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밤중의 밀회 (14/34)

#한밤중의 밀회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까. 자기 자식 잘못한 건 생각도 안 하고 남의 자식한테 뭐라고 하는 학부모와 그 앞에 억울한 표정을 짓는 어린아이?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내게 영어로 뭐라고 하는 남자를 보았다. 내 옆에 서 있던 이호연은 졸린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귀엽네.

“우리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해?”

“보호자 올 때까지요.”

강유진은 언제 올까.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내게 뭐라고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먼저 시비 걸고 덤빈 건 그쪽네 애들인데요.

피곤함에 하품이 나왔다. 커다란 호랑이 끌어안고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보호자 뒤에 숨어 비죽이며 웃는 낯이 약 올랐다. 그냥 아까 한 대 칠 걸 그랬다.

남자가 손을 올려 삿대질하려 하자 중재 역할을 담당한 미국 정부의 직원 겸, 이번 모임이 끝날 때까지 호텔의 직원을 겸하게 된 남자가 곧바로 남자의 손을 낚아챘다.

뭐라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몇몇 단어를 조합하고 두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으로 대충 대화 내용이 예상은 갔다. 얌전히 있어 주는 괴물을 괜히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본의 아니게 강유진의 말대로 로비에서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리게 됐다. 과정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삿대질을 말리는 저 직원이 한국말까지 할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슬프게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직원은 강유진을 픽업하러 갔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한 대 치면 안 되겠지?”

“네.”

내 물음에 이호연이 단호하게 답했다.

로비에 서서 이게 뭐 하는 짓이람. 따분함에 눈을 굴리다가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김수혁보다 좀 더 밝은 느낌의 붉은색이었다. 다홍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눈치 보는 여자와 달리 뭐 잘했다고 저렇게 당당한 표정인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손을 들었다.

그 작은 손짓에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비웃어 주며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노골적인 바디 랭귀지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참 도발에 약한 친구였다.

내게 덤비려 하는 남자를 붙잡는 보호자와 내게 뭐라 뭐라 빠르게 말하며 말리는 시늉을 하는 직원을 보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내가 쟤를 한 대 치고 암시 걸어 없었던 일로 하는 게 빠를까, 강유진 씨가 오는 게 빠를까?”

“일 커지면 세진이 형이 여기로 올 수밖에 없게 돼요.”

내 행동을 저지하는 마법의 말이었다. 입을 삐죽이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낮게 웃었다. 주머니에 따로 넣어 둔 것인지 낱개로 포장된 마들렌이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포장지를 벗겨 내 입에 넣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것을 한 입 베어 물며 뒷목 잡기 직전인 보호자를 구경하던 중이었다.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에요?”

이호연이 마들렌을 세 개쯤 입에 넣어 줄 때쯤 강유진 씨가 도착했다. 우리와 저쪽을 번갈아 본 강유진 씨가 묘한 낯으로 웃으며 내게 물었다.

“세 번은 참는다더니?”

“그건 시비 거는 거 세 번 참는다는 의미고요. 저쪽은 시비 거는 게 아니라 덤빈 거였어요.”

내 말에 강유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일에서도 내 편을 들어 주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그럼 얘기가 다르기는 하죠.”

“이래서 강유진 씨가 참 좋아요.”

“너무 좋아하지는 말아 줘요. 난 길드장님 거란 말이야.”

“그쪽은 일이랑 결혼한 것 같은데.”

“쉿. 조용.”

성큼 내 앞으로 걸어온 강유진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에 저쪽 보호자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그들을 구경하다가 옆머리를 조금 잡아 쫑쫑 땋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 행동을 구경하던 이호연이 땋은 머리를 내버려 두는 나 대신 그 머리를 잡았다.

“묶어도 돼요?”

“굳이?”

태연하고도 쓸데없는 우리의 대화와 달리 저쪽의 대화는 F로 시작하는 단어가 참 많이 나왔다. 그리고 그 F의 강렬한 발음은 주로 강유진의 입에서 나왔다.

대화가 아니라 말싸움하는 것 같은데, 뜻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강유진의 말씨가 운전 솜씨만큼 거칠다는 건 알겠다.

이게 바로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인가 싶었다.

여기 시간으로는 새벽이라 그런지 로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싸움을 말리던 남자는 로비로 내려오자마자 손을 흔들며 웃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내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의 첫 만남에서 인상 찌푸리지 않는 불 사용 마법 계열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히든 전직자라는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특이한 반응이었다.

날 좋아한다는 김수혁도 가끔가다 날 보면 움찔거릴 때가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불을 마주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생리적 거부 반응이었다.

김수혁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마치 아득한 존재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은 기분과 비슷했다. 히든 전직자쯤은 되어야 날 보고 인상 찌푸리는 것 정도로 끝난다.

불을 사용하는 마법 계열들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의 원인도 그거였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드는 거부감. 그리고 사실 그 불은 정신 계열 마법을 위한 매개체일 뿐이라는 허망함.

그건 이과면서 문과인 나보다 국어를 잘하는 친구가 수능 때문에 공부하는 거지, 뭐.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즉, 재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본능이었다.

저 남자가 유난히 나를 싫어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유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한 대 못 때린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뒤돌아 걸어가는 일당의 등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흔든 강유진이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돌았다가 그 모습을 본 남자가 제 보호자에게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보호자는 그런 남자가 피곤한지 남자의 머리를 잡아 앞으로 돌려놓았다.

“잘 해결되었어요?”

“뭐 그럭저럭이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별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우리의 곁에 서서 뻘쭘하게 서 있던 직원이 운반 카트를 끌고 오며 강유진에게 물었다.

“저, 이제 안내해 드려도 되나요?”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것을 봐선 이 직원이 조금 전의 직원이 말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 보며 울상인 것으로 보아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여기 배정된 것 같았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다. 해외에서 내 이미지가 어떤지 참 궁금해지는 표정이었다.

“자, 그럼 일단 카드 키부터 줄게요. 방 하나 당 두 장인데, 하나는 내가 갖고 있을 거예요.”

이호연에게 한 장을 내밀고 자기 몫의 카드 석 장을 꺼내는 강유진에게서 카드가 든 봉투를 가져왔다. 겉봉투를 힐끔 쳐다보고 다시 강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둘이 좋아 죽는 건 아는데 밤에 몰래 남의 방에 놀러 가거나 하지 말아요.”

“아까 싸움 난 쪽은 어느 나라예요?”

“말 돌리지 말고요. 영국이요.”

“영국?”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강유진이 말했다.

“불 사자, 불 사자.”

“아, 맞아, 그거.”

거대한 불로 만들어진 사자를 다루는 영국의 마법사. 옛날에 커넥터 자게에 올라온 기사 링크로 본 적 있었다.

“…….”

나를 왜 싫어하는지 알겠다. 그때 본 기사는 불을 다루는 마법 계열로 유명한 영국의 에드워드 로거스와 나를 비교하며 그를 깎아내리는 기사였다. 그것도 에드워드 로거스의 자국, 영국에서 만들어진 기사였다.

「불로 만들어진 사자를 다루는 영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로거스의 능력은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일각에선 그가 자신의 소환수나 다름없는 불 사자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한국의 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단신으로, 그리고 최초로 하늘 조각을 공략한 한국의 전직자. 로거스는 겨우 사자 하나를 부린다. 류는 푸른 불로 만들어진 해일을 이끌고 다닌다. 로거스의 불은 뜨거우나 류의 불 앞에선 작은 불티 정도일 것이다.

에드워드 로거스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그의 소환수가 사자의 모습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만약 늑대나 코끼리의 모습이었다면 그가 이렇게 찬양받을 수 있었을까?」

그 뒤로 로거스 찬양하지 마요, 하는 글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며 참 쓸데없는 거 비교한다며 기억에서 지웠기 때문이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만. 개인적 원한으로 생각 없이 행동하는 인간을 내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었다. 다음에 또 덤비면 그때는 안 봐줄 거다.

“그럼 이제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와 강유진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직원이 조심스럽게 우리를 불렀다. 방에 가서 해외에서 내 이미지가 어떤지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긴장했담. 너무 빤히 쳐다보았는지 직원이 쩔쩔매는 것이 보여 결국 시선을 돌렸다. 정신없어 구경하지 못했던 호텔 내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고 화려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가 어우러지는 곳이었다.

승강기를 타고 복도를 걸으며 섬세한 장식들을 구경하다 보니 금세 우리에게 배정된 방 앞에 도착했다.

“이쪽 방을 쓰실 분은 누구신가요?”

직원의 물음에 문에 붙은 번호판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카드키 번호도 확인 안 했네. 뒤늦게 봉투를 들어 카드를 꺼내려는데, 그런 나보다 이호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예요.”

그의 손에 번호판과 같은 숫자가 새겨진 카드가 들려 있었다. 강유진이 운반 카트에서 까만 캐리어를 골라 그에게 내밀었다.

“심심하다고 공주님 찾아가지 말고.”

“…잘 거예요.”

강유진의 손에서 캐리어를 낚아채 가는 이호연의 얼굴에 옅은 붉은 기가 돌았다. 놀려 주고 싶었다.

“굿 나잇 키스?”

“류….”

내 말에 얼굴을 손으로 덮는 모습이 웃겨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잘 자. 내일 봐.”

“류도.”

뒤돌아서 먼저 걸어가는 강유진과 직원을 확인한 이호연이 내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눈을 깜박거리는 나를 보며 이호연이 눈을 휘며 웃었다.

“내일 봐요.”

“…응.”

간지러운 속내를 숨기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강유진의 뒤를 따라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나를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방은 한참을 걷고 난 다음에야 도착했다. 그 점이 이상해 직원에게 물어보려다가 제대로 답하기 전에 졸도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강유진에게 묻기로 했다.

“왜 이렇게 방을 멀리 잡은 거예요?”

내 말에 팔을 쭉쭉 뻗으며 기지개 켜던 강유진이 여상한 어조로 설명해 주었다.

“우리만 이런 게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전직자들 방이 다 멀리 떨어져 있어요.”

“싸움 날까 봐?”

“네. 괜히 복도에서 마주쳤다가 싸움 날까 봐 방을 멀리멀리 떨어트려 놓았죠.”

그게 가능한가? 아무리 국가당 세 명이라고 해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방을 떨어트려 놓으면 남는 방이 존재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런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강유진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보도된 건 전 세계 모든 국가의 대표자들이 모였다지만 실제로는 아니에요.”

“허위 보도예요?”

“그렇다기보단, 쓸데없는 사실을 숨긴 거죠. 자국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것을 원치 않아 하는 곳도 제법 있었거든요.”

“…….”

“특히 미국에 보내야 하는 전직자 외에는 특별한 전직자가 없는 나라에선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어요.”

“뺏길지도 모르니까?”

“뺏길지도 모르니까.”

세상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해도 당장 자국의 생태가 더 중요한 국가들도 있을 것이다. 자본으로 밀어붙이는 곳으로 소중한 전직자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

나라에서 막는다고 해서 전직자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도, 군대도, 전직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자꾸 쓸데없는 물건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령 이예린을 옭아맸던 계약서라든가.

“…….”

환한 샹들리에 빛 아래 내 그림자는 다른 이들의 그림자에 비해 새카맸다. 저 안에는 아직 그것이 들어 있었다. 차갑고, 시린 쇳덩이가.

내 몫의 하얀 캐리어를 운반 카트에서 꺼내 주며 강유진이 말했다.

“길드장님이 사고 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길드장님도 나도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아요.”

“취급 주의 좀 해 주세요. 순살 되겠네.”

“그냥 뉴스에 나오지 않을 정도만 사고 치세요.”

뉴스? 조건이 참 특이했다. 의문을 담아 그녀를 보니 강유진은 학생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포즈로 입을 열었다.

“뉴스, 기사, 그날의 검색어 1위 차지해서 댓글에 국뽕에 취한다, 류가 국가다, 이런 말만 나오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에요.”

“참 구체적인 조건이네요.”

“원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구경하는 사람은 즐겁지만 그거 뒷수습하는 사람은 죽어 나가거든요.”

그건 그렇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만족스럽게 보던 강유진이 손뼉을 짝 치며 내 시선을 끌었다.

“특히 에드워드 로거스. 그 사람이랑은 싸우지 마세요.”

“왜요?”

“옛날에 한번 류랑 비교당한 적도 있고, 좀 만만해 보여도 그 사람이 류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불 마법사라고 추정되는 사람이거든요.”

걔가? 하는 표정으로 강유진을 보았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강유진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옥상에서 좀 많이 발렸다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 알잖아요.”

그렇지. 그 유명한 불 사자는 보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그래 봤자다.

“그쪽에서 진심으로 덤벼도 안 지는데요.”

“알아요. 근데 불 마법 특성상 화려하고 이목을 집중시키잖아요.”

“아, 눈에 띄니까 싸우지 마라?”

“정답.”

옆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직원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강유진의 얼굴은 참 해맑기 그지없었다.

“에드워드 로거스는 잘생겨서 팬이 많거든요. 안티도 많고, 언론에서도 집중하죠. 류랑 싸움 나서 졌다는 사실만 하나 던져 줘도 아주 난리가 날 거예요.”

그리고 그걸 수습하는 건 주세진일 것이다. 나는 에드워드 로거스와 싸우게 된다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싸우겠다고 강유진 손에 손가락 걸고 약속한 뒤에야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그녀에게도 내가 싸우지 않는다는 가정은 없는 듯했다.

자신의 방을 찾아 떠나는 강유진을 손 흔들어 배웅한 나는 카드 키를 꺼내기 위해 봉투를 꺼냈다가 그 안에 든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카드가 두 개지?”

일단은 내 앞에 문과 똑같은 번호가 새겨진 카드를 꺼내 안으로 들어갔다. 최고급 호텔다운 내부에 감탄이 나왔다.

캐리어를 침대 옆에 세워 두고 푹신한 침대에 앉아 다른 카드 키를 꺼내 보았다. 새겨진 번호가 익숙했다. 이호연의 방 번호였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카드를 손안에서 빙빙 돌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호연이 카드 하나 가져갔고, 강유진이 세 개 가져갔고, 내가 봉투를 가져 왔고.

“…….”

강유진은 네 개를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닌가? 방 하나당 카드키 두 개니까, 이호연 거 하나, 내 거 하나, 본인 거 두 개를 가져가야 했다.

본인도 카드 키가 두 개라는 거 생각 안 했구나. 자기 빼고 사람 숫자 세는 것 같은 실수였다. 헛웃음을 지으며 이호연의 방 카드키를 침대에 올려 두었다.

내일 강유진에게 가져다주든가 해야지. 방에 도착해 방문 열 때쯤엔 강유진도 본인 실수를 알아챌 것이다.

답지 않게 오늘 하루 종일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그림자 속으로 넣으려다가 방에 놓여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흐릿한 수면 등의 빛을 잡아먹을 것 같은 짙은 색이었다.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방에 들어오면서 대충 보았던 방은 전체적으로 고급스럽고, 가을의 밀밭을 생각나게 하는 색 조합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불 끝자락에서 흔들리는 술 장식을 손으로 훑고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창밖 세상이 어두웠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만이 유일하게 이 어둠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커튼을 쳤다.

옷이나 갈아입자는 생각으로 캐리어를 열었다. 캐리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옷을 보며 나는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알아서 준비해 준다길래 그러려니 했더니. 손에 잡히는 옷의 질감이 부드러웠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새 옷이었다. 주세진에게 남들 옷 사 주는 취미가 있을지는 몰랐다.

“예쁘네.”

하나같이 예쁘고 신경 써서 골랐다는 티가 나는 옷이었다. 정말 안 그렇게 생겨서, 차가운 얼굴과 행동이 따로 노는 다정함이었다.

그중에서 부드러운 크림색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꺼내 침대에 올려놨다. 옷 구경은 나중에 하고 일단 씻고 잘 준비나 해야겠다.

갈아입을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저거 입어야 하나 했는데 저렇게 따로 옷을 준비해 준 걸 보며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부드러운 곡선형의 욕조 옆 선반에는 향초와 꽃, 그리고 배스 밤이 놓여 있었다. 파스텔 가루를 섞어 뭉쳐 놓은 배스 밤 중 하나를 집어 욕조에 넣었다.

뜨거운 김이 나던 욕조 안의 물이 색색으로 물들었다. 욕조 안에 손을 넣어 작은 붉은색 돌멩이를 꺼냈다. 용암 지대 생태계를 가진 하늘 조각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물 데우기 용도로 사용하기엔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선반에 놓여 있는 얼음초를 엮어 만든 받침대에 돌멩이를 올려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나름 긴장을 하긴 했었는지 뜨거운 물에 닿은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

저번 사태 이후로는 별문제 없이 나름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하늘 조각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길드 차원에서도 떨어지는 조각에 대한 공략을 서둘러 괴물이 게이트를 넘어올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다만….

“나비.”

욕실 안에 내 목소리가 울리다가 수증기와 함께 흩어졌다.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물살이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예린과 함께 들어갔던 하늘 조각에 대한 공략이 끝나고 나왔던 날. 우는 호랑이를 달래 주다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이호연은 인공적인 꽃향기가 난다고 했다.

꽃향기. 꽃과 나비. 라일락 향이 나고 그 색을 눈 안에 담은 남자. 얼굴에 나비를 새긴 남자.

“눈 마주쳤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인 걸까 그놈은. 신을 배반한 성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전직 명도 그렇고, 테오그라젠스는 사이비라고 읊조리던 말도 그렇고. 모든 비밀이 베일에 싸여 있는 자였다.

마주치기 싫다. 그런데 결국은 마주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푸른 불이고 그놈이 나비인 이상 우리는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참 지독하게도 얽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일으켰다. 뽀얀 수증기에 덮인 거울을 손으로 쭉 쓸어내렸다. 거울에 비친 내 눈은 빛 하나 통과시키지 않을 것 같은 암흑의 색이었다. 이호연의 눈은 먼지 낀 거울 같은 회색이었다.

그리고 그 나비의 눈은 하늘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새벽의 색. 싸울 때 가까이에서 본 결과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보라색에 하늘색이 잡아먹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과 머리카락 색은 자신의 전직관의 색깔을 따라간다. 오정인은 약간 붉은 기 도는 갈색이고 이예린은 병아리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이다. 그 나비처럼 덜 섞인 물감 같은 색이 아니라는 거다.

다시 수증기로 덮이는 거울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빙글빙글 움직였다. 달팽이 모양으로 거울이 선명해졌다. 다시 희뿌예지기를 기다리다 몸을 움직였다. 몸에서 단내가 났다.

“아, 맞다.”

두툼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 내며 맨발로 객실 안을 걷다가 문득 든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종아리에 닿을 듯 말 듯 한 기장의 잠옷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좋았다.

몸을 숙여 수면 등 때문에 만들어진 그림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몇 번 휘젓자 손안에 도톰하고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을 쭉 잡아당기니 하얀 목도리와 꼬마 도깨비 하나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꼬마 도깨비가 검은 가면이 흔들릴 정도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목도리를 개며 꼬마 도깨비에게 물었다.

“망가트리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던 거야?”

푹신한 침대 위에서 넘어진 꼬마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네. 나는 그런 꼬마 도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랑 말이 통하면 더 좋을 텐데.”

말이 안 통해도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가끔은 아쉽게 느껴졌다. 랑이 말한 내 성장이 어떤 의미의 성장인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랑에게 물어도 봤지만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부분에서 남의 손을 빌릴 생각은 하지 말라며 그는 단호히 말했다.

“우리 아이 한글 배우기도 중급까지밖에 못 하고.”

상급부터는 어려워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꼬마 도깨비에게 웃어 주고 다른 깨비들도 그림자 밖으로 불러들였다. 처음 와 보는 호텔이 신기한지 다들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바빠 보였다.

“내 말 상대해 주려고?”

유일하게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던 검은 가면의 꼬마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 위에 올려놓으니 털썩 앉아 자리를 잡는 것이 정말 내 말 상대를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너는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아?”

내 물음에 꼬마 도깨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였더라. 벌써 1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섣달 그믐날에 태어난 작은 아이. 손잡이 없는 기다란 검은 칼. 그 위에 푸른 불로 새겨지던 기이한 문자들. 피 한 방울, 문자를 더듬던 손에 선득하게 남던 감각. 내 무릎을 적시던 호수의 찬 물결.

검은 가면의 꼬마 도깨비의 본체는 손잡이 없는 검은 칼날이었다.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한다는 설화를 생각해 보면 엇비슷하면서도 더 위험스러운 탄생이었다.

다른 꼬마 도깨비들의 본체가 평범하게 비단 꽃, 향낭, 실과 바늘 같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 그랬다. 빗자루에 비하면 물론 평범은 아니지만,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얘뿐이었다.

한참을 나와 눈싸움 하던 꼬마 도깨비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제 친구들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을 보다 침대 위로 누웠다.

알 수 있는 것 하나 없었지만, 이거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는 것. 창 너머 하늘은 새카만 암흑인데 잠이 안 왔다. 분명 피곤했는데, 지금은 정신이 또렷했다.

“자고 있으려나.”

이호연은 비행기에서 계속 자서 잠 안 올 거 같은데. 침대 위에서 몸을 한 바퀴 구르며 일어났다. 수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젖은 머리카락에서 단내가 확 풍겼다.

“놀러 갈까?”

내 물음에 꼬마 도깨비들은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짓다가 침대에 던져두었던 카드 키를 집어 들었다. 폭신한 슬리퍼를 벗어 문 앞에 준비된 신발을 신었다.

생긴 건 플랫 슈즈인데 생각보다 편했다. 배웅해 주는 꼬마 도깨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방을 나왔다. 두툼한 카펫이 내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

이호연의 방까지 가는 데는 제법 오래 걸어야 했지만 그 사이에 마주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최대한 전직자들끼리 마주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카드 키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예의의 문제도 있어 문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금방 열릴 거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자나?”

아닌데. 문 너머에선 기척이 느껴졌다. 벨이 고장 났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카드 키를 보았다. 그래도 역시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가는 것은 좀 그랬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다시 벨을 눌러 보았다. 이번에도 안 열리면 그냥 방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았다는 듯 문이 열렸다.

내 몸에서 나는 것과 얼핏 비슷한 단내가 제일 먼저 느껴졌다.

“어….”

“류?”

씻고 있었구나. 하얀 머리카락 위에 비슷한 색깔에 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그 수건을 잡고 있는 손은 열기에 의해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뚝 떨어진 물방울이 목을 지나 쇄골을 훑고 그 아래로 떨어졌다. 그 물방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나는 이호연의 부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이 안 와서 놀러 온 거예요?”

“응….”

말을 흐리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그제야 자신의 차림이 어떤지 깨달았는지 머리의 물기를 털고 있던 수건으로 제 몸을 가렸다.

“잠깐만…. 그,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그래도 돼?”

“위에만 입으면 돼요.”

이호연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만큼 안으로 발을 옮겼다.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뻘쭘하게 서 있는 나를 지나쳐 침대 위에 올려져 있던 하얀 반팔 티를 주워 입은 이호연이 젖은 제 머리카락을 털며 약간 붉어진 낯으로 물었다.

“배 안 고파요?”

그의 손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에그 베네딕트, 그 외 간단한 요깃거리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호연은 비행기 안에서 자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영화 보면서 가끔가다 엿도 먹고, 약과도 먹고 로비에서 이호연이 준 마들렌도 먹어서 허기지지 않았던 거다.

이호연이 내게 샌드위치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한입 베어 물며 그를 보았다. 샌드위치를 먹는 손이 왼손이었다. 오른손으로는 컵에 주스를 따르고 있었다.

“…….”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바라보다가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런 내 행동에 이호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얼굴에 의아함이 담겼다.

“맛이 별로예요?”

“아니. 맛있어.”

테이블 앞 등받이 없는 소파에 앉아 옆을 두들겼다. 이호연은 별말 없이 내 옆에 앉았다. 샌드위치를 잡은 왼팔이 바로 내 옆에 있었다.

그 팔을 잡았다. 내 행동에 그의 움직임도 멈췄다.

“그때 생긴 흉터지?”

손끝에 우두투둘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목부터 시작해 팔꿈치까지. 팔을 가리는 긴 옷만 입어 볼 수 없었던 흔적이었다.

내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이 느껴졌다. 손을 뗐다. 잠시간 움직이지 않던 팔이 다시 움직였다. 먹던 샌드위치를 접시에 올려놓는 움직임을 따라 팔 위 흉터도 함께 움직였다.

모르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갑자기, 직접적으로 보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배고프잖아. 더 안 먹어?”

“나중에 먹어도 돼요.”

그리 말하며 나를 돌아보는 고갯짓을 따라 하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토독, 하고 떨어져 하얀 윗옷을 적시는 것을 보다 그가 소파에 올려놓은 수건을 잡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뒤쪽으로 걸어갔다. 의아함을 담아 나를 돌아보는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수건을 머리에 얹었다. 보들 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손길을 따라 수건에 헝클어졌다.

“류?”

“머리 안 말리면 감기 걸려.”

“류도 제대로 안 말렸잖아요.”

“쉿. 조용.”

“…….”

머리가 짧아서 그런가. 수건으로 몇 번 문질렀다고 금세 뽀송뽀송해졌다. 그것이 신기해 괜히 하얀 머리칼을 건드려 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원망 안 해?”

“…뭐를요?”

“나를.”

이호연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수건에 감긴 손으로 그런 그의 목을 꾹꾹 눌렀다.

“…제가 왜 원망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너, 봤잖아.”

“…….”

수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것에서 물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공기에 습기가 찬 것 같았다.

“네 팔. 그렇게 될 때까지 내가 보고만 있었던 거.”

우리 그때 눈 마주쳤잖아.

침묵이 무겁다. 물에 흠뻑 젖어 늘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을 아무 말 하지 않던 이호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맞추려 고개를 들까 하다가 들지 않았다. 하얀 윗옷에 시선을 두는 내게 이호연이 물었다.

“그때 일,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요?”

“그걸 끝냈다고 보기는 어렵잖아.”

그 상황에선 끝낼 수밖에 없었던 거였지.

우리의 첫 만남. 그날 이호연은 옆구리가 뜯어져 나갔고, 왼쪽 팔을 잘라야 할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죽음 바로 앞에까지 가게 한 상처였다.

“…….”

괴물 사이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그를 살린 것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이호연이 봤고, 나도 그를 보았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가끔가다 멈칫, 멈칫. 그때 일이 떠오를 때면 그를 보다가도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말하지 않고 묻어 두면 해결될까. 일단 난 그런 경우를 거의 못 봤다. 묻어 두고 모르쇠 하고 싶지도 않고. 침묵을 지키던 이호연의 입이 열렸다.

“…원망하냐고?”

“…….”

“다 알면서 왜 그런 걸 묻는데요?”

“너는 살았잖아.”

어찌 됐든, 내가 너를 살렸으니까. 너는 살았고 상처도 치료했다. 너는 살았다. 그래서 너와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왜 살렸어! 그냥 죽게 놔뒀어야지! 싫다고 했잖아!’

날카롭게 변한 손톱이 내 목을 스쳤다. 핏발 선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의 첫 대화를 떠올릴 때 함께 상기되는 것은 피 냄새와 엎어진 의료 물품에서 나던 소독약 냄새였다.

그리고 죽음을 원하던 사람과 그런 사람을 멋대로 살려 버린 사람 간의 적의, 원망. 서러운 슬픔.

피와 흙먼지가 얽히고 섞여 엉망이던 그곳.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이호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쳤고 도망치고 싶었으며, 그 도망의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눈이 마주쳤음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사람 굳이 살려 원망의 말을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살렸다.

피를 흘리는 입으로 싫다고 말하는 모습이, 하늘 조각으로 기어들어 가던 내가 생각나서였다. 나는 그때 정말 죽고 싶었나? 그렇다, 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다만, 그거 하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봤던 회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세상은 어두웠고, 붉은 불덩이는 그리 밝지 않은데.

그 어둠 속에서 회색 눈이 빛났다. 제 몸을 가르러 오는 괴물의 손톱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그래서 괴물의 목을 잘랐다.

나도 왜 그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금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 대신 그가 내게 알려 주기를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싶었던 것인지 죽고 싶었던 것인지.

어쨌든 우리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이호연은 내게 덤볐다. 나는 내 목을 조를 것처럼 굴면서도 정작 손에 힘을 주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피가 흘렀다. 피 냄새가, 지독했다.

바닥은 딱딱했고, 어설픈 텐트에 설치된 조명은 흐릿했다. 벌레가 날아들어 지저분해 보이기도 했다. 내 목을 잡은 손은, 그 상황에 맞지 않게 따뜻했다.

그 손을 잡고 싶어 손을 올렸다가 다시 힘을 뺐다. 그때 나는 조금 궁금했다. 과연 이호연이 손에 힘을 줄지.

곧이어 주세진을 비롯한 힐러들이 들어와 내게서 이호연을 떨어트렸다. 주세진에게 붙잡혀 끌러가면서도, 최소한의 처치를 해 놓은 상처가 다시 터지면서도 그 눈은 나를 향했다.

나는 그 눈을 보다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주세진이 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음에도 그는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그게, 생각보다 기억에 오래 남았다.

다시 만났을 때 이호연은 그때의 모습이 내 착각이라는 듯, 전혀 다른 태도로 내게 말했다.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때는 다친 지 얼마 안 돼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거짓말. 웃으면서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눈 만큼은 선명히 기억했다.

그 말을 하며 나를 보던 회색 눈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차가웠으며 할 수만 있다면 내 목을 뜯어 버릴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그와 대화하는 일은 없었다. 붉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날까지.

하지만 죽음조차 자유롭지 못한 위치에 서 있었던 이호연이 그나마 생겼던 기회를 뺏어 버린 나를 저 스스로 용서하고 없던 일로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호연은 천성이 마냥 착하지는 않으나 뭐가 옳은지 그른지는 알았다. 죽음을 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봤자 좋을 것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때 일을 묻었다.

자신들과 합류한 이후로 내가 짊어져야 했던 짐의 무게와 나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일을 알게 된 이후에는 나를 혼자 두지 못할 정도로 무른 구석이 있었다.

원망은 동질감으로 변했다. 그것의 이름이 죄책감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죄책감은 수치심이 되었다. 시간을 따라 감정이 변했다.

차가웠던 눈에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돌았고, 내 목을 조르던 손은 음식을 내밀었다. 내 목에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닌 약품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감정의 색이 붉음으로 변했다. 시간이 흘렀다. 감정이 변했다. 그렇게 이호연은 살았다. 죽음을 원했으나 억지로 살았고, 나중에는 그저 살아 있으니까 살았고, 결국은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 살아 있다.

“어차피 네 말 무시할 거, 더 빨리 무시할 걸 그랬어.”

그랬으면 힐러의 능력으로도 흉이 남는 상처 따위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그와의 관계가 행복하다가도 이런 옛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잠에서 강제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이야기 꺼내지 않는다고 그때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세진은 나와 이호연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호연은 내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호연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미움보다 늘어지고 끈적이는 감정이 죄책감이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회색 눈은 그때와 달랐다. 그와 나의 관계가 달랐다. 그래서 이제야 물어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때 일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를 원망해?”

“…그 질문이 어떤 생각으로부터 시작했는지를 모르겠어요. 구해 주기 위해 내 쪽으로 오던 류한테 싫다고 말한 건 나였어요.”

“…….”

“원망을 하려면 나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손을 뻗었다. 하얀 옷자락을 들췄다. 그런 내 행동에 잠시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이호연은 제지하지 않았다.

들춰진 하얀 옷자락 안에 또 다른 흉터가 보였다. 그 흉터를 보며 말했다.

“그때 정말 죽고 싶었어?”

“…….”

“거봐. 대답 못 하―.”

“그때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제 옷을 들춘 내 손을 잡았다. 왼손이었다.

“그때는, 죽고 싶었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아릿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회색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차피 살아 봤자 또 괴물 앞으로 밀쳐질 텐데. 또 나 혼자 죽어갈 텐데.”

“…….”

“굳이 살아서 그걸 또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깍지 낀 손이 움츠러들었다. 그의 손톱이 내 살을 긁어냈다. 내 손등에 붉은 자국을 남기는 제 손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약간의 원망을 담은 눈이 나를 보았다.

“왜 나보고는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하면서 원망하냐고 묻는 거예요?”

“그건….”

“원망하냐고?”

이호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비틀린 듯한 웃음이었다. 내 손을 놔주며 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얼굴은 무슨 생각을 담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동공이 가늘어졌다. 호랑이의 눈처럼 작게 축소되는 것이 아닌 뱀의 눈처럼 가느다란 동공이었다. 그 변화에 놀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내 반응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이호연이 비틀린 웃음마저 지우며 낯을 구겼다.

“죽으려고 했던 것도 나고, 죽게 해 달라고 했던 것도 나인데, 왜!”

“…….”

“왜 내가 원망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그러면 나는… 내가….”

왜냐고? 나는, 내가… 모르겠다.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우리는 내놓을 수가 없었다. 답도 모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잖아. 너는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고, 그래서 한 번쯤은 그때를 생각할 수 있고, 내 행동을 원망할 수도 있는 거잖아.”

“…….”

“네가 그랬잖아. 주세진은 원망한다고. 그거랑 이거랑 뭐가 그렇게 다른데?”

“누가 선택해서 결과를 맞게 되었는지가 다르죠.”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 멈췄다. 머뭇거리던 손이 떨어지려다가 다시 내 쪽으로 뻗어졌다.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내가 원망할 거라는 생각 말고, 왜 ‘잘 살고 있는지’는 생각 안 해 봤어요?”

“…….”

그 말을 하면서 그렇게 보면, 이미 답을 알려 주는 거잖아.

아, 주세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원망한다는 내 말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원망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나를 봤을 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슷하면서도 반대되었다. 이호연이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주세진에게 했던 말과 반대되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너를 살렸어.”

그건 속죄의 말 같기도 하고 나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 같기도 했다. 말하는 나조차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되뇌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살았고.”

이호연이 말했다. 음절 음절이 다정한 듯한데 내 속을 긁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피는 안 나도 붉어지는 정도로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고, 다시 만나고 싶어서 움직이고,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

“더 이상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야.”

내 옷소매를 잡은 손이 떨어졌다. 한 걸음. 이호연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베스 밤의 단내가 느껴졌다. 눈에 팔에 새겨진 흉터가 아롱거렸다.

“나를 죽인 것은 나였고, 나를 살린 것은 너면서, 원망하냐고 물으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숨 같은 말이었다. 그의 말을 더듬으며 나는 자그마한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서.”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너를 네 말 하나 듣고 죽게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떨쳐 낼 수가 없어서. 자신을 살린 것이 나라고 하지만 내가 아니었어도 이호연은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충분히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실을 이호연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 하나 때문에 산다는 듯이 말한다.

말일 뿐일지라도 그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나비와 내가 지독하게 얽혔다고 생각했다. 푸른 불꽃과 나비, 운명. 하지만 정말 지독하게 얽히는 관계는 이런 거였다. 미안한데 좋아하는 거. 원망하는데 사랑하는 거. 거기에 죄책감까지 얽혀드는 것.

함께하면 안 되는 것들끼리 얽히면, 그 결과가 좋을 수 있을까. 손톱 옆에 또 염증이 났나 보다. 부푼 상처를 짓눌렀다.

그런 내 손끝을 보며 이호연이 말했다.

“미안하다고 할 거면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해.”

“…….”

“나한테는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본인은 그러는 거예요? 가끔 보면… 스스로 상처 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아.”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상처 주고 싶었다. 나를. 언제부터 이랬는지 모르는 꽤 옛날부터. 그래서 버릇이 됐나 보다.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 충동을 참고 손을 뻗었다. 저에게 향하는 손을 이호연은 낚아챘다. 그 손에 깍지를 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내 움직임을 따라 그는 내 쪽으로 움직였다. 도망가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헛숨과 함께 애써 그 생각을 삼켰다.

“…원망 안 해?”

“조금도.”

단 한 번도.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잡아먹을 듯이 구는 이호연을 받아들이면서 생각했다. 그도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걸까.

입술을 맞부딪히는 행위는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피에 가깝게 느껴졌다.

가끔가다 우리는 자꾸만 이런 심각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 이유가 우리의 대화 부족인지, 그냥 다른 객체의 사람이기에 일어나는 일들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서로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일까. 다양한 감정이 얽힌 것치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짧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하게 된 것은 더 짧았다.

과거에 풀지 못한 것들은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 얘기를 할 때면 둘 중 하나는 격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 당시의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인지, 그때의 자신을 놓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집중해 줘요.”

“…….”

“나만 봐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내 입술 위를 훑는 손이 노골적이었다. 자꾸만 주춤거리는 나 때문에 인내심이 줄어든 것인지 분위기가 더 위험스러워졌다.

침대에 다리가 걸렸다. 비틀거리는 나를 잡아 침대 위에 앉혀 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나를 내려다보던 이호연이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 맞추며 그가 말했다.

“류는 몰라요.”

“…뭐를?”

숨이 막혔다. 도주에 지친 사람처럼.

“내가 얼마나 당신한테 미쳤는지.”

“아….”

아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물렸다. 이렇게까지 세게 물려 본 것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살짝 피 맺힌 내 손목을 보던 이호연이 피를 핥았다.

유난히 새빨간 혀가 하얀 손목 위에서 더 선명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핥아 주는 것과는 달랐다.

“그러니까 원망하냐는 그런 이상한 소리만 하지.”

“그건….”

“못된 말 할 거면 그냥 하지 마.”

또, 물었어…. 그나마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살짝이었다. 저가 물어 놓고 달래듯 핥는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끝이 났다.

“…도망가지 말아요.”

손에 잡히는 시트가 마구 구겨졌다.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눈을 피했다. 애써 다른 주제를 입에 담았다.

“…너, 은근히 무는 거에 집착하는 거 알아?”

“…….”

실컷 물고 나서 그런지 아까보다 분위기가 온유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노골적인 내 주제 전환에 그는 맞장구쳐 주었다.

“류도 자주 물잖아요.”

그런가. 그래도 나는 피 날 정도로는 안 물었는데. 이호연에게 잇자국 남은 손을 흔들거리니 그가 시선을 피했다.

“나름 참은 거예요.”

“…뭐를?”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내 다리를 잡아 제 다리 위에 올렸다. 다리의 위치가 높아짐에 따라 치맛단이 허벅지 쪽으로 조금 밀려났다. 드러난 내 무릎에 키스하며 이호연이 물었다.

“안 도망갈 거예요?”

“…말하지 마.”

이호연의 눈이 휘었다. 지금 말한 도망과 좀 전의 도망이 다른 의미임을 알지만 두 질문 모두 답할 수가 없었다.

회피하고 싶어 하는 나를 두고 그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지금까지 봤던 눈웃음 중에 가장 유해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잡아 내 쪽을 보게 하면서 그가 끊어 버린 생각을 이어서 했다.

그 당시의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인지, 그때의 자신을 놓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그도 아니면.

참 지독하게 얽혀서든가.

물린 손이 꽤나 얼얼했다. 그 손을 멀거니 보고 있으려니 다른 손이 그것을 방해했다. 슬쩍 옆을 흘겨보니 멋쩍은 얼굴로 웃고 있는 이호연이 누워 있었다.

“친구네 강아지도 이렇게까지 나를 물지는 않았는데.”

“…….”

이호연의 손에서 내 손을 쏙 빼 버렸다. 그런 나를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허리에 감기는 손을 꼬집으며 말했다.

“호랑이로나 변해.”

“류….”

“나랑 같이 누워도 되는 건 호랑이야.”

내 요구에 이호연은 흐린 낯을 했다. 그러고선 침대 무너진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그런 그를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고 마주 앉았다.

“문 건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안 물 거야?”

“…살살 물게요.”

그래. 기대도 안 했다. 물기가 남아 차가운 내 머리카락을 손에 감으며 장난치던 이호연이 내 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역시 상처 입는 것에 대해선 일반인과 똑같은 거죠?”

“네가 무는 건 일반인하고 무는 거랑 강도가 달라.”

“돌에 쓸렸을 때도 다쳤잖아요.”

용이랑 싸우는 높이에서 떨어져도 생채기만 생기고 끝난 이호연 입장에선 물었다고 상처 나는 것이 신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맷집 자체는 일반인이랑 다를 게 없지. 일단은 난 마법 계열이지 신체 계열이 아니니까.”

체력, 근력, 민첩은 이호연 외에는 져 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신체 자체는 평범하게 튼튼한 일반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맷집이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고 해도 나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다치는 것도 힘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맷집 끝내주는 탱커들인 신체 계열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내 질문에 이호연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내 시선은 언제나 한곳으로 향하거든요.”

“…….”

“다치지 말아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간질거리는 속내를 숨기고 이불만 그러쥐었다. 이호연 너머 창의 색깔이 바뀌었다. 밤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우리가 시차 적응 망했다는 건 알겠다.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한 이호연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여기 형이 있었으면 혼났을 거예요.”

“주세진한테 걸리기도 전에 강유진 씨한테 걸릴 수도 있지.”

“형한테 걸리는 것보단 나을걸요? 안 혼내거든요.”

전에 뭐 하나 걸려 봤나 보다.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를 들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던 이호연을 다시 눕혔다. 내 손짓 따라 순순히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 반항의 의지 따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지금 자 봤자 얼마 자지도 못하는데 대화나 할까?”

“대화요?”

“응. 우리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 같은 거 별로 없었잖아.”

내가 기억 못 하는 과거에선 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했던 대화라고 해 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내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던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요?”

“그렇게 본격적으로 물으니까 잘 모르겠잖아. 그냥 아무거나 물어봐. 가족 관계나, 나이나, 생일, 혈액형. 뭐 그런 사소한 것도 괜찮고.”

말하다 보니 막상 그 사소한 것에 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호연 또한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조금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제 있어요? 나는 외동인데.”

“나도 외동이야. 부모님 중에 누굴 더 닮았어?”

“아버지요. 류는… 두 분 다 골고루 닮은 것 같아요.”

부모님과 이호연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늘 조각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날 안전 구역에서도 봤고, 강유진의 신나는 카트라이더 체험기 전에도 봤었다.

“내가 두 분 다 닮은 것 같아?”

“외모는 아버지 쪽을 닮았는데, 전체적인 인상은 어머니 쪽을 닮았어요.”

“우리 아빠, 미인이지?”

내 말에 이호연이 낮게 웃었다.

“미인이시던데요. 류랑 닮았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미인이라고 하는 것 같네. 침대 위에서 몸을 빙글 돌려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손에 턱을 괴고 이호연을 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라. 젊은 시절의 아빠 같다고.”

내 말에 이호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겉모습만 보면 이호연과 아빠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미인인 것은 같았지만 이호연은 육식계 미남 같은 스타일이고 아빠는 예민한 느낌의 섬세한 미인이었다.

엄마는 처음 만났을 때의 아빠가 귀하게 자라 예민할 것 같은 느낌의 예쁜 연구원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연구원이 팬이라고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꼬셔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이 얘기를 고스란히 이호연에게 해 주자 그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어떤 점에서 아빠와 같다고 하는지 대충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머니의 팬이셨다고요?”

“응. 엄마가 전직 하키 선수였거든. 아빠는 회사 복지 차원에서 경기를 보러 갔다가 엄마한테 반했고.”

“아, 하키….”

묘해진 그의 낯을 보며 말했다.

“너 지금, 하키라는 점에서 나 생각했지.”

“…싸울 때 무기 들고 싸우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요.”

들린다. 랑의 한탄 소리가. 그래도 요새는 때리는 것보다 마법 사용할 때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아, 마법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구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짧게 가지고 이호연에게 말했다.

“류는 나름 마법 지팡이야.”

“류?”

“아, 무기 이름이 류야.”

“닉네임이랑 같네요?”

“동음이의어야. 거기서 따오기도 했는데, 내 이름에서 따온 거기도 하거든.”

내 성인 유(柳), 그리고 무기의 이름인 류(流). 같은 류이기는 했지만 나름 뜻이 달랐다. 그러고 보니 랑이 항상 앉아 있는 호숫가 근처의 나무가 버들나무네.

“…….”

우연이겠지, 뭐. 잠깐 들었던 기시감을 지우고 이호연에게 웃는 낯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물을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눈앞에 있는데요.”

훅 치고 들어온다. 불쌍한 베개를 때리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거짓말. 우리가 처음 봤을 때 네가 23살 끝자락이었는데 어떻게 첫사랑 한번이 없어?”

“재밌는 인생을 살지는 않았거든요.”

“그 흔한 유치원 선생님이 좋았어요, 이런 것도 없어?”

“어린이집 나왔어요.”

말 돌리긴. 자신을 흘겨보는 내 시선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첫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숨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이호연이 물었다.

“류는 연애 몇 번 해 봤어요?”

“우리 과거는 추억으로 묻어 둘까?”

이번에는 흘겨보는 사람과 대상이 바뀌었다. 나는 그런 이호연을 보며 작게 웃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베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 마. 이렇게 물고 빨고, 깨물기까지 하는 연애는 네가 처음이니까.”

“…정말요?”

“어, 정말. 애초에 너 이전에 연애는 모두 내가 미성년자일 때였어.”

난 나름 성실한 학생이어서 연애하면서도 공부에 집중했었다. 물론 상대에게 성의 없이 굴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가차 없는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지금보다 더 유교적이었던 것 같다. 못된 손은 허용 안 해 줬다. 허용해 주는 지금은….

저번 이호연의 집에 갔을 때 생각했던 의문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이호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 이호연이 눈을 깜박였다.

“성인이 돼서 하는 첫 연애는 너야.”

성인이 되자마자 하늘이 무너졌고, 어느 정도 안정기를 맞이했을 때는 사람에게 질린 상태였다. 대학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제대로 다닌 것은 1학기뿐.

친구도 제대로 안 사귀었던 그 당시에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그 결과 이호연이 성인이 돼서 하게 된 첫 연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성인이 돼서 하는 첫 연애인데도 그렇게 성인의 연애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호연 씨?”

은근히 기회 안 놓치고, 스킨쉽 좋아하고, 오히려 잡아먹을 듯이 구는 것은 이호연이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선을 지켰다. 물어보기 뭐해서 안 물었던 것이 호기심이라는 이름으로 빼꼼 튀어나왔다.

내 질문을 들은 이호연은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았는지 곧바로 내 시선을 피했다. 집요하게 바라보니 금세 입을 여는 짧은 회피였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바닷가, 리블 사옥 기숙사, 네 방, 그리고 아까.”

모른다고 하기엔 그럴뻔한 적이 꽤나 많았다. 제 뺨을 콕콕 찌르며 재촉하는 내 손길에 결국 이호연이 항복했다. 뺨이 붉었다.

“분위기에 넘어가서 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분위기가 아니면?”

“…….”

나를 흘겨보는 시선에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던 이호연이 내 손 하나를 끌고 가 앙, 하고 물었다. 아까 물렸던 곳 바로 위였다.

아프지 않게 물었지만 왜 또 무나 싶어 그를 멀거니 바라보니 이호연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준비가 안 돼서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위험스러운 분위기에 슬쩍 손을 빼내었다. 그런 내 손을 보는 진득한 시선은 이호연이 가볍게 웃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 그의 등 뒤로 푸른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마치 푸른 바다의 안광이 창을 통해 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광 아래 흐리게 빛나는 회색 눈이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 숨었다가, 드러났다. 달빛에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이 눈부셨다. 부서지는 빛무리처럼 우리의 대화는 가벼웠다.

“…이런 대화 할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이호연 너머, 창 너머의 바다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생각이 튀어나왔다. 내 말을 들었음에도 이호연은 답하지 않았다.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놓고 바르게 누웠다.

“옛날 일을 얘기할 때도 아무렇지 않을 날이 올까?”

이번에는 답을 바라고 물었다. 내 뺨을 스치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올 거예요.”

눈을 떴다. 내 바로 앞에서 하얀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얼굴을 간질이는 그것을 눈에 담았다. 손으로 헤집었다.

“둘 중 하나는 격해지는 것 같아.”

얼굴에 잔키스를 하던 행동이 멈췄다. 괜히 말했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순간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호연에게서 나온 말은 다정하고, 장난스러웠다.

“류가 이상한 말만 안 하면 안 격해질 자신 있는데.”

“너, 은근히 성격 나빠.”

“류한테 배웠어요.”

할 말 없게 만드네. 삐쭉거리는 내 입에 이호연이 짧게 입 맞추는 것을 보다가 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첫인상은 어땠어?”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거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아니야?”

내 물음에 이호연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았다. 바다의 푸른빛을 살그머니 뺏어 온 회색 눈으로.

“…지금은?”

“내 인생을 기어이 구원했지만…나를 미치게 만드는 사람.”

커튼이 흔들렸다. 창은 닫혀 있을 텐데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와 뺨을 간질였다. 그 바람을 느끼다 눈을 감았다. 귓가에 호랑이가 옛이야기 들려주듯 조심스레 속삭였다.

“잘 자요.”

밤이 가야 오는 새벽에 어스름한 푸른빛에 퐁당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눈에 황금 모래를 뿌려 주는 요정이 왔다 간 것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깜빡, 선잠이 들었다가 혼몽해진 정신으로 눈을 떴다. 푸른빛이 잔상을 남겼다.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 주는 손길이 자상했다.

“욕심… 부… 면… 도망….”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 귓가로 내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눈이 감긴다. 이마에 작은 온기가 스쳐 지나갔다.

“좋은 꿈 꿔요.”

쉿. 조용히. 스쳐 가는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 같은 말을 끝으로 나는 아득한 어둠과 같은 꿈속 여행을 떠났다.

한밤중의 밀회가 끝났다.

***

“그렇게 보는 거, 범죄인 거 알아?”

남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기이하게 조각난 보랏빛 보석을 쑤셔 넣은 것 같은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조용히 해.”

그의 말에 남자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말을 한다. 그것은 울음에 긁혀진 목소리였다.

“버릇없이 말하지 마. 네 엄마가 널 그렇게 키웠냐? 아, 너 엄마 없지.”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런 그의 손을 남자가 짓밟았다. 남자의 발아래 자신의 손을 보며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일로 일을 키울 수는 없었다.

그는 익숙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둘리 엄마가 브라키오사우루스인 건 알아? 엄마 없는 건 너겠지, 민폐 자식아.”

남자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빛을 품은 물이 피어올랐다. 남자의 다리가 산성에 녹듯 일그러졌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소용없는 짓거리라는 것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정도가 적정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 손을 짓밟은 발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난 뒤 그는 손을 흔들어 물의 흔적을 없앴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남자는 그의 행동에 별다른 말 하지 않았다. 성깔 있네. 그 한마디로 자신의 다리를 녹인 행위를 간단히 정의 내렸다.

“그나저나 이걸 어째? 공주님은 이미 짝이 있는 것 같은데.”

“상관없어.”

우리의 운명은 겨우 저런 호랑이 하나 때문에 끊어질 종류가 아니니까. 가장 질기고, 지독하고,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게 얽혀 있는 게 우리니까.

“가끔 보면 넌 너무 저 공주님한테 집착하는 것 같아. 너처럼 불행해지기라도 바라는 거야?”

“…아니, 별로 그렇지는 않아.”

집착이 아니야. 불행해지길 원하는 것도 아니야. 아, 이건 아닌가. 아주 조금 바라는 것도 같고.

하지만 내가 공주님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이유는….

“꽃이잖아. 나는 나비고.”

“불꽃도 꽃이면 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이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가까이 다가가면 불타오를 나비.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달려들게 만드는 게 푸른 불꽃이었다. 달려들고 싶게 그를 충동질했다.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다. 닿을 수 없는 위치였다.

그의 헛짓거리를 지켜보던 남자가 그의 쪽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내 말이나 잊지 말고 전해. 신데렐라 찾았다.”

“공주님이 싫어할 말이네.”

“왜? 신데렐라도 공주 아니야?”

“신데렐라는 귀족 딸이야.”

그리고, 그 공주님은 왕자님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고. 왜 안 오냐고 찾아갈 사람이지.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손가락이 맞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물의 나비들이 반짝이는 조각을 품에 안고 바다로 퐁당퐁당 사라졌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은 바다의 물결만이 아니었다.

…한밤중의 밀회가 끝났다.

***

“세 시간만 더 잘래요….”

“단위가 분이 아니라 시간이네요.”

강유진의 말을 들으며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졸려….

“지금 자면 이따 잠 못 자요. 시차 적응하게 어서 일어나요.”

“현대인의 피로를 무시하지 마세요. 지금 자도 이따 또 잘 수 있어요.”

“말 참 안 들어.”

강유진이 뭐라 하든 나른한 졸음기가 가시질 않았다. 주세진이 준비해 준 잠옷은 보들거렸고, 침대는 푹신했으며, 이불 속이 너무 따듯했다. 그리고 밖은 추웠다. 이불 밖은 위험해.

“호연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

그 말에 그제야 눈을 떠 이불 밖으로 눈을 내밀어 보았다. 비슷하긴 하지만 이곳은 내게 지정된 객실이었다. 새벽에 이호연이 이곳으로 옮겨 놨었나 보다.

그럼 강유진한테는 안 걸린 건가?

“밤에 놀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 아니네.

“어떻게 알았어요?”

“카드키 하나 부족할 때부터 예상했고, 호연이가 자진 반납했을 때 알게 됐죠.”

“그렇구나아-.”

뭉그적거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 찔렸기 때문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는 나를 보며 강유진이 말했다.

“아직 도착 안 한 국가들도 있어서 며칠 동안은 자유롭게 행동해도 돼요. 하지만 웬만하면 호텔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추천할게요.”

“벗어나면 총살이에요?”

“총 맞는다고 죽어요?”

“맞기 전에 쏜 사람이 죽겠죠.”

내 말에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국의 전직자들이 나서서 제지하려나.

나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이미 다 대피한 뒤일 텐데, 뭐 구경한다고 나가겠는가.

“호텔 안에서 장비 입어야 해요?”

“파이터 정신이 충만하지만 않으면 안 입어도 돼요.”

강유진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드디어 침대에서 벗어났다. 침대가 넓어서 그런지 열 깨비 전부가 올라와 있는데도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 대신 도롱이 벌레 놀이를 하는 꼬마 도깨비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다가 캐리어 속에서 옷을 꺼냈다.

소매에 끈 리본이 달린 예쁜 바이올렛 색의 윗옷과 하얀 롱 스커트였다. 그것을 보다 고개를 기울이며 강유진에게 물었다.

“주세진 씨 취향일까요, 이 옷?”

“아, 그건 제가 고른 거예요. 길드장님 취향은 그 밑에 있는 거.”

둘이 같이 가서 샀구나. 주세진의 취향은 단정한 검정 투피스였다. 옷을 챙겨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는 아직 졸음이 가득했다.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며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에 감싸 꾹꾹 누르며 강유진에게 말했다.

“이호연한테 들어와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커다란 하얀 구름을 들고 뭔가를 하고 있던 강유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에 있던 구름을 한 움큼 떼어 내 문 쪽으로 보냈다. 구름은 문을 그대로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신기하네요.”

“구름 전서 처음 봐요?”

“옛날에 유니콘 구름은 본 적 있어요.”

대단했고, 내가 받았으면 쪽팔렸을 것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귀찮은데 그냥 불로 말릴까 고민을 하는데 이호연이 방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

따뜻하게 입었네. 아이보리 색 목 폴라 니트가 잘 어울렸다. 손에 쥐고 있던 구름 조각을 강유진에게 돌려준 이호연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머리 말려 줄까요?”

이호연이 내게 말하며 옆에 앉았다. 그런 그에게 들고 있던 수건을 넘기고 몸을 옆으로 틀어 앉았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어설픈 솜씨에 웃음이 나왔다. 작게 키득거리는 내게 이호연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못 해서.”

“…류도 못 해요.”

어젯밤에 머리를 말려 줄 때 나 또한 어설펐나 보다. 우리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누구 머리를 말려 주거나 해 본 적이 없으니 둘 다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호텔 안이나 둘러보자는 내 말에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진은 할 일이 있다면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돌아다니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로거스는 마주치지 마세요.”

“저도 만나기 싫은데요.”

“그래도 영국에선 인기 참 많은데, 류한테는 취급이 별로네요.”

“인기 많아요?”

“잘생겼잖아요.”

잘생겼던가. 그랬던 것도 같고. 행동이 먼저 생각나지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나저나 에드워드라니,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옛날 이름 아닌가.

“에드워드 로거스는 능력으로도 유명하지만 얼굴로도 유명하거든요. 이름이랑 외모랑 잘 어울린다고요.”

“이름?”

“뱀파이어 나오는 소설 있잖아요. 주인공이랑 이름도 똑같고, 외모 묘사가 비슷하다고 한참 말 나왔었는데.”

“아, 그 책.”

에드워드란 이름만큼이나 제법 옛날에 나왔던 소설이었다. 중학교 때 도서관에 꽂혀 있던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가 영어 원문이 끝내준다고 알려 줬었는데.

잠시 생각난 옛 기억을 더듬다 강유진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미국 측에서도 전직자들끼리 못 만나게 하려고 방을 멀리 잡아 놓았고, 마음먹고 찾아가려고 해도 이 넓은 호텔 안에서 사람 찾는 것도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어지간히 운 나쁘지 않은 이상 안 만나겠지.

구름 속을 더듬던 강유진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나와 이호연에게 내밀었다.

“그럼 나가기 전에 이거 받아요.”

“통역 반지네요?”

옛날에 한번 커넥터 홈 쇼핑에서 봤던 물건이다. ‘토익 공부가 힘든가요? 이 반지 하나면 당신의 걱정은 끝!’. 당연하게도 이 반지 끼고 토익 시험장에 들어가면 탈락이었다.

나름 구하기 힘든 재료에 만들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어 수요는 많지만, 공급은 없는 물건이었다.

“둘 다 영어 못한다는 소리에 길드장님이 구한 물건이에요.”

강유진이 건네준 반지를 이호연과 나눠 끼웠다. 디자인이 같아 뭔가 커플링을 낀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하필이면 위치도 왼손 약지였다. 이참에 그냥 커플링으로 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심플한 은색 링 위에 작게 세공된 하얀 보석이 빛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뻤지만 저 하얀 보석의 정체를 아는 입장에선 영 께름칙한 물건이기도 했다.

소지와 약지에 나란히 끼워진 반지를 보다가 이호연의 손을 잡고 방을 나왔다. 그런 우리의 뒤에서 손 흔들며 싸우지 마세요, 하는 강유진에게 다시 한번 알겠다고 답했다.

호텔 로비로 내려와 안내 책자를 훑어보다가 곧바로 에드워도 로거스를 만날 줄 알았다면 알겠다고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두울 때 봤을 때는 몰랐는데 그의 금발은 붉은 염료 한 방울을 떨어트린 것처럼 묘한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머리색 예쁘네.

에드워드 로거스의 얼굴은 긴장을 지우지 못한 낯이었다. 그런 그를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한 대 때리면 안 되겠지?”

내 말에 이호연은 곧바로 내 손을 잡았고 에드워드 로거스는 몸을 움찔거리며 세 걸음 정도 물러났다. 통역 반지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저쪽에서도 알아듣는 듯했다.

“에디. 싸우면 안 돼.”

에드워드 로거스의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영국의 전직자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손목에 하얀 보석이 달린 얇은 은팔찌가 보였다.

인제 보니 저쪽도 통역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어제 옥상에서 너무 말이 없다 싶었다. 말 안 통해서 생긴 실수였다는 핑계로 조용히 넘어가려고 한 듯싶었다.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한 여자가 잽싸게 제 손을 뒤로 숨겼다.

“노는 게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에디 데리고 얼른 가면 넘어가 줄게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자가 에드워드 로거스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나마 이쪽은 말이 통하는 듯싶었다.

“오스틴, 이거 놔!”

에드워드 로거스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름 반항을 했지만 평범한 마법사가 한 나라의 대표로 선정된 신체 계열 전직자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투닥거리는 그들을 바라보다 이호연에게 말했다.

“호텔에 돌아다니는 동안 웬만하면 다른 전직자랑 안 마주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 이렇게 줄줄이 만나는 거 보면.”

이렇게 만나기가 쉬우면 굳이 방을 멀리 떨어트릴 필요도 없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 말을 들은 에드워드 로거스, 페이즐리 오스틴이 행동을 멈췄다.

그런 그들을 보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기척을 감지하는 것에 있어 짐승의 감 수준인 이호연 또한 알고 있었는지 그의 얼굴에는 동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의 난간을 잡으며 내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진한 갈색 머리에 햇빛에 그을린 얼굴, 웃는 것 같은 가는 눈. 기이할 정도로 기척을 죽이는 재주와 철의 단면을 가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느낌의 불을 다루는 자.

“또 보네요. 이번에도 싸움을 말리려고요?”

내 질문을 들은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가느다란 눈이 더 가늘어졌다.

“싸울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힐끔 옆을 돌아보니 페이즐리 오스틴이 에드워드 로거스를 놔주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대표 앞에서 싸울 정도로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듯했다.

노는 게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에디보다 신경 쓰이는 쪽은 역시 저 남자였다. 에드워드 로거스는 인성은 모르겠으나 실력만큼은 한 나라의 대표로 뽑힐 정도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나는 마법 계열의 끝판왕이라고 평가받는 마법사가 주변에 있었다. 마법사들의 육감. 이예린은 직업 특성상 평범한 마법사적 육감도 예언에 가까웠다.

평범한 마법사 김수혁 또한 마법사답게 육감이 뛰어났다. 그럼 평범한 마법사지만 한 나라의 대표로 뽑힐 정도의 실력자인 마법사 에드워드 로거스의 육감은?

숨어서 구경하는 저 남자를 알아차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둘 중 하나다. 에드워드 로거스의 마법사의 육감이 영 별로거나 하나의 능력이라고 생각되는 마법사의 육감을 무시할 정도로 저 남자가 기척을 죽이는 데 재주가 있거나.

우리의 바로 앞까지 내려온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의 이름은 바타르. 몽골의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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