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불과 불 (13/34)

나만 장르가 달라 3권

#불과 불

쾅!!

신경질적인 소음에 과자를 집어 먹던 꼬마 도깨비 하나가 폴짝 뛰었다. 떨어트린 과자를 다시 쥐여 주며 책상 위로 고개를 묻은 주세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처음 보는 격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나는 절대 정치하지 말아야지. 정치는 할 짓이 못 되는 것 같았다.

매사 평정심의 아이콘이던 주세진마저 함락시킨 정치의 세계란. 상대가 방심하기를 기다리는 독사들의 모임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미국이 주최한 모임 관련으로 정신없던 주세진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치사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이호연의 집에 놀러 간 날, 전직자 관리 정부 기관에 대한 여론이 너무 빠르게 묻혔다는 것을 느꼈다. 미국의 모임이 그 전의 이슈를 밀어내는 핫이슈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쏟아부을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남의 일인 미국 모임보다는 당장 나의 일인 전직자 관리 본부가 더 중요했다. 그런데 너무 빨리 묻혔다. 누군가 의도한 것처럼.

나는 곧바로 주세진에게 그것을 알렸고 미국행 준비 때문에 과부하 되어 있던 주세진은 결국 고장 나 버렸다.

“미국 모임에 대해 순순히 넘어갈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어.”

머리를 쓸며 말하는 주세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웃지 못했다. 저렇게까지 때려치우고 싶다는 얼굴은 처음 보았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설마 주세진을 미국에 보낸 사이에 전직자 정부 관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버리려고 했을 줄이야.

한국의 가장 커다란 길드의 주인이자 지옥도 당시 전직자들의 머리 역할을 했던 사람의 상징성이란 지금도 유효했다. 만약 정부와 주세진이 각기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 전직자들은 주세진의 말을 들을 확률이 높았다.

그건 함께 전선에 서서 싸우던 총사령관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비슷했다. 그런 만큼 주세진의 반대를 정부 측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판국이었고, 결국은 이런 치사한 수를 쓰게 된 것이다.

초코 나라 부정 선거만큼 치사한 수단이다. 초콜릿 과자를 얌 하고 무는 꼬마 도깨비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미국에 가서 세상의 비밀에 대해 듣는 것, 혹은 한국에 생길 전직자 관리 정부 기관에 대한 통제.

주세진이라는 브레이크 없는 상태로 정부 기관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관리가 아닌 병기 제작소 같은 것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정부에 속한 사람들 중에 전직자는 없었다.

그들에게 전직자란 사람이 아닌 무기. 통제해야 할 살인마 혹은 예비 살인마일 뿐이었다. 관리와 통제. 겉으로만 전직자를 사람 취급하는 이들이 어떻게 관리와 통제를 할지 눈에 훤했다.

눈 사이를 꾹꾹 누르며 주세진이 말했다.

“알아서 해 볼 테니까 나가서 놀아.”

“…….”

지금은 그럴 말할 때가 아닌데. 답지 않게 바보 같은 고집이면서 가장 그다운 고집이었다.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세진이 정부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의 상징성 덕분일 뿐 그에게 실질적인 권력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쪽에서 마음먹고 밀어붙일 경우 물론 주세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감수할 수도 있었다.

한국 유일한 지휘 계열. 혹시나 모를 일에 대한 대비책. 지옥도가 다시 한번 펼쳐진다면 전직자들을 통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그렇기에 주세진에게는 권력이 있는 거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하지만 저쪽에서도 이미 반쯤은 마음먹은 것 같고. 사실 이 상황에 주세진이 미국에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힘들었다. ‘보호자’는 미국 측에서 반드시 함께 보내라고 한 당부사항이었다.

피로한 낯을 한 주세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꼭 저렇게 군다. 혼자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런 그의 모습은 손톱 옆 거스러미처럼 영 거슬렸다. 이호연과 했던 대화가 떠올라 더 그런 것 같았다.

꼬마 도깨비가 파맛 과자를 집어 던졌다. 그것을 잡아 다시 그릇 안에 넣었다. 시야에 커넥터가 들어왔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던 나는 주세진에게 물었다.

“둘 중 더 중요한 일이 뭐예요?”

“…….”

“아, 말이 좀 잘못됐다. 둘 중 더 자리를 지켜야 하는 쪽은 어디예요?”

짓궂은 질문이었다. 미국과 한국. 전자는 나와 이호연이며 후자는 우리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다. 지옥도 당시와 연관 지어 본다면 전선에 나와 이호연을 세울지 다른 사람들을 세울지 물어보는 것과 같았다.

주세진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의도가 명확한 내 질문에 그의 낯이 굳었다. 비꼬는 거냐고 화라도 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주세진은 화내지 않았다.

피가 맺힌 엄지손톱 옆을 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약간, 귓속이 뜨겁고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런 방식으로 건드는 것은 나 스스로도 거북했다. 싫어하진 않지만, 오히려 좋아하지만 원망하는 상대에게 가끔 알 수 없는 화풀이를 하게 되는 악순환.

이런 잔재를 발견할 때면 하늘이 무너지고 괴물이 득실거리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감정이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우리 한번 쉽게 생각해 볼까요?”

손톱 옆 거스러미가 일어나는 자리는 쉽게 붓고 염증이 나곤 했다. 나는 그 아픔을 즐기는 사람처럼 툭 하면 거스러미를 손으로 뜯고 부은 자리를 손톱으로 찍어 눌렀다.

얕은 아픔으로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지옥도에서 버티려고 의도적으로 했던 행동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멀리서도 연락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세진을 향해 커넥터를 흔들거렸다. 그것을 본 주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똑똑하면 뭐 하나,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니 이런 쉬운 편법도 생각하지 못하는데. 보호자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 역할은 주세진 외에 맡을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는 지원자도 없었을 것이다. 정부 측에서 손을 써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무서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원하지 않은 의외의 사람 중에 보호자 역할을 맡을 만한 사람이 나름 있기는 했다.

실시간으로 연락할 수 있고, 똑똑하고, 어느 정도 나에게 뭐라 말할 수 있는 사람. 보호자의 조건을 가진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말이다. 그것도 주세진의 편인.

“강유진 씨가 보호자를 하면 되죠.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네요.”

웃음기 어린 내 말에 조금 전 미묘했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의도적으로 그 분위기를 없앤 내 의도를 읽었는지 주세진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은근히. 주세진도 회피를 즐긴다. 나는 그냥 웃었다. 주세진이 할 수 있는 것은 내 장단에 맞추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의 행동이 오히려 나를 자극한다는 것을 모르니 저러는 거다.

“강유진 씨가 보호자 한다고 하면 정부 측도 뭐라 못 할 거예요. 누가 뭐래도 강유진 씨는 커넥터 제작자잖아요. 같은 길드라는 점에서도 나름 통제하겠구나 싶을 테고.”

“그렇지…. 그런데, 강유진 씨가 싸우지 말라고 말리면 들을 거야?”

그게 제일 중요하구나?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았지만 주세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와중에 그 부분을 놓치지 않는구나 싶었다. 중요한 내용인 건 맞지만.

못마땅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툭하면 싸우는 사람은 아닌데요.”

“거기 가서도 안 그렇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

―건 그렇다. 주세진에게 들은 바로는 놀랍게도 우리 애는 안 싸울 거예요, 라고 확신한 국가가 단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 포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상대가 시비 걸면 웃으며 넘겨줄 의향이 있었다. 있기는 한데…. 있나?

“세 번은 참을게요.”

못 믿는 얼굴이었다. 주세진이 머리를 헤집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일이 빨리 끝나면 그쪽으로 넘어가든가 할게. 사고는… 국제적 문제가 될 정도로만 치지 말고 있어.”

빨리 끝나는 게 불가능할 텐데. 생각한 것을 숨기고 그에게 물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데요?”

“한 나라의 대표로 선별된 전직자를 죽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상태로 만드는 정도.”

확실히 그 정도면 국가 문제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일이 있으려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못 믿는 눈치였다.

“…….”

“…….”

할 말이 끝나니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웃는 낯을 버렸다. 굳이 웃고 있을 이유가 있나 싶은 반항적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치 보던 과자 털이범들이 슬그머니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나도 주세진도 그런 꼬마들의 모습을 눈에 담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것 같았다.

이제는 뜯을 거스러미 하나가 남아 있지를 않았다. 오른손을 쭉 펴 내 눈앞에 펼쳐 보았다. 간간이 피 묻은 손가락들이 보였다.

그것을 보니 또다시 충동이 들었다. 마구 소리 질러 버리고 싶은 그런 충동을, 피가 나는 상처를 꾹 눌러 함께 잠재웠다.

아픔이 주는 고통은 되레 흥분하는 속내를 진정시키고는 했다. 작은 고통과 만들어 낸 차분함은 닮은 구석이 있어서 그런 듯했다.

실바람처럼 가느다란 숨을 내쉬다가 입을 열었다.

“나 할 말 있어요.”

소리 지르는 것을 누르니, 다른 충동이 툭 튀어나왔다. 그것을 찍어 누를 상처가 부족했다. 이번 충동은 그때의 서러움을 닮아 있었다.

서러움. 그 단어를 더듬어 보았다. 한 단어에 집중하면 그 단어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단어의 뜻이 헷갈리고, 어지럽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단어를 갖다 붙인다.

나의 서러움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서러운 마음을 슬쩍 품고 그에게 말했다. 설움은 짧게. 너무 길면 내가 우니까.

“본론만 간단하게 말하면, 원망해요.”

손을 움켜쥐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이 거세된 사람처럼 무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 얼굴에 주세진은 입을 달싹이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주어와 목적어를 붙여서 말해 봐.”

그렇게 묻는 그의 모습은 내가 내 손을 괴롭히는 것과 비슷했다. 일부러 상처를 내는 그런 행동. 정확히 말하고 들어 봤자 가장 상처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뻔한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충동적으로 말을 했다. 핑계는 주세진이다. 그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비겁하고 치사했다.

“내가 주세진 씨를 원망해요.”

“…….”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놀람이 아니었다. 때가 와서 받아들인다는 수긍에 더 가까웠다. 그 담담함에 오히려 내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염증난 상처를 짓뭉개면, 그 아릿함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차라리 너무 아파 기절이라도 하면 좋겠다.

주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게 물었다.

“뭐라도 마실래?”

“…코코아 마실래요.”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장단을 맞췄다. 그러기로 미리 합의 본 사람들 같았다.

방 안에서 씁쓸한 커피 특유의 향과 코코아의 단내가 섞여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내 손에 쥐여 준 주세진이 내 앞에 앉았다. 컵을 깨고 도망치고 싶었다.

뜨거운 잔에 손을 뭉개는 것으로 그 감정을 짓누르고 그에게 물었다.

“안 놀라네요?”

놀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모르겠다. 커피잔에 가려진 그의 입매가 어떨지 보고 싶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어지러운 감정을 뚫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니까. 너도, 그리고 호연이도.”

알고 있었다는 말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이호연이 극단적인 예시를 들 때까지 내 감정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상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불편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으니 기다렸을 뿐이야.”

“왜요?”

“날 원망하는지 아닌지도 제대로 구별 못 하는 어린애한테 이 얘기를 꺼내 봤자 원망 안 한다며 넘겨 버리려고 할 테니까.”

내 얘기지, 저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호연에게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왜 내가 먼저 찾아오기 전까지 주세진이 나를 찾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주세진을 만나러 가는 순간에도 나는 원망하면 안 된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나보다 남이 내 감정을 더 잘 알았다. 그럼 지금도 알까.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찻잔을 매만지다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뭐라고 더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시작을 안 하는 게 더 좋았나? 하지만.

“그렇다고 말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시간이 흐른 뒤 그 당시의 얘기를 꺼내며 탓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비꼬고, 상처 주는 말로 매도할지도 모른다. 나도 몰랐던 원망의 응어리를 끄집어내면서.

어쩌면 반대로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그 원망조차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 잊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다만 지금이 그때가 아니었을 뿐이다. 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주세진에게 느꼈던 감정을 알았다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지 않았을 것이다.

침묵이 갑갑하다. 뭐라 말해야 할까. 뭘 해야 할까.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풀어내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그를 용서라도 해야 하나? 그래야 내 속은 풀리나? 그렇게 쉽게?

용서는 나를 위한 행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말 그런다고 내 마음이 편해지는지는 모르겠다. 그게 된다면 이렇게 말의 형태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이 말 몇 마디로 정리되는 거였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다채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계 초침 소리가 울린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열기로 가득했던 찻잔은 식어 간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사과받고 싶나? 그렇다기엔 주세진의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과 받는다면 불편함만 더 느낄 것 같았다. 그가 사과한다면 나는 용서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고도 끝맺지 못한 감정을 껴안고 낑낑거릴 거다.

그럼 그냥 용서하고 싶은 건가? 어떤 부분에서 사과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용서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을 하고 싶어서, 뭘 원해서 이 이야기를 했을까.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냥 그랬으니까, 그냥….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으니까.

주세진을 마주 보는 자리가 이렇게까지 불편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달그락거리며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들어 보니 테이블 위에 찻잔을 올려놓은 주세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 말이나 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내 바람을 따르듯 그의 입이 열렸다.

“여동생이 있었어.”

“…….”

“그냥, 아무 얘기나 해야 할 것 같아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대화였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과 시간. 나는 주세진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알지? 모른다.

왜 전직했는지, 왜 그렇게 뭐든 다 책임지려고 하는지. 왜 지옥을 끝내고 싶어 했는지 조차도. 식어 버린 찻물 같은 옛이야기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옛날이야기는 식은 차와 비슷했다. 식은 차가 마시기 쉬운 것처럼, 옛날이야기는 어딘가 쉽게 끄집어낼 수가 있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쉽지만 굳이. 굳이 라는 거다.

굳이 식은 차를 마시지 않는 것처럼. 옛이야기는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어. 내가 그때 열아홉이었으니까…. 내가 스무 살 됐을 때 태어났을 거야.”

많이 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태어났을 거야’. 그 말이 걸렸다. 그런 내 생각이 티가 났는지 주세진이 흐린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거든. 친동생이 아니야. 실제로 같이 산 건 2년 정도고.”

“…이런 거 말해 줘도 되는 거예요?”

“상관없어. 이미 다 끝난 이야기니까.”

끝났다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지 2년 뒤에 연락이 왔어. 돌아가셨거든.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외도 상대를 보았지. 그때가 한겨울이었고, 검은 상복은 임산부에겐 추웠어. 어머니는 내게 동정하지 말라 했지만, 겉옷을 내밀었던 건 동정은 아니었어.”

“…그럼요?”

“…그때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은 몰라. 아버지의 외도 상대라고 하기엔 너무 젊고 예쁜 게 이상했고, 굳이 다 큰 아들이 있는 유부남을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만 기억해. 실제로 죽은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도 그리 슬퍼 보이지는 않았어. 두 사람 간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었겠지.”

“…….”

손에 들고 있던 코코아가 식어 뜨뜻미지근해졌다. 옛이야기를 하는 주세진의 표정과 어조 같은 온기였다. 그것을 내려놓았다.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했고 그 이후에는 어머니와도 거의 만나지 않았어. 원래부터가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뒤론 대학을 다니다가 변호사가 되고, 그냥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가….”

“…동생을 만났어요?”

“응…. 4년 전에 그 사람이 나를 찾아왔거든. 어린 여자애를 데리고. 초등학교 1학년 어린애는 정말 작더라. 그 애는 몸이 안 좋아서 특히 작았어.”

“…만난 이후로 같이 지냈어요?”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 병원비 때문인지, 지쳤던 건지. 얘기를 나누다가 잠시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카페를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어. 나도 그 애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 그 애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해서 혼자 못 두겠더라고, 그래서 함께 살았어. 그러다 하늘이 무너졌고….”

“…….”

주세진한테 동생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처음 들었다. 2년 동안 함께 살았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던 당시 그의 동생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몸이 약한 아이. 그 아이의 끝이 어땠을지 예상이 갔다. 너무 쉬워서, 거북했다.

“내가 전직을 한 건, 내 동생이 죽고 난 다음이었어. 그 애가 특별한 이유로 죽은 건 아니야. 그저 음식이 없었고, 물이 없었고, 제대로 된 쉴 곳이 없었어. 그래서… 그냥 그래서였어.”

“…묻어 줬어요?”

“…전직하지 않으면 온전히 묻어 줄 수 있는 곳도 없더라고. 내가 전직한 것도, 그렇게 특별한 이유는 아니야.”

아, 알겠다. 이 사람은, 눈앞에 이 사람은 전직할 생각이 없었다. 괴물들에게서 살아남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동생을 묻어 줄 작은 땅이 필요해서 전직한 거였다.

“이헤른, 내 전직관이 자신의 공간에 동생을 묻어 줘도 된다고 했거든. 그래서 전직했어. 그래서, 빠르게 지옥도를 끝내고 싶었어. 빠르게…. 맞아. 그것만 생각했어.”

죽은 사람을 묻어 주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은 시신을 따로 챙기지 못해 장례도 치를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던 날에 대한 기획 방송을 보면 내레이션으로 그때의 상황을 말한다. 그 한 줄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자면 그렇게 평이한 어조로 할 말이 아니었다. 그 한 줄에 사람이 살고 죽었다.

“…….”

이제 됐다. 이 이상 무엇을 더 말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지옥도 그 세 글자가 만들어 낸 세상의 생존자였다. 우리의 감정조차 결국은 살았기에 가질 수 있는 잔재였다.

내 감정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리 서러워도 결국은 살았으니 투정일 뿐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모르겠다. 내 원망이 그렇게 특별난 건지도.

입을 열면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뭘 바라고 원망한다는 말을 했을까. 뭘 안다고. 주세진은 그런 내 속내도 모르고 제 탓만 했다.

“뭐라 말하든 변명이야. 결국은 내 욕심에 널 앞으로 밀었던 거니까.”

“됐어요.”

“머릿속에 그려지는 전략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 말고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그만해요.”

“내가―.”

“됐다고 했잖아!”

소리를 질렀음에도 속이 거북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던 거다. 이래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던 거다. 원망한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싫었다. 나도 똑같이 했을 거니까.

원망한다. 이해한다. 이해의 이름은 동질감이다. 나도 그랬을 거니까. 다만 그리했던 게 주세진이기에 그에게 원망이라는 감정을 가졌다. 치사하게.

“내가 그쪽을 원망하는 게 남 탓하는 거로만 느껴져요.”

“내 탓이 맞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나도 똑같이 했을 거라는 걸 알아서, 원망한다고 한 것 자체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고요.”

비난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좋을 텐데.

“내가 너고, 네가 나였다면 나도 너처럼 생각했을 거야. 그러니까….”

비난 한번을 안 하다. 내 옆으로 걸어와 앉은 그가 등을 툭툭 두들겼다.

“울지 마.”

“안 울어!”

빽 소리친 내 말에 주세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려진 시야로도 그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괜히 얄미워 그의 검은 구두를 꾹 밟아 주었다.

가끔은 말하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사실 해결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드는 착각이다. 다시 저 깊은 곳으로 묻어 두고 옛이야기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최선임을 알았다. 그것 말고는,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의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더 나중에. 오늘 끄집어낸 감정들이 조금 더 퇴색되면 그때는 이 감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잠시 멈춘 것에 만족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

푸른 불을 일으켜 손에 난 자잘한 상처들을 없앴다. 이렇게 해 봤자 시간이 지나면 다시 피가 나고 염증이 날 것을 알았다. 그 상처의 주범이 나라는 것도.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비행기를 꼭 타야 할까?”

“?”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국 일정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 위해 모여 있던 주세진과 강유진도 의아함을 담아 나를 보았다.

“가는 데만 10시간…. 왕복 20시간이잖아요.”

“비행기 말고 이동할 방법이 있어?”

주세진의 물음에 답을 한 것은 이호연이었다.

“그림자로 이동하게요?”

“음….”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 땅끝 마을까지는 이동 가능했는데 한국에서 미국까지는 안 될 것 같았다. 거리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일단 정확한 위치가 가늠되지 않았다.

“나 말고 있잖아. 공간 이동의 천재.”

“정인이 말하는 거예요?”

강유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보니까 얍! 얍! 하니까 순식간에 이동되던데, 나는 기대감을 갖고 주세진을 보았다.

그러나 주세진 포함 나머지 둘도 떨떠름하거나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주세진이 서류 뭉치를 강유진에게 넘기며 내 의문에 대한 답을 말해 주었다.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질지 모르는데 괜찮아?”

“네?”

“걔 길치야. 그리고 방향치.”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오정인이지.”

“??”

놀리는 건가? 내가 자신의 말을 영 믿지 못하는 눈치라는 것을 알았는지 주세진이 여상한 낯으로 말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본인한테 가서 물어보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공간 이동 능력자가 길치, 방향치라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나? 주세진이 차례로 나와 이호연을 가리켰다.

“너희, 영어 할 줄 알아?”

“…….”

중요한 거 맞네.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말했다.

“…저 수능 영어 마지막으로 공부한 거 2년 전인데요.”

“수능 영어로 회화 안 돼. 회화 되는지를 묻는 거야.”

“학교에서 하는 듣기 평가에 나오는 대화문도 회화 맞죠?”

“…호연이는?”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호연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나, 토익 마지막으로 공부한 거 군대 가기 전이야….”

거의 3, 4년 전이다. 다시 내게로 향하는 시선에 나는 눈을 피했다.

“토익은….”

“1학년 때 토익 공부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나 대학 1학기밖에 안 다녔어요. 토익 공부할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나, 영어 안 좋아해. 성실하게 공부 안 한 학생들을 보며 주세진이 머리를 짚었다. 그 옆에서 강유진이 희망차게 말했다.

“전 영어 가능해요!”

“그야 그렇겠죠.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 근데 예의 바른 영어 아닌데 괜찮아요?”

“…영어에 예의 바르고 아닌 것도 있습니까?”

“제가 상류층 스타일로 배운 게 아니라서…. 좀 거친 스타일이거든요.”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F가 많이 들어가는 그런 회화. 주세진도 대충 나와 비슷한 걸 생각하는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말이 통하면 괜찮지 않나?

“그럼, 일단 그걸 구할까요?”

강유진의 물음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가 싶었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거기 가서 엿 먹어 영어로 하면 어떻게 돼요?”

“하지 마.”

단호했다. 원래 외국어는 욕부터 배우는 거라던데.

얼추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주세진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이만 나가도 된다고 했다.

“아. 호연이는 잠깐 더 있다가 가. 할 얘기 있어.”

눈을 꾹꾹 누르며 주세진이 말했다. 며칠 새에 눈 밑이 더 까매진 것 같았다. 손을 흔드는 이호연에게 마주 흔들어 주고 아쉬운 티를 숨길 생각이 없는 강유진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보면 강유진도 주세진을 참 좋아한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강유진에게 물었다.

“외국에서 살았어요?”

내 질문에 강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보통 욕을 자유자재로 섞어서 말한다는 건 거기 살았다는 뜻이잖아요. 길드장님 말도 그렇고.”

주세진은 강유진이 영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내 말에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쇄골 부근에서 흔들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 안에 들어가며 강유진이 말했다.

“몇 년 외국에서 살았어요. 그쪽에서 일도 했고.”

“무슨 일 했는데요?”

“해커요.”

“…네?”

해커? 발랄한 비글처럼 웃는 낯으로 강유진이 다시 한번 내게 강조했다.

“해커.”

안 어울리는데… 어울렸다. 강유진이라는 사람의 전직자로서 특징은 정보 수집, 조작, 그리고 유포였다. 전직 명은 천공의 정보상. 닉네임은 ‘나는야정보통신사’ 지만.

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전직자로서의 능력은 비전투 계열 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능력이었다. 사람 하나 여론몰이로 골로 보내기 딱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해커였다는 점이 어울리기도 하고.

띵, 하고 도착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제 머리를 배배 꼬며 강유진이 말했다.

“신기하죠? 원래 직업도 해커였는데 전직도 그거랑 비슷한 직업을 얻었다는 거.”

“적성에 잘 맞았을 것 같기는 해요.”

내 말에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 누가 직업 적성 검사해서 맞춤 직업 소개해 준 줄 알았다니까요.”

만약 나한테 강유진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딱히 할 게 없네.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보면 직업이 사람을 잘 찾아갔다.

“그런데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항상 발랄하기만 하던 그녀의 낯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물음에 강유진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적절한 설명에는 적절한 예시가 필요하죠.”

뜬금없는 말을 하며 강유진은 닫혀 있는 방 쪽으로 걸어가며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니 강유진이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방 안에는 오정인이 멍한 얼굴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커다랗게 펼쳐진 여러 개의 지도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정인이는 길치에 방향치.”

그거 진짜인가? 그럼 지금 하는 수업은….

“지금 지도 외우기 하는 거예요?”

“그것도 있고. 지역별 랜드마크 외우기가 이 수업의 주목적이에요. 정인이는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이동할 수 있거든요.”

랜드마크…. 주사위 던지며 땅따먹기하는 놀이가 생각나는 언어 선택이었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인천 부근을 가리키며 오정인에게 물었다.

“자, 여기는 인천 중 어디?”

“어…. 서구?”

“랜드마크로는 뭐가 있죠?”

“…아파트?”

길치와 방향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실수로 살짝 건든 문에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쯤 정신 놓은 것 같은 얼굴로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오정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 데리고 가요!”

“…….”

무척이나 간절한 얼굴이었다.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가며 결심했다. 미국 갈 때 비행기 타야겠다고. 바다 위에선 나도 곤란했다.

앞에 펼쳐진 지도와 오정인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보다 말했다.

“맞히면 책임지고 데리고 갈게요. 회사 근처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이 어디 있는지 설명해 봐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오정인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 그…, 저기, 그 신호등 옆에?”

“주변에 있는 상가 이름은?”

“상가 이름을 다 보고 다녀요?”

“…….”

랜드마크 외우기를 왜 하는지 알겠네. 그녀에게 공간 이동 능력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고민하는 오정인을 구경하고 있는데 강유진이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눈치챘어요?”

“뭐를요?”

“내가 아까 말했잖아요. 직업 적성 검사한 것처럼 딱 맞게 전직했다고요.”

“…….”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인제 보니 그 말이 영 틀린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오정인이 지나가는 말로 자신의 전직 과정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지옥도 당시 괴물에게 쫓겨 도망 다니다가 길을 잃어 안전 구역으로 돌아가지 못할 때, 히든 게이트를 발견했다고 했다.

인제 보니 길을 잃었다기보다는 길치 방향치라 돌아가지 못한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직업상의 특징에 대한 적성이 각각 잘 맞아떨어졌다.

전직 해커였던 정보상. 길치에게 꼭 필요한 능력일 공간 이동 능력. 그러고 보면 힐러 남매인 손민호, 손민경도 지옥도 이전에 의대생이었다고 했었다.

“우연이에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요즘에라는 건….”

“나가서 얘기해요.”

자기 두고 가지 말라며 손을 뻗는 오정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방을 나왔다. 복도에 오늘따라 사람이 없었다. 그 한적한 적막을 깨며 강유진이 말했다.

“제가 나름 연구원이어서 이것저것 연구하거든요. 최근에 하게 된 연구의 시발점은 상호였어요.”

“박상호요?”

“상호는 탐색자로 전직했죠. 보물찾기 하다가 히든 게이트를 찾은 것도 이상한데, 직업 특성이 너무 상황에 잘 맞아떨어지지 않아요?”

그 능력 갖추고 겨우 보물찾기 하는 데 쓰지는 않았겠지만, 타이밍이 오정인처럼 맞아떨어지긴 했다. 길을 잃었더니 공간 이동 능력을 얻고, 보물찾기 하다가 탐색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뭘 알아낸 거예요?”

“전직이라는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서요. 전직의 종류가 세 가지라는 건 알고 있죠?”

강유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진 장소에 언제나 존재하는 전직관들에게 가서 전직하면 그것은 일반 전직. 그 상태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깨달아 재전직하면 그것은 일반 상위 호환 전직으로 구별되었다.

그리고 전직관이 있는 공간으로 갈 수 있는 하늘 조각 찾기부터 필요한 것이 히든 전직이었다. 이 세 가지의 전직 형태는 전직 명에서부터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일반 전직자는 마법사, 검사, 힐러 같은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상위 호환의 경우 그 앞에 수식어가 붙는 형식이었다. 김수혁이 ‘화염의’ 마법사인 것처럼.

그리고 히든 전직자의 경우 전직 명 자체가 고유 명사처럼 딱 하나씩만 존재했다. 도깨비 공주, 마지막 호랑이, 전장의 머리와 천공의 정보상처럼 말이다.

이는 해당 전직관들의 별칭으로 그들이 그렇게 불리었기에 이어지는 것이라 했다. 나 같은 경우는 예외지만.

전직관이란 하늘 조각의 괴물과 같은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전직관이라는 존재가 알려진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누구나 전직이 가능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직관들이 사람들을 평가하고, 전직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어요.”

“…잘 알죠.”

직접 세 번이나 거절당한 전적이 있는데. 그때 신체 계열 전직관이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장르가 안 맞는다고 했었다. 그 뒤로 진짜 남들 서양 판타지 찍을 때 혼자 동양 판타지 찍게 됐지만 당시에는 어이가 없었다.

나름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체 계열이 가장 자신 있었다. 전직하지 않았을 당시에도….

내 몸 하나 건사라기보단 남의 몸 건사하기에 가깝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만큼 몸 쓰는 건 잘했다. 재능 없다고 거절당할 줄은 몰랐지. 옛일을 더듬는 내게 강유진이 물었다.

“거절당해 봤어요?”

“…네.”

“신체 계열 전직자에게요?”

“아뇨. 치유 계열, 마법 계열, 신체 계열, 전부 다.”

웃픈 이야기였다. 설마 셋 전부에게 거절당한 줄은 몰랐는지 강유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나마 대표적인 전직관만 찾아가서 셋이지 비전투 계열 전직관들까지 하나하나 다 찾아다녔으면 거절 횟수는 더 많았을 것이다.

비전투 계열 전직자의 경우 보기 드문 만큼 지옥도 당시 굳이 찾아갈 일도 없었겠지만, 아마 그들도 같은 이유로 나를 거절하지 않았을까 어림짐작되었다.

“?”

나는 나름 가볍게 이야기 한 것인데 강유진의 얼굴을 여전히 굳어 있었다. 해커나 연구원이라는 직업에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내 말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라도 있었던 건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게임을 하다 보면, 마력이 높으면 마법사가 되고 힘이 좋으면 전사가 되잖아요.”

“그렇죠?”

“우리는 전직할 때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전직 명이라는 것도 받죠. 게임처럼요. 전직도 게임처럼 패턴이 있는 게 아닐까요?”

“패턴?”

그게 그녀가 알아냈다는 건가? 우연이 반복되면 하나의 규칙이 되고 규칙의 반복은 패턴이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직의 과정이 패턴이라고 부를 정도로 규칙적인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서정은만 봐도, 그 언니가 신체 계열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적응을 잘한 것 같지도 않고. 전형적인 시대에 떠밀린 희생양에 가까웠다.

히든 전직까지는 규칙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반 전직까지 합쳐 생각해 보면 단순 우연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애초에 마법 계열은 무슨 재능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고.

강유진은 제 입가를 톡톡 치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게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화면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전직관들의 인성을 고발한다고 올라온 영상이요.”

“?”

걔네 인성 고발한다고 누가 해결해 주지는 않을 텐데. 어그로 영상인가 싶은 마음으로 이걸 보여 준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재생된 영상에선 전직관이 전직하러 온 남자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영상을 보는 것을 확인한 강유진이 영상의 소리를 키웠다. 그것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나는 천천히, 낯을 굳혔다.

전직관은 전직하러 온 이를 평가한다. 좋다. 나쁘지 않다. 나쁘다. 그리고 나쁘다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모두 전직시켜 주었다. 그런데 지금 영상 속 전직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거,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변형 게이트 연결 현상과 이상한 시스템 메시지. 괴물들이 더 강해진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예요.”

“…….”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요. 갈수록 전직하는 것에 대해서 전직관들이 까다로워지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하고 싶다면 다 시켜 주었고, 하늘이 아닌 조각 쪽에서 괴물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평가하기 시작했죠.”

“괴물이 강해지니까, 이젠 평가하는 것이 아닌 선택하는 것이 되었고요?”

돌아보지 않아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식이 달라졌다. 영상 속에선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 뒤 전직관들이 자격 있는 이들을 골라내듯 몇 명만을 골라 전직시켜 주고 있었다.

지옥도 당시 괴물이 변화를 맞이했을 때, 사람들이 더 고생했던 이유는 전직관들도 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나 막 시켜 주던 전직에 제약이 생겼다. 싸울 사람 수가 줄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열 명 중 하나 나올까 말까. 많은 사람이 전직관 앞을 오고 갔지만 선택받아 전직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영상에서 눈을 못 떼는 나를 보며 강유진이 말했다.

“전에는 급한 마음에 물량 공세 하듯 아무나 전직시켜 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뭔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전쟁을 준비하며 무기를 개발하는 것처럼요.”

“…….”

“꼭, 게임에서 일정 능력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전직하지 못하는 구조 같지 않아요?”

급할 때는 화살받이라도 시키기 위해 아무나 끌고 와 전선에 세운다. 준비할 시간이 있고 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생각이 제대로 박힌 장수라면 화살받이라는 존재가 거슬리기만 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대미지 1주는 100명보다 100의 대미지를 주는 하나가 나았다. 사람들을 골라내는 전직관들의 행위가 후자를 찾는 행위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의 확대 해석일까.

랑이 말했다. 괴물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짧게 본다면 전직관들의 행동은 우리를 더한 지옥으로 몰아넣는 거지만 멀리 본다면 최소한의 수로 최대 효율을 뽑는 것에 가까웠다.

다만 그것이 정말 우리를 위한 행동인지는 모르겠다. 영상을 다시 재생하며 강유진에게 물었다.

“그럼 히든 전직은요? 거기에도 규칙이 있나요?”

“게임에도 히든 직업이 있어요. 특정 조건을 맞춰야만 얻을 수 있죠. 나는 천공의 정보상으로 전직하는 조건이 해커랑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길드장님은 정신력과 관련된 것 같고, 정인이는 알 테고.”

“히든 전직을 하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할 거라는 뜻이에요?”

단순 능력치뿐만 아니라 특정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게 현실이라는 거였지만.

알 수 없는 볼쾌함에 낯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강유진이 설명했다.

“난 일단 그렇다고 생각 중이에요. 재능 문제이거나, 특정한 상황이 필요하거나… 그도 아니면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능력을 줄 수 있는 전직관이라든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오정인은 전직하며 더 이상 길 잃을 걱정이 없어졌다. 이나연은 이제 괴물의 앞에 설 때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주세진은 가장 빠르게 지옥도를 끝낼 수 있도록 사람들을 통솔하는 능력을 얻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류랑 호연이는 알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이 특정한 재능이 있거나 행위를 한 것 같지는 않고. 전직자로서의 능력 중 간절히 원하는 능력이랄 것도….”

“없죠.”

그럼, 나와 이호연은 무슨 조건을 만족시킨 거지? 이호연의 경우 애당초 전직의 방식부터가 이상했다. 저 홀로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 하늘 조각 안으로 납치되었다.

나 같은 경우엔 강유진의 말처럼 조건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랑, 도깨비들의 왕과 내가 무슨 관련이 있을 리가 없었다.

푸른 불을 일으키는 도깨비처럼 강하고 싶었나, 하면 아니다. 한밤중 그림자에 스며드는 귀신처럼 안전하고 싶었나 싶으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그 당시 가장 바라던 것은, 사실 없었다. 그냥 살아 있으니까 안 죽고 버티던 거였지, 그렇게 간절하다 싶을 만큼 바란 것이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랑의 히든 게이트를 찾게 된 거지?

강유진의 가설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걸리는 것 또한 따로 있었다. 전직의 조건은 재능, 혹은 어떠한 간절함. 일반 전직의 경우 이중 하나만 충족하면 되었다.

서정은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지만 그녀도 통과한 신체 계열 전직관의 재능 검사에 내가 떨어진 것이 영 걸렸다. 그때 전직관 또한 내게 말했다. 재능은 충분하다고. 하지만 거절. 이유는 장르가 다르다.

그 장르라는 게 단순히 서양 현판, 동양 현판처럼 장난스러운 생각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 정말로 다르다는 것을 돌려 말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도깨비들의 왕, 비형랑의 정체에 대해 말하는 것을 테오그라젠스는 제약을 두었다. 애초에 들리지 않도록. 그럼 그 장르가 다르다는 말이 어떠한 것을 돌려 말한 메시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내가 남들과 다른 것이 있다는.

고민하는 나를 보며 강유진이 입을 열었다.

“류. 나는 공주님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고 있어요. 내가 묻고 싶은 게 뭔지 알죠?”

강유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모르는 것을 답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강유진이 말을 이었다.

“타고난 전투 센스가 좋고, 마법을 다루는 데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상상력과 통제력에 관한 부분도 뛰어난 당신이 일반 NPC나 다름없는 전직관들에게 거절당한 것부터가 이상해요.”

강유진의 말을 들으며 나 또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거절마저 어쩌면 내가 랑에게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지 마.

랑을 믿지 말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다. 내가 그에게로 향했던 길이 만들어진 길처럼 느껴졌다. 그건… 별로 깨닫고 싶지 않은 가설이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로, 일반 전직 쪽으로는 재능이 없었던 것일 가능성은요?”

굳은 낯의 나를 보며 강유진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전설의 검사로 전직 가능한 사람이 일반 검사로 전직 못 할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당신의 재능을 거절할 신체 계열 전직관은 없어야만 했어요.”

“…….”

나 스스로도 의심했으면서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의뭉스럽게 웃는 내 전직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랑이 나를 전직시켜 줄 때가 생각났다. 그날 괴물에게서 도망치던 내 앞에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던 것이 정말 우연이 아니었다면. 그는 왜 나를 선택한 걸까.

손에 긁어낼 거스러미가 없어 속에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것을 다 뜯어 버리고 싶다.

“나는 내 정보력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처럼 편애에 가까운 전직관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남들과 이렇게까지 차별화되는 능력을 사용하는 전직자를 본 적이 없어요.”

뭐를 더 숨기고 있는 걸까. 내 전직관은.

“당신의 어떤 점이 남들과는 다른 전직을 하는 조건으로 작용한 것인지 짐작 가는 것이 있나요? 아니면 남들과는 다르지만, 호연이랑은 공통되는 점이라든가….”

“…….”

평범한 학생이었다. 유별난 재능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언가 간절히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때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으로 하늘 조각에 뛰어들었다. 주세진, 이나연, 오정인처럼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박상호처럼 무언가 특정한 행위를 해서라고 하기엔 내가 한 것은 도망밖에 없었다. 내가 전직한 것에 대한 이유의 주체가 ‘내’가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뭐가….

“기록….”

입 밖으로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있었다. 남들과 다르고 이호연과는 공통적인 것. 그건 기록이었다. 비형랑 설화와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백호의 문헌.

하지만 그건 나와 이호연의 공통점이라기보단 각자의 전직관이 가진 공통점이라고 봐야 더 타당했다. 그거 외에는 공통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아기씨도 만나고, 호랑이님도 만났으니―.’

귀신 언니가 그렇게 말했었다. 다시 만났다, 라고. 아기씨는 나였으며 호랑이님은 이호연의 전직관이 아닌 이호연에게 향하는 말이었다.

옛날. 귀신이 옛것이라 이름 붙일 정도의 오래된 과거. 내가 태어나기는 했을까 싶은 시절에 무언가 있기라도 했나?

옛날. 과거. 그 말을 더듬어 올라가니 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언자들이 반드시 미래를 훔쳐볼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시야를 넓혀. 미래가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다.’

미래가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 서사 없는 글은 없고, 개연성 없는 이야기는 없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은 온전해지고 싶은 테오그라젠스 때문.

전직을 한 이들 또한 각자의 과거가 밑바탕이 되었다. 그럼 나의 어떠한 과거가 지금의 미래를 만들어 낸 거지? 이호연의 어떤 과거가….

“이예린.”

“갑자기 그 사람은 왜…?”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강유진이 의아한 낯을 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나중에 한번 확인을 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짐작 간다고 하기엔 심증도 물증도 없는 상태라서요. 더 정확해지면 그때 말해 줄게요.”

미국에 가기 전에 이예린을 한번 찾아가고 싶었지만, 천칭 팀은 게이트 공략하러 들어간 상태였다. 아마도 미국에 갔다 온 다음에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

옛날에 이예린이 이호연에게 예언한 적이 있었다. 너 옛날에 한 번 죽었다고. 뭔 소린가 하고 대충 넘겨들었었는데 어쩌면 그때 그 예언이 뭔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던 말을 읊은 말. 그녀가 엿본 과거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예린과의 첫 만남 때 예언을 들었어야 했나. 하지만 그때의 예언이 내가 원하는 예언이었다는 보장은 없었다. 고민해 봤자 이미 다 지난 일이다.

지금은 당장 알 수 있는 정보에 집중할 때였다.

“히든 전직이 조건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얼마만큼 확신하고 있어요?”

내 질문에 강유진이 곧바로 답했다.

“일단, 한국에 소속된 히든 전직자 중 류와 호연이 빼고는 거의 제 생각이 들어맞는다고 생각해요. 개인사가 얽힌 사람들은 알 수가 없지만요.”

말을 듣고 생각할수록 그녀의 가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설의 변수인 나와 이호연의 경우를 제외하면.

“외국의 전직자들도 그 가설에 해당하나요?”

“이번에 가게 되면 잘 알아내 봐야죠. 전 세계의 표본이 모이는 것과 다름없는데.”

불법과 합법을 넘나들며 뒷조사하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에서 느껴졌다. 평소의 이미지와 참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강유진이 비글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가서 사고 치면 안 돼요? 류가 사고 치면 보호자 책임으로 넘어오게 된단 말이에요.”

“네, 뭐…. 노력은 할게요.”

그렇게 답을 할 때만 해도 나는 나름대로 자신 있었다. 솔직히 겉으로 보기엔 단체 소개팅 같은 모임이라고 해도 중요도로 따지면 세계급인데 경거망동 행동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은 참 다양하고 이번 모임은 그 다양한 사람이 전 세계에서 모이는 만남의 장이었다. 우리 애는 안 싸울 거예요, 라고 한 국가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유의했어야 했다.

***

“가서 밥 잘 챙겨 먹고. 말 잘 듣고.”

“엄마, 나 성인이야….”

보호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진짜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는 아닌데…. 내 말에 엄마의 눈이 샐쭉해졌다. 그런 우리의 옆에서 아빠와 이호연이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인사는 나눴지만, 도저히 뭐라 더 할 말이 없어 애써 다른 곳을 보는 것이 티가 났다.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둘을 내버려 두고 나와 엄마는 대화를 나눴다.

공항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리블의 사옥에서 배웅을 받기로 했다. 이호연의 부모님은 어젯밤에 그의 집을 방문해 하루 동안 함께 보내는 것으로 아들을 배웅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선 나 또한 굳이 새벽에 여기까지 부모님을 오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단호했다. 두 분의 눈에는 아직도 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웃던 열아홉처럼 보이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도 있었다. 엄마가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 주었다.

“날도 추운데 더 따뜻하게 입지 않고.”

“이거 장비라서 보온 기능도 다 갖춰져 있어.”

“보기에 춥잖아.”

폭신한 하얀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나는 엄마를 향해 웃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던 엄마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돌았다.

혹시 모르니 장비를 입고 오라고 한 주세진의 말에 따라 나는 도포에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원래라면 어깨에 걸치고 마는 두루마기도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제대로 입고 있는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얇은 옷이라 껴입는다고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따로 장비를 입지 않아도 되는 이호연은 코트에 검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사옥임에도 불구하고 꼬리와 귀를 감춘 상태였다. 그것을 힐끔 쳐다본 엄마가 내 귓속에 작게 속삭였다.

“쟤, 오늘은 귀 안 달았네?”

“응?”

“아쉽다. 한번 보고 싶었는데. 쟤랑 사귀는 것 맞지?”

속닥거려 봤자 이호연은 다 들릴 텐데. 그 사실을 알려 줄까 말까 하다가 약간 귓가가 붉어진 이호연을 보며 결국 말하기로 했다.

“엄마 속닥거려 봤자, 쟤는 다 들려.”

“그럼 쑥스러워서 귀 빨개진 거야? 귀엽다, 네 아빠 젊을 때 보는 것 같네.”

엄마의 말에 이호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차마 뭐라 말도 못 걸고 그러고 있는 것이 정말 귀엽기는 했다. 혼자만 대화를 듣지 못한 아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내 취향의 근원은 엄마였나 보다.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이들이 보였다. 나와 이호연이 바라보는 쪽으로 부모님의 시선이 움직였다.

리블의 직원들이 짐을 들고 로비로 들어왔다. 그런 그들의 뒤로 서류 뭉치를 비서 아저씨에게 넘기고 있는 주세진과 강유진이 따라 걸어왔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배웅하러 온 주세진의 낯이 피로해 보였다. 잠은 자나? 그는 곧바로 우리 쪽으로 와 엄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따라가야 했는데….”

엄마는 그런 주세진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렇게 신경 써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애들 보호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엄마의 말에 새로운 보호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 강유진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런 그들을 보다가 직원들이 갖고 온 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비 입고 몸만 오라더니 정말 다 준비해 줬구나 싶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본 직원이 내게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은 나는 내 표정이 요상해져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복주머니?”

어여쁜 색감의 복주머니였다. 제법 묵직한 무게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안을 본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가다가 입 심심할 때 드시라고 준비했습니다. 길드장님이 그거 먹다가 질리면 이호연 씨 거 뺏어 드시래요!”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이호연에게로 걸어갔다. 마찬가지로 직원에게 받았는지 예쁜 상자 하나를 들고 있는 이호연이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 들었어? 니는 약과랑 엿, 그리고 유과.”

“마카롱이랑 이것저것 골고루 들어 있어요.”

동서양의 조합인가? 주세진이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뭔가 안 어울리는데 어울리는 것 같은 준비성이었다. 이호연이 상자에서 마카롱 하나를 꺼내 내게 먹여 주었다.

그것을 한입 베어 물고 손에 쥐며 그에게 말했다.

“뒤에서 아빠가 노려보는 거 알아?”

“…….”

차마 뒤돌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소리 내 웃었다. 복주머니에서 엿 하나를 꺼내 이호연의 입 안에 넣어 주며 엄마, 아빠에게 말했다.

“올 때 선물 사 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일부러 더 밝은 얼굴로 하는 내 말에 불안감이 서려 있던 엄마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울상을 지우진 못한 아빠가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주세진이 준비해 준 차에 탔다. 나름 장기간 여행이기에 짐이 제법 되어 준비된 차였다. 그리고 내 그림자 이동은 동반 1인만 가능이기도 하고.

옆에 앉은 이호연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 부모님이 걱정이지.”

하늘이 무너지던 날, 나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었다. 그렇게 헤어져 다시 만나는데 1년이 걸렸다. 여행에 대한 트라우마는 내가 아니라 부모님에게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갔는데 성과가 별로면 어떡하지.”

“다 잘될 거예요.”

그리 말하면 이호연이 내게 짧게 키스했다. 그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본 강유진이 우리에게 말했다.

“연애는 둘이 있을 때 하면 안 돼요? 이 공간에 나도 있단걸 잊지 말아 줘요.”

그 말에 이호연이 다시 바르게 앉았다. 잡은 손은 놓지 않았지만…. 그런데 기분 탓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강유진에게 물었다.

“뭔가 차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이에요?”

“착각 아니에요. 우리 늦었거든요. 늦었다는 핑계로 인터뷰 전부 거절할 예정이라서요.”

“…….”

지금이라도 안전벨트 매야 하나? 새벽에 움직이는 이유 중 하나는 강유진의 레이싱 카를 운전하는 듯한 솜씨 때문이 아닐까 고민되었다.

“안전벨트 맸죠?”

“…….”

거울에 비치는 강유진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장면이었다. 가령 영화관이라든가, 영화에서라든가, 장르가 공포나 호러물인 그런 데서.

“좀 천천히 가면 안 되나요.”

타이어 갈리는 소리 들리는데.

“한국인은 빨리빨리.”

빨리 가다가 골로 갈 것 같았다. 창밖의 풍경이 8배속을 켜 놓은 것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것을 본 이호연이 결국 눈을 감았다.

“괴물 위 폴짝폴짝 뛰면서 공중전도 하는데 이 속도가 무서워요?”

강유진의 물음에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며 말했다.

“공중전이 더 안전한 것 같은데요. 우리 안전벨트 맨 거 안 보여요?”

게다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남이 하는 거라 뭔가 더 무섭다. 내가 친 사고에는 곧바로 대응 가능인데 강유진이 언제 사고 칠 줄 모른다는 점이.

커브 길을 돔과 동시에 바닥에 검은 자국 날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한쪽으로 쏠리는 몸을 느끼며 결국 강유진에게 빽 소리쳤다.

“지금 이거 카트라이더 아니거든요!”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출발하기 직전에 강유진이 멀미 여부를 물을 때 도망칠 걸 그랬다. 고속도로에서 부스터 쓴 것 같은 속도를 유지하는 험악한 운전 솜씨에 결국 나도 눈을 감았다.

“공주님, 공주님! 류! 눈 좀 떠봐요.”

“왜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본격적인 카트라이더를 즐겨 볼래요 아니면―.”

“두 번째. 무조건.”

강유진에게 답하며 눈을 떴다. 옆을 힐끔 쳐다보니 이호연이 당장 내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속도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벌써 공항이 보였다.

“공항 안으로는 기자들이 못 들어오게 통제해 놔서 공항 앞에 기자들이 쫙 깔려 있을 거예요. 신나는 카트라이더로 기자들 피해 가는 게 싫으면 길 좀 만들어 주세요.”

그 말과 동시에 창문이 열렸다. 슝슝 들어오는 바람이 시렸다. 손을 뻗음과 동시에 그림자에서 류가 스멀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단단한 등대를 손에 쥐고 등을 문밖으로 내밀었다.

차 밑에서부터 시작되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하늘 위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처럼 새까만 길이었다. 다만 낭만은 없었다.

“기자들을 장해물 취급하는 인성에 감탄이 나오네요.”

새벽에 부르는 것이 미안해 오정인한테 부탁하지 않았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부탁할 걸 그랬다. 비꼬는 것에 가까운 내 말에 조금도 타격이 없는지 강유진은 해맑은 얼굴로 엑셀을 밟았다.

슬쩍 창밖을 내다보니 저 아래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이 보였다. 아, 모르겠다. 의자에 몸을 늘어트리며 등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림자 오작교가 공항 앞까지 이어졌다. 다음부터는 절대 강유진이 운전하는 차 안 탈 거다.

***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는 10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주세진이 예매해 준 일등석은 정말 좋았지만 강렬한 운전의 기억을 지우지는 못했다.

생전 안 하던 멀미에 시달려 본 이호연 또한 다음부턴 절대 강유진과 차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끙끙거리는 이호연을 푸른 불꽃으로 잠재우고 통로에 서서 강유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장비 입고 오라고 한 거예요?”

“비행기 통로에 서 있으면 위험…한데, 류는 괜찮을 것 같네요.”

좌석에 누워 나를 올려다보며 강유진이 말했다. 비행기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에 파묻힌 상태였다.

“언제 싸움이 날지 몰라서 장비를 입으라고 한 거거든요.”

“저 싸우러 가는 거 아닌데요.”

“우리 애는 안 싸운다고 한 국가가 단 한 곳도 없었잖아요. 전직자 중엔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많고. 본인들이야 그냥 가벼운 투닥거림일 수도 있지만, 그 투닥거림이 여러 명이 되면….”

재앙이겠네. 옆에 있다가 괜히 휘말리면 새우 등 터졌네,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네가 감히 내 등을 터트리려고 해? 하며 달려들 이들만 모인 것이 이번 모임이었다.

그곳에서 눈먼 공격 한 번이면 웬만한 전직자들은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 하고 탭댄스 추다가 오는 정도일 것이다.

“우리 애는 안 싸울 거예요, 라고 확신 못 한 국가 중에 우리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줘요.”

“노력할게요.”

안 믿는 눈치였다. 수면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강유진이 말했다.

“길드장님한텐 공주님과 나는 애매하게 친한 사이라 부탁하면 들어줄 거라고 하기는 했는데, 솔직히 그것도 류가 내킬 때만인 거 알아요.”

“그건 그렇죠.”

그나저나 애매하게 친해서 말 들어주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매한 관계의 간격을 지키는 것은 예의일 테니까.

“그러니까 만약 사고를 치게 되면 아예 안 걸릴 방법으로 쳐 주세요.”

“보호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훌륭한 보호자는 따로 있으니까 괜찮아요.”

강유진이 이런 말 할 줄 알았다면 과연 주세진이 그녀를 보호자로 지정했을까 싶었다.

강유진은 뽀송뽀송 곰돌이 안대를 뒤집어써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내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 싸움 날지 모른다는 게 비행기 안에서도 포함인가 생각하면서 영화를 틀었다.

고개를 드니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한국인처럼 보이는데….

승무원이라고 하기에 기세가 너무 좋았다. 여기 말고 게이트에 들어가는 헌터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손으로 눈을 덮었다. 천천히 떼어 내는 손끝에 푸른 잔상이 남았다.

정보 부족인지 일부러 시험하는 건지 모르겠다. 환상 만들기가 특기인 정신 계열 마법사 앞에 저런 어설픈 환영이라니. 동양적인 얼굴 안에 서양적 얼굴을 숨긴 승무원이 아닌 척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미국 쪽에서 보낸 건가.

당장 뭘 하려는 건 아닌 것 같고, 감시가 목적인 듯했다. 영화의 인트로가 끝났다.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덤비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아.”

문득 든 생각에 옆에 놔둔 복주머니를 손안에 쥐었다. 허공으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주세진이 굳이 이것을 준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복주머니 속 잔뜩 들어 있는 간식거리. 굳이 이것을 줄 필요가 있나 싶은, 서비스로 제공될 음식들. 승무원의 위치는 덤비지는 않아도 장난치기엔 제법 좋은 위치였다. 특히 음식에다가.

“…….”

미국은 도착도 안 했는데 집에 가고 싶었다. 진짜로 음식에 장난질하면 비행기 옆에서 날아다니는 체험을 하게 해 줄 거다.

10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는 내 희망 사항과 달리 시간은 참 느리게 갔다. 영화 보는 것도 지쳐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한번 신경 쓰이고 나니 잠이 안 왔다.

주세진이 챙겨 준 간식거리들은 입 안이 얼얼해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강유진은 피융피융 소리 내며 꿈나라로 떠났고, 이호연은 아직 못 일어났다. 암시를 너무 세게 걸었나.

몽글거리는 구름이 슬며시 담요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아 저쪽도 나름 대비를 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강유진은 비전투 계열이었다. 여론몰이도 살아서 나간 뒤에나 가능한 거였다.

그러니까, 일단 나는, 눈… 뜨고 있는 게, 좋은데.

“아…. 졸려.”

이제 못 버티겠다.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끝을 움직였다. 톡톡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치에서 살그머니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 하나가 옷자락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 깨비면 충분하겠지.

발목에 스치는 작은 움직임을 느끼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 번져지는 세계가 어두컴컴했다. 이제 약 다섯 시간 남았다. 쓸데없이 일 벌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손끝과 발끝부터 천천히 힘이 빠졌다. 몸은 잠들었으나 정신은 깨어 있는 기묘한 상태였다. 가위에 눌리는 것과 비슷하면서 조금 달랐다. 신경이 예민해지면 꼭 이러더라.

귀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 소리, 쇠와 쇠가 맞물리는 소리.

이예린과 함께 천칭의 회장님을 보러 갔을 때 그 회장님이 보여 줬던 총구와 비슷한 소리였다. 특수 제작한 총이라고 했었나. 괴물한테도 통하고, 전직자에게도 통할 신무기라고 했다. 사실 총을 실제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기는 했다.

신무기라고 해 봤자 총이라는 점에서 낯선 건 똑같은데. 그나저나 그런 건 참 잘 개발한다. 원래부터가 총기 소지가 가능한 나라라 그런가.

그리 생각하며 점점 가까이 오는 기척에 집중했다. 눈을 떠야 하는데, 귀찮았다. 우위를 점하기 위한 위협일지 아니면 미국의 학자 이야기부터가 함정이었을지.

그도 아니면 내부 분열로 인한 결과물인가. 기다란 도포 자락에 숨어 내 다리에 찰싹 붙어 있던 꼬마 도깨비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졸려. 깊은 곳으로 떨어질 것 같은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슬며시 눈을 떠 보았다. 총구를 들이미는 자세 그대로 승무원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꼭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그런 승무원의 목을 흐릿한 허상 같은 손잡이 없는 검이 찌르고 있었다.

피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저것은 작은 꼬마 도깨비의 장난질이었다. 고통은 환상통, 검은 환상. 꿈결 같은 고통에 휘말린 승무원이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림자가 일렁이며 그 안에서 검은 손길들이 기어 나와 승무원을 낚아챘다. 간절한 손 하나가 휘적이는 것을 끝으로 승무원이 사라졌다.

검이 검은 안개로 변해 흩어지다 다시 뭉쳐 꼬마 도깨비를 뱉어 냈다. 콩콩 뛰어가 승무원이 놓쳐 떨어트린 총을 들고 열심히 걸어온 꼬마 도깨비가 내 손끝을 콕콕 두들겼다.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꼬마 도깨비에게 말했다.

“잘했어.”

늘어지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꼬마 도깨비가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를 까닥였다. 얇은 그림자 줄기 하나가 총을 잡아 으깨 버렸다.

그 줄기를 따라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꼬마 도깨비에게 잠꼬대하듯 말했다.

“적당히 해서 내보내.”

알아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뭐, 알아서 하겠지. 나는 대충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은 이미 깼다. 그저 눈을 뜨기가 귀찮았을 뿐이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몸에 반항하지 않고 시간을 죽였다. 선잠이 들었다 다시 깼을 때 귓가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통로에 주저앉아 제 목을 더듬으며 실성한 듯 울고 있는 승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빨리 데리고 가요. 이번에는 모른 척해 줄 테니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뒤편에서 또 다른 승무원 하나가 걸어왔다. 주저앉은 승무원을 일으키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쭙잖은 장난질 칠 생각하지 마요.”

“…네.”

통로로 걸어가는 그들을 보다 손가락을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통로 쪽에 남아 있던 총구의 흔적이 푸른 불꽃에 잡아먹혔다. 이제 보니 저번에 보았던 그 총이 아닌 평범한 총이었다.

“밥 먹고 싶다.”

엿은 하도 먹어 입 안이 얼얼하다. 나른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창밖을 보았다. 하늘에 뻥뻥 뚫려 있는 구멍 너머 어둠이 새카맸다. 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던 괴물을 나는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테오그라젠스.”

낡은 유리창처럼 깨진 저 하늘이 정말 테오그라젠스, 그 자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추측과 생각만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괴물은 또다시 변화를 맞이했고 사람은 아니다. 이번 모임에서 실마리를 찾기를 바랄 뿐이다.

시계를 보니 선잠인 줄 알았는데 제법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애매한 졸음은 오히려 몸이 늘어지는 결과를 갖고 왔다.

찌뿌둥한 몸을 쭉쭉 피다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를 걸었다. 걸음을 멈추고 강유진 쪽을 보며 말했다.

“일어났으면 말을 해요.”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는걸요. 호연이나 깨워 줘요. 이제 슬슬 내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애가 아직도 꿈나라네요.”

다음부턴 암시를 조금만 걸어야겠다. 이호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좌석에 붙은 낮은 벽에 기대어 서서 그의 뺨을 꾹 찔러 보았다. 생각보다 말랑한 뺨이 보들보들했다.

호랑이 귀가 없어 어색하게 느껴지는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푸른 불을 담은 언어가 입 밖으로 나왔다.

“이제 일어날 시간.”

꿈은 끝. 밤을 건너 밤으로 왔다. 이제는 눈을 뜨고 손발을 움직여야 한다.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속눈썹이 움직였다. 눈꺼풀 아래 숨겨져 있던 회색 눈이 어두운 공간에서 흐릿하게 빛났다. 밤중 빛나는 묘안석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류….”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일어날 시간이에요, 공주님.”

“제가 공주예요?”

내 말에 그가 웃었다. 손을 뻗어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에 걸어 주며 이호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꼬대인가?

“그럼 류가 왕자님이네요.”

“그런가?”

“그럼 키스해 줄 거예요?”

“…….”

잠꼬대 맞는 것 같은데. 잠이 덜 깼나? 아니면 아직도 강유진의 운전 솜씨에 충격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하는 이호연의 낯이 나른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키스로 일어나는 게 백설 공주였나.”

하얀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으며 말했다. 백설 공주, 어울리는 것 같았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이 작은 고갯짓을 따라 흔들거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국 측에서 손을 쓴 것인지 우리 외엔 아무도 없는 일등석이 고요했다. 강유진은 뭉그적거리며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고 수상한 승무원들은 모두 도망갔다.

키스 못 할 이유는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강유진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나 일어나도 돼요?”

“…그러세요.”

내가 물러남과 동시에 이호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귀가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온 강유진이 내게 물었다.

“착륙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친절하게 기자들과 스펙타클 인터뷰를 할 거예요?”

앞에 스펙타클이 붙는 걸 보니 도망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꼭 해야 하는 거 아니면 도망갈래요.”

샌프란시스코 정도면 캘리포니아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말을 들은 강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착륙도 안 했는데 바로 이동할 수 있어요?”

“가능은 한데, 여권 검사는 받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럴 줄 알고 길드장님이 이미 다 해결해 놔서 괜찮아요. 애초에 국가의 대표로 오는 만큼 신원은 확실하기도 하고. 미국 측에서도 웬만한 절차는 가볍게 하자고 했거든요.”

그거 절차 밟다가 성질 급한 전직자가 급발진할까 봐 손쓴 거 같은데. 나야 좋지만.

“호텔만 들어가면 기자들 만날 일도 없어요. 국가를 대표하는 전직자들 바글바글한 곳에 맨정신으로 취재 갈 사람은 없거든요.”

“진짜 우리만 가도 돼요?”

“어차피 나까지 데리고 이동 못 하잖아요. 짐도 갖고 가야 하고,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한 명은 남아서 기자들 상대도 해야 하고.”

본인이 괜찮다면 나야 좋지만. 벗어 두었던 겉옷을 챙겨 입고 내 손에 들려 있던 목도리를 가져가 내 목에 둘러 주며 이호연이 물었다.

“하늘에서도 이동 가능해요?”

“하늘이라고 해도 여기는 비행기 안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하늘이나 바다 위면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비행기 안이었다. 이동에 필요한 그림자는 충분했다.

“호텔로 바로 이동해야 해요. 내가 갈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리고. 괜히 다른 전직자랑 싸우지 말고.”

“왜 나한테만 말해요?”

“호연이는 의외로 웬만하면 잘 안 싸우거든요.”

강유진의 눈에 나는 어떤 모습인지 참 궁금해졌다. 못마땅한 내 얼굴을 보며 강유진이 헷, 하는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호연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좌석에 붙어 있던 그림자들이 내 발밑으로 기어와 길게 늘어졌다. 우리를 삼키는 그림자 사이로 손을 흔들거리는 강유진이 보였다.

“이따 봐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이 뒤바뀌었다.

어두컴컴한 세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나와 이호연만이 보였는데, 흐릿하게 빛나는 것 같은 우리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보이고 괴이쩍게도 보였다.

마치 한밤중 산속에서 발견한 푸른 빛과도 같았다. 손가락 끝을 맞부딪쳐 소리를 내자 조그만 꼬마 도깨비불이 피어올랐다. 그림자 속에 들어오는 것이 익숙한 이호연은 내가 움직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따로 주의를 줄 필요가 없어 다행이다 싶었다. 잠시 손을 놓고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짝, 소리와 함께 둥실거리며 떠다니던 푸른 불이 일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궁의 숨겨진 비밀 통로를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불이 비추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불 자체만 빛날 뿐이었다.

푸른 도깨비불 사이를 걸으며 이호연이 내게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 불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돼요?”

“나야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 나가면 그림자 속의 미아가 되지.”

“미아?”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제 손을 잡음과 동시에 걸음을 멈춘 내 뒤를 따라 그의 걸음도 멈추었다.

“나야 이 안에서 길 잃으면 밖으로 나가서 택시 타고 집 가면 되니까 상관이 없어.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여기서 나가는 법을 모르니 영영 이곳에 갇히게 되는 거지.”

물론 내가 찾아낼 수 있다면 얼마든 길을 잃어도 괜찮지만, 문제는 나도 이 안에서 미아가 된 사람을 찾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림자는 나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나의 공간은 아니었다.

삿된 것들의 안식처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그리고 이 그림자 안엔 나만 있는 게 아니라서 도전 같은 거 안 하는 게 좋아. 운 나쁘면….”

운 나쁘면 정신 놓을 수도 있거든. 입을 다문 나를 보는 이호연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뒷말은 하지 않았음에도 영 좋지 않으리란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뒤를 힐끔 쳐다보자 저 멀리서 손을 뻗는 검은 형체들이 얼핏 보였다.

차마 푸른 불꽃이 비추는 곳까지는 오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는 들개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이호연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말 안 해도 알지?”

“…네.”

“빨리 나가자.”

오래 있어서 좋을 곳은 아니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여기쯤인가. 푸른 불이 뭉쳐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자 어둠이 물러났다. 바깥의 풍경이 물을 탄 수채화처럼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아래 물살 따라 움직이는 바다의 하얀 파도가 보였다. 불빛 없는 바다를 비추는 것은 하얀 달빛 하나였다.

밤에 잡아먹힌 도시가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 전부 피신시켰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싸울 거면 저 바다 주변에서 싸우라는 건가.

텅 빈 바닷가를 한번 보고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호연이 발걸음을 옮기기 전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우리 옥상으로 나가는 거죠?”

“그렇지?”

애초에 나는 건물 안에서, 그것도 딱 로비에 나타날 정도로 섬세한 이동은 못 하는 편이다. 깔끔하게 옥상에서 로비로 내려가는 게 더 편했다.

“저번처럼 난간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죠?”

“…….”

다시 말하지만 나는 섬세하게 이동 못 하는 편이다. 그런 건 이동 전문가 오정인에게 바라야 하는 능력이었다. 불안한 낯의 이호연에게 나는 강유진이 내게 했던 것처럼 헷, 하고 웃어 주었다.

뭐라 말하려 했는지 입을 열었다가 이호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말하는 대신 내 손을 더 꽉 움켜쥐는 것이 마치 준비됐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우리 둘 중에 겨우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다치는 사람은 없었다. 용이랑 하늘 위에서 한 판 하다가 떨어졌을 때도 이호연은 생채기 조금 나고 말았다. 나야, 뭐….

“다음에는 좀 더 연습해 볼게.”

그래도 조금 미안한 감이 있었다. 솔직히 섬세한 이동을 못 한다기보단 해 본 적이 없어서 못 하는 것에 가까웠다. 지나친 개인 플레이 위주라서 배려가 부족한 부분이었다.

몸은 안 다칠지 몰라도 심장은 놀라면 끄앙 한다.

“괜찮아요. 떨어진다고 다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지면 놀라서 물어본 거예요.”

웃으면서 말하는 이호연에겐 미안하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또 난간일 것이다. 애초에 내가 제대로 지정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림자가 가장 많은 부근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옥상에서 제일 그림자가 많은 것은 난간이었다.

이 호텔이 옥상에 조형물을 많이 뒀다면 그 옆일 수도 있지만, 전직자들이 다 부숴 버릴까 봐 치워 버린 것인지 옥상은 깨끗했다.

그래도 저번에는 해의 위치상 난간 밖에 그림자가 더 많아서 그런 거고 지금은 밤이니까 아마 난간 안쪽일 것이다. 아마도.

이호연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바람이 불었다. 겨울의 공기가 찼다. 머리카락과 목도리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아슬아슬하게 난간 바로 위였다. 이런 저번이랑 똑같네.

그래도 한번 당해 봐서 그런지 이호연은 난간 위에서 중심을 잘 잡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안전한 것 같지 않아?”

그런 내 말에 이호연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입을 삐죽이며 뭐라 말하려던 나는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열기에 고개를 돌렸다.

“불?”

내가 말함과 동시에 이호연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몸이 뒤로 기울어지며 재주 도는 여우처럼 몸이 한 바퀴 돌았다. 그 움직임을 따라 발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끼긱거리는 돌이 긁히는 소리가 울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온 손이 벽에 박혔다. 이호연의 목에 팔을 두르며 건물 벽에 일렁이는 내 그림자 속에서 류를 꺼냈다. 발이 허공에서 달랑이는 것이 꽤나 기분이 나빴다.

우리 애는 안 싸운다고 한 국가가 단 한 곳도 없었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바로 공격당할 거라는 말은 못 들었다.

“위로 올라갈 수 있지?”

“물론.”

벽을 디디고 선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 쥔 류의 등대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생각했다.

눈먼 공격이었으면 네가 감히 내 등을 터트리려고 해, 하는 마음으로 경고 차원에서 끝낼 것이다. 고의였다면 왜 나한테 불로 덤비면 안 되는지 몸소 체험하게 해 줄 것이다.

안 싸운다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세 번은 참아 보겠다고 했지만 그건 옆에서 누가 말릴 때의 이야기였다. 애초에 주세진도, 강유진도, 내가 정말로 참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강유진은 내게 그러지 않았는가. 안 걸리게 사고 치라고. 안 걸리면 된다.

옥상에 있을 기척을 느껴 보았다. 두 명? 아니, 흐릿하지만 하나 더.

그중 겁도 없이 불덩이를 날린 사람은 셋 중 유일하게 기이할 정도로 몸의 열기가 올라가 있는 사람. 옥상 난간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놈이 범인이다.

등 안에 푸른 불꽃이 찬찬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 따라 등에 장식된 구슬들이 맞부딪혔다. 이호연이 나를 안정적으로 받쳐 안았다.

난간 바로 앞에서 구두 소리가 멈췄다.

“지금.”

이호연이 움직임과 동시에 등이 열렸다. 상대 쪽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감지하며 다시 한번 불덩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느껴졌다.

푸른 불꽃이 우리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새빨간 불길을 살라 먹으며 겁 없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호연의 발이 난간 위에 닿음과 동시에 내 쪽을 향해 달빛을 시리게 반사하는 것이 날아왔다. 나를 난간 위에 내려 주며 이호연이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의 손에 튕겨 옥상에 꽂힌 것은 작은 단검이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정말 겁도 없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리는 머리를 뒤로 쓸며 옥상 위를 쭉 훑어보았다.

푸른 불꽃의 위협을 피해 제 몸에 불을 감은 남자가 하나. 단검을 손에 쥐고 우리 쪽을 긴장한 낯으로 보고 있는 여자가 하나. 그리고 탁 트인 공간에 서 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흐릿한 기척의 남자가 하나.

딱 보니 서양권 외모의 남녀가 우리를 공격한 범인이었다. 존재감이 흐릿한 남자는 구경하러 온 것인지 등 터지기 직전의 새우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류를 질질 끌며 난간에서 내려와 여자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쪽은 신체 계열이고 남자 쪽은 마법 계열, 그중에서도 불을 다루는 쪽이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이유로 공격한 거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다.

어차피 저쪽이나 이쪽이나 말은 제대로 안 통할 거다. 사이좋게 나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웃는 낯으로 손을 올렸다.

“덤빌 거면 빨리 덤벼.”

내가 비행기 안에서 실컷 먹은 엿을 표현하자마자 달려든 것은 신체 계열의 여자가 아닌 마법 계열의 남자였다. 이건 의외였다.

정말 겁이 없는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다. 탱커한테 몸빵하는 마법사를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목도리를 풀어 그림자 속으로 던졌다. 하얗고 푹신한 목도리가 검은 그림자에 잡아먹혔다.

뒤에서 그런 남자를 당황한 표정으로 보는 여자를 보며 나는 랑 같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들고 있던 류를 옥상에 찍어 박은 뒤 앞으로 손을 뻗었다.

불을 감으며 뛰어오던 남자의 눈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빨간 불 자락이 옷에 붙었다. 고온의 푸른 불로 매일 단련된 검은 비단엔 이런 불은 다리미 온기보다 옅은 것이었다.

조금의 타격도 없는 내 모습을 보며 뒤늦게 뒤로 물러나려 하는 남자의 목을 낚아채 바닥에 처박으며 나는 말했다.

“올 때는 네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란다.”

“……!”

발버둥 치며 뭐라 말하려는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뭉개진 숨소리뿐이었다. 남자의 목을 잡지 않은 손으로 옷자락을 털었다. 두루마기에 붙어 있던 불씨가 꺼졌다.

그을림 하나 없는 검은 비단을 보고 눈을 굴려 남자를 보았다. 내 팔목을 붙잡은 손의 아귀힘은 평범한 성인 남자 정도였다. 뭘 믿고 덤비는가 했는데 막상 이렇게 붙들고 보니 정말 뭘 믿고 덤빈 건가 싶었다.

목에 힘을 바짝 주는 남자의 이마를 꾹꾹 밀며 고개를 들었다. 여자 쪽은 이미 이호연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새 무기까지 빼앗겼는지 본인 무기로 위협당하고 있었다.

겨우 저 정도 실력으론 한 나라의 대표라고는 못 할 텐데? 의아함을 담아 그쪽을 구경하는데 팔이 뒤로 꺾인 채 붙잡혀 있던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아하. 이건 나름. 하지만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여자를 향해 말했다.

“The end?”

“…….”

대답 없는 여자를 바라보다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 줄기에 붙잡힌 단검 수십 자루가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그것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만큼의 무기를 소환해 공격하는 능력은 확실히 특이하기는 했다. 얼만큼의 숫자를 소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단검의 재질도 평범한 철은 아닌 것 같고, 나름 한 나라의 대표로 선발될 능력이기는 했다.

“…….”

그에 반해 얘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고. 길게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볼 붙이는 헛수고를 하는 남자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마를 누르던 손을 치우고 남자의 손을 쳐냈다. 불붙은 머리카락은 한번 손으로 훑는 것으로 불씨가 꺼졌다.

자기보다 더 강한 불을 가진 상대한테는 자신의 불이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나 보다. 말짱한 내 머리카락을 발견한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남자를 보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너 자꾸 그러면 바다에 담갔다 빼 버린다.’가 영어로 뭘까?”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이마를 꾹 눌렀다. 버티려고 노력해 봤자 완력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말이 안 통하니 불편했다.

모른다고 빼지 말고 오기 전에 욕 몇 개라도 배우고 올 걸 그랬다.

“말이 안 통하면 몸으로 보여 줘야겠지?”

남자의 이마를 콕콕 찌르던 손을 치우며 주먹을 쥐었다. 날 노려보던 남자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맨손으로 바위 하나는 가볍게 으깨 버린다는 걸 모르는 눈치도 아닌 듯했다.

그러면 작정하고 덤빈 거네? 가만히 있는 남의 등 터트리는 것들보다 더 괘씸했다. 목을 죄는 손에 힘을 살짝 풀자마자 남자의 입이 열렸다.

“Stop, stop!”

“…….”

옅은 금발이 살짝 흔들거렸다. 질끈 감은 눈의 눈꺼풀 위가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옥상에 엎어진 여자 옆에 이호연이 없었다.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먹 쥔 내 손에 간신히 닿은 손. 그리고 그 손 주인의 팔목을 붙들어 매고 있는 호랑이의 손.

일부러 존재감도 숨기고 구경이나 하더니 갑자기 왜 끼어들었을까. 곤란한 얼굴로 내게 웃는 남자의 얼굴은 무해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옆에서 남자를 노려보는 이호연의 눈은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맹수의 눈이었다.

“놔줘도 돼.”

내 말에 이호연의 눈이 내 쪽으로 향했다. 깜깜한 밤중에도 묘하게 빛나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남자의 손목을 긁으며 떨어지는 이호연의 행동에도 남자는 무해한 얼굴을 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다 바람 따라 사라졌다.

진한 갈색 머리에 햇빛에 그을린 얼굴, 웃는 것 같은 가는 눈의 남자였다. 서양 쪽 사람은 아니고, 동양적인 얼굴에 가까웠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 밑에 남자를 가리켰다. 국적 상관없는 서양 판타지 스타일 장비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전직자들끼리 싸움 날 것을 각오하고 왔다는 뜻인데, 하는 짓은 마치 평화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인내심은 기나 성질머리가 마냥 얌전한 것은 아닌 호랑이의 입 사이로 송곳니가 보였다. 여기서 내가 고개라도 저으면 호랑이로 변형해 곧바로 남자의 목덜미를 물어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내 손안에서 바르작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시답잖은 능력에 흥이 가셨다. 더 놀아 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기분 상했다고 나 원하는 대로 하기엔 걸리는 것이 많았다. 여기서 정말 유혈 사태라도 나면 주세진이 당장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것이다.

국가적 문제 정도의 사고는 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던 피곤함에 절은 얼굴이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사람 그런 일로 오게 하는 건 역시 아니었다.

애초에 내 밑에 깔려 덜덜 떠는 이 남자를 정말로 한 대 칠 생각은 없었다. 얼굴 바로 옆 바닥 좀 깨서 겁만 줄 생각이었지.

왜 내게 덤볐는지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고, 그 이유가 괘씸해서 경고해 준 것뿐이었다.

잡고 있던 남자의 목을 털어 버리듯 손에서 놔주었다.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손끝을 까닥였다. 옥상에 꽂혀 꼿꼿하게 서 있던 류가 점성질 액체처럼 변하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주저앉아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여자가 달려와 남자를 부축했다. 그런 여자의 손길을 쳐 내며 나를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가 별로 인상 깊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억에 남는 쪽은 이쪽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이 웃는 것 같은 남자. 눈이 마주치자 양손을 들으며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하는 남자를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척을 드러내니 확실해졌다. 이 남자도 불을 다룬다. 모든 것을 태우는 열기가 아닌 철의 단면을 가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느낌의 불을.

이것은 불을 다루는 전직자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김수혁은 나의 불을 아득함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내게 있어 진정한 아득함의 불은 이 푸른 불의 원주인이었다.

그 불의 감각을 느껴 보고 나면 그 어떤 불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날카로운 느낌의 불도, 맹수와 같은 느낌의 불도.

“Бортэ-Чино”

“?”

뭐라고 한 거지?

가느다란 눈이 더 가늘어졌다. 발음마저 낯선 언어로 내게 무어라 말한 남자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이번 미국의 모임이 벌써부터 아주 기대가 되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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