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선
날이 차다. 이젠 정말로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찬 공기를 들이 마시며 따끈따끈 부드러운 털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런 내 행동에 커다란 하얀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었고 호랑이 위에 자리 잡은 꼬마 도깨비들과 고양이들이 꼼지락거리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손을 뻗어 호랑이의 코를 쓰다듬어 주었다. 살살 쓰다듬는 내 손길을 따라 고롱고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가로운 한낮의 시간이었다.
“와우.”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지나가다 발견한 이예린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커다란 썬 베드형 벤치에 누워 있던 나는 그런 그녀에게 손을 휘휘 저어 인사했다.
내 이불 겸 침대가 된 하얀 호랑이, 본체 이호연 씨께선 관심 없다는 듯 고양이들을 위해 꼬리나 설렁설렁 흔들어 주었다.
그런 이호연을 으익 하는 얼굴로 쳐다보던 이예린이 떨떠름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주세진 씨가 부르는데요.”
“왜요?”
“모르죠. 전에 말했던 일에 대한 결과물을 말해 주겠다고 하던데요?”
전에 말했던 거? 너무 많아서 뭔지 모르겠는데.
“뭔지 전혀 짐작이 안 가네요. 너무 많아서.”
잇차. 따끈따끈한 호랑이 품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켰다. 살금살금 걸어 와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는 데 성공한 이예린은 애초에 볼일이 고양이였다는 듯 쌩하니 가 버렸다.
“일단 내려갈까?”
내 말에 자기 몸을 타고 놀던 꼬마 도깨비들과 고양이들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 모습으로 그러니 참 기분 묘했다.
우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하얀 호랑이가 하얀 머리칼과 호랑이 귀, 꼬리가 눈에 띄는 미인으로 변했다.
“변형할 때 이펙트는 봐도 봐도 신기한 것 같아.”
내 말에 이호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는 다 사라진 네모네모 디지털 그래픽 같은 이펙트를 생각하며 꼬마 도깨비들에게 손짓했다.
내 그림자 속으로 퐁당퐁당 들어가는 꼬마들을 기다리다 이호연과 함께 주세진의 방으로 이동했다.
“고양이 털 좀 해결하고 들어오랬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자마자 고양이 털을 휘날리는 우리를 본 주세진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나는 간단하게 내 몸에 불붙이는 것으로 해결했고 이호연은 그냥 포기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호연의 옷에 붙은 고양이 털을 집어 후 날리며 주세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갑자기 왜 불렀어요?”
한들한들 허공에 날아다니는 고양이 털을 지켜보던 주세진에 내게 서류 한 묶음을 건넸다. 뭔가 싶어 보니 빼곡하게 적힌 영어 문서였다. 와우.
“국제…. 이게 뭐예요?”
“옛날에 말했던 미국의 학자. 그 일에 대해서 미국이 결정을 내렸어.”
“오래도 걸리네….”
가을에 시작된 이야기였다. 지금은 겨울이고. 요리조리 서류를 넘겨 보다 테이블 위에 곱게 올려놓았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우리 측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야기 끝냈어.”
“그럼….”
“공식적으로는 각국의 대표 전직자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대면해, 친분을 쌓는 것이 목표라고 할 거야. 진짜 만남의 목적은 학자의 입에서 나올 세상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고.”
“미국이 받아들였다는 게 솔직히 놀랍네요. 거절하거나 회유할 줄 알았는데.”
“학자 쪽이 강경했다더라고. 너를 꼭 불러야 하며, 이왕이면 할 수 있는 한 네게 맞춰 달라고.”
“?”
왜? 의문을 담아 주세진을 쳐다보자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대신. 너와 따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전 세계에 알리기로 합의 본 세상의 비밀 외에 너와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그 남자는 자기 전직관을 통해 무엇을 알아냈기에 자꾸 나를 불러내고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학자 쪽이 원했다고 그걸 또 들어준 미국도 대단하기는 했다.
나와의 만남을 위해 하는 배려와 양보가 이제는 꺼림칙할 정도였다. 팔짱을 끼고 천천히 손끝을 두들기며 생각했다.
푸른 불꽃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자. 내가 푸른 불꽃이라 높은 확률로 예상하면서도 굳이 만나겠다고 떼 쓰는 수준으로 고집 부리는 자.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었다. 굳이 내가 따로 만나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번엔 내가 그 학자의 말을 들어 줄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제안을 들어주기 위해서 학자는 한 국가의 장들을 상대해야 했을 테니까.
“알겠다고 전해 주세요.”
나쁠 것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안전성에 대한 보장도 받은 셈이었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사실도 있었다.
사라졌다는 전직관에 대해서.
“…….”
랑은. 그날 이후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스라이 무너질 듯 흔들리던 그 순간이 내 꿈이었다는 듯. 날 보면 살며시 웃었고 여전히 친절했다.
그래서 나도 전과 같이 그를 대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날의 일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로 했다.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을 화제에 올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명을 알았음에도 나는 그를 랑이라 불렀고, 그는 여전히 내게 약과를 쥐여 주고 이것저것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멈춰 버린 시간처럼. 우리는 그것을 유지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왜 그 학자의 전직관이 사라졌는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사라졌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손에 끼워진 반지를 더듬었다. 아공간 반지 안에 들어 있을 하늘 조각을 생각했다. 내가 또다시 알면 안 되는 것을 알아내 그를 만난다면. 그는 또다시 내 손 위에서 기꺼이 놀아나 줄지.
몸에서 힘을 빼고 소파에 기대었다. 미국에 가는 것에 대해 확실히 결정나면 그때 말해 주겠다는 주세진에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반쯤 자신의 말을 흘려듣는 나를 눈치챘는지 주세진은 이야기를 멈추었고 대신 커넥터를 두들겼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그가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안 돼, 리블의 공략대 멤버들과 천칭에서 넘어온 이예린 포함 12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내가 몇 명 점찍어 둘 때 이호연과 김수혁도 각자가 맡은 게이트 안에서 쓸 만한 이들을 추슬러 놓았다고 했다. 그 결과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배는 많은 이들이 리블에 소속되었다.
이제 공략대 팀이 두 개니 구별하기 편하게 이름 지으라는 말에 기존에 있던 공략대는 리블이라고 했고 이예린 쪽은 그냥 천칭으로 하겠다고 했다.
내가 묘한 얼굴로 이예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천칭만큼 자기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고 말했다.
이예린의 선택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리블에는 ‘리블’ 팀과 ‘천칭’ 팀이 생겼다. 주세진은 심란한 얼굴로 우리의 선택을 허락했다.
나와 이호연 포함 총합 8명인 리블 팀. 이예린 포함 총합 12명인 천칭 팀. 거기에 길드장인 주세진까지. 도합 21명이 들어서자 넓게 느껴지던 주세진이 방도 북적북적해졌다.
진작에 앉아 있던 나와 이호연, 주세진을 제외한 이들 중 눈치 싸움에 져서 앉는 데 실패한 이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바닥에 앉거나 소파에 기대어 서든가 하며 자리를 잡았다.
겨우겨우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주세진이 우리에게 알림장 일러 주는 선생님처럼 게이트 공략에 대한 것을 알려 주었다.
공략대들과는 절대 회의하지 않는 주세진 씨의 방식에 이예린은 처음에는 전 천칭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그냥 기쁘게 받아들였다.
학급 회의보다 진행 안 되는 과거의 회의에 대해 알게 된 이예린은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그냥 통보해 달라고 주세진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주세진은 그냥 말하면 웬만해서는 다 받아 주는데 굳이 머리 아프게 회의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예린이 바라던 것은 권력보단 자신과 자기가 맡은 이들의 최소한의 안전, 그리고 정신적 케어였다. 리블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충족해 주니 굳이 권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도 우리는 쪼르르 자리를 잡고 주세진의 말을 경청하는 착한 어린이집 학생들이 되었다.
“이번에는 두 팀 모두 공략하러 나갈 거니까 사다리 타기로 하지 말고 가위바위보도 하지 마.”
주세진의 말을 통해 오랜만에 공략해야 하는 게이트가 두 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내 말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그 속내가 마냥 좋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늘 조각 안에 있던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은 총 두 번이었다. 지옥도. 그리고 몇 달 전, 나비와의 만남 이후에 있었던 그 사건.
그 이후로 괴물들은 더 강해졌고 하늘에서 조각들이 떨어지는 일들이 잦아졌다. 오랜만이라고 했지만 정말로 오랜만은 아니었다.
당장 지난주만 해도 일주일 동안 집에 못 돌아갈 정도로 연속으로 게이트 공략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타이밍 좋게 이예린이 리블에 들어오고 팀을 만들지 않았다면 영 곤란했을 것이다.
일단 리블 팀은 나와 이호연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공격이 가능한 전직자가 없었다. 물론 그들만으로도 공략은 가능했지만 딱 B급 정도였다. 괴물들이 강해지기 전이라면 A도 가능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 아니면 이호연이 함께 들어가지 않으면 A급은 불안불안했다. 정 급하면 나누기는 했지만….
정식 공략대가 아닌 길드 내 일반 사원들 중 일부는 전직자이기는 하나 괴물과 싸우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급하다고 그 사람들을 계속 하늘 조각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하늘 조각과 강해진 괴물들. 안 좋은 일에 대한 전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
산속에서 이호연이 라일락 향을 맡았던 그 날 이후에도 나비는 내 앞에 나타나거나 내 주변을 맴돌거나 하지 않았다.
주세진이 전해 준 말에 따르면 커넥터로 추적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나비 쪽에서 커넥터를 버렸다고.
미국의 학자가 나비와 테오그라젠스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으면 좋겠지만.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는 싫어 애써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지금은 공략이나 생각하고 미국에 가야 할지 모르는 사실에 대해 아빠를 어떻게 달랠지 걱정이나 해야지.
상대적으로 이예린 외에는 그리 뛰어나다 할 수 있는 전직자가 없는 천칭 팀의 경우 이번에도 더 안전한 B급 게이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전 천칭에 있을 때 목숨값을 받으며 사선을 오갔던 그들은 그런 주세진의 선택에 자존심 상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고 그저 감사해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이예린은 행복까지는 모르겠지만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여전히 그날 그 총은 내 그림자 속에 있었지만. 이젠 모두가 그것을 잊었다. 눈이 마주친 이예린이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도 흐리게 웃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날 있었던 일을 더 이상 화두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천칭 회장의 죽음이나, 그날 옥상에서, 했던… 얘기….
“…….”
잠시 멍하게 있던 나를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톡 건드렸다. 꿈속에서 건져진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나를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나는 별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뭐 생각하고 있었더라.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이호연의 집 앞이었다.
오늘도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다가 내게 데려다주기를 당한 이호연이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살며시 내게 입을 맞췄다.
위험한 듯하다가도 선은 넘지 않는 그 애정을 받아들이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잘 자.”
“류도요.”
제 뺨을 더듬는 내 손의 손가락 하나를 살짝 깨문 그가 천천히 내 손을 놔주었다. 저릿한 손끝을 매만지다 그림자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이 아닌 거실에서 얍 하고 나타나는 딸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진 엄마는 태연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딱 맞춰 왔네? 지금 막 저녁 다 만들었는데.”
“아빠 불러올까?”
“너 먼저 먹어. 네 아빠 지금 씻으니까.”
“그럼 옷만 갈아입고 올게.”
아, 맞다. 옷.
오늘도 깜박했네.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간신히 생각난 것을 되짚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굴에서 이호연에게 빌려줬던 두루마기를 돌려받는 것을 또 깜박했다.
이호연은 그날 옷을 빌려 입었다는 것 말고 다른 일 때문에 정신없어서 내 두루마기를 빌렸다는 것을 완전히 잊은 것 같던데.
“…….”
입가를 더듬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같아도 옷 빌린 건 까먹겠다.
“나중에 받지, 뭐.”
나는 그 나중이 상당히 먼 미래가 될 거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
서걱.
날카로운 것에 의해 단면이 잘리는 소리가 스산했다. 저 멀리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등의 문이 열렸다.
등 안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초록색 피를 살라 먹으며 피의 주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점액질로 뒤덮여 있던 몸이 타올랐다.
온몸을 휘저으며 불을 끄려 하는 괴물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푸른 불의 괴물처럼 보였다. 바람결 따라 꽃잎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푸른 불티들을 밟고 내려왔다.
바싹 굽다 못해 탄 오징어 냄새가 진동했다.
“예비. 지지.”
조금 전 자른 괴물의 단면에서 쏟아져 내린 초록색 피를 질색하며 피한 이나연이 뒷걸음질을 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초록색 피가 닿은 바닥 부분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푸른 불에 휩싸였음에도 움직이는 괴물을 올려다보며 검은 그림자의 줄기를 내 팔을 휘감았다. 이나연에게 조금 더 물러나라 말하고 등대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등에 장식된 구슬이 맞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괴물을 태우던 불이 물러나며 허공을 휘감은 수십 개의 불의 고리를 흉내 냈다.
새카맣게 그을린 모습으로 키에엑, 이상한 소리를 내는 괴물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넓은 소맷부리가 휘날렸다. 괴물의 이마에 박혀 있던 붉은 보석에 류가 명중했다.
등이 열리고 모든 것을 녹여 버릴 것 같은 고온의 푸른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푸른 불과 함께 뒤섞인 거대한 불길이 장관이었다. 태우고 녹여 버리는 불 때문에 눈이 건조했다.
“와. 오징어구이 냄새.”
오정인의 중얼거림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끝을 까닥였다. 사람 생각하는 거 참 똑같았다. 그림자를 타고 내 손에 다시 쥐어진 류의 등이 흔들거리며 장식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형체가 무너짐과 동시에 푸른 불 또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재가 되어 버린 마흔 개의 다리와 열 개의 눈을 가진, 오징어를 닮은 괴물이었던 것의 흔적을 흘겨보며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 이호연을 지켜보았다.
오징어 괴물의 약점은 누가 봐도 적색 보석이었다. 그러니 별다른 약점이 보이지 않는 괴물을 맡은 이호연 쪽으로 박상호가 배치되었다. 신체 능력이 영 별로인 박상호는 손민호한테 매달려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
“왼쪽! 더 왼쪽!”
목청 한번 좋았다. 거대한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형한 이호연은 박상호의 외침에 따라 수십 개의 촉수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징어의 친구 문어가 아니라 뜬금없는 말미잘이었다.
“우리, 나가면 해산물 먹으러 갈래요?”
“난 조개구이가 먹고 싶은데.”
“난 회. 회 먹은 지 오래됐어.”
태연하기 그지없는 오정인, 이나연, 손민경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초밥.”
그렇게 말했다가 거대 말미잘을 불태워 버릴 준비를 하듯 저 멀리서 지팡이를 내밀고 준비하는 김수혁을 보며 말을 바꿨다.
“해물짬뽕도 괜찮을 것 같아요.”
초밥에서 해물짬뽕이라는 확 바뀐 내 선택지에 오정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민경과 이나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본 이들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해물짬뽕. 고기 넣은 거 먹어야지.”
오정인의 말에 너도나도 군침을 삼켰다. 김수혁을 보고 중식이 생각 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화염 마법에 특화된 상위 호환 전직자인 김수혁은 대학 전공이 중식이었다. 그런데 중식은 불맛이라며 요리할 때 화염 마법을 사용했다. 문화 충격이었다. 그리고 맛있었다.
오늘 들어온 게이트가 바닷가고, 하늘 조각 안에 널리고 널린 괴물이 하나같이 해산물 모양인데 저 멀리서 말미잘을 태워 버릴 준비를 하는 마법사를 보니 자동으로 해물짬뽕이 생각났을 뿐이다.
마침 머리카락 색도 짬뽕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색이었다.
“불! 불! 불!”
박상호가 가리킨 촉수를 정확히 뜯어낸 이호연이 말미잘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김수혁이 마법을 사용했다,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땅에서부터 시작된 하늘로 치솟았다.
내 불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리고 남들과는 전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붉은 불이었다. 정확한 원통 모양을 유지하는 불의 탑 덕분에 괴물이 죽었는지 아닌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마법사의 육감 같은 내게는 없는 제3의 감각이 아닌, 그냥 경험하다 보면 얻게 되는 감이었다.
그런 불의 탑에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무언가 꼼지락거리고 있는 이호연 쪽을 쳐다본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거의 제 몸만 한 거대한 촉수를 물고 있던 호랑이가 촉수를 바닥에 뱉음과 동시에 발톱으로 갈가리 찢어 버렸다. 웬일로 입으로 안 물어뜯나 싶었다.
조각난 말미잘의 촉수가 움직임을 멈춤과 동시에 화염의 탑이 불티로 변해 흩날렸다. 거대 말미잘이 까맣게 그을린 모습으로 꿈틀거리다 천천히 쓰러졌다.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호연은 굉장히 찝찝한 얼굴로 퉷퉷거리며 조각이 되어 버린 촉수를 발로 찼다.
“왜 그래?”
이호연에게 다가가 물으니 그는 굉장히 묘한 얼굴로 제 목과 입가를 더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
뭐지?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호연은 오정인에게 물을 받아 입을 헹군 뒤에야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미묘한 기분을 뒤로 한 체 오징어와 말미잘에서 찾아낸 쪼개진 하늘 조각을 챙겼다. 두 개를 가까이 가져다 대자 두 조각이 하나로 이어졌다.
보스 격 괴물이 둘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조각을 쥐고 우리는 빛무리를 내뱉는 게이트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채집 담당자에게 조각을 넘기고 해물짬뽕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오정인과 홀린 듯 그 말을 듣는 다른 이들을 지켜보는데 이호연이 갑자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떠들썩하게 대화를 하던 다른 이들도 모두 이호연을 쳐다보았다. 이호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내 물음에 이호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입을 열자마자 제 입을 틀어막는 그의 행동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멀미 나?”
“속 안 좋아?”
“토할 것 같아?”
모든 질문에 이호연은 고개만 저을 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손민호가 손을 뻗었다.
“일단, 치료를 해 보면….”
손민호의 손에서 피어오른 빛이 이호연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잔뜩 찡그리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자마자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호연이 손민호를 밀쳤다. 뒤로 넘어지는 손민호의 어깨를 붙잡아 바로 세운 뒤 이호연의 손을 붙잡았다. 붙잡은 손이 차가웠다.
이젠 서 있을 힘도 없는지 주저앉는 이호연을 부축하며 손을 뻗는 손민경을 제지했다.
“힐 쓰지 마세요. 그게 더 안 좋게 작용하는 것 같으니까.”
“어떻게 해요? 힐도 안 통하면, 아니, 애초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박상호의 물음에 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초조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혼란스럽고 아무나 붙잡아 묻고 싶었다. 숨쉬기 힘든지 색색거리는 이호연의 등을 두들기며 시야를 가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힐을 하니까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대체 왜? 언제부터 상태가 안 좋았더라. 말미잘 괴물을 물어뜯고 난 다음부터….
“…….”
설마.
“이호연. 나 봐.”
숙인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려 내 눈과 마주치게 했다. 흐릿해진 회색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이를 달래듯 등을 두들겼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편안하게 풀리고 어딘가 멍한 눈이 스르르 감기었다. 힘이 풀린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온전히 내게 의지한 몸을 받쳤다.
혼란스러워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박상호의 어깨를 잡아 이호연 앞으로 끌고 왔다.
“누나?”
“능력 써서 이호연 좀 봐 봐. 목이나 입 쪽을.”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박상호는 착실히 내 말을 들었다. 그의 눈에 황금색 빛무리로 이루어진 나침반과 마법진 같은 것이 생겼다.
그의 시선이 이호연의 목에 닿음과 동시에 눈속에 나침반이 빙글, 한 바퀴 돌았다.
“어?”
눈을 끔벅인 박상호가 제 눈을 비비더니 다시 이호연의 목 부근을 보았다. 뭐가 보이냐 재촉하니 그제야 그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어…. 이상한 덩어리? 벌레? 움직이기는 하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공략대 중 김수혁이 툭 하고 한 단어를 내뱉었다.
“기생충?”
“…….”
별로 좋은 단어는 아니었지만 영 가능성 없는 건 아니었다. 그야, 괴물이 일단 해양 생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이호연에게 괴물 무는 거 안 찝찝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분명 변형한 경우 입 안에 랩 같은 것이 씌워진다고 했었다. 약간 최소한의 인권 보호같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입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가거나 하는 건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아공간 반지에서 하늘 조각을 꺼내 허공에 던졌다. 내가 하는 짓을 지켜보던 김수혁이 당황한 어조로 말하며 나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저 조각 안으로 이호연 데리고 가려는 거예요?”
“비켜요. 아니면 돕든가.”
내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키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질질 끌리는 다리 쪽으로 눈짓하는 내게 김수혁이 빽 소리쳤다.
“남의 히든 게이트에 못 들어가요! 잘못하면 당신 전직관이 이호연을…!”
“그럴 일 없으니까 그냥 도와요. 안 도울 거면 방해하지 말고.”
사나워지는 내 기세에 김수혁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쳤다. 이나연이 그런 김수혁을 뒤로 밀며 내게 물었다.
“안 다치게 할 자신 있어요? 당신의 전직관이 얼마나 자비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전직자가 아님에도 제 공간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일지도 몰라요.”
“그럴 일 없어요. 있어도 없게 만들 거예요.”
“…….”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나연이 내 앞에서 물러났다. 그들의 걱정은 당연했기에 그리 화나지는 않았다. 실제로 전직관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이호연을 데리고 하늘 조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민호가 이호연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길드장님한테는 대충 설명해 줘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조각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이 알아서 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오색 빛깔 뭉게구름이 내 뺨을 스침과 동시에 폐공사장 같던 곳이 사라지고 눈앞에 커다란 수양버들이 보였다. 코끝으로 진한 물 냄새가 느껴졌다.
그리고, 피부로 불의 열기가 느껴졌다.
이호연을 끌어안고 한 손에 들고 있던 류의 등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등이 열림과 동시에 쏟아져 내리듯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우리의 주변을 감쌌다.
불과 불이 얽혀 들었다. 똑같이 푸른빛이었지만, 동시에 다르게 느껴지는 두 개의 불꽃이 서로 잡아먹을 듯 굴다 천천히 사그라졌다.
내가 상대의 불을 잡아먹은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내 불을 잡아먹어 강제로 불을 꺼트린 거였다. 제멋대로 닫히는 등의 문을 힐끔 쳐다보다 앞을 보았다.
푸른 불티 너머, 심해의 가장 깊은 곳의 어둠 같은 긴 머리를 늘어트린 랑이 부채를 접으며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외부인을 들였구나. 아가.”
“…….”
“그게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알지 않니.”
랑의 가벼운 타박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항상 휘어지던 눈매가 무감했다. 복사꽃 꽃의 꽃물을 들여 놓은 것 같은 입술이 웃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전직관들은 자신의 전직관이 아닌 이가 자신의 공간 안에 발을 들이는 것을 싫어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락하지 않았다.
달갑지 않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살려서 내보내 주지 않았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원래부터가 그런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옥도 당시 위기 상황에 제 동료와 가족을 데리고 히든 게이트로 이동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히든 전직자들에게 교훈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교훈을 어긴 나는 이호연을 더 힘주어 끌어안고 슬슬 뒷걸음질 쳤다. 지금 내가 랑의 말 대로 얼마나 무례하고 그가 싫어할 짓을 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만 들어온 이를 살려서 보내 주지 않을 정도로는 싫어할 짓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대화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나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이호연이 아파요.”
“데리고 나가거라.”
“도와줘요, 랑.”
“어서.”
랑은 져 주지 않을 것인지 나무의 결이 고스란히 남은 새카만 부채를 이호연 쪽으로 내밀었다. 부채에 장식된 실 공예품이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말미잘을 닮은 괴물을 물어뜯었어요. 그때부터 상태가 안 좋아졌는데 힐을 사용하니까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요.”
“…….”
“랑….”
내 부름에도 랑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생각해야 했다. 여기서 랑이 안 도와준다고 하면 따로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이미 힐이 안 통했다. 아니, 오히려 역효과였다. 그럼 일반적인 의술이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다. 괴물을 상대하다 생긴 일이었다.
조심히 손을 뻗어 이호연의 목을 덮었다. 두근두근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맥박이 아닌 다른 것이 느껴졌다.
내 실력의 문제인지 너무나 미약한 이질감이었다. 그것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크기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
슬쩍 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부채를 거두기는 했지만, 결코 이 이상 이호연이 자신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제발.”
소용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호연을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할지. 누가 이 상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끊임없는 생각에 빠진 나는 랑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지 못했다. 바람을 타고 다니는 나뭇잎의 그림자보다 더 살그머니 다가온 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시야에 기다란 검은 실타래를 발견했을 때야 퍼뜩 고개를 들어 무감하면서도 누그러진 얼굴을 마주 보았다.
랑이 손을 뻗었다. 검은 그림자 줄기가 이호연의 몸을 붙잡아 눕히더니 수양버들이 있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갑자기 생각과 행동을 바꾼 랑의 모습이 의아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랑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이 이상 너와 말씨름해 봤자 남는 것이 무엇이겠니.”
얕은 한숨 같은 목소리였다. 랑의 말은 어린애와 말씨름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는 어조였지만 왠지 나는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은 호랑이나 고치러 가자꾸나, 아가.”
나를 이끌고 수양버들 아래로 가는 그의 행동에 순순히 따르면서도 기이한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그스름한 눈매는 의뭉스러웠고, 검은 눈동자는 이상한 정도로 검었다.
“…….”
‘나는 죗값을 청산하려는 것뿐이다.’
그의 진짜 이름을 불렀던 날.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그가 그렇게 말했다. 왜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생각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묘한 섬뜩함을 느끼며 목을 더듬었다. 기이하고 알 수 없는 도깨비들의 왕은 그런 내 행동을 눈에 담으면서도….
그저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찰랑거리는 물결을 따라 하얀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귀에 물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귀를 막는 내 행동에 랑이 헛웃음을 지었다.
“귀에 물 들어간다고 안 죽는단다.”
“죽지는 않지만 기분 나쁘잖아요.”
내 말에 랑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잠들게 한 것이 답이었는지 이호연의 안색이 아까보단 많이 좋아졌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수양버들 나무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하얀 얼굴과 하얀 머리 위로 바람 따라 왔다 갔다 했다. 버들잎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커다란 호수 속에 몸을 담근 이호연을 보며 랑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호수로 온 거예요?”
내 질문에 랑이 호숫가의 물을 손을 모아 조금 뜨더니 그대로 이호연의 얼굴에 부었다. 그의 행동에 잠시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위협적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제지하지 않았다.
설마 저런 식으로 익사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내 엉뚱한 생각을 읽은 것인지 랑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이유를 알려 주었다.
“평범한 호수가 아니야.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입에도 붓게 입 좀 벌려 보렴, 아가.”
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히 이호연의 입을 벌렸다. 남들보다 조금 더 뾰족한 송곳니와 유난히 빨간 혀가 눈에 보였다. 이호연의 입에 호수의 물을 조금 넘긴 랑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 하려는 걸까 싶어 랑을 보는데 그의 손에 웬 하얗고 부슬부슬한 것이 들려 있었다. 저게 뭐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는데 랑이 그것을 이호연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그제야 제대로 보이는 그것의 모습을 본 나는 기겁해서 랑의 팔을 붙잡았다.
“그걸 왜 입에 넣어요!”
“넣는 것이 아니라 즙을 짜서―.”
“그러니까 그걸 왜!”
차마 뺏지는 못하고 랑의 손을 붙잡아 늘어졌다. 그런 내 행동에 고개를 기울이던 랑이 뭔가를 깨달은 듯 작게 웃음을 흘리며 나를 똑바로 앉혀 주었다.
“버들개지다.”
“버들개지?”
송충이가 아니라? 근데 버들개지가 뭐야? 의문 가득한 내 시선에 랑이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암자색의 하얗고 포슬포슬한 털을 뒤집어쓴… 열매? 씨앗?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커다란 송충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버들강아지라고도 하지.”
“들어도 모르는데요….”
내 말에 랑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꽉 쥐었다 풀어 다시 내 앞에 내밀었다. 끈적한 점성의 액체로 랑의 손이 번들거렸다. 단내가 느껴졌다.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액체가 묻지 않은 손의 손가락으로 액체를 조금 긁어낸 랑이 내 입 쪽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먹어 보렴. 다디달 거란다.”
그의 말에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히 손가락 끝을 입에 넣었다. 랑의 말 대로 단맛이 느껴졌다. 다소 익숙한 단맛이.
“꿀?”
“한 번에 맞히는구나.”
호수에 손을 넣어 흔뻑 묻은 꿀을 닦아 낸 랑이 새 버들강아지를 이호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벌레인 줄 알았어요.”
내 말에 랑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 장난질은 하지 않는단다. 하물며 내가 충을 먹이겠느냐? 엉뚱한 상상을 하는구나.”
생긴 게 벌레여서 착각한 것도 있지만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신경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이호연은 랑의 공간에 침입한 침입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데려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은 랑이 이호연은 공격하지 않고, 도와준다고 하기는 했으나 그 말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아무도 몰랐다.
입 안에 물을 흘려 넣어 주는 순간에도, 꿀을 들이 붓는 순간에도 그는 이호연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니 랑이 도와주겠다고는 해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 신경은 예민해지고.
랑이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은 나이지, 이호연이 아니었다. 조금 전 느꼈던 서늘함이 저절로 생각났다. 랑이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잡생각을 고갯짓 도리도리 젖는 것으로 쫓아내고 랑이 하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랑이 잘게 웃으며 말했다. 웃음 어린 어조와 친절한 말씨에선 조금 전의 노한 것 같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잘 배워 두거라. 이럴 때가 아니면 너는 배우려 하지 않으니까.”
탁, 하며 작은 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연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꿀을 지켜보며 귀로는 랑의 말을 들었다. 아마 저 꿀도 호수의 물처럼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꿀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줌과 동시에 상처의 곪음을 막아 주지.”
랑이 허공에서 한들거리며 떨어지는 버들잎 하나를 낚아챘다. 푸름과 푸름이지만 색이 다른 두 푸름이 순간적으로 얽혀 들었다.
하얀 손에서 푸른 불이 아주 살짝 탁탁거리며 불티를 튀기고 사라졌다. 바짝 익은 버들잎은 랑의 작은 손짓 한꺼번에 바스러지며 가루가 되었다.
그것을 바람에 흘려보낸 랑이 새로운 버들잎을 손에 쥐었다.
“버들잎은 고통을 줄여 줘. 해열에도 좋고. 버드나무는 물만 옆에 있으면 한해가 바뀌기 전까지도 무성하니 언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좋은 약재란다.”
그것을 이호연의 입에 물리는 랑의 행동을 보며 나는 점점 생각이 미궁으로 빠졌다. 대체 어떤 식으로 치료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제 전공은 경영이지 한의학이 아니라서요.”
그마저도 반쯤은 때려치운 격이었지만.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운다고 능사는 아니지. 뭐든 배워 둬서 나쁠 것은 없단다. 아가.”
“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배워서 나쁠 것은 술과 담배와 도박뿐이니까. 그래도 역시 랑의 치료법은 영 모르겠다.
“가서 나뭇가지 하나 꺾어 오렴. 피리로 만들어도 좋을 그런 것으로.”
“…그게 뭔데요.”
“물이 갓 올라 파랗고 딱딱하지 않은 것이 있을 거다. 그것을 꺾어 오렴.”
이것이 세대 차이에서 오는 관록인가 싶은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 채집 퀘스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대부분 짙은 색을 띠는 것들 중 간신히 찾은 푸릇푸릇한 가지를 꺾어 랑에게 건넸다. 얇고 가느다란 가지를 제 손에 탁탁 쳐 보는 랑의 행동을 지켜보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하필 그 가지인 이유가 있나요?”
“어린 가지가 그나마 아프지 않으니 그렇지.”
“?”
“버드나무의 가지는 봄이 지나면 단단해진단다. 잘 휘어지고. 소리는 요란하며, 맞으면 뼈저리게 아프지만, 외상은 남지 않아.”
“…….”
혹시 그걸로 맞는 게 난가? 손바닥 몇 대 맞을래, 그런 건가?
침묵하는 나를 보며 랑이 눈을 휘었다. 장난스럽고 가끔가다 사람 골리는 것을 좋아하는 도깨비의 웃음이었다.
“여린 가지가 아닌 다른 튼튼한 가지로 때리면 네 호랑이가 황천길 건널지도 모른단다.”
“…잠깐. 지금 이호연을 때린다고―.”
내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랑이 버드나무 가지를 휘둘렀다. 끄앙하며 랑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호연의 목에 가지가 닿는 것이 먼저였다.
“…….”
탁.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 매섭지도 따끔따끔하지도 않은 소음이었다. 지금 나 낚은 거얌? 하는 얼굴로 랑을 보자 그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린것 때리고 괴롭혀서 무엇 하니.”
“…….”
“버드나무는 예부터 양기가 가득해 삿된 것들 내쫓는 데 좋았지. 호랑이가 주워 먹은 것도 어찌 보면 삿된 것 중 하나라 할 수 있지 않느냐.”
“…….”
“내가 놀려 골났니, 아가.”
골난 어린아이를 인자하게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약간의 짜증을 담아 이호연의 목 부근을 쿡쿡 찌르는 버들가지를 탁 쳐 버렸다.
그런 내 행동에 랑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외부인을 내 공간에 들였으니, 그에 대해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하나, 네가 막지 않았더냐.”
“…….”
“이 정도 심술은 넘어가거라.”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내게 가지를 넘겨 준 랑의 낯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생각보다 온유한 분위기에 경계심을 풀었다.
손을 뻗어 랑이 더듬고 있는 이호연의 목 부근 위로 내 손을 올렸다. 그런 내 행동에 랑이 손을 치워 줬다.
“느낄 수 있니?”
“아주 조금… 뭔가 있다는 것 정도만요.”
“불이 상기하는 이미지란 위험하고도 아름답다는 것이지. 파괴적인 문명의 시작. 또한.”
랑이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그의 손안에 잡힌 내 손안에서 제멋대로 푸른 불이 피어올랐다. 남의 의지대로 끌려가는 느낌이 조금 섬찟했다.
“생명이기도 하지. 수많은 것에게서 살아남게 해 준 것. 수많은 것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스스로를 태워 버리며 아름답게 사라지는 불장난.”
“…….”
“너희는 이 능력을 스킬이라 부르며 가르친 대로만 사용하더구나. 같은 것이라도 어찌 활용하느냐에 따라 불 하나도 이리 다양하게 사용 가능한데.”
손안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아주 얇게,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그 열기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내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의 능력이나 내가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푸른 불의 원주인이 내 힘을 빌어 행하는 짓이었다.
한 손으로는 네모, 다른 한 손으로는 세모.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원을 그려 내는 것 같은 행위였다.
푸른 불을 피어오르게 함과 동시에 그것을 얇게 퍼트리면서도 그 열기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만큼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조금 분하게도, 이런 미친 짓은 나 혼자서 할 수 없었다.
“집중해야지 아가.”
“…….”
“다양성과 활용성이 높은 것은 원래는 그림자이지. 형체 없는 흉내쟁이는 조금의 상상력만 있다면 서투른 아이도 곧잘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니까.”
고온의 열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정신 안 차리면 허공으로 흩어질 정도로 얇게 퍼지는 열기가.
“하지만. 네가 제대로 배워야 하는 것은 그림자가 아닌 불 쪽이지.”
열기가 내 손 아래, 이호연의 목 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의 체온 정도로 옅어진 열기가 목 안에서 느릿느릿 움직였다. 빈 관을 채우듯 그 안을 파고들었다.
“불을 불로서만 보지 말아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해. 조금만 생각을 비틀어도 수백 가지의 결과물이 나오는데 말이야.”
목 안에 퍼트려져 있던 열기가, 집요하게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내 손 바로 아래. 맥박 외에 이질감을 느낀 그곳으로.
몸 안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넓게 퍼졌던 것이 작은 점으로 뭉치듯 움직였다. 나는 물살에 휩쓸리는 사람이 된 것처럼 내 의지를 잃고 멋대로 움직이는 능력의 감각을 쫓았다.
사람의 체온 같던 것이, 모든 것을 녹이다 못해 바스러지게 할 정도의 열기가 되었다. 그 작은 불이 노리는 것은 딱 하나였다.
“커헉!”
이호연이 크게 기침함과 동시에 랑이 내 손을 놔주었다. 나는 물에 빠졌다 구조된 사람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했다.
콜록거리는 이호연을 일으켜 등을 두들기는 랑을 올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눈이었다.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게 어둠을 드리운 것 같았다.
“끊임없이 생각하렴.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 낯선 것. 계속해서 생각하고 되뇌렴. 그럼으로써 너는 누군가를 홀리는 불꽃을, 나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불꽃을. 그리고 그 이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니.”
“…….”
“…어스름 찾아오는 밤을 밝힐 것인지, 밤 중에 폭군이 되어 모든 것을 재로 돌릴 것인지도. 도망을 위한 길을 밝힐지. 혹은. 그 무엇도 하지 않을지. 선택을 네가 할지언정 그 선택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잊지 말거라.”
“…그거. 뭘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에요?”
이호연의 등을 두들기는 손짓이 멈추었다. 그를 천천히 다시 눕힌 랑이 웃지 않는 낯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많은 것을 아나,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리 없어 네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
“…….”
“그러니.”
쫘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은 부채가 활짝 펼쳐졌다. 랑이 부채로 입가를 가린 순간 그의 까만 눈에 푸르른 귀기가 서렸다.
“쓸데없는 것들이라도 가르쳐야지. 먼지 쌓인 옛이야기라도 들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조금이나마 공평하지.”
그것은 씨름을 거는 도깨비의 초대 같았고, 숨바꼭질하며 놀자는 귀신의 조름 같은 어조였다. 호수에 떠다니던 물안개가 짙어졌다.
오색 빛깔 구름과 함께 언제나 무릉도원 같던 곳이 을씨년스러워졌다. 입에서 하이얀 입김이 나왔다. 마치. 귀교(鬼橋)를 열었을 때처럼.
달라진 기류를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옛이야기 하나 들려주시게요?”
내 물음에 옜 이야기꾼을 흉내 낸 도깨비들의 왕이 부채 너머로 말을 걸었다.
“이야기 하나 풀어 볼까 하나, 누가 방해할까 무서워 장난하나 치고자 한다. 눈 하나 깜박하면 사라질 장난이며, 어린아이 우스갯소리 같은 말장난이니. 이 정도의 눈속임은 괜찮겠지.”
귀교(鬼橋)란. 온전한 나의 공간. 모든 것으로부터 살그머니 숨어 삿된 것들이나 오고 가는 기이한 세계. 그리고 그 삿된 것들의 왕이 자신의 공간에서조차 이야기꾼을 흉내 내며 해야 하는 이야기들.
이야기꾼이 이야기 시작한다.
괴이쩍이며, 숭상의 존재가 될 가엾은 아이. 길을 안내해라. 너는 불의 인도자이니. 어느 날 밤 시작된 도깨비의 장난에서 시작된 운명이 이리도 얽히었구나.
푸른 불을 따라 길을 건너리다. 푸른 불을 따라 길을 걸으리다. 성큼 밤이 왔다. 도깨비가 걸음 하고 귀신이 놀러 왔구나. 살금살금 저 어둠 너머 푸르르게 빛나는 것을 탐하니.
그것은 달빛에 푸르게 빛나는 호수였구나. 그것은 썩은 버드나무의 원줄기구나.
밤에 홀려 착각했다. 그것은 푸른 불이 아니니.
누가 그리도 애타게 푸른 불을 찾는 것이오. 왜 그리도 애타게 푸른 불을 찾는 것이오.
그 말에 답한 자 누구인가. 돌아오는 답은 있으나 눈에 뵈는 이가 없구나.
천둥이 울린다. 비바람이 친다. 구름이 무성하게도 움직이는구나.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
그것을 찾아내 묻고자 하오. 그것을 찾아내 알고자 하오.
무엇 그리 물을 것이 많나. 참으로 궁금한 것도 많다.
“푸른 불은 어디 있는가.”
저 산 너머에 있지.
“푸른 불은 어디 있는가.”
서역인들과 여행길에 올랐지.
“푸른 불을 어디 있는가.”
그대 눈앞에 있지.
도깨비와 귀신들이 푸른 불을 따라 걸음 했구나.
이매망량 참으로 많기도 하다.
“이제 답을 하오.”
그대는 누구인가. 무엇 그리 물을 것이 많은가.
한낮 어둠에 몸을 감추었는가. 어서 내 앞에 나타나라.
“눈을 감은 하나를 찾는다. 푸른 불의 잿더미 아래 숨어 있는 하나를 찾는다.”
그것을 잡아먹어 나는 온전해질 것이니.
푸른 불아. 나를 안내하라. 너는 불의 인도자이니.
나비와 함께 피어올라, 내게 오라.
그럼으로써 나는 온전해지리라.
***
눈을 감은 하나를 찾는다. 푸른 불의 잿더미 아래 숨어 있는 하나를 찾는다.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되뇌다 새근새근 잘도 자는 이호연의 머리를 흩트리며 장난을 쳤다. 새카맣게 타오른 살덩이 같은 것을 뱉어 낸 이호연은 비몽사몽 정신을 못 차린다 싶더니 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런 이호연의 모습에 쯧, 하고 혀를 찬 랑이 방 하나를 내어 주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났던 귀신 언니가 방을 안내해 줬고, 처음 보는 덩치 커다란 귀신이 이호연을 둘러업었다.
공통점은 둘 다 귀신이고 눈구멍 네게, 커다란 코와 헤죽 웃는 입을 표현한 방사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친절한데 심장에 해로운 소리를 냈다. 히힛힛히 하고.
멍때리나 싶더니 괜히 자는 사람한테 장난질 치는 내 행동을 옆에서 보고 있던 귀신 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낭군님이 잠들어 적적하신가요?”
“…….”
어휘 선택 참 예스러웠다. 떨떠름한 내 얼굴을 본 귀신 언니는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웃다 내게 다과를 내밀었다.
“왕께서 외지인을 이곳에 들일 줄은 몰랐답니다.”
“나도 반쯤은 거절당할 각오했었어요.”
“괜한 걱정이셔요. 오늘은 그저 심술을 부리셨을 뿐인걸요.”
“?”
그게 심술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어조였다. 심술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이호연을 죽일 것 같은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술이라고 하기엔 기세가 사나웠는걸요.”
“뮈, 그야….”
방사시 가면이 살짝 방향을 틀었다. 누워 있는 이호연 쪽이었다.
내 능력을 끌어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랑이 마음먹었다면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이호연은 죽었을 것이다. 대화의 여지 없이.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그저 심술을 부렸을 뿐이다. 오늘은, 그리고 심술….
“…….”
단어 선택 참 묘하지 않은가. 소담한 분홍 꽃 하나 장식된 하얀 한과 하나를 들며 귀신 언니를 떠보았다.
“심술이라 다행이지. 처음부터 그냥 들어주면 좋았을 텐데 랑은 꼭 그렇게 심술을 부려요.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야 말해 주고.”
“은근히 장난을 좋아하시잖아요.”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심했어요. 상대가 상대라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내가 말한 상대란 자신의 전직자가 아닌 자를 의미했다. 저 귀신 언니는 뭐라고 받아들였을까.
아주 살짝 방사시 가면이 다시 이호연 쪽으로 움직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눈에 담으며 나는 태연히 한과를 입에 넣어 천천히 그것을 씹어 삼켰다.
“랑은 역시 이호연이 달갑지 않은가 봐요. 보기 껄끄러워서 그런가?”
“왕께서… 그리 말씀하셨나요?”
뭔가 아는구나. 언제나 희로애락을 잃은 인형같던 말씨가 조금 변했다. 높낮이 없던 감정에 파문이 생긴 것처럼.
“랑은 항상 나중에 알려 줘요. 미리 말해 줬다면 좋을 텐데….”
걸려라. 걸려라.
똑각. 방사시 가면이 부자연스럽게 기울어졌다. 똑각. 제자리로 돌아왔다. 똑각. 똑각.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한숨 같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못 믿는 걸까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왕께선 언제나 아기씨께 모든 것을 내어 줄 준비를 하시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도 내게 미리 언질해 준 것 하나 없었잖아요.”
똑각. 가면에 새겨진 네 개의 눈이 나를 보았다. 눈구멍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내 앞의 있는 이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방 안이 조금, 추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 보는 위치에서 옆으로 기울어지던 가면은 가로로 길게 누울 때까지 움직였다. 90도로 돌아간 가면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요. 상대가 상대이지 않습니까.”
걸렸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며 섭섭하다는 티를 냈다.
사람은 무슨, 대화 같은 최소한의 교류조차 없다시피 한 이곳에서, 영약한 사람이라곤 먼저 대화 거는 것이 불가능한 랑밖에 못 보고 살았던 귀신 언니는 모호한 내 말에 홀라당 넘어와 버렸다.
넘어와 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은 넘어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방사시 가면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텅 빈 네 개의 구멍을 마주 보며 마찬가지로 텅 빈 헤죽 웃는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사적인 감정은 없으셨을 거예요. 그 누구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계신 분인걸요. 그저 예전에 있었던 그때 일도 생각나 그러셨을 거예요.”
그때 일. 마치 옛날부터 알고 지냈자는 듯이 말한다. 그것을 속으로 곱씹으며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 이곳에 갇힌 것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겠지만요. 하지만 왕께서 진심으로 죽이고자 하였다면 산… 호랑이님은 죽었을 겁니다.”
방금, 말 더듬었다. 뭘 얘기를 하려다 만 것일까. 그쪽을 더 캐고 싶었지만 소용없을 것 같았다. 대신에 나는 다른 것을 화두에 올렸다.
“그 대가란 거… 좀 너무한 것 같아요.”
뭔지 모르겠지만 앞뒤 맥락만 따지면 그 대가라는 것 때문에 이호연을 공격했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직관들이 자신의 공간에 침입한 자신의 전직자 외 사람들을 죽인 것도 그 대가라는 것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말 없는 나를 가만 바라보던 귀신 언니가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알면서도 이 안에 갇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시었는걸요. 그래도, 그자를 피해 도망치려고 스스로 갇힌 이들에 비하면 낫지요.”
“…….”
묻지 않았는데도 답한다. 랑과 상당히 비슷한 화법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아기씨도 만나고, 호랑이님도 만났으니 왕께서도 조금은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이루실 테니까요.”
내 손을 조심스레 잡는 손이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이 서늘했다. 잡힌 손을 힐끔거리다 방사시 가면을 향해 살짝 웃어 주었다. 내 웃음에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랑에게 붙여 놓았던 꼬마 도깨비에게서 신호가 왔다. 장지문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때 왕께서는―.”
“그만.”
서늘한 한밤 같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소리도 없이 열린 장지문 뒤로 랑이 서 있었다. 조잘조잘 말하던 귀신 언니의 말이 뚝 끊겼다.
“나가거라.”
귀신 언니는 그 말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놀라는 기색 하나 없는 모습과 내 손을 잡던 서늘함을 마주할 때마다 내게 사람인 척해 주지만,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랑이 방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장지문 밖에 서서 기다리던 귀신 언니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장지문에 새롭게 드리워져 있던 작은 인영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자리에 앉는 랑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노란빛이 참 고운 한과를 그에게 내밀었다.
“드실래요?”
“아주 틈만 나면 꾀를 부리는구나.”
그런 나를 보며 랑이 말했다. 말씨는 타박이나 어조는 다정했다. 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고 해 주세요.”
“겁도 없지. 귀신을 속일 생각을 다 하고.”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우니 괜찮아요.”
내 말에 랑은 이게 무슨 소리일꼬,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게서 받아 간 한과를 다시 내 입에 물려 주며 그가 말했다.
“아가. 너는 사람보단 귀신을 더 무서워해야지. ‘사람’ 중엔 건방지게도 네게 덤빌 이가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
“하지만 귀신이라는 것 중 생각을 하는 이가 거의 없지. 절대적이라면 고개를 조아리나, 애매하면 한번 덤벼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이라.”
“…알고 있어요.”
귀교(鬼橋)를 열고 지쳐 보인다 싶으면 살금살금 덤빌까 말까 간 보는 것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귀신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가끔. 날 보는 손이 움찔거리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그나저나. 저 호랑이는 참 허약하구나.”
“허약은 아니지 않아요?”
되게 튼튼한데. 내 말에 랑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이호연은 힐끔 쳐다보았다.
“심술은 내가 아니라 다른 이가 부린 것 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 쓸모가 없다는 뜻이지. 이 아이나 데리고 가거라.”
랑이 그림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꼬마 도깨비를 달랑 들어, 내게 내밀었다. 내 쪽으로 손 뻗는 꼬마 도깨비를 안아 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하는 모든 것을 내게 배웠는데 네 잔재주가 내게 통하겠니.”
“어차피 알면서도 속아 줄 거니까 괜찮아요.”
맹랑하기 그지없는 내 말에 랑은 얕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품에서 하얀 꽃 달린 나뭇가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네 호랑이한테 필요한 것. 그거 들고 심술궂은 호랑이나 찾아가라 하여라. 그걸 보면 그도 심술 부리지는 않겠지.”
심술궂은 호랑이면, 이호연의 전직관을 말하는 건가.
“…이호연의 전직관이 이호연 싫어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의뭉스러운 미소를 띤 남자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툭, 하고 맞닿은 이마에선 서늘하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이러니 헷갈리는 거다.
“떠보지 말거라. 이미 하지 않았니. 요 작은 머릿속 안에서 또 어떻게 나를 곤란하게 할까 궁리하고 있을 터인데, 이 이상 네게 알려 주면 내가 너무 불리하지 않겠느냐?”
“그리 말해도 귀띔해 주실 거잖아요.”
“맹랑하긴.”
설핏 웃는 낯을 한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 뒤돌게 했다. 얌전히 그에게 등을 보이며 앉은 나는 내 머리를 손을 살살 빗어 내리는 손길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네 곁에 꽤나 재밌는 능력을 갖춘 아이가 있더구나. 혹시 모르지. 그 아이가 보면 안 되는 것을 엿볼지도. 이미… 몇 번 엿본 것 같지만…. 스스로는 기억 못 하는 것 같구나.”
꽤나 재밌는 능력. 엿본다. 그 말에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예린 말하는 건가요?”
“…예언자들이 반드시 미래를 훔쳐볼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시야를 넓혀. 미래가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다. 과거는 하나를 보여 주나 미래는 수백, 수천 갈래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
“…….”
“잊지 말라 하는 이야기이니 그리 귀 기울일 필요 없단다. 보자, 다 됐구나, 아가.”
세 갈래로 나누어 쫑쫑 땋아 내린 머리끝에 댕기와 함께 조금 전 내게 주었던 나뭇가지에 달린 꽃과 똑같은 꽃을 달아 준 랑이 내 머리를 놔주었다.
향이 좋았다. 땋은 머리를 앞으로 끌고 와 하얀 장미를 닮은 꽃을 매만져 보니 꽃잎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생화였다.
“네 호랑이가 일어났구나. 기생하던 것에게 뺏긴 기력이 회복되면, 아가, 너는 그거 달고, 호랑이한테는 꽃 쥐여 주고 함께 산에나 놀러 가렴.”
랑의 말에 이호연 쪽을 쳐다보자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몽롱한 회색 눈이 이리저리 굴러가며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살폈다.
기생하던 것에게 기력을 뺏겨다는 랑의 말에 역시 기생충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호연의 모습을 지켜보던 랑이 어딘가 얄미운 어조로 말했다.
“함부로 주워 먹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겠구나. 그러다 한 번에 골로 가지.”
“…누구?”
일어나자마자 막말을 들은 이호연의 눈에 경계심이 서렸다. 목이 아픈지 제 목을 더듬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괜히 심술궂게 행동하는 랑의 팔을 꼬집어 주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내 전직관이야.”
“…네?”
“전직관. 여기는 내 히든 게이트 안.”
짠, 하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이호연이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미잘 안에 있던 기생충 때문에 쓰러졌거든. 그런데 힐도 안 통하고 마땅한 방법도 없어서 이곳으로 데리고 왔어. 랑은 다쳐서 오면 어떻게든 치료해 주거든.”
일단 내가 여기 와서 치료 안 된 경우가 한번도 없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
랑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생각이 끊겼다. 뒤를 돌아 랑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내 순간의 착각을 비웃듯 랑의 얼굴은 웃는 낯이었다. 그 얼굴로 랑은 내게 말했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진 이유가 있었구나. 치료의 대상이 된 것은 저 호랑이가 아니라 목에 기생하고 있던 것일 거다.”
랑의 말을 들으며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젠 기생충까지 나오는구나, 싶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 몸에 기생충이 들어왔다는 건가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호연이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얕은 의심이 서려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니 이호연이 헛기침을 하며 목을 푼 뒤 천천히 말을 하였다.
“기생충 같은 거 애초에 없었어요.”
“?”
“그렇게 생긴 괴물을 몇 번이나 상대해 봤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 자체가 처음이에요. 기생충 같은 게 존재하는지 알았으면 애초에 물지도 않았을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종을 닮은 괴물이라 기생충이 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가기엔, 지금까지 어종을 닮은 괴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기생충 같은 게 생긴 거지?
“…….”
기생충이 생겨 피해를 보는 건 괴물보다는 사람 쪽이었다. 기력을 빨아먹는 것을 달고도 괴물은 멀쩡했으며 오히려 쓰러진 것은 이호연. 사람에게 해 되는 것이 늘어났다.
기생충. 기생충 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제법 옛날. 바닷가에서 군집 생활하던 것들의 특징이.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최종 진화형 같은 거였는데.
“…….”
설마 단순 벌레 같은 게 아니라, 평범한 괴물들이 그것들 따라 진화한 거라면?
침묵하는 나를 지켜보던 공간의 주인의 나른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너희도 성장하는데 그것들이라고 영원하리라는 법은 없지.”
“정말 진화라도 했다는 거예요?”
“옛날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느냐. 이미 한차례 변화를 거친 것들이 새롭게 변화를 겪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
“…….”
“아가, 너는. 이미 그것들의 마지막 단계를 직접 보지 않았니. 그것들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괴물들이 너무 약하다고도 말했지. 애매한 것들의 모방이 모방으로만 끝나지 않는 시간이 올 거란다.”
괴물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전직관을 찾아내 전직을 했다. 괴물을 죽였다. 더 강한 괴물들이 하늘 조각에서 튀어나왔다. 히든 전직자와 상위 호환 전직자가 나왔다.
그리고 다시 괴물들은 변화를 맞이했다. 그럼 사람들은?
“그럼, 우리는요?”
“…….”
내 질문에 랑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활짝 열어 놓은 창 너머 어딘가로 향했다. 새카만 눈동자가 깜빡이지도 않고 쳐다보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사람만큼… 변화를 싫어하고 안주하는 것은 없단다. 내가 보기에 너희에게 더 이상의 변화는 없을 것 같구나.”
“…….”
그럼 우리는…. 아득해지려는 나를 붙잡아 올린 것은 랑의 목소리였다.
“하나. 사람이란, 참으로 신기하게도 제 몸이 불편하면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싶어 가끔 말도 안 되는 것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찾아내곤 하지.”
랑이 손을 뻗어 내 머리끝에 매달린 꽃을 툭 건드렸다.
“영 방법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니 그런 얼굴 하지 말거라.”
“방법이 있어요?”
그가 가늘게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나는 이미 네게 귀띔해 주었단다.”
그의 손이 다시 한번 하얀 꽃을 툭 건드렸다.
***
“정부의 추진하에 이행될 전직자 관리 기관에 대해 사생활 침해라는 논란의 말이―.”
“아직 정해진 것은 없으니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정부 측의 입장에 대해―.”
“일부 시민들은 이번 기회에 누가 전직을 했는지 밝혀지면 좋겠다는 의견을―.”
저 많은 뉴스 중에 괴물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 은연중에 전과 달라진 괴물들에 대한 내용이 도는 것을 막지 않겠지만, 공식적으로는 그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겠다는 심보였다.
“요샌 뉴스에서 죄다 저 얘기만 하더라.”
과일 먹으라며 내 손에 포크를 쥐여 주며 엄마가 말했다. 쪼르르 자리 잡고 딸기 하나씩 입에 무는 꼬마 도깨비들을 힐끔거리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안 먹어?”
“내 몫까지 먹을 애들 많아.”
내 말에 왕, 하고 크게 감을 먹던 꼬마 도깨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와 나는 참 귀엽다 하는 얼굴로 열 깨비들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저 전직자 관리 정부 기관? 저거 만들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래?”
“길드 소속으로 헌터 일을 하는 전직자들은 크게 바뀌는 게 없고, 전직자인 걸 숨기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게는 날벼락이지.”
전직하는 것 자체에 대한 통제도 심해질 테고, 천칭과 같은 일 자체가 일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다행이었다.
“…….”
그래 봤자. 마냥 좋아하고 반길 일도 아니지만. 손끝을 까딱였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은 그림자 줄기가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괴물은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했고, 사람은 이전의 변화조차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 더 이상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심술궂은 호랑이.”
작게 중얼거린 내 말에 엄마가 뭐라 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느긋하게 오후 출근을 한 나는 출근 도장을 찍자마자 곧바로 의무실로 올라갔다. 하얀 병원보다는 깔끔한 카페 같은 분위기의 병실 안에 이호연이 앉아 있었다.
나를 발견한 이호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꼬리가 살랑거렸다. 푹신한 침대에 앉아 조금 야윈듯한 뺨을 쓸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검사 결과는 어때?”
“이상 없어요.”
내 손에 제 뺨을 비비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벌써 이걸로 삼 일째였다. 내 히든 게이트에서 돌아온 뒤 이호연이 의무실 밖으로 못 나간 것이.
본인은 멀쩡하다고 하고, 검사 결과도 매번 문제없다고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영 맥을 못 추렸다.
현기증을 느끼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꾸만 꾸벅꾸벅 졸았고 금세 피곤해했다. 지금처럼.
“…잘 자.”
잠들어 버린 이호연은 침대에 눕혀 주고 병실을 나왔다. 병실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주세진을 보며 물었다.
“상태는 어때요?”
“몸에 문제 자체는 없어. 자꾸 잠들 뿐이지.”
기생충 사건 이후로의 반복이었다. 그때 기력을 죄다 빨려 버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집부리는 건요?”
“여전하지. 괜히 일찍 나와서 검사하는 거 보며 걱정하는 모습 원하지 않는다며 너 오후 출근하게 해 달래.”
“…….”
한숨이 나왔다. 이호연이 의무실에 들어간 지 하루하고도 하루 더 지났을 때, 랑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미 다 알려 주었다면서.
다만,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는 했다.
‘생각보다 불완전한 것 같구나.’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짐작 가는 구석은 하나였다. 하얀 꽃과 산. 그 산의 주인. 그리고 그 산에 가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호연의 하늘 조각,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차트를 확인하던 주세진이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호연 하늘 조각이요. 심술궂은 호랑이가 사는 산으로 갈 수 있는 히든 게이트.”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주세진이 차트를 덮으며 다소 냉랭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안 돼.”
단호한 어조에서 소소하게 사고 치고, 멋대로 일 벌이는 내 행동들을 매번 넘어가 주던 평소와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사히 나와서 다행이지 네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아? 전직관들은 자신의 전직자를 살려서 내보내 준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어.”
“지금까지는 그랬죠.”
“유하연.”
“…….”
“그 한번을 믿고 함부로 움직이지 마. 변수를 믿고 움직이는 순간부터 네 목숨을 위협하는 변수들 또한 감당해야 하는 거야.”
“…….”
틀린 말이 아니었다. 랑의 경우를 믿고 행동하기엔 도박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확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호연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신경이 예민해지니 입에서는 절로 좋지 못한 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그럼 확률 재 가며 행동할 거야?
입 안에 갇힌 말을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기껏 말해 봤자 상처 줄 못된 말만 하던 시절이라면 주세진에게 그리 말했을 것이다. 나는 내 말에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세진은 그것을 트집 잡지 않았을 것이다.
“하….”
말을 지운 숨결만 입 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아니다. 그때와는 다르다. 아무렇지 않게 남의 속에 불 지르는 말을 할 정도로 나는 서럽고 화난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에 그러겠다 답할 마음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눈길을 피한 것은 주세진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얕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나는 때때로 그에게 상처 줄 말을 고르곤 했다. 내뱉지는 않지만, 그것을 삼킬 때면 매번 속이 껄끄러웠다.
나는 그의 옆 모습을 바라보다 병실로 들어갔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던 것인지 이호연이 어색한 얼굴로 나를 살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
“…세진이 형이 안 된다고 할 때부터요.”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나지. 속마음을 숨기고 몸을 일으키는 그를 다시 눕혔다. 침대에 걸터 앉아 그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조각의 주인이고 남의 히든 게이트 들어가서 살아나온 유일한 사람이잖아.”
의견을 묻는 내게 이호연은 조금 곤란한 낯으로 말했다. 얼굴 보자마자 답을 알 것 같았다. 거절이군.
“솔직히 저는 반대예요.”
“왜?”
내 질문에 손끝을 꼼지락거리던 이호연이 조심스레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얽었다. 간지러움이 살짝 묻어나는 느릿한 움직임을 느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제 전직관에게서 당신을 지킬 자신이 없으니까요.”
“…….”
그는 내 눈에 눈을 맞추며 말했다.
“류의 게이트 안에서 제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에요. 제가 아닌 누구라도 살아서 나왔을 거예요. 류도 그걸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렇지. 보통은 자신의 전직자가 무릎 꿇고 빌어도 전직관들은 봐주지 않으니까.”
랑이어서. 그리고 그의 전직자가 나이기에 일어난 아주 작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제 전직관이 그 보통에서 벗어나는 존재라는 자신이 없어요.”
이호연은 그리 말하면 웃었다. 흐리게 웃는 낯이었다. 그 낯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내 전직관이 괜찮을 거라고 했어도?”
랑이 나를 위험에 빠트릴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내게 먼저 이호연의 게이트에 들어가라고 한 것은 내 안전은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다만 그것은 나와 랑 간의 신뢰이지 이호연과 랑의 신뢰는 아니었다.
“변수를 믿고 행동하기엔… 제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요.”
그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슬그머니 올라오는 짜증을 느껴야 했다. 조금 서러운 그런 짜증.
“그럼 나는?”
“…….”
“네가 보는 나는, 답지 않게 변수 하나 믿고 움직이려는 나는. 왜 그러는 것 같은데?”
가끔 보면, 이호연이나 주세진이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제멋대로 성정의 포식자? 즉흥적이기 그지없는 무도한 공주님?
마주 보는 회색 눈이 크게 뜨였다. 먼지 낀 거울을 마주 보는 기분으로 그의 눈부처 안 나를 보았다. 주세진에게는 입을 다물었으나 이호연에게는 입을 열었다.
중요도를 따지면 내게는 후자의 사람이 더 중요했다. 그럼에도 짜증과 못된 말을 내뱉게 되는 것도 후자라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여기서 내가 화를 내며 나가 버리면 우리 사이는 흔들릴까, 하는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싸우고, 대화의 단절이 시작되고, 서로 각자의 생각의 꼬리를 물며 오해하다가 상처 주고. 뻔한 이야기가 돼서 시간에 흐름에 따라 묻히고 스러져 사라지는 흔한 이야기가 될까.
그건 싫었다. 충분히 멋대로 행동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은 그런 것이 싫은 나의 서러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속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제멋대로 폭군으로 살 거면 애초에 혼자 사는 게 나았다. 쉽게 상처나고 금세 낫는 손톱 옆 거스러미를 오늘도 괴롭혔다. 손끝으로 틱, 틱 뜯으며 일어나는 거스러미가 나인 것 같았다. 그것을 뜯어 버리며 말했다.
“나는 변수 하나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누구보다 재고 따지며 행동하지.”
“류….”
“그러니까… 이번에는 나한테 져 줘.”
기껏 말하는 것도 결국은 제멋대로 통보. 가끔은 내가 소통 능력이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보하는 게 편해진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왔다.
네가 잠들 때마다, 천천히 죽어 가는 것 같아.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내 행동의 정당성이면 안 되는 걸까.
말하고 싶은 속내는 꼴깍 삼켰다.
이호연 쪽으로 뻗는 내 손을 검은 그림자가 한번 감싸다 사라졌다. 손안에 하얀 장미를 닮은 꽃가지가 생겼다.
그것을 이호연이 입고 있는 옷가지에 찔러 넣었다. 내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 끝자락에 같은 꽃을 달아 주고 사라지는 그림자 줄기를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변수만 믿고 행동하지 않아. 그렇다고 랑을, 내 전직관의 말 하나 믿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야.”
허무함에 몸이 주눅드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보다 감정 서리지 않은 내 어조에 이호연이 조금 불안한 얼굴을 했다. 왜 누그러진 음성에 오히려 불안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쓸어내려 하얀 꽃을 앞으로 끌어냈다. 조금의 시든 흔적도 없이 싱그러움이 여름 한낮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나를 믿는 거야. 결코 나를 위험하게 만들지 못하는 랑을 아는 나를.”
제 옷가지에 끼워진 꽃을 더듬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낯을 한 이호연이 내게 말했다.
“당신의 전직관은 당신을 닮았어요.”
“…….”
“분위기가 닮았고, 짓궂은 점이 닮았어요. 그래서 내게 얄미운 말을 해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요.”
꽃을 더듬는 내 손 위로 이호연의 손이 더해졌다.
“그래서 그 남자의 말을 믿기가 힘들어요.”
“왜?”
“…류도,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호연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은 아니나 모호한 말로 속여 넘겼는지 나도 헷갈릴 정도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런데도 너는 언제나 내게 속아 넘어가 줬다.
내가 입을 다물면 더 이상 묻지 않는 그 불완전한 배려 덕분에 내 마음은 언제나 편했다. 겉보기에는.
다시 잠에 빠지려는 듯 깜박이는 눈을 보다 손가락을 맞대어 딱 소리를 냈다. 푸른 불티가 튀며 회색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임시방편일 뿐인 작은 불장난이었다.
“알면서 왜 말 한번 하지 않았는데?”
“…진실이 아닐 뿐이지 거짓은 아니잖아요.”
이호연이 제 목을 더듬었다. 얇은 줄에 걸려 있는 하늘 조각이 옷 밖으로 끌러져 나왔다. 청명한 하늘에 푸른 산등성이가 엿보였다.
“류와 그 남자는 닮았어요. 그래서 믿지는 못하겠는데, 신뢰는 가요.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 기분 하나 믿고 류를 위험해 빠트리는 것이 싫었을 뿐이에요.”
회색 눈이 곱게 휘었다. 언제나 내게 져 주는 이의 웃음이었다. 내 손 위로 차르륵거리며 떨어진 목걸이 끝에 선명한 색감의 하늘 조각이 흔들거렸다.
“형한테 혼나는 건 나중에 생각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
내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본 이호연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퍽 짓궂은 얼굴이었다. 의아함이 담긴 내 시선에 이호연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미안해서 못 들어오는 거에요. 은근히 소심하거든요.”
“소심한 건 나도 알아. 그런데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
“…감성보다 이성을 앞세운 것?”
그리 말하며 이호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몸을 숙이느라 볼 수 없었다.
신발을 신다가 다시 감기는 눈을 보며 손가락을 맞대 딱 소리를 내었다. 불티가 튀고 눈이 다시 또렷해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어.”
내 말에 이호연이 묘한 얼굴을 했다. 쓴 커피를 삼킨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내게로 성큼 걸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나와 눈높이를 맞게 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이호연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였다.
“틀리지 않지만, 듣는 사람 기분 상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죠. 그리고 류는 항상 그런 말들은 모호한 말로 정리해 버려요.”
“내가 그랬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어, 가 아니라 그 말에 기분 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진실에 가깝지 않아요?”
그런가….
이호연의 말을 들으니 괜히 기분이 께름직했다.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이호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제 조각을 허공으로 던졌다.
풀 냄새가 병실을 채웠다. 조각 너머에서 날아온 듯한 초록색 나뭇잎이 병실 바닥에 흐트러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문 쪽으로 걸어가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 똑똑거리는 소리에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이 몸을 움찔거린 것이 느껴졌다.
“…다녀올게요.”
상대에게서 돌아온 답은, 똑똑 하고 느리게 울리는 노크 소리였다. 이호연이 뒤에서 헛웃음을 내뱉는 것이 들렸다.
주세진이 답지 않은 짓을 한다고 나 또한 생각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호연의 손을 잡고 풀 내음 가득한 공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잠드는 이호연을 고칠 방법, 변화한 괴물을 상대할 방법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심술궂은 호랑이.
꽃 하나를 단다고 태도가 얼마나 바뀐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랑은 의뭉스럽고 장난치는 것은 은근히 좋아하기는 해도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
이호연의 말대로, 정말 그와 내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내 말에 답해 주는 이 하나 없다는 점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공기가 좋았다. 나무들이 얼마나 무성하고 파릇파릇한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참, 좋은 풍경이었다.
손목에 매단 커넥터를 작동시켜 보았지만 전파가 잡히지 않는다며 거절당했다. 단단한 나무의 기둥을 손으로 더듬다가 그것을 밟고 위로 올라가 보았다.
아파트 20층 높이는 족히 될 정도로 커다란 나무였다.
“푸르네….”
마치 이끼로 뒤덮인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전직도 못 한 제대 앞둔 군인 이호연 씨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가 말했던 숲속에서 살아남기 서바이벌이 사실 숲속에서 생존하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는데. 이호연의 히든 게이트에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다만 빛무리를 뚫고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이호연이 사라진 상태였다.
게이트를 넘는 과정에서 뭔가 잘못돼 이 드넓은 산속에서 헤어진 것 같았다.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거나.
원래라면 이호연의 그림자를 이용해 금세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내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이런 무성한 산속은 낮이 없는 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이곳이 괴물이 득실거리는 하늘 조각 안이 아닌, 전직관의 마이 홈 그라운드라 그런지 능력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마이 홈의 주인은 성격이 영 좋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음….”
나뭇가지를 밟아 다시 땅으로 내려온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손에 힘을 주었다. 보아하니 그림자나 푸른 도깨비불 같은 스킬 종류도 영 맥을 못 추렸다. 그나마 신체 능력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로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꽉 쥔 주먹을 뻗어 그대로 고목을 후려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나뭇잎이 쏟아져 내렸다.
장정 열이 있어야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고목의 기둥 위로 선명하게 패인 자국이 남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라면 쓰러졌어야 했다.
“…나무가 단단한 건가?”
아니면 신체 능력에도 제약이 생긴 건가? 잠시 고민하다 손을 보며 생각했다.
다시 해 볼까? 그 생각을 하며 자세를 잡았다. 손을 뻗었다. 손이 고목 위로 닿기 직전, 풀 짓밟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나타난 남자가 내 손을 붙들지 않았다면 실험은 성공했을 것이다.
“!”
뒤에서 내 손을 붙잡은 이를 인지함과 동시에 뒤로 돌았다. 넓은 소맷부리가 제일 먼저 보였다. 주먹 쥔 내 손을 붙잡은 손이 커다랬다.
반대 손으로 날 잡은 이의 팔목을 붙잡았다. 상대가 그런 내 행동에 주춤하는 사이 그대로 고목 쪽을 향해 상대를 엎어트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고목에 부딪힌 것은 상대의 등이 아니었다. 단단한 두 다리가 고목 위를 밟고 있었다. 그 잠깐의 사이에 균형을 잡고 몸을 비틀어 자세를 취한 것이다.
“…놔.”
내게 붙들려 비틀어진 제 팔을 흔들거리며 상대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로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놓친 내 손에 힘을 주며 고목 대신 남자의 머리 쪽을 향해 휘둘렀다.
최소한의 움직임이 무엇인지 보여 주듯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으로 내 공격을 피했다. 먼저 나 있던 패인 자국 옆으로 새로운 패인 자국이 생겨났다.
나무 조각들이 부스러져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다시 한번 말했다.
“놓으라 했다.”
남자는 나직히 말하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나자 남자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쳐냈다.
내가 자신을 놓침과 동시에 남자는 고목을 발로 차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가벼운 몸짓이었다. 사뿐히 내려오는 몸짓에 따라 기다란 하얀 머리칼과 하얀 옷자락이 흔들거렸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랑만큼이나 긴, 거의 무릎에 닿을 것 같은 길이였다. 그리고 내게 너무나 익숙한 하얀색이었다.
“…누구야, 너.”
내 말에 상대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아도 사실 남자의 정체는 뻔했다. 다만 내가 예상한 모습이 아니기에 물어봤을 뿐이다.
검은 너울이 둘러진 갓을 뒤집어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키는 컸다. 예스러운 복장은 산에 어울리지 않게 치렁거렸으며 풀물 들기 좋은 하얀 색이었다. 그리고….
“알면서 묻는 나쁜 버릇이 있구나.”
“…….”
조금 더 낮은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닮았다.
지익, 하고 흙과 내 발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그림자 속에서 머리를 빼내는 류를 잡기 위해 몸을 낮추는 나를 보면서도 남자는 제지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검은 너울 너머 무슨 얼굴을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느낌 하나 믿고 경계를 풀거나 할 수는 없었다. 내 앞에 저 남자는….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남자의 너울이 움직였다. 손끝이 움찔거렸지만, 남자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다. 검은 밤 자락 같은 그것의 움직임이 향하는 곳을 향해 나 또한 고개를 돌렸다.
어둠 껌껌하게 보일 정도로 울창한 산속, 무성하리만치 해 가리는 나뭇잎 그득한 그곳에 새하얀 백호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드러난 송곳니는 한 번 문 것을 놔주지 않을 적의로 가득했다. 목을 긁는 것 같은 소리는 어흥 같은 귀여운 단어로 표현할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이호연?”
내 부름과 동시에 백호가 발밑에 풀들을 짓밟으며 달려들었다. 내 앞의 남자에게로. 호랑이에게 물려 몰아붙여진 남자가 패인 자국이 선명한 고목 위로 다시 한번 처박혔다.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호랑이의 송곳니를 한 손으로 잡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 남자에게선 힘든 기색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힘에서 밀리는 것은 이호연이었다. 너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건방지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소리는 너 때문에 생긴 것 같구나.”
송곳니를 잡지 않은 반대 손이 백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한 손으로 이호연을 붙잡은 남자가 그대로 그를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바닥에 처박힌 하얀 호랑이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다 움직였다. 검은 것이 허공에 나폴거리는 먼지를 흐트러트렸다.
“…….”
“놔.”
내 말을 들은 남자의 고개가 내 쪽을 향해 기울어졌다. 흔들거리며 그의 얼굴을 가리는 너울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찢은 것은 나였다.
오늘따라 고생 많은 고목에 류가 꽂혔다. 흔들거리는 등을 툭 치고 등대를 잡아 쓸며 남자에게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코앞에 남자가 있었다.
흙 바닥에서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쪽으로 한 번, 그리고 내 쪽을 향해 휘날리는 남자의 너울 자락을 한 번 눈에 담으며 등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등 안에 호롱불이 작게 피어올랐다. 낭패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불이었다.
아마도, 이호연의 전직관일 이 산의 주인. 본체는 이호연의 변형 모습과 똑같을 호랑이의 모습일 남자가 천천히 제 전직자를 놔주었다. 너울 자락 너머 시선이 느껴졌다.
집요하고 몸을 굳게 만드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시선이었다. 이호연과 똑같을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게 익숙한 색으로 낯선 눈빛을 담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호연을 놔준 손이 내 쪽을 향해 움직였다. 목을 살짝 스치고 넘어가 내 머리를 앞으로 끌고 왔다. 하얗고 커다란 손이 길게 땋아 늘어진 머리카락을 쭉 쓸어내렸다.
땋은 머리 끝자락에 달린 하얀 꽃이 남자의 손에 들어갔다. 그것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뭐라 묻기도 전에 남자가 꽃을 떼 갔다. 머리가 풀렸다.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흔들리며, 밑에서 움찔거리던 호랑이가 몸을 움직였다. 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앞발이 남자를 향해 휘둘러졌다. 류를 휘둘렀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고목에 발톱 자국과 칼날에 패인 자국이 깊게 새겨졌다.
남자는 그곳에 이미 없었다. 순식간에 두 차례의 공격을 피하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풀잎은 바람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이호연이 그르렁거리며 나를 감싸듯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를 지켜보던 나 또한 그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잡지 못했다. 이 정도까지 신체 능력의 차이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
남의 게이트 안에선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이렇게 준비 없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림자는 비실거리고 푸른 불은 초라했다. 이 공간의 주인에 비하면 신체 능력조차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전직한 이후로 이렇게 능력 차로 인해 기분이 저조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나마 제 공간에 멋대로 침입한 나를 죽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해야 했다. 남자는 나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숨 한 번 내쉬는 시간, 걸음 한 번, 그 모든 것이 이 산의 주인에게는 나를 죽일 순간들이었다. 랑이 제 공간에 들어온 이호연을 언제든 죽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이호연을 보자마자 불부터 지르고 봤던 랑보다도 나름 점잖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전직자인 이호연한테 더 박한 것 같았다. 사이가 나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망설임 하나 없이 땅에 처박을 정도인 줄은 몰랐다.
먼저 덤빈 것은 이호연이긴 했지만, 뜬금없이 제 전직관을 공격했을 리도 없고 이미 변형을 한 상태였으니 이곳에 오기 전 제 전직관과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자신의 공간에 데리고 온 것에 대한 책임을 이호연에게서 묻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말의 어투, 행동, 기세에서 이호연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흙투성이 된 하얀 털을 힐끔 쳐다보며 어두컴컴한 무리 지은 군락을 이룬 나무 너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 따라 수풀이 움직였다. 사각거리는 소음이 산속을 울렸다.
기이할 정도로 산짐승 소리, 새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이 공간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봐준다는 듯, 일부러 우리가 자신을 인지할 수 있게 하면서 말이다.
이호연이 그곳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제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달칵거리며 등의 문이 열렸다. 작은 여우 불이 살그머니 등에서 빠져나왔다.
나무 아래 어둠을 향해 여우 불이 움직였다. 어둠이 푸른 불에 조금 밀려남과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단순한 산바람이 아니었다. 여우 불이 꺼졌다.
물러났던 어둠이 다시 자리를 차지하고, 새하얗고 커다란 무언가가 어둠을 뚫고 튀어나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풀린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섬찟함이 내 몸을 붙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내 손끝, 발끝에 매달려 늘어진 것만 같았다. 늘어진 것의 이름은 두려움이었다. 숨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간신히 그 감각을 털어 내고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봤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도랑처럼 깊게 패인 땅과, 흙먼지. 그리고 가늘고 기다란 하얀 꼬리였다. 복슬복슬 호랑이의 꼬리가 아닌 비늘로 덮인 그런 꼬리.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와중에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허리를 비틀었다. 풍압에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것을 향해 류를 치켜들어 아래로 찍어 내렸다. 등과 구슬 장식이 요란스레 흔들렸다.
막힌 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꼬리가 아닌 도랑에 류를 꽂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었다. 백호를 문 기이한 하얀 용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니, 용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저게 뭐야.”
몸과 꼬리는 가늘었다. 머리에 뿔은 없었다. 몸에는 호랑이 무늬가 그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도 호랑이도 아닌 기이한 것이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다.
용의 아가리에 붙들려 있던 백호가 몸부림치며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하늘에서 용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꽃 들고 산에 놀러 가라더니….”
두 번 놀러 왔다가 송장 치르겠네. 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정말 내 안전은 보장되었다는 것과 이호연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
랑만큼 속을 알 수 없는 이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인제 보니 전직관들이 다 이상한 것 같았다.
죽일 듯이 구는 것이 제 공간에 침입한 자가 아니라 전직자라는 경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주세진과 이호연의 예상은 다 틀렸다. 산의 주인께선 날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호연을 죽이려 들어서 문제인 거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이래도 안 죽이려나.”
조심스레 손을 뻗어 오늘따라 고생 심한 고목 위를 더듬었다. 바짝 마른 것이 잘 탈 것 같은 나무였다. 그림자를 다루는 것이 힘들었다. 불 피우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불 다루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늘에서는 용의 입에서 벗어난 호랑이가 용의 몸을 밟고 다니며 비늘을 긁어 대고 있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안타깝게도 별 타격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호연이 지상으로 추락하거나 용에게 물려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설마 진짜 죽이겠어? 라고 태연하게 생각하기엔, 이호연의 전직관이 자신의 전직자를 보통 싫어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전직도 안 한 평범한 사람을 이 산속에 버려 두고 사라졌겠지.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그의 전직관이 서바이벌을 선호하는 전직관인가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알 것 같았다.
치사하게 용으로 변해 호랑이와 공중전 하는 전직관께선 아마 죽으라는 의미로 이호연을 산에 방치했을 것이다. 물 하나, 식량 하나 직접 구해야 하는 이곳에 말이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한 적의였다.
“랑은 정말 무슨 생각인 건지….”
정황상 그런 호랑이의 심리를 대강 알고 있었을 것 같은 랑이 왜 이곳에 가라, 가라 재촉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랑은 산의 주인이 나를 죽일 생각이 없고, 내가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변수를 믿고 행동하는 자가 아니었다. 제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것을 지켜보는 컨트롤 타워에 가까운 이였다.
자신의 전직자 성격이 어떤지도 잘 아는 랑은 이 또한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패기 넘치게 굴기로 결심했다. 손가락을 맞대어 소리를 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끝에서 자그마한 불티가 튀었다.
패인 자국 그득한 고목에 푸른 불이 붙었다. 마른 나무,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웬만하면 절대 꺼지지 않는 푸른 도깨비의 불. 산불 나기 딱 좋은 조건들의 총합이었다.
나는 방화범이 된 기분으로 슬금슬금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고목의 절반을 살라 먹은 불이 가지를 타고 넘어가 옆의 나무들도 잡아먹었다. 점점 커지는 산불을 지켜보다 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시작은 불티였으나 산에서는 그 작은 불티 하나가 말도 안 되는 결과를 갖고 오고는 했다. 등이 흔들리며 나무를 타고 오르는 불들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푸른 불 자체가 나의 권속이었다. 불 피우기 힘들면 번지게 만들면 된다. 물론 밖에서는 못 할 짓이었다.
화려한 봄날 벚꽃이 흩날리듯 허공을 그득히 메우는 푸른 불의 불티를 밟으며 용을 향해 뛰었다. 산불이 되어 버린 푸른 불이 폭포수의 줄기처럼 내 뒤를 따랐다.
불과 함께 연기도 하늘로 피어올랐다. 치고받느라 정신없던 용도 호랑이도 그것을 봤는지 싸우던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동물의 얼굴이었으나 이호연의 표정에 황망함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용 쪽은 모르겠다. 호랑이 무늬의 용은 표정 없는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질책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눈 마주치자마자 공격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죽이지는 않아도 건방진 방화범을 공격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마이 홈이 불타는 것을 봤음에도 용에게선 나를 향한 적의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담은 회색 눈이 나를 보았다. 역시나, 내게로 향하는 적의가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캐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불티 위에서 불안 불안 흔들리던 내 발밑으로 불이 모여들었다. 허공을 유영하는 등이 장식과 함께 한들거리며 춤을 추었다.
나는 푸른 불을 이용해 내 눈앞에 호랑이 줄무늬 용만큼 커다란 푸른 불의 용을 만들어 냈다. 사그라지는 불티에서 내려와 푸른 불의 용 위로 올라섰다.
“저 아래 산이 전부 타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그만 싸우고 대화를 하는 것이 먼저일까요?”
저는 싸울 의지 없습니다. 나는 무해한 낯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내 주변으로 산을 태운 불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용이 몸을 뒤틀어 제 꼬리 쪽에 서 있던 이호연을 다시 입에 물었다. 손끝이 움찔거렸지만 공격할 의사가 없는 듯한 모습에 애써 손에 힘을 풀었다.
호랑이의 모습이었던 이호연이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왜 변형을 풀었지?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놀란 듯한 그의 표정에서 변형을 푼 것이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봐준 거였구나. 알고는 있었다. 다만 생각하는 것과 직접 그 범위를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랑의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저렇듯 남의 능력에 대한 간섭 여부를 생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일방적인 우위에 있다는 것을 굳이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성격 참 고약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랑과 눈앞의 저 용이 자신의 전직자들의 능력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이 둘을 제외한 다른 전직관들도 자신의 전직자의 능력에 간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네들이 우리에게 비협조적이다 못해 적의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싸울 능력조차 없겠구나 싶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으나 그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세상에 그냥 쥐어지는 것은 없었다. 전직관들이 우리에게 힘을 준 것은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싶었다.
용의 회색 눈이 번뜩였다. 목 뒤로 스산한 바람이 지나감과 동시에 하늘에 구름이 거세게 움직였다. 바람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의 모습이 기이했다.
푸른 불의 용 위에 서 있던 나는 급작스럽게 불어오는 강풍에 몸을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불의 용에게서 튀어 오르는 불티들이 바람을 따라가다 사그라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너머, 말도 안 되는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다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쳤네.”
그리고 돌겠다. 미치겠네, 진짜.
산의 나무와 풀을 살라 먹던 불의 움직임이 멎었다. 바람 따라 불의 길이 바뀌었다. 강제로 분리되듯 나무에서 떨어진 불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왔다.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로 올라올수록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산소 차단의 원리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비과학적인 힘의 논리인지 모르겠으나 후, 하고 한번 부는 입김에 꺼지는 생일 초 취급이었다.
이호연을 본 랑이 그런 말을 했다. 심술궂은 것은 자신이 아닌 이호연의 전직관이라고. 이호연의 전직관이 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그 뜻의 의미를 지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다. 호랑이가 아닌 용으로 변한 모습부터, 바람을 다루는 모습까지.
기껏해야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형하는 법만 아는 이호연의 전직관이라고 하기엔 할 줄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사실은 우리 집 옆집 할아버지가 어느 왕국의 전 기사단장이라든가, 우리 아빠가 전설의 용사 출신이라든가 하는 힘숨찐 클리셰 수준이었다.
용의 입이 열렸다. 용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저 아래로 떨어질 뻔한 이호연을 보며 손에 식은땀이 났다. 용의 이빨을 붙잡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바로 저 앞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나와 눈을 맞추며 용이 말했다. 깊은 동굴 속에서 시작된 듯한 음성이 울렸다.
“선택권은 내게 있는 것 같은데. 대화할 것인지, 아닌지.”
“…….”
산불은 멎었고, 멀쩡히 남은 불은 내가 밟고 서 있는 용의 형상을 한 푸른 불뿐. 그래 봤자 이 또한 저 용이 바람을 부른다면 꺼져 버릴 불이었다.
전직관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득한 너머에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랑이 나를 정말 많이 봐주고 있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앞으론 적당히 까불어야 될 듯 싶었다.
손안에 감기는 제등의 나무 결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어차피 나 죽일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게 낫지 않아?”
“굳이 대화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면?”
단호하네. 순수한 의문이 아닌 비꼼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웃긴 건 여전히 적의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내 머리였다. 누가 내게 안전하다고 속닥이는 것처럼, 이 곤란한 상황에 맞지 않게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정신은 평화로운데 몸은 긴장하는 그런 이상한 상태였다. 긴장한 몸은 쓰잘데기 없는 곳에 힘을 주고는 했다. 목에 힘이 들어갔다. 손안에 식은땀이 찼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머릿속은 평화로웠다.
그래서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어색하지 않게 웃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음….”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화려한 푸른 불의 용에 의해 가려진 작은 불덩어리의 움직임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배운 지 얼마 안 된 것을 이렇게 빨리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피부로는 느낄 수 있을 열기. 그 열기마저 사람의 체온과 비슷할 정도로 얇게 퍼트려 천천히 움직였다. 못 할 줄 알았는데.
과연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자 모방 능력에 있어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
“…….”
언젠가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이호연이 왜 신체 계열 전직자들 중에 최고라고 평가되는지를 말이다. 힘, 체력, 민첩. 그리고 맷집이 장난 아니었다.
시선을 살그머니 내려 이호연과 눈을 마주쳤다. 내 시선에 무엇을 느꼈는지 몰라도 뭔가 대충 눈치를 챘는지 이호연이 지상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그머니 움직인 열기가 용의 눈앞에서 멈췄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나는 대화하기를 원해요.”
퍼져 있던 열기가 모여들고, 용의 눈앞에 푸른 불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눈에 푸른 불이 담김과 동시에 용이 추락했다.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귀교(鬼橋)를 열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아니, 더했다. 목구멍 안쪽이 시큰거렸다. 흐트러질 뻔한 푸른 용을 수습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헛헛한 숨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대한 용의 추락으로 인해 숲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꼿꼿함을 잃고 쓰러져 내린 나무를 훑어보다 푸른 불의 용 위에서 뛰어내렸다.
용의 형체를 이루던 푸른 불이 흐트러지고 다시 모여 작은 불여우들이 만들어졌다. 불여우들이 만들어 주는 불티를 밟아 아래로 내려왔다.
무너진 숲 사이로 이호연이 머리를 쓸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생채기는 있어도 크게 다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 맷집은 돼야 하늘에서 용에게 덤빌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숲의 일부를 파괴한 거대한 용 또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다란 하얀 머리칼이 풀과 흙 위로 흐트러졌다. 하얀 옷은 지저분해진 주변과 달리 여전히 깨끗했다.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몸의 통제권이 내게로 넘어와 있으니까. 그런 남자의 위로 수십 마리의 불여우들이 빙글빙글 열 맞추어 뛰어다녔다.
손끝을 움찔거리는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
“정신계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눈 가리고 싸울 각오는 해야죠. 그렇게 뚫어져라 볼 게 아니라.”
“…….”
나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 허세였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똑같이 정신계 마법을 걸어 몸을 통제시키는 거라고 해도 상대에 따라 나한테도 페널티가 있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주세진처럼 정신력에 대한 철벽 스킬이 있으면 애초에 걸리지도 않았겠지만, 다행히도 이 남자는 그런 스킬은 없는 듯했다. 전직관도 정신계 마법에 걸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만.
눈 사이를 꾹꾹 눌렀다. 약간 흐릿해졌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랑한테는 정신계 마법 써 볼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괜찮아?”
“네….”
내 물음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제 머리를 짚었다. 손끝으로 머리를 문지르는 것이 떨어지면서 부딪힌 곳이 얼얼한 듯했다.
그 높이에서 떨어진 게 얼얼한 것으로 끝날 정도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참 대단한 맷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바닥에 엎어진 남자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
좀 이상한데.
수상했다. 겨우 이거 한 번으로 이렇게 순순히 잡힐 정도로 남자가 약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도 봐주는 건가? 대체 왜?
류를 땅에 꽂아 고정하고 조심히 몸을 낮춰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열 맞춰 빙글빙글 허공을 뛰어다니던 불여우들이 살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옆면이 조금 찢긴 너울의 끝을 잡았다. 재질이 내 도깨비 가면에 달린 너울과 똑같았다. 너울을 잡은 손이 움직이려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불여우 몇 마리가 깨갱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그라졌다. 붙잡았던 너울이 한들거리며 떨어졌다. 붙들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속에서 무언가가 타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드라마틱하게 피 토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는 것을 꼴깍 삼켰다.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비릿함이 거북했다. 그나저나….
정신계 마법을 강제로 깨트리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역시 지금도 당한 것이 아니라 당해 준 거였다. 시간차 공격도 아니고 깰 꺼면 진작에 깨든가 왜 이제 와서.
“손대지 마.”
남자가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 조금 감정이 서려 있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훅 하고 깜깜해졌던 시야를 생각해 볼 때 싸우는 건 최대한 피해야 했다.
속에서 들끓는 감각을 애써 참고 집중했다. 희미하게 암시가 온전히 끊기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일부러 남긴 것처럼, 흐릿하면서도 선명하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랑이 할 법한 행동과 비슷하지 않나? 조금 더 격하기는 하지만….
“…이거 놔요.”
남자에게 말함과 동시에 손을 뻗어 땅에 고정해 놨던 류의 등대를 붙잡았다. 불여우들이 폴짝폴짝 뛰어 등 안으로 들어갔다.
내 쪽에서 먼저 암시를 거둬들였음에도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몸을 추스른 이호연이 이쪽으로 와 남자의 손을 쳐냈다. 자유로워진 손을 탈탈 털며 남자에게 물었다.
“대화.”
“…….”
“할 거예요?”
내 질문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공격의 의사는 없으나 대화의 여지도 없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다 이호연의 옷자락에 아직까지 꽂혀 있던 꽃을 뽑아 남자에게 내밀었다.
“내 전직관이 이거 달고 당신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너울이 살짝 움직였다. 검은 베일 너머 남자의 시선이 내 손안에 꽃가지 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누워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는 그의 행동에 살짝 경계심을 가졌지만 그런 내 우려와 달리 남자는 내 손안에 꽃만 가져갔다.
“…꽃치자가 피는 계절은 지났는데.”
꽃치자? 저 꽃 이름인가.
꽃을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곧이어 남자는 꽃을 뭉개 버렸다. 그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조심스럽게 행동했냐는 듯 가차없는 손짓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런 그의 행동이 꼭, 화풀이처럼 보였다. 대상 없는 이 대신에 엉뚱한 곳에 푸는 그런 갈 곳 잃은 화. 손안에서 으스러진 꽃이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 땅에 굴렀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
내 머리에 장식된 꽃을 보면서도 저렇게 말했다. 이호연은 그런 제 전직관의 모습에 아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둘 사이도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뒹구는 꽃 위를 굳이 밟고 지나가는 심리가 참 고약했다.
나는 손을 뻗어 기다란 남자의 하얀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인제 보니 요 심술궂은 호랑이는 사람 모습일 때도 이호연처럼 호랑이 귀나 꼬리가 없었다.
고양이 털 같은 머리카락의 감촉은 똑같았다. 무례한 내 행동에 남자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놔.”
“오늘 나랑 한 대화의 절반이 놔, 손대지 마. 이거밖에 없는 거 알아요?”
“…….”
“어차피 나 죽일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대화 좀 해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의 물음에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꽃.”
“…….”
“꽃 다 망가트렸잖아요.”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며 남자를 재촉했다. 자신의 발밑에 있는 꽃을 다시 한번 짓뭉개는 것으로 남자가 내 말을 꽤나 성가셔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꽃값만큼만 대화해 줘요.”
“네가 그 꽃값을 어찌 알고?”
“나한테는 이름 모를 꽃이지만 그쪽은 아닌 것 같은데, 그쪽한테 그 꽃의 의미만큼 대화해 주세요.”
“…….”
억지스러운 내 말에도 남자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머리카락을 놔주었다. 불안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던 이호연의 낯에 안도감과 함께 의구심이 서렸다.
그의 의구심은 나의 의아함과 맞닿아 있었다. 그 꽃이 뭐길래, 그의 발목을 칭칭 감아 못 도망가게 하는 걸까.
짓뭉개진 꽃을 보았다. 흙투성이가 된 꽃은 언제 그리 활짝 폈냐는 듯 구겨진 휴지뭉치 같았다. 그것을 집어 손에 담았다. 그런 내 행동이 어떤 점을 자극했는지 제법 매서운 손길이 날아들었다.
내 손을 쳐 내 꽃을 떨어트리게 한 남자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숨기듯 그의 입에서 조금 전보다 거칠어진 어조로 말이 나왔다.
“여기 온 목적은 이미 이뤘을 텐데 대화할 것이 뭐가 더 있다는 거지?”
남자의 말에 이호연을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행동에 여기 온 목적을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폴짝폴짝 잘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문제의 기생충 사건이 다 해결됐다는 것은 알았지만 확인 사살 받으니 안심되었다.
“…….”
그에 따라 이번에는 내 쪽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럼 이 남자는 고칠 건 다 고쳐 주고 그렇게 죽일 듯이 행동했다는 건가? 성격 참 이상했다. 흔들거리는 하얀 머리끝에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혹시 내 전직관이랑 친했어요?”
“하…. 그놈이 그리 말하든?”
내 말 무엇에 그리 기분이 상했는지 남자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아는 사이 같길래 물어본 건데. 둘이 정말 뭐가 있긴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랑은 항상 숨기고 안 알려 주길래 물어본 것뿐이에요. 화내지 마세요.”
“…….”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 지뢰인가? 이번에도 남자의 기세가 사납다 못해 거세졌다. 인위적인 바람이 불었다.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몇몇 나무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땅 위로 뿌리를 드러냈다. 하늘 위 구름은 요란스럽게 하늘을 기었다. 나는 손안에 제등을 살펴보았다. 흔들리는 등안의 푸른 불꽃을 살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싸우지 않는 쪽을 원하는데, 하는 짓만 보면 상대는 싸우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속이 아팠다. 여기서 나가자마자 손민경부터 찾아가야겠다.
자신의 산에 사는 모든 것을 바람으로 괴롭히던 산의 폭군이 드디어 진정했다. 바람이 멎고 그런 바람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그자를 믿나?”
남자가 내게 물었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비에게서, 그리고 이번에도 내 대답은 같았다.
“애초에, 그리 믿은 적 없어요.”
너무 의무적이게 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믿은 적 없다…라….”
남자가 성큼, 한 걸음을 내밀었다. 몸을 움찔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려는 이호연에게 고개를 저었다.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인 남자의 너울이 뺨을 스치다 내 어깨에 걸터앉았다.
흐트러진 너울 사이 형형한 안광의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얼굴의 윤곽이 살며시 드러났다.
“그때도 그랬어야지.”
“…지금 뭐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내게서 멀어졌다. 몸을 틀어 이호연에게로 가까이 간 남자가 무어라 속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호연의 시선이 내 쪽으로 잠시 향한 것을 보니 내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때도 그랬어야지…. 무슨 의미일까. 주먹을 움켜 쥐었다. 속이 아프다. 너무.
피로했다.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받아라, 다음 문제닷! 하면서 골 아프게 하는 것들이 몰려들었다. 예언 들을 거냐는 이예린의 질문에 매는 나중에 맞는 주의라며 손을 쳐냈었는데 괜히 그런 것 같았다.
내가 나중에 매 맞고 싶다고 벌주는 사람이 응, 그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랑도 저 남자도 나란히 내게 문제를 주었다.
그 와중에 해결한 문제는 별로 없다는 점에서 감탄이 나왔다. 그나마 제일 급한 불이었던 이호연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이 그나마 비극 중 희극이었다.
바닥에 짓뭉개진 꽃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꽃값. 꽃의 의미. 꽃치자라고 했었지. 이곳에서 나가면 꽃치자가 무슨 꽃인지 찾아봐야겠다.
대화가 끝났는지 게이트를 열고 기다리는 이호연 쪽으로 걸어가며 남자를 보았다. 갓에 둘러진 너울 너머 엿보였던 얼굴.
빛무리를 내뱉는 게이트를 넘기 전 나도 모르게 이호연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랑 닮았더라.”
작은 목소리가 빛무리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