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
“미국엔 특산물 뭐가 있지?”
“어…. 옥수수?”
리블 공략대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들으며 입 안에 과자를 넣었다. 들고 있던 과자를 내게 뺏긴 손민호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 어디로 가요?”
“캘리포니아주 바닷가 근처 호텔.”
“관광하러 가는 거 아니죠?”
“관광이면 얼마나 좋아요….”
내 말을 들은 오정인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의 학자를 만날 날이 성큼 다가왔다. 내가 신경 쓰지 않다 못해 반쯤 까먹고 있는 사이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주세진이 결과가 나온다면 알려 준다고 했지만, 그가 말해 주기도 전에 뉴스에 먼저 보도되었다. 대대적 홍보가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이번 모임은 모두가 관심을 집중하는 핫한 사건이었다.
가족들과 저녁 먹다가 보게 된 뉴스를 보며 티는 안 냈지만 나는 내심 주세진의 일 처리 능력에 감탄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준다더니 정말로 판이 내 뜻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번 만남의 공식적인 목표는 각국 대표 전직자들의 친분 다지기였다. 여차할 때 타국의 전직자를 불러와 도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메리트를 높으신 분들이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전직자들을 모아 놓고 정상적으로 친목질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우려의 말도 많았다. 괜히 도시 하나 무너지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놀랍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답한 나라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에 이 모임의 주최자나 다름없는 미국이 나서서 장소를 제공했다.
캘리포니아주의 바닷가. 그 일대의 사람들을 이미 피신시켜 놓았다고 한다. 바닷가 근처면 무너질 건물 수도 도시 한복판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만나기도 전에 무너질 건물의 수를 걱정하고 사람들 피신시켰다는 점에서 이 모임은 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거기까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애시당초 내 목적은 미국의 학자를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미국 또한 유해한 전직자들이 몰려드는 것에 대해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는지 제약 겸 제한을 내밀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전직자 두 명, 그리고 그들을 통제할 보호자 하나만 올 것.
전직자 하나만 부르자니 모임의 취지에 맞지 않고, 그렇다고 여러 명 부르자니 불안한 그들의 심리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책임지고 전직자들 통제시킬 사람 보내라고 하는 점에서 잘못하면 국가 문제로까지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애가 그럴수도 있죠, 하고 넘어가기엔 그 애들이 너무… 파워풀했다.
이런 부분을 들먹여 은근히 싸움 나기를 원하는 나라가 있을지도 모른다. 잘만 하면 거액의 보상금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사실을 알려 준 것은 주세진이었다.
거기가서 괜히 싸우지 말라는 주의를 주기 위해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근데, 약간 단체 소개팅 느낌 아닌가?”
내 말을 들은 리블의 공략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매일 뉴스에 도보 되며 모두의 관심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모임의 당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상했나 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전직자 두 명, 단 남녀 한 명씩. 솔직히 의도가 너무 뻔했다.
사랑에 빠져 이민 가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우리 애는 안 그럴 거고, 너희 애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본인들 나라로 남의 나라 인재 빼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단체 소개팅 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한국의 대표는 나와 이호연이었다. 그리고 보호자는 자동으로 주세진이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했지만 의외로 주세진이 보호자로 선정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가 나와 이호연이 소속된 리블의 길드장이라는 점. 둘째는 내게 뭐라고 말할 정도의 강심장인 사람이 주세진 말고는 없었다는 점. 셋째는 나나, 이호연이 싸움 났을 때 어느 정도 우리들을 통제시킬 수 있는 사람도 주세진 말고는 없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왜 보호자로 선정되었는지를 말해 주며 주세진은 내게 참 말 안 듣고 살았구나, 하는 얼굴을 했었다.
세 번째 이유는 주세진 개인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 아닌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통과된 거였다. 결국 그냥 나한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주세진 말고는 생각 안 났다는 거지만.
이유야 어쨌든, 주세진이 보호자라는 점에서 나는 매우 만족했다. 물론 그만큼 주세진은 더 바빠졌지만, 그는 알아서 준비할 테니 나가서 놀라며 나를 자신의 방에서 내쫓았다.
미국 장기간 체류에 대한 것부터, 나와 이호연의 부모님께 왜 우리가 가야 하는지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까지 주세진의 담당이었다. 뭐라 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부모님은 주세진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사실을 말해 줬더니 이예린은 상견례도 프리 패스 할 인간이라며 주세진을 평했다.
짐싸는 것까지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너희가 못 하니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 마인드의 조장님 덕분에 할 일이 없었다.
그 결과 나와 이호연은 일상의 변화 없이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야 하지만…. 내 옆에 분은 크나큰 변화를 맞았다.
기껏 용으로도 변하는 심술궂은 호랑이를 만나는 모험을 감수하며 잠드는 병을 고친 것이 무색하게도 이호연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그의 뺨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성격 참 나빠.”
내 말에 답해 줄 이는 꿈나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저 체력 좋은 호랑이를 이렇게 만들 정도면 얼마나 굴리는 건지 상상되지 않았다.
잠든 이호연의 뺨을 괜히 콕콕 찔러 보는 김수혁을 푸른 불티로 쫓아냈다. 제 앞에서 타탁 하고 터지는 불티에 깜짝 놀란 김수혁이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가르쳐 주는 게 어디예요.”
오정인의 말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이호연의 전직관은 지금까지 방치에 가깝게 제 전직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심술궂은 호랑이, 아니, 용인가. 어쨌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는 저번 만남을 이후로 이호연을 제 공간에 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러 놓고 또 산속 한가운데에 방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사이 안 좋고, 서로서로 싫어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전직관과 전직자처럼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일상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 꽃치자, 하얀 장미를 닮은 그 꽃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랑에게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그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테오그라젠스나 변화를 맞이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새롭게 배우고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 전에 이호연이 죽어 나가는 일만 없으면 말이다.
“으음….”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결국 이호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사옥에 있는 기숙사에 가서 자라고 해도 싫다 고집부리더니. 웃지 않으면 날카로워 보이던 얼굴이 피곤으로 인해 멍해 보였다.
“…심술궂은 호랑이.”
저를 보며 하는 말에 이호연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도 피로도 손민경의 힐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잔재주 부릴 거면 오지 마라.’
상처를 치료하고 온 이호연을 보며 그리 말했다고 한다. 본인은 다칠 일 없다 이거지. 손을 뻗어 반창고 위를 살짝 톡 하고 쳤다. 아프지는 않은지 이호연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 이호연은, 그리고 그의 전직관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아마 이호연은 당황은 해도 그의 전직관이 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내 말을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전직관이 다시 나를 만나 주려고 할까?
애 놀리기 좋아하는 도깨비들의 왕께선 이 질문에 대해 참 묘한 반응을 보였다. 웃지 않았다. 그저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 말할 뿐이었다. 왜냐 물었더니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할 말만 했다.
‘슬퍼할 거란다.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랑이 정작 슬프고도 미련 있어 보여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너울 사이로 엿보게 된 그의 얼굴이 이호연과 닮은 것 같다는 것을. 그가 당신을 믿느냐 물었다는 것을.
전직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들이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모두 수상한지 신기할 정도였다.
“류?”
말없이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호연이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이호연에게라도 말할까, 말까 생각하다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나 돌려받을 거 있는데.”
“?”
“내 옷. 두루마기 아직 안 돌려줬어.”
내 말에 이호연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역시 잊고 있었구나.
“바닷가 동굴.”
“아….”
이제야 생각났는지 이호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제 목을 매만지며 이호연이 말했다.
“내일 갖고 올게요.”
내일…. 그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나는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얼떨결에 잡혀 얼떨결에 버릇처럼 내 손에 제 손가락을 얽어매는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똑같이 그의 손에 내 손가락을 얽으며 말했다.
“내일 갖고 오지 말고….”
“?”
“오늘 가지러 가면 안 돼?”
“…네?”
“너희 집 놀러 가고 싶어.”
내 말에 이호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문 앞까지 데려다준 적은 많았지만, 그 안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물론 그건 이호연도 마찬가지였지만 나 같은 경우엔 집에 부모님이 계셔서였다. 우리 아빠가 이호연을 보면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호연은 성인이 되자마자 집에서 독립했다.
언제든 놀러 가도 된다. 집주인인 이호연만 좋다고 한다면.
기대감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당황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무엇을 그리 생각하는지 심각해져 있었다. 머뭇거리던 입이 열렸다.
“그게… 오늘 말고 내일 오는 건….”
“왜?”
“…….”
이호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왜 그러나 싶어 가만 쳐다보았지만, 그는 도르륵 눈을 굴리며 내 시선마저 피했다. 내가 놀러 가는 것이 싫은 건가?
“이호연 원래 누가 자기 집 오는 거 싫어해요.”
박상호에게서 과자를 뺏어 먹던 김수혁이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김수혁이랑 이호연이랑 집 도어락 비번을 알려 줬느니 안 알려 줬느니 하며 싸우지 않았나?
나도 싫은 거야? 하는 얼굴로 그를 보니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장난인데.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나 집 찾아오지 말라고 집 주소도 제대로 안 알려 줬잖아!”
“…그건 너고.”
작게 말했지만 다 들렸는지 김수혁이 이 나쁜 놈아, 하고 소리 지르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멀거니 김수혁이 뛰쳐나간 문을 쳐다보는데 손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이호연의 손이 내 손바닥을 살살 긁었다.
살짝 간지러우면서도 묘한 느낌에 그를 돌아보았다. 이호연의 뒤로 하얗고 복슬복슬한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류가 오는 건 좋아요. 그냥… 오늘은 좀….”
김수혁 들으면 울겠다. 자꾸만 손을 간질이는 그의 행동을 힐끔거리다 문득 드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청소 안 해서?”
“…….”
정답이었나 보다. 손장난 치던 행동이 멈췄다. 하얀 얼굴이 조금 붉게 달아오르고 살랑이던 꼬리의 움직임도 뚝, 하고 멈춰 버렸다.
“별로 상관없는데….”
그나저나 의외였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현실적인 자취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보였는지 이호연이 허둥거리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잘 치워요!”
이호연의 얼굴에 억울함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자신의 말을 안 믿는다고 생각했는지 이호연의 낯이 뾰루뚱해졌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지만 이호연의 말이 사실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요새 바빴으니 청소는커녕 집 가자마자 뻗었을 것 같고.
리블에서 퇴근하고, 나와 헤어지고 나면 그는 곧바로 히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전직관에게 굴려지면서 배웠다. 새벽까지 시달리다 간신히 두세 시간 자고 나면 아침이었다.
그리고 출근하고, 공략 시간까지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게이트 공략하러 나가고 다시 퇴근. 며칠째 반복되는 생활 패턴에 살이 조금 내렸을 정도였다.
집안일할 시간이 없었다. 그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고 원래 이호연이 깔끔한 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억울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놀려 주고 싶었다.
전직관들 성격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도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화하면 자꾸 핑퐁핑퐁 하게 되는 건가?
“그―.”
“놀리지 마요.”
“…….”
어떻게 알았지? 턱에 손을 괴고 그를 쳐다보니 이호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눈치가 더 좋아진 것인지 내게 익숙해진 것인지.
내가 자신을 놀릴 때면 놀리는 것이라는 걸 알아채는 횟수가 늘었다. 옛날에는 더… 더…. 잘 속았던가? 어,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 알았어?”
“…궁금해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가만 바라보던 이호연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안 알려 줘요.”
전직관한테 가서 심술궂게 구는 법도 배워 왔나 보다.
***
“너 피곤해 보여.”
다음날 그를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하는 것 치곤 눈 밑이 까맸다. 괜히 놀러 간다고 했나? 고생시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이호연이 내 손을 잡으며 온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요새 용으로 변형하는 법 배우고 있어서 그래요. 청소하느라가 아니라.”
“용….”
설마 했는데 진짜 용으로 변형하는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근데 그게 용이 맞긴 하구나. 아득함이 느껴질 정도로 거대했던 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호연을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용으로 변하는 게 가능한 거야? 원래는 호랑이잖아.”
호랑이랑 용은 너무 다르지 않나? 용호상박이라는 말도 있고. 그 둘이 어떻게 같은 존재로서 있을 수가 있지?
내 의문에 이호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호’의 뜻을 가진 존재가 둘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신수로서의 백호와 영수로서의 백호가 서로 다른 모습이거든요.”
“신수와 영수?”
둘이 비슷한 것 아닌가? 의아함으로 가득한 내 얼굴을 본 이호연이 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 입력하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고구려 벽화요.”
이호연이 손끝으로 벽화 위에 그려진 기이한 용을 가리켰다. 몸통과 꼬리가 가늘고 길며, 네 개의 다리를 가졌다. 몸에는 호랑이 무늬가 그려져 있고, 뿔은 없으며, 갈기를 단 호랑이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호연의 전직관이 용으로 변했을 때와 비슷한 외양이었다.
“이 용의 이름이 백호라고?”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놀란 점은 백호가 용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문헌으로 있다는 것에 놀란 거였다.
나는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 그림 밑에 써 있는 설명을 읽었다.
‘고구려 우현리 중묘 벽화에는 용을 닮은 백호가 그려져 있다. 몸이 기다랗고 날렵한 몸놀림을 보여 주는데 이 생김새가 사신 백호의 모습―.’
“문헌….”
역사에도. 설화에도. 어느 나라의 민담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괴물들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존재들. 그것이 전직관이었다. 랑을 제외하고.
그런데 랑 말고도 기록된 전직관이 있다고?
백호란 이름으로 백호의 모습으로만 변형하는 이호연의 모습을 보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이호연 외에는 없으나 외국에는 간간이 동물의 모습으로 변형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드래곤이 경우도 있었고, 흔하게 여우나 뱀인 경우도 있었다. 백호도 마찬가지였다. 설화에선 산신이라고 불리고는 했지만 실제로 백호가 전설 속 동물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설로 따지면 드래곤 쪽이 전설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안 됐다. 그의 전직관이 용으로 변한 것을 봤을 때라도 의심해 봤어야 했다. 아니, 랑이 그와 아는 사이라는 점에서부터 애초에 의심을 시작했어야 했다.
정신없으니 이런 것도 잊지. 애꿎은 손톱 옆을 긁어내니 거스러미가 일었다. 기대 없는 물음이 입을 통해 나왔다.
“혹시 전직관 이름이 뭔지 알아?”
“아니요. 매번 알려 주지 않아서….”
심술맞아서 알려 주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엔 걸리는 것이 있었다. 랑 또한 내게 제대로 된 이름을 알려 주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전직할 때는 뭐 이상한 건 없었어?”
내 물음에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온전히 랑과 비슷한 경우는 아니라는 건가?
이호연의 전직 명은 마지막 호랑이. 전직 명은 전직관의 별칭이다. 그런데 왜 마지막 호랑이지?
그 남자의 복식은 신라 시대의 옷이었다. 기록상 마지막 호랑이는 조선 때고. 기록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라 어떠한 비유인가? 듣고 넘겼던 모든 것들이 내 신경을 콕콕 찔러 대는 것 같았다.
“…전직관한테, 고구려 벽화 얘기를 한 적 있어?”
“…아뇨.”
다행이다. 랑의 정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마치 제재라도 하듯 테오그라젠스가 간섭했다. 몸이 굳었고,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똑같이 제재를 받았으나 벗어날 수 있었던 랑이 나를 구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호연의 전직관은 그를 구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만난 것은 한 번뿐이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는 않으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결코 도와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방치하고, 밀어낸다. 그로 인해 죽을지언정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 할 것이다.
“그거, 전직관 앞에서 말하지 마.”
랑에 대한 것을 알아내고, 교수님과 이야기했을 때 별문제가 없었다. 랑에게 직접 말하자마자 몸이 천천히 굳기 시작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봐선 전직관 앞에서 직접 입으로 말하는 것이 테오그라젠스의 시선을 끄는 조건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이호연은 뜬금없는 내 말에 뭐라 묻지도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감이 들었고, 자연스럽기까지 한 그의 행동에 미안함도 들었다. 묻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된 것 같아서.
“이유는 안 물어보는 거야?”
묻지 않기를 바라면서 묻는 기만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의 옷 소매를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그런 내 손끝을 힐끔 쳐다본 이호연이 묘한 낯을 하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알려 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별로 그 호랑이랑 사이좋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도 아니라서 상관없어요.”
“…….”
그런 이유는 조금 슬픈데.
“그러니까, 미안해하거나 하지 않아도 돼요.”
배려인지, 진심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를 보며 나 또한 웃었다. 기껏 날 생각해 주는 이에게 괜한 소리를 하거나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
이호연이 사는 곳은 리블의 사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피스텔로, 깔끔한 외관을 가진 곳이었다. 문 앞까지는 와 봤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 잠시만….”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나올게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번에 말해 준 비밀번호 진짜였구나. 김수혁 알면 울 것 같았다.
남의 집 멀거니 바라보며 서 있는 것도 뭔가 웃겨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꺼냈다. 커넥터 자게나 인터넷 기사나 하나같이 이번 미국에서 주최한 모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쭉 훑어보다 보니 기시감이 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고민하던 나는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아, 알겠다. 뭐가 이상한지.
“…묻혔네?”
며칠 전만 해도 전직자 관리 정부 기관으로 도배되어 있던 기사들이 이제는 미국의 모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의도한 것처럼.
전직자 관리 기관 문제는 이렇게 까지 빠르게 묻힐 만한 일이 아니었다.
“…….”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하자 벽 너머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방음 자체는 하늘 조각 안의 자원을 섞어 넣은 만큼 좋았다. 집중하면 들리는 것을 보아 그렇게 많이 섞은 것도 아닌 듯했지만.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리를 듣다 눈을 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핸드폰과 커넥터를 번갈아 쳐다보다 핸드폰을 들었다. 전직자계의 아싸인지라 커넥터보다 핸드폰이 익숙했다.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주세진 씨에게 문자를 보냄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
“…….”
“들어…와요.”
낯을 살짝 붉히며 하는 말이 참, 사람 기분 묘하게 만들었다. 괜히 나까지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이호연의 움직임만큼 나는 앞으로 움직여 집 안에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며 도어락 소리가 울렸다.
전날 이호연의 집이 어떨지 상상을 해 봤다. 왠지 블랙 앤 화이트 같은 색 구조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았다. 샤워기는 해바라기고 냉장고에는 물이랑 술 밖에 없는 광공 인테리어.
하지만 의외로 그의 집은 전체적으로 베이지색과 밝은 원목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뜻하며 밝은 느낌이었다. 쿠션이나 커튼은 베이비 블루 색으로 밝은색 위주인 집에 포인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난리 친 것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깔끔한 편이었다.
“아…!”
“?”
찬찬히 집을 둘러보며 구경하는데 갑자기 옆에 어색하게 서 있던 이호연이 소리를 냈다. 왜 그러나 싶어 그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이호연이 잽싸게 움직여 커튼을 쳐 버렸다.
“…갑자기 커튼은 왜?”
“그… 빨래를 안 걷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귓가를 보며 그냥 묻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대충 무슨 빨래 때문에 저러는지 알 것 같아서 더 어색했다.
사실 이호연의 집에 놀러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의 내 기분은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인제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이호연은 절친한 내 친구 같은 것이 아니었고, 이곳도 친구 집은 아니었다. 친구는 친구인데 앞에 추가로 붙는 글자가 있었다. 그 사실은 인지하니 괜스레, 어색했다.
“사과 있는데….”
“어, 도와줄까?”
“괜찮아요. 앉아 있으면 금방 가져다줄게요.”
“응….”
커튼과 똑같은 색의 슬리퍼를 신으며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슬리퍼 하나까지 이 집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듯 내 발에 맞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자꾸만 벗겨지는 슬리퍼를 바라보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남의 공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 위축시키는 줄 몰랐다. 위축이 아니라 긴장인가….
애꿎은 쿠션을 끌고 와 꾹꾹 눌렀다. 찹쌀떡 같은 감촉이 좋았다.
말랑말랑 쿠션을 쥐어뜯으며 꼬마 도깨비들이라도 풀어서 이 어색한 공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렸다. 쿠션을 끌어안으며 소리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접시를 갖고 오던 이호연과 눈이 마주쳤다.
“…….”
“…….”
10분 뒤에도 분위기 이러면 그냥 꼬마 도깨비들 열 깨비 전부 풀어놔야겠다. 내가 다짐하는 것과 동시에 잠시 멈추었던 이호연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원목 테이블 위로 접시를 내려놓은 이호연이 잠시 머뭇거리다 내 맞은편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평소 같으면 옆에 앉았을 호랑이를 생각해 보면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애는 나가서 하라고 잔소리하는 주세진이 봤다면 매우 환영했을 모습이기도 하고. 포크로 사과 하나를 콕 찔러 내게 내미는 것을 손을 뻗어 받았다.
“…귀엽네.”
사과를 본 내 감상이었다. 깜찍한 토끼 사과였다. 우리 엄마도 귀찮다고 토끼 모양으로 안 깎아 주는데 정성도 정성이지만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자세히 보면 귀가 짝짝이기는 했지만 귀여운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잘 익은 달짝지근한 사과를 먹으며 이호연을 보았다. 토끼 사과 귀엽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것인지 꼬리가 살랑거렸다.
“…….”
생각해 보니까 누구 집에 마지막으로 놀러 가 본 것이 거의 2년 전이었다. 어색함의 원인이 이호연의 집이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묘해지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나, 다른 사람 집에 놀러 온 거 오랜만이야.”
왜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제는 놀러 갈 만한 친구네가 없다는 것이 떠올라서였는지 모른다.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은 어디까지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나 눈을 휘며,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새삼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언제든 놀러 와요. 비번도 알잖아요.”
“시도때도 없이 놀러오면 곤란하지 않아?”
“준비할 시간만 주세요.”
“…언제든 와도 돼? 누구 집에 오는 거 안 좋아한다며.”
“류가, 누구나는 아니잖아요.”
“…….”
그렇게 말하면 정말 그러고 싶어진다. 포크에 반만 남아 있던 사과를 입에 쏙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이호연에게 웃어 주고 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예의상 하는 말 아니고?”
“예의상 하는 말이면 비번도 안 가르쳐 줬겠죠.”
그것도 그렇다. 비번은커녕 집 주소도 제대로 안 알려 줬다며 찡찡거리던 김수혁을 생각해 보면 이호연이 나를 얼마나 특별 취급하는지 알 것 같았다.
토끼가 폴짝폴짝 뛰는 것 같은 속이 간질거렸다. 그 간지러움을 티 내기 싫어 괜스레 호랑이를 놀리기로 했다. 사과를 이호연의 입에 넣어 주며 얄밉게 말했다.
“다음에 오기 전에는 빨래 미리 걷으라고 말해 줄게.”
“…봤어요?”
입에 물었던 사과를 손에 들고 달아오른 낯으로 이호연이 내게 물었다.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다 눈을 휘며 웃었다.
“안 알려 줘.”
아이 앞에서 행동 조심합시다. 전날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똑같이 하는 나를 밉지 않게 흘겨본 이호연이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입 안에 넣었다.
그것을 지켜보다 몸을 일으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 내 행동에 이호연이 멈칫거리는 사이 고개를 숙여 이호연의 입에 물려 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참 달았다. 굳은 듯 꼼짝 않는 이호연을 보며 말했다.
“자주 놀러 올게.”
토끼 사과 좋아하거든.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이 입 안에 사과를 마저 씹어 삼켰다. 내 허리에 닿은 손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 주니.
씹지 않아도 입 안에 사과 향이 났다.
***
커튼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아 시간이 어림짐작 되지 않았다.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사과를 힐끔 쳐다보고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피곤해 보인다 싶더니 기어코 잠들어 버렸다. 살짝 흐트러진 하얀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어 보았다. 고양이 털 만지는 기분이다.
손을 좀 더 위로 올려 하얗고 복슬복슬한 귀를 만졌다. 만질 때마다 참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말랑말랑 귀를 몇 번 더 만지작거리다 부엌 쪽으로 갔다. 목이 말랐다.
싱크대 쪽에서 컵을 꺼내 부엌을 둘러봤지만, 따로 정수기가 보이지 않았다. 물은 냉장고에 있는 듯했다.
“음….”
남의 집 냉장고 함부로 여는 건 좀 그런데…. 거실 쪽을 봤지만 피곤함에 절은 호랑이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냉장고 앞에서 서성거리며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따가 일어나면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사과?”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냉장고 안을 멍하니 보았다. 냉장고에 사과가 많았다. 그것도 깎아서 통에 넣어 둔 것들이.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토끼 모양 사과였다.
연습한 거였구나. 그것을 깨닫자마자 냉장고 안 토끼들이 튀어나와 내 위로 폴짝폴짝 뛰노는 것 같았다.
이거 연습할 시간에 잠이나 잘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솔직히 묘하게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반찬 밀어 주는 엄마를 보며 좋아 죽으려 하는 아빠가 이런 기분이었나 싶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물병 하나를 꺼내고 냉장고를 닫았다. 찬물을 마시니 달아오른 귓가가 조금 식는 것 같았다.
나도 몰랐는데, 내 취향이 이런 쪽이었나 보다. 아니면 사람 따라 취향 따라가는 거일 수도 있고.
거실로 나오니 이호연은 아직도 꿈나라 여행 중이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뺨을 콕, 콕 찔러 보았다. 회복력이 좋아 얼굴에 나 있던 상처가 거의 사라진 후였다.
“누가 그렇게 귀여운 짓을 하래.”
나보다 세 살이나 많으면서. 무릎 위에 팔을 얹고 그 위에 뺨을 기대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보니 새삼, 맹수과의 미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는 짓은 정반대지만.
만약, 기억하고 이런 짓 한 거면 이호연은 호랑이가 아니라 여우였다.
“…….”
…기억?
‘엄마한테 토끼 사과 깎아 달라고 할 거야.’
‘오래 걸리잖아. 옆에 더 오래 있을 수 있겠지.’
아, 맞아, 그때,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그게 언제 적에 한 말인데 그걸 기억하고….
“…….”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더라?
“어….”
그 말을 했을 때 이호연이 뭐라고 했지? 눈을 감고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역시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언제 이런 대화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붉은 별똥별이 떨어지던 그날에 한 대화 중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뭔가, 뭔가 이상한데.
그날만 대화한 게 아니었나? 그 전에, 혹은 그 후에도 몇 번 대화한 적이 있었나?
“언제였지….”
모르겠다.
“…….”
뭐지?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뭔가, 놓친 것 같은….
“류….”
“…일어났어?”
생각을 멈췄다. 몽롱한 회색 눈이 멍하니 나를 보았다. 이호연이 손끝을 움찔거리다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매만졌다. 잠이 덜 깬 건가 싶어 그를 보았다.
“나 목말라서 물 꺼내 먹었는데.”
“잘 했어요….”
“잠 덜 깼지?”
“아뇨….”
목소리가 늘어지는 것이 잠 덜 깬 것이 맞는 듯했다. 손에 턱을 괴고 반대 손을 뻗어 이호연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어 보았다.
요즈음 고생이 심해서 그런지 전보다 턱선이 날카로워졌다. 내 손길을 따라 하듯 그의 눈이 깜빡깜빡 감기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또 자게?”
“일어나야 하는데…. 잠이 안 깨요….”
“그럼 내가 잠 깨게 해 줄까?”
이호연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비벼진 하얀 머리칼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 뭉개졌다. 말랑말랑 호랑이 귀를 손끝으로 건들다 입을 열었다.
“나, 네 방 들어가도 돼?”
“!”
효과가 좋았다. 곧바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이호연이 제 머리를 쓸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잘 잤어?”
“…네.”
“그래서 대답은?”
내 물음에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던 이호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낯을 굳혔다. 단순한 내 착각일까? 아니면 이호연과 정말 그런 대화를 했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이호연을 따라 들어간 그의 방은 따뜻한 봄볕, 혹은 가을 한낮 같던 거실과 달리 겨울의 밤 같은 색감을 갖고 있었다.
벽은 밝은 회색이었고, 전체적인 가구의 색이 어두운 갈색이었다. 베이비 블루 대신 짙은 남색이 방 안을 꾸미고 있었다.
“옷 갖고 올게요.”
방에 연결된 작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며 이호연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 한편에 놓인 책장을 훑어보았다.
문학책보다는 비문학, 혹은 인문학 책이 압도적으로 많이 책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ᐧ문화, 생활과 윤리 같은 수능 문제집들도 몇 권 보였다. 기념 삼아 갖고 있는 옛 문제집인 듯했다.
난 다 태워 버렸던 것 같은데 이걸 추억으로 갖고 있기도 하는구나. 용케 지옥도를 거치면서 무사했네 싶었다.
토익 책도. 새삼스럽게 그가 대학생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생경한 기분으로 문제집 한 권을 꺼내 보았다. 빨간펜으로만 필기된 책 안의 글자는 대체로 정갈했다. 중간중간 졸았는지 휴먼 졸림체로 변하는 글씨들을 볼 때면 웃음이 나왔다.
“…….”
그리고 웃음이 멎었다.
이때만 해도 몰랐는데. 세상이 이렇게 될 거라고…. 수능 공부하고, 수능을 보고, 결과만을 기다리다가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다. 기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과 졸업 기념 여행을 떠났다. 열심히 계획을 짜 봤자 놀다 보면 다 어길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그래, 즐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제집을 덮어 다시 제자리에 넣었다. 책장에는 책 말고도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금보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 그리고 검은 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는 이호연이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펜션…. 예뻤을까….”
펜션 예약을 담당한 친구가 자신만만하게 굴었었다. 이것보다 좋은 숙소는 없을 거라며 웃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방에는 못 들어갔으니까. 기억 나지 않으니 못 들어간 것이 맞을 것이다.
괜한 심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진을 덮어 버렸다. 딱딱한 나무틀을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언제 왔는지 내 뒤에 이호연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까만 두루마기를 받아 들며 그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너무 늦게 주는 거 아니야?”
“…깜박 잊었어요.”
손에 들린 두루마기에서 또 좋은 냄새가 났다. 부드러운 검은 천을 매만지면 손에 까만 것이 묻어 나올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을 상상일 뿐이었다.
손에 묻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미련이 만들어 낸 환상이기도 했다.
손에서 힘을 풀었다. 스르륵 부드럽게 흘러내린 두루마기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옷자락의 끝을 눈에 담다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자꾸 장비를 세탁기에 빠는 거야?”
“…세탁기에 빠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생각해 보니 이호연은 따로 장비를 입은 적이 없었다. 호랑이 모습으로 변형하니 장비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넣었네 하는 생각으로 몸을 낮춰 그림자 속에서 다시 두루마기를 끄집어냈다.
“여기 봐 봐.”
내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본 이호연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옷 안쪽, 목덜미 부근에 수놓인 연꽃 문양이 화려했다.
“다른 장비는 모르겠는데 내 장비는 이렇게 연꽃 무늬가 수놓여 있어.”
“무슨 효과가 있는 거예요?”
“음… 청결 마법?”
주술이라고 해야 하나. 이예린의 장비는 안쪽에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장비마다 그려진 문양은 다르지만 대부분 갖는 효과는 똑같았다.
“생산 계열 전직자들이 만든 장비면 없을 수도 있는데, 전직관한테 받은 장비에는 모두 기본적으로 이런 것들이 새겨져 있어.”
“아…. 이쪽으론 관심이 별로 없어서….”
하긴, 그것도 그렇다. 어차피 쓰지도 않는 장비에 이런 것이 있든 없든 별로 상관없을 테니까.
“그럼 빨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응?”
두루마기를 다시 그림자 안으로 집어넣는데 이호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면 귀여운 걱정을 하는 이호연을 쳐다보았다.
세탁기에 넣고 빨았다고 문제 생기면 물속에서 그거 입고 못 싸운다. 엉뚱한 걱정이었다.
“…….”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만 괜스레 놀리고 싶었다.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놀리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인지함으로 인한 불길함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괜한 것을 떠올리는 물건을 봐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기분이 나빠서, 우울하고 그래서, 놀리고 싶었다.
한 걸음, 이호연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런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이호연은 점점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몸을 움찔거리더니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류?”
이호연의 다리가 침대에 부딪혔다. 뒤를 힐끔 돌아보는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대로 툭, 밀었다. 버틸 수 있음에도 내 손짓에 반항하지 않은 호랑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긴장감이 조금 전, 제 사진을 덮어 버리는 나를 봤을 때의 긴장감과는 다른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곧 원래의 긴장감으로 돌아올 얼굴이었다.
이호연은 내게 말했다. 내가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또한, 진실이 아닐 뿐 거짓이 아니라고.
내 경험상 상대의 그런 점을 빠르게 눈치채는 이들은 본인도 그렇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그 속은 어떨지 모르는 주세진이 내게 상담을 제안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교묘하게 진실을 쏙 빼놓고 이야기한다면 이호연은 입을 다문다. 묻지 않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실들을 숨긴다.
다만 묻어 두는 진실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가 다를 뿐이다. 나는 ‘나’를 위해서, 너도 ‘나’를 위해서.
침대 위, 이호연의 다리 바로 옆에 내 다리가 닿았다. 지지대는 이호연의 어깨였다. 두 사람분의 무게가 한쪽으로 모이자 침대의 매트리스가 살짝 기울어졌다.
뒤로 흔들거리는 내 등을 이호연이 손을 뻗어 바쳤다. 방 안에 있는 전신 거울에 우리의 모습이 비쳤다. 전혀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 물어볼 거 있는데.”
“…꼭 이 자세로 물어봐야 하는 건가요?”
“이래야 당황해서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다 내뱉을 거 아니야.”
“…….”
도망도 못 갈 거고.
우리는 진실을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닮았을지 모르나 얼마나 이기적인가가 달랐다. 이호연은 수긍하고, 나는 못되게도 그것을 알아내려 한다. 그리고 이호연은 그것을 매번 받아 준다.
그래. ‘매번’ 받아 줬어. 분명히.
등에 닿은 손이 움찔거렸다. 어깨에 올린 손 하나를 살짝 움직여 그의 목을 더듬다가 귀로, 뺨으로 움직였다. 옅어진 상처 위를 손끝으로 쓸며 그에게 물었다.
“너, 나랑 대화한 거 한 번이 아니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이호연의 몸이 멈췄다. 놀라 크게 떠진 눈이 나를 보았다.
사과에 대한 단편적인 대화에 대한 기억. 그리고 제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덮어 버리는 나를 보며 긴장감이 느껴지던 얼굴. 그리고 아주 가끔. 알 수 없는 과거를 더듬던 그의 얼굴과 말.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이호연이 알고 있었다. 내 말에 눈길을 피하는 그의 행동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있잖아. 내가 가진 능력 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능력이 뭔지 알아?”
“…….”
“정신계 마법이야. 불 다루는 마법사들이 부러워하는 푸른 불도 정신계 마법을 위한 매개체일 뿐이야. 그림자도 정신을 건드릴 수 있는 능력에 비하면 그리 가치가 높지 않아. 그런데 내 전직관은 이상할 정도로 정신계 마법은 잘 안 가르쳐 주더라고.”
“류―.”
뭐라 말하려는 그를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으로 제지했다. 그런 내 행동에 회색 눈에 불안감과 걱정이 감돌았다. 이것 봐.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뭔가 아는 게 아닌 이상.
“그런데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했어. 그런데 한번 생각하고 나니까 왜 지금까지 생각 못 했나 싶을 정도로 생각이 계속 이어지더라.”
랑이 내게 정신계 마법을 제대로 가르친 것은 한 번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환각 정도의 잔기술, 그리고 이론만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마법이랑 참 안 맞는다고 하고 넘겼을 뿐이다.
마치, 토끼 사과를 보기 전까지 내가 이호연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 못 한 것처럼. 커튼 너머를 엿보기 전까지 그 안에 든 것이 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의 생각과 기억에 커튼을 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으나 기억났다.
그건 랑이 내게 정신계 마법을 가르칠 때 제일 먼저 가르친 기술이었다.
“왜 생각을 못 했는지 이상할 정도야.”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통제시킬 정도의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 내가 정신계 마법을 제대로 못 다룬다고 생각했다.
이호연과의 재회한 날,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기억을 못 건드린다고 단언했으나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그거였다. 그런데 못 한다고 단정 지었다.
이호연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정신계 마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랑 또한 뭔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둘 중 하나였다. 내 머리에 손댄 것이 랑이거나, 아니면 나 자신이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거나.
내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 하나가 내 손을 붙잡았다. 뺨보다 더 따뜻한 손안에 잡힌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기억 나는데요?”
조심스레 묻는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얽어매는 손을 바라보다 말했다.
“몰라.”
모른다. 그건 진심이었다. 어설프게 배웠던 것을 써먹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너무 완벽하게 써먹은 것인지 정신계 마법이 걸렸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으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는 것을 한번 인지하고 나니 내가 가볍게 생각하고 넘겨 버렸던 것들이 얼마나 얇은 지지대 하나 믿고 버티고 있던 건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일들을 겪은 것치고 너무 잘 지냈다. 부모님과 너무 일상적인 평화로움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응당 느꼈어야 할 불안이나 초조함도 거의 없었다.
지옥도 당시 그렇게 좋다고 티 내고, 쫓아다니는 이호연에게 말 한마디 안 걸었을 거라는 확신도 이제는 없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스스로 내 머리에 손댄 거면 그건 나 스스로가 못 버텨서 한 행동이었을 거고, 랑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랑이 건드렸다면 그가 보기엔 그러지 않으면 내가 망가질 거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기억을 건드는 것은 커튼을 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커튼을 걷어 볼 용기가 생기거나,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 그제서야 천천히 손을 댄다. 나 같은 경우엔 있는지도 몰랐던 커튼을 얼떨결에 발견해 호기심에 살짝 들춰 본 정도였다.
인지는 하나, 정확히 기억은 못 한다는 점에서 아직 내가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예린이랑 대화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이예린?”
이호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다.
내 과거에 대해서 그녀에게 말할 때까지 그 일들을 거의 잊고 지냈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내가 잊고 싶어서 생각 안 하고 살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예린이라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컨닝하듯 커튼 안을 슬쩍 훔쳐봤던 거였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나는 커튼 안에 내 기억에 대한 잔상만을 남기고 다시 잊었을 거고, 잔상이 남아 있으니 의심조차 하지 않고 내 기억이 자연스러운 거라 착각했을 것이다.
이예린이 한 번이라도 그때 내가 한 말들을 언급했다면 더 빠르게 알아챘을 수도 있으나, 그렇게 배려 없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깨닫는 것이 늦춰졌다.
토끼 사과 같은 깜찍 발랄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애초에 커튼은 천천히 열리고 있었을 거다. 그저 내가 조금 더 빨리 커튼에 손을 댄 것뿐이었다.
그제야 간간이 멍해졌던 일들이 떠올랐다. 무언가 생각하다 멍해지고,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잊었으면서 가볍게 넘겼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마법이었다.
화를 낼 대상도 없고, 화를 낼 이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겠는데….
“…….”
알 수 없는 기분에 한숨이 나왔다. 몸에 힘을 풀어 이호연에게 늘어트려 몸을 맡겼다. 날 품에 안은 이호연은 갑작스러운 내 태도 변화 때문에 당황한 듯하다가 천천히 내 등을 토닥거렸다.
“류, 화 났어요?”
“…아니.”
이호연이 뭔가 알고 있다는 점이 영 이상하기는 한데, 아마 기억 못 하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려니 싶었다. 그도 아니면 스스로 판단하기에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내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거나.
“말했으면 좋겠어요?”
“뭐를?”
“나는 알고, 류는 잊은 것들.”
“글쎄….”
일부러 들출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때되면 가장 알맞은 시기에 저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종류의 마법이었다. 이호연이 말하든 말든, 결국 나는 기억해 내는 구조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이호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속였다고 생각해서라기엔 나 또한 만만치 않게 말 안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냥, 그냥 지금은 이렇게 껴안고 있고만 싶었다.
그런 내 행동에 대해 이호연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등을 토닥거렸다. 애 취급인가 하기엔….
힘이 들어간 뒷목을 손끝으로 꾹 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게 좋을 것 같아?”
“가능하다면 조금 더 나중에 알면 좋겠어요.”
“그래….”
그럼 됐어.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보다 더, 꽉 맞물려진 이음새처럼 붙은 몸은 심장 소리마저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았다.
향수 냄새인지, 살 냄새인지.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니 이호연이 몸을 움찔거렸다. 피하듯 살살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살짝 깨물어 주었다.
“류!”
“왜 자꾸 움직여.”
“간지러워서….”
“너도 깨물었잖아. 바닷가 동굴에서 실컷.”
“그게 간지럽다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이 간지럽다는 건데….”
아…. 머리카락. 살짝 고개를 들자 이호연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던 머리카락이 내 고갯짓을 따라 움직였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다시 이호연을 끌어안았다.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어.”
“…….”
“화가 난 건 아닌데, 별로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그런데 끌어안고 싶기는 해.”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어둠뿐인 눈꺼풀 아래,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말하지 않아서 서운한가요?”
“그렇게 따지기엔 내가 말 안 한 것이 더 많은데.”
“그거랑 이건 조금 다르지 않아요? 내가 숨긴 건 기억과 관련된 건데.”
“…나 스스로가 지운 기억이잖아.”
슬슬 자세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으로 내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나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눈을 뜨고, 파묻히듯 안겼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회색 눈이 나를 보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빛바랜 은, 혹은 먼지 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색이다.
그런데 별 같았다.
“…누울래요?”
“무슨 의미로?”
“…건전한 의미요.”
괜스레 놀리는 내 어조에 이호연은 살짝 곤란한 낯을 하기는 했으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제 침대에 눕혀 준 이호연이 옆에 앉아 내 손을 잡았다. 마치 병간호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류는… 가끔 지나치게 선을 긋는 것 같아요.”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마주 잡은 손을 보았다. 손장난치는 내 행동을 가만 놔두며 이호연이 말을 이었다.
“사람 감정이 하나로 정의되는 건 아니잖아요…. 사랑과 죄책감이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
“내가… 좋고, 존경하고, 믿지만 지옥도 당시 나와 류를 전선에 배치하는 전략을 세웠던 형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처럼요.”
“뭐…?”
당황하는 나를 보며 이호연은 흐리게 웃었다.
“원한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형이 전략을 세우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요. 보기 싫어요.”
다시 일어나려는 나를 이호연이 제지했다. 얌전히 침대에 누우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주세진도 알아?”
“얼핏 눈치채기는 했을 거예요.”
핑계였구나. 주세진과 공략대는 회의를 하지 않는다. 집중 안 하고 정신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세진이 이호연의 이런 생각을 눈치채고 회의를 하지 않았던 거면….
굳어지는 내 얼굴을 보며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내 행동에 대해 이성적 생각과 감정적 생각을 나누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이에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그거 하나를 말해 주기 위해 든 예시가 너무 강렬하네….”
“류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주어가 없었으나 그 대상이 주세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세진을 어떻게 생각하냐니.
“난… 말했잖아. 안 싫어해.”
그 말을 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눈을 피했다. 잡지 않은 손의 거스러미를 또 뚝, 뚝 끊기 위해 움직였다. 검지 손톱이 엄지손톱에 맞닿아 틱틱 소리를 냈다. 이호연이 그런 내 손을 제지했다.
주세진은 그 당시에 가장 옳은 선택을 했고, 그 옳은 선택을 해야만 했던 무게감도 안다. 우리는 그래야 했기에 그랬을 뿐, 그 안에 우리의 개인적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한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냐, 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온전히 답하지는 못한다.
‘너는 그럼 확률 재 가며 행동할 거야?’
기생충 사건 때, 맥을 못 추리는 이호연을 고치기 위해 그의 히든 게이트에 들어가겠다는 나를 말리던 주세진을 보며 그리 생각했었다.
내가 정말 지옥도 당시에 주세진에 대한 유감이 없었다면 무의식적으로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확률 재가며, 같은 명백하게 상처를 후빌 그런 말을.
지옥도의 총사령관. 정부는 있으나 마나 한 상태. 제 살길만 찾는 사람들. 무법자나 다름없던 전직자들.
그런 이들을 한데 묶어 다루는 것이 가능했던 유일한 지휘 계열.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앙금이었다. 이해하고 받아들여도 잔재를 남기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끌어안고도 웃을 수 있다면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온전히 못 받아들여도 웃을 수 있더라. 속이 거북했다. 거북한 말들이 슬그머니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해, 애써 원망을 삼켰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깊숙이 숨겨진 원망의 잔재가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잊으려 했다. 그러면 안 돼, 라고 누가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워하면 안 되는 사람. 원망하면 안 되는 사람. 내가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의무에 가까웠다.
최선의 선택을 한 주세진을 원망하면 안 돼. 섭섭하거나 서운해하면 안 돼.
나를 앞으로 내미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면 미움의 종착지는 주세진이 되었다. 불공평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움은 그를 향해 기어갔다.
좋은 감정만 남기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빈정 상할 일 없고, 투닥거릴 일 없고. 미움이라는 감정은 나만 해결하면 되는 거니까.
주세진도 이호연도 각각 내게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나 혼자만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호연도 그때 일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겨우’라는 이름이 붙는 내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
그랬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아래 세상이 어두웠다. 그러나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언제까지고 어둠 속에 숨을 수는 없는 문제였다.
“서운하다고 해도 돼?”
“얼마든지요.”
“…뒷담화하는 기분이야.”
“그럼 내가 주범이네요. 먼저 이야기 꺼냈으니까.”
답지 않게 장난스러웠다. 덕분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 수 있었다.
“…주세진을 조금 원망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
어린시절 엄마 미워! 하고 말하면 무슨 일 일어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처럼.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그런 내 행동을 제지하듯, 아픈 입술을 위로하듯 온기가 닿았다.
뺨에 하얀 머리카락이 닿았다. 살랑거리는 움직임으로 나를 간지럽히고 도망갔다. 열기가 남은 입술 위를 더듬으며 그를 보았다.
회색 눈의 청년이 내게 물었다.
“원망하고, 싫어하나요?”
“…싫어하는 건 아니야.”
원망한다, 아주 조금.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좋아한다. 정말 싫다면 주세진을 보며 웃고 떠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형이 싫진 않아요.”
“…….”
“그런데 사람은… 싫어하지 않아도 원망은 할 수 있더라고요.”
“맞아. 정말 이상해.”
당사자들만 아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서로에게 죄책감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갖는 나와 이호연이나, 원망과 호감을 동시에 받는 주세진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은 감정이 얽히고 섞이는 그 오묘함을 당사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그때의 그 감각,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은 그 당시에 나만이 아는 것이다.
얼마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가가 관건이었다. 조금 더, 혹은 조금 덜. 저울로는 잴 수 없는 그 약간의 차이로 웃을 것인가, 웃는 낯을 할 것인가가 갈리는 거다.
우리는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원망한다, 하지만 동시에 좋아한다. 선 그으며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흑백으로 나뉠 수 없는 다양한 색감들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손을 뻗어 이호연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버티는 시늉도 하지 않은 그가 내 옆으로 몸을 눕혔다.
“이렇게 우울한 얘기나 하려고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었는데.”
“싫어요?”
“아니, 좋아.”
앙금이 쌓이면 나는 다시 한번 서러워질 것 같거든. 옆으로 돌아누워 그를 보았다. 이호연 또한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얘기해 줄까? 내가 숨기고 말 안 했던 것들.”
“…….”
의미를 알 수 없는 침묵이었다. 침묵이 가끔은 답이 되지만 이번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듯했다.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고 간 이호연이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췄다.
“깨물 거야?”
“안 깨물어요.”
손을 뻗어 조금 전 내가 물어 흔적이 남은 목덜미를 가리켰다.
“가을이 짧아져서 다행이네.”
“…….”
겨울에 입는 옷은 기니까. 대답은? 벙긋거리며 소리 내지 않고 말하는 내 입을 바라보던 이호연이 몸을 일으켰다. 뺨에 손이 닿았다. 간질이고 도망쳤던 하얀 머리카락이 다시 찾아 왔다.
“안 깨문다며?”
밭은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내 말에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다시 움직였다.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대화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침묵의 답은 알 것 같았다.
듣지 않겠다는 거절이었다.
고양이 털 같은 감촉의 머리를 헤집으며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 호랑이에게 순순히 잡혀 주었다. 그가 왜 거절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날 잡아먹을 듯이 구는 애정 행각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어린애의 행동과 비슷한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
귀엽다. 맛있겠다가 아니라 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몽글몽글한 계란 이불을 덮은 밥으로 만들어진 곰돌이가 소스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사과도 그렇고…. 이런 건 다 어디서 찾아서 만드는 거야?”
오므라이스가 너무 귀여워서 손대기 미안할 정도였다. 숟가락을 들고 머뭇거리는 나를 본 이호연이 웃으며 말했다.
“만들어 주고 싶어서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 말에 냉장고 속 잔뜩 있던 사과가 생각났다. 간질거리는 속내를 숨기고 곰돌이를 피해 계란을 살짝 잘라 입 안에 넣었다.
“…맛있다.”
이게 바로 자취 5년 차의 요리 실력이구나. 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이호연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그런 그의 목에 물린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녁 만들어 주겠다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지라 더 눈에 띄었다.
하얀 피부 위에 불긋한 자국들을 힐끔거리다 그에게 말했다.
“회사 갈 때, 목 가리는 거 입어.”
“…네.”
“…….”
“그… 류도….”
이호연의 말에 반사적으로 목에 손을 얹었다. 누가 봐도 요렇게 저렇게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꼴이었다. 깨물기만 했다. 끝까지 간 거 아니다.
바닷가 동굴에서보다 더 아슬아슬한 듯했지만…. 어쨌든 아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식히지도 못하고 애꿎은 곰돌이를 입 안에 넣는 이호연을 보며 나는 괜한 심술을 부렸다.
제 다리를 툭툭 치는 내 행동에 이호연이 의아함을 담아 나를 보았다. 그것을 못 본 체하며 곰돌이 귀를 조심스럽게 잘라 입 안에 넣었다.
“…….”
다음에 물어봐야지.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을 곰돌이 오므라이스와 함께 삼켰다.
서러운 대화를 한 적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우리는.
***
“나를 위한 행동이었나요?”
내 질문에 새카만 검은 눈이 나를 돌아보았다. 햇빛에 반사되는 기다란 귀고리가 눈이 부셨다. 아득함을 담은 눈이 휜다. 의뭉스럽고, 나는 이해 못할 감정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럼 됐어요.”
그럼, 됐다. 알 수 없는 감정을 삼켜 넘겨 버렸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주 가끔, 랑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고는 했다. 지금처럼.
나만 장르가 달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