같이 갈게요.”

“중간에 도망만 가는 거 아니면 마음대로 해요.”

“도망은 이미 한번 갔다 와서 안 갈 거예요. 그럼 이따가 봐요.”

응? 하며 되묻는 강유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방을 나왔다. 풍성한 속치마와 화려한 겉치마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복도를 스쳤다.

이호연의 방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잠시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오.”

잘 어울려. 이호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통역기에 이어 한복까지 커플 룩이었다.

까만 포 위에 금실과 하얀 실로 화려한 수가 놓인 새하얀 답호를 입은 이호연의 움직임에 따라 허리에 묶인 까만 끈이 흔들거렸다.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려서 깜짝 놀랐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바지는 검은색이었고 인제 보니 신발도 검은색이었다.

색 조합은 나와 같은 모나미로, 깔끔하고 단정한데 옷 위에 놓인 수가 워낙 화려해 밋밋해 보이지 않았다.

저기에 호랑이 귀와 꼬리까지 꺼냈으면 사람 홀리러 산에서 내려온 둔갑한 요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람을 홀려서 홀라당 잡아먹는 그런 호랑이.

저를 구경하는 내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이호연의 귓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올랐다.

“예뻐요….”

“너도 예뻐.”

난 내 취향이 한복인 줄 몰랐다. 음울했던 기분마저 잊게 만드는 새로운 취향의 발견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구경하는데 우리 쪽으로 오는 두 명 정도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당히 익숙한 기척이었다.

이호연의 소매를 잡아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몸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재질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페이즐리 오스틴과 정장을 빼입은 에드워드 로거스였다.

신사모까지 쓴 에드워드 로거스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마가 아니네?”

영국의 전통 의상 하면 생각나는 건 킬트 아닌가? 그런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우아하게 머리를 한쪽으로 틀어 내린 모습이 무색하게 페이즐리 오스틴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러다 열심히 세팅한 머리가 망가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토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자를 쓴 에드워드 로거스가 나를 떨떠름하게 보며 말했다.

“그 말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둘이서 내 반응을 예상하며 온 듯했다. 신사용 지팡이까지 손에 쥔 에드워드 로거스의 모습은 솔직히 말하면… 멋있기는 한데 마술쇼가 생각났다.

그나저나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슬쩍 그의 지팡이를 살피며 속으로는 안심했다. 선생님이 갖고 오지 말라고 한 물건을 나만 갖고 온 게 아님을 알았을 때의 안도감이었다.

방긋방긋 웃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보던 에드워드 로거스가 자신의 의상을 설명했다.

“나는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잉글랜드 출신이야. 킬트는 스코틀랜드 쪽 의상이고. 그리고 난 이쪽이 더 좋아.”

“아쉽네. 킬트 입고 왔으면 예쁘다고 칭찬해 주려고 했는데.”

“그쪽 애인한테나 해, 그런 말은.”

“이미 실컷 했어.”

불만스러워하는 얼굴의 로거스에게 웃어 주며 그의 손에 있던 지팡이를 뺏어 들었다. 마법 지팡이의 현대적 재해석인가?

그것을 살펴보는데 손잡이 아래에 틈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거 잡아당기면 칼 나오는 그거야?”

내 물음에 에드워드 로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굳이 이걸? 솔직히 에드워드 로거스는 몸 쓰는 쪽으로는 영….

의아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뭘 그런 당연한 것을 모르냐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멋있잖아. 그리고 실제로도 원래 그런 모양이었어, 옛날에.”

“…….”

고증 지키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내 어깨에 걸쳐진 두루마기를 보며 칙칙해 보인다는, 와이셔츠 빼고는 올 블랙인 그의 정강이를 한 번 차 주고 두루마기를 그림자 속에 넣었다.

“?”

지팡이를 다시 돌려주며 살펴본 로거스의 느낌이 전과는 달랐다. 조언을 주면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성취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 의외였지만.

그들과 함께 걸어가다 로거스와 이호연을 앞으로 보내고 오스틴과 뒤편에 서서 걸었다. 그런 내 행동에 두 남자가 서로를 어색한 얼굴로 보다 나를 돌아보았다.

“앞을 보고 걸으세요.”

내 말에 둘 다 정말 앞만 보고 걸었다. 같이 가고는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의아함을 담아 나를 보는 오스틴의 옆으로 붙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단검 하나만 나 주면 안 돼?”

“단검을?”

“응. 실험 좀 해 보고 싶은 거 있어서.”

오스틴의 눈동자가 또르륵 움직였다. 주변에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눈이 있지는 않나 살피는 눈치였다.

한복 치마가 풍성한 것이 이럴 때는 참 좋았다. 부드러운 비단 치마 위 내 손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검은 치맛자락이 그것을 숨겼다.

나는 그것은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검은 치맛자락을 타고 떨어진 단검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봐도 자연스러운 모습에 오스틴이 옆에서 작은 감탄 소리를 냈다.

“이거 시간 지나면 사라져?”

“내가 사라지게 하겠다고 마음먹거나 나한테 문제가 생기거나 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는 않지.”

“그런데 달라고 한다고 정말 줘도 되는 거야?”

요구한 내가 한 말은 아니었다. 사실 정말로 줄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도 아니었다. 다소 뜬금없는 요구를 이렇게 곧바로 들어줄 줄은 몰랐다.

그냥 한번 찔러 본 거였는데. 내 물음에 오스틴은 작게 키득거리더니 로거스를 가리켰다.

“에디에게 조언해 준 답례라고 생각해.”

“너한테 좋은 일은 아니잖아.”

“아니. 좋은 일 맞아. 결과적으로 에디는 더 강해질 거야.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거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도 많아질 거야.”

“…….”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 가족이나, 친구나,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게 좋은 일이고, 내가 너에게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일인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새순 같은 연두색 눈동자가 휘어졌다. 암청색 드레스와 어울리는 예쁜 색이었다. 그 눈을 마주 보며 나는 덤덤히 말했다.

“가끔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굴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나쁜 애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에디가 들으면 기뻐할 거야. 그리고 나도 가끔은 한 대 치고 싶어.”

“그래서 본인한테는 말 안 해 주려고.”

우쭐대는 거 보면 딱밤 먹이고 싶어질 것 같거든.

“에디가 너 성격 나쁘다더라. 그런데 나는 네 성격, 제법 마음에 들어.”

오스틴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걷다가 말고 뜬금없는 악수 신청이었다. 머뭇거리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손안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마주 잡은 손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오스틴이 내게 말했다.

“페이즐리라고 불러. 아니면 리즈라고 불러도 좋아.”

페이즐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순순히 끌려가 주자 그녀는 내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이건 친구가 된 기념으로 주는 내 선물이야. 잘 챙겨.”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리즈.”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손안에 이 작은 선물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노리개와 함께 달려 있는 향낭을 열었다.

잘 감춰진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걸음을 서둘렀다. 저 멀리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두 남자는 여전히 어색하게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웅장한 문 하나가 보였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일정.

연회의 시작이었다.

***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페이즐리와 에드워드 로거스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들의 보호자를 찾아 떠났다.

이호연과 함께 천천히 연회장 안을 걸으며 내가 느낀 것은 하나였다. 정신없어.

각국의 대표자들이 자신들의 모국의 전통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나름 취지가 좋을지는 모르나 한데 모아 놓고 보면 정신없을 뿐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느 나라냐고 물어보는 수고를 덜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것도 상대의 의상이 어느 나라의 전통 의상인지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젊을 때 즐기라는 강유진의 조언을 들을 겸 샴페인 한 잔을 들어 살짝 맛을 보았다. 달달함보다는 알코올의 쓴맛이 느껴졌다.

“…써.”

그런 내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호연이 내 손에 있던 잔을 가져가고 대신 입 안에 쿠키 하나를 넣어 주었다. 내가 한입 맛본 술은 이호연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강유진이나 찾을 겸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째 대부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소개팅이 끝난 게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로맨스 말고 시끄럽게 팡팡 터지는 장르를 찍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이호연의 팔에 찰싹 붙어 있으니 말을 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회를 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세계의 비밀에 대한 오피셜을 발표하고 나면 방으로 바로 도망가야지.

강유진이 말하기를 테오그라젠스란 존재에 대한 것만 밝히기로 이야기 나눴다고 한다. 푸른 불꽃과 나비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 전직관들이 천공 섬의 주민들이라는 것은 알려질 거고.

그 사실이 미디어에까지 알려질지는 모르겠다. 혼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 비밀로 해 두자고 할 수도 있었다. 정보의 차단만큼 전쟁의 전조 같은 게 없는데.

알리지 않는다는 게 뭔가, 좀 그랬다. 내 바로 옆에 있는 위협을 모르고 웃는 것 같은, 기만당하는 것에 가까운 행위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가져오는 그 특유의 생각들과 느낌을 모르지 않으니까.

“…….”

로웰 콕스가 노아 이스벨라에게 들은 내용도 테오그라젠스에 대한 부분까지라고 하니, 나에 대한 이야기가 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노아 이스벨라도 그거에 대해선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내 입장에서는 다행인 부분이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라도 된 것 같아 별로이기는 하지만.

“?”

눈치만 보고 다가오지 않는 이들 중 우리 쪽으로 가까이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화려한 플레이팅을 자랑하는 음식들에서 시선을 떼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푸른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은 바타르가 눈을 가늘게 휘며 웃는 낯으로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 첫 만남을 제외하고는 원래도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니던 그이기에 새삼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연회가 끝나면 바로 돌아가는 거죠?”

“그렇죠. 바타르도 돌아갈 거 아닌가요?”

내 물음에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 모양으로 자른 딸기가 올라간 미니 타르트 하나를 들며 그가 말했다.

“다음에 놀러 가면 관광시켜 주세요.”

“한국에 놀러 오게요?”

“무지개가 뜨는 나라, 솔롱고스. 우리는 당신의 나라를 그렇게 부른답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바타르가 내게 무지개가 뜨는 나라에서 온 귀인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생각해 보면 꽤나 예쁜 말이었다.

“무지개는 잘 안 보이지만 더 재미있는 거 많이 보여 줄게요.”

“기대할게요, 류.”

가벼운 인사치레를 끝으로 그는 자리를 피했다. 나 말고도 나름 친분이 생긴 사람들이 있는지 몇몇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이번 만남에서 가장 묘하다 할 수 있는 인연이었다.

“사적이기만 한 친분 목적을 갖고 친구 하자고 한 건 아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원하는 게 뚜렷하니 의심할 필요도 없고요.”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바타르는 친구라도 되고 싶다고 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마냥 꿈과 희망이 가득하지는 않았다.

아카샤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몽골은 대부분의 전직자들이 죽었다. 대표로 뽑을 만한 전직자가 없을 정도였다.

바타르는 개인적인 이유로 이곳에 왔다고 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이룬 것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모임의 목적인 친목질도 가장 잘 따랐고.

몽골이 감당 못 할 하늘 조각이 떨어진 상황이 왔을 때, 그가 도와달라고 한다면 도와줄 의향은 있었다. 그러니 바타르는 이곳에서 가장 얻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업 같은 거 했으면 잘했을 것 같아. 수완이 좋잖아.”

“몽골로 돌아가 길드를 만들어도 잘할 것 같기는 하네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친분 있는 사람, 그 이상은 친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상대도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는 눈치고. 재고 따지기를 잘한다.

“응?”

앞이 소란스러웠다. 싸움 났나? 이호연과 함께 사람들을 피해 앞쪽으로 가 보니 무대 위에 로웰 콕스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에이.

연회장의 불이 꺼졌다. 유일한 빛은 무대 위. 모두가 그녀에게 집중했다.

“…나갈까?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인데.”

내 말에 이호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간 아무 말 없던 그는 내 손을 잡아 테라스 쪽으로 이끌었다.

테라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무대 위에 로웰 콕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는 듯, 테라스의 문이 닫히는 순간에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리 벽 너머에서 로웰 콕스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테오그라젠스. 천공 섬. 그곳의 주민들. 다만 노아 이스벨라와 대화할 때는 몰랐던 내용도 한 가지 추가되어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 창. 테오그라젠스 이외에 또 다른 신격적 존재가 있으며 그자는 우리의 편이고, 우리가 전직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든 존재가 또 다른 하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아 이스벨라와는 또 다른 하나에 대해 이야기 나누지를 못했다. 워낙 정신없기도 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아쉬웠다.

“…….”

그럼 시스템 메시지가 현대판 신탁 같은 건가? 테오그라젠스도 시스템 메시지를 이모티콘 뿌리면서 사용하던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난간에 기댔다. 이왕 밖으로 나온 김에 도망이나 갈까 하다가 그래도 마지막이니 끝까지 얼굴은 비치자고 마음을 바꿨다.

껌껌한 세상에서 빛나는 것은 우리가 머무는 호텔뿐이었다. 까맣게 칠해진 하늘에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손을 뻗어 어둠을 긁어내면 별무리가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았다.

이호연이 내 옆으로 와 나처럼 난간에 기댔다. 우리는 별 아래에서 그렇게 시간을 죽였다. 연설이 끝나고 웅성거리는 연회장에 소음이 잦아들 때까지.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보게 된 풍경은 약간은 소란스럽지만 처음 왔을 때의 분위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부만 소란스러웠다. 그 일부는 보호자로서 이곳에 온 이들. 그러니까, 후방의 사람들이었다.

전직자들을 언제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이들이었다. 테오그라젠스라는 존재에 놀라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래 봤자 원래의 삶과 그리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괴물이랑 매일 쎄쎄쎄 하는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테오그라젠스가 그렇게 유별난 존재인 것은 아니었다. 숨겨진 찐 보스 몹 정도의 취급이려나.

물론 보호자로 보이는 이들은 모두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전방이냐 후방이냐에 따른 차이이기도 했다.

후방의 사람들은 생각이 많지만, 전방의 이들은 하나만 생각하면 된다.

괴물이나 신이나 하늘 조각에서 기어 나오는 것들. 내가 죽이거나 죽임당하거나. 어차피 내가 없애야 할지도 모르는 것. 지금 고민해 봤자 어차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답을 찾는 것은 후방의 서는 이들의 몫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찾아낸 것들을 가지고 괴물을 상대하면 되는 거였다.

자연스럽게 연회장의 사람들이 둘로 나뉘었다. 심각한 표정에 보호자들이 무리를 이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낯을 굳혔으나 천천히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온 전선에 서는 자들은 파티의 술과 음식을 맛보며 원래라면 만나지 못했을 타국의 전직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웃을 때 실컷 웃기라도 하겠다는 듯. 전직한 이들의 성격이 호전적으로 변하는 것은 비단 괴물을 상대하며 거칠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 그때, 그럴걸, 하고 후회를 가장 많이 하는 이들이니까 거치지 않고 서슴없어지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호연도 참 독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심지어 죽음 직전까지 가 봤으면서 끝까지 제 감정을 짓눌러 버렸다는 점이.

각기 다른 옷을 입었는데도 그 옷으로 보이는 차이점보다 행동에 차이점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누가 전선에 서는 자인지 너무 쉽게 구별이 되어서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할 것도 없으니 이만 방으로 갈까 싶어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답지 않게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

“우리, 방 갈까요?”

갑자기? 물론 나도 방에 가자고 할 생각이었긴 하지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 우리의 뒤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려는 내게 이호연이 뒤돌지 말라며 우는 소리를 냈다. 어, 설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이 이호연의 어깨를 잡아챘다.

“잡았다.”

“올리버 로스….”

이호연이 제 어깨를 잡은 올리버 로스를 돌아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올리버 로스의 초록색 눈이 번뜩였다. 집착 광공의 모습이 엿보이는 눈이었다.

카우보이 복장에 잘 어울리는 그을린 피부에 진한 갈색 머리를 가진 올리버 로스는 이호연과 비슷한 키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전형적인 신체 계열하면 생각나는 외양이기도 했다. 셔츠가 터지는 거 아닐까 싶은 거대한 몸을 가지고 허리에 조그마한 장식용 총을 걸어 놓은 것이 영 안 어울렸다.

내 주먹의 이름이 총이지 하면서 주먹부터 날릴 것 같았다. 그리고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져 있었는데, 이호연이 용으로 변형하는 법을 배운 이후 갖게 된 변화와 비슷했다.

다만 차이점은 이호연은 본인이 힘을 사용할 때나 감정이 격해지면 그렇게 변한다는 거고, 올리버 로스는 이호연이나 내가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영구적으로 변한 것처럼 전직을 통해 동공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거였다.

“결과는 옛날에 나왔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굽니까?”

제 어깨를 잡은 남자의 손을 잡아떼며 이호연이 물었다. 올리버 로스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한 번 더 붙어 보자!”

“싫어요.”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꺼져.”

이호연이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건 처음 보았다. 싸우자! 하며 얼굴을 들이미는 올리버 로스를 밀어내는 그를 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상대해 줄까?”

두 사람의 행동이 멈췄다. 이호연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고 올리버 로스는 이건 또 뭐지? 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너 마법 계열 아니야? 내가 겨루고 싶은 건 신체 계열답게 힘 대 힘이야. 편법이 아니라.”

“으음?”

마법은 편법이라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랑 9서클 마법사가 서로 마주 보고 싸우면 당연히 소드마스터가 이기지만 멀리서 메테오! 하면 당연히 마법사가 이긴다.

그것도 나름 실력은 실력이지만 묘하게 비겁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연회장에 있는 사람 중 절반이 마법 계열일 텐데 저런 말을 하다니.

겁이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 덕분에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은 집중되었고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올리버 로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중엔 에드워드 로거스도 있었는데 삿대질하는 그의 손을 페이즐리가 옆에서 곱게 접어 주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올리버 로스를 살펴보았다. 힘과 피지컬은 따로 노는 개념이기에 신체 계열 전직자라고 해서 다 몸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 예로 이나연은 평범한 성인 여성의 체형이지만 한 손으로 성인 남성 둘을 한꺼번에 매달고 뛰어다닐 수 있었다. 겉모습으로 구별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올리버 로스는… 헬스장 VVIP 같은 피지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서니 내가 굉장히 자그마한 꼬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힘도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가 마법 계열치고는 힘이 좋아서 말이야. 날 이기면 이호연이랑 싸우는 거야, 어때?”

내 말에 올리버 로스는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마법사가 힘이 좋아 봤자지.”

힘법사를 무시하지 마세요. 자신만만한 그의 뒤편에서 에드워드 로거스가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거스는 얼떨결에 내 힘을 직접 겪어 본 적이 있었다.

페이즐리가 실수로 그의 손목에 잘못된 도수 치료를 했을 때였다. 평범한 사람은 웃는 얼굴로 남의 뼈 못 맞춘다.

옥상에서도 힘으로 몰아붙이는 마법사를 경험하기도 했고. 은근히, 다사다난한 인생이었다, 쟤도.

“…정말 하게요?”

이호연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못 할 것도 없었다. 저 멀리서 강유진도 파이팅 하는 제스처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보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상대가 먼저 시비 걸었으니 괜찮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못마땅한 얼굴인 올리버 로스에게 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쪽이 원하는 대로 마법 없이. 순수하게 힘 대 힘으로. 어때?”

내 말에 올리버 로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일견 비웃음이 서려 있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마법사랑 뭘 하란 건지 모르겠지만…. 지고 나서 딴소리하기 없기다. 너, 나랑 다시 한번 겨루기야.”

올리버 로스가 이호연에게 말했다. 그는 묘한 낯을 하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올리버 로스는 이호연 다음으로 유명한 신체 계열 전직자였다.

그의 이름이 유명한 이유에는 드래곤으로 변형할 수 있어서도 있지만, 변형하지 않은 상태로도 괴물의 신체를 두 쪽으로 찢어 버릴 괴력이 있어서였다.

신체 계열의 히든 전직자라도 그 정도의 괴력을 가진 이는 드물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궁금증이 생겼다. 변형을 할 수 있으면 그만큼 힘이 더 세지는 것인지.

비정상적으로 힘이 센 두 사람의 공통점은 변형 스킬을 가졌다는 거였다. 물론 여우나, 토끼 같은 변형 스킬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평범하게 힘센 정도였다.

나와 이호연의 힘 차이는 엇비슷하거나 내가 조금 밀리는 정도였다. 올리버 로스가 나를 힘으로 못 이기면 어차피 이호연한테 가망 없다는 소리였다.

“근데 뭘 어떻게 싸우게요? 나랑 드잡이질이라도 하게요?”

몸싸움 벌이기엔 오늘 꾸민 것이 아까웠다. 치고받고 싸우면 그건 그것대로 제지당할 것 같고.

내 말에 올리버 로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몇몇 마법 계열들이 뒤에서 야유를 보냈다.

“너랑 무슨 몸싸움이야. 간단하게 힘 대결할 수 있는 거로 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힘 싸움이면….

“팔씨름?”

올리버 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손을 들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흘러나온 검은 그림자들이 테이블 위에 있던 음식들과 물건들을 구석으로 몰아서 놓았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올리버 로스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네가 편법을 쓰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심판 보면 되지.”

에드워드 로거스가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다홍색 눈에 담긴 것은 너 이 자식, 잘 걸렸다, 하는 생각이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지 아닌지는 같은 마법사가 아는 법이지. 그렇지?”

에드워드 로거스를 내려다보며 올리버 로스가 말했다.

“같잖은 마법사들끼리의 유대감이랍시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같잖은 마법사한테 힘으로 지는 건 아니겠지?”

저러다 둘이 싸울 것 같았다. 나와는 달리 평범한 마법사인 에드워드 로거스는 깝죽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그런 그의 옆구리를 꼬집는 것으로 그의 입은 다물어졌다.

여기서 망신 좀 당하면 이제 귀찮게 안 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리버 로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이 테이블이 얼마나 단단할지 모르겠다. 매끄러운 하얀 천 위에 손을 올리며 주변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직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테이블 부서져도 돼요?”

“…네?”

되묻는 직원의 말을 무시하며 올리버 로스가 자세를 잡았다.

“빨리 끝내. 난 저 녀석이랑 다시 한번 승부를 봐야 한다고.”

내가 자신한테 질 거라는 사실을 전제에 깔고 있는 오만한 말이었다. 저렇게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을 보니 이호연 외에는 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나는 저 힘에 미친 집착 광공 스토커에게 새로움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남의 호랑이를 왜 괴롭혀.

“손이 으스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인데.”

“만약 그렇게 되면 그쪽한테 병원비 청구하지, 뭐. 그쪽은 나한테 청구하지 말고.”

미국 병원비가 그렇게 비싸다던데. 여상한 어조로 한 내 말에 올리버 로스는 우렁차게 웃었다. 손을 마주 잡고 보니 무슨 어른과 아이 손 같은 모양새였다.

“쓸데없는 걱정 마. 재밌었으니 안 다치게 나름 신경 써 주지, 뭐.”

“…재밌다는 말이 안 나올 텐데.”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이호연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자세를 잡고 이호연에게 말했다.

“심판. 숫자 세세요.”

이호연은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허망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내 말을 따라 맞잡은 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 그에게 나는 웃으며 속삭였다.

“널 위해서라면 이런 헛짓거리,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

지금 한 말 너무 인소 남주 같았나. 하지만 이호연의 반응을 보니 마냥 싫은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이호연이 숫자의 마지막을 세자마자 나와 올리버 로스는 동시에 손에 힘을 주었다. 맞잡은 손의 위치는 시합이 시작되기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 올리버 로스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근처에 서 있던 에드워드 로거스가 헛숨을 내뱉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시작 안 한 거야?”

“몰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수록 올리버 로스의 낯이 점점 더 굳어 갔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다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확실히 힘이 좋은 편이기는 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다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그 증거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팔이 조금 뻐근했다. 이 정도면 됐나 싶어 고개를 들자 보이는 올리버 로스의 얼굴에선 포기의 기색이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다른 내가 돼서 다시 도전하세요. 탈락입니다!”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올리버 로스의 손이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이 박살 나며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건들을 다른 테이블에 옮기는 건데.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직원들과 달리 구경하던 전직자들은 환호를 질렀다.

그 환호의 주인들은 마법 계열들이었고, 신체 계열들은 제 눈을 비비거나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재미는 없었지만 안 다치게 나름 신경 써 줬어.”

“…….”

이제 이걸로 좀 겸손해지려나.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지금 시대에 마법 계열을 무시하는 올리버 로스의 버릇은 고칠 필요가 있었다.

개인만 보면 신체 계열이 우수할지 모르나 다양성을 따지면 마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와 같은 신체 계열 전직자가 그를 살리는 것보다 마법 계열 전직자가 그를 살리는 것이 더 쉬웠다. 마법은 멀리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멍하니 테이블에 박힌 손을 보는 올리버 로스의 모습을 보다 뒤를 돌았다. 어차피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이니 이 정도 사고는 괜찮겠지.

이호연에게 이만 가자고 말하려는데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

일주일 동안 따라다니면서 한 번만 싸워 보자고 조르고, 쫓아다니고, 시비 걸었다고 했었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았다.

초록색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한 번 더. 한 번만 더 제대로 싸워 보자. 이런 장난 같은 거 말고.”

“…마법사한테 몸싸움 권하지 마세요. 싫어요. 안 돼요. 저리 꺼져요.”

“한 번만!”

싸움에 미쳤나 봐. 주저앉아 치맛자락 잡는 올리버 로스의 손을 잡아 떨구고 있는데 이호연이 그런 그의 손을 발로 찼다.

“귀찮게 굴지 마.”

이호연의 발길질에 손이 떨어진 올리버 로스가 눈을 끔벅이더니 이호연을 돌아보았다. 마법사한테 진 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가 조언 하나 해 줄게. 도망가. 저거 눈 맛 간 거 보이지? 도망가.”

“…….”

슬쩍 내 옆으로 온 에드워드 로거스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첫 만남에서 올리버 로스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가 끝났나 보다.

올리버 로스를 밀어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이호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류. 먼저 돌아가요.”

“…뭐 하게?”

“차라리 이참에 다신 못 덤비게 하려고요.”

어떻게? 라고 묻지 않아도 슬며시 변한 동공을 보니 언어로인지 몸으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예 묻어 버리고 온다는 뜻이 아니길 빌기로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남자 하나가 로스를 붙잡으려 했지만, 벌떡 일어난 거구의 몸짓에 끄악, 하며 뒤로 넘어졌다.

“드디어 나와 다시 싸워 주는 거야?”

“…….”

어린아이처럼 신난 올리버 로스에게는 별로 미안하지는 않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달라!’는 올리버 로스뿐만 아니라 이호연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로스의 보호자로 보이는 넘어진 남자의 어깨를 강유진이 짚는 것이 보였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자 쪽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니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이호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에드워드 로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구경꾼들이 그런 내 행동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말 걸고 너와 나는 운명의 데스티니 안 하는 거 하나는 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무나 하나 데리고 힘자랑 좀 할걸.

중간에 눈이 마주친 페이즐리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고, 내가 연회장을 벗어날 때까지 뒤통수 따끔거릴 정도로 쳐다보는 로웰 콕스의 시선은 무시하며 복도로 나왔다.

“바닷가에서 싸우려나….”

애초에 미국이 이 호텔을 고른 이유가 바닷가여서였다. 여차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서 싸우라는 의미였다.

난 미리 가서 짐이나 싸야지. 손가락 끝을 까닥여 꼬마 도깨비에게 이호연 쪽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쉬고 있다가 싸움 끝나면 데리러 가야지.

두어 개의 그림자 조각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비?”

겨울 바다에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것이 내 앞에서 팔랑이고 있었다. 나비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동그란 자국이 생겼다.

묘한 황금빛을 뿌리는 투명한 물의 나비였다. 마치 내게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그것은 천천히 날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노아 이스벨라가 보여 준 세계의 비밀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이랬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나비를 따라 걸었다.

한번 날갯짓할 때마다 떨어지는 물방울은 헨젤과 그레텔의 조약돌, 혹은 빵조각과도 같았다. 이 끝에 있을 남자를 보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비는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고, 호텔 건물을 빠져나와 있는지도 몰랐던 정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겨울의 삭막함에도 제법 푸릇한 정원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 하나 없는 이곳을 비추는 것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달 하나였다.

불을 피울까 고민하며 손을 드는데 나비가 사라졌다. 완전한 물로 변해 바닥에 스며든 흔적을 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높은 벽 역할을 하는 식물의 삐져나온 잔가지의 잎 하나를 뜯으며 모퉁이를 지났다. 흐릿한 꽃향기가 잔상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별로.”

그래서 답했다.

푸른 천장을 받치는 은색 기둥이 화려하고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고전 로맨스 영화의 남녀 주인공의 밀회 장소 같은 정자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런 그의 눈 아래에는 예의 검은 나비 문신이 어둑하게 남아 있었다.

정자로 걸어가는 내내 어디선가 날아든 물의 나비가 살짝씩 나를 스쳐 지나갔다. 불을 피워 증발시켜 버릴까 하다 관두었다.

저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이호연과 올리버 로스가 나간 뒤 나름 연회 분위기를 내기 위해 연주하는 것 같았다.

나비 또한 그것을 들었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공주님은 피아노 칠 줄 알아?”

“초등학교 때 배웠어.”

“잘 쳐?”

“포도알 칠하기만 열심히 해서, 별로.”

손가락 끝에 물의 나비를 앉히며 놀던 그가 나비를 하늘로 올려보내며 나를 봤다. 하늘색에 섞인 보랏빛은 오늘도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주변에는 눈 빛나는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만히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다시 만나면 공주님이 바로 내 목부터 베는 거 아닌가 걱정했어.”

“나도 내가 네 목 베어 버리는 거 아닌지 걱정했어.”

“우리 잘 맞는 것 같네?”

“아니. 우리 사이는 일기 예보와 날씨 같은 관계야.”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사이인데?”

“잘 안 맞는 사이.”

낮은 웃음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눈을 휘며 웃는 그를 보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이얀 입김이 숨을 내뱉자 길게 흘러나왔다.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모양새다.

“안 물어봐?”

“뭐를?”

“그냥. 많잖아. 봤을 거 아니야, 세계의 비밀. 푸른 불꽃과 나비가 왜 운명인지도 대충 알았을 거고.”

먼지 쌓인 테이블 위를 손가락 끝으로 쓸다가 손을 떼었다. 물의 나비 한 마리가 그런 내 손끝이 앉았다가 날아갔다.

깨끗해진 손끝을 보다 그에게 말했다.

“너는 뭐야?”

“나는 나야, 라고 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글쎄. 나는 뭘까.”

“말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야. 나도 나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여명과도 같은 눈이 나를 보았다. 웃지 않는 낯이 낯설었다. 자신의 눈 밑, 검은 나비 문신을 더듬던 그가 슬며시 웃었다.

“공주님은 왜 자기가 푸른 불꽃인지 모르지?”

“너는 안다는 듯이 말하네.”

“나는 모르지만 네 전직관은 알지. 그리고 내 전직관도.”

“…….”

전직관.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노아 이스벨라의 푸른 그림들. 신에게 총을 겨누고 그 총을 뒤로 숨기며 사도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말을 속삭인 존재.

그림에선 본인이 알아서 다시 태어나 테오그라젠스를 끝장내겠다는 듯이 말해 전직관으로 이곳에 넘어왔다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그림 속 남자가 전직관이 아니라면 눈앞에 남자가 설명되지 않았다.

“내 전직관은 공주님의 전직관에게 관심이 지대해. 인도자에게 있어 인도할 것들을 모아 줄 구심점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거든”

“…….”

“그래서 내 전직관은 나름 중요한 것을 많이 알고 있어. 가령… 공주님의 전직관의 죄악이 무엇인가.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공주님이 선택받았는가, 같은 거.”

사도들에게 속삭이던 푸른 선의 남자처럼 나비가 내게 속삭였다.

“알고 싶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테오그라젠스와 또 다른 하나, 푸른 불꽃과 나비에 대해 알았지만 랑과 호랑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죄악. 그 단어를 떠올리니 귓가에 누가 속닥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그걸, 알아, 야, 해. 말해. 말해.

대답 없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비가 입을 열었다.

“알려 줄게. 공주님이 알면 좋겠어. 나처럼 전부 다 알아 버리면 좋겠어.”

“…….”

“하지만 알려 주고 싶지 않기도 해.”

탱커 같은 새끼. 쥐고 있던 의자 손잡이가 우그러졌다. 그것을 본 나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의자에 몸을 기댄 그가 나른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말해 줄게.”

“무슨 부탁.”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손에 턱을 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내 이름을 지어 줘. 나를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정의해 줘.”

“…….”

“내가, 누구라고 해야 하는 건지 좀. 알려 줄래?”

웃는 낯을 흉내 내는 거짓말쟁이가 여기 하나 더 있었다. 다만 그의 거짓은 웃음, 그 자체였다.

“이름?”

“응. 이름.”

“원래 이름은 뭔데?”

내 질문에 애써 끌어 올린 것 같던 그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무감한 얼굴이 나를 보았다. 그는 꿈결을 헤매는 나비처럼 어딘가 멍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원래 이름…. 옛날에 있기는 했는데, 엄마 죽고 나서부터 아무도 안 불러 줬어. 그래서 까먹었고.”

“…….”

“나는 아버지에게 있어 위대한 신의 첫 번째 종이지, 자식이 아니었거든. 나비.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그렇게만 불렸더니 이름을 잊고 말았어.”

턱을 괴고 있던 그가 몸을 바로 했다. 그런 그를 보니 속이 불편한 기분이었다. 낯을 굳히는 나를 보며 그는 오히려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는 공주님이 나한테 틱틱거리는 게 좋아.”

그의 말처럼, 나는 괜스레 틱틱거렸다.

“변태야?”

“아니. 성자한테는 아무도 틱틱 대는 그런 말투 안 쓰거든.”

그래서 좋아.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런 그를 한번, 먼지 낀 테이블 위를 한 번 보다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톰으로 하든가.”

“그건 싫어. 나중에 코 없어질 것 같은 이름이잖아. 내 미모가 보존되는 이름으로 해 줘.”

까탈스럽게 굴지 마. 조금만 더 성의 있게 지어 줘. 작은 투닥임 끝에 나는 나름 생각을 한 뒤 말을 뱉었다.

“쥬쥬. 닉네임이랑 어울리네.”

“무슨 의도로 말한 건지 알겠는데 나는 뾰로뾰롱 스타일 아니야.”

“그럼 쥬.”

“…….”

“쥬로 해, 그럼.”

표정이 묘해졌다. 약간 놀란 듯, 얼떨떨한 듯. 그리고 아주 약간 기분이 상한 것 같기도 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나는 무정하리만큼 무관심하게 보았고, 나도 알 수 없을 만큼 집중해서 보았다. 이름 없던 어느 신의 종자는 결국 슬며시 웃음 지었다.

“쥬…. 그래. 그게 제일 낫네. 공주님, 이름 진짜 못 짓는구나.”

“싫으면 말아.”

“아니…. 좋아. 그거 알아? 우리 엄마는 프랑스인이었다?”

“?”

갑자기 그걸 왜 말하냐는 눈으로 그를 보니 그는 그저 가늘게 웃었다.

“그냥. 그렇다고. 이름 마음에 드네.”

“…….”

쥬. 짧고 간결하고 부르기 편했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 낸 이름이라는 점에서 묘했다.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나로 인해 누군가가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나비, 이제는 쥬가 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을 빙글 돌아 내 앞으로 걸어온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밀었다.

“얼굴 들이밀지 마.”

손 아래 입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웃기라도 하는 걸까. 그의 피부는 차가웠고 뺨에는 별로 살이 없었다. 내 손 바로 위에는 검은 나비가, 그리고 휘어지는 눈이 있었다.

“…야!”

악, 소리를 내며 그를 완전히 밀어 버렸다. 그런 내 행동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질색하는 얼굴로 그의 팔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네가 개야? 왜 핥아!”

“호랑이가 물고 빨 때는 가만있었으면서.”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으며 왜 아는 건데. 화라도 낼까 하다가 솟구쳤던 감정을 자제했다. 말려드는 건 여기까지였다. 부러 차갑게 웃는 그를 밀어냈다.

“너랑 이호연은 다르니까.”

내 말에 웃는 낯이 금이 갔다. 그는 내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다, 하늘을 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그런 그의 숨결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맞는 소리인데, 기분은 나쁘다.”

“네가 나쁠 게 뭐가 있는데.”

“그야 내가 공주님을 좋아하니까 그렇지.”

“그래서?”

내 물음에 그는 뭐라 정의 내리기 힘든 얼굴을 했다. 조금, 상처받은 것 같기도 했지만, 비틀림이 엿보이는, 나를 비웃는 것 같은 그런 얼굴.

그는 내 손을 잡아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뿌리치려는 기색이 엿보이자 그는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날 미워하지는 말아 달라고.”

“…놓기나 해.”

손이 떨어졌다. 내게서 한 발자국 멀어진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공주님의 전직관의 죄악에 대해선 나중에 날 잡고 알려 줄게. 이야기가 길어질 거니까.”

“얘기가 다르잖아.”

“대신 따로 전해 줄 말이 있어.”

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매서운 겨울바람을 타고 물의 나비 떼가 몰려들었다.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쥬는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왜 내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연 있으면서 속도 모르겠는 얼굴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있자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짜증이 났다.

내 불만을 모를 남자는 나비 떼가 두고 간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며 그를 보았다.

“둘리가 전해 달래.”

“누구?”

“둘리 말이야, 둘리. 초록 공룡.”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황당함이 담긴 내 얼굴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잔뜩 찌푸려졌다.

“신데렐라 찾았다.”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그 안에는 내가 잃어버렸던 꽃신 한쪽이 들어 있었다.

“너, 이걸 어떻게….”

“내가 공주님 보다 두 살 많은데 오빠라고 불러 주면 안 돼?”

“꺼져.”

곧바로 돌아온 내 답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불러 줄 줄 알았어. 그냥 한복 입었길래 한번 해 본 말이야. 유교 정신없는 건 옛날부터 알았거든.”

유교는 패션이다, 이 바퀴벌레 같은 자식아. 게다가 뭐 저딴 요구를 이런 상황에 할 생각을 하는 거야.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다. 굴러떨어진 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노아 이스벨라가 세계의 비밀을 보여 줬잖아.”

“묻는 말에 대답해.”

“테오그라젠스의 사도 중 다섯은 불순한 것들의 손에 의해 죽고, 다시 신을 떠받들기 위해 이곳을 넘어오며 셋이 희생되었지. 나머지는 어디 갔을까?”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나를 찾아와. 공주님의 전직관이 그토록 절절매는 죄악이 뭔지 궁금하면 망설이지 말고 나를 찾아. 기다리고 있을게.”

한 발자국 그가 뒤로 물러났다. 이 순간 왜 노아 이스벨라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절대적 존재를 맞이하는 순간 그것에 홀리고 매혹됩니다.’

‘테오그라젠스가 우리 중 누군가의 신이 될 수도 있죠.’

‘나비’는 신의 죽음을 원했으나, ‘쥬’는 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가? 불순한 어조로 말한다 한들 그것이 그의 생각을 모두 보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안녕. 어서 빨리 나를 찾아오기를 바라.”

물이 시야를 가렸다. 특유의 황금빛 광채에 눈이 부셨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나는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편이지?

발치에 닿는 꽃신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신을 부활시킬 것인가. 쥬는 자신의 신을 다시 한번 배반할 것인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귀를 찢을 것 같은 울림이 파고들었다. 놀라 귀를 막으며 고개를 들었다.

바닷가 쪽에 거대한 드래곤이 머리를 들고 있었다.

“올리버 로스?”

저쪽은 또 무슨 일이야. 설마 이호연이랑 싸우느라 변형을 한 건가? 진짜 가지가지 하네,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기이한 점이 느껴졌다.

바닷가 쪽에 인기척이 너무 많았다. 반대로 호텔 쪽엔 인기척이 없었다. 음악 소리가 멎었고 웅성거리던 소리는 바닷가 쪽에서 나고 있었다.

쥬와 대화하느라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그제야 눈을 뜨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 앞에 드리워져 있던 가림막을 치운 것처럼.

“바다….”

며칠 전 내내 바다를 신경 쓸 때와 같은 께름칙함이 목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바닷가를 향해 뛰었다.

그런 내 뒤로 홀로 남은 꽃신 한 짝이 정원을 굴러다녔다. 마치 신데렐라가 12시 종소리에 급하게 두고 간 구두처럼.

나만 장르가 달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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