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짓과 거짓과 거짓 (15/34)

#거짓과 거짓과 거짓

“바타르 씨는 신기하네요.”

“바타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네, 그럼 바타르.”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에 카페 직원들이 움찔거렸다. 누가 보면 내가 찻잔이라도 깨 먹은 줄 알겠다.

몽골에서 왔다는 남자와 지나치게 대비되어서 그런가. 저들이 더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불을 다루는 사람 중에 대화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나를 웃으며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를 볼 수 있는 건가요?”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많은 불의 마법사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태연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 물음에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비교 대상이 아닌 자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있나요?”

비교 대상이 아니다라.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닐 텐데. 평정심? 아니면 연기를 잘하는 걸까.

게다가 열등감이라는 표현도 제법 재미있었다. 그 누구도 생리적 두려움을 열등감이라고 표현한 적 없었다. 어쩌면 말하고 있는 본인이 누구보다 그 열등감을 느끼고 있기에 저런 답을 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열등감으로 설명 안 되는 감각이라는 거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하지만 그 감각의 근원에 열등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지금 나랑 말장난하는 건가. 대답하는 듯하면서도 내가 묻는 것은 빙빙 돌려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뭔가, 랑과 비슷한 타입 같았다. 태연하게 말하는 걸 보면 진심으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할까. 테이블을 두들기는 내 손짓이 길어질수록 긴장하는 것은 카페 직원들이었다. 저 사람들도 전직자일 텐데 겁이 참 많았다. 아니면 내 악명이 높은 건가.

빙빙 돌리는 대화가 짜증 나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바타르라는 이 사람과의 대화가 그렇게 짜증 나는 것은 아니었다.

저 혼자 모든 세상의 미련으로부터 해탈했다는 태도도 나름 재밌고, 뭘 원해서 접근했는지 궁금도 했다. 이야기를 이어 가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와 하고 싶다는 대화가 뭔가요?”

내 물음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음과 동시에 눈이 가려졌다. 테이블 위에 있는 내 손을 향해 그가 손을 뻗었다. 뭐 하는 걸까 지켜보는데 이호연이 그런 그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우리가 손잡고 대화해야 하는 사이는 아니지 않아요?”

“손목을 자르고 대화해야 할 정도로 삭막한 사이도 아니죠.”

“하지만 못 자를 것도 없는 사이죠.”

제 손목이 간당간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타르는 웃음소리를 냈다. 항복하듯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 이호연이 잡은 손을 놔주었다.

대화는 살벌한데 분위기는 온유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졌다. 자신은 적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못 이기니 반항하지 않겠다는 의미 같기도 했다.

일단, 내게서 호기심을 이끌어 내는 것을 성공하기는 했다.

“말 돌리지 말죠. 하고 싶은 말 빨리하고 헤어져요. 안 그러면 그쪽 보호자, 우리 쪽 보호자, 나란히 모여서 경고받을지도 모르니까.”

바타르의 뒤편에 서 있는 카페 직원 겸 미국 정부에서 보낸 감시자들이 손을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앙들을 보는 눈빛이었다.

여기 직원으로 파견된 사람들 중 자진 지원자가 있기는 할까. 딴 데로 새는 내 생각을 붙잡은 것은 바타르의 말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뜻을 몰라 기억 못 하겠는데요.”

외국어로 말하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것도 몽골어를. 발음도 기억 안 난다. 떨떠름한 내 얼굴을 본 바타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통역기 안 갖고 있었습니까?”

“오늘 받았어요. 바타르야 말로 통역기 안 갖고 있네요?”

지금도. 텅 빈 손과 팔목, 목과 귀. 대충 눈에 보이는 곳 어디에도 하얀 보석 달린 은색 장신구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안 갖고 있어도 통역기 갖고 올 사람 많으니 대화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처럼요.”

“…….”

치사하고 실용적인 답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 온 대부분의 사람은 통역기를 갖고 올 것이다. 말 안 통하면 이번 모임의 취지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역기가 아무리 구하기 힘들다고 해도 한 나라 안에서 세 개를 못 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도 국가의 대표자에게 주기 위한 물건을 안 구해 줄 리도 없었다.

반지 위의 하얀 보석을 더듬는 내게 그가 말했다.

“보르테 치노(Бортэ-Чино). 그날 제가 한 말은 보르테 치노입니다.”

“고유 명사인가 봐요. 들어도 모르겠어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 손바닥을 천장을 향하게 펼친 그의 손안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나는 늑대, 하나는 사슴의 모습을 취한 불이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제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불로 어떠한 모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시전자 개인의 역량이 가장 많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늑대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불의 꼬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불을 다루는 그의 능력이 한 나라의 대표로 이름 올리기에 부족하지는 않구나 싶었다.

오히려 섬세한 것만으로 따지면 에드워드 로거스보다 이쪽이 한 수 위였다. 그쪽은 세심한 컨트롤 능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그 대신 이쪽보다 화력은 좋고.

바타르가 양손을 움켜쥐니 그의 손안에서 피어올랐던 두 마리의 짐승이 사그라졌다. 불티의 흔적을 눈으로 쫓으며 그가 말했다.

“보르테 치노와 고아 마랄(Бортэ-Чино, Гоа-Марал).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이라는 뜻입니다.”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이면… 원조 비사? 대충 몽골의 설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게 푸른 늑대라고 한 거지? 나쁜 뜻은 아닌 것 같지만….

의아함을 담아 바타르를 보았다. 그는 내 시선의 마주 보며 묘한 낯을 하다가 이호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타르와의 대화에 흥미 없다는 듯 내 옆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호연의 낯에도 의아함이 떠올랐다.

한차례 우리의 얼굴을 쭉 훑어본 바타르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음료를 마셨다. 느릿한 그의 행동은 만들어진 것처럼 차분했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재미없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들어 두면 좋은 얘기인가요?”

“기분은 나쁠 수 있지만, 들어 둔다면 나쁘지 않을 이야기지요.”

마치 이예린이 예언 들을래? 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타르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실눈캐는 꼭 나중에 흑화하던데.

반쯤 장난스러운 내 생각과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제법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이번에 나 혼자 이곳에 왔어요. 몽골은 원래 미국 모임을 거절했었죠. 몽골의 전직자는 그 수가 적고, 그중에 이름을 알릴 만한 이들은 더 적기 때문입니다.”

강유진에게 들은 것이 있기는 했다.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국가가 제법 있다고. 대표로 뽑을 만한 전직자를 타국에 보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거나, 아니면 그 정도 격의 전직자가 없거나.

사실 이번 모임이 나라 간의 신경전이기는 했다. 너희는 이런 전직자 없지? 우리는 있다? 이렇게 타국에 보내도 안심할 정도다? 물론 이렇게까지 가볍지는 않겠지만 대충 비슷한 느낌이었다.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몽골도, 자국의 전직자를 밖으로 내돌릴 여유는 없었다.

“그럼 혼자 미국까지 온 건가요?”

생각해 보니 몽골 쪽 보호자나 다른 대표자를 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함께 온 이들과 다니는데 그에 반해 바타르는 항상 혼자 돌아다녔다.

보호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다. 아니면 예외 사항에 따른 제약이 있었을 수도 있고.

“류, 당신을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이번 기회가 없다면 평생에 한 번 볼 수나 있나 싶은 사람이니까요.”

“…왜죠?”

바타르가 굳이 나를 만날 이유가 있을까. 그 이유가 재미없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이야기인가. 이미 작은 의심이 서린 내게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당신이 나의 보르테 치노니까요. 강하고, 푸른. 초원의 생명보다 더 강한,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는 나라에서 온 사람. 당신을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식의 찬양은 또 처음이네…. 그런데 뭔가 조금 그런데.

바타르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은 이호연의 기세가 영 좋지 않은 것이 나만 그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어조가 단순 동경하는 사람에게 하기에는 너무 절절했다. 그런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나는 서서히 낯을 굳혔다.

“내가 미국에 오긴 전, 나의 나라에게 요구받은 것이 있습니다.”

“뭐죠?”

“가능하다면 당신을 유혹해라.”

“…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옆에서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에 배치된 긴 의자 손잡이를 이호연이 부숴 먹는 소리였다.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바타르를 보는 이호연의 얼굴이 제법 사나웠다. 한 대 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바로 앞에서 그런 이호연을 보면서도 바타르는 웃는 낯을 버리지 않았다.

그와 반대되게 내 얼굴은 제법 굳어 있었지만. 재미없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이야기. 그 표현이 딱 알맞았다.

내 얼굴을 본 바타르는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심 나도 그러고 싶었으나, 이미 짝이 있는 것 같군요.”

“보다시피.”

“잘 어울리는 보르테 치노와 고아 마랄입니다.”

“…….”

내가 보르테 치노라고 했으니 이호연이 고아 마랄, 즉 흰 사슴인가. 힐끔 옆을 보니 못마땅하다는 티를 지우지 못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호연이 바타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카락 색은 구름 같은 하얀색이었다. 내 기억상 푸른 늑대가 남자고 흰 사슴이 여자였던 것 같은데…. 어쨌든 색 조합이 비슷하기는 했다. 푸른색, 흰색.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겁니다. 당신을 유혹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 나뿐이 아닐 거라는 거.”

그거참 곤란한 말이네. 벌써부터 피곤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요?”

“어제 영국 사람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들의 보호자가 로거스에게 그래서야 당신을 유혹할 수 있겠냐고 화를 내더군요.”

유혹해도 넘어갈 생각 없는데. 으웩, 하는 내 표정을 본 바타르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서인지 로거스가 더 골이 났습니다. 그는 당신을 이기고 싶은 거지 유혹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로거스의 생각이 어떻든 둘 다 불가능한 꿈이네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덤벼 보고 싶다면 날 보자마자 흥분하는 것부터 고쳐야 할 거다.

바타르의 말을 생각해 보면 에드워드 로거스는 경고까지 먹고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니,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기는 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럴 거라는 뜻인가요?”

침묵을 지키던 이호연이 바타르에게 물었다. 쿠키 하나를 입에 넣고 있던 바타르가 이호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대부분의 나라가 그럴 겁니다. 당신의 푸른 늑대는 강하니까요. 작은 나라였다면 왕처럼 추앙받았을 겁니다.”

“왕이 되고 싶지 않은데요.”

“자리를 만드는 것은 자리의 주인이 아닌, 그 자리를 떠받들어 줄 의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내게는 선택권이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언뜻 들으면 참 좋은 말인데 거기에 나를 대입해 보니 영 기분이 별로였다.

실제로 하늘이 무너진 이후 대부분의 나라가 정부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그것을 다시 회복시킨 나라가 다수이기는 했으나 정부 자체가 사라진 국가도 있었다.

가장 강한 전직자를 왕으로 추대한다고 했나. 지금도 나라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라를 만드는 건 단순히 힘만으로는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지옥도와 다를 게 없었다. 힘만 있다면 그건 폭군이었다. 그리고 아마 나 또한 폭군에 가까울 듯싶었다.

이뤄질 리 없는 가설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유혹이라니.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골때리는 소식에 급작스러운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시린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바타르에게 물었다.

“바타르의 말은, 각 나라의 대표들이 이곳에 도착할 때마다 나를 귀찮게 할 거라는 뜻이네요?”

“유혹하고, 구혼하겠죠.”

이야, 정말 단체 소개팅이었네. 그것도 내가 주인공인 소개팅. 이제 나는 도망가면 되는 건가. 애초에 미국에 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에 뒤로 버튼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한숨 쉬는 내게 바타르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괜스레 못마땅해 보였다.

“세계의 비밀, 이라는 미국의 제안도 구미가 당기기는 했겠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할지는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모르죠.”

“앞에 ‘세계’라는 타이틀이 붙었다고 해도요?”

“세계급이라고는 해도 불확실하다는 점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류’, 당신의 존재 가치는 정확하죠.”

“…….”

바타르의 말에 따르자면 이번 미국의 모임에 참가한 나라들의 목적은 공적으로는 친목도모요, 비공식적으로는 세계의 비밀을 듣기 위해서요, 사적으로는 ‘나’라는 뜻이었다.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이건 주세진도 예상 못 한 상황일 것이다. 식어 버린 음료를 쳐다보다가 바타르를 보았다.

이런 걸 말해 주는 저의가 무엇일지 몹시 궁금했다. 나 하나 보고 싶어 몽골에서 미국으로 혈혈단신 혼자 왔다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많은 나라가 당신을 탐냅니다. 당신을 묶어 둘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동원할 겁니다. 당신은 아카샤(ākāśa)를 유일하게 홀로 공략한 사람이니까요.”

“아카샤…. 오랜만에 듣네요 그 이름.”

아카샤(ākāśa). 내가 최초로 공략했던 하늘 조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각국에 하나씩 있었던, 지금의 하늘 조각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조각들의 이름.

그 안의 괴물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며, 절대적이며, 그 많은 전직자를 가져다 바친 뒤에야 없앨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크기별로 등급을 매긴 하늘 조각들. 게이트도 되지 못한 규격 이하의 조각들. 그리고 아카샤. 이제는 아카샤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후유증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거 하나를 공략하기 위해 수십 명의 전직자를 잃은 나라가 있었고, 수백의 전직자를 잃은 나라가 있었다. 몽골의 전직자 수가 적은 것 역시 아카샤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온 괴몰들의 손에 의해 죽었거나, 공략하다가 죽었거나. 아카샤를 공략할 때 얼마나 많은 전직자를 잃었냐는, 그 나라의 전직자 수와 능력을 예상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전자의 경우 단순히 그때 죽은 전직자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 얼마만큼의 사람이 전직했는가였다. 아카샤에서 죽은 사람이 적을수록 많은 사람들이 전직을 했다.

많이 죽었다면 그만큼 이후에 전직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다.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전직자를 본 사람들이 그만큼 전직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직자의 수는 새로운 국력. 국가의 입장에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한국은 직업 선호도 1위가 전직자더군요.”

“정확히는 헌터라고 해야죠. 직접적으로 활동해서 돈 버는 전직자는 헌터라고 부르니까.”

“그리고 그런 결과물이 만들어진 데는 당신의 존재 이유가 크고요.”

“…그렇죠.”

아카샤를 홀로 공략할 수 있는 전직자가 있다는 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불었다.

지옥도를 겪은 우리는 새로운 것을 필요로 했고 ‘나’라는 존재가 갖고 온 바람에 사람들의 마음은 민들레 홀씨보다 가볍게 흔들렸다.

결코 감가상각되지 않을,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높아져만 가는 것이 ‘류’라는 존재였다. 상징적으로도 실제로도.

사람은 동경의 대상이 있으면 따라 하고 싶은 심리가 존재한다. 날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직하는 사람의 수에 커다란 변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당사자의 기분이 어떻든 세상은 흘러간다.

유혹하고, 구혼할 거다. 만약 내가 내 사랑을 찾아 다른 나라로 간다고 한다면 그 국가에는 전직자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질 것이다.

선망의 대상이란 그런 거였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것.

…짜증 나.

에드워드 로거스의 평가를 다시 내려야 할 듯했다. 로거스는 불로 이루어진 사자를 다룰 수 있기에 영국이라는 나라의 얼굴마담이 되었다.

그렇기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목받았고, 국가와 너무 얽혀들고 말았다. 그리고 나를 꼬셔 보라고 한 것은 하나의 국가 사업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보자마자 불부터 날린 것을 보면 제법….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건 때려 주고 싶은 거고, 자기가 얽혀 있는 단체의 명령을 거절하는 패기를 보여 준 건 따로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페이즐리 오스틴은 무슨 생각일까. 그녀 또한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드워드 로거스처럼 나를 이겨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냥 에드워드 로거스가 사고 치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같이 덤빈 건가?

두 사람의 보호자는 이왕이면 로거스가 나를 꼬셔 주기를 원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내게 무조건 잘 보이기를 원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로거스와 오스틴에게 통역기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건 사용 안 하고 영어로만 말하는 것으로 곤란하게 만든 거 보면, 내심 내가 그들에게 먼저 고개 숙이는 상황 같은 것을 원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것을 원하는 거라면 로거스가 들들 볶일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져 줄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나를 두고 세상이 멋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바타르는 왜 내게 이런 걸 알려 주는 건가요? 내가 어쭙잖은 생각하는 이들과 그쪽을 싸잡아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오해는 조금 슬픕니다. 전 이미 포기했거든요.”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린 바타르가 손을 흔들었다. 마치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런 바타르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잘됐네요. 바타르의 말대로 내 옆에는 이미 짝이 있거든요.”

“잘 어울립니다. 백년해로하세요.”

“그럴 거예요.”

내 말에 바타르가 소리 내 웃었다. 진한 갈색 머리가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밝게 빛났다. 노을 지는 시간에 초원의 빛깔 같기도 하고, 초록빛 무성한 잎을 단 가지의 나뭇결 같은 색이기도 했다.

바타르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며 말했다.

“포기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그 대신을 바랐습니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친구?”

“당신의 연인이 되기에는 이미 글렀으니까요. 그러니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쪽이 더 즐거울 것 같군요.”

바타르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단단한 굳은살 배긴 손은 사냥꾼의 손이었다. 햇빛 아래 묘하게 황금빛이 스며든 다갈색 눈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지개 뜨는 나라에서 온 귀인. 나와 친구가 돼 주실래요?”

바타르의 눈동자는 내심 자신도 나를 유혹해 보고 싶다고 했던 것치고는 너무 반짝거렸다. 햇빛 한 가닥을 두른 것처럼 말이다.

“…….”

잠시 고민하다 그의 손을 맞잡았다. 웃기야 웃었지만, 내 기분은 그리 들뜨지 않았다.

친구.

그 짧은 음절이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벅차서, 웃는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맞잡은 손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내가 그를 정말 친구로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라기엔 우린 너무 계략적인 사람들이었다. 친애는 무리다. 신뢰가 최선이었다.

***

바타르와 헤어지고 목적 없는 걸음을 걷다 이호연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바타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걷는 것을 멈추었다. 바타르와 마주 잡았던 손을 보았다. 단단한 굳은살 배긴 손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한 것 같았다.

“수상하다고 하기엔 솔직하게 굴고, 수상하지 않다고 하기엔 너무 의뭉스러워.”

모순된 표현이었지만, 정말로 그랬다. 바타르의 행동, 말, 모든 것이 수상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기이할 정도로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과 친구라면 나중에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마주 잡은 손을 흔들거리며 바타르가 그렇게 말했다. 너무 대놓고 말해 황당했지만, 도리어 그래서 화도 나지 않았다. 눈을 끔벅이며 저를 보는 내게 바타르는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늘게 만드는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다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흑막처럼 구는 것보다는 낫기는 한데, 그렇다고 각별하게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반에서 조별 과제 할 때 인원 부족할 경우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반 친구 정도?

딱 그 정도의 관계 이상은 못 나갈 것 같았다. 그가 죽으면 안타까워는 해도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얕은 찜찜함만 남을 것 같았다.

다시 걷기 시작하는 내 옆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던 이호연이 내게 먹기 좋게 포장된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아까 카페에서 샀어요. 아침 못 먹었잖아요.”

어젯밤 그의 방에서 먹었던 샌드위치보다 속이 더 알차 보였다. 그것을 한입 베어 물며 이호연을 보았다. 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들고 먹는 것이 어제 모습과 비슷했다.

“어제 그건 어떻게 했어?”

“어제?”

“샌드위치. 어제 먹다가 말았잖아.”

“아, 그거. 류를 방에 데려다준 뒤 돌아가서 다 먹었죠.”

역시나 내 방까지 나를 옮겨 준 것은 그였다. 그나저나, 손에 쥔 샌드위치 하나로 이호연이 배가 찰까 싶었다. 내 기억상 당장 어제 그의 방에 있던 음식만 해도 지금 손에 쥔 것의 몇 배는 되었다.

그리고 이호연에게 ‘이거 먹을래?’하고 음식을 내밀면 그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근육량이 많아서 그런지 그는 항상 잘 먹었다.

원래는 호텔 내부를 조금만 구경하다가 식당 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우연히 로거스와 오스틴을 만나고 바타르와 대화하다 보니 조식 시간을 놓쳐 버렸다.

뭐라도 사서 먹일까. 샌드위치를 냠냠 먹는 호랑이를 보다가 창밖을 보았다. 겨울 바다는 뭔가 삭막한 이미지인데 날이 좋아서 그런지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파이어를 뿌린 것 같기도 하고 유리 조각을 떨어트린 것 같기도 했다. 눈이 아릿할 정도로.

“……?”

원래 바다가 저 정도로 빛나나? 새벽에 봤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샌드위치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이호연이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고는 내게 물었다.

“바다 구경하고 싶어요?”

“나가도 돼?”

“호텔 주변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이호연의 말을 들으며 창 쪽으로 더 걸어갔다. 손을 올려 보니 차갑게 얼어 버린 얼음 조각 같은 유리창이 내 손을 막았다. 차가움에 본능적으로 창에서 손을 떼었다.

그런 내 행동을 옆에서 보고 있던 이호연이 내 손을 쥐며 말했다.

“안 되겠네요. 그러고 나가면 감기 걸려요.”

그의 말대로 우리 둘 다 차림새가 가벼웠다. 따듯한 호텔 내부만 돌아다닐 거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입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 그냥 다음에 나가자. 바닷가는 춥기도 하고.”

그렇다고 보온 기능 있는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고 나가기엔, 싸울 준비 됐으니 덤비라는 의미의 시비 같았다. 이왕이면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있다가 미국을 떠나고 싶었다.

약간의 께름칙한 기분을 무시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

뭐지. 한참을 벗어나, 다른 층으로 간 뒤로도 그 감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한 번 이런 비슷한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신경 쓰인다.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새삼스레 없던 마법사의 감이 발동했다고 하기엔 걸리는 것이 없었다.

미국에서 주선한 장소에 위협이 될 만한 게 존재하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넘긴 샌드위치를 뚝딱 해치운 이호연이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요?”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나 싶어 그를 보았다. 의아함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이호연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류, 버릇 있어요. 고민을 하거나 불안하면 이렇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반쯤 뜯겨 나간 거스러미가 엄지손톱 옆에 달랑달랑 달려 있었다.

“염증 나니까 웬만하면 하지 말아요.”

내 손을 내가 괴롭히는 것을 방지라도 하겠다는 듯, 이호연이 잡고 있던 내 손에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얼결에 잡혀 버린 손을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말했잖아요. 내 시선은 언제나 한곳으로 향한다고.”

낯간지러운 소리. 손이 움츠러들며 그의 손등을 슬쩍 긁었다. 그런 내 행동에 이호연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애꿎은 손 괴롭히지 말라는 말은 덤이었다.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야?”

“짝이라잖아요. 그럼 잘 알수록 좋죠.”

“바타르는 싫으면서 그 말은 좋은가 봐?”

이호연은 웃음으로 답했다. 짝이라…. 꽤나 직접적이면서 묘하게 서정적으로 들리는 것 같은 단어였다.

보르테 치노와 고아 마랄이랬지.

1학년 때 수강 신청 실패로 듣게 된 수업에서 원조 비사에 대한 것을 배웠다. 설마 그 지식을 실제로 써먹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럼 너는 내 흰사슴이야?”

“원래는 호랑이지만, 류가 원하면 사슴도 좋고요.”

둘이 너무 차이 나는 개종 변화 아닌가. 그의 말에 작게 키득거리다 문득 든 생각에 다시 그를 보았다.

“혹시, 용으로 변할 수 있어?”

개종 변화라고 하니, 그의 동공이 전과는 다르게 변했던 것이 떠올랐다. 호랑이처럼 축소되던 동공이 파충류의 것처럼 세로로 축 찢어졌었다. 무언가 변했다.

내 물음에 이호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으로 변할 수 있기는 한데…. 어떻게 알았어요?”

“너, 동공 변할 때 뱀처럼 변하더라고.”

이호연이 자신의 눈가를 만지다 그대로 손을 내려 제 입가를 더듬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에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용으로 변형하는 걸 성공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변형해 봤자 10분 정도밖에 못 버티고.”

10분이면 길다고 보기에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럼 귀랑 꼬리 안 보이는 이유도 용으로 변하게 돼서야?”

“그건, 그냥 내가 안 꺼낸 거예요. 다른 나라 사람 앞에서 그 모습을 할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아요.”

이호연의 이어지는 말과 떨떠름한 그의 얼굴에서 귀랑 꼬리를 꺼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귀여워서 좋은데.

그러고 보니 엄마의 이호연 첫인상 표현도 그거였다. 동물 귀랑 꼬리 단 걔. 그 첫인상을 전 세계 단위로 퍼트리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가벼운 대화를 하는 내내 내 신경은 이호연에게로 쏠렸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잊은 것 같은 감각을 져 버릴 수 없었다.

클리셰의 정석은 이런 감각을 모르는 척 넘어가면 꼭 무슨 일이 생기던데. 언제부터 이랬더라.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렇게 특별난 것을 보거나 한 적은 없었다.

설마 바다인가? 그때부터 좀, 께름칙했던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바다로 나가 볼까 싶어 이호연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데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숨지 말고.”

내 말에 두 사람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불의 감각이었다. 한참을 실랑이하는 그들을 더 기다려 줄까 하다가 그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이쪽으로 오잖아!”

“내가 그냥 방으로 돌아가자고 했잖아!”

이제는 목소리를 숨길 생각도 없는 듯했다.

“욥.”

“난, 너 쫓아다닌 거 아니야!”

에드워드 로거스에게 까꿍 하는 포즈를 지으며 말하자마자 그가 빽 소리쳤다.

“알아. 네가 내 눈을 피해 쫓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왁왁거리는 에드워드 로거스를 페이즐리 오스틴이 붙잡았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영국 대표자보다 로거스의 보호자에 더 가까운 거 같았다.

“에디를 놀리지 마.”

페이즐리 오스틴이 한 손으로 로거스의 양손을 포박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그쪽이 에드워드 로거스를 더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지적할까 하다가 로거스의 표정이 재밌어서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쪽 어린이가 안 덤비면 문제없어요. 나도 이 나이 먹고 보호자 호출하는 일은 없으면 싶거든요.”

“에디는….”

뭐라 말하려던 오스틴은 저에게 잡히고도 얌전히 있을 생각이 없는 로거스를 보며 피곤한 낯을 했다. 아, 그냥 때려치울까 하는 표정이었다.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페이즐리 오스틴은 꽤나 쌈박한 결론을 내렸다.

“그냥, 에디를 보면 무시해 줘.”

“무시하긴 뭘 무시해!”

어떻게 대해 주기를 원하는지 둘이서 합의해서 알려 주면 좋겠다. 그런데 페이즐리 오스틴의 말은 반말로 들린다는 점이 신기했다. 바타르의 말은 존댓말이었는데….

뭔가 좀 어색하게 딱딱 끊기는 어조기는 했지만.

내가 알기론 영어처럼 몽골어에도 존댓말이 따로 없었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바타르에게는 통역기가 없고 저들에게는 있다는 점. 돈 쓴 사람이 존댓말 듣게 해 주는 서비스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저들끼리 투닥거리던 오스틴과 로거스가 기어이 사고를 쳤다. 우드득거리는 뼈 소리가 떠드는 소리 외에는 한적한 복도를 울렸다.

오스틴이 멍한 얼굴로 제 손과 로거스의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거스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덜덜 떨었다. 붙잡힌 상태로 로거스가 무리하게 움직여 일어난 참사였다.

“소리 봐. 도수 치료인 줄 알았네….”

뼈 소리 장난 아니다. 저래서 신체 계열한테 몸으로 덤비면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구나.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몸소 보여 준 에드워드 로거스의 눈에서는 찔끔찔끔 눈물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헛짓거리를 옆에서 함께 보고 있던 이호연의 표정 또한 저런 멍청한 것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로거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낚아채 앞으로 끌고 왔다. 놀라 크게 뜨인 다홍색 눈을 보며 말했다.

“이거 고쳐 주면 앞으로도 나 꼬실 생각하지 않기야.”

“너, 그거 어떻게 알았―.”

놀라 눈이 동그래진 그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움직였다.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로거스의 다홍색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꽉 다문 입에서 악, 소리가 삼켜졌다.

제법 잘 참네, 라는 생각을 하며 손안에서 푸른 불을 일으켰다. 약간의 피로감과 함께 로거스의 손이 다 나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안녕.”

멀쩡해지다 못해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손을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로거스에게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그런 나를 로거스가 서둘러 붙잡았다.

뭐 할 말 있냐는 눈으로 그를 보니 로거스는 지금까지 봤던 얼굴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치료한 거? 활용.”

내 말을 들은 로거스가 낯을 구겼다. 나는 얘가 또 왜 그러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불 마법으로 사람을 치료한 게 활용이라고?”

“활용이지, 그럼 뭔데.”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가장 필요한 능력은 상상력과 통제였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잘 다룬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통틀어 활용이라고 불렀다.

김수혁이 자신의 불로 중화요리를 하는 것도, 내가 불을 이용해 용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도 모두 활용이었다. 물론 내 불은 애초에 정신계 마법의 매개체기 때문에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상식으로 자리 잡힌 당연한 사실이었는데, 에드워도 로거스의 얼굴을 보니 뭔가 또 나 모르게 세상이 돌아간 것 같았다.

“그게 활용일 리가 없잖아!”

“…그럼 뭔데.”

그의 뒤편에 서 있는 페이즐리 오스틴의 얼굴 또한 묘한 낯이었다. 마치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눈앞에서 겪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눈에 새기는 내게 에드워드 로거스가 말했다. 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의 전형적인 흥분감이 엿보였다.

“치료는 치유 계열의 고유한 능력이야! 계열의 고유 능력은 다른 계열이 못 사용한다고.!”

“…그거 네 뇌피셜이야, 오피셜이야?”

“진짜라고! 내가 정부 연구 기관에서 들은 내용이란 말이야!”

이건 또, 예상 못 한 내용이네. 나는 놀란 티를 애써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에드워드 로거스에게 말했다.

“내가 사실 치유 계열이었나 보지.”

“그게 뭔 소리야! 넌 누가 봐도 불 마법사야! 지금도 널 보면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안 먹히네. 에드워드 로거스가 하다못해 다른 속성의 마법사였다면 속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필 불 마법사였다.

나는 이걸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다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 능력이 다르다는 건 원래 알았지만, 계열의 고유 능력에 대한 건 생각하지 못했다.

주세진도 강유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거스의 말로는 정부 연구 기관에서 들었다는 것을 보니 그들만의 정보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얘는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외부에 발설한 건가?

얘한테는 이거 우리만의 비밀이야, 하는 이야기 자체를 꺼내면 안 되겠다.

“내가 조금 특이한 히든 전직자거든.”

“누군 히든 전직자 아닌 줄 알아?”

“네 말이 정확하다는 증거도 없잖아. 네가 세상에 있는 모든 히든 전직의 경우의 수를 아는 것도 아니고.”

“그건….”

“일반화의 오류는 위험하단다, 에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무는 에드워드 로거스를 오스틴의 품으로 던져 주고 이호연과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곧바로 이호연에게 물었다.

“저 말, 사실이야?”

“…일리 있는 말이기는 한데, 들어 본 적은 없는 말이에요.”

이호연도 모른다라.

우리가 계열을 나누게 된 계기는 그저 그게 보기 편했기 때문이다. 계열의 기준은 메인 스킬이 무엇이냐였다.

내가 아무리 신체 계열과 맞먹게 몸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마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호연의 변형은 마법이라고 칭할 수도 있지만, 그의 신체 능력과 직접적인 싸움 방식은 신체 계열의 것이었다.

내가 푸른 불을 이용한 상처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치명상에 그것이 가능하지는 않았다. 팔 잘리고, 옆구리가 통으로 뜯기는 것 같은 상처는 치유 계열의 능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계열은 그런 방식으로 나뉘어 왔다. 무엇을, 얼마만큼 잘하느냐. 그런데 에드워드 로거스는 애초에 내가 치료에 대한 능력을 갖추고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랑….”

작게 중얼거린 내 말을 들었는지 이호연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전직관은 참 다재다능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

띵동, 띵, 띵, 띵동, 띵, 띵, 띵동―

벨을 누르는 나를 보던 이호연이 내 팔목을 조심스레 잡으며 뒤로 물렸다.

“그만 눌러도 될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곧이어 강유진이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나를 벨튀하는 꼬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보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벨을 부술 기세로 치는 거예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물어볼 거 두 개 있다가는 문 부수겠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보고 놀라지 말고.”

“?”

놀라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그녀의 뒤로 보이는 풍경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기만 하늘 위 구름 성이네요?”

“멋있죠?”

멋있는 건 모르겠고, 살짝 정신없었다. 방안은 새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구름으로 전서를 날리는 강유진이라는 이름의 전령 새의 둥지 같은 모양새였다.

“그래서 할 말이 뭐예요?”

구름 의자 위로 털썩 앉은 강유진이 내게 물었다. 구름 위로 손을 뻗어 스쳐 가는 수증기 덩어리의 감촉을 느끼다가 그녀를 보았다.

“에드워드 로거스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요.”

“오늘도 만났어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어이구야, 하는 얼굴로 내 말을 경청하던 강유진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 중 계열에 따른 능력이라는 부분부터 천천히 낯을 굳히기 시작했다.

“계열에 따른 고유 능력이 존재한다고 했다고요?”

“들어 본 적 없나요?”

“…옛날에 잠깐 그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기는 한데, 나는 그거 말고 전직자의 전직 조건에 대한 것으로 연구 주제를 바꿨어요.”

그럼 로거스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강유진이 앉으라고 구름 의자를 우리 앞으로 보내 주었다.

통과되는 것이 아닌 푹신하게 손에 잡히는 의자를 살펴보다 그 위에 앉았다. 공중에 둥실 뜬 의자가 저절로 강유진 쪽으로 날아갔다.

“계열별 특성은 알죠?”

“당연하죠.”

신체 계열은 몸을 쓰는 사람. 마법 계열은 이름이 곧 능력. 치유 계열 또한 이름이 곧 능력이었다. 보통은 그렇게 계열이 자동으로 나뉘었다.

“혹시 리블 연구실에 들어와 본 적 있어요?”

“예전에 한 번 들어간 적 있어요.”

그곳에서 테오그라젠스의 석판을 봤었다. 그리고 플레로…타, 니아? 그 식물로 하는 적성 검사 같은 계열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럼 플레로니아로 하는 계열 검사도 해 봤어요?”

아, 플레로니아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분명 내 색깔은 푸른빛으로 시작해서 심해 빛, 밤하늘의 빛, 그리고 완연한 암흑으로 바뀌었었다.

“그거 계열 정하기 애매한 사람들한테 쓰이는 물건이에요. 우리 길드에는 워낙 특이한 능력들이 많아서 계열 구별이 헷갈렸거든요.”

“손민호나, 이호연이요?”

“네. 민호는 힐러는 힐러인데 전투 한복판에서 뛰어다닐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치유 능력을 갖춘 신체 계열로 구별해야 할지 신체 능력이 좋은 치유 계열로 구별해야 할지 말이 좀 많았어요.”

그때 이호연은 손민호의 색은 흰색에 더 가까워서 치유 계열로 구분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호연 본인은, 조금 이상하지만 붉은색이라 신체 계열로 결정 났다고 했고.

“에드워드 로거스의 말이 영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어요. 민호를 예로 들자면 그 애는 신체 계열이라고 하기엔 가장 중요한 재능이 없었거든요.”

“그게 뭔데요?”

“맷집.”

맷집? 의아한 내 시선을 본 강유진이 내게 물었다.

“류가 보기엔 민호가 튼튼한 것 같은가요?”

“…안 쳐 봐서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직접적으로 쳐 봐야 하는 내구도 말고요. 딱 보면 드는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

손민호가 튼튼한 것 같냐고?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이호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 강유진이 곧바로 말했다.

“호연이는 비교 대상이 아니에요. 일반적인 신체 계열 전직자랑 비교해야죠.”

이호연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신체 계열 전직자 중 가장 최근에 본 사람은… 서정은이었다. 괴물 다수를 물리칠 능력은 없지만, 하늘 조각의 자원이 섞인 천장을 부술 정도의 재능은 있는 전직자.

내 기억상 그 정도의 재능이면 일반 전직자가 전직시켜 주기 전 하는 평가에서 ‘나쁘지 않다’라고 평가되는 정도였다.

그럼 서정은과 비교했을 때 손민호는 튼튼한가?

“부족, 한 것 같은데….”

튼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반인보다는 당연히 튼튼했고 순수하게 맷집으로만 비교하면 나보다도 튼튼할 것이다. 하지만 서정은보다 튼튼한 건 아니었다.

“맷집. 감. 치료.”

“…….”

“순서대로 신체 계열, 마법 계열, 치유 계열로 구분되는 전직자들이 무조건 갖게 되는 특성이죠.”

“…다른 계열 특성을 가질 수는 있잖아요. 손민호도 일단은 튼튼하고.”

내 말을 들은 강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앉은 구름 의자에서 구름 조각을 여러 개 떼어 내더니 내 앞으로 일렬로 세웠다.

둥실거리는 구름 조각은 총 열 개. 그중에서 세 개가 위로 올라갔다.

“이게 재능 있는 일반 신체 계열 전직자가 갖게 되는 맷집.”

그리고 두 개가 추가로 위로 떠 올랐다. 열 개 중 다섯 개만이 남았다.

“이게 전직관들이 나쁘지 않다, 하는 정도의 재능을 가진 신체 계열 전직자의 맷집.”

“…….”

강유진이 남은 구름 다섯 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호는 여기서 두 개, 최대 세 개는 더 없어져야 해요. 그 애 맷집은 그 정도예요.”

10이면 이호연 정도고. 7이면 재능 있는 일반 전직자. 5면 나쁘지 않다 정도. 손민호는 5보다 아래라는 거구나.

“…치유 계열은요.”

손을 휘저어 구름 조각들을 없애며 강유진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재능 있는 일반 전직자는 칼에 찔린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 나쁘지 않은 재능이라면 칼에 베인 것을 치료하는 정도죠.”

“마법 계열이 치료 능력을 갖췄으면요?”

“…다른 계열이면서 치료 능력을 갖췄을 경우, 종이에 베인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로 효율이 떨어져요. 물론 이건 비유일 뿐 정말로 이 정도의 효율이 나온다는 건 아니에요.”

“…….”

“민호는 치유 능력 자체는 평범하죠. 전선에서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것을 높게 평가받는 거지, 순수하게 치료 능력만 보자면 ‘재능 있는’ 과 ‘나쁘지 않은’ 사이의 치료 능력이에요.”

나는 내 손을 보았다. 푸른 불의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렇듯 남의 계열 능력을 얻는다면 그 계열로 의심 자체를 받지 않을 정도로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는 거예요.”

손민호와 비교해 보면 물론 내 치유 능력은 한계점이 명확했다. 잘려나간 팔을 다시 붙일 수도 없고 칼에 찔린 상처 또한 곧바로 치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릴 뿐 가능하기는 했다. 그러나 강유진의 말에 따르면 원래는 ‘가능’하면 안 되는 거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는 상관없이.

“류. 어디까지 치료할 수 있어요?”

“몰라요. 잔 상처 외에는 잘 안 써 봐서….”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류가 보기엔 민호가 치료 가능한 환자를 본인은 치료 못 할 것 같나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

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모르지만, 아니라고 확답할 수 없었다. 이미 그 점에서 답은 나온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대답 없는 나를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쉰 강유진이 구름 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이래서 1세대가 안 좋은 거예요. 뭐든 처음부터 일구고 알아내야 하거든요. 아무리 사소하고 나중에 가선 이걸 왜 생각 못 했지 하는 것들도요.”

“1세대니까요.”

“맞아요. 1세대니까. 그 사소한 거 생각 못 하게 다른 것들 신경 쓰느라 바쁜 세대죠. 아무리 연봉이 세도 열정 페이처럼 느껴져요.”

하늘이 무너진 것은 2년 전이었다.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복구한 지 이제 겨우 1년 조금 안 됐다. 그사이에 연구를 진행해 봤자 자잘한 것들밖에 얻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전직의 조건이니, 계열의 고유 능력이니. 저런 연구가 활성화된 것부터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그런 연구를 할 정도의 여유가 생긴 지도 오래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만약 내가 지옥도 당시의 전직을 하는 것이 아닌 지옥도가 끝난 현재에 전직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내 이상한 능력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집중해서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때를 놓쳤기에, 이미 다른 것들 연구하기 바빠 가장 먹음직스러운 연구 대상을 놔둔 것뿐이었다. 반쯤 잊었거나.

하지만 이럴 때면 차라리 나에 관한 연구를 누군가 하기를 바랐다. 내 몸이고, 내가 사용하는 능력인데 나조차 모른다는 것은 꽤나 짜증 나는 일이었다.

“플레로타니아요.”

“플레로니아 말하는 거죠? 어째 그거 이름 제대로 말하는 사람 하나를 못 보네.”

“네, 그거. 나 그거 사용한 적 있어요.”

“…무슨 색?”

“푸른색으로 시작해서 검은색으로 변했어요.”

“검정…. 전에는 없던 색이네요.”

그때는 가볍게 넘어갔었다. 에드워드 로거스의 말을 듣기 전까지 우리에게 있어 전직의 계열은 그리 특별난 거 없는 겉보기 구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충 나 혼자 동양 현판을 찍으니 이것도 별나게 나온다고 하며 어이없어하기만 했다. 하지만 로거스의 말과 강유진의 말을 조합해 보면 나는 애초에 마법 계열 자체가 아닌 완전히 다른 계열의 전직자라는 소리였다.

어쩌면 계열보다 더 상위의 구별에서 갈린 것일지도 모른다.

남들과는 다른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내 전직관이 너무 비범했다. 미국에 오기 전 강유진이 말해 준 히든 전직의 조건에 대해서도 마땅하게 생각나는 것도 없고.

“…아.”

한 명 더 있었다. 능력 자체는 나만큼 특이하지는 않지만, 전직의 과정은 누구보다 특이한 사람.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잘 어울리는 하얀 머리의 호랑이를 보았다.

나와 이호연의 전직 조건을 알 수 없다는 강유진의 말과 함께 이호연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그때 그는 플레로니아 검사의 색이 이상하다고 했었다.

“…색깔, 그때 색깔이 조금 이상하다고 했지.”

가만히 강유진의 말을 함께 경청하던 이호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강유진의 시선은 이호연 쪽으로 향했다. 그는 뭔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강유진의 방 한편에 놓인 거울을 가리켰다.

“저 거울에 보석 장식 보여요?”

이호연이 말한 장식은 화려하게 커팅되어 각도별로 다양한 붉은빛을 보여 주는 보석이었다. 밝은 다홍색, 핏빛 적색, 적포도주 빛과 빛을 반사하는 부분의 하얀빛.

“저런 느낌의 색이었어요. 커팅된 보석을 액체로 만든 것 같았죠.”

그의 말에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결과물에 놀랐어요. 우리가 예상한 건 푸른빛 서린 붉은색이었는데.”

푸른빛? 의아한 내 시선을 느낀 강유진이 말을 이었다.

“변형은 일단 마법으로 분류되거든요. 미국에 드래곤 변형 스킬을 가진 전직자도, 그 외 여우 같은 평범한 동물로 변형할 줄 아는 전직자들도 모두 검사에서 푸른색이 나오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이호연은 푸른빛이 없었다는 뜻이다. 검은색만큼이나 특이한 결과물이었다.

“…….”

랑이 남들과 다른 만큼 이호연의 전직관도 남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랑과는 묘하게 연결된, 아주 특이하고도 별난 이들.

“…전직관, 한 번 더 만나게 해 줄 수 있어?”

“전직관…을요?”

내 물음에 이호연이 조금 곤란한 낯을 했다. 머뭇거리던 이호연에게서 돌아온 답은 거절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네 전직관이 직접?”

“…네.”

곤란했다. 랑만큼이나 그쪽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도 알면 조사라도 해 볼 텐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게 되면 랑의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테오그라젠스가 개입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실험해 보기에도 위험하고.

“전직의 조건으로 삼을 만한 건 모르는 거죠? 둘 다.”

나와 이호연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연은 납치당해 끌려간 케이스였고 나는 도망 다니다가 하늘 조각을 발견해 들어간 케이스였다. 그런 우리에게 애초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고민하는 나를 보며 강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전직에 연결 고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연결 고리…?”

…그것도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나? 이호연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일을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겼었다.

전직의 계열은 그저 겉보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직의 여부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잊고 있었다. 이호연은 전직할 당시 기이한 조건 하나가 있었다.

호랑이의 산에 갇혀 누군가가 히든 전직할 때까지 그곳을 못 나오는 이상한 조건. 이것을 나와 전혀 연관 짓지 못했던 이유는 굳이 ‘나’라는 지칭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히든 전직만 하면 완료될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히든 전직을 하고 이호연이 공식적인 첫 히든 전직자가 될 때까지 아무도 히든 전직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조건이 나를 겨냥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마치, 내가 랑을 만난 것이 누군가가 준비한 안배의 길을 쫓은 걸지도 모르는 것처럼.

“강유진 씨. 있잖아요.”

우리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강유진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뭔가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낯이 조금 굳었다.

“내가 전직할 때 받았던 시스템 메시지 창에 적혀 있던 말이 있는데….”

나의 말을 들으며 강유진의 표정이 그러데이션처럼 천천히 바뀌는 것이 보였다.

“그걸 왜 지금 말해요!”

그러게 말이에요.

간신히 진정한 강유진은 한탄의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왜 그걸 말 안 했던 거예요?”

그 질문에 나와 이호연은 서로를 보다 차례로 그녀에게 말했다.

“랑, 그러니까 내 전직관이 웬만하면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쓸데없이 알리고 다닐 생각하지 말라고 해서….”

내용은 비슷한데 어투의 차이가 심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강유진이 이호연을 묘한 낯으로 보았다. 이호연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익숙하다는 그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슬펐다.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해도 되는 거예요?”

“뭐…. 내 전직관은 애초에 내가 그렇게 말 잘 들을 거라고 기대 안 했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말할 데가 없어서 말 안 했던 것뿐이었다. 내 말을 들으며 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로 끄덕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이 뭔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네요.”

비형랑 설화랑 고구려 벽화까지 말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거기까지 알았다간 위험할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강유진이.

테오그라젠스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랑의 정체인 듯하고.

“…….”

‘눈을 감은 하나를 찾는다. 푸른 불의 잿더미 아래 숨어 있는 하나를 찾는다.’

푸른 불꽃, 이 가장 결정적인 열쇠가 될 것 같은데. 또 다른 하나도 그렇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다가 슬쩍 강유진을 살펴보았다. 고민에 깊게 빠진 듯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고구려 벽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쏙 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호연은 별말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미국의 학자가 따로 만나기를 원했다고 했잖아요. 그거 언제 만나는 거예요?”

“아, 그거. 연회 전에는 만나고 싶다고 그쪽에서 연락이 오기는 했어요.”

“연회?”

그런 것도 하나. 노골적인 귀찮음과 거부감을 담은 내 얼굴을 본 강유진이 한숨 한번을 내쉬고는 설명해 주었다.

“일단 이번 모임의 목적은 친목질이잖아요. 남들한테 보여 줄 이미지는 제공해야죠. 연회의 메인은 세계의 비밀이 되기는 하겠지만.”

연회를 열려면 일단 참석 인원이 다 모여야 한다. 일부만을 데리고 열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 기다리는 데에만 최소 며칠은 더 걸릴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 만나고 싶다, 처럼 모호하게 말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불만스러운 내 얼굴을 본 강유진이 곤란한 듯 웃었다. 물론 상대가 국가인 이상, 이 정도는 갑질에도 포함 못 시키는 행위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 수는 없지만.

“그 학자의 이름이 뭐예요?”

“노아 이스벨라. 일찍이 귀농한 젊은 농부였는데 어쩌다가 세상의 비밀 같은 머리 아픈 일에 휘말렸는지 모르겠는 사람이죠.”

“그렇게 부가 설명 안 해 줘도 그 학자한테 화풀이할 생각 없어요.”

“들켰네. 화풀이는 하지 말고 탈탈 털어먹는 건 해 주세요.”

기지개를 쭉 편 강유진이 손을 휘저었다. 나와 이호연이 앉아 있던 구름 의자가 흐물거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발로 선 우리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자, 이제 나는 열심히 자료 수집을 해야 하니 나가서 노세요.”

“바닷가로 나가도 돼요?”

에드워드 로거스와의 만남 때문에 잊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강유진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웬만하면 호텔 밖으로 안 나가는 게 좋아요. 눈에 띄는 행동을 하기엔 미국 측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거든요. 이런 식의 전직자 모임 자체가 처음이라 누구 하나가 사고 칠까 봐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로 걱정도 심하고.”

“그런 것치고는 감시가 약하던데요?”

“일부러 그런 거죠. 너희가 감히 나를 감시해? 하고 전직자들 신경 건드릴까 봐.”

그럼 바다로는 나가면 안 되는 건가? 강유진이 조금 미안한 낯을 하며 말했다.

“특히 우리는 더 얌전히 있어 주는 게 좋을 거예요. 애초에 미국으로선 지지 않아도 될 위험 부담을 껴안고 이 모임을 열게 된 까닭이 우리니까요.”

“그 연회만 끝나면 돌아갈 수 있는 거죠?”

“그럼요. 연회 열리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고요. 마주치지만 못했을 뿐이지 제법 많은 나라의 대표들이 도착했거든요.”

그 말을 하는 강유진의 시선은 구름 둥지로 향해 있었다. 인제 보니 그냥 구름이 아니라 CCTV 메인 화면 역할이었나 보다. 어쩐지 돌아다닐 때마다 묘하게 시선이 느껴진다 했다.

“…….”

그럼 바다를 보면서 느꼈던 께름칙함도 강유진의 구름 때문이었나? 가능성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감시당하는 것 같은 감각에 거부감을 느낀 거였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감시를 강유진만 하지는 않았을 거고. 다른 사람의 감시의 눈길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생각을 더듬는 내게 강유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스웨덴의 대표들이 로비에 도착했네요.”

“그거 불법 촬영 아니에요?”

“에이. 암묵적으로 다들 이 호텔 내부 다 감시하고 있어요. 명단 보니까 대부분의 보호자 능력이 감시더구먼. 능력 없으면 자본으로 감시하고 있을걸요.”

참 쓸데없는 데 힘 뺀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강유진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윤리 의식은 지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연구 자료 수집이라고요.”

“뭐라고 한 적 없어요.”

강유진과 함께 키득거리며 생각했다. 정말 감시하는 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강유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감시까지 더해졌으니 신경이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고.

“…….”

그래도 역시 좀 걸리는데. 잠시 고민하다 손끝을 까닥였다. 발밑에 그림자 조각 두어 개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이호연의 시선이 내 발밑으로 향했다. 이제는 용으로 변할 수 있어서 그런가. 전보다 그림자의 움직임을 더 잘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볼게요.”

이호연의 팔을 잡아끌며 강유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여 가라고 손짓하는 강유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벽화 이야기는 비밀인가요?”

“알게 되면 위험할지도 모르거든.”

기다렸다는 듯 물어보는 이호연에게 답을 해 주었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네 전직관이 날 만나기 싫다고 했어?”

“…만나고 싶지 않대요.”

“왜?”

“…….”

이호연의 낯이 굳었다. 회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이호연의 집에 놀러 간 날을 기점으로 더는 그가 다친 것을 못 봤던 것 같았다.

“류만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

“앞으로는 나도 찾아오지 말라고 했어요.”

이호연의 손이 제 목으로 향했다. 목가를 더듬던 그가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다음에 찾아오면, 죽이거나 죽을 각오를 하라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

정말, 알 수가 없네. 이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죽이거나 죽을 각오를 하라니, 갑자기 왜?

“…….”

호랑이의 산. 이호연의 히든 게이트에 붙은 별명이었다. 이호연 외 다른 사람의 게이트를 가 본 적 없어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 산은 무서울 정도로 울창하고 외로운 산이었다.

내 히든 게이트와는 분위기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그곳과는 다른 느낌의 침묵으로 둘러싸인 장소.

마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죽음을 준비하는 자가 살 것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그곳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랑의 공간에는 탈을 뒤집어쓴 시비 역할을 하는 귀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대화할 의지가 있지 않은 이상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랑은 그들과 대화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선, 절대적 우위에 존재에게 감히 말을 걸지 못하기에, 높다란 위치에 서서 그 밑의 이들에게 말을 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만들어진 선이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침묵의 장소였다. 그곳 또한, 호랑이의 산과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랑도, 그 호랑이도 침묵밖에 없는 공간에서 자신들의 전직자가 찾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시간을 죽인다. 둘은 지독하게 외롭다는 점에서 닮았다.

버드나무에 기대어 호숫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 검은 눈동자를 볼 때면 바다의 세월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무슨 수를 써도 이해하지 못할 시간의 무게였다.

나비도, 호랑이도 랑을 믿냐고 묻는다. 나는 그 새까만 눈동자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암흑 속에 무엇을 숨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기에 믿고 싶어진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사이 안 좋다가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이호연의 감정 또한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우리 둘 다 너무 어려운 전직관을 둔 것 같아.”

“그러게요….”

“둘 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계획을 짜고, 얼마나 넓은 판을 짜 놓은 것인지.

“차라리 미국의 학자를 빨리 만나 보고 싶어.”

알 수 없는 것들은 늘어져라 붙잡는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다. 그러느니 털어먹을 수 있는 상대를 붙잡아 늘어지는 것이 훨씬 나았다.

미국의 학자는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귀농한 젊은 농부. 대부분의 인생을 순박한 시골에서 살다 오신 분은 세기말 분위기의 두 전직관보다 훨씬 쉬운 대화 상대일 것이다.

“…….”

복도에 장식된 화병에서 싱그럽게 피어난 장미 한 송이를 꺼냈다. 가시를 전부 정리해 손에 쥐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다들 암묵적으로 하는 거라고 했지만 나는 허락해 준다고 한 적 없어 그렇지?”

“…류?”

내 발밑에서 살그머니 피어오른 검은 그림자 줄기가 내 팔을 타고 올라와 장미를 감았다. 새카맣게 변한 검은 장미가 위험스러워 보였다.

“뭐 하려고요?”

“요새 마법만 너무 열심히 사용한 것 같아서.”

자주 안 하면 감을 잃잖아. 감시당하는 취미도 없고. 강유진의 구름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다른 사람 감시까지 얌전히 받겠다는 건 아니다.

이호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검은 장미가 천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내 바로 위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밑에 떨어진 잔해를 주우며 살펴보았다.

손에 잡히는 금속을 살펴보며 나는 툭, 말을 내뱉었다.

“이거, 오스틴의 단검이랑 같은 재질이네.”

손에 힘을 줘 봤지만, 잔해는 살짝 일그러지는 것에서 멈췄다. 전 천칭 회장님의 총구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어떻게 스킬로 만들어 내는 단검과 같은 재질인 거지?

내 옆에서 함께 잔해를 보던 이호연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잔해를 쥐여 주자 그가 그것을 움켜쥐었다.

“부서져?”

“…아뇨. 일그러지기는 하는데 부수는 건 안 되네요.”

그의 손에서 다시 잔해를 받아 왔다. 찌그러진 작은 철 조각은 기이한 푸른빛이 나는 은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이런 재질을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요새는 자주 보는 것 같아.”

새롭게 발견된 자원인가. 그런데 죄다 위험스러운 물건에만 쓰이는 것 같네.

오스틴의 단검이야 그건 개인의 능력이니 어쩔 수 없다 치고, 총이나, 이런 감시 물품에 쓰이는 걸 보면 영 수상한 자원이었다.

“이건 누구네 감시 카메라였을까?”

기술력 하나는 좋은 것 같은데. 부서지는 소리는 이 철 덩어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것을 매달고 있던 이음새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손에 쥔 것을 조명 아래에 두고 살펴보았다. 철 조각 안에 아주 작은 소형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손안에 푸른 불이 피어올랐다.

“…….”

안 녹네. 이걸로 두 번째였다. 내 푸른 불에 안 녹는 재질은. 안에 들어간 카메라가 다 녹기는 했는데. 잠시 고민하다 이호연에게 다시 쇳조각을 넘기며 말했다.

“그거 벨 수 있어?”

내 말에 곧바로 이호연의 손이 변했다. 호랑이의 앞발보다는 사람에 더 가깝기는 했지만, 손톱이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는 철 덩어리 정도니 조금만 변형해도 되나 보다.

끼긱,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철 덩어리가 조각났다. 이것도 마법 방어율이 높고 물리 방어율이 낮은 듯했다.

“또, 물리 공격이 통하네.”

잠시 고민하다 손에 끼고 있던 아공간 반지를 꺼내 그 안에 철 덩어리를 집어넣었다. 나중에 페이즐리 오스틴을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여기 오니까 머리 아픈 일만 늘어나는 것 같아.”

철 덩어리는 갖고 있으면 물건의 주인이 찾으러 올 거다. 찾아온다면 자원을 얻은 경로를 알아내면 되는 거고, 만약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때야말로 이 철이 도덕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유통되었다는 증거겠지.”

작게 중얼거린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발밑의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방금 내가 부숴 먹은 것 외엔 이것과 같은 재질의 감시 카메라는 없었다.

밖에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인지 유리창이 덜컹거리면서 흔들렸다. 바깥에 바다가 바람 따라 넘실거렸다.

“이 주변에 감시하는 것들은 모두 스킬이에요.”

이호연이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철 덩어리가 테오그라젠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불길한 생각.

지나친 생각이라고 하기엔 그 검은 석판과 이 금속은 너무 닮아 있었다.

‘그거 나름 미국에서 만든 신무기예요.’

이예린은 전 천칭 회장의 총구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미국과 대화할 거리가 늘어날 것이다.

***

사건의 시작은 평화로운 아침. 성공적인 시차 적응 이후 이호연과 강유진과 함께 아침을 먹을 때 일어났다. 사실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사소한 일이었다.

어쨌든 날 두고 무언가가 흘러가긴 시작했으니 나는 나름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에는 식빵을 너무 구웠나, 하는 정도의 걱정밖에 없었다. 다시 새 식빵을 구워 오자니 그건 또 귀찮아서 대충 딸기잼을 바르고 있었다.

그런 내 앞에 웬 애플파이를 예쁘게 담은 접시 하나가 내밀어졌다. 스프를 떠먹고 있던 이호연과 혼자 컵라면 끓여 먹고 있던 강유진의 시선이 내 옆으로 향했다. 둘 다 저건 뭐 하는 놈이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빵을 한입 베어 물며 물었다.

“…누구세요?”

내 물음에 방긋방긋 웃는 낯의 남자가 말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아뇨?”

다른 빈자리 많은데 왜 내 옆자리에 앉아? 너님이 누군데? 내게는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남자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그는 조금 굳은 낯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나 누군지 몰라?”

“누구신데요?”

슬쩍 강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녀는 혼자 라면 먹는 것에 더 집중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거야, 신경 안 써도 되는 상대라는 거야.

내가 알아서 판단해도 된다는 건가.

이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들 중엔 익숙한 시선들도 있었다. 자신들의 보호자와 함께 앉아 있던 페이즐리 오스틴과 에드워드 로거스가 보였다.

그들의 보호자는 로거스를 툭툭 건들고 있었고 오스틴은 곤란한 낯을 하고 있었다. 로거스는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게 그거구나. 유혹, 그리고 구혼. 익숙한 시선 중 유난히 흐릿한 기척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혼자 식사를 하던 바타르가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뭐라고 하는 거지? 자세히 입 모양을 보았지만 번역기에 입 모양만 보고 외국어를 알아듣게 해 주는 기능은 없는 듯했다.

바타르 또한 그것을 깨달았는지 손짓으로 바디 랭귀지를 실현했다. 앞에, 앞에 봐? 대충 그런 뜻인 것 같은데….

“아.”

다시 똑바로 고개를 돌리니 본의 아니게 한참을 멀거니 세워 놓고 무시해 버린 남자가 아직도 그 자리,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죄송해요. 잠시 깜박했어요. 그래서 누구시라고요?”

“…됐어!”

화났나 보다. 어쨌든 이 정도면 소란 없이 조용히 끝낸 거니까 잘 됐지, 뭐. 남자의 뒷모습을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혹이네, 구혼이네, 듣기는 했지만 별로 현실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정략혼 같은 것도 드라마로만 보는 소시민이었다. 다만 실제로 그런 식으로 타국의 전직자를 빼낸 성공 사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때는 참 별짓 다 하네, 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그래 봤자 나에게는 남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신경 안 쓰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내게 도전하는 이들에겐 그 성공 사례 하나가 100% 성공률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 확률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선 차 버리는 게 아니라 쳐 버리고 싶었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내게 말 거는 사람이 그 정도로 많아질 줄 알았다면 객실 안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바빠요.”

“관심 없어요,”

“놉.”

인제 그만 좀 했으면 싶다. 머리를 짚으며 눈앞에 남자를 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나라 이름 외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또 어느 나라야.

“난 스웨덴에서 온….”

“아이 돈트 스피크 잉글리시.”

“아니, 나는 스웨덴…. 그리고 지금 통역기 쓰는데 무슨….”

“아 돈 노.”

그래도 이번에는 좀 나았다. 내 말에 버벅거리던 남자가 뻘쭘한지 제 머리를 긁적이다 돌아갔다. 밖에 나가는 거 한번 참 힘드네, 거참.

한숨을 내쉬고 벽에 등을 기댔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국가에서 나선 자만추로 이뤄진 연애의 시작 계획은 대단했다. 그리고 끈질겼다.

솔직히 이 호텔에 있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데, 마주치는 놈들마다 하나같이, ‘아, 이런 우연히’를 남발했다. 핑계 대는 것도 이제 귀찮았다. 그냥 방으로 돌아갈까.

앞으로 갈 것인가 뒤돌 것인가 고민하며 신발을 끄는데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너는 왜 또 왔어?”

“너 쫓아온 거 아니야!”

누가 뭐랬나. 나를 보는 다홍색 눈이 매섭다기보다는 새초롬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에드워드 로거스의 눈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번에도 페이즐리 오스틴이 함께 있었다.

내가 보기엔 영국은 보호자를 둘 보낸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페이즐리 오스틴과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에드워드 로거스에게 물었다.

“뭐 할 말 있어?”

내 질문에 답한 것은 로거스가 아닌 오스틴 쪽이었다.

“우리 보호자가 너랑 대화 좀 하라고 해서. 그래도 보여 주는 식의 노력은 해야지, 안 그러면 에디의 입장이 조금 곤란해. 조금만 어울려 줘.”

슬며시 웃는 그녀의 낯은 정말로 곤란해 보였다. 사이가 특별나게 나쁜 것도 없는데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거절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지, 뭐.”

흔쾌히 오스틴의 부탁을 승낙했다. 솔직히 그녀의 제안은 내게도 나쁠 것 없는 것이, 타국에 대한 예의인지 뭔지 누군가가 말을 걸 때는 끼어드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리고 먼저 말 거는 사람이 자리를 떠나면 차례대로 말 거는 식이었다. 그 예의, 나한테도 좀 보여 주면 좋으련만. 시선이 너무 많아 그림자로 이동하기도 좀 그랬다.

누가 그걸 보고 쟤 혼자 스킬 막 써 대요, 하고 고자질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웬만하면 싸우지 말라는 건 웬만하면 스킬 같은 능력도 쓰지 말라는 소리였다.

복도 한복판에 서서 멀뚱히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바다 쪽이나 나가 볼까 했는데.

꼬마 도깨비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바다에는 그림자가 없어 그런 것인지 정확하지 않았지만, 싫다는 애들을 억지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싫은 건지, 못 하는 것인지도 정확하지 않고.

아쉬운 대로 바닷가 주변을 둘러보게 해 봤지만, 수상한 것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애초에 내가 마음에 걸렸던 것은 바닷가가 아니라 바다 자체였다.

이 이상한 께름칙한 감각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선 제대로 내 눈으로 보는 게 좋은데. 빈말로도 이 호텔 안에서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입장이 아니었다.

“…….”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 에드워드 로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내가 딱밤이라도 먹일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랑 같이 바다 나갈래?”

“우리랑?”

내 말에 오스틴이 내게 되물었다. 뭐라 말하려는 로거스를 뒤로 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원래 나가려고 했는데 말 거는 사람이 많아서 못 나갔거든. 너희랑 나가면 괜찮을 것 같아서.”

강유진은 웬만하면 호텔 안에 얌전히 있기를 바랐지만,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에는 이미 믿음이 없었다. 내가 나갈 거라는 것을 이미 아는 듯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페이즐리 오스틴과 에드워드 로거스를 끌어들이면 호텔 밖을 나간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그들도 함께 지게 된다. 즉 공범이 생기는 것이다.

저 둘에게도 책임이 생긴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원래 혼날 때는 누구랑 같이 혼나야 마음이 편한 거였다.

“나야 상관없지만….”

방긋방긋 웃는 내 모습에 오스틴의 시선이 에드워드 로거스에게로 향했다. 불퉁한 얼굴이 자신은 반대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굳이 둘 다 필요한 건 아닌데.

역시 이쪽보다는 이쪽이 내 부탁을 더 잘 들어주려나.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떼며 오스틴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너하고만 있어도 좋아.”

대사가 좀 플러팅 같은가.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럴까?”

“응.”

“…그래.”

내 말을 들은 오스틴이 묘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그것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로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왜 승낙해!”

“아니, 너는 이미 글렀으니까 나라도 친구 먹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런 게 어딨냐며 난리 치는 로거스를 보다 손에 끼워 둔 반지를 보았다. 반말로 말해도 별 반응 없는 것을 보니 문제없는 듯했다. 아니면 반말을 저쪽도 편하게 받아들였던가.

영어권은 반말로 해도 차이가 별로 안 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된 설명이라도 들을 걸 그랬다. 손에 끼워진 반지의 하얀 보석은 그런 내 속내도 모르고 불투명하게 빛났다.

떽떽거리는 에드워드 로거스를 밀어내고 페이즐리 오스틴에게 말했다.

“그럼 같이 나가는 거지? 로비에서 봐.”

“지금 바로 안 나가고?”

“이 차림으로 나가면 얼어 죽어. 그리고 같이 갈 사람이 하나 더 있어.”

의아함을 담은 얼굴로 나를 보는 오스틴에게 웃어 주며 말했다.

“내 아기 호랑이.”

“웩.”

로거스가 옆에서 밉상 짓을 했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역시 사슴보다는 호랑이 쪽이 더 잘 어울렸다.

손가락 끝을 맞대어 소리를 냈다. 베일보다 얇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를 보고 있던 로거스와 오스틴이 눈을 끔벅였다.

“기척이….”

“그럼 이따가 봐.”

뒤를 도는 나를 뒤쫓듯 옅은 그림자 줄기가 일렁거렸다.

귀신이란 눈으로는 보여도 기척 없는 존재였다. 귀신 걸음을 눈치챌 정도로 예민한 건 지금까지 이호연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쉴 틈 없이 말 거는 이들 때문에 이 쉬운 방법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 방법을 쓰고 방을 나왔어야 하는 건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복도를 뛰어다니는 내게 말을 거는 이들은 없었다.

다행히도 이호연처럼 기척에 예민한 이는 없는 듯했다. 몇몇 예민한 이들이 손끝을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으나 온전히 나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이호연의 방으로 가 그를 불러내었다.

“류?”

강유진이 따로 알아볼 것이 있다며 데리고 가는 바람에 그녀의 방이거나, 그의 방이거나, 둘 중 한 곳이 답이었는데. 다행히 길이 엇갈리거나 허탕 치는 일 없이 곧바로 만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

“바다로 나가자!”

앞뒤 설명 다 자른 내 말에 이호연은 눈을 끔벅였다.

“갑자기요?”

“오스틴이 같이 나가 주기로 했어. 영국까지 끼어들게 하면 미국에서도 뭐라 하지는 못할 거야.”

나 하나 나갔다 오면 가벼운 경고는 하겠지만 다른 나라까지 끼어 있으면 친목 도모라는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 입장에서도 자국의 전직자도 아닌 이들 여럿에게 경고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느 틈에 포섭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만 기다려요.”

이호연이 그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코트 두 벌을 들고 나왔다.

“그대로 나가면 감기 걸려요.”

내게 자신의 코트를 입히고 목도리까지 해 준 뒤에야 그는 자신도 겉옷을 입었다. 이호연이 입었더라면 무릎 언저리까지 왔을 것이 내가 입으니 종아리를 덮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다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걸리기 전에 빨리 가자!”

수학여행 가서 교관과 선생님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편의점 가는 기분이었다. 성인이 돼서 그 기분을 다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다 충분한 자유 시간을 안 줘서 그런 거야.

복도를 뛰어가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스틴과 로거스는 로비에 이미 나와 있었다. 그들의 보호자도 함께였는데, 로거스를 붙잡고 진지하게 뭐라 하는 그의 얼굴과 달리 로거스는 넋 나간 얼굴이었다.

손뼉도 맞아야 소리가 나지.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마음 같아선 에드워드 로거스가 끝까지 고집부려 주기를 원했다.

“음?”

아닌가. 어쩌면 고집부릴 필요도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발견한 오스틴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영국의 보호자는 이곳에 처음 온 날 있었던 일 때문인지 영 껄끄러운 얼굴을 하다가 자리를 피했다. 뒤끝 있긴.

“갑자기 바다는 왜 가자고 하는 건지 지금이라도 답해 주면 안 돼?”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는 문을 통과하며 오스틴이 내게 물었다. 이호연 또한 궁금한지 나를 보았다. 로거스는… 안 듣는 척하면서 귀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몰라. 그냥 나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내 말에 이호연과 오스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의 반응을 보인 것은 로거스였다. 그는 내가 푸른 불을 이용해 자신의 팔을 고쳤을 때의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거 감이야?”

“어…. 아닐걸?”

로거스가 말하고자 하는 감이란 마법사의 감을 말하는 거였다.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내 인생에 단 한 번을 마법사의 감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 나 마법사 아닌가? 갈수록 정황이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다. 로거스는 내 부정에 알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본인도 이유를 모르는데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건 마법사의 감 맞아.”

“나는 마법사의 감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이 행동은 생존 본능에 더 가까울 터였다. 눈치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옥도에서 힘없는 어린애로 살아갈 때 저 사람이 나를 죽일지 아닐지를 보는 눈과도 같았다.

그리고 내가 정말 그 마법사의 감이라는 게 있었다면… 여러 가지가 바뀌었을 것이다. 내겐 그런 거 없었다.

내 말을 듣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로거스의 고민은 호텔을 나와 오스틴에게 붙들려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 이어졌다.

오스틴은 신체 계열 전직자와 동등한 몸놀림을 가진 나를 보며 감탄을 했다. 익숙한 감탄이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잘 포장되어 있던 길을 지나 바닷가에 도착했다.

내 발밑에 그림자가 일렁이며 그림자 조각들이 흩어졌다. 사각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바닷가를 둘러보았다. 수상쩍거나 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도, 바다도.

뭐지…. 내 착각이었나. 바다 위를 살펴보았지만, 그때 느꼈던 께름칙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누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신발에 굴러들어온 모래가 데굴데굴 구르며 제 존재감을 슬며시 드러내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고민하는 내게 로거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마법사의 육감 맞아, 그거.”

아직도 그거 생각하고 있었나. 나는 약간의 짜증을 담아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라니까.”

“맞다니까.”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는데 왜 자꾸 저러는 거야.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는 나를 보며 에드워드 로거스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니고?”

“…….”

그의 말에 입을 벙긋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자꾸만 내 말을 부정하는 이에게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묘해진 두 마법사의 신경전에 다른 두 신체 계열들은 어색한 얼굴로 우리를 살폈다. 페이즐리 오스틴이 그만하라는 의미로 로거스의 등을 툭, 툭 쳤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잠시 머뭇거리던 에드워드 로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같은 경우를 예전에 본 적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뭐?”

“마법사의 감을 오랫동안 잃었던 전직자를 본 적 있다고.”

나를 포함한 이호연, 그리고 오스틴의 시선 또한 로거스에게 향했다. 지금, 쟤가 뭐라고 한 거지. 나는 약간 정신이 멍해진 기분이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자 당황한 듯하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감을 믿지 않았고, 그로 인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을 잃게 되었어. 그 이후로 감을 잃었댔어.”

“…네 말은. 나도 그렇다는 거야?”

왜, 이러지. 도근도근 얌전히 뛰던 심장이 내 귀 바로 옆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거세졌다.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변화였다. 손톱이 여린 살을 꾹 눌렀다.

급작스러운 나의 변화는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워 오로지 나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온할 나의 얼굴을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마법사의 감은 마법 계열만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이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말을 못 하거나, 그림을 못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할 수 없는 경우처럼 그 능력 또한 고장 날 수 있어.”

“…….”

“적어도 내가 봤다는 사람은 그런 경우였어.”

“…그럼 나는 아니야.”

처음부터, 내가 전직을 한 당시의 기억부터 지금까지 내가 그런 종류의 감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마법사의 감이 있었다면 내게 달려드는 괴물을 피해 왼쪽으로 몸을 굴릴지 오른쪽으로 몸을 던질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갈래 길에서 매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를 두고 에드워드 로거스는 이야기를 이었다. 손끝이 움찔거리며, 그런 그의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순간 그의 말이 전부 맞다고 인정하는 것 같아서, 나는 주먹 쥔 손에 힘을 주는 것으로 그런 나의 행동을 참았다.

“그 사람은 특정한 사건을 겪게 되면서 서서히 감이 다시 살아났어. 그런데, 그 뒤로 간간이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누군가가, 내 귀에 속삭이는 듯한 느낌. 로거스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 말이 없는 나를 보며 로거스가 물었다.

“너, 네 감을 믿지 않아 일어났던 사건 중 정신적으로 충격받을 정도의 일, 겪은 적 없어?”

어조는 조심스럽고 태도에선 약간의 불안이 엿보였다.

“…몰라.”

내 기억 중에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지워 버린 기억 중 있을 수도 있었다. 아냐, 역시 없어. 애초에, 랑을 만나 전직을 했을 때부터 감 같은 건 없었다.

이호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나는 확신할 수 있나? 회색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로거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소음은 파도가 모래를 갉아 먹는 것밖에 없는 이곳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능력 하나가 고장 날 정도의 충격이면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지 않나….”

“…….”

그 정도로 충격받을 만한 일이 내게 있었다고? 지옥도 당시에 그 정도의 일이 있었나? 이예린에게 말했던 그때 일보다 더한 일들은 없었을 텐데.

아닌가. 있을 법도 했다. 굳이굳이 따지고 헤집어 들면 충분히 있을 법도 한 시대였다. 누구나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는 그런 시대.

유난이다. 그 생각을 하자 숨이 다시 틀어막혀지듯, 오히려 막혔던 숨이 다시 틔워지는 듯, 뭔가 툭 하고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떨어졌다. 움켜쥔 주먹을 풀었다.

나 혼자 이러는 건 유난이야.

고민해 봤자 나오는 답은 없었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어색한 낯을 한 로거스를 붙잡아 물었다.

“그 사람이 겪었다는 특정한 사건이라는 게 뭐야.”

다행히도 내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유난스럽게도, 울음이 섞여 있다든가. 유난스럽게도 평소와 달랐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 내 목소리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을 얼굴에 띄운 로거스가 곤란한 낯을 했다.

“어…. 추측일 뿐이라 말하기는 좀 그런데….”

“말해.”

재촉하는 나를 보며 로거스가 몸을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아, 이건. 실수였다. 불을 다루는 로거스 입장에서 내가 하는 위협은 남들이 느끼는 것보다 배는 위협적인 거였다.

붙잡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내 행동을 굳은 낯으로 보던 로거스가 얕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마법사의 감은 미래 엿보기에 가까워. 그러니까, 단편적인 운명을 엿보는 거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마법사의 감은 예언과 엇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이예린처럼 방대한 범위의 예언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목숨과 관련된 단편적 예감이라고는 하지만.

충분히, 예언이라 칭할 법한 능력이었다. 예언은 수많은 운명 중 하나를 엿보는 것이니까.

“고장 난 감을 고치는 건 간단해. 기능을 움직이게 할 정도의 충격을 주면 돼. 충격 요법이지….”

“어떤 식으로?”

“그거야… 감은 예언, 그리고 예언은 운명이니 운명적으로 깊게 얽혀 버린 상대를 만나거나 하는 식으로지. 일단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감이 되살아났어.”

고장 난 감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강한 충격을 주는 운명의 상대. 운명….

애초에 그 사람이 내 운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은 만난 것 같다는 거였다.

“…나비.”

푸른 불꽃과 나비. 고장 난 마법사의 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감. 언제부터 이런 기이한 감각을 느꼈더라. 언제부터, 내 귓가에 누군가 속닥이고 있었지?

생각 끝에 결론이 나왔다. 헛웃음이 나왔다.

“…하!”

나비와의 첫 만남. 왜인지 지금은 죽일 때가 아니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기능을 멈췄던 감이 다시 움직였던 것은. 누군가 내 귓가에 속닥이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나비와 만났을 때부터였다.

바다 나들이는 별 성과도 없이 끝났다. 로거스는 내게 시련을 주기 위해 이곳까지 오기라도 한 듯 자꾸만 내가 모르던 것들을 던져 주었다.

낯이 하얗게 질린 나를 이호연이 챙겼다. 멀쩡한 정신으로 호텔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 드는 그에게 나 또한 별말 없이 안겼다.

어리광부리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 말에 굳어 버린 나를 당혹스러운 얼굴로 보던 로거스는 오스틴이 자신을 둘러업은 것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을 정도로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당혹감과 죄책감을 눈에 담다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내가 이 정도로 충격받을지 몰랐다는 그의 태도가 괜스레 거북했다. 나를 보며 일렁이는 다홍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머뭇거리는 음색이 조심스레 울렸다.

“나는, 그냥 알려 주려고….”

약간의 잔떨림. 후회 짙은 음성. 그것들을 귀에 담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알아.”

로거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렇게 충격받을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차가웠다.

정신과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내 몸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불안해하는 에드워드 로거스에게, 어딘가 간절하게 나를 붙잡은 이호연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내가 괜찮지 않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괜찮아. 평소엔 그리 쉽게 나오던 말이 오늘따라 어려웠다.

로비에 들어설 때까지 그 상태가 지속되었다. 직원인지 어딘가에서 온 보호자인지 모르겠는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강유진이 나를 보더니 낯을 굳혔다.

로비에는 생각보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인원이었다. 연회 날이 머지않았다는 말을 얼핏 듣기는 했는데 정말이었나 보다.

“무슨 일이야?”

우리 쪽으로 빠르게 걸어온 강유진이 이호연에게 물었다. 이호연은 그런 강유진에게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에 가서 얘기해요. 여기서 말고.”

이호연의 어깨에 뺨을 뭉개다가 눈을 감았다. 흐느적거리는 나를 받치는 손이 안정적이라 더 몸을 못 추스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 좀 들어라. 아직도 떨리는 손끝을 보며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나서 몸이 고장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각한 얼굴을 한 두 사람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정신적으로는 멀쩡했다.

이호연에게 매달린 몸이 민망할 정도였다. 멀쩡한데 괜찮지 않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말이 되니 우스웠다.

“빨리 가자.”

걸음을 재촉하는 강유진의 말에 이호연이 움직였다. 우리의 뒤편에서 뭐라 말하고 싶은지 손을 뻗는 로거스가 보였다. 오스틴이 그런 로거스의 행동을 제지했다.

영국의 보호자인 남자가 달려와 그들에게 무어라 묻고, 오스틴과 로거스가 그런 남자를 외면하는 것을 끝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다행히도 저 두 사람은 나와 했던 대화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런 게 알려지는 건 역시 곤란하겠지. 그런 쪽으로는 제법 안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그 둘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나 싶었다.

“…….”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니 손끝이 붓는 느낌이 들었다. 저릿한 손에 힘을 주니 그제야 천천히 움직였다. 막혔던 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나 내려 줘도 돼.”

“류.”

“내 발로 걸어서 갈래.”

환자 취급은 사양이었다. 정말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었는지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 주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바짝 긴장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것을 앞둔 상태에서 겪는 공포심 같기도 했다. 목 뒤가 선연하고 머리카락 끝이 삐쭉 서는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이 뭉치는 것 같은 감각.

웃긴 것은 정신적으로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다는 거였다. 인지 부조화가 올 것 같았다.

다행히 두 발로 서는 것 또한 문제는 없었다. 내가 휘청이기라도 할까 봐 눈을 떼지 못하는 이호연에게 웃어 주었다.

“괜찮아. 안 쓰러져.”

그런 나를 보며 강유진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간 생각을 다듬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영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나비에 대해 강유진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모르고, 물론 이곳까지 왔다는 건 주세진에게 웬만한 건 다 들었다는 뜻일 테지만….

대답 없는 나를 보며 강유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에요? 그러면 말 안 해 줘도 돼요.”

“곤란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래요.”

나비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한 대화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나조차 모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라도 하듯 우리는 방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구름 둥지를 손으로 휘휘 저어 없앤 강유진이 나를 침대에 앉혔다. 이호연은 침대에 있던 이불로 나를 꽁꽁 감았다.

약간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호연의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에서 손만 빼꼼히 내밀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강유진이 입을 열었다.

“또 로거스에게 뭔 말을 들은 거예요?”

강유진이 보기에도 로거스가 내게 있어 자극제처럼 보이나 보다. 내가 이예린을 건드리면 자극을 받은 그녀가 터지는 것과 같은 건가. 에드워드 로거스의 정보 하나하나가 나를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거짓과 거짓과 거짓으로 이루어진 나를.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렸다. 눈을 꼭 감고 머리만 숨기면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을 거라고 믿는 어느 아이처럼.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기에 눈을 뜨고 헝클어진 머리로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의외로 에드워드 로거스가 아는 게 많더라고요.”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는 잔잔하고 평온했다. 조금 전의 이상하고도 유난스러운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젠 괜찮다.

그나저나 에드워드 로거스. 그가 의외로 아는 게 많다는 건 진심이었다. 그리고 내게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 또한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그가 주는 정보 하나하나가 제법 값졌으니까. 또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해 정보 독점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계열의 고유 능력에 대한 것은 연구원들 말을 실수로 흘려버린 것이었지만.

“…….”

설마 마법사의 감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막연히 어떠한 능력이겠거니 했던 것인데. 또한 그와의 대화로 깨닫게 된 것도 있었다.

전직자들의 정보에 대해서 나라별로 얼마나 폐쇄적으로 구는지에 대하여. 마법사의 감이 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드워드 로거스의 말마따나 자신의 감을 믿지 않아 참극을 당한 사람이 겨우 나와 그가 말한 어떤 사람 단둘뿐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었다.

본인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아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 생각으론 나라의 개입이 있었을 것 같았다. 소중한 연구 자료로 봤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터무니없는 가설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로거스는 영국 왕실의 상징인 사자를 다루기에 나라의 얼굴마담이 되었고, 그만큼 자국에 깊이 얽혀들었다.

그런 만큼 다른 전직자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있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저 첫인상이 워낙 만만해서 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을 뿐이다.

솔직히 마법사의 감에 대한 것보다 에드워드 로거스가 의외로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끊임없이 하였으나 이제는 입을 열 시간이었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만한 것도 별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하는 나를 두고 불안해하는 이호연의 손을 토닥거려 주었다. 에드워드 로거스가 말한 예시, 내가 기억 못 하는 어떠한 기억에 대해 이호연은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도 모를까.

나는 나에게 어떤 거짓을 덧씌운 걸까. 진실보다 거짓이 무해하다는 것만이 내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강유진에게 물었다.

“푸른 불꽃과 나비에 대해 알아요?”

뭐든 이야기의 시작점은 그거였다. 불꽃과 나비. 나비와 불꽃. 마치 어느 서사시의 시작점처럼. 돌고 돌아 되돌아오는 시작과 끝의 종착지처럼.

모든 것들이 그것과 얽혀 있었다.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석판의 글자가 어디 것인지 알아낸 게 나였는데.”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이건 또 의외였다.

“그 캐나다…, 그거요?”

“통합 캐나다 원주민 글자 마디. 네, 그거.”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요?”

“보고서 작성할 때…. 음, 좀 색다르게 제출하고 싶어서 문자표 뒤지다가 알았어요.”

주세진의 피곤함에 젖은 한탄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내 얼굴에 강유진은 일견 뻔뻔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웃음을 지었다.

분위기를 가볍게 하고 싶어 하는 강유진의 생각이 엿보였다. 배려 섞인 장단에 기꺼이 맞춰 주었다.

내 안색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정신적으로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꼼지락거리다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매고 있는 이호연 쪽이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일 정도였다.

“내가 나비랑 만났던 것도 주세진 씨한테 들었어요?”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대화에 차질 없을 정도의 정보는 있어요.”

다행이네. 나는 옅은 한숨 한 번을 내쉬고 로거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마법사의 감에 대한 것들은 강유진 또한 몰랐는지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거 그냥 회피 기술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이예린은 예언도 하잖아요. 전 천칭에 있을 때는 그 능력으로 주식 재미 좀 봤다던데.”

“그거야 그쪽은 히든 전직자잖아요. 나는 기껏해야 마법사의 감이 특화된 건 줄 알았죠. 예언이라고 해 봤자 어쩌다가 한 번이고…. 감 하나는 정말 좋지만.”

확실히 이예린을 제외하곤 마법사의 감이라고 해서 예언이나 운명 같은 거창한 단어를 붙일 만한 이는 없었다. 나도 지금까지 회피기 정도로만 취급했었다.

이예린 본인도 자긴 이 능력 덕 본 것이 맛있는 밥 먹기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리블 소속이 되는 밑바탕이 되기는 했지만.

실제 예언이라 불릴 법한 경우도 별로 없었다고 하고. 그저 남들보다 지나치게 감이 좋은 정도라고 했다.

“…….”

누군가 내 귓가에 속닥이는 것 같은 감각이라고 했었나. 이불에 둘러싸인 팔을 들어 귓가를 더듬어 보았다. 착각 같은 게 아니었나 보다.

“그럼 뭐 때문에 마법사의 감이 기능을 잃었는지는 모르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강유진의 말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그랬냐는 질문에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스스로 내 머리에 손을 댔고 그 결과 기억에 혼선이 생겼다.

아직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과거 중 마법사의 감이 고장 날 정도의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훨씬 더 이전일 수도 있었다. 이호연이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가 모를 수도 있었다.

에드워드 로거스는 충격으로 인한 기억 상실이 아닌가를 의심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보단 나 스스로가 의심스러웠다.

만약 정말 내 스스로 지워 버린 기억의 일부분이 마법사의 감과 관련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생각을 해 보자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 듯했다. 내가 그 기억을 받아들일 때가.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니까. 이젠 정말 괜찮아.”

이호연의 물음에 나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고 말고, 애초에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토끼 사과 하나로 생각났던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정말 시간이 답인 듯했다.

이호연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손장난을 걸며 말했다.

“그런데 내 마법사의 감은 영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아. 기껏 나갔는데 바다에 아무것도 없었잖아.”

게다가 고장 난 것이 다시 움직일 정도의 충격이라는 표현도 뭔가 조금 웃겼다. 고장 난 TV 한 대 때리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돼먹은 감각 기관인지 모르겠다.

농담조에 가까운 내 말에 이호연 또한 애써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런 그의 모습을 살피며 나는 실없는 질문을 던졌다.

“김수혁도 감이 좋아?”

내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 집 가스 불 끄고 나왔는지 아닌지 물어보면 정답 말해 줄 정도?”

그거 뭐야. 쓸데없는데 되게 좋은데? 미묘하게 좋았다.

일상에서 그 정도라면 적어도 괴물 앞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피해 목 날아갈 일은 없다는 거지만.

다음에 김수혁에게 우리 집 가스 불 여부를 물어봐야겠다.

“…….”

막상 마법사의 감에 대해 생각해 보니 아는 마법사가 얼마 없어 어느 정도가 뛰어난 건지 긴가민가했다.

에드워드 로거스는 어떤지 잘 모르겠고, 이예린은 애초에 예언자였다. 뭔가 조금 어설픈 예언자지만.

그리고… 없네. 내 인간관계에 나름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데 이호연이 나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

몇 번째 묻는 건지 모르겠다. 반복되는 질문에 짜증보다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도망 안 간다고 말이라도 해 줘야 하나.

꽁꽁 감싼 이불을 풀어헤치고 몸을 틀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이호연을 마주 보며 그의 양 뺨을 잡았다.

눈을 맞추며 그에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정말로. 네가 불안해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내 말에 일렁이던 회색 눈이 살며시 눈꺼풀 뒤로 숨었다.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불안감이 사라졌었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말 몇 마디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내게 거짓말,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그가 하고 싶은 말인지 나 혼자 지레 찔려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안 나가도 되니까 그렇게 어색하게 뒷걸음질하지 마세요.”

내 말에 뒷걸음치던 강유진의 행동이 멈췄다. 그녀는 어깨에 닿아 뻗치는 자신의 머리끝을 만지며 나에게 말했다.

“아니…. 키스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길래 나가 주려고 했죠.”

“남들 앞에서는 안 해요.”

아마도. 그리고, 애정으로 매번 모든 것을 넘길 수는 없었다.

내 말에 강유진은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다 곧이어 자신과 상관없다고 판단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녀를 힐끔 보다 로비의 모습이 생각났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제 연회가 얼마 안 남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학자와의 만남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 곧. 만날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 귀에 속닥여 준 것처럼. 단순 착각이 아닌 그 감각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거 있는데요.”

“뭔데요?”

구름을 불러와 자리에 앉는 그녀를 보다 이호연에게 툭 기대며 말했다.

“노아 이스벨라, 그 사람이랑은 언제 만나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다 모인 것 같던데.”

“아.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연락 왔어요. 정신없어서 깜박했네.”

드디어 만난다. 마법사의 감에 대해 듣는 순간 세계의 비밀을 들어야 할 이유가 더 늘었다. 푸른 불꽃과 나비가 얼마나 대단한 운명인지 이젠 궁금할 지경이었다.

“연락 온 거 알려 줄 겸 바다로 놀러 간 두 사람 마중 나갔던 건데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정신없기는 했지.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지만. 문득문득 드는 생각을 뒤로 밀어 두었다.

“그쪽에서 언제 만나자고 했어요?”

“오늘 밤. 정확히는 내일 오전 한 시.”

시차 적응 성공한 지 얼마나 됐다고. 떨떠름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강유진이 어색한 낯으로 말했다.

“노아 이스벨라가 여기에 안 살 거든요. 지금 오고 있는데 이 사람이 멀미가 심해서 새벽에나 도착할 것 같대요.”

“…….”

정말 멀미 때문인지 기죽이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벽이든 낮이든 차라리 빨리 만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하면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여기 여행이나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애초에 노아 이스벨라를 만나러 왔던 것이니.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빨리 만날 수만 있다면 거짓된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작은 희망을 품은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강유진이 말을 이었다.

“나쁜 소식도 있는데, 정보를 듣자마자 바로 한국에 가는 건 안 돼요. 연회는 참석해야 해요. 그러니까 정보를 듣자마자 한국에 갈 생각하지 말아요.”

들켰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저렇게 잘 아는 것인지 참 신기했다. 내가 풀어헤친 이불을 다시 내 어깨 위로 올려 주고 있는 이호연에게 고개를 저었다.

“나 안 추워.”

“그래도….”

“괜찮아. 그리고 여기 방 주인은 강유진 씨야.”

내 말을 들은 강유진은 눈을 깜빡이다 웃음을 지었다.

“이따 새벽에 일어나기도 해야 하고, 류도 놀란 것 같으니 방에 가서 자는 게 어때요?”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따뜻한 거 끌어안으면 잠 잘 올걸요? 옥상 정원에서 낮잠 자는 거 봤어요.”

강유진의 말은 이번 한 번은 봐줄 테니 이호연을 데리고 방에 가서 낮잠이나 자라는 뜻이었다. 주세진이라면 절대 허락 안 해 줄 오픈 마인드였다.

아닌가. 어쩌면 주세진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럴까요?”

“지금 밖에 돌아다니면 이따 피곤할 테니 차라리 방에 가서 호연이랑 쎄쎄쎄나 하면서 놀아요.”

확실히 지금 나가면 많이 피곤할 것 같기는 했다. 아침부터 우리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만남, 너는 내 운명, 이런 소리를 질리게 들었다. 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그것도 안 할지도 모르겠다. 로비에서 대놓고 이호연에게 안겨 들어왔는데, 그거 보고도 계속 치근덕거리기엔 전직자들이 그렇게 자존심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림자로 이동하기에는 엉뚱한 방에서 튀어나올 확률도 있으니 걸어가는 것이 나았다. 허리에 감긴 이불을 마저 풀어헤치고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그나마 미국 측에서 전직자들끼리 싸움이 날까 봐 지레짐작해 방을 멀리 떨어트린 것이 다행이었다. 적어도 내 방에 갈 때까지 누굴 만나거나 할 일은 없을 거다.

강유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가서 나랑 낮잠이나 자자.”

“호랑이로 변해서요?”

“그것도 좋고.”

이호연의 손바닥 위를 살살 긁어내며 그에게 웃었다.

“이쪽도 좋고.”

“…….”

붉게 달아오른 모습에 나는 소리 내 웃었다. 이제는 몸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까지 몸이 굳었던 건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은 멀쩡했다.

원래 기억이 없어도 몸은 반응하나?

“?”

흘러내리는 코트의 소맷자락을 걷어 주는 이호연 뒤로 내 방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조명 아래 반짝이는 금색 가닥이 꽤나 고왔다.

“에드워드 로거스?”

내 부름에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웬일로 페이즐리 오스틴 없이 혼자였다. 다홍색 눈이 나를 보았다. 붉은 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넌 또 왜 그런 얼굴이니? 하고 물으면 내 어조가 어떤가는 상관없이 울 것 같았다.

“여기서 뭐해?”

최대한 온유한 듯한 어조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로거스는 내 옆에 이호연을 힐끔 보고는 내게 말했다.

“대화…. 쟤, 그러니까 이, 빼고 둘이서 대화 좀….”

이? 이호연을 말하는 건가? 이호연 발음이 안 돼서 저렇게 부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 옆의 호랑이가 로거스의 말에 불만스러워한다는 건 알겠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로거스의 얼굴을 보았다. 첫 만남에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인상을 남긴 에드워드 로거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풀 죽은 모습이었다.

“…….”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이호연에게 건넸다.

“먼저 들어가 있어. 얘기 좀 하다 들어갈게.”

잠시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내게서 카드키를 받아 들었다.

“빨리 들어와야 해요.”

“빨리 들어갈게.”

이호연의 뺨에 짧게 키스해 주고 손을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듯 뺨을 더듬던 이호연이 내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복도에 나와 에드워드 로거스만이 남았다. 짙은 나무색의 문을 더듬다가 뒤를 돌았다.

“할 얘기가 뭐야?”

로비에서 만난 보호자에게 끌려가서 한 소리 듣기라도 했나. 조금 전 바다에서 봤을 때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내 물음에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던 로거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우는 건가 싶어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낮췄다. 쭈그리고 앉아 무릎 위에 팔을 얹었다. 그런 내 행동에 로거스가 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왜 울어?”

손에 턱을 괴며 물었다. 몸을 낮춘 것이 무색하게 로거스가 얼굴을 가리니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끌리는 코트 자락을 보다 로거스의 정강이를 손으로 톡톡 쳤다.

“울보.”

에드워드 로거스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 놀리는 맛이 있어 왁왁대는 그를 놔뒀던 것도 있었다.

에드워드 로거스의 나이는 한국으로 따지면 열아홉 살. 딱 나보다 세 살 어리고 박상호와는 동갑인 나이였다. 그리고… 미성년이라 주장하기에는 많은 것을 알았을, 어른을 코앞에 둔 아이.

그의 나이를 알게 된 것은 웬만하면 로거스를 만나지 말라는 강유진의 말을 듣고 난 다음이었다. 영국의 대표로 선발된 전직자의 나이를 알아내는 것 정도는 검색어 몇 개면 충분했다.

동양인이었다면 애티가 더 났으려나. 일단 서양인 특유의 외모 때문에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노안인 걸지도 모르지만.

숨죽여 우는 걸 보니 잘 느껴지지 않았던 그의 나이가 선명하게 와닿았다. 이런 건 역시 불편했다. 저를 놀리는 말에도 반응 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다.

“별로, 네 잘못 아니야.”

누구한테 하고 싶었던 말일까. 생각과 말의 인지 부조화가 올 것 같은 나를 두고 그가 말했다.

“내가 생각 없이 말해서 그런 거잖아.”

“아니라니까.”

고집쟁이.

“남의 트라우마 건드리는 게 얼마나 거지 같은지 내가 잘 알아. 그거 진짜 개 같아. 그런데 내가 그 개 같은 짓을 했어.”

남의 말 안 듣고 저 할 말만 하는 게 미묘하게 익숙했다. 지옥도 당시의 이호연이 뭐라 말하든 못 들은 척하던 나 같았다.

유난스러운 아이.

“그렇게 개 같지는 않았어. 나름 좋은 정보였거든.”

거짓과 거짓과 거짓이 뒤섞인 거짓말.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마. 너는 날 한 대 치거나 하면서 함부로 입 나불거리지 말라고 욕을 하든가 해야 해.”

“맞는 거에 취미 있는 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말고.”

연약한 마법사는 내가 잘못 치면 훅 간다. 잘못된 도수 치료의 예시를 몸소 체험해 봤으면서 저렇게 말하는 것도 나름 대단했다.

“내가, 내가 네 트라우마를 건드렸다고! 마법사의 감이 고장 날 정도의 트라우마를!”

“…….”

서러운, 아이.

빽 소리 지른 에드워드 로거스가 제 눈을 벅벅 비볐다. 드러난 다홍색 눈동자는 물기 어리고 눈가는 새빨개져 있었다. 붓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며 물었다.

“내가 보기엔, 네가 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 같은데.”

“…….”

네가 이러면 물어보려던 것도 물어볼 수가 없잖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다가 손가락을 맞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푸른 불이 로거스의 얼굴 앞에서 일렁이다 사라졌다.

“천천히. 울지 말고 말해 봐. 대화하자며.”

놀란 듯 크게 떠진 눈이 나를 보았다. 푸른 불에 놀란 것인지 눈물이 쏙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슬며시 웃었다. 우는 애 달래는 데 별다른 재주가 없구나 싶었다.

우리는 내 방문 옆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등을 기댔다. 궁상맞아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복도가 워낙 잘 꾸며져 있어 파티에서 도망친 어린애들이 나름 숨었다고 주장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눈이 조금 아릴 때까지 천장 위 샹들리에의 빛무리를 보고 있던 내게 에드워드 로거스가 말했다. 그건 한탄, 자기 방어, 변명. 그리고 서럽디서러운 고백이었다.

“너랑 비교당했어. 지금 말고 지옥도 당시에도. 어떤 사람이 네 영상을 보여 주며 왜 너는 이렇게 못 하느냐고 했어.”

그때 당시면 에드워드 로거스의 나이는 열일곱에서 열여덟 사이일 것이다. 그 지옥 속에서 남한테 비교당하는 것을 참기엔 너무 어렸다.

그런 취급을 당할 이유도 없었고.

“난 가만히 앉아서 내 도움만 받는 그 사람이 너랑 나를 비교하는 게 화났을 뿐이었어. 그래서… 그럴 거면 내 도움받지 말라고 외치고 떠났어.”

잘했다고 말해야 하나.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안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어. 나 아니면 그 사람이 죽을 걸 알았으니까.”

“착하네.”

“아냐. 나는 안 착해. 정말 착했으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거야.”

로거스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겨우 그걸로 악하다고 말하면, 살아남은 우리 전부가 악인일 텐데. 순수는 죽고 순진은 옅어져도 순박함은 남았나 보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어느 한구석에 처박힌 기억의 한 자락을 더듬었다.

“한번 그렇게 겁을 주면 더 이상 너랑 비교하는 말 안 할 줄 알았어. 나는 그때 그 말을 참았어야 했어. 그곳을 떠나면 안 됐어.”

“…….”

떠나면 안 됐다, 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는 많은 것들이 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그중 하나였다. 그 뒤의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됐을지 예상이 갔다.

그건, 경험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나한테 쏠리면서 다시 너와 비교하는 것이 시작됐어. 즐거운 척 떠들다가도 미스터 로거스, 만약 한국의 류처럼 강했다면 지옥도 당시 더 많은 사람을 구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하고 물어봐.”

“…그 사람 얼굴이라도 한 대 쳐 주지 그랬어.”

“발로는 차 줬어.”

“잘했네.”

내 말에 그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까지 고개를 들지 않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서 나만 보면 으르렁거리고 덤빈 거야?”

“…네가 싫었던 건 아니야. 그냥… 너랑 비교당할 때면 그때 일이 자꾸 생각났어. 네 얘기를 듣는 게 싫었어. 그런데 직접 보게 되니까…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이래서 비교당했나 싶고. 왜 나는 저렇게 강하지 못했나 싶고.”

존재하는 것만으로,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콕콕, 찌르는 자극제다, 이거구나.

그러니까 에드워드 로거스에게 있어서 나는 트라우마의 시작 버튼이나 다를 게 없었다는 소리였다.

이제는 알겠다. 흐느끼는 소리는 우는 소리였다.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부드러운 금발을 헤집었다.

“첫 만남에서 네가 너무 재수 없어서 탈모나 걸리라고 저주했었는데.”

“…너 성격 정말 나빠.”

“알아. 그건 취소해 줄게.”

에드워드 로거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눈동자 색까지 붉으니 밤에 보면 꽤나 호러틱할 것 같은 꼴이었다. 김수혁한테 울 때 눈 비비지 말라고 해야겠다.

“직접 본 나는 어떤데?”

“…강해. 그리고 생각보다 어려 보였어. 내가 본 영상에 너는 항상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까 나보다 어려 보여서 놀랐어.”

“그건 네가 노안이라 그런 거야.”

“그리고 너 정말 성격 나빠.”

삐쭉거리는 것을 보니 그제야 제 나이처럼 보였다. 내가 에드워드 로거스를 어리게 볼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외모도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어쩔 수 없어 철들어 버린 그의 모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내 물음에 그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그런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나는 웃는 낯을 유지했다.

“네가 만났다는, 나처럼 마법사의 감이 고장 났다는 사람.”

“…….”

“그 사람, 지금 살아 있어?”

대화가 뚝, 끊겼다. 짓씹은 입술에서, 회피하는 눈에서, 꼼지락거리는 손끝으로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을 때 머뭇거렸구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우리가 앉은 복도로 겨울이 스며들어온 것 같았다, 꽁꽁 얼어 버린 마음에 기대어 그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네가 보기에 나도 그럴 것 같아?”

“…아니. 절대 아니야. 너는, 강…하잖아. 그러니까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조심스럽게 긍정을 뜻하는 고갯짓하는 어린애를 보며 나는 짓궂고도 못된, 아주 나쁜 웃음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건 비틀림이었다.

“그래. 그럼 됐지. 안 그래?”

뭐라 말하고 싶은 듯 벙긋거리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리고 다시 입이 열렸을 때 나는, 그 못된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속닥이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답하면 안 돼.”

“…….”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 답, 하면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잡아먹힐 거라고 했어.”

잡아먹힌다….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정신이 좀먹을 거라는 뜻인지. 마법사의 감 또한 하나의 능력이니 조각의 괴물이 튀어나와 나를 먹어 버릴 거라는 건지.

잠시 고민하다 불안한 얼굴을 한 꼬마에게 가벼운 말을 건넸다.

“안 잡아먹히게 조심해야겠다. 잡아먹힐 것 같으면 한 대 때리고 도망이라도 칠게.”

“나 농담하는 거 아냐.”

“알아. 그래서 내가 농담하는 거잖아.”

마주 보는 눈에 담긴 것은 순수한 걱정 같은 게 아니었다. 순수는 죽고, 순진은 옅어졌다. 순박은 순수와 순진보다는 약은 것의 이름이었다.

날 향한 걱정보다는 자신을 향한 걱정. 나 때문에, 라는 말이 싫은 어느 꼬마의 걱정이었다. 툭, 하고 지금의 분위기를 벗어날 말을 던져 주면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날려 버릴 말을 던졌다.

“누나라고 불러 봐.”

“넌 내 형제가 아닌데 왜 누나라고 불러?”

“번역기로도 이런 건 안 되나 보네.”

의아함을 담은 다홍색 눈을 보다 금색 머리를 잔뜩 헤집어 주었다. 옅은 불안감은 최선을 다해 도망쳤다. 앞뒤 상황 맥락 안 맞는 대화는 그렇게 이어졌다. 불안이 도망간 도주로를 훑으면서.

“그만해!”

제 머리를 헤집는 내 손을 막으며 그가 말했다.

“나한테 화풀이한 건 네 잘못 맞으니까 벌은 받아야지.”

하얀 이마에 딱, 소리 나게 딱밤을 맞혔다.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로거스에게 웃으며 말했다.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에 네 잘못은 없어. 굳이 따지자면 나한테 네 개인적인 이유로 덤빈 게 잘못이지.”

“…나도 알아.”

“그리고 널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사람들의 잘못이고.”

“…….”

이마가 빨갛게 부었다. 너무 세게 쳤나 싶었지만 나는 나름 봐준 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로거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음에 또 덤비면 그때는 딱밤으로 안 끝난다?”

“안 덤빌 거야. 못 이긴다는 건 이미 첫날에 깨달았어.”

풀이 죽은 모습이 조금 불쌍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슬며시 웃었지만, 그리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우울했던 대화는 그렇게 묻혔다.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어느 열세 번째 달의 말로처럼. 남은 건 약간의 유쾌함. 조금의 미안함.

그 옅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든다면, 잠깐의 고약한 장난 같던 대화는 완전히 사라지는 거였다.

그리고 그건 너무 쉬웠다. 간절하게 필요하며 관심 끄는 것을 주는 것만큼 아이의 혼을 쏙 빼놓은 것은 없으니까.

벌게져서 부어오른 이마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거 하나 알려 줄게.”

내 말에 집중하는 다홍빛은 예뻤다. 장난치는 아이의 불. 딱 그 정도로만 위협적으로 보이고 딱 그 정도로만 눈에 띄는 그런 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한 대화를 없던 것처럼 취급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불은 특수한 불이어서 무기에서 꺼내 쓰지 않는 이상 많이 사용할 수가 없어.”

물론 이호연의 히든 게이트 때처럼 편법은 있지만 류라는 등이 없다면 내가 사용 가능한 푸른 불은 호롱불 정도였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다른 불 마법사들의 불은 모두 같은 불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떼쟁이 에디 어린이에게 특별히 해 주는 조언.”

로거스가 고개를 들었다. 다홍색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공 빼고는 붉음밖에 없는 눈을 마주 보며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 이렇게 쉽게 잊고 금세 새로운 것에 달려들잖아.

“누가 다루냐에 따른 차이일 뿐 같은 종류의 불이라는 거야. 마법은 상상력과 통제력이 가장 중요시되는 능력이지.”

“…….”

“통제력만 높다면, 남의 불, 못 뺏어 올 것도 없잖아?”

“!”

놀라 크게 떠진 눈을 보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나처럼 무한의 불을 끄집어내지 못한다.

이건 따지자면 게임의 마나와 비슷했다. 마법사들은 보이지 않는 마나의 총량이 있고 각자 자신의 한계만큼만 불을 소환해 내는 거였다. 물론 나는 류의 등 안에서 끄집어내므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끄집어내 각자의 방식에 맞게 활용해 공격하는 것이 불 마법이었다. 불 마법이란 그냥 불 소환일 뿐 그 이후에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순전히 소환한 이들의 역량에 달렸다.

그리고 불 마법사의 한계는 그 불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 물론 활용을 얼마나 잘하고 통제력이 얼마나 높은지도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바탕이 되는 상상력도 중요했다.

하지만 재능만 있고 준비물이 없으면 그건 아이디어에 불과하지, 제대로 된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다. 어린애들 모래 장난과 비슷하다고 봐야 했다.

그 모래로 무엇을 표현할지에 대한 상상력. 그 모래를 어떻게 다루어 상상한 그대로 표현할지에 대한 통제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인 모래.

내 모래가 부족하면 남의 모래를 뺏어 오면 된다. 조금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건 에드워드 로거스가 상대에게서 뺏을 건지 빌려 올 건지 알아서 할 문제였다.

물론 남의 것을 뺏어 오는 만큼 통제력이 얼마나 좋냐가 관건이었다. 내 모래 뺏어 가는 놈을 가만히 두고 보는 어린이는 없기 때문이다.

뺏을 건지 순순히 주게 만들 건지. 뺏는다면 다시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그것은 모두 본인의 역량이다.

에드워드 로거스는 히든 전직자니, 불을 끄집어내는 총량이 적은 편이 아니었다. 최대 총량이 불기둥 만들어 내는 것인 김수혁과 비교해 보면 물컵과 물통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의 불 사자였다. 하나의 의지를 갖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바람에 사용되는 불의 양이 너무 많아 정작 불 사자를 소환하고 보면 로거스가 사용할 불의 양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불 사자를 로거스가 그렇게까지 잘 다루는 것도 아니었다. 자아를 가진 존재들은 제 주인이 우습게 보이는 순간부터 개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 그림자 안에 숨은 것들처럼. 그것들이 얌전히 구는 것은 나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도 있지만 내 뒤에 버티고 선 랑의 존재 때문이었다. 틈이 나면 한 번씩 기어오르기는 하지만.

“어떻게, 말도 안 돼….”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로거스를 보며 나는 웃어 주었다.

“대체, 뭘 생각하면서 살아야 그런… 방법을 알아내는 거야?”

침묵 사이에 있을 말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야 직접 해 봤으니까 알지.”

“…뭐?”

로거스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바닥 위에서 새빨간 불이 피어올랐다. 로거스의 얼굴이 물음표 살인마의 공격을 당한 것처럼 바뀌었다.

“내가 파란 불만 쓴다고 사람들은 평범한 불을 못 쓰는 줄 알더라. 효율이 딸려서 안 쓰는 건데.”

“네가, 그걸 어떻게… 쓰는 거야?”

어떻게 쓰냐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 줄까 하다가 언젠가 강유진이 내게 말해 줬던 비유가 생각났다.

“전설의 용사가 일반 검사가 사용하는 스킬을 못 쓰지는 않잖아.”

로거스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내 말이 그렇게 이상한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검기를 달고 칼을 휘둘러서 산도 베는 캐릭터가 일반 베기를 할 줄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이래서 고정 관념이 무서운 거야.”

태평한 내 말을 들은 로거스가 제 머리를 헤집었다.

“네 애인은 네 성격이 나쁜 거 알고 너 만나?”

내 성격이 안 좋은 거, 걔가 제일 잘 알 것 같은데. 그리고 이호연도 성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람이 매사 친절한 거지, 착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 비슷비슷하긴 하지만.

혼란스러워하는 에드워드 로거스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더 헤집어 주며 말했다.

“남의 불을 뺏을 정도의 실력이 되면 한 번쯤은 제대로 상대해 줄게.”

“…오래 안 걸리니까 기다려.”

불을 다루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 에드워드 로거스 또한 호승심이 넘쳤다.

재미있는 건, 친목질이라는 이 모임의 공식 목적을 어쩌다 보니 제대로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타르에 이어 에드워드 로거스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오스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에디 어린이는 그를 데리러 온 페이즐리 오스틴에게 맡기고 나는 호랑이랑 낮잠이나 자야겠다.

그들을 배웅하고 문 앞에 서자 내가 오기를 기다렸는지 곧바로 문이 열렸다.

“…….”

떠나는 두 사람 중 뒤 한 번 돌아보는 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우리 사이에 있던 심각하고도 보기 싫고, 듣기 싫은 이야기는 모르는 척해도 되는 무언가가 되었다.

모르는 척하는 것도 거짓말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날 보며 웃는 이호연에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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