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의 이름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호랑이와 낮잠이나 자자는 내 계획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 침대에 올라온 건 하얀 백호가 아닌 건장한 청년이었고, 기껏 성공한 시차 적응 때문에 잠이 안 왔기 때문이다.
나란히 누워 키득거리며 놀다 이호연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 친해진 사람 없어?”
내 물음에 가만히 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주던 행동이 멈췄다. 그는 가만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별로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요.”
이호연이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제법 있는 것 같았는데. 아침부터 정신없이 너와 나는 운명, 우리의 만남은 데스티니를 외치던 사람 중에 나보다 이호연에게 관심 있어 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은 보호자 눈치를 보며 내게 대충 말을 거는 척하고는 곧바로 이호연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 쪽 보호자 강유진과 있다는 말에 그들은 실망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대부분 신체 계열 전직자였는데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이가 하나 있었다. 전직자계의 아싸인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올리버 로스도 널 보고 싶다고 하더라.”
“올리버 로스?”
이호연 또한 그 이름에는 제법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올리버 로스는 전직자들과의 소통 없이 살아온 나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전직자였다.
“너랑 같은 능력 가진 걸로도 유명하잖아.”
백호의 모습으로 변형하는 이호연 이후로 등장한 변형 스킬을 가진 이들 중 가장 화제가 됐던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토끼, 여우 다음에 드래곤이면 누구나 놀란다.
“올리버 로스가… 여기 있어요?”
“?”
이호연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의아한 내 시선에 이호연이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에 한번 본 적이 있어요. 세진 형이 길드의 기술 문제로 뉴욕에 가야 하는 일이 있었거든요.”
썩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나 보다. 자신의 팔을 베고 누워 있는 나를 끌어안고 한참을 뒹굴거린 뒤에야 이호연은 말을 이었다.
“뉴욕에 있던 일주일 동안 따라다니면서 한 번만 싸워 보자고 조르고, 쫓아다니고, 시비 걸고….”
“…스토커?”
“한국에 돌아간 뒤에도 사흘 내내 연락하길래 폰 번호도 바꿨어요. 웬만하면 마주치기 싫은데….”
“연회장에서 만나야 될걸….”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표정은 처음 보았다. 귀찮음 가득한 이호연의 뺨을 조물조물거리며 말했다.
“연회장에서 열심히 도망 다녀야겠다.”
내 말에 꺼내 둔 귀가 축 처졌다. 슬쩍 그의 뒤를 살피니 살랑이던 꼬리도 툭 떨어져 있었다. 정말 싫은가 보다.
“도망 다니는 거 도와줄게. 나, 그거 잘해.”
연회장에 우리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해 줄 수 있어. 내 뒤편에서 인사하듯 흐느적거리는 그림자 줄기를 발견한 이호연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귀찮게 하기는 싫어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이번 기회에?”
“…….”
대답 없이 묘한 미소만 짓는 이호연을 보며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뭐. 그리고 일단 나보다는 이쪽이 나름 평화주의자니까. 그나저나….
“잠 안 온다. 어떡하지.”
“호랑이로 변할까요?”
“음…. 아니, 그냥 이러고 있을래.”
보들거리는 하얀 털에 파묻히는 것도 좋지만, 적당하게 따뜻한 사람의 체온에 파묻히는 것도 기분 좋았다. 지금은 사람 체온이 더 필요하기도 하고.
에드워드 로거스와 했던 대화가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오르다 빠르게 가라앉았다. 답하지 말라고 했지. 일단은 그것만 기억해 두기로 했다.
우리는 강유진이 데리러 올 때까지 느긋하게 시간을 죽였다. 선잠이 들다가도 깨어나고, 흐릿한 잠의 자취를 찾아 다시 눈을 감기도 하면서.
시계는 똑딱거리고, 바다의 수면을 눈 부시게 하던 해가 살그머니 숨고. 잠기운이 우리의 몸에 흠뻑 젖어 드는 새벽이 될 때까지.
새벽녘 하늘 위에 걸린 달은 누군가가 갉아 먹은 것 같은 초승달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셨다. 이제야 감기는 눈은 건조함에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나를 이호연이 챙겼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내 어깨 위로 익숙한 무게감이 닿았다. 슬그머니 눈을 떠서 보니 옷걸이에 걸어 놓은 두루마기였다. 평범한 겉옷이 아닌 걸 보니, 그가 노아 이스벨라와의 만남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신발을 신겨 주는 이호연에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가야 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불을 끌어안고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내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호연은 신발 신기기 미션을 완료했다.
“안아서 데리고 가 줄까요?”
“…….”
이호연의 말이 꽤나 솔깃했다. 운반되는 시간 동안은 졸 수 있다는 유혹이 내 앞에서 살랑이는 꼬리처럼 나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내 발로 가기는 해야지.”
비록 그쪽은 일방적으로 나를 부르고, 일방적으로 약속 시간을 잡고, 일방적으로 이 새벽에 나를 움직이게 하지만.
흐느적거리며 일어나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도착 전에 내려 주면 되죠.”
단단한 손이 허리에 닿았다. 눈을 끔벅이던 나는 이호연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나는 유혹에 약한 사람이었다.
안정적으로 나를 들어 올린 이호연은 한 팔로 나를 지탱하며 문을 열었다.
“자는 건 아니죠?”
“깨… 있어요….”
잠결에 들리는 강유진의 목소리에 답했다. 살짝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깜깜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쪽도 깜깜했다.
둘 모두 깜깜하니 감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도착하면… 일어날…게요….”
늘어지는 내 목소리를 따라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유진이 이호연에게 웃지 말라고 타박하는 소리를 끝으로 나는 깜박 잠들었다.
그리고 깼다.
“……?”
너무 순식간에 잠들었다 깨, 오히려 잠이 확 달아났다. 체감상 이삼 초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내 등을 두들기듯 손끝이 작게 톡톡 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깬 것을 느꼈는지 그의 고개가 내 쪽으로 움직였다.
“일어났어요?”
“응. 나 얼마나 잤어?”
“얼마 안 잤어요. 한 15분?”
나는 3초밖에 못 잔 것 같은데. 이호연의 품에서 꼼질거리다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 내 행동이 간지러웠는지 이호연의 몸이 움찔거렸다.
“여긴 어디야?”
“호텔 지하 시설이요.”
보통 호텔 지하 시설이 이렇게 수상한가? 마치 마피아 보스의 사무실로 가는 것 같은 한적함과 삭막함이었다. 사람들이 머무는 객실 근처의 복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제 어깨를 툭툭 치는 내 행동에 이호연의 걸음이 멈췄다. 이호연이 나를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흘러내리는 두루마기를 잡아 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옷자락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밖으로 빼내고 앞을 보았다. 어두컴컴한 것이 영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비타민 A 좀 잘 챙겨 먹을 걸 그랬다. 당근이 야맹증에 좋다던데.
불이라도 피우기 위해 손을 뻗는데 그런 내 손을 이호연과 강유진이 동시에 잡았다. 의아함을 담아 둘을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능력 사용하면 안 돼요.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서 잘못하면 고슴도치 꼴이 될지도 몰라요.”
어떻게 돼먹은 특수 처리인지 궁금했지만, 하늘 조각의 자원을 가지고 무기 사업에 가장 집중한 미국인만큼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호연이 손잡고 걸어요. 여기서 밤눈이 제일 좋은 건 호연이니까.”
“뒤에서 따라오는 아저씨들도 눈 나빠요?”
“네.”
감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양복 입고 쫓아오는 아저씨들은 이 껌껌한 곳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취향이려니 하고 굳이 묻지는 않기로 했다.
기다란 복도를 걷는 내내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장식들이 있었는지 뒤에 아저씨들이 어딘가에 부딪혀 악, 소리 내는 것이 들렸다.
저럴 거면 그냥 복도 불을 켜면 안 되나 싶었다. 이게 바로 아군을 처치했습니다, 인가. 여기서 유일하게 밤눈 좋은 이호연은 그런 아저씨들에게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강유진 씨도 밤눈 나빠요?”
“난 그냥 눈이 나빠요. 밤에 핸드폰 많이 해서.”
“낮에 해요. 왜 굳이 밤에 핸드폰을 해요?”
“자기 전에 누워서 하는 게 가장 즐거운 걸 어떡해요.”
이런 바르지 못한 현대 어른이 같으니라고. 소소한 우리의 대화와 뒤편에 악, 소리가 몇 번 오간 끝에 마침내 도착지가 저 멀리서 아른거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빛이 눈 부셔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럴 거면 그냥 복도 불을 켤 것이지.”
‘북극곰을 위한 쓰지 않는 곳의 불은 꺼 주세요.’ 캠페인인가. 투덜거리는 나를 이호연이 옆으로 잡아끌었다. 내 바로 뒤에 있던 남자가 악 소리를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글라스 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안 박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문 앞에 서서 걸음을 멈췄다. 너덜너덜한 다리를 질질 끌며 남자가 앞으로 가 문을 열어 주었다. 좀 불쌍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밝은 빛이 눈을 아리게 했다. 선글라스의 진면목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몇 번 눈을 끔벅인 다음에야 움직이는 우리와 달리 선글라스 맨들은 척척 걸어가 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와서 그래 봤자 별로 멋있지는 않았다.
방의 내부는 평범하고 깔끔했다. 호텔 지하 비밀의 시작점 같은 과정을 생각해 보면 싱거운 방이기도 했다.
방의 주인인지 선객인지 모르겠는 여자가 소파에 앉아 우리를 맞았다. 빙긋 웃고 있지만 별로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비즈니스 미소. 솔직히 말하면 삭막함. 그게 그녀에 대한 나의 평가였다. 반대쪽 소파를 손짓하는 여자의 모습을 힐끔 보다 진한 녹색의 소파에 쪼르르 앉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모임의 책임을 담당한 로웰 콕스입니다. 그 유명한 류를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
존댓말로 들리네? 슬쩍 내 손을 보았다. 통역 반지의 하얀 보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 행동을 옆에서 보고 있던 강유진이 내게 작게 속닥거렸다.
“한국말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우리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던 로웰 콕스가 손뼉을 짝 치며 시선을 끌었다.
“피차 시간도 없고,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은 심정인 건 똑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인사치레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속으로 한국말 되게 잘하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웰 콕스가 뒤편에 서 있던 남자 중 한 명에게 신호를 보냈다.
남자는 우리가 들어온 문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그 문의 가장자리에 그려진 문양을 눈으로 훑어보는데 로웰 콕스가 내게 말했다.
“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군요.”
내가 무슨 전설의 동물도 아닌데 과장이 심했다. 반짝이는 눈을 보면 마냥 과장이 아닌 것도 같았지만 그러면 더 문제였다. 대충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자 그녀는 낮게 웃었다.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다. 내가 진짜 이 자리에 오게 될 줄은. 인생 참 파란만장했다. 별생각이 없는 나와 달리 상대는 무언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뭔가, 귀찮아질 것 같았다. 과연, 그런 내 예상을 틀리지 않고 그녀는 내게 매우 곤란한 말을 했다.
“류. 학자께서 오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우리 미국으로 올 생각은 없나요? 무엇을 원하든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상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으니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
“저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요.”
강유진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쳤다. 제법 아팠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로웰 콕스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미국으로 오겠다, 말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이 처리될 겁니다. 미국의 시민권, 호화로운 대저택, 명예.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손에 들어올 겁니다. 당신의 부모님 또한 미국에서 최고의 대우와 최고의 보호를 받으며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눈에 띄는 삶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지금처럼 있지만 없는 듯 살고 싶어요.”
“우리는 제안이자 권유를 하는 겁니다.”
“…….”
이건 좀.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한 국가가 권유라는 이름으로 통보할 때 순순히 받아들여라?”
미소가 오갔다. 한쪽은 예의 있는 비즈니스적 미소라면 한쪽은 비틀린 비웃음이었다.
“솔직하시군요.”
“제가 좀.”
“그리고 겁도 없고.”
“헷갈려서 그러는데, 지금 싸우자는 건가요?”
내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어설픈 모습으로 어두운 복도에서 장식물들에 부딪히던 선글라스 맨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어둠보다 더한 어둠의 움직임을 눈에 담으며 로웰 콕스가 말했다.
“아무리 강해 봤자 당신이 사람인 이상 국가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글쎄요.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나를 제대로 조사한 거 맞나요?”
“당신의 위치를 다시 상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쪽도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선글라스 맨들 중 하나의 발끝이 조금 움찔거렸다. 그것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한 발자국.”
로웰 콕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나랑 싸우자는 의미로 알아들을 거예요. 미국이 아카샤를 공락하는 데 있어 가장 적은 사상자가 나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류.”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난 그 아카샤보다 더한 괴물인데?”
사상자밖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을 들은 로웰 콕스가 미소를 지웠다.
“무례하군요.”
“무례하네요.”
콕스가 손을 들었다. 선글라스 맨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다시 대화인가….
“우리는 당신이라는 인재가 탐납니다. 한국 같은 작은 나라에 있기엔 당신은 너무 뛰어난 무기죠. 날을 갈지 않으면 무기를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그 무기가 유순하게 굴어야 하는 시대예요, 지금은. 너무 날카로운 무기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어요.”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 거 같은가요?”
“…….”
귀찮게 군다. 너무 질척거렸다. 미국의 학자는 미끼였나 싶을 정도로 이쪽이 본론인 것처럼 굴었다.
옆에서 강유진이 뒤편에 숨긴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구름 조각이 그녀의 손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테오그라젠스…. 노아 이스벨라가 그자의 이름을 그렇게 말했죠. 또한 이 만들어진 평화가 얼마나 얇고 쉽게 망가지는 것인지도 말했습니다.”
테오그라젠스.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 학자가 가짜는 아닌 것 같기는 한데….
“학자인 줄 알았는데 예언가였나 보네요.”
“우리는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미국은 그 준비가 되었고, 마무리로 당신을 원합니다. 아카샤를 단신으로 공략한 류라는 전직자를요.”
“…….”
“가능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끝맺는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도 참 남의 말 안 듣는다고.
이걸 어떡하지. 물론 그간 이렇게 무례하고 강렬한 러브 콜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국가 단위로는 처음일 뿐이지.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너무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는다는 건 좀 거지 같은 일이었다. 그 사랑이 영 건전하지 못한 사랑일수록.
새롭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기이한 감각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검지 끝을 살짝 까닥거렸다. 로웰 콕스의 짧은 머리끝이 살랑거렸다.
제 목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그림자 줄기를 힐끔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물었다.
“무력으로 가능할 것 같아요?”
“…….”
답 없는 상대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올리버 로스를 만났어요. 미국의 대표로 선정된 그 남자도 나를 못 이길 것 같던데…. 코끼리 앞에 병아리 수백 마리 풀어놓는다고 코끼리는 죽지 않아요.”
수적 우위라는 게 대단할 것 같지만 절대적인 게 아니었다. 삐약 하는 병아리가 아무리 많아도 사자나 호랑이, 코끼리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입을 다문 로웰 콕스를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의 목 바로 옆에서 음산한 기운을 뿌리던 그림자가 흐물거리다가 사라졌다.
“여기까지 하죠. 피차 잠자리에 들고 싶은 늦은 밤이고, 이 이상 해 봤자 남는 것도 없는 싸움을 지속해서 뭐 해요?”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없던 일로 해 드릴게요. 그쪽 말고, 내가.”
로웰 콕스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노아 이스벨라가 도착할 겁니다.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상대는 내 말을 받아들였다.
“선글라스 맨들도 데리고 가 주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우리에게 다음이 있나요?”
뒤돌아 걷던 로웰 콕스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를 뒤따르던 선글라스 맨들의 걸음도 멈췄다. 나를 돌아본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생겼다.
“다음번에는 당신 입에서 미국으로 오겠다는 말이 나오도록 설득해 보죠.”
“전 한국이 좋아요.”
“…꼭, 미국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죠.”
“?”
지금 뭐라고….
“…….”
날 보는 로웰 콕스는 웃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봤던 웃음과는 궤를 달리했다. 질척거리고 끈질긴 그런 웃음. 나, 저런 웃음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잠깐의 착각이라는 듯 그녀는 다시 원래의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만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또 이상한 말 하면 그때는 안 봐줄 거거든요. 이왕이면 안 만나면 더 좋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경첩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문이 닫혔다. 우리밖에 안 남은 방 안에서 강유진이 내게 늘어져라 몸을 기대며 말했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진짜 싸웠을 거예요?”
“아는 사람들끼리 왜 그래요. 기 싸움이지, 진짜 싸우려고 했겠어요? 저쪽도 정말 덤빌 생각은 없더만.”
“기 싸움 두 번 했다간 내 등 터지겠네.”
곡소리 내는 강유진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녹음했어요? 그녀는 짓궂은 미소로 답을 주었다. 그런 우리를 보는 이호연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런 그의 뺨을 조물조물거리며 말했다.
“예상은 했잖아.”
“너무 예상대로라 더 기분 상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는 하지. 그나저나 무기 사업에 열중했다더니 전직자를 보는 눈도 한국보다 더 질이 나빴다.
이 나라 사람들이 전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로웰 콕스가 나를 보는 눈은 누가 봐도 탐나는 무기를 보는 눈빛이었다.
미국 갈래요. 한마디 했다간 뼈 하나 남김없이 알뜰살뜰 써먹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모임의 책임자라고 하니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가 버리는 것이 답일 것 같았다.
“…….”
한국으로 가면 만날 일 없는 거 맞겠지? 꼭 미국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신경 쓰였다. 정말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빨리 한국 가고 싶어요.”
“갑자기요?”
“음…. 그냥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이 나간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화를 중단하고 그곳을 보고 있으니 곧이어 똑똑,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명을 받아 옅은 빛이 도는 아마색의 머리카락이었다. 햇빛에 조금 그을린 얼굴은 순박한 농부의 얼굴이었다.
다만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에선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눈만 본다면 덤블도어와 같은 현자를 마주 본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노아 이스벨라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노아 이스벨라입니다.”
존댓말로 들리는 것을 보니 통역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번 한 번을 위해 다른 나라 언어를 따로 공부하는 수고를 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유하연입니다. 발음 어려우면 그냥 류라고 부르세요.”
내 이름을 몇 번 곱씹어 보는 듯하더니 그는 맑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럼 류로 할게요.”
로거스와 오스틴, 그 외 영어권 사람들은 다 나를 류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호연을 부를 때면 이…, 이…, 이러다가 너(you)라고 말했다.
이호연의 이름을 몇 번 되뇌던 노아 이스벨라가 곤란한 낯으로 이호연에게 말했다.
“혹시 닉네임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닉네임이요.”
“네, 닉네임.”
“네.”
“?”
의아한 시선으로 이호연을 보던 이스벨라는 머뭇거리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오해한 것 같기는 한데 딱히 그 오해를 풀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답 없는 우리가 자신을 적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악수하자 손 내미는 것을 보면 천성이 밝은 것 같았다.
“류.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나도 만나고 싶었어요. 묻고 싶은 것이 많거든요.”
내 말을 들은 노아 이스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낯이었다.
“그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뭐죠?”
“당신이 푸른 불꽃, 맞나요?”
“…어떤 의미의 푸른 불꽃인가요?”
여기까지 와서 떠보는 것도 좀 그랬지만 정확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노아 이스벨라는 내 떠보는 질문에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얕은 숨을 길게 삼키다 뱉으며 내게 말했다.
“테오그라젠스의 석판의 글귀에 나오는 존재. 푸른 불꽃과 나비 중 당신이 푸른 불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는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당신에게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알려야 해요. 그러니 경계하지 말아 주세요.”
알려야 한다. 마치 의무라도 된다는 어조였다.
“…그러죠.”
그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제 옅은 갈색 머리를 잔뜩 헤집은 뒤 노아 이스벨라는 흔들리던 푸른 눈을 단단히 굳히며 나를 보았다.
“나는 석판에 글귀, 전문을 알고 있어요.”
“…….”
내가 봤던 석판의 글귀 뒤편은 훼손이 심해 해석이 불가능했다. 나비와 푸른 불에 대한 글귀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나를 보며 노아 이스벨라의 입이 열렸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나는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길 잃은 것들의 인도자, 신의 궤적을 좇는 자
무릎 꿇고 빌어먹는 생을 탐하는 자
너는 푸른 불꽃
길 잃은 것들의 구심점, 요람
누가 그대를 무릎 꿇리리
우리는 삶과 죽음의 가림막, 기원과 종말의 인도자
가장 성스럽고도 괴이쩍은 존재들
누구보다 인간에 먼 신의 종자, 누구보다 인간에 가까운 귀신의 아이
불을 붙이오, 내가 끌 테니
불을 보고 걸음 한 이들 모두 길을 잃을 터다
날갯짓에 홀려라. 어리석다
우리는 길 잃은 자들의 낙원
그 낙원의 이름은―.
“테오그라젠스. 세계이자, 신이요.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존재. 괴물과 전직관, 우리가 사용하는 이 기이한 힘들의 원천이자 우리의 고향, 천공 섬의 이름.”
푸른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길 잃은 것들이 되어 푸른 불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이들이 된 것처럼 우리는 노아 이스벨라의 이야기를 들었다.
“테오그라젠스 말고도 또 하나의 신격적 존재가 있음을 알고 있나요?”
노아 이스벨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세상을 구해 달란 메시지를 보낸 또 다른 하나의 존재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따로 설명은 필요 없겠군요. 당신은 또 하나의 신격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테오그라젠스와 가장 반대되는 존재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은 하나였다. 하늘에 반대되는 것.
그런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아 이스벨라가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에요.”
별로 달갑지는 않은 소리였다. 옆에서 강유진이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지만 우리 중 누구도 거기에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내 전직관, 레코드가 알려 준 것들에 대해 말할 거예요. 그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고, 사라졌죠.”
“…사라져?”
“네. 사라졌어요. 내게 세상의 비밀을 알려 줄 때마다 몸에 금이 갔고, 부서졌고, 모래 알갱이처럼 변했죠. 이제는… 만날 수 없어요.”
전직관이 사라졌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어째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랑이 생각났다.
“그가 내게 가르칠 때 제일 먼저 했던 이야기부터 들려줄게요. 이건 이 세상의 가장 큰 비밀이자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왜 지옥도에 버려져야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영화관에서 영화가 시작되는 것처럼 방의 불이 꺼졌다. 어둠이 스멀스멀 빛을 잡아먹었다.
그 속에서 노아 이스벨라의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푸른 눈의 안광이, 그 푸른빛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림을 그렸다. 불의 궤적 같기도 한 그것은 두 사람의 형체를 만들며 밝게 피어올랐다.
이곳이 정말 내가 앉아 있던 방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에 닿는 감촉에 이호연이 바로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감촉 말고는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종의 영역과 비슷한 건가. 고민하는 나를 두고 푸른 그림들이 움직였다. 나란히 서 있던 두 인영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베일을 뒤집어쓴 두 사람 중 입가를 드러낸 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눈을 감을 것이다.
목소리가 울리듯 귓가에 닿았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방 전체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 전부를 가린 자가 말했다.
어리석은 것. 너는 너 스스로의 가치를 버렸다.
마주 보던 두 인영이 서로를 등졌다. 입가를 드러낸 자가 흐물거리며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을 뒤돌아 바라본 얼굴을 가린 자는 구름을 밟고 하늘로 사라졌다.
역사의 내레이션을 읊듯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을 설명했다. 푸른 그림이 하늘 위 얼굴을 가린 자를 그려 냈다.
하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제 몸을 노니는 방종한 것들을 감히 두고 보지 못했다.
군림과 신앙, 절대적 우위.
제 몸을 감히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그는 하늘이 되었다.
세계이자 그네들이 우러러보아야 하는 하늘이요, 신인.
이름마저 감히 방종한 것들이 입에 올리지 못하는 하나.
테오그라젠스.
그림이 바뀌었다. 푸른 그림은 나무를, 풀을, 그 위를 뛰어다니는 동물과 사람들을 그려 냈다. 새파란 초원이 산이 되었고, 숲이 되었다. 우리가 밟고 살아간,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터전이었다.
하나는 눈을 감았다.
제 몸 위에 노니는 방종한 것들을 자애롭고도 무심하게 두었다.
삶과 죽음, 파괴와 생존.
자신의 존재를 갉아 먹는 것들을 사랑하여 몸을 낮추었다.
세계이자 그네들이 밟고 서는 땅이요, 신인.
이름마저 방종한 것들의 부름을 따르는 하나.
그 신의 이름은 지구(Earth)라 칭해졌다.
베일로 얼굴 전부를 가린 자, 테오그라젠스가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것은 비단 그의 얼굴이 가려져 있어서도 아니고 그림체가 단순해서도 아니었다.
저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푸른 단색뿐인 그림에서도 느껴졌다. 테오그라젠스가 손을 뻗었다.
구름이 움직였다. 하늘에 땅이 생기고, 사람이 생겼다. 자비란 없는 신을 둔 천공 섬의 주민들이 똑각거리며 천공 섬 위를 돌아다녔다.
허나, 신의 시선은 자신을 우러러볼 이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베일 안의 눈은 자신이 내려다보아야 있는 모든 것들을 향하고 있었다.
무료한 신은 무료하지 않은 것을 탐냈다. 하여, 조금의 장난질을 해 보고자 하였다. 똑각거리는 인형은 지겹고, 무료하였으니까.
구름 사이로 하늘에서 뻗어진 손이 땅에서 노니던 아이를 데리고 갔다. 골목길에 숨어 잠든 자를 데리고 갔다. 감옥에 앉아 멍하니 창살을 내려다보는 이를 데리고 갔다.
신이 말했다. 나를 즐겁게 하는 자, 영광을 누릴 것이다. 똑각거리는 것들은 사람이 아니요. 구름 위 섬에 있는 것은 무료한 신뿐이더라.
신의 무료함 달래고자 끌려 온 이들이 날뛰었다. 푸른 선과 선이 엉켜 들었다. 혼잡한 선은 섞이고 엮어 푸른 염료를 들이부은 그림처럼 변했다. 그것은, 실패작이었다.
테오그라젠스가 제 섬에서 노니는 것들을 보며 말했다.
무료하구나. 나는 재미있는 것을 원한다.
그런 그에게로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들었다. 신의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날았다. 나비가 날았다. 나비 떼에 얽혀 들어갔다. 날갯짓하는 푸른 선들이 어지러웠다. 테오그라젠스가 그것을 눈에 담음과 동시에 나비 떼가 으스러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한 소년이 나타났다. 일그러진 나비 떼에서 기어 나온 한 생존자. 소년은 제 몸을 바짝 낮추어 무료한 신께 고했다.
나는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이 될 자. 당신에게 무릎 꿇으며 삶을 빌어먹고자 하는 자.
소년의 눈 안에 푸른 선들이 얽혀들었다. 텅 빈 눈을 채우는 색깔, 그것은 푸름에서 유일한 보랏빛으로 변했다.
무료한 신, 테오그라젠스는 나비가 주는 즐거움에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베일 안에 웃는 입꼬리가 거북했다. 나비가 속삭였다.
나와 같은 이들을 두세요. 저 아래, 감히 당신과는 다른 길을 걸은 또 다른 하나의 방종한 것들과 달리 오로지 당신만을 위하는 자들을.
테오그라젠스의 시선이 새파랗게 칠해진 실패작들을 보았다. 신의 입이 열렸다.
저들 중에도 쓸 만한 것들은 있겠지.
신의 손이 움직였다. 한번 휘젓는 것으로 파랗게 칠해져 있던 푸른 선들이 분리되었다. 나비가 고했다.
신께서 하찮은 싸움을 질려 하신다.
그 위선적인 베풂에 비로소 그들은 무의미한 싸움을 멈출 수 있었다. 색깔 덩어리의 면적이 줄었다. 그것은 푸른색으로 표현한 결코 푸르지 못할 것이었다.
구름과 신뿐인 천공 섬에 나무가 자랐다. 풀이 자랐다. 바다가 생겼다. 나비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뱉어냈다.
그것의 끝은 끝없는 나락이나, 언뜻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더라. 이를 낙원이 아니라 한다면, 뭐라 할까.
방종한 것들은 어찌나 질기고, 삶에 집착하던지. 신의 면모와 같던 텅 빈 섬은 터전이 되었다.
하나, 신의 시선은 언제나 저 나락 끝, 또 다른 하나에서나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테오그라젠스의 뒤편에 서 있던 소년의 그림, 나비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림이 바뀌었다.
나비 떼가 휩쓸고 간 그림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운 천공 섬이 아닌 불타오르는 지옥의 모습이었다.
무료한 신 테오그라젠스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감히 저가 만든 천공 섬을 망치는 것들을 두고 보았다. 정확히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끼리의 투닥거림에 어찌 신이 관심을 보이리오.
테오그라젠스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열셋의 인영 중 나비를 제외한 나머지 인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을, 우리의 신 테오그라젠스를 위하여.
푸른색 덩어리 하나로 표현되었던 것들이 신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신의 사도가 된 열셋 중 다섯은 그들의 손에 죽었소, 일곱은 신이 아닌 자들에게 무릎 꿇었다.
이 모든 것을 이끌어 낸 자, 인도자인 나비는 그들의 틈새에 서서 총 하나를 손에 쥐고 있더라.
제 바로 앞에 그들이 당도했음에도 신의 시선은 나락 너머를 향했다. 신의 입이 열렸다.
어리석은 것이 푸른 불 자락 아래에 기어들어 갔구나. 다른 어리석은 것들은 의미 없는 짓을 벌이는구나.
그제야 언제나 저 아래, 저와 가장 닮고도 다른 선택을 하는 존재만을 바라던 눈이, 처음으로 저를 노리는 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신의 손짓 한 번에 그림의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푸르게 표현된 피의 전장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것 중 하나인 나비가 손을 들었다. 총이 신에게로 향했다.
그림이 어그러졌다. 선과 선이 낙서처럼 꼬였다. 망쳐 버린 실뜨기처럼, 눈을 감고 휘저은 손에서 탄생한 망작처럼.
꼬였던 푸른 선들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자, 신 테오그라젠스가 푸르게 번진 자신의 섬을 보고 있었다.
무료한 신의 시선이 드디어 나락을 건너, 저를 노리던 자들을 지나 방치하였던 천공 섬으로 향했다.
감히. 방종한 것들이 감히.
테오그라젠스는 생각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군림과 신앙으로 이뤄진 이곳에서 어찌 이런 방종한 일이 일어났을까.
신, 테오그라젠스는 생각했다.
온전하지 않아서야. 어리석은 그것이 나와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뉘어서다.
그렇다면, 원래대로 돌려놔야지. 감히 이런 일 없도록 온전해져야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나락 아래 방종한 것들과 뒹구는 너와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락 너머를 굽어보던 신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테오그라젠스의 몸 뒤편이 푸른 선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그가 방종하다 여긴 것들이 그를 망가트리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림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들이 웃으며 뛰어다니는, 내가 밟고 선 터전이었다. 산자락에 서서 치렁거리는 옷을 입은 남자가 푸른 선으로 그려졌다.
나는 그 그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남자의 귓가에 기다란 귀고리가 흔들거렸다.
수풀 사이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눈을 감은 하나가, 베일 아래 눈을 휘며 남자에게 말했다.
귀하고도 천하게 태어나, 인간이되 인간 같지 않은 삶을 살고, 그 언저리에서 줄타기하던 귀신의 아이가 그 괴이함에 이끌려 알면 안 되는 것을 알아 버렸구나.
신의 이름으로 신이 되지 못 하는 존재와 신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신의 만남이었다. 두 신 중 먼저 자신을 굽힌 것은 눈을 감은 자.
나를 숨겨 주련. 저 하늘 위 무료한 삶에 스스로를 놔 버린 자가 욕심을 부린다. 네 불그림자 아래 나를 숨겨 준다면 네 죄악을 풀 수 있게 도와주련다. 네 가엾은 여우, 내가 도와주련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자는 그 말에 기꺼이 어울려 주었다.
남자가 기다란 옷자락을 하느작거리며 지상의 신에게 손을 뻗었다. 신의 그림이 흐드러진다. 그것이 남자의 발아래로 스며들었다.
하늘의 구름 사이에서 테오그라젠스가 몸을 드러냈다. 남자를 보며 신이 입을 열었다.
푸른 불은 어디 있는가.
저 산 너머에 있지.
푸른 불은 어디 있는가.
서역인들과 여행길에 올랐지.
푸른 불을 어디 있는가.
그대 눈앞에 있지. 그대는 누구인가. 무엇 그리 물을 것이 많은가. 한낱 어둠에 몸을 감추었는가. 어서 내 앞에 나타나라.
눈을 감은 하나를 찾는다. 푸른 불의 잿더미 아래 숨어 있는 하나를 찾는다. 그것을 잡아먹어 나는 온전해질 것이니. 푸른 불아. 나를 안내하라. 너는 불의 인도자이니. 나비와 함께 피어올라, 내게 오라.
그럼으로써 나는 온전해지리.
남자가 아득한 하늘을 보며 손을 뻗었다. 그의 뒤편에서 수없이 많은 기이한 것들이 하늘로 달려들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찌 불완전한 신이 내게 덤비나. 도깨비는 나의 친구요, 신하요. 귀신들은 내 발아래 것들인데.
신이라 하나 온전하지 못한 자, 잡신과 그리 다를 것 없지 않은가. 믿는 자 없고, 받들어 주는 자 없는 신을 어찌 신이라 부르오.
인간을 거죽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망량신(魍魎神)보다 못한 것이 지금의 그대요.
남자의 발밑에서 눈을 감은 또 다른 하나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일렁인 푸른빛에 테오그라젠스가 물러났다. 거대한 푸른빛이 하늘을 덮었다. 그 색이 옅어졌다.
하늘은 하늘이되, 하늘이 아닐지니. 참으로 어리석다. 눈을 감아야 할 자가 감지 않으니 이리도 일그러지는구나.
망량신의 말에 또 다른 하나가 말하길.
내 위를 노니는 것들이 수없이 죽을 것이야. 허나, 그 순간에 네 죄악의 갚음이 시작될 것이야. 신의 놀음에 한 줌 재가 되는구나.
그것은 스스로를 낮춘 신의 한탄이더라.
한탄과 한탄에 얽매이며 그 고약한 것을 눈에 담아야만 하던 신이 결론을 내리기를.
그렇다면 살아남을 기회를 주어야 옳음이지. 실패한 자들도 한 번쯤은 옳음을 선택한 자신들의 결과를 보아야 그것이 맞는 것이지.
결국은 희생이다.
신의 손이 하늘을 향했다. 흐릿한 푸른 것들이 하늘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것들이 테오그라젠스의 손에 의해 푸른 덩어리 하나로 표현되었던 천공 섬의 주민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우리에게 괴물과 싸울 힘을 주는 자들. 최근 들어 기이한 행동을 하는 그들을 보며 강유진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지 않냐는 말이.
전직관. 우리와 닮았고 기이한 힘을 가졌고, 괴물과 함께 알 수 없는 곳에서 넘어온 자들.
천공 섬의 주민, 테오그라젠스의 손 아래 푸른 덩어리 하나로 표현된 과거의 사람들. 그들은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 바뀌었다. 푸른 선들이 화려한 깃발과, 풍등을 표현했다. 흥겹게 퍼지는 노래가 들렸다.
온갖 가면을 뒤집어쓴 자들이 꽃을 한가득 채운 관을 들고 행진하고 있었다. 노랫말이 들렸다.
성제의 혼이 낳으신 아들.
비형 도령의 집이 바로 여길세.
날고뛰는 온갖 귀신들아, 이곳에서 함부로 머물지 말게나.
노래가 울린다.
노랫말을 끝으로 신을 숨긴 푸른 불그림자의 주인이 관 속에서 몸을 일으키니,
도깨비들의 왕이 걸음 한다. 괴이한 것들이 몸을 낮추는구나. 인간 흉내를 내어도 그 본질은 신에 가까울 터. 삿된 것들의 왕이 죄악을 풀고자 한다.
기이한 향 퍼져 나가고, 오색구름이 사방을 덮으니. 그것은 곧이어 하늘로 가는 길을 만들어 내는구나.
호랑이의 한이 왕을 따라 걸음 한다.
하나는 죄악을 풀러 가고, 하나는 미련을 풀러 가는구나. 껍데기뿐인 것들이 신들의 놀이에 끼어드니 그 몸이 온전할까. 장례는 치르나 묻히는 것은 없구나.
랑.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남자의 그림을 보며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손안에 쥐여진 이호연의 손에 땀이 찬 것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랑의 그림을 뒤따라가는 호랑이에게로 향해 있을 것이다.
끝내 두 그림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이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새로운 그림이 까만 세상 위로 그려졌다.
테오그라젠스 옆에 무릎 꿇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나비 또한 있었다. 신실한 종교인의 모습을 흉내 낸 그들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우리는, 우리의 신 테오그라젠스의 사도. 우리는 그의 사도. 우리가 무엇을 하리. 신을 모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신을 따라 걸음 하자. 저 나락 끝에 우리의 신이 있다. 어리석은 것들이 신을 노린다. 우리는 우리의 신 테오그라젠스의 사도. 우리는….
나비가 한 걸음 나서 그들을 돌아보며, 살금살금 걸어와 살근거리는 새벽과도 같은 말을 속삭였다.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그의 말에 사도들은 홀린다.
어찌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신을 보필하리. 우리의 믿음은 불안정하다. 나락 너머로 넘어갈 수 없다.
너, 신을 믿는가. 너, 신을 사랑하는가. 너, 테오그라젠스. 우리의 신을 신실한 마음으로 섬기는가.
대답하는 자, 하나 없다. 모두가 낯을 굳히고 첫 번째 종의 시선을 피하니. 나비가 웃는다. 날갯짓에 홀려라. 어리석다.
그것은 인도자의 속삭임이니.
희생을 하라. 우리의 신을 위하여.
가만히 서 있던 이들 중 셋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푸른 선이 흘러내려 푸른 덩어리가 되었다. 희생을 맞이한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이 신이 나락이라 부르던 곳으로 뛰어내렸다.
그런 그들을 가만 내려다보는 나비의 뒷짐 진 손에는 신의 목숨을 취하고자 한 총이 들려 있었다. 나비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나의 신, 테오그라젠스. 하나 이리 또 실패할 수는 없지요.
하여, 나는 다시 시작할 겁니다. 완전한 새로운 몸으로. 꿈결 자락에서 다시 시작할 겁니다.
나는 나비. 당신의 첫 번째 종. 낙원 테오그라젠스를 여는 당신의 열쇠. 당신의 종을 기다리시오. 당신과 나의 약속은 끝나지 않았으니.
파란 염료를 들이부은 듯 검은 세상에 푸른 선이 엉켜 들었다. 그 위에 검은 선들이 쫙쫙 그어졌다. 푸른 것들이 조각났다. 세상으로 떨어졌다.
땅에 있던 것들이 푸른 덩어리에 깔렸다. 어둠에서 기이한 그림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지옥도의 시작이었다.
그 어둠 너머 나락을 굽어보는 자, 온전한 자신의 몸을 원하는 자, 테오그라젠스가 말했다.
푸른 불꽃은 어디 있는가. 열쇠를 달구어라. 나의 세상을 열어라. 낙원의 문을 열어라. 나는 온전해질 것이다.
푸른 불이 둘로 나누어졌다. 둘 중 누가 내 세상을 열 존재인가. 꺼져 가는 불과 타오르는 불티가 있구나. 스스로를 죽여 시작한 어리석은 나비도 있구나.
내 종을 태우는 것은 누구인가.
푸른 불꽃. 그것은 어디 있는가.
춤을 추어라 푸른 불자락이여. 너의 검으로 나비의 생명을 태워 내게 바쳐라.
선이 움직였다. 그림이 그려진다.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이 한 소년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린 소년의 손에 신의 목숨을 취하고자 한 총이 들려졌다.
치렁거리는 옷과 기다란 귀고리를 한 남자가 그려졌다. 그가 몸을 낮추어 마주 보는 소녀는 그처럼 치렁거리는 옷을 입고 제 키보다 긴 제등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나와 랑, 나비와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낙원을 열 존재. 지독하도록 얽히어 버린 운명의 선이 만들어 낸 존재들이었다.
운명이란 참 기묘하고 지독하며, 질기고 재미있지 않은가.
이야기꾼들이 노래하고, 베틀에 올라간 실 자락들은 엉킨다. 엉킨 것들이 잘려나가면 울부짖는 노랫소리.
그것이 운명이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끝으로 푸른 선의 그림이 끝났다.
깜빡거리는 검은 불빛을 끝으로 방에 불이 들어왔다.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나를 이호연과 강유진이 붙잡았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이걸 꼭… 당신한테 알려 줘야 하니까….”
노아 이스벨라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파란 눈은 더 이상 기이하게 빛나지 않았다. 그저 너무 새파랗다고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그런 그의 눈과 달리 새빨간 것이 울컥 흘렀다. 입에서, 코에서, 그리고 눈과 귀에서.
당황하는 우리를 두고 노아 이스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하얀 소매로 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하얀 것을 붉은 것들이 물들였다.
“내 전직관, 레코드가 사라지기 전 한 말이 있어요.”
“당신, 피 나요. 일단 치료부터 받고―.”
“아뇨, 괜찮아요. 안 죽어요. 지금 당신한테 전해야 하는 이 말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
막무가내였다. 노아 이스벨라는 또다시 제 코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닦아 내며 나를 보았다.
“푸른 불꽃은 당신이에요. 당신의 전직관은 푸른 불꽃이기는 하나, 테오그라젠스를 어떻게 하지는 못해요. 그건 온전한 몸이 남아 있던 과거에나 가능했을 테니까요.”
“…….”
구름으로 사라지면서 랑은 장례를 치렀다. 저 스스로의 장례를. 그에게 몸은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꺼져 가는 푸른 불이었다.
그리고 나는 타오르는 불티. 불꽃이 되는 건… 결국은 나였다.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는 나를 보며 노아 이스벨라가 내 생각의 종지부를 찍었다.
“당신은 당신의 전직관의 위치를 계승 받아야 해요. 온전한 푸른 불꽃의 이름을.”
“…….”
“당신은 공주고, 그는 왕이죠.”
“…그만 말해.”
그의 말을 끊는 나를 노아 이스벨라는 굉장히 가엽다는 듯, 그런 눈으로 보았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계승을 받는 방법.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의 비밀을 엿보고 다른 사람한테 말할 수 있는 이유.”
전직관이 사라졌다고 했다. 세상의 비밀을 말하는 것에 있어 테오그라젠스의 개입이 없었다. 전직자들은 그 신의 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전직관들뿐.
“당신은 왕의 이름을, 푸른 불꽃의 이름을 계승해야 해요.”
“…….”
“그리고 그 방법은―.”
노아 이스벨라의 입이 핏물을 머금고 움직였다.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죽음을 암시하는 흔한 소설의 클리셰 같았다. 그래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 내가 꿈을 꾸나 싶을 정도로.
죽음을 속닥이는 저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속닥이는 말에 답하지 말라고 들었는데, 그냥 무시하면 안 되는 걸까. 푸른 선에 그림이 성의 없이 목과 몸을 분리해 버린 것처럼.
하지만 그랬다간 푸른 염료로 덮여 버린 그 섬의 모습처럼 이곳은 붉게 물들 것이고, 꿈이라고 할 수 없을 사람의 체온을 담은 붉은 액체가 나를 덮어 이것은 꿈이 아니라 확신할 것 같아서.
나는 늘어트린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침묵뿐인 방 안에 로웰 콕스가 들어왔다. 그녀는 노아 이스벨라의 모습을 한번 힐끔 보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연회 날 세계의 비밀을 각국의 대표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선의 내용을 알릴 것인지 상의를 해야 하니 강유진 씨는 저와 함께 가 주십시오.”
비릿한 냄새가 느껴지지도 않는 것인지 잔잔한 미소 지은 얼굴은 소름 끼치게 평온했다.
노아 이스벨라는 그런 콕스의 모습이 익숙한지 그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태연히 얼굴에 피를 닦았다.
“이야기를 더 나누시겠습니까?”
로웰 콕스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강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문을 건넜다.
할 이야기가 없다고 했으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던 노아 이스벨라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건가요?”
“내가 뭘 더 물어야 하는데요?”
“…무엇이든.”
노아 이스벨라는 협조적이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차라리 그가 비협조적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것인지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이던 노아 이스벨라가 고개를 숙였다. 저가 죄인이라는 듯.
어쩌다가 세계의 비밀 같은 거창한 것을 알아 버린 사람이라고 하기엔 그의 어깨는 그리 넓지 않았다.
옆에서 숨죽이며 있던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또 다른 하나를 불그림자에 숨겨 준 남자. 그 남자와 함께 구름 사이로 사라진 호랑이는 뭡니까?”
이호연의 질문에 노아 이스벨라가 눈을 깜박였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덜 지워진 핏자국이 아직 남아 있어 푸른 눈과 얽히어 괴이쩍게 보였다.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노아 이스벨라가 말했다.
“생각하는 대로예요.”
“하….”
헛웃음을 내뱉는 이호연을 두고 노아 이스벨라가 이야기를 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천공 섬의 주민들에게는 기회를, 우리에게는 살아날 방도를 주기 위해 테오그라젠스에게 죽은 이들을 전직관의 형태로 이 땅에 넘어오게 했어요.”
“나랑 이호연의 전직관은 천공 섬의 주민들이 아닌 것 같던데.”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발밑에 그림자들이 술렁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들어온 흐릿한 실바람이 다리를 간지럽히고 사라졌다.
“아주 오래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인 나비처럼 기이한 삶을 살아온 남자가 있었어요. 나비가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라 하면, 푸른 불꽃은 또 다른 하나의 사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비슷하다는 건 사도는 아니라는 거네요.”
“당신의 전직관은 죄악을 갚기 위해 또 다른 하나를 도왔을 뿐 신격의 존재를 모시는 자가 아니니까요. 다만 그 격이 신의 첫 번째 종이라 할 수 있는 나비와 비슷하거나 혹은 우위거나 할 뿐이죠.”
“왜 하필 내 전직관이 또 다른 하나에게 선택받은 거죠?”
내 질문에 노아 이스벨라의 시선이 내 발끝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의 그림자보다 유난히 새까만 내 그림자가 저 홀로 흔들거리며 존재감을 엿보이고 있었다.
“나비와 푸른 불꽃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까요. 나비는 길 잃은 것들의 인도자. 푸른 불꽃은 길 잃은 것들의 구심점이죠. 여기서 길 잃은 것들이란 죽은 것들 혹은, 갈 곳 잃은 자들을 말해요.”
갈 곳 잃은 자들. 그림자에 숨어 일렁이는 삿된 자들. 그들의 구심점은 도깨비들의 왕.
“천공 섬의 주민이란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이었어요. 그렇기에 나비는 그들을 인도해 테오그라젠스 앞에 도달할 수 있었죠. 그에 반해 푸른 불꽃은 이 땅에서 구심점이 되어 그들의 왕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었지요.”
노아 이스벨라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옛이야기를 더듬는 현자의 입 사이로 과거가 흘러나왔다.
“나비는 푸른 불꽃을 원해요. 다시 한번 인도할 이들을 원하나 나비에게는 그것들을 모을 힘이 없으니까요. 다만 푸른 불꽃은 죄악을 끝내는 것,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원합니다.”
영원한, 안식. 그 단어들이 만들어 낸 의미를 곱씹다가 묻었다. 다른 것을 앞으로 밀었다.
“죄악이 뭔데요?”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몰라요. 다만 육신을 버리고 혼(魂)은 흘려보낸, 한(恨)만 남은 상태로 전직관이 된 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압니다.”
심술궂은 호랑이와 관련 있다는 소리였다. 결국 테오그라젠스의 손에 죽은 자들은 또 다른 하나의 힘을 빌려 전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게 된 것이고.
랑과 이호연의 전직관은 본래부터가 이곳의 존재였으나 미지의 죄악과 한 때문에 또 다른 하나의 힘을 빌려 끝없는 시간의 흐름을 버티고 전직관의 이름으로 우리의 곁에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문뜩 갓에 둘러진 너울 사이로 보았던 얼굴이 생각났다.
“…….”
옆을 돌아보니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입가를 더듬고 있는 이호연이 보였다. 그는 알까? 그의 전직관이 본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까만 너울 사이로 엿보인 얼굴을 정확히는 보지 못했으나 내가 못 알아볼 일 없는 외양을 갖고 있었다.
“내 전직관도 한(恨)인가요?”
“아뇨. 그는 육신을 버렸을 뿐 혼(魂)을 흘려보내지는 않았어요. 굳이 따지면 천공 섬의 주민들과 비슷한 형태라고 봐야겠죠.”
그럼 랑은 혼(魂)이고, 이호연의 전직관은 한(恨)이라는 소리였다. 비슷한 듯 달랐다.
귀신, 도깨비 같은 삿되고 사람 아닌 것들 다룬다 싶었더니 본인도 귀신이란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
그 호랑이. 또 다른 하나의 힘을 빌려 전직관이 되는 순간 랑처럼 육신을 버렸을 거고 지금 남은 것은 한(恨)뿐이라면 혼(魂)은….
이호연에게 너 한번 죽었어, 라며 망발이나 다름없는 예언을 했던 이예린이 생각났다.
예언자들이 반드시 미래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랑의 말도. 그리고 귀신 언니의 말도.
모든 정황이 내게 말해 주고 있었다. 생각 정리를 끝내지 못했는지 여전히 심각한 낯을 한 이호연이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흐릿한 초점으로 그가 지금 아무것도 눈에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이호연의 옆모습을 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짚으며 가장 묻고 싶지만 애써 뒤로 미뤄 두었던 질문을 끄집어냈다.
“내가 꼭 계승을 해야 해요?”
내 질문에 노아 이스벨라의 입이 다물어졌다. 새파란 눈을 보니 듣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꺼져 가는 푸른 불이라고 했다. 랑이 육신을 버린 순간부터 그는 테오그라젠스를 상대하던 과거의 도깨비 왕의 역할도, 테오그라젠스의 낙원을 열 푸른 불꽃의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무엇을 선택할지 고르고 싶다면 일단은 내가 푸른 불꽃이 되어야 했다. 계승을 해야 했다. 내가….
그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방법이었다.
“…나비는 무슨 생각인 것 같아요?”
목소리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나왔다. 침묵의 방 안에서 듣기에는 문제없는 크기였다.
나비는, 테오그라젠스의 종이라 하여 적이라고 생각했다. 낙원을 열어 우리를 죽게 만들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아 이스벨라가 보여 준 푸른 선들의 그림에서 그는 자신의 신을 배신했다.
그의 총구는 신을 향했고 새벽이 속삭이는 것 같은 혀 놀림은 테오그라젠스의 사도들을 희생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정녕 신의 편이라 할 수 있을까.
나비는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신을 죽일 방법을 위하여. 신을 배반한 성자. 그 명칭은 말 그대로였다.
회색빛 도는 갈색 머리에 기이한 보랏빛 섞인 하늘색 눈으로 나를 보던 남자가 생각났다.
그는 말했다. 테오그라젠스도 그 ‘자식’도, 내 아버지도, 나도, 다 사이비라고. 그가 말했던 그 자식이 누구인지 알 거 같았다.
신의 첫 번째 종이자 그 신에게 반기를 든 자. 대항할 이들을 인도하여 신의 앞으로 간 보랏빛 눈을 가진 나비.
그 나비와 이 나비가 다른 존재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쪽이 오리지널 나비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자기 신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면 그는 대체 누구의 편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 끝에 남은 것은 새로운 혼선의 연속이고 방 안에 남은 것은 침묵과 비릿함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그것들이 뒤섞여 버린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이었다.
메스껍다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무던하다고 해야 할까.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놀았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따라 이호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를 가만히 앉아서 올려다보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미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내 발밑에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쇳덩어리 하나를 내뱉었다. 조명 아래 흐릿한 푸른빛 도는 은색의 금속을 본 노아 이스벨라는 알 수 없는 낯으로 그것을 들었다.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되면 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을 원하게 되죠. 이건 그런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 물건이라고 봐야겠네요.”
“금속의 출처가 어디인데요.”
“…….”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질문과는 상관없는 어찌 보면 영 엉뚱한 것을 이야기했다.
“종교가 무서운 이유가 뭔지 알아요? 한번 빠지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서예요.”
“…….”
“사람은 왜 신을 믿는지 아나요? 절망밖에 없는 나의 삶에 아득한 존재의 등장은 나를 구원해 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에요.”
노아 이스벨라의 눈이 휘었다. 순박한 농부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외모가 처음으로 삶에 지친 현자처럼 보였다.
“우리는 각자의 신에게 이름을 붙여요. 그것은 예수가 될 수도 있고 부처가 될 수도 있죠. 혹은 어떠한 존재를 절대적이라고 믿으면 그것이 신의 이름이 되기도 해요.”
“…….”
지옥도 당시 대부분의 종교들은 몰락했으며 동시에 부흥했다.
몰락은 신도의 죽음 아래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신을 원망하여 시작되었고 부흥은 그런 우리를 구원해 달라 빌며 시작되었다.
노아 이스벨라가 말했다.
“로웰 콕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신의 얼굴은 당신이에요. 나라의 이름을 대는 것은 핑계입니다. 당신을 가장 원하는 것은 콕스 본인이에요.”
“…….”
“사람은 절대적 존재를 맞이하는 순간 그것에 홀리고 매혹됩니다. 당신이 콕스의 신이 된 것처럼, 테오그라젠스가 우리 중 누군가의 신이 될 수도 있죠.”
새파란 눈동자 안에 내가 오롯이 담겼다. 그 안에 일렁이는 나의 모습은 푸른 선들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윤곽선처럼 보였다.
“신에게 미친 자에게는 도덕심도, 상식도 통하지 않아요. 이 정도는 작은 유흥거리이거나 신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의 한 걸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도 있죠.”
그의 손안에 들린 금속에 푸른빛이 어렸다.
“절대적 존재를 우러러보는 입장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저 구원을 바랄 뿐이죠. 어떻게 하면 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나 고민하면서.”
“금속의 출처를 물었는데 돌아오는 답은 철학적이네요.”
“이것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에요. 들쑤시지 말아요. 가능하다면 연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 나라를 떠나세요. 콕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신의 얼굴은 당신이지만 그 신의 이름은 당신이 아니니까요.”
“…….”
“나의 신을 어떻게 부를지는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신에게 붙이는 이름이 중요한 거죠. 이 금속에 당신의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건 본인의 마음이라는 뜻이에요. 혹은 이것의 이름이 테오그라젠스일지라도.”
마지막 말은 한숨과도 같았다. 노아 이스벨라의 말이 흐릿한 안개처럼 흩어지다 내게 닿았다. 그의 손에서 쇳덩어리를 받아들여 살펴보다 바닥으로 던졌다.
쇳덩어리는 검은 그림자의 호수에 퐁당 빠지듯 모습을 감췄다.
이호연과 함께 방을 나서기 직전, 이호연이 뒤를 돌며 노아 이스벨라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의 신은 누구죠?”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내심 당황했다. 또한 이호연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노아 이스벨라는 위험한 존재였다. 알면 안 되는 것을 너무 많이 알아 버린 존재였다. 만약 그의 신이 테오그라젠스라면….
그때는 그를 볼 때 생각나는 말은 세상의 비밀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될 것이다.
이호연의 질문에 노아 이스벨라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슬며시 흐릿한 낯의 웃음을 지었다. 그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한 눈이었다.
“…지옥도 이전 내 신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내 농장이었을 거예요.”
“…….”
“지금은… 내게 이런 무거운 지식을 안겨 주고선 멋대로 사라져버린 나의 전직관 레코드가 나의 신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전직관이 당신의 신인가요?”
“…그런가 봐요. 말하면 안 되는 것을 알려 줄 때마다 조각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걸요. 그건 숭고한 희생 같기도 하고, 고집스러운 지식인 같기도 했어요.”
“…….”
“하지만,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내게 뭐 하나 말해 주지 않았죠. 자신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신과 같이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노아 이스벨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다 피 묻은 소매를 보며 멈칫거렸다. 오래 가지는 않았다.
“…언제나 하는 말은 비밀의 언어들. 마지막 순간에는 내게 인사 한 번은 해 주지 않을까 했는데 푸른 불꽃을 찾아가라는 말만 했죠.”
“…….”
“내게 해 준 것 하나 없는데도 그립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공부랑은 거리가 먼 나를 학자로 만들어 버린 그가 미우면서 다시 한번만 보고 싶고 물어보고 싶어요. 나에게 할 말은 없냐고. 신을 찾는 이들과 이런 내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만나기를 원하고, 말 한번 듣기를 원하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형체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깜깜한 눈꺼풀 아래 세상은 어두웠다. 푸른 선이 이지러지며 뭐 하나 그려 주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면 보이는 세상에도 푸른 선이 춤을 추듯 그려 내던 그림은 없다. 노아 이스벨라가 내게 물었다.
“당신의 신은 누구인가요?”
나의 신. 미지의 얼굴과 미지의 이름을 가진 존재가 나를 뒤흔든다는 것이 가능한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렇기에 나는 노아 이스벨라의 물음에 그저 고개만 저었다.
내가 누군가의 신일지언정, 나의 신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은 신을 만들어 내고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무형의 존재이기도 하다.
“…….”
그런 신의 뒤에 숨어 웃고, 안심하고, 안도감을 느끼는 그런 삶이. 신의 뒤에 숨어 사는 그런 삶은, 정말 나의 삶일까.
***
깜깜한 복도를 걸어 나와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새벽이라 미등을 켜 놓은 복도는 낮과 밤에 보던 모습과 달리 은은한 빛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란히 걷는 우리 사이에 맴도는 것은 침묵이었다. 그것은 익숙한 밤 자락 같은 조용함은 아니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꼬마들과도 같은 침묵이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다.
남들과는 다른 전직관을 갖고 특이한 방식으로 전직했다. 그들은 이 땅에 기록된 이들이었다. 무슨 죄악이 그리 깊고, 무엇이 그리 한 맺혀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우리를 찾아온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입에서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꾹 다문 입으로, 나는 모르는 다정함을 보이는 그 사람은 결코 먼저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여명의 빛깔은 황혼과 비슷하면서도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푸르고 붉었다 그 둘은. 어느 쪽이 더 푸르게, 혹은 붉게 느껴지냐에 따라 그 둘은 나뉘었다. 지금은 차가운 푸른빛의 시간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산책이나 하러 갈까?”
걸음을 멈추고 창 너머를 바라보는 나를 따라 그의 걸음 또한 멈췄다. 고개를 돌려 이호연을 보았다. 하얀 머리칼 위로 반짝이는 여명의 빛 한 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툭, 치면 햇빛과 함께 바스러질 것 같은 설탕 공예를 보는 것 같았다. 하얀 머리칼에 반사되는 것들이 너무 반짝거려서.
창을 열었다. 하얗고 화려한 창살은 덜컹거리며 시간을 끌다 맥없이 열렸다.
투명한 유리에 손자국이 남고, 새벽녘의 바람이 살랑거리며 앞머리를 쓸어 올리다 사라졌다. 손을 내미니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폴짝 뛰어올라 창틀에 다리를 올리고 이호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호연이 반짝거리는 여명의 빛 한 줌 아래 사라지는 밤의 흔적처럼 웃음 지었다. 그 웃음은 너무 흐리고 예쁜 신기루 같아서 나는 움켜쥔 그의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마주 닿은 손은 따뜻했고,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그는 나와 달리 가볍게 창틀 위로 올라왔다. 찬바람이 몰고 온 겨울의 공기는 너무 차가워 두루마기를 여몄다.
창틀에 앉아 보는 새벽 겨울 바다는 추웠고, 바람에 눈이 아렸으며, 반짝이는 수면이 아름다웠다. 그것들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동은 없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감정이 격해지기엔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회색빛 도시에 떠오르던 아침 햇살이 꿈을 깨우는 무법자인 것처럼.
“…….”
“…….”
침묵에 답하는 것은 침묵이었다.
산책하자고 했으면서 우리는 한동안 창틀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달랑거리는 다리 아래 세상이 아득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저 높이가 무서웠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또한 무서웠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탐내는 것이 무료한 신과 나의 차이고,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였다.
테오그라젠스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내가 살아온 이 땅을 나락이라고 불렀다. 그럼 우리는 나락 속에서 살아가는 건가?
입을 열어 숨을 내뱉으니 하이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찬 바람이 불면 금세 사라지고 마는 허상 같은 거였다.
바다를 보던 시야를 높였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어우러진 하늘의 색감은 아름다웠으나 그것은 이미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였다.
텅 비어 낮에도 어둠이 드리워진 하늘의 빈자리들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왔다. 작품을 망쳐 버린 커다란 오점 같았다. 손을 뻗어 그것을 가려 보았다. 빈 곳이 많아 소용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가려도 결코 존재감을 지우지 않는 그것들은 그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쭉 뻗었던 팔을 당겨 내 눈을 덮었다. 이제는 전부 어둠이라 다른 어둠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손을 이호연이 잡아끌어 내렸다.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손이 온기에 녹았다. 내 손을 바라보던 이호연이 내게 물었다.
“산책, 갈까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덤덤했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그런 거짓말쟁이의 얼굴이었다.
“응….”
이제 거짓말쟁이는 둘. 하고 싶은 말을 꾹 다문 입으로 삼켜 버린 우리는 마주 보며 웃는 낯을 했다.
이호연이 밖으로 열린 창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는 걸까 지켜보았다. 이호연의 한 발은 창틀에, 한 발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움직였다.
놀라 눈을 깜박이는 내 뺨을 스쳐 지나간 바람은 매서운 겨울보단 봄과 비슷했다. 창을 붙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창틀에서 발이 떨어졌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서 어딘가 어설프게 서 있던 이호연이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내 발밑에 살랑이는 바람이 느껴졌다.
“천천히, 조심해서 일어나야 해요. 아직 바람 다루는 건 어설프거든요.”
빙판 위에서 휘청거리는 것처럼 버벅거리던 나는 내 손을 붙잡은 이호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두루마기의 끝자락이 흔들거렸다. 비행 가능한 괴물들의 몸을 짓밟으며 공중전을 해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날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느끼기에는 희미한 무언가가 나를 지탱하는 것은 불안하면서도, 이상하게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슬쩍 발을 움직여 보았다. 곧바로 흔들리는 불완전함이 느껴졌다. 발끝으로 그것을 더듬다 입을 열었다.
“…발밑에 뭉쳐 있는 바람을 얇게 퍼트린다고 생각하면서 다뤄 봐.”
그에게 설명하면서, 내가 생각난 사람은 눈앞에 초보 마법사가 아닌, 랑이었다. 내 팔을 잡고 몸소 시범을 보여 주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자꾸만, 지금은 잠시 잊으려고 해도.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호연이 내 발밑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나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고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쪽으로는 재능이 없는 듯싶었다.
“신기하네….”
“하지만 오래 못 버텨요.”
그 말과 동시에 내 발밑에 있던 바람이 흩어졌다. 이호연이 잽싸게 나를 붙잡았다. 제 발등 위에 나를 올려놔 준 덕분에 우리는 꽉 끌어안게 되었다.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다시 창틀로 움직였다. 그것을 가만 지켜보던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작은 푸른 불이 피어올랐다.
이호연의 손등을 톡톡 쳐 놔달라고 하고 푸른 불꽃 위로 올라갔다. 작음 불티 같은 것 위로 올라탄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며 나는, 웃었다. 장난스럽고, 의뭉스러운 그런 웃음을.
익숙한 말을 흘렸다.
“마법의 좋은 점은 활용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역량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거야.”
내가 아는 그가 해 줬던 말을.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노력 여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재능이 마법이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불이 용이 되고, 바람이 되고, 파도가 되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거야.
내가 그랬듯, 다른 이들이 그랬듯, 아주 먼 과거에 어느 도깨비 왕이 그리했던 것처럼.
내 말, 그가 했던 말을 들은 이호연은 고개를 기울이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나는 마법 재능은 없는 것 같아요.”
“모르는 거지. 낯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거나. 물론 어느 정도는 이호연의 재능 문제이기는 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자신 없어 하고, 마법을 다루는 저 스스로를 낯설어하면서.
이호연이 주저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름 내 기분 풀어 주겠다는 의도였을 거고, 그건 정확히 먹혀들었다.
햇볕 피해 숨어든 나무 아래로 함께 끼어든 바람 같은 그런 다정함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도망 안 가고 그의 앞에 있는 거였다.
푸른 불이든 나비든. 도망가고 싶은 그 모든 것을 두고서.
잠깐 사이에 자신을 지탱하던 바람도 흩어져 버렸는지 이호연이 창문을 붙잡고 창틀에 발을 올렸다. 그런 자신을 보는 나를 보며 그는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배운 건 며칠인데 정작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안 되네요.”
그 정도면 확실히 재능 문제기는 했다. 나는 손뼉을 짝, 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내 발밑에 작게 뭉쳐 있던 불이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공에 생겼다.
작은 불꽃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창 앞에 섰다. 손을 뻗어 열린 창문으로 인해 벽에 만들어진 그림자에서 류를 끄집어냈다. 등이 열리고 푸른 불이 흘러나왔다.
조약돌 크기의 불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던 내가 작은 샛길 같은 푸른 불의 길 위로 발을 옮기자 이호연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티는 안 내도 불안했나 보다.
“마음 같아선 네가 했던 것처럼 이 위에 올라오게 해 주고 싶은데, 올라오기 전에 불탈지도 몰라서 그건 안 돼.”
“그 불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한번 당해 봐서 알아요.”
“…….”
바닷가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그때 확실히 위험하기는 했지. 여러 의미로.
푸른 불 위에 쪼그려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호연은 창틀에 걸터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바람 따라 머리카락이 흔들거렸고, 옷자락이 흔들렸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호연이 웃음과 함께 말을 흘렸다.
“그러고 있으니까, 꼭 바다에서 건너온 신처럼 보여요.”
“신?”
내 물음에 이호연이 손을 뻗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내 머리를 귀 뒤로 쓸어 주며 그가 말했다,
“뒤에는 노을과 바다가 있어서 푸른 파도를 타고 온 신처럼 보여요.”
낯간지러운 소리였다. 내 뺨의 덮은 손에 얼굴을 기대었다.
신이라. 노아 이스벨라와 신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인지 그의 신 타령이 묘하게 들렸다.
하나 있다는 신은 좀 문제 많기도 하고.
“…….”
이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사람과 신 중 누구에 더 가까운 걸까. 푸른 불꽃은, 어디에 더 가까운 것인지 명확한데 나는 모르겠다.
이왕이면 전자에 가까웠으면 좋겠는데.
그의 손등에 내 손을 덮으며 눈을 감고 물었다.
“마법 가르쳐 줄까?”
“난 재능 없어요.”
“배워 두면 좋아. 급할 때 하늘로 도망갈 수도 있잖아.”
신체 계열이 마법 계열한테 마법 배운다는 게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이젠 안 될 이유가 있나 싶었다. 우리 둘 다 애초에 계열에 따른 고유 능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체 계열인 이호연이 바람을 다루는 마법을 사용한다는 점부터 이상한 거였지만, 우리는 이미 이보다 더 이상한 것을 받아들인 뒤였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마법을 가르친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호연은 사용만 가능하고 재능은 조금 부족한 것 같기는 했지만….
배워서 나쁠 것도 없고. 그렇게 배운 것 하나하나가 한 번이라도 목숨 지키는 데 쓰인다면 더 좋고.
눈을 떠 그를 보았다. 고민하는 낯의 그에게 눈을 휘며 웃었다.
“나도 내가 이럴 말 할 줄은 몰랐는데.”
“?”
“나랑 같이 도망갈래?”
크게 뜨여진 눈이, 조금 벌어진 입이. 나의 말에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보여 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실없는 웃음을 짓고, 맥없는 말을 했다.
“그래 봤자 금세 돌아와야 하지만. 산책이잖아, 이거.”
짧은, 아주 짧은 도망일 뿐이지만. 나 혼자 도망가 버리지 않았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 주면 좋겠다.
내가 내미는 손을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바람과 불은 함께하면 위험하다. 불이 꺼지거나 더 타오르거나 둘 중 하나의 길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위험한 짓을 내버려 두고, 부추기고, 장려했다.
바람이 불을 따라 한다. 작은 푸른 불을 따라 바람이 뭉치고, 얇게 퍼트려지는 불을 따라 바람도 퍼트려졌다.
우리는 각자의 불과 바람을 타고 허공을 걸었다. 갈 곳도 없으면서 도망이라는 이름의 산책을 나왔다.
눈으로 보이는 색을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일까. 재능 없다더니 제법 잘 따라왔다. 휘청거릴 때는 내가 붙잡아 주면 그만이었다.
불과 바람이 섞이고 얽히면, 푸른 불꽃이 바람을 잡아먹을 듯이 굴다가도 물러나고, 바람이 불을 꺼트리고 싶은 듯 굴다가도 되려 자신이 잡아먹혀 무서워하며 도망갔다.
그가 휘청거릴 때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안정적이면 손끝과 손끝이 닿았다. 가끔은 목을 조르듯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여명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래사장이 우리의 발밑에 있었다. 눈이 아리게 반짝이는 바다가 아래에 있었다.
바다의 포말과도 같은 하이얀 입김이 뭉개지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길게 이어지던 푸른 불이 내 발아래에 작게 뭉쳤다. 그것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알라딘이라도 된 것 같네.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아니라 불과 바람이기는 하지만.”
어릴 때 알라딘을 보고 나도 호랑이랑 놀고 싶다고 엄마한테 졸랐던 기억이 났다. 동물원에 가서 만난 아기 호랑이는 귀여웠지만 내가 같이 놀고 싶었던 건 성체였다.
결국 눈으로만 봐야 해서 울었던가? 정확히 기억하기엔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지금이라면 결코 꿈꾸지 않을 작고 바스러질, 하찮은 소망이었다. 그래서 소중한 추억이었다.
푸른 불 위에 앉아 바람 위에 조심스레 따라 앉는 이호연을 보았다. 무릎에 팔을 얹고 그 위에 뺨을 기대며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사라진, 아득하다고 하기엔 가까운 과거의 것들을.
“나 어릴 때 꿈이 호랑이랑 노는 거였다? 알라딘을 봤는데 호랑이랑 같이 사는 공주님이 너무 부러운 거야. 그래서 나도 호랑이 키우고 싶다고 졸랐어.”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귀엽다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보니 그의 하얀 머리가 여명에 떠오르는 해의 빛깔과 비슷해 보였다.
어느 색의 하늘이든 쉽게 물들여지는 구름이랑 닮은 게 맞을 테지만.
반짝거리고, 눈부셔서 눈이 아리다는 점에서도.
“…너는 꿈이 뭐였어?”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눈을 돌리게 될 것 같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래 깊은 바다로 끌려가는 것 같은 나의 기분과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산뜻했다.
“경찰차요.”
“…경찰?”
“아뇨. 경찰차. 삐용삐용거리면서 가는 거 멋있다고 경찰차가 되고 싶다고 했대요.”
귀엽네. 작게 중얼거리며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는 제법 요령을 익혔는지 이호연 또한 편안한 분위기로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바다 건너 떠오른 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애써 가벼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있잖아. 만약 내가 푸른 불꽃이 되기 위해 랑, 그러니까 내 전직관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면 말이야.”
내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순간이 기어이 오고 만다면 말이야.
“…….”
“적어도 그 계승은 내 손으로 이뤄지지 않을 거야.”
나는 그 칼을 놔 버릴 거야.
“…네.”
“떠밀려 받는 순간이 오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먼저 그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을 거야.”
설령 그가 다시 내 손에 떨어트린 칼을 쥐여 준다고 해도. 나는 그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하고 비겁한 변명이나 내세울 것이다.
나는 수상하고도 다정스러우며, 제멋대로 굴 수 있으면서 내 손안에서 기꺼이 놀아 주는. 울면 달래 주고 어리광을 부리면 받아 주는 랑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해서.
랑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그 의무감에 굴복하기 싫었다.
“…….”
믿지 말라는 말에 믿은 적 없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그의 말을 의심 한번 한 적 없었고.
처음 푸른 불을 다루게 된 날 제대로 다루지 못해 화상 입은 내 손을 붙잡아 주던 그 감촉이 아직도 생생해서. 도저히, 나는.
“말 못 해.”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벗겨진 신을 다시 신겨 주기 위해 기꺼이 몸을 낮추는, 혼자여야 하는 지옥도의 삶에서 나를 그리도 살뜰하게 살피고, 챙기고, 돌보아 준 그에게 내가 어떻게.
내가 랑에게….
가끔은 숨이 막히는 그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죽어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해….”
그 말을 꺼내면 내가 랑에게 죽어 달라 청하는 것이 되는데.
만약 내가 그리 말하며 칼을 들이민다면 랑은 옷에 피가 묻는다고 말하며 내 걱정을 할 것이다. 칼을 들이밀기만 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그 칼에 스스로 찔려 줄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죽어 줄 그를 알기에 나는 말하지 못 하는 거다.
내게 애정을 주는, 삶에 미련 없는 랑을 내가 놓지 못해서. 매일을, 오로지 언제나. 어느 순간에 올지 모르는 끝만을 바라보는 랑을 내가 못 놔서.
그러니까 말 안 해. 안 할 거야. 최후의, 최후의, 최후까지. 선택권 없는 강요가 되는 순간까지도 절대.
시야가 흐려졌다.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버텨 보았지만 제멋대로 눈물이 떨어지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리고 다시 흐려지고, 선명해지고, 흐려졌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다.
뚝, 떨어진 작은 물방울은 푸른 불에 잡아먹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노아 이스벨라가 한 말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은 적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약과를 달라 조를 수 있게.
노아 이스벨라가 내게 물었다. 나의 신은 누구냐고. 나의 신은 얼굴 없는 자요, 이름 모를 낯이나, 굳이 고르자면 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는 나처럼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가졌을 거고. 기다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수묵화 같은 존재일 것이며. 답지 않게 치렁치렁한 금귀고리를 달고 언제나 의뭉을 떠는 자일 것이다.
나의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그렇게 생겼을 것이다.
“나 원래 무교라서 신 별로 안 믿었어. 그런데 내가 신을 죽일 용사가 됐네?”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저 밑에 바닷물이 눈에 들어간 것처럼 따끔거렸다. 그래서 눈이 아파 눈물 나는 거라는 핑계를 갖고 와 보았다.
의미 없고 빈약한 변명거리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용사가 나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보았다.
이마에 번개 흉터 단 꼬마의 이야기도 봤고, 용사가 주인공인 게임도 해 봤다. 심지어 역설로 용사가 흑막인 소설도 봤다. 그런데 내가 정작 그 용사가 되고 보니 느끼는 것은 하나였다.
“용사 진짜 개 같아. 망캐야. 꿈도 희망도 없어.”
용사의 단골 이벤트인 주변 인물의 죽음으로 인한 각성 같은 거, 내게는 필요 없었다. 그런 거, 난 원한 적 없었다.
용사가 실패하면 끝나는 세계 같은 거 책임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있는 듯 없는 듯, 적당히 편하고 적당히 잘 살면서.
“말 안 할 거야.”
랑에게 죽어 달라는 말 안 할 거야.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나는 주변 인물들을 죽여야만 강해지는 용사 같은 거 되기 싫어.
바람이 뜨겁게 달아오른 내 눈가를 스쳤다. 불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친 이호연이 내 눈가를 쓸었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것으로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의 외면이 얼마나 하찮고 미약한 것인지 알면서도, 나만 두고 세상은 흘러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발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
내 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도망치는 것도 해결법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의 어깨너머 보이는 하늘은 푸른 염료가 더해지고 있었다. 여명이 끝났다.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이제 꿈에서 사는 건 불가능하다.
도망가도, 결국엔, 모든 것이 이뤄질 거야.
“…….”
그건 비단, 누군가 내 귓가에 그리 속삭였기에 깨닫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전보다 더 선명해진 것 같은 속삭임을, 환청에 가까운 그것을 듣지 못한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