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바오밥, 장미. 별의 비애 (10/34)

#바오밥, 장미. 별의 비애

“천칭 쪽과 협력하기로 했어.”

주세진의 말에 공략대 길드원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주세진의 설명을 들었다.

“인원이 많으니 나눠서 진행할 건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수혁이랑 민호는 B-54 게이트로―.”

주세진이 과연 그걸 모를까. 아니야 모를 수도 있어. 직업을 나타내는 마크는 따로 검색해야 나오니까.

“정인이랑 나연이 민경이는―.”

길드가 만들어지고 자리를 잡은 지 이제 반년이 조금 넘을까 말까 한 시간이 지났다. 타 길드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렇게 쉽게….

“호연이랑 상호가 함께할 거고, 류는 천칭의 길드장과 함께 들어간다.”

주세진의 말을 흘려듣던 중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천칭의 길드원이 그렇게 많아요?”

내 질문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눠진 팀만 해도 4팀이었다. 리블의 공략대는 나를 포함해서 8명이었다. 4팀으로 나눌 정도면 천칭의 공략대는 대체 몇 명인 거지?

“팀마다 천칭의 길드원이 10명씩은 들어갈 거야.”

공략대가 최소 40명은 된다는 소리였다. 질보다 양이라더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차이가 심하다. 리블의 경우 일반 사원들 중에도 전직자가 제법 있어 급할 때 그들이 돕는 식으로 해서 정식 공략대 수가 적은 거기는 하지만….

보통의 중소 길드의 경우 공략대 인원은 15에서 30이다. 천칭은 지나치게 많았다.

“…….”

최소 80명이면. 누구 하나 몰래 바뀌어도 내부인이 아닌 이상 알아차리기 힘들 거다. 아니, 내부인이라도 알아차리기 힘들 수준이었다.

닉네임 옆에 붙은 마크가 바뀌는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커넥터의 주인이 재전직을 했거나. 커넥터의 원래 주인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그 커넥터를 이어서 사용할 때.

커넥터는 그것을 재전직으로 판단하고 닉네임도, 그간의 정보도 그대로 두고 오로지 직업을 나타내는 마크만 바꾼다. 그리고 나는 천칭의 길드원이 재전직했다는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재전직은 제법 뉴스거리임에도 말이다.

“류. 무슨 일 있나요?”

주세진에게 설명을 다 듣고 나가는 공략대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호연이 나를 불렀다. 걱정을 담은 회색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젓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내 말에 이호연은 뭐냐는 질문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살피는 주세진을 힐끔 보고 이호연의 팔을 잡았다.

“둘이서.”

자기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하는 내 모습에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순순히 나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사옥 기숙사로 갔다.

저번에도 와 봤던 기숙사는 여전히 깔끔했고, 정갈했다. 이층 침대의 사다리를 쓰다듬다가 1층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 옆에 앉은 이호연을 보며 물었다.

“이예린이랑 둘이 만나면 안 된다고 한 이유가 영역 때문이야?”

“…만났군요.”

“응.”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기어이 이예린을 만났다. 제 말을 들어주는 척하곤 곧바로 어겼으면서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는 내게 이호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어디까지 알게 됐나요?”

“?”

보통 이런 경우에 ‘어디까지 알게 됐냐?’하고 묻나?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천칭이 조금 이상한 길드라는 것. 이예린이 그렇게 정상은 아닌 것 같다는 것 정도?”

“그럼 거의 다 알아낸 거 맞아요.”

“화 안 나? 둘이 만나는 건 싫다고 했는데 알겠다고 한 날 바로 만났어.”

내 질문에 이호연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사실 류가 만나러 갈 거라고 예상했는걸요.”

“내가 그렇게 쉽게 파악되는 사람인가….”

“그렇다기보다는….”

이호연이 내 손에 제 손을 얽어맸다.

“제가 그만큼 류에게 관심이 많아서라고 여겨 주세요.”

“주세진은?”

“…형은 보호자의 마음이죠.”

주세진도 다 알고 있다는 뜻이군.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던 이호연은 이내 별 상관 없다고 판단했는지 내 손에 제 뺨을 비볐다.

“…다친 곳은 없나요?”

“그럼. 애초에 영역에 안 들어갔으니까.”

“…네? 그럼 영역에 대해선 어떻게?”

하얀 호랑이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뭐. 영역 들어가도 이길 것 같기는 하지만.

“영역을 펼치려고 하길래 그냥 내가 저지했어.”

“?”

“나도 영역 사용자거든.”

“류가, 영역 사용자라고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영역은 보통… 마법사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갖고 있다고….”

“…나 마법사야.”

“순수 마법 계열이요. 손민호처럼 힐러와 전투가 섞인 케이스가 아니라 순수한 마법 계열….”

“…….”

“…신체 계열 섞인 거 아니었나요?”

아니야.

떨떠름한 내 얼굴에 이호연이 당황한 듯 눈을 데록데록 굴렸다. 꼬리가 바쁘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신 사나운 털 뭉치를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뭐. 모를 수도 있지. 나도 가끔 헷갈려서 손이 먼저 나가는데 남들이 보면 얼마나 헷갈리겠어.”

“…….”

“그보다 묻고 싶은 건 그거야. 천칭, 그 길드 대체 뭐야?”

내 질문에 이호연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나는 그런 이호연을 보며 생각했다. 왜 그는 그렇게까지 이예린을 경계했을까.

이예린이 말한 것처럼 예전에 영역으로 강제 이송당하고 죽었다! 같은 요상한 예언을 들어서? 잘못하면 영역의 미아가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를 그렇게까지 잘 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

애초에 이호연은 본인이 개인적 이유로 싫어한다고 제가 아는 사람 모두가 그 사람이랑 안 어울리기를 바라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그리고 이호연이 평소에도 그렇게까지 이예린을 경계하고 싫어했다면 주세진이 그녀를 못 오게 했을 것이다. 즉 평소에는 그냥저냥 하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럼 어제의 무엇이 이호연을 자극했을까. 뭐가 달랐을까. 심지어 김수혁이 천칭의 길드원과 멱살잡이하며 노는 것까지 모두 익숙한 것처럼 굴었는데.

“…….”

나?

이예린이 접근한 것은 나. 이호연이 경계한 것은 ‘내’가 이예린과 단둘이 만나는 것.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천칭. 그곳의 길드장 이예린. 이상한 이예린. 그 원인은 천칭, 그 자체.

천칭은….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설마 아직도 그 옛날 방식을 못 버린건가.

“…이예린이 아니라 천칭, 그러니까 그 길드를 소유하고 있는 기업을 경계한 거야? 나한테 접근할까 봐?”

“…네.”

정말 뭐가 더 있구나.

“그 기업.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이호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듯 시간을 끌던 그가,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반년이면. 한 길드가 정착하고 기반을 다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에요. 그 길드가 대기업의 지원까지 받았다면.”

“…….”

“그리고 반년이면. 비리나 범죄를 저지르고 체계화시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죠.”

“이예린이 쓴 노예 계약서 같은 거?”

“그보다 더 질이 나빠요…. 커넥터로 천칭의 길드원들 직업 마크를 본 적 있나요?”

“…국가 장학금 언제 나오냐고 하는 애 직업 마크가 바뀐 것은 봤지.”

“3번이에요.”

“…….”

“류가 말한 사람의 직업 마크가 바뀐 게. 이번이 3번째예요.”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재전직은 한 번이었다. 어떻게 운이 좋아 재전직 이후, 다시 한번 히든 직업으로 재전직한다고 해도 최대 두 번. 세 번이나 바뀌는 게 가능할 리가….

있다. 커넥터는 주인이 바뀔 경우, 바뀐 주인의 직업을 재전직으로 입력하니까. 제 팔을 움켜쥐는 내 손을 보며 이호연이 말했다.

“처음 그 사실을 눈치챈 건 수혁이었어요. 류가 말한 사람이랑 커넥터 자게에서 마주치면서 친분을 쌓았대요. 그러다 직업 마크가 바뀐 것을 보고 개인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 끊기를 원했다고 하더군요.”

“…….”

“그러다 다시 직업 마크가 바뀌었을 때 그쪽에서 다시 연락이 왔대요. 친했던 시기와도, 급작스럽게 연락 끊기를 원했던 시기와도 다른 말투로. 전부터 존경했다며 다시 친해지길 원한다고요.”

“김수혁은 어떻게 했는데?”

“…처음에는 무슨 일 있었나 하며 다시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그러다, 갈수록 대화를 하는데 기억하는 것이 다름을 느꼈대요. 관심사, 함께 떠들었던 맛집, 갖고 싶은 물건. 심지어 가족에 대한 것까지.”

“…….”

“그리고 최근. 또다시 직업 마크가 바뀌고 말투도 기억도 바뀐 사람이 연락을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보냈다더군요.”

“주세진은 알아?”

“…다시 친해지길 바란다고 연락이 오기 시작했을 때 알렸어요. 형이 그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그 사람 외에도 직업 마크가 바뀌거나 다른 사람처럼 바뀐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얼마나 알아 이 사실. 이예린은?”

“일단… 공략대 멤버들은 다 알고 있어요. 최근 들어 직업 마크가 바뀌거나, 말투가 다른 경우가 늘기 시작했거든요…. 이예린의 경우 세진 형이 따로 만난 적이 있어요.”

이예린의 이야기를 꺼내며 어두워지는 얼굴에 그 만남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거나 좋게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천칭의 길드는… 일종의 신분 세탁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소속 공략대는 지옥도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죽는다고 해도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죽으면 대놓고 활동하기엔 문제가 되는 이들이 닉네임을 이어받아 활동하고?”

내 물음에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와. 환장하겠네. 그런 미친 짓을 사태 수습하기도 바빴던 그때부터 이어서 했다고? 그 와중에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이예린은 자기 자신이 살짝 맛 가는 것으로 입을 닫고?

“주세진이랑 이예린이 한 대화는….”

“…본인이 거절했어요. 계약서에 관한 것도, 길드원들에 관한 것도. 모두 다 도움 필요 없다고.”

“…….”

그녀는 천칭을 나오면 그다음을 모르겠다고 했다. 기다란 병아리색 머리의 마냥 웃던 여자는, 다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 자기네 애들 죽지 않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것은 영악하고도 슬픈 작은 속임수였다.

소모품. 흔하지 않아 언제든 구해다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의 전직자들. 반쯤 맛 간 이예린. 얼마나 맛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 미친 길드에 들어간 길드원들.

어제까지 알고 지냈던 사람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새로운 사람을 볼 때마다 이예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체 불가능한 자신을 붙들기 위해서, 정서 불안으로 생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계약서를 들이밀고 감시자를 붙인 천칭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들은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 걸까.

“왜 거절했는데?”

“…천칭의 그 많은 공략대가 전부. 이예린의 족쇄니까요.”

“…죽으면 새로 갖다 놓으면 되는 소모품?”

“…….”

“이예린은 자기 인생 망치는 소모품들에 정을 주다 못해 미쳤고?”

대답 없는 이호연을 보다 눈을 꾹 감았다.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눌렀다.

괴물들을 상대하기 힘드니 도움을 원한다고 이곳에 온 것이 대단했다. 제 입으로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 용했다. 그 정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정신력에 감탄이 나왔다.

모든 것을 잃게 했던 지옥도. 그 잃은 것들과 가장 유사한 것들을 제공해 줬을 길드라는 이름의 감옥. 제공되는 소모품들에 미친 이예린.

만약 이예린이 리블에 밥 먹으러 오는 짧은 유흥의 시간도 없었다면, 그녀는 그 감옥에서 스스로의 시간을 갖기는 했을까. 그 유흥의 시작마저 그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칭 길마와 그 길드원들이 밥 먹으러 오는 거. 그냥 자기네 밥 먹기 싫어서 오는 거 아니지.”

“…형이 이예린에게 말했어요. 도움받기 싫으면 와서 밥 먹고 가라고. 혼자 와도 되고, 아니면 길드원들을 데리고 와도 된다고 했죠.”

“…….”

주세진도 약았다. 밥 챙겨 주는 정다운 말을 이예린은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고, 주세진을 싫어하는 천칭의 실질적 주인들도 차마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온전히 미치는 것은 그네들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예린은 주세진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밥 먹으러 오는 척하면서 도움을 요청할 기회를 자신이 아닌 제 길드원들을 위해 사용했다.

나보고 계약서 찍을 때 이래라저래라 충고나 하더니. 속이 거북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는 이예린을 신경 쓰고 있었다. 지나친 감정 이입이었다.

“…김수혁은 식당에서 왜 싸운 거야?”

“감시자거든요.”

“그래….”

밥 한번 먹을 때도 감시자를 붙이는 것들도 문제고, 시킨다고 자기들 길드장을 감시하러 오는 것들도 문제고. 그걸 또 달고 오는 이예린은.

“…….”

그러고 보니.

“그 감시자. 주세진이 매수했어?”

“…매수는 아니고 협력 관계?”

정말.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구나.

식당에서 그랬다. ‘사고 치지 않는 것이 조건’이라고. 그 조건의 기준은 ‘이예린’이었다. 그리고 이예린이 주세진에게 말했다. 얼굴 자주 볼 사이라고.

이호연이 만약 정말, 정말 내가 이예린과 만나는 게 싫고 천칭을 경계했다면 날 데리고 식당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갔고 부러 천칭이 이곳에 오는 게 맞다며 내게 이예린의 위치를 알려 줬다.

이리저리 몸을 맡기고 놀아나는 이예린이 움직일 때는 그리도 아끼는 길드원들의 목숨과 직접적인 관계 있을 때.

누구보다 확실하게 제 길드원들을 지킬 수 있는 나를 본 이예린이, 흔들리지 않을까?

그런 이예린의 속내를 감시자가 과연 모를까? 주세진과의 면담을 일으킬 사고를 치는 이예린을 소극적으로 말리던 천칭의 길드원. 이예린을 찾으면서 기업에는 연락하지 않던 그 남자.

아, 이제야 이호연과 이예린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걸리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이호연의 뺨을 꼬집었다.

“날 미끼로 쓰다니.”

요 못된 호랑이랑 주세진을 어떻게 할까.

***

“와, 만나서 반가워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하는 내 말에 이예린은 짝짝 손뼉을 쳐 줬고 감시자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주세진의 스파이였던 남자는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그 외 천칭의 길드원 8명은 약간의 경계심과 안도감을 담아 나를 봤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선이 매우 익숙했으며 하찮았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천칭과의 합동 게이트 공략 날. 남들 갑옷 입고 로브 입을 때 혼자 검은 비단 도포를 입고 온 나를 보며 주세진이 말했다.

“제발….”

뒷말을 흐렸지만 나는 그가 하려던 말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칭의 공략대를 괴롭히지 말고, 시비 걸지 말고, 웬만하며 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고.

괜히 이예린 자극하지 말고.

정 많고 매사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운 면모가 있는 주세진 입장에서 나는 이예린을 가볍게 치는 것만으로도 폭발하게 만들 수 있는 기폭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대척점 같은 사이였다. 길드장이 된, 벗어날 수 없는 계약에 묶여 스스로 얌전히 놀아나 주는 이예린. 길드장은커녕 길드와 정부 그 무엇도 나를 묶어둘 수 없게 진작에 잠수 탔던 나.

이예린은 지킬 것이 많았고 나는 없었다. 욕심 많은 이예린은 제게 쥐어진 사람들을 전부 살리고 싶었으나 그럴 능력이 없었고, 나는 지킬 사람도 거의 없는데 그 이상을 지킬 힘이 있었다.

차라리 원하는 정도의 능력만 딱딱 배부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이예린을 보는데 이호연이 나를 불렀다.

“류.”

변형 스킬 특성상 따로 장비를 맞춰 입지 않아도 돼 평범한 현대 의상을 입은 못된 호랑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깜찍하게도 나를 미끼로 쓴 것이 괘씸해 내가 골려 줬기 때문이다. 주세진이 불안한 얼굴을 했던 이유도 이와 같았다. 골난 내가 이예린을 괜히 건드려 툭툭 칠까 봐.

말 걸어도 묵묵부답. 은근슬쩍 잡는 손을 피하기도 며칠째. 바짝바짝 속이 탔을 못된 호랑이는 게이트 공략 당일만큼은 꼭 나와 대화하고 싶은지 안쓰러울 정도로 애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골려 주고 싶었지만, 날이 날인 만큼 슬슬 그만해야 한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화난 것도 아니고.

미끼라고 해 봤자 주세진이 의도한 것은 나와 이예린을 만나게 하는 게 끝이었다. 그리고 이예린을 파고든 것은 나 스스로의 행동이었고. 이호연에게 틱틱거렸던 것은 작은 투정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젠 그만할 때였다.

이호연은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과 공략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안증이 있었다. 차라리 나 혼자 들어간다고 하면 이호연은 섭섭해할지언정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두고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던 사람들을 봤던 이호연. 내가 나올 때까지 멀거니 기다릴 수밖에 없던 불쌍한 호랑이.

이름도, 생긴 것도 예쁜 하늘 조각이 새까만 옷을 뒤집어쓴 나를 뱉어 낼 때까지 이호연이 느꼈을 감정을 나는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그때의 감정을 이호연이 다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상황에서 말도 안 걸고 들어가면….

“…….”

“류….”

봐줬다.

손을 뻗어 높다란 곳에 위치한 얼굴을 내 쪽으로 끌어 내렸다.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숙여 주는 이호연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봐줄게. 잘 갔다 와.”

“…다치지 말아요.”

그거참 쉬운 요구다. 이성과 감성은 따로 논다. 누구보다 다치는 것이 힘든 인물에게 다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애정 행각 하지 말라고 멀리서 눈치 주는 주세진에게 메롱 하고 이호연의 입에 가볍게 쪽, 입을 맞추고 잽싸게 떨어졌다.

제 입가를 더듬는 이호연에게 말했다.

“나한텐 인사 안 해 줘?”

슬쩍 주세진 눈치 한 번, 주변에 안 보는 척 은근히 보는 천칭 길드원들 한 번, 대놓고 보는 본인 소속 길드원들 한 번. 마지막으로 내 눈을 마주 본 이호연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살포시 닿았다가 떨어지는 작은 온기에 키득거리는 웃음이 났다. 살짝 붉어진 눈가가 예뻤다.

“그…. 다… 보니까….”

톡톡 붉어진 눈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 안 보면?”

“…….”

“응?”

머뭇거리며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제 손으로 가리던 이호연은 내가 순순히 놔주자 약간의 원망과 달뜸을 담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다치지 마세요.”

“…다쳐서 오지 마.”

자꾸만 주춤거리며 뒤도는 호랑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이예린과 감시자인척 사실은 스파이였던 남자가 속한 팀으로 돌아왔다.

이예린이 내 팔을 콕콕콕 찔러 대며 물었다.

“둘이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알면 다쳐요.”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짓는 이예린에게 어깨를 으쓱이곤 어느새 내가 들어가야 할 하늘 조각, 어떤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주세진 앞으로 걸어갔다.

서류를 훑어보다 나를 발견한 주세진이 제 길드원들과 즐겁게 웃고 있는 이예린을 한번 힐끔 보더니 조심스레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내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말에 나는 간지러움을 느끼면서도 입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내 말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그런 주세진을 보다 웃음을 지었다.

“맡겨 주세요. 저, 그거 잘해요.”

“그걸… 잘하면 안 되지….”

본인이 시켜 놓고, 그걸 또 잘한다는 소리에 주세진이 머리를 짚었다. 왜 이호연과 굳이 떨어트리는 건가 싶었는데 이걸 위해서였구나.

병아리 박상호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호연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잽싸게 고개를 바로 하고 주세진에게 웃어 주었다.

“걱정 마세요. 잘할게요.”

“그래….”

주세진에게 웃어 주고 이예린에게 가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요. 제가 먼저 들어갈까요, 아니면 제일 마지막에 들어갈까요?”

내 물음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이예린이 방긋 웃으며 답을 주었다.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우리 애들 다 들어오고 나면 들어와 주시겠어요?”

“…….”

“…….”

“물론이죠.”

묘하다. 이예린의 말에 내가 느낀 것은 묘함이었다. 이예린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은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있을 위협을 본인이 해결하겠다는 의미였다.

내게 자신의 길드원들 전부가 들어온 다음에 들어와 달라는 것은, 어찌 보면 감시의 의미였다. 자신의 길드원들이 중간에 도망 안 가고 제대로 게이트 통과하는지 봐 달라는 의미.

이예린이 제 길드원들에게 죽고 못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이외에 더 복잡한 감정이 엉켜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아직 떠나지 않았던 다른 팀의 천칭 길드원들 하나하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난 뒤에야 이예린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사실은 스파이였징 남자와 그 외 나와 같은 팀에 배정된 천칭 길드원들이 따라갔다. 두루마기를 걸치지 않아 허전한 어깨를 쓸며 천천히 따라 걸었다.

내가 들어가고 나면 다른 팀들도 본인들에게 배정된 게이트 공략을 위해 각 지역으로 떠날 것이다. 지금 다 같이 모여 배웅하는 것은 공략할 게이트 중에 내 눈앞에 있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내 바로 앞에서 빛무리를 내뱉는 하늘 조각을 보다 뒤를 돌아 손을 흔들었다. 이호연이 내게 마주 손을 흔들었고,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공략대 멤버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천칭의 길드원들 전부를 멀리멀리 흩어지게 만든 뒤, 본격적으로 바빠질 주세진에게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세요. 파이팅.”

“…빨리 가.”

단단한 유리 파편 같은 하늘 조각 위로 손을 올렸다.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이동시킬 게이트는 오늘도 참, 예뻤다. 하늘 조각의 아름다움은 장미와 같았다.

예쁘지만 손대면 피를 보게 되는 종류의 위협. 자신이 키운 단 하나의 장미였기에 어린 왕자에게 사랑받았던 장미와는 달랐다. 내 눈앞에 장미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별을 눈에 담은 누구는 자신이 키운 것도 아닌 장미 더미를 사랑하다 못해 질식할 것 같은 지경이지만. 다만 그 장미를 위해 자신을 죽이는 이는 사랑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한다고 볼 수 있는 묘한 관계였다.

정말 묘한 관계.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홀로 괴물 하나를 죽이고 그 위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예린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무기 하나 꺼내지 않은 천칭의 길드원들이었다.

“…….”

버릇 참 잘못 들였네. 누군가에겐 참 못된 생각을 하며 이예린 쪽으로 걸어갔다. 스파이였엉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예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괴물 위를 걸어 다니는 자신의 길드장을.

긴장감은 있되, 두려움은 없는 천칭의 길드원들을 둘러보고 생각했다. 이래서 안전장치란 안 좋은 거라고. 안정감은 신경 줄을 흐물흐물 늘어트린다. 전직자가 되어 헌터로 살 거면 저래선 안 된다. 내 개인적 유감과는 별개로.

이예린이 있는 곳으로 폴짝 올라가 멍때리는 병아리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해 줄까요?”

“…….”

“상냥한 유치원 선생님, 엄격한 현장 체험 학습 시간을 보내는 초등학생 선생님, 수련회 조교.”

“…그게 다 뭔가요?”

뭐긴.

“여기 오기 전에 우리 길마님이 부탁 하나를 했거든요.”

“부탁?”

내 말에 이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이왕 함께하는 거. 본인 몸 지킬 수 있게 강해지는 게 좋잖아요. 언제나 당신이 저 많은 길드원들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셋 중 골라 봐요. 내가 제 몫은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게요.”

“…제 몫에 초점을 맞춘 건가요 아니면 사람에 초점을 맞춘 건가요?”

“…….”

이거 봐라. 역시 좀 맛 간 것 같아도 나름 머리 굴리고 할 건 다 한단 말이지. 어쩌면 내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디에 초점을 맞췄을 것 같아요?”

“너무 뻔해서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빠른 시간 안에 날 파악해서 그거 하난 좋네요. 몇 시간이 될지 며칠이 될지 모르는데. 내 성격이라도 빨리 파악해야지.”

나 혼자였으면 앞뒤 볼 것도 없이 돌격, 돌격, 돌격으로 몇 시간 안에 이 게이트를 공략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하기는커녕 눈에 차는 실력은 이예린 하나뿐인 이 공략대로는….

“골라요. 1, 2, 3.”

“…1?”

“상냥한 유치원 선생님 스타일이 뭔지 보여 주도록 하죠.”

내 말에 이예린이 불길함을 느꼈는지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2, 3, 아니, 2! 2! 2!”

“선택지를 바꾸기까지 쿨타임이 남았답니다.”

어, 어, 어 하는 이예린에게 방긋 웃어 주고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한 천칭의 길드원 쪽으로 뛰어내렸다.

“억!!”

쭈그리고 앉아서 노닥거리며 놀다가 내 발판이 된 남자 위에서 말했다.

“까꿍. 지금부터 즐거운 놀이 시간을 가져 보아요.”

“뭐….”

“집중의 박수를 짝!”

몇 명은 기행을 벌이는 내 행동에 아직도 괴물 위에서 넋 놓은 이예린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몇 명은 차마 내게 말도 걸지 못하고 아직도 내 발밑에서 바르작거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은 이들은 반사적으로 내 말에 손뼉을 짝! 쳤다가 뒤늦게 손을 뒤로 휙 숨겼다. 손뼉을 친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웃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즐겁게 수업에 임해 볼까요?”

“아까 놀이 시간이라고….”

“유치원생은 노는 게 할 일이고 수업이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잘하는 아이에겐 스티커.”

그럼 못 하는 아이에겐? 애들이 못 할 수도 있지, 뭐.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이가 아니었다. 어른이들이지.

“수업에 못 따라오는 친구들은 즐거운 방과 후 시간.”

“…유치원에 방과 후 없는데요.”

“강아지 유치원에는 있어요.”

내 말에 그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는 그런 그들을 살펴보다 아직도 내 밑에서 움찔거리는 남자의 위에서 폴짝 내려왔다.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무릎이 뻐근했다. 아이고 소리 내며 기지개를 켜는 내게 경계 어린 시선들이 쏟아져 내렸다.

“자, 그럼 우리 친구들. 마법 계열은 왼쪽, 신체 계열은 오른쪽, 힐러는 가운데. 움직여 볼까요?”

조금 전 집중의 손뼉을 짝짝 쳤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가장 먼저 움직였다. 어물거리던 다른 이들도 결국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속았징, 나는 스파이 남자는 전투 계열이었다. 이예린을 제외한 천칭의 길드원 수는 9. 신체 계열이 4. 마법은 3. 힐러가 2.

저 중에 상위 전직자는 둘…, 셋? 나머지는 전원 일반 전직자인가. 그런 그들 중에서도 그나마 괜찮은 건….

한참 그들을 보다 방긋 웃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즐거운 놀이 시간. 실습 사냥을 시작하겠습니다.”

원래 애들에겐 직접 경험이 더 중요하다.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멍하니 있던 그들이 곧 얼굴을 찌푸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 내게 짓밟혔던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내가 제일 강하니까.”

“…….”

“원래 하늘 조각 안에선 제일 강한 사람이 보호자랍니다. 꼬우면 네가 나 이기세요.”

하늘 조각에 손대기 전 주세진이 내게 말했다.

‘역지사지가 뭔지 알려 주고 와.’ 물론 주세진의 말은 순환 표현이었겠지만 내게 역지사지란 더 적나라하고 거친 언사였다.

역으로 지랄해야 사람은 자기가 지랄 맞았다는 것을 안다. 보호만 받는 어린이가 되고 싶으면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는 어린이의 의무도 함께 해야지.

나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천칭 반 어린이 여러분. 수업을 시작할까요?”

지금부터 나는 상냥한 유치원 선생님이다.

***

도깨비 공주, 류.

유명했다. 누가 모를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알았지만 모두가 그녀를 몰랐다. 그래서 온갖 다양하고 무성한 소문이 어린 공주님께 들러붙었다.

닉네임 빵먹고싶다. 천칭에선 길드장님 감시자로 유명하고 사실은 리블 길드장님께 매수 같은 협력을 제안받은 그는 멍하니 도포를 입은 여자를 보았다.

항상 새까맣고 고아한 옷차림을 고수하는 말 없는 공주님에 대한 예측 글은 많았다. 과묵할 것이다. 매사 차분할 것이다. 차가운 성격일 것이다.

“…….”

어떤 자식이 그딴 걸 추측 글이라고 했는지 끌고 와서 얼굴 한번 보고 싶었다.

집중의 박수 짝짝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손뼉 쳤던 그는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 그놈의 짝짝,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길드장님은 멍하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당장 뛰쳐나가 길드원들을 구해 왔을 길드장님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원래라면 그런 길드장님의 모습을 걱정했겠지만, 사실 그도 그냥 넋 나가고 싶었다. 뭘까 저거. 사람 맞나? 사탄 끌어내려 대신 자리 차지란 악마 아닐까?

“세상에. 괜찮아요,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거 하나 못 할 수 있지. 지금까지 뭐 했길래 그거 하나 못 하는 건지 삶을 되짚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지만 괜찮아요,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상냥한 말투를 구사하는 것이 소름 끼쳤다. 한 대 치는 게 아닌가 걱정되는 기세였다. 나름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을 신체 계열 전직자는 울기 직전인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옆을 어린아이 달릴 때 아이 힘들어라, 너무 빠르다아아 하듯 따라가고 있던 공주님이 손을 휙 저었다.

검은 해일 같은 것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괴물을 집어삼켰다. 미친 듯이 뛰던 신체 계열 전직자가 쓰러지듯 바닥에 엎어졌다. 그것을 지켜본 공주님이 혀를 쯧 찼다. 눈에서 그것밖에 못 하냐는 듯한 질책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시X. 공주가 공포의 주둥아리냐고….”

다음 차례인 마법 계열 전직자가 울먹거리며 중얼거렸다. 공주님께서 세 명을 기절시킨 다음에야 괴물의 사체에서 뛰어 내려온 길드장님이 대충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함께 공략하는 김에 공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가르침을 주겠다고 했다고. 선택지가 3개 있었는데 1번 선택지의 결과물이 저거라고 했다.

상냥한 유치원 선생님.

말투만 상냥했다. 어조는 상냥했다. 말씨도 상냥했다. 말이 상냥하지 않고 하는 짓도 상냥하지 않았을 뿐이다.

앓는 소리 내는 기절한 길드원 위로 새로운 길드원을 올린 공주님이 우리를 향해 방긋 웃었다.

“자. 다음 어른이, 이리 나오세요.”

집에 가고 싶다. 엄마가 데리러 오면 좋겠다.

***

“심각한데.”

그 한 마디로 평가 끝이었다. 천칭 길드원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고 행복하고 뜨뜻한 평화로움에 찌들어 있었다.

방패를 들고, 검을 들었을 손들이 깨끗하고 곱다는 점에서 이미 망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쯧.”

짜증 나.

이예린에게 한 사람 몫을 할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물론 사람에 초점이 더 갔을 수도 있지만 얼마나 갱생 가능한지 보고 싶은 것도 맞았다.

그나마 버티고 서 있는 건….

나는야 사실을 스파이였징 남자와 몇몇 눈여겨보았던 서너 명 정도였다. 이 길드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였을까.

멀뚱멀뚱 서 있는 이예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혹시 호구세요?”

“…아닌데요.”

“지금까지 어떻게 공략에 성공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

입을 꾹 다문 이예린을 힐끔 쳐다보다 엎어진 천칭의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자, 어른이 여러분, 낮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랍니다. 아침 해가 방긋방긋 웃고 있답니다.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굴지 말고 일어나세요.”

“…쿨타임 언제 끝나요?”

“글쎄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이예린에게 말했다.

“쉬게 해 주고 싶어요?”

“…….”

“그럼 나랑 즐거운 대화 시간을 나눠 보아요. 인원이 9이나 되면서 다 합쳐도 1인분 역할 못 하는 우리 어른이들 쉬게 해 주고.”

이예린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런 그녀에게 웃었다.

“어때요?”

“…지금부턴 만화 영화 관람 시간으로 하죠.”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나.

골골거리는 천칭의 길드원들 위를 폴짝폴짝 뛰어, 이쪽으로 달려드는 괴물 쪽으로 갔다. 굳이 제 길드원들 위로 폴짝거리는 나를 복잡한 눈으로 본 이예린이 나와는 달리 평범하게 뛰어 괴물 쪽으로 왔다.

철없는 어른이들이 희망을 담아 이예린을 바라보았다. 몸도 못 움직이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에 나는 또다시 혀를 찼다. 전직자가 고작 그거 뛰고 근육통이라니. 이 정도면 그냥 머릿수 채우기로 데리고 온 수준이었다.

속았징 스파이얌 남자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흘겨보고 이예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금빛 기류가 한들거리며 병아리색 머리를 흐트러 놓았다. 기류가 돌개바람처럼 빙글빙글 모여 커다란 별 모형을 만들어 냈다.

샛별 같은 눈부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 별이 마법의 매개체인가?

양손을 살짝 든 이예린 앞으로 거대한 별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괴물이 혓바닥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어떻게 하려는 걸까 싶은 마음으로 구경하던 나는 왜 마법 소녀라는 그녀의 별명 앞에 전체 연령 불가 딱지가 붙었는지 알게 되었다.

“…미친.”

저게 마법이야?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거대한 별의 뾰족한 오각성이 팽이처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눈부신 톱날이었다.

“얍!”

이예린이 괴물 쪽으로 별을 던졌다. 그 뒤는 빨간 딱지였다. 까드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게 만화 영화면 난 유치원 선생님 못 한다.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이예린에게 나는 말했다.

“뺨에 피 묻었어요.”

“아차.”

길드원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헛구역질하는 사람, 눈을 질끈 감은 사람, 눈을 떴지만, 초점 나간 사람 등 다양한 모습들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저 익숙하지 않다는 태도. 처음 보는 나도 멀쩡한데 몇 번이나 보았을 것들이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이예린에게 물었다.

“광역기 돼요?”

“단일성 공격이라 광역기로 하면 효과가 별로예요.”

그럼 여럿이 몰려들때면 매번 영역을 열었다는 거네. 그리고 그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고. 팔짱을 꼈던 팔을 풀었다. 느슨해진 머리를 다시 묶으며 물었다.

“2번? 3번?”

“…2번.”

“그리고?”

“…….”

“그리고. 대화. 우리 대화 시간을 좀 가질까요?”

아무것도 안 한 탓에 본인들이 얼마나 민폐였는지 몰랐던 것들은 이제 그에 대한 정반대로 너무 열심히 해 지친 상태니 지금이 이야기 나누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즐거운 낮잠 시간.”

딱. 손가락을 맞대 튕기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에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길드원들 전원 잠에 빠졌다.

유일하게 푸른 불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이예린만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상냥한 유치원 선생님 아니지 않아요?”

“아차.”

“…….”

“이제부터 바꾸죠, 뭐. 그럼 상담 시간을 가져 볼까요?”

초등학생 선생님들은 은근히 상담을 많이 하거든. 황금색 눈과 검은 눈이 마주쳤다. 우린 동시에 눈을 휘며 웃었다.

“뭐가 궁금한데요? 우리 나름 진솔한 대화를 저번에 나누지 않았나요?”

“그때 깜박하고 못 물어본 거랑 이번 기회를 통해 더 알게 된 것이 있어서요. 그럼 일단 이것부터 물어보도록 할까요?”

손을 뻗어 병아리색 머리끝을 붙잡았다. 내 손가락에 긴 머리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당신 전직관이 왜 콕 집어서 나를 당신한테 보여 줬어요?”

“이런.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 넘어가네요.”

“그럼요.”

내 말에 빙글거리던 얼굴에 조금 금이 갔다. 조금 전 피워 두었던 푸른 불이 이쪽을 향해 살금살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직 그것을 눈치채진 못한 이예린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무슨 의미길래 당신 전직관이 나를 알려 줬을까. 그게 참 궁금하더라고요.”

“…듣고 싶나요?”

“사실 별 상관 없어요.”

“…….”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묻는 것뿐이지.”

내 말에 이예린이 잘게 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나도 몰라요. 그냥 무조건 당신을 찾아가 보라고 한 것뿐이라서.”

“그래요? 그거참 아쉽네.”

불꽃의 자락이. 성큼, 더 다가왔다. 핏자국 묻은 뺨에 푸른빛이 돌았다.

“그럼 이거부터 물어보죠.”

“…뭐죠?”

“있잖아요, 천칭의 길드장님.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당신.”

푸른 불이 황금색 눈동자에 언뜻 스쳤다.

“당신은 정말 저 많은 천칭의 길드원을 다 살리고 싶은 거 맞나요?”

“…….”

“왜 내 눈에는 그게 아닌 것 같지?”

“…….”

“내 말이 틀리면 당근이라도 흔들어 볼래요?”

“여기에 당근은 없는데요.”

“네. 그러니까요.”

“…….”

무슨 생각인 걸까. 이 사람은. 양순하게 감았던 눈을 뜬 여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치사한 수를 쓰네요?”

“알고 있었으면서, 뭘 새삼.”

힐끔 이 주변을 감싼 푸른 불을 흔들리는 눈으로 보던 이예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님. 류. 유하연 씨.”

“…….”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어요?”

“글쎄요. 할 수 없다고 이미 전제하에 둔 당신보단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꼬는 것에 가까운 내 말에 이예린은 웃음을 흘렸다.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뱅뱅 감겨 있던 샛노란 머리칼이 풀렸다. 금실 같은 그것을 보며 물었다.

“대답은?”

“…난.”

푸른 불은 정신계 마법의 매개체. 내가 사용 가능한 정신계 마법에는 상대의 팽팽한 정신을 흐물흐물 풀어놓는 것도 있었다.

푸른 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이예린이 입을 열었다.

“난.”

그 애들이 좋아요. 지켜 주고 싶어요. 더는 그 애들이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알던 이름을 뒤집어쓰고 낯선 얼굴을 마주 보는 게 싫어요. 그리고.

“숨이 막혀요.”

“…….”

“숨이 막혀요. 나도 모르겠는데, 가끔가다 너무 숨이 막혀서…. 내가,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차라리.

“내가, 내가 차라리 먼저….”

“…끝내고 싶은가요?”

내 질문에 이예린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았다.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왜 이런 걸까. 우리는. 이예린의 손에 잡힌 내 옷자락은 마지막 동아줄 같았다. 그녀를 이해하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속이 거북했다.

“나는… 나는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지키지 못해서 죽은 사람들…이, 그 이름의 원래 주인들이… 있었는데….”

지키지 못한 이들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저를 지옥으로 미는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이 사람이. 나는 참 싫다. 그런데 인간적으로는….

“난… 숨 막혀…. 차라리….”

푸른 불로 장난친 적 없었다. 저건 그저 연출 효과였다. 나는 남의 깊은 속마음을 마법으로 들춰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예린 씨.”

내 부름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답을 바라고 부른 이름은 아니었다. 정신계 마법 따윈 애초에 걸리지도 않았으면서 그것을 핑계 삼아 이제야 제 속내를 말하는 이 사람이. 나는.

“내가… 내가… 차라리….”

죽이고 싶다. 그것이 전직자든, 민간인이든. 그래 봤자 똑같은 사람. 똑같이 나를 밀어 넣는 것들.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서라도, 설령 망가트려서라도.

그러나.

“차라리… 나는….”

벙긋거리는 입을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우리는. 죽이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다. 그리고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우리에겐 해결책이 없으니까. 바스러질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살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예린에겐 그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잊으려 해도 살아 움직이는 옛것들의 이름을 붙잡고 싶어 하는 사람만 멀뚱히 남았다. 푸른 불이 사그라졌다.

말라비틀어진 듯 오래된 감정은 뱉어 내는 순간에도 숨이 막히는 법이었다. 흐릿한 금색 눈을 보며 나는, 속이 안 좋았다. 단순한 공감에선 나올 수 없는 반응이라는 것을 이제는 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그마한 풀잎 하나에 들러붙어 타오르는 푸른 불을 즈려밟았다. 바위 지대에 간신히 돋아난 생명을 붙들고 살라 먹는 것이 참 욕심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욕심쟁이인 나의 입이 열렸다. 나와는 다른 욕심을 한껏 품은 욕심쟁이에게.

“나였으면 죽였을 거야.”

“…….”

“다 죽이고 도망갔을 거예요. 이예린 씨.”

죄책감에 메마르는 그런 인생.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관두는 그런 인생. 나는 싫어. 그을린 자국이 남은 붉은 바위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이해해요.”

사람의 정이 고팠을 사람. 겨우 쥔 것을 허무하게 잃고, 잃은 것들의 대체품이 강제로 쥐어진 사람.

“그래도 당신은 도망쳐야 했어. 아니면 그 일에 질질 끌려다니지 말든가.”

“…내가 도망가면, 다 죽을 거예요. 천칭이 왜 실력이 없는 이들도 다 받아들이는지 눈치챘잖아요. 오히려 실력 없으면, 약하면 더 좋아해요.”

그게 더 당신을 옭아매기 좋으니까.

“내가 없으면 괴물에게 죽을 거예요. 나를 붙잡는 용도로 고용했는데 내가 도망가면 다 죽게 만들 거라고!”

“…….”

“…….”

“누가?”

“…천칭의… 수뇌부들이… 회장이.”

천칭의 길드원들은 몇몇 이들을 빼면 공략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런 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재능 없음에도 전직자가 되어 헌터 일을 해야 하는 가진 거라곤 몸 밖에 없는 사람. 평범한 일은 구할 수 없는 신분 세탁이 필요한 사람.

천칭은 그 모든 것들을 충족해 주는 길드였다. 목숨값을 두둑하게 쳐 주고, 커넥터를 돌려 쓰는 것으로 신분 세탁을 한다. 그리고 그런 커넥터들의 주인들은 대부분 연고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이어지던 것들이 지금의 이예린을 만들어 버렸다. 손에 쥐어진 수십 명의 목숨. 죽은 이들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다시 한번 제 앞에서 죽는 사람들.

비틀린 마음은 그런 이예린이 한심하다고 내게 말했다. 공감을 담당하는 구석에선 같은 상황에서 너는 안 그랬을 것 같냐고 속닥였다. 그래서 도망쳤잖아.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이예린은 도망갈 생각이 있기는 할까. 못 도망가서 정말 그대로 살아가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럼에도.

“…다시 묻죠. 이번에는 똑바로 대답해 주세요. 당신은 정말 저 많은 천칭의 길드원을 다 살리고 싶은가요?”

“…….”

“아니면 차라리 다 죽여 버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가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이예린이 고개를 숙였다.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란 노란 실타래가 얼굴을 가렸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바위 지대를 휩쓰는 바람과 뒤섞여질 때쯤 이예린이 고개를 들었다.

검붉은 기괴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예린이 느릿느릿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나요?”

“…….”

“먼저 대답해 주면 나도 말할게요.”

한 발자국 걸음을 움직였다. 나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고상한 석상 같은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서.”

“…….”

“당신을 보면 내가 ‘만약에 그랬다면’이라는 가정이 생각나요. 내 선택의 결과물 중 하나가 당신 같은 삶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당신만 보면 짜증이 나.”

이예린을 만난 이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호연과 주세진에게 그래서 더 짓궂게 굴었다. 천칭의 길드원들을 괴롭혔다.

그때. 만약 내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잠적하지 않고 내게 살려 달라 손 뻗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몸을 맡겼다면.

흐르는 물살에 휘둘리는 작은 배처럼. 작은 꼬마의 장난질에도 쉽게 죽는 금붕어처럼. 내가 살리지 못한 이들의 이름을 매일 마주 보아야 하는 이예린처럼. 그렇게 살아야 했겠지.

그래서 짜증이 났다. 전에 이예린이 한 말대로 우리는 강하지만 그래 봤자 법은 약한 자들의 편. 순수한 힘을 제외한 사회의 소시민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얌전히 정부의 개가 되거나 이예린처럼 불법 노예 계약서에 도장이나 찍어 머리가 반쯤 맛 갔겠지. 아니면 주세진이 만든 길드 리블의 초기 단원이 됐을 것이다. 그것이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설령 주세진이 만든 길드에 들어갔다고 해도 잠적해 얻은 해방감보다 좋을까.

“…….”

“…….”

우리는 침묵했다. 이예린의 목은 얇았고 조금만 더 힘주면 똑 부러질 것 같았다. 이곳은 하늘 조각이 만들어 준 게이트의 안이었고 목격자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은 모두 잠들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나간다 해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머리가 아파요.”

뜬금없는 내 말에 이예린의 눈에 의문이 담겼다.

“내가 구할 수 있음에도 내가 구해 주지 않아 죽은 거면 상관이 없어. 그런데 내가 구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

“어렴풋이 이런 내 상태를 눈치를 챈 주세진이 내게 상담을 받을 것을 제안했어요. 리블에는 유명한 심리 상담사가 있거든.”

“…나도 알아요. 귀한 정신계 마법을 다루면서 동시에 심리학을 전공한 인재라고.”

“리블같은 대형 기업이 아니라도 중소기업만 돼도 상담사는 다 있어요. 천칭은 있나요?”

“…….”

없겠지. 목을 쥐고 있던 손을 치웠다. 주저앉은 이예린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기다란 도포 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있는데. 난 겨우 스물두 살이에요. 전직할 때는 성인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스무 살이었고. 지옥도가 일어나기 전까진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죠.”

“…….”

“하지만 모두가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죠. 왜인 것 같아요?”

“…….”

이예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강함.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들에게 있어 ‘나’라는 사람의 정의가 이루어지기에.

“상담받는 것은 거절했어요.”

“…왜요?”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듣는 게 무서워서요.”

“…….”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이예린은 왜 그렇게까지 천칭에게, 그리고 자신의 자유와 목숨, 생각하는 것까지 붙들어 매고 통제하게 만드는 이들에게 목을 매는 걸까. 그것에 대해 이예린 본인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탈주 각을 잰 적이 있고 그러면서도 하지 않았다. 천칭에서 나온 다음부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건 상담을 받지 않는 나와 비슷한 심리일 것이다. 길드를 나오고 나면, 상담을 받고 나면. 그다음. 내가 마주 보아야 할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당신은 나한테 당신네 애들 좀 살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호연도 있는데 굳이 내게 부탁했죠. 그 이유가 뭔가요.”

“…류, 당신이 더 강하니까.”

“맞아요. 나는 강해요. 그럼에도 나 또한 당신처럼 현실을 마주 보기 무섭고, 마냥 멀쩡한 정신은 아니죠.”

“…….”

“…그냥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러니 이제 말해 줘요. 당신은 천칭의 모든 이들을 정말 다 살리고 싶은가요?”

“…….”

“아니면 현실을 마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연장선인가요.”

작게 벙긋거리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이예린의 고갯짓에 따라 샛노란 병아리색 머리가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그것은 마치 강풍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작은 황금 폭포 같았다.

대답하지 않는 이예린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를 냈다. 엎질러진 물처럼 제멋대로 엎어져 있던 길드원들 위로 작은 불티가 탁탁, 하고 튀었다.

“천천히 생각해 봐요. ‘그다음’까지 생각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그냥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봐요.”

“…나와 대화하는 것은 연민인가요, 아니면 동정인가요.”

“글쎄요.”

나도 모른다. 연민이라 하기엔 짜증이 나고, 동정이라 하기엔 애틋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게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기다려 주실 건가요? 당신 같은 사람의 시간은 비쌀 텐데.”

“휴학해서 시간 많아요.”

“…….”

“그래서 나는 이 게이트를 아주 느릿느릿 공략할 생각이에요. 웬만하면 내가 안 나서고 그쪽 어른이들이 해결하도록.”

“…오래 걸리겠네요.”

“이예린 씨는 생각만 하세요. 그쪽 어른이들은 내가 돌봐 줄 테니까. 오기 전에 한 말도 있으니 안 죽게 해 줄게요.”

숙취 난 사람들처럼 천천히 몸을 들썩이는 길드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좀비 같은 그들의 몸짓을 보며 이예린이 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호랑이를 안 봐도 괜찮겠어요?”

“아뇨. 재촉하기는 싫은데 그래도 생각 정리 최대한 빨리빨리 해 주세요. 나도 몰랐는데, 말하니까 보고 싶네.”

내 말에 이예린이 작게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그쪽에 대한 내 감정이 연민인지, 동정인지, 그도 아니면 동질감에서 비롯한 짜증인지, 나도 잘 몰라요. 어쨌든 이예린 씨가 신경 쓰이죠. 하지만 난 우리 호랑이가 더 중요하거든요.”

“참 사랑꾼이네요, 공주님은.”

이예린에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주저앉은 여자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내 손에 옆구리를 붙들린 모습으로 번쩍 일으켜진 것에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여기서 나가면 혼자 생각할 시간도 못 갖는 사람 배려 못 할 정도로 사랑에 눈멀지는 않았으니 걱정은 하지 마시고.”

“그것참… 믿음직스럽네요.”

“그럼요. 그리고 아직 역지사지 이벤트는 안 끝났답니다.”

제 발로 바닥에 선 이예린이 내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끄어어―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던 천칭의 길드원들이 저들의 길드장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야 스파이얌 남자는 주세진에게 무언가 언질을 받았는지 나와 이예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생각해 보니 주세진이 이예린을 괜히 건드려서 터트리지 말라고 했는데.

“…….”

배 잡고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니 터진 것까진 아니고, 적당히 깔짝인 정도인 것 같았다. 그럼 된 거지, 뭐. 나는 손뼉을 짝짝 쳐 시선을 모았다.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 노란 병아리는 내버려 두고 나는 길드원들에게 걸어갔다.

“이제부터는 2번입니다.”

“…2번이 뭔데요?”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내 말에 그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에게 웃어 주고 손목에 묶어 두었던 댕기를 풀었다. 제멋대로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던 머리를 하나로 모아 댕기로 묶었다.

댕기의 끝자락, 하얀 실로 수놓인 꽃송이에 시선을 주던 이들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제등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 안녕.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갑시다.”

아이엠 스파이 남자가 손을 들고 내게 질문했다.

“그냥 놀이 시간 하면 안 되나요?”

“안 되죠. 본격적인 사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시작인데. 4학년만 돼도 놀 시간이 없답니다.”

“…그럼 3번은 수능 입시 학원 선생님인가요?”

“아차.”

그게 있었네. 3번의 선택지를 수련회 교관으로 둔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들이 일어날 것을 재촉했다.

자신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콩알 탄 터지듯 피어로는 불티에 식겁한 이들이 언제 게으름을 피웠냐는 듯 잽싸게 일어났다.

나는 그들을 비웃으며 등불에 기대어 섰다. 등 안에 어스름히 피어오른 푸른 불이 하늘도, 밟고 있는 바위 지대도 모두 불그스름한 이곳과 너무 달랐다.

2번은 현장 체험 학습에 나간 초등학교 선생님. 현장 체험 학습이 왜 체험 학습이겠는가. 직접 해 보니깐 그렇지.

“자. 이제부터 자유 시간이에요. 경험보다 좋은 교육은 없죠? 미션은 괴물 잡아 오기입니다. 많이 잡아 오는 학생에겐….”

“…….”

“…일단 잡아 오기나 해 봐요.”

손뼉을 짝짝 쳤다. 그림자에서 살그머니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들을 앙증맞게 뛰어가 천칭의 길드원들 앞에 한 깨비씩 섰다.

“길 잃거나 진짜 죽을 것 같아도 거기 꼬마 도깨비한테 살려 달라고 말하지는 말고.”

“네?”

“걔네가 알아서 판단하고 알려 줄 거니까 엄살 부릴 생각하지 말고 농땡이 피우지 말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꼬마 도깨비들은 에휴, 한숨 쉬는 모양새로 각자 자신이 맡은 이들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출발.”

쿵. 류로 바위 위를 두들겼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나 싶더니 마치 공격이라도 할 것처럼 안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들을 위협했다.

천칭의 길드원들은 우는 얼굴로 이예린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 사람은 태연한 얼굴로 손을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빨리 가라는 의미로 그림자를 들이밀자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도망가듯 자리를 떠났다.

“너무 험하게는 다루지 말아 주세요.”

이예린의 말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이예린은 흐리게 웃었다. 나는 그것을 힐끔거리며 눈을 감았다.

우리 둘만 남은 불그스름한 바위 지대는 조용했다. 들리는 소음은 가끔가다 작은 돌 조각이 굴러가는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사부작거리는 옷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던 사람이 오랜만에 생각을 정리해 보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늦게 데려와.

내 명령을 들은 꼬마 도깨비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바위에 기대 더 이상 웃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침묵이었고, 고요였다. 나 또한 오랜만에 생각 속에 잠기는 그런 시간이었다.

***

원래라면 몇 시간 만에 끝났을 공략은 사흘이 되는 날 겨우 끝이 났다.

게이트를 나올 때 이예린의 얼굴은 조금 후련해 보였고 자신들이 얼마나 개민폐인지 똑같이 느껴 보는 역지사지 이벤트의 주인공들은 우는 얼굴이었다.

나는 내가 게이트를 타고 하늘 조각을 넘어오자마자 끌어안고 매달리는 커다란 호랑이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저기… 이제 조금 떨어지면….”

내 말에 잠시 움찔거린 몸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 털 같은 하얀 머리칼이 목덜미에 비비적거려지는 게 느껴졌다. 간지러웠다.

저보다 20cm는 작은 사람을 껴안으려고 웅크린 것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이호연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억지로 밀어내면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지만 나는 손을 뻗어 그를 꼭 껴안아 줬다.

“미안. 늦었지.”

“…….”

조각을 넘어오자마자 본 이호연의 표정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날 붙잡은 손은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

주세진이 줬던 계약서의 복지 관련 문서에는 심리 상담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의무는 아니지만 권고하는 편이며 미리 상담사와 사전에 날짜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리블의 상담사는 한 명이 아니었다. 가장 능력 좋은 이를 필두로 여럿 두고 있었다. 그 많은 상담사들 모두가 사전에 날짜를 조율해야 할 정도로 바빴다.

이예린에게 말했다. 당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도 그렇게 멀쩡한 정신은 아니라고. 그리고 그건 이호연도 마찬가지였다.

“더 빨리 나올 걸 그랬네.”

“…….”

“오랜만에 보는 건데 얼굴 안 보여 줄 거야?”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더 빨리 나올걸. 배려심이 부족했다.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호연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천칭의 길드원들은 질색을 하며 떠났고 이예린은 어머머머 하는 표정, 몸짓을 흉내 내다 떠났다.

주세진에게 자그마한 하늘 조각을 던졌다. 그것을 받은 주세진이 게이트 내 자원 수집을 위해 모여 있던 이들을 이끌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도 피할 겸 직접 가려는 눈치였다.

이제 자원 수집이 끝나고 난 뒤 주세진이 저 조각을 게이트에 던지면 게이트가 닫힐 것이다. 보스 몹이 드롭하는 저 조각 하나 얻겠다고 천칭의 민폐들이 고생 좀 했지.

구경꾼도 다 떠났으니 이제 이 호랑이를 달래야 하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달래기엔 영 좋지 못한 성격이었고 성인을 달래 본 경험은 아예 없었다.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지옥도 이전에는, 친구를 달래기보단 놀리는 것에 가까웠지. 정말 필요할 때면 물론 장난 안 치고 달래 주기는 했지만.

평소라면 살랑거렸을 꼬리도 축 처져 있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이호연에게 참 못 할 짓 했다는 것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나올 걸 그랬다.”

내 말에 이호연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목덜미에 비벼지는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하얀 머리칼을 살살 쓸며 물었다.

“왜?”

“…류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

아, 이 호랑이를 어쩌면 좋을까,

“너라면 방해해도 괜찮아.”

“…….”

꼬리가 조금 살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작게 키득거렸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얼굴 안 보여 줄 거야?”

“…….”

“난 보고 싶어서 천칭 길드원들 잠도 못 자게 하면서 열심히 쪼았는데.”

3번이 교관이었거든.

내 말에 조금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날 붙잡은 손에선 힘을 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손에 내 손을 얹으며 사흘 만에 보게 된 이호연의 얼굴을 보고 나는 낯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 사흘 동안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밥도 제대로 안 먹었는지. 평소라면 남들 있는 데서 애정 행각 하지 말라고 면박 주던 주세진이 순순히 자리를 비켜 준 이유가 있었다.

그 사이에 얼굴에 살이 내렸다. 울면서 눈을 비볐는지 눈가가 조금 불그스름했다. 보기만 해도 쓰라려 보이는 그런 눈이었다.

손을 뻗어 그런 눈가를 더듬으며 물었다.

“…많이 걱정했어?”

제 눈가를 더듬는 손에 뺨을 비비며 이호연이 말했다.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어떤 생각?”

“…조각 안에서 또 이상한 것을 마주한 것은 아닌지. 천칭의 길드원들이 당신을 배신해 곤경에 처한 것은 아닌지….”

‘또 이상한 것’? 뭐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궁금증을 미뤄 두고 입을 열었다.

“이예린도 있었는걸.”

“…천칭의 길드원들은 대부분 질이 안 좋고…. 거기 길드장은….”

“나보다 자기 길드원들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이니까?”

이호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길드원의 살려 달라는 엄살에도 이예린이 영역을 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봤자 안 믿을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

“…….”

“내가,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음에는 같이 들어갈래요.”

회색 눈동자에 간절함이 담겼다. 뺨에 비벼지고 있는 손을 움직여 이호연을 내 쪽으로 숙이게 했다.

메마른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말했다.

“그러자.”

이젠 따로 들어갈 일 없을 테니까. 천칭과의 즐겁지 못한 합동 공략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사흘이면 이예린이 생각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협동해야 할 필요 자체가 없어질 것이다.

제 말에 순순히 그러자 할 줄은 몰랐는지 이호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 들여다보다 쪽 하고 잽싸게 다시 입을 맞췄다.

“류?”

“예뻐서.”

자꾸만 제 입술에 새 부리처럼 쪽쪽 와닿는 입술에 이호연의 얼굴이 슬금슬금 붉어지기 시작했다. 설렘과 갈망이 걱정과 불안을 밀어내 버린 것이 훤히 보였다.

“류….”

“여기 사람 없는데.”

“…….”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던 호랑이는 결국 유혹에 졌다. 나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심정으로 이호연에게 쪽쪽거렸고 호랑이는 나한테 떡을 주었다.

날 껴안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난스레 왔다 갔다 발꿈치 들고 쪽쪽거리던 나와 달리 이호연은 몸을 숙여 길게 입을 맞췄다.

손끝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옛날에 전래 동화 보면 호랑이가 그러잖아.”

“?”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고.”

“…….”

손에 깍지를 껴 이호연의 목 뒤로 걸었다. 도망 못 가게 된 호랑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떡 안 줄 건데.”

“…….”

“그럼 잡아먹을 거야?”

“그게… 무슨….”

얼굴이 시뻘게진 이호연이 버벅거리며 내게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제 목 뒤를 감싸듯 걸쳐진 내 손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요리조리 피했다.

“…안 잡아먹어요.”

“그럼―.”

어? 목에 감고 있던 손을 풀고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이호연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다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았다.

눈이 가늘어지나 싶더니 동공이 작게 수축하였다. 깜깜한 밤, 하늘 조각이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산 중턱이었기에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시선이 느껴졌는데.”

그것도 굉장히 걸쩍지근한. 불을 피우자니 산불 날까 무섭고. 그림자라도 이용해 볼까 고민하는데 이호연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 하는 건가 싶어 그를 보니 내가 보고 있던 곳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눈이 묘하게 빛났다.

“설마 보여?”

“호랑이는 원래 밤눈이 좋아서요.”

“…….”

그건 좀 부럽다. 한참을 이곳저곳 두리번거린 이호연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어스름한 산에서 내 기감은 몇 배로 발달하고는 했다. 도깨비라 그런 건가.

떨떠름한 내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이호연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냐는 듯 그를 쳐다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직접 가 보면 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호랑이와 떡 뺏어 먹기 놀이는 여기까지였다. 이호연의 손을 잡고 시선이 느껴졌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림자로 이동하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이호연은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제 꼬리에 대롱거리며 매달린 꼬마 도깨비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동할 때마다 한 깨비 이상씩은 이호연에게 달라붙고는 했다. 오늘도 꼬리를 차지한 주인공인 까만 가면의 깨비를 힐끔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희미하게 하늘 조각이 내뱉는 빛무리가 보였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이호연이 주변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쳐다보는데도 이호연은 진지한 얼굴로 흙길을 밟고 나무를 짚었다.

“냄새가….”

“냄새?”

“꽃향기? 약간 그런 향이 나는데…. 조금 인공적인 그런 꽃향기요. 이 시기에 꽃이 필 리가 없는데.”

“…….”

꽃.

나는 이호연의 후각에 감탄하고, 그의 말에 얼굴을 굳히다 이호연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이제 가자.”

“갑자기요?”

“가자.”

“…….”

충분히 물어볼 만도 한데 이호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하늘 조각 쪽으로 깨비 넷을 보내고 이호연에게 물었다.

“데려다줄게. 집 어디야?”

“제가 데려다줄게요.”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게. 여기 산이라 빨리 내려가야지. 안 그러면 조난 당한다? 그림자 타고 빨리 내려가자.”

물론 그럴 일 없지만. 내가 조난 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참 신기하긴 하겠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붙잡은 손을 흔들었다. 내 재촉에 못 이겨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 어디야?”

“회사까지만 데려다주셔도 돼요.”

“싫어. 집까지 데려다줄래.”

내 말에 곤란한 얼굴을 하던 이호연이 결국 순순히 제집의 위치를 말했다. 그가 말하는 주소지를 들으며 내 표정이 미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회사 기준으로 우리 집이랑 정반대네.”

“…….”

“지나가는 길이라고 맨날 데려다주더니.”

“뛰어가면 지나가는 길 맞아요.”

“…대중교통을 기준으로 잡아.”

조깅하는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안 뛰어다녀. 그것도 매일. 본인도 제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아는지 이호연이 조금 민망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응?”

“그렇게 해야… 더 오래 볼 수 있잖아요.”

“…….”

속이 간질거렸다. 괜히 잡지 않는 쪽의 손을 혼자 잼잼거렸다. 물론 이호연에게 우리 집에서 자기 집까지 뛰어가는 것 정도는 가벼운 조깅일 것이다. 비슷한 신체 수준을 갖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수고로운 일을 꼭 해야 하는가였다. 본인이 좋다고 하고, 물론 나도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사실이었다.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그럼. 가끔은 내가 데려다줄게.”

뭐라 말하려는 이호연에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데려다준 뒤에. 내가 너희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림자 타고 갔다가 돌아오면 되니깐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아. 길진 않지만 그렇게 하면 더 오래 볼 수 있잖아.”

내 말에 이호연은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안 했지만, 그의 의지를 벗어난 꼬리가 제멋대로 그의 답을 내게 알려 주었다. 친절한 커닝 테일을 힐끔 쳐다보고 이호연에게 웃어 주었다.

나보다도 예민한 호랑이의 기감을 피해 저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눈을 견제하면서.

어스름한 산은 도깨비들의 놀이터. 한번 인지한 상대를 찾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울까. 귀신의 한은 달빛 몰래 상대를 찾아내고, 살금살금 따라가니.

나는 우리를 감싸는 그림자의 줄기 너머를 노려보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꽃향기, 라일락 향을 이끌고 다니는 나비가 그곳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눈이 마주쳤다.

***

“밤마다 울었지.”

“…정말요?”

“그래. 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불안 증세가 많이 나아졌길래 너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거였는데.”

주세진의 말을 듣는 내내 속이 착잡해졌다.

이호연은 울면서 비볐는지 붉게 짓물러진 눈가가 쓰려 보였다. 그 잠깐의 며칠 사이에 살이 내렸고 조금 초조해 보였다.

길드에 오자마자 내가 보게 된 것은 주세진한테 질질 끌려 상담받으러 가는 이호연이었다.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은 나를 보자마자 활짝 펴졌다.

상담을 받으러 가는 건지 몰랐던 나는 불쌍한 호랑이나 구해 줄까 생각했지만 그런 내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본 주세진의 가드로 생각은 생각으로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멈춰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 처진 꼬리를 질질 끌며 상담실로 들어가는 이호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난 다음이었다. 이호연이 들어가길 기다렸다는 듯 주세진이 서둘러 나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갔다.

뭘까 싶어 졸졸 쫓아가서 들은 내용이 이런 것일 줄 알았다면 아까 이호연을 만났을 때 뺨이라도 꼬집어 줬을 것이다.

주세진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거였다. 내가 천칭의 길드원들 이리저리 굴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 이호연의 스트레스 지수와 불안 증세가 폭발했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주세진을 달달 볶고, 밤에 자려고 누우면 온갖 안 좋은 생각을 하며 베겟잇을 눈물로 적시는 나날을 보냈다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운 건 알았지만 사흘 내내였을 줄은 몰랐지. 심지어 이호연은 내게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저를 집까지 데려다준 내게 집착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키스한 뒤 붉어진 얼굴로 집에 들어갔었다.

불안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선.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모르겠다.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불안해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였다.

뭐라 말을 하지 못하는 내게 주세진이 말했다.

“내 잘못이야.”

“아니,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늦게 나와서―.”

“내 잘못이 맞아. 너한테 부탁할 때 이미 이삼 일은 거릴 거라고 예상했어. 그래서 너희 부모님한테도 미리 설명 드리고 호연이한테도 미리 말해 뒀지.”

어쩐지. 사흘 만에 들어왔는데 엄마도 아빠도 생각보다 많이 안 놀란다 싶어더니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럼 이호연이 운 건….”

“네가 들어가고 난 바로 그날 저녁부터 불안해하기 시작했어.”

“…….”

나는 주세진의 말을 들으며 내내 생각하던 것을 애써 입 안으로 삼켰다. 대체 왜?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지?

누구보다 이호연이 잘 알았다. 위험해지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 나라는 것을. 그런데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불안하다고….

“…지옥도 이후 내가 사라졌을 때도 그랬어요?”

“아니. 오히려 그때는…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굴었지. 안 울었어. 네 이야기도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고.”

“…….”

“네 얘기를 하면 자신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주세진도 놀란 기색 없이 이호연을 돌아 봤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이호연이 한숨을 내쉬고 내 옆에 앉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그때 류 얘기를 안 꺼낸 건….”

“안 꺼낸 건?”

“…만약, 저까지 류 얘기를 꺼내면 그걸 빌미 삼아 당신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조심한 것뿐이에요.”

“…….”

“그리고 이번에 운 건, 그건 그냥….”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매서운 눈이 주세진을 흘겨보았다.

“확대 해석 하지 마.”

답지 않게 매섭게 말하고는 내 눈을 슬슬 피하는 호랑이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 내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주세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른 곳 보느라 그 잠깐의 사이 스쳐 지나가듯 오고 간 손짓의 대화를 모르는 이호연은 애꿎은 쿠키를 뽀각뽀각 박살 내고 있었다.

가루가 묻은 손을 덥썩 잡자 이호연이 몸을 움찔거렸다.

“옥상에 산책가자.”

“류, 잠깐. 손에 가루가 묻었어요.”

“옥상에 산책로 있다며.”

“그건 맞는데, 잠깐 손 좀….”

맞잡은 손 사이에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래알 같은 과자 가루가 느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호랑이를 힘주어 담기자 이호연은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가자!”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우리는 옥상 정원으로 한 번에 이동했다. 물론 내 그림자를 이용한 방법이었고, 약간의 오차로 인해 난간 위에서 튀어나온 것이 됐지만, 어쨌든 무사히 도착했다.

공중전이 불가능해 평범한 층수 거리감을 가지고 있던 이호연은 정말 놀랐는지 내 손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미안…. 여기 올라와 본 적이 없어서….”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작은 오솔길 혹은 정원처럼 꾸며진 이곳에는 예쁜 벤치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에 앉혀 주자 그제야 좀 발이 땅에 붙어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지 이호연의 안색이 한결 좋아졌다.

꽉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내 손에 묻은 과자 가루를 털고, 그다음에 자신의 손에 붙어 있던 과자 가루까지 턴 호랑이가 은근슬쩍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시간을 죽이는데 저 멀리서 작은 인영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뭔가 싶어 그쪽을 빤히 바라보는데 살금살금 움직이는 몸에 익숙한 것이 달려 있었다. 나는 내 옆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고양이?”

“이 거리에서 보여요?”

이호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언뜻 보이는 꼬리가 내 옆에 있는 거랑 비슷해서 때려 맞힌 거였다.

“여기, 고양이도 살아?”

“강아지도 살아요.”

동물 농장이었구나. 깨달음을 얻으며 저 멀리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고양이를 보고 있는데 발밑에서 애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네?”

“여기에 고양이가 많이 살아서….”

“그런 것 같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다섯 마리의 고양이가 이호연의 발밑에 쪼르르 앉아 있었다.

사람을 잘 따르나 싶기엔 너무 노골적으로 이호연만 좋아하는 것이 티가 났다. 앗, 하는 사이에 또 새로운 애들이 왔다.

“고양이한테 인기가 좋네?”

“호랑이는 고양이과라….”

“…맹수잖아. 호랑이.”

“저는 사람이라서 위협만 안 하면 고양이 정도로 인식되나 봐요….”

“…….”

그게 뭐야. 황당한 마음에 이호연을 멀거니 바라보았지만, 이호연은 어색한 얼굴로 괜히 가만히 앉아 있던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만져 볼래요? 다들 순해요.”

“네 머리카락 느낌이랑 똑같네.”

“…….”

내 말에 제 머리끝을 매만지는 손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아까 왜 주세진이 옥상으로 가라고 손짓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느새 이호연의 무릎, 어깨, 머리 위까지 차지하고선 살랑이는 꼬리 잡으려 열심히 움직이는 고양이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졌다.

“이게 애니멀 테라피인가.”

제 호랑이 귀를 탁탁 때리는 머리 위 고양이를 잡아 다시 바닥에 내려 주던 이호연이 내 말을 듣고는 날 따라 작게 웃었다.

주세진에게 버럭하던 아까의 호랑이는 어디 가고 유순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어리고 작은 짐승이랑 놀아 주는 나른한 맹수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왜 운 건지 물어봐도 돼?”

“…….”

옷을 뜯으며 놀고 있는 고양이를 떼어 놓으며 이호연이 나를 보았다. 잠깐 사이에 옷에 털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허공에 후 불어 날려 보냈다.

느릿느릿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도 다 말하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지옥도 이후 류 얘기를 안 꺼낸 건 정말로 아까 말한 이유 그대로예요.”

“…….”

“말하면 그리울까 봐 말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마냥 확대 해석은 아니었다는 거네. 이호연의 무릎에서 놀다가 내 쪽으로 건너온 털 뚱뚱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내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호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 거 맞아요. 불안해서.”

결국은 이실직고였다.

“많이 불안했어?”

“…머리로는 아는데,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

역시 그건가.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이호연을 보았다. 고양이와 놀아 주던 저 손이 덜덜 떨리던 것을 나는 보았고 직접 느꼈다. 말 안 하고 넘길 수 없었다.

고양이 울음소리 사이로 내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옛날에는 내가 너한테 약한 모습 보인 적도 없고 말도 안 걸었으니까.”

내 말에 이호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에이포 용지에 글로 옮기면 한 줄 나올까 말까 한 말로 설명되는 감정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해하지 못한 이호연은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충은 알 것 같아서.”

이호연의 불안증의 원인은 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와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친밀해졌고. 또한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일 것이다.

“나는 정신계 마법사야. 내 전직관은 이론을 중시하지. 그가 그랬어. 무의식이란 견고하고, 때론 숨바꼭질에 흠뻑 빠진 어린아이 같은 거라고. 가장 원초적인 생각의 근원.”

“…….”

“아마 지옥도의 당시 나를 생각하는 네 무의식의 정의는 무너지지 않는 무언가였을 거야. 실제로 나는 웬만하면 다치는 경우가 없었고 네 앞에서 아픈 것, 힘든 것 하나 티 내지 않았지.”

내 말을 가만 듣던 이호연의 낯이 서서히 굳어 갔다. 예상했던 바였다.

“난―!”

뭐라 말하려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꾹 다문 입은 일견 고집스러운가 싶으면서도 무서워 입은 다문 사람같기도 했다. 고양이의 손을 빌려 그의 입을 꾹 눌렀다.

“비난이 아니야. 네가 그 당시의 그들처럼 나를 최종 무기처럼 생각했다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은 네 무의식이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거야.”

그는 제 입을 막은 고양이 손에서 얼굴을 물리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겠지. 말하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가 하는 말들은 전문적인 심리학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렴풋이 알겠는걸. 최대한 끄집어낸 것뿐이었다.

“지금 우리의 관계는 그때와 확연히 달라. 대화하고 함께 식사하지. 좋아하고, 아껴. 그리고 나는 네 앞에서 한 번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지.”

“…….”

“내가 견고할 거라 생각하던 네 무의식이 무너지기 충분했다는 뜻이야.”

그 결과물은 아마 이호연의 불안 증세일 것이다. 그때 느꼈어야 할 것까지 합해져 쓰나미처럼 몰려들었겠지.

그건 언제나 단단할 거라고 생각한 부모님의 어깨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을 느끼는 어린아이의 마음 같은 걸 거다. 과거의 있었던 일까지 전부 끄집어내 어린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그런 감정.

사실 정확하게는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만큼 모호하고 어려운 과목은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랑한테 가르침 받을 때 딴짓 안 했을 텐데.

뭐라 말은 못 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제 손만 바라보는 이호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 봐.”

“…….”

“나 좀 봐 줘.”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못마땅했다. 손을 뻗어 얼굴을 잡아 억지로 내 쪽으로 돌렸다. 조금 사나워진 내 기세에 고양이들이 모두 도망을 갔다.

“나는 강해. 하지만 사람이라 물리적인 것이 아닌 것에도 상처를 받아.”

“…….”

“그리고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지. 너도. 나도. 난 너한테 뭐라 할 생각 없어. 무의식적인 생각이라는데, 뭐 어떻게 해. 나도 마찬가지인데.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 따라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괴물들 해치우러 다녔잖아.”

“…류.”

“네가 안 다칠 걸 아는데, 약간의 가능성마저 차단해 버리고 싶었어.”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호연은 다시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 않았다.

“난 내가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다 밀어냈어. 근데 너는 못 밀어냈어.”

“…….”

“죄책감은 느끼지 마. 그게 힘들어도 웬만하면 갖지 말아 줘. 밥도 잘 못 얻어먹고, 다쳐도 말도 못 하던 그 당시의 나를 네 책임으로 돌리지 마.”

“하지만, 당신은 그때 겨우 스무 살이었어요! 나는…! 그 당시 당신의 편을 온전히 들지 않았어요. 어린애나 다름없는 당신을 방치했다고요!”

“…….”

이거구나. 이호연의 불안 증상의 원인. 꼭꼭 감추고 모른다며 잡아떼던,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무의식이 숨겨 버린 진실.

이호연은 이제 나를 그 당시와 다르게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그는 지옥도 당시 제대로 편들지 않았다. 죄책감이 한번에 몰려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

이호연이 숨을 색색 내쉬었다. 내가 아니라 이 자리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상담사가 있었다면 뭐가 좀 달랐을까. 하지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당사자들만 아는 그런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만으로는 설명 못할 그런 감정들. 우리의 첫 만남만 해도, 그때의 우리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영원히 없을 거라 장담 할 수 있었다.

당사자인 나조차 지금도 어떻게 서로 좋아한다는 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했다. 흐릿한 웃음을 흘린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좋아.”

“…….”

“좋아. 정말로 네가 나를 방치했다면 이런 생각 들지 않았겠지. 벽을 친 건 나였어. 너는 그냥 내 의도대로 따랐을 뿐이야. 심지어 은근슬쩍 내 의도에서 벗어나 내게 말을 걸었지.”

음식을 챙겨 주고. 다친 곳을 치료해 주려고 했고. 결국엔 자신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내가 떠난 이후 내 편을 들었지. 누구보다 열심히. 원래라면 사람들이 내게 떠맡겼을 일들을 네가 대신했어.”

“…….”

“나는 네 죄책감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내가 괜찮다고 한들, 정작 네가 스스로 괜찮지 않다고 하면 소용이 없는 걸 테니까.”

눈물이 맺힌 눈가를 살짝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죄책감, 나한테 갚는 걸로 쳐.”

“…네?”

“네가 내게 죄책감을 느끼는 만큼 내게 잘 해 줘. 날 더 좋아하고 사랑해. 그때 못 했다고 후회되는 모든 것을 내게 해 줘. 난 이번에는 안 피하고 다 받아들일 거니까.”

“…….”

“그러다 네가 죄책감에서 벗어나면.”

그때는.

“네가 해 주는 모든 것들의 배 이상 내가 너를 사랑할게. 그때는 너도 딱 그만큼 나를 사랑해 줘야 해. 죄책감 같은 쓸데없는 감정 빼고.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눈에 짧게 키스했다. 깜박거리는 회색 눈에 대롱거리던 것이 툭 떨어졌다.

“미안하다고 할 거면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해. 뭔지는 말 안 해도 알지?”

나는 그날 몇 시간을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어느새 살금살금 돌아온 고양이들이 그런 우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나는 또랑또랑 귀여운 얼굴들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커다란 고양이 같은 호랑이에게 말했다.

“나도. 사랑해.”

가을 날씨가 참 좋았다. 선선한 가을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어쩌면 시간만으로는 해결 되지 않는 것들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리 사이에도 여전히 풀지 않는 문제가 있듯이.

***

팔랑팔랑 넘어가는 서류를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내 입으로 다가오는 맛난 케이크에 입을 얌 벌렸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었다. 누워서 먹으면 소 된다고. 아,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는 거였나. 뭐 어때.

머리를 받치는 허벅지가 단단했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니 잠이 솔솔 왔다. 무슨 케이크를 내게 먹일까 고민하던 이호연이 그런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한숨 잘래요?”

“음….”

“제발 나가, 내 방에서.”

서류를 탁―소리 나게 내려놓은 주세진에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저러니까 고뇌에 빠진 젊은 회장님 같았다. 아, 회장 맞지.

딱딱한 나무 책상에서 업무 보는 자신과 달리 노닥거리는 우리가 짜증이 났는지 주세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내 방에서 연애하지 말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딱히 염장질은 아니었는데. 이호연이 들고 있던 포크를 뺏어 이호연의 입 안으로 넣었다. 내게 먹이려고 했던 초코케이크를 먹게 된 이호연이 미묘한 얼굴로 케이크를 씹었다. 호랑이가 먹기엔 너무 달았나 보다.

애써 삼키는 것을 지켜보다 주세진에게 물었다.

“주세진 씨는 연애 안 하나요?”

“안 해.”

“왜요? 인기 많으면서.”

발끝을 까닥이며 설렁설렁 질문을 내뱉는 내 말에 주세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초코케이크를 삼킨 이호연이 내게 대신 답을 알려 주었다.

“형은 비혼주의자예요. 독신으로 살 거래요.”

“어? 진짜?”

의외…인데 뭔가 어울려.

“그러면―.”

“나가.”

“…연애 얘기 아닙니다.”

사실 맞지만. 말하기 싫은 주제가 아니라는 말에 그제야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는 주세진에게 나는 살짝 웃어 주며 말했다.

“천칭 일은 어떻게 돼 가나요?”

“후….”

내 말에 한숨을 내쉰 주세진이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눌렀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이번만 넘어가 준다.

주세진이 우리 앞에 앉는 것과 동시에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얌전히 소파에 착석했다. 내 배게 신세였던 허벅지가 저리지도 않는지 이호연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끝낼 수 있고. 운이 없으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

“어쨌든 끝낼 수 있다는 거네요.”

“그렇지.”

“방법 물어봐도 되나요?”

내 말에 차를 따르던 손이 멈칫했다.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는 시선을 나는 뀨? 하는 얼굴로 마주 보았다.

나는 수상하지 않아요. 해치지 않아요.

주세진은 굉장히 의심스럽고 떨떠름하다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듯, 천칭이라는 길드 자체를 없앨 거야.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문제는 다시 발생하니까.”

“그게 돼요?”

“인수 합병.”

아, 되게 현대적인 어른의 방식이네. 현실적인 자본주의를 보여 주는구나 싶었다.

“합병은 어떻게 하게요? 뒤가 구려도 천칭은, 그러니까 길드를 갖고 있는 회사는 대기업이잖아요.”

“그래서 말했잖아. 운이 좋으면 한번에. 나빠도 시간이 조금 걸리고 말 일이라고.”

“…….”

“뭘 모른다는 얼굴이야. 네가 만든 결과물인데.”

“?”

내가 뭘 했는데? 멀뚱멀뚱 주세진을 쳐다보니 그가 작게 웃으며 설명을 해 줬다.

“합동 공략 이후 천칭의 어르신들이 매일 내게 전화를 걸어. 무슨 짓을 했기에 이예린이 이상 행동을 하느냐고.”

“이상 행동?”

“말을 안 듣는대. 공략도 거부하고 제게 뭐라 하니 사무실을 뒤엎고 도망가 버렸다는군.”

“…….”

“덕분에 천칭의 주식이 매일매일 떨어지고 있어.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돌발 행동을 하기 시작해서…. 이대로 있으면 인수 합병은 간단하게 될거야. 그 어르신들이 문제기는 하지만….”

즉. 주가가 하락했을 때 꼴깍한다는 거구나. 괴물이 나타나고 마법을 사용하는 이 시대랑 안 어울리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천칭은 길드보다는 대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기는 했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길드 없이는 돌아가는 게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길드에서 공략한 하늘 조각을 털어 자원을 수집하고, 가공하고, 판매한다. 재료의 공급 역할을 하는 길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회사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 이예린이 계속 반항해야 된다는 뜻이네요.”

“…그렇기는 하지.”

“…….”

오래 못 갈 것 같은데. 이예린의 반항심, 그러니까 이제야 좀 사람답게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도 힘이 나야 할 수 있다. 과연 그 사람이 얼마나 버틸까.

장기전으로 가면 도중에 이예린은 다시 수긍하는 쪽으로 생각이 빠질지도 모른다.

“…주가 하락.”

“?”

내 중얼거림을 들은 이호연이 고개를 가웃거렸다. 나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주세진에게까진 들리지 않은 듯했다.

옆에서 살랑거리는 하얀 꼬리를 끌고 와 살살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보통 주가가 하락하는 경우가 무엇이 있는지.

회장님들 휠체어 탈 일 생기면 일단 주가는 하락했다. 언론 플레이로 신나게 굴려지고 나면 그때도 주가는 하락했다.

그리고.

“…….”

검은 줄을 손끝으로 따라 그리는 것을 관두고 꼬리를 놔주었다. 눈앞에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예린이 내게 물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냐고. 나는 답했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에 둔 당신보단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할 수 없다.

이예린은 정말 할 수 없는 걸까,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렇게 스스로 세뇌하듯 되새기고 있는 걸까.

할 수 없다는 자기 생각을 깨 버릴 용기는 있을까.

“반항을 했다는 거 자체에 높은 점수를 줘야겠지?”

“네?”

“응. 높게 쳐 주자.”

알 수 없는 내 말에 이호연은 눈만 깜박였고 주세진은 서류 보느라 바빴다. 지금 내가 뭘 생각하는지 누가 알았다면 말렸겠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진심을 다해 말릴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제 뺨에 손을 올리는 내게 뺨을 비비는 이호연에게 웃어 주며 손끝을 까닥거렸다. 작은 그림자 덩어리 하나가 남들 몰래 살그머니 방을 벗어났다.

반짝반짝 별님이 과연 한밤중 나들이해야 하는 내 초대를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모른 척 시침 떼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늘 조각 안에서 듣지 못한 대답을 이제는 들을 시간이 되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고 이예린은 나름 스스로 행동했다.

유리창 너머 하늘이 어두워지는 그때. 별님과 밤 나들이나 가련다.

***

하늘이 깜깜한 밤으로 바뀌고 손을 뻗어 휘적거리면 새카만 것들이 묻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잡아먹힐 것 같은 어둠으로 물드는 시간.

총총히 박힌 별은 찾아볼 수도 없고, 그 대신이라 하기엔 낭만 없는 인공적인 불빛들이 밤을 밝혔다.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헤집고 지나가는 밤바람은 제법 찬기가 서려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별빛 대신이라 하기에는 뭐하지만 어둠아 저리 가라, 하는 불빛들에 의지해 사람들은 돌아다닐 용기를 얻는다. 그들처럼 나 또한 별을 따라 걷지는 못해도 불빛을 따라 밖으로 흘러나왔다.

까만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난간에 걸터 앉아 보는 서울의 밤이 화려했다. 이게 바로 직장인들이 만들어 내는 불꽃놀이인가 싶었다.

아득하게 먼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어지면 심장이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을 것 같은 높이였다.

난간 위를 사뿐사뿐 걷는 내게 하늘에서 툭 떨어진 별님 같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나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리며 발을 놀렸다. 앞꿈치만 난간에 닿고, 뒤꿈치는 저 아래로 기울어지고. 발끝에 힘주었다가 폴짝거리다가.

줄타기하는 광대놀음 같으면서도 설움 풀어 주는 춤사위 같은 몸짓을 반복하다 이예린 쪽으로 팔을 뻗었다. 원래라면 칼이 들려 있어야 할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텅 빈 내 손을 보는 별을 품은 사람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두려움 같기도 하고, 후회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제사용 춤이래요.”

“…….”

“오랜만이에요. 이예린 씨.”

이예린의 앞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리블이 옥상에 정원을 만들었다면 천칭은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며 상사 뒷담화를 할 것만 같은 휴식 공간을 만들어 놨다.

그곳을 쭉 훑어보았다. 회색 공간 사이에 병아리색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감상이었다.

이예린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꼬마 도깨비가 얍 하고 튀어나와 쫑쫑거리며 내 쪽으로 뛰어 왔다. 그런 깨비를 가만 바라보며 이예린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즐겁게 살고 있다면서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기분은 어때요?”

“…….”

입을 벙긋거리며 답을 망설이던 이예린이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 얼굴에 담긴 것은 즐거움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그저 웃음일 뿐이다.

그건 버릇 같기도 하고 강제로 길들여진 어느 불쌍한 동물의 반사 행동 같기도 했다. 내 물음에 이예린은 머뭇거리다 한숨 같은 말을 내뱉었다.

“좋아요. 좋은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사랑에 빠졌나 보죠.”

“…사랑보다는 잘못을 저질르고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 같은데요.”

“그럼 그거 잘못된 거네요.”

이예린 앞으로 바싹 걸어간 나는 아까부터 그녀가 만지작거리던 팔을 내 앞으로 잡아당겼다. 손등을 덮은 소매를 걷자 드러난 팔이 얼룩덜룩했다. 붙잡힌 팔은 벗어날 의지 없이 얌전했다.

“보호자는 아이를 때리면 안 되거든요.”

“…….”

잡은 팔 쪽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내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이 이예린의 팔을 타고 넘어가 화려하게 타오르다 사그러졌다.

불이 사라진 자리엔 하얗고 깨끗한 피부만 남아 있었다. 푸른 불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지켜보던 이예린의 입이 열렸다.

“…치유 능력도 있어요?”

“뭐, 일단은. 가성비 나쁘지만요.”

몰려오는 피로에 목 뒤를 주물렀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이예린의 눈은 아주 치사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가볍게 놀리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낼 준비를 했다. 스몰 토크는 이 정도면 되었다.

“그래서 이제 답 들을 수 있나요? 연장 시간은 이미 끝났는데.”

“더 기다려 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우리 길드장님이 그쪽 길드를 꼴깍할 생각인 것 같아서요. 그 전에 나랑 그쪽이랑 끝내야 할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런 거 외부인이다 못해 그 꼴깍의 대상자인 길드의 장에게 막 말해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바지 사장이잖아요.”

와아. 너어는 지인짜. 하는 얼굴로 나를 보던 이예린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말을 인정했다.

“뭐. 그건 그렇죠. 저번에 멋대로 합동으로 게이트 공략 갔다고 없던 권력이 더 없어지게 생겼거든요,”

예상했던 바다.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기는 했지만, 막상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영 별로였다.

“그래서 리블의 주세진 씨는 갑자기 왜 천칭을 꿀꺽할 생각이 들었대요?”

“꿀꺽이 아니라 꼴깍. 그쪽네 사정이 꿀꺽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좋지는 않아요.”

여기 오기 전에 확인해 보니 주식이 아주 다이렉트로 떨어지고 있던데, 뭐. 이예린 또한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꼴깍. 그래서 왜 꼴깍하려는 건데요.”

“싹 자르기? 원인을 없애겠다고 하던데요?”

“…….”

“인수 합병이란라는 굉장히 얌전하고 비폭력적이며 아무도 죽지 않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

“그리고 완벽하게 뿌리 뽑지는 못할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주세진 씨는… 사람이 너무 법적이라서.”

“공주님 생각은 다르다는 것 같네요.”

그렇지. 나는 주세진처럼 마냥 법적인 사람도 아니고. 평범하게 평화로움에 흠뻑 젖은 삶을 살았다고 하기엔 지난 2년이 너무 스펙타클해서 생각하는 게 그리 건전하지가 않았다.

난간에 몸을 기댔다. 내 눈앞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밤이 돼서 그런가,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웃는 낯을 버리고 물었다.

“있잖아요. 이예린 씨. 사람, 죽여 봤어요?”

“…….”

애써 끌어 올려져 있던 입꼬리가 굳는다. 그것을 보며 나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난 죽여 봤거든요. 왜 죽였는지 아세요?”

내 물음에 이예린은 답하지 않았다.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침묵 안에는 살인자를 보는 혐오감이 아니라 그냥, 이미 알고 있기에 묻지 않겠다는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가만히 미소 지어 주었다. 난간 위를 손끝으로 톡, 톡 쳤다. 말로 내뱉으니 머릿속에 당시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옛 앨범을 뒤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하고 되새기니 머릿속이 희뿌예졌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기분이다.

“…….”

사람을 죽였다. 다양했다. 공통점은 지금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분란을 가져 올 사람. 나를 곤란하게 만들 사람. 나를 배신할 사람. 내 뒤통수를 친 사람. 적대감을 갖고 있던 사람. 이미 한번 전적이 있는 사람. 계획을 세우던 사람. 그것을 실천하던 사람.

처음부터 손속에 자비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용서해 봤자 소용없고, 그것이 오히려 내게 해가 된다는 것을 느끼고 깨달았을 뿐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좋고 빠른 해결책은 싹을 자르는 게 아니에요.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지.”

그리고 주세진이 하려는 인수 합병, 즉 천칭이라는 길드를 없애고 목 뻣뻣한 어르신들이 재기 불가능하게 회사를 뒤흔드는 것은 뿌리를 뽑는 것이 아닌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

싹이 잘린다고 끝이 아니었다. 그 싹을 다시 한번 자라게 할 사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외로워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이라지만,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다. 외로움에 미친 사람의 극단적인 모습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나처럼 도망가서 혼자 살 것처럼 굴거나, 이예린처럼 아무것도 못 놓는 사람이 되거나.

그래서 난 이예린을 볼 때면 짜증이 난다.

“어떻게 생각해요?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오래 보고, 옆에서 계속 양분 뺏기는 식물처럼 살았잖아요.”

이예린과 천칭은 바오밥 나무와 어린 왕자의 별 같은 관계였다. 바오밥 나무가 더 크고 튼튼하게 자랄수록 별은 부서지고 망가진다. 그것을 중간에서 말릴 어린 왕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별에는 바오밥 나무와 장미들만 있기 때문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말투가 영 시비조였다. 마치 비꼬는 것처럼. 이예린 또한 그것을 느낀 듯했지만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난 더욱 기분이 상했다.

“…무슨 말이에요?”

알면서 굳이 묻는 모습에 나 또한 굳이 물었다.

“뿌리가 진짜 이 길드, 회사라고 생각해요?”

“…….”

“난 아닌데. 결국 이것들을 만든 건 사람이잖아요.”

싹을 자르는 게 아니야. 뿌리를 뽑아야지. 그래야 모든 것이 끝난다.

벙긋벙긋 움직이는 내 입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예린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사람처럼 놀라더니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 하는 거….”

“…….”

이예린은 말을 하다 말고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 웃는 낯이 깨졌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머릿속에 되뇌고 있는 듯했다.

한참만에 나온 그녀의 말은 결국 질문이었다.

“…리블 길드장도 알아요? 그쪽이 그런 생각하고 있는 거?”

“나도 제대로 모르는 내 속을 남이 어떻게 다 알아요. 말하고 표현하지 않는 이상 모르지.”

알면 말렸겠지. 주세진이 말렸다면 내가 이 한밤중에 야경이 예쁜 천칭의 사옥 옥상에서 불쌍한 병아리색 별님과 밤 나들이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다가 그림자로 집까지 데려다주기를 당한 이호연도 꿈에도 모를 한 밤중의 외출이었다.

장난스러운 내 어조가 이예린을 건드렸는지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큰소리가 났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한테 그런 걸 말하는 의도가 뭐야!”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는 눈빛과 발작하듯 내게 말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잠적했는지 알아요?”

“갑자기 그 얘기가 왜―.”

“이유는 알아도 과정은 모르죠?”

“…….”

답 없는 침묵은 긍정에 가까웠다. 우리는 꽤나 닮았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예린 입장에서 나는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속이 거북하다 못해 비틀어지는 기분이었다.

엄지손톱 옆의 거스러미를 손끝으로 뜯었다. 아릿하게 아픈 것이 내일이면 부을 것 같았다. 손끝의 자그마한 아픔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픔이 흐릿해지고 눈 뜨고 있는 이 밤이 꿈같아지는 그런 이야기를.

“난 당신처럼 말 잘 듣고 사기 계약 하기 딱 좋은 상태로 미쳐 있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내가 우스워 보였는지, 나한테 곱게 곱게 계약해요, 하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곱게 거절할 이유도 없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

“그래서 죽였어요. 한… 둘 정도. 내버려 두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난 상대가 내게 한 만큼만 했어요. 정당방위였어요. 그건.”

약간의 거짓이 담긴 말이었다. 미쳐 있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당시의 그리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억도 잘 안 나고.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조금 아팠다. 어쨌든 두… 사람의 죽음 이후 아무도 내게 계약서를 들고 찾아오지 않았다.

“쫄래쫄래 맨날 와서 날 괴롭히던 사람들도 자기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더 이상 찾아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아무도 그 일을 공론화시키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내가 잠적한 뒤에도. 얼굴도 본명도 다 알려진 지금도. 그래서 나도 굳이 건들이지 않았다.

내 말을 듣는 내내 이예린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애꿎은 손끝을 괴롭힐 뿐이었다. 얕은 아픔은 내 입을 계속해 열었다.

“왜 알리지 않은 것 같아요? 알렸다가 내가 죽이러 올까 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서? 그도 아니면 찔리는 게 있어서?”

셋 모두가 정답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겁주는 것으로 그들의 싹을 자르는 것이 아닌 뿌리를 한번 뽑았기 때문이다.

한번 뽑힌 뿌리는 어거지로 다시 묻어도 결국은 시들시들 제 몫을 못 한다.

자신들이 내게 한 짓과 똑같은 방식으로 당하는 이들을 보는 것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자신들이 한 짓에 대해 뼈저리게 느껴 보았을 것이다.

그 공포를. 허망함을. 내가 전직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들에 대한 행위의 공포를. 내 버릇 하나 고쳐 보겠다고 했던 그 헛짓거리들.

나는 강했기에 죽지 않았고, 그들은 나보다 약했기에 죽었다. 그러하기에 같은 방식임에도 나는 살았고 그들은 죽었다. 겁을 먹고 숨었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있었음에도 숙이는 것을 선택한 다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의 차이점은 딱 하나였다.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는가. 이예린은 외로웠고 나는 서러웠다.

피 맺힌 손끝을 살펴보다 고개를 들었다.

“이예린 씨. 싹을 잘라 봤자 이만큼 해 드신 어르신들은 이미 쟁여 놓은 돈도 많아 잘 먹고 잘살 거예요. 어떻게든 털어먹어도 밥 벌어먹을 정도는 남아요.”

“…….”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하늘 조각 안에서. 천칭에서, 당신 혼자 살지만, 감시자들이 매일 들러붙어 있는 집에서.”

“…….”

“…리블 아닌 곳에서 마음 편히 밥 먹어 본 적은 있어요? 감시 안 받고, 자기들 입 채우느라 바쁜 길드원들 없는 곳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 생각 없어요?”

과정이 어떻든. 결국은 결과가 중요했다.

내 과정이 어떠하든 어쨌든 나는 무사히 잠적했고 행복한 일상을 누렸으며, 과정이 어떻든 조건 좋고 나 좋아하는 사람들 가득한 곳에서 길드 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러니. 과정이 어떻든. 그 과정이 힘들었으니 결과만큼은 그냥 좋으면 안 되는 걸까.

일상 하나 얻기 위해 내가 했던 과정을 아무도 모르니, 나는 그저 책임감 없지만, 행복한 일상을 누린 사람이 된 것처럼.

불법 촬영 같은 자세한 내막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나는 그저 일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다가 최고의 조건으로 최고의 길드에 들어간 부러운 인간이 된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그저 남부러울 것 없는 대형 길드의 길드장인 이예린이 그 과정을 아무도 모르기에 그저 매일 웃고 즐거운 사람인 된 것처럼.

그 과정이 어떠하든 그냥 결과만 좋게. 남들 보기엔 문제 없고, 오히려 부럽고, 겉보기엔 문제 없는 그런 결과라면.

그런 결과라도. 그거 하나라도 그냥 얻으면 안 되나?

양심이고 법이고. 과정에 담긴 눈물이 얼마만큼인지 남들이 얼마나 신경 써 준다고.

“천칭을 나간 이후를 잘 모르겠다고 했죠? 아뇨.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결과와 과정까지.”

자신이 나가, 족쇄의 의미가 사라진 이들이 어떻게 될지. 그 과정을. 장미에 길들여진 사람은,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탓에 눈물 흘릴 일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못했다.

이건 동정이 아니다. 짜증이었다. 비틀어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과정은 남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작 남들이 보는 건 결과죠. 그러니까…. 가끔은. 정말 숨 막혀 죽을 것 같을 때는….”

결과만 생각해 보아요. 나를 봐요.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봤을 때 나는 행복하고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니. 그러니까.

“…남들 말고. 당신만 생각해요. 과정은 잊어요, 어차피 사람들은 결과만 기억하고. 결과만 보고. 결과만… 당신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라 생각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웃는 얼굴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입꼬리가 애써 끌어 올려지기 위해 바들거렸다. 눈물에 번들거리는 황금색 눈은 흐렸다.

이예린이 나를 붙잡았다. 내 몸에 팔을 둘렀다. 꽉 껴안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마주 않지는 않았다.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

“그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잖아요.”

“제대로 된 게 아니면 좀 어때요. 나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게끔 몰아붙였는데.”

병아리색 머리가 도리질 쳤다.

“나…. 나 스스로 버티지 못하면….”

“잊게 해 줄게요. 열심히 배워서 기억을 조작하든 없애든 해 줄게요.”

될까 모르겠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 내가 더 놀라웠다.

샛노란 머리카락이 걸린 손을 들어 올렸다. 환한 빛깔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보였다. 그것을 눈에 담는 내게 이예린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너는, 넌 어떤데….”

나는… 나름 버텼다. 아마도. 뭐라고 할까 생각하다 천천히 말을 늘어트렸다.

“당신이 생각하고, 상상하고, 직접 보고 느꼈던. 부탁한다면 모든 이뤄 줄 수 있을 것 같은 요술 방망이라도 휘두르는 도깨비 같은 사람. 그게 나였죠?”

“…….”

이렇게 말하고 나니 무슨 동화 속 주인공 같기도 하고, 신 같기도 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가벼운 웃음이 실바람처럼 흘러나왔다. 웃음 소리가 울음을 닮은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아요. 남들이 보는 나도 그런 이미지잖아요. 남들 보기에 그렇게 보일 정도면 나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

손에 흘러든 머리카락을 꾹 움켜 쥐어 보았다. 몽글거리며 뭉쳐 있던 핏방울이 뭉개져 퍼졌다.

“후회의 여부를 묻는 거라면 아니에요. 죄책감에 파묻혀 살 것 같은지를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에요. 난 즐거웠고, 행복했고, 지금도 문제없어요.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좋았고. 그래서 남들 보기에도 문제없었고. 과정은 결국 남들을 위한 것. 나는 날 위한 선택을 했어요.”

죄책감과 죄악심이 내 위는 아니었다. 그것들을 짓밟아서라도 숨 쉬기 위해 물 위로 올려보내야 하는 것은 ‘나’였다. 그냥 그것만 생각했다.

“남 생각하는 건 내가 먼저 살고, 숨 쉬고, 웃을 때. 그때예요.”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었다. 남 생각하다 중요도를 주객전도하면 안 된다. 내가 아닌 남을 내 위로 생각하는 순간부터 한없이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드는 것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눈을 감았다. 가을 바람은 겨울보다는 따스하지만 봄날같은 포근함은 없었다.

“당신이 보는 나는 불행해 보이나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죽어 가는 것처럼 보이나요? 웃고, 웃고, 또 웃으면서 죽어 가는 사람 같나요?”

“나는….”

“…나 먼저 살아야죠. 남들 말고 ‘나’부터 생각해야죠.”

그러쥐고 있던 병아리색 머리칼을 놓고 이예린의 어깨를 잡았다. 날 붙잡고 있던 몸을 밀어내 내 눈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짐승도 살려고 자기를 공격하는 것들을 공격해요. 그런데 사람인 당신은 왜 자신을 죽이는 것들을 걱정해요?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맑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나를 보는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 또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

불안증에 시달리는 이호연에겐 뭐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그가 내 속내를 제대로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상담을 제안하는 주세진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 속이 얼마나 꼬였는지 알고 있다면 주세진은 절대 내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걸었다가 벗어난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걷고 있는 이예린에게는 말을 한다. 그저 말을 한다. 위로도, 제안도, 뭣도 아닌 그냥 말들.

충고라고 하기엔 너무 내 개인적인 이야기들이고. 한탄이라고 하기엔 나 자신의 삶을, 행동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그냥 말이었다.

나는 이랬고. 저랬고. 그래서 지금 이렇고. 그러니 너 또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도 된다고. 그래 봤자 안 죽고, 오히려 지금 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그런 말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알게 하지 않고. 들어주지 않고, 듣지 못하게 한 것들이 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고. 숨소리가 가라앉는다. 눈물은 멎는다. 아니, 애초에 흘린 적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다. 가장 비슷한 길을 걸은 이들끼리.

건드리기엔 견고한 성과 같았던 주세진은 모르는 일. 건들기엔 이미 너무 잘 알려지고 대중의 사이에 있던 이호연도 모르는 일.

건들기 딱 좋게 정신적 수습이 잘 안 되던 이예린과 남들 피해 도망 다니기 바쁘던 내가 겪은 것들. 외롭고 서러운 사람들. 만약 내가 아주 조금만 덜 서럽고, 외로움이 더 컸다면, 내게 하얀 종이와 함께 독을 내미는 이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오늘 왜 천칭에 왔는지 알아요?”

“…….”

“싹을 자르기 전에 뿌리를 뽑아 버리려고. 겸사겸사 인수 합병 하려는 우리 길드장님 편하라고 왔어요.”

마지막 말은 장난스러운 어조에 가까웠다. 일부러였다. 그렇게 진지한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는 말은 그렇게 많은 감정을 담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주식이 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는 경영자의 죽음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리고 내가 마음에 안 드니까.”

“…….”

흐릿하게나마 웃는 나를 보며 이예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듣는 웃음소리도 울음을 닮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는 이예린을 바라보다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낮아졌지만 마주 보는 시야 속 밤과 밤 속에 놀러 온 별님이 비추고, 섞이고, 얽혔다. 별이 빛나기 위해선 주변이 어두워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너무 어두우면 외로웠다.

어둡고 어두워서 잡아먹히는 그런 기분으로는 빛나지 못한다. 아주 깊은 어둠 속에서 단 하나의 별로서 죽어 가는 이에게 물었다.

“날 막을 거예요?”

이예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애처롭게 깜박이는 별의 유언 같았다. 빠르게 세 번, 느리게 세 번, 빠르게 세 번 빛나는 그런 반짝임.

별을 본 나는 물었다.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가 돼서 여기서 도망갈래요?”

아까보다도 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직접 끝낼래요?”

이번에는.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몸짓으로는 전할 수 없는 언어와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이며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리블에 들어올래요?”

“…….”

숙여지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동그랗게 떠진 눈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울음과 비틀어짐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내가 리블에 있으면서 느낀 건데, 너무 소수 정예라 게이트 두 개를 맡게 되면 안 그래도 없는 공략대 인원 둘로 나누니 더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새로운 공략대 팀이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뭐라고….”

“당신이 지키고 싶다고 믿던 천칭의 공략대요. 그중에, 나쁘지 않은 애들도 있었어요. 주세진 씨가 몰래 넣어 둔 스파이 씨도 그렇고. 몇몇은 괜찮더라고요. 공략대로 쓰기에도, 사람으로서도.”

“…….”

“내가 봤을 때 이예린 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점찍어 둔 사람들이 위험해 처했을 때 더 불안해 보이더라고요.”

다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이예린에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못된 말만 하기는 했는데. 그쪽 그렇게 인생 헛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인생의 결과물들 데리고 우리 길드 올래요? 밥 맛있고, 사람들 친절하고, 사기 계약도 없는데.”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 죽여 우는 이예린을, 나는 그제야 끌어안아 주었다. 그림자에서 살며시 튀어나와 나처럼 이예린을 꼭 껴안아 주는 꼬마 도깨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정이 어떻든. 이거 하나는 약속할 수 있어요. 결과가 지금의 삶보다는 훨씬 행복하고, 즐거울 거예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숨을 쉬고, 웃고. 그 뒤에 스스로 여유가 생기면. 그때즈음에야 남을 생각하면 된다. 또한 그것은 의무가 아니다.

남을 구하고 싶어질 때,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되는 권리일 뿐. 제 위에 멋대로 뿌리 내린 바오밥 나무와 장미로 인해 무너지던 별의 비애는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밥 하나는 절대 안 굶기고 잘 챙겨 주는 길드장님 있는데. 사기 계약도 안 하고. 그 사람 한번 만나 볼래요?”

내 말에 눈을 마구 비비며 울던 이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느릿이 아닌, 아주 빠르고 머뭇거림 없이.

울음에 잠기 목소리가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거기 밥 너무 맛있어서 꼭 가고 싶어요.”

“주세진 씨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직원들 밥 먹이는 데 은근히 집착하는 사람이거든요.”

내 말에 이예린이 실실 웃었고 울다가 웃으면, 하고 놀려 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그냥 에이 못생겼다 하며 빨갛게 부은 눈을 손으로 덮어 주었다.

“난 예뻐요.”

“지금 모습 거울로 보여 줄까요?”

“그건 싫어요. 핸디캡이 너무 심하잖아.”

노닥거리기를 하는 내내 난간 너머 건물들의 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밤이 성큼성큼 다가오듯. 그것들을 눈으로 훑어보다 뜨끈뜨끈한 눈에서 손을 뗐다.

“난 이제 내려갈 거예요. 집에 간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

“뿌리를 캐러 갈 거예요.”

“뿌리….”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는 이예린을 마주 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이예린이 붙잡았다.

첫 만남에서 그랬듯. 잡힌 손을 흔들흔들 하며 물었다.

“그래서. 뭐 하는 건가요?”

“같이 가요.”

“…….”

“결국은 내 일이잖아요. 난… 아주 작은 뿌리조차 남기고 싶지 않아요.”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이예린을 쭉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거의 대롱거리듯 일어난 이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공주님이 내 일을 대신해 줘야 하는 의무는 없어요. 그리고 이건, 내 권리예요.”

“…그 상태로 말해 봤자 하나도 안 멋있는데요.”

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제야 제대로 자기 발로 서게 된 이예린이 눈꼬리엔 눈물을 달고, 활짝 웃으면서.

“데려갈 거죠?”

라고 묻는데. 어떻게 거절하나.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서 쪼르르 서 있던 꼬마 도깨비들은 손뼉을 짝 짝 쳤다.

빛이 꺼졌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를 그런 깜깜한 밤이 되었다.

***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결국은 나중에 잘못이 다 밝혀진다는 어진 속담이죠.”

그렇죠? 하고 묻는 내 말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으니 상관없었다.

덜덜 떨며 주저앉은 남자는 두려움을 담은 눈으로 나와 이예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옷 차림으로 한밤중에 자기 회사 회장실로 납치당한 천칭의 주인께선 내게서 멀어지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몸짓을 보며 나는 삐뚤어진 웃음을 지었다.

“너…, 너희,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줄 알아? 사람을 납치하고, 공격하고! 전직자가 민간인 공격하면―.”

“시끄러워요.”

“컥―!”

남자의 목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눈을 부릅뜬 남자에게 웃어 주며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유리 벽으로 끌고 갔다.

주세진 방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회사에 높으신 분들 방은 모두 통유리 벽이더라. 남자의 목을 잡지 않은 손으로 유리 벽을 두들겼다. 퉁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스스로 선다면 목이 졸리는 일도 없을 텐데.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생각을 못 하는 건지 남자는 제 목을 부여잡은 내 손만 간절하게 붙잡을 뿐 스스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한심한 꼴을 뒤에서 지켜보는 이예린의 눈은 깜깜한 어둠에 덮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쪽을 가만히 바라보다 두들기고 있던 유리 벽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며 유리 벽 하나를 살라 먹었다. 사납게 들이닥치는 바람에 멋대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발버둥이 심해진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살 자신 있어요? 난 있는데.”

“이거, 이거 놔!”

“에비. 에비.”

장난 삼아 남자를 뻥 뚫린 유리 너머로 몇 번 높이높이 시켜 주었다. 질질 끌리기라도 했던 다리가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경험을 한 남자는 이제 거의 울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만, 제발 그만!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뭘 잘못했는데?”

“…….”

답하지 못하고 눈만 굴리는 것을 보니 괜스레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런 문답은 원래 연인 간에나 하는 건데 말이다. 잘못이 명백한데 답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리는 무엇일까.

오기? 죄책감? 회피? 아니면 억울함?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몇 번 더 겁을 줘야 입을 열 생각이 들려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풀었다 반복했다. 그런 내 손 위로 다른 손이 겹쳐졌다.

“왜요?”

내 물음에 이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대화 좀 하고 싶어서요.”

“…….”

“금방 끝날 거예요.”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뭐. 손에서 힘을 풀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회장님.”

이예린이 남자를 불렀다. 남자는 그런 이예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허둥거리며 유리 벽에서 멀어지고자 하였다.

그런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던 나는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을 보고 헛웃음을 내뱉었고 이예린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손님맞이용으로 있는 소파 밑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린다 싶더니만.

남자가 내게 총을 들이 밀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제대로 쏠 수나 있나 싶었다. 지옥도라는 과정을 겪은 후 총기 소지에 대한 법이 모호해졌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총 갖고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깜깜한 방을 비추는 바깥의 야경이 제법 밝았다. 어찌나 밝은지 회장님 총이 어둠 속에서 반짝, 하고 빛날 정도였다.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하는 심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남자가 악을 쓰듯 외쳤다.

“너, 너 내가 주세진한테 연락해서 가만 안 둘 거야! 지금이 그때랑 같은 줄 알아? 너 같은 뒷배 없는 어린 것들 한 방에 보내는 거, 아무것도 아니야!”

“…….”

어디서 나온 배짱인가 했더니. 크게 착각하고 있었구나. 회장님께서 하시는 말이 이뤄지려면 일단 필요한 전제 조건이 있었다. 살아서 나가는 것. 그리고 그건 이뤄지지 못할 갈망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남자는 열심히 말했다. 정말 열심히.

“역시 주세진, 그 어린 자식이 문제야. 매일 사사건건 방해하더니 전직자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하고! 너랑 주세진, 둘 다 이 나라엔 발도 못 붙이게 해 주마!”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것 같은 눈을 보며 물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진심으로 그런 걸로 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미국에서 넘어온 신무기거든요. 괴물의 외피를 뚫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어요.”

내 물음에 답해 준 것은 이예린이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내심 놀랐다. 아주 조금이지만. 생각해 보니 들어 본 것 같기도 했다. 강유진이 말했던가?

미국에서 이상한 물건을 만들어 냈다고 했나? 아니면 이상한 물건이 나타났다고 했나. 설렁설렁 들은지라 정확한 대화가 생각나지 않았다. 총을 비롯한 무기류는 애시당초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저 총 하나 믿고 저렇게 기고만장하게 웃는 건가?

“괴물을 잡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못 잡을 것 같은데.”

“시끄러워!”

곧바로 급발진 하는 회장님께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예린에게 물었다.

“대화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딘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몰아붙인 회장님을 보고 있던 이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텅 빈 것 같은 얼굴이 거북했다. 조용한 방 안에 이예린이 걸음을 옮기는 발소리가 울렸다. 별이 제 몸을 파고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바오밥 나무에게 말을 걸었다.

“회장님.”

“가까이 오지 마!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 요새 말 안 듣고 헛짓거리한다 싶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언제 저에게 은혜를 입혔는데요?”

말이, 마치 목이 졸린 것 같았다.

“네가 입고, 먹고, 누린 모든 것들이 내가 해 준 거였어! 미친 인간을 남 부럽지 않은 자리에 앉혀 주고 이만큼 키워 줬으면 감사한 줄을 알아야지!”

“…하.”

손에 얼굴을 묻은 이예린이 떨리는 음성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일부러 내 앞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죽이고, 다시 그 사람의 이름을 단 사람을 내밀고. 매일, 매일 그렇게….”

“네가 잘 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정신 나간 계집애를 거뒀는데! 네가 제값만 했어도 아무도 안 죽었을 거다!”

“…….”

“넌 그 계약서에 도장 찍는 순간부터 내 소유였어! 사람들이랑 어울려 산다고? 네까짓 것들이 사람인 줄 알아? 괴물 취급 당하기 싫으면 얌전히 무기로서 있으란 말이야!”

철컹.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철과 철의 이음새가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남자가 히죽거리는 얼굴로 방아쇠에 손을 걸었다.

“건방진 것들…. 이래서 전직자 놈들을 함부로 돌아다니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문젯거리들한테는 목줄을 채워야지! 어떻게든 정신계 마법사를 데리고 와서―.”

“데리고 와서? 뭐 하게?”

내 물음과 동시에 뻣뻣한 로봇이 움직이는 것처럼, 남자의 팔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람과 공포로 커진 눈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격한 이처럼 덜덜 떨렸다.

기다란 병아리색 머리칼에 가려져 이예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그머니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남자의 주변에서 점점 세기를 높이고 있었다.

“뭐. 왜 그렇게 놀라? 그쪽이 찾던 정신계 마법사가 눈앞에 있잖아.”

내게 향했던 총구가 천천히 남자의 머리로 향했다.

“말, 말도 안 돼….”

“처음 보지? 내가 일반적인 정신계 마법사는 아니라서. 기억 조작이나 치료 쪽은 별로지만 환영 만들기와 세뇌는 잘하거든.”

나는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간절함을 담은 눈을 보며 웃어 주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총을 쥔 손을 내 손으로 덮어 주었다. 다정한 어조를 담아 입을 열었다.

“사인은 자살 어때? 사실 선택지는 없어. 어떻게 죽든 당신은 자살로 처리될 거야.”

“이, 이예린!”

“아. 계약서 믿고 부르는 거면 관두는 게 좋아요 회장님.”

이예린이 도장 쾅 찍었던 계약서는 평범한 종이가 아니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노예 계약서. 도망도, 그렇다고 눈앞에 이 남자를 죽일 수도 없게 만드는 목줄이었다.

그리고 이예린이 말 잘 듣는 정신나간 사람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을은 갑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하는 요상한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내가 그 계약서를 좀 살펴봤는데, 마법의 종류가 정신 계열이더라고요. 마법 계열 간의 힘 겨루기는 알죠? 같은 계열일 경우 더 강한 쪽이 이기는 거.”

이예린은 반쯤 내게 암시당하는 중이었다. 암시의 종류는 ‘자유’. 마음대로 움직일 것. 계약서의 암시, 회장의 명령을 들을지 듣지 않을지는 이예린의 선택이었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회장의 눈에 서서히 공포감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늘어지듯 천천히, 그리고 눈깜짝 할 사이에 빠르게.

“제…, 제발, 내가 잘못했으니까….”

“총으로 죽든. 저 우리 벽 너머로 뛰어내려서 죽든. 어쩃든 사인은 똑같을 거예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 오늘 있었던 일 전부! 이예린, 이예린이 쓴 계약서도 파기해 줄 테니까!”

“명백하게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정황이 있어도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천칭의 회장과 내 사이에는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자가 서로의 말을 하는 동상이몽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동상이몽에 빠져 있던 사람이 움직였다.

내 앞으로 튀어나온 손이 남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기다란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회장의 손에 들려 있던 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들에게서 물러나 소파에 앉았다. 이예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민간인과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한 힘임에도 회장은 몸을 늘어트릴 뿐이었다.

“이렇게 쉬운데. 계약서만 없었으면 진작에….”

과거를 되뇌어 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다. 몇 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같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다 그냥 눈을 감았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도 막았다. 어둠에 파묻혔다.

알 수 없는 시간들이 똑각똑각 지나가고. 살며시 눈을 떴다. 주저앉은 이예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차양 막 같은 긴 머리가 가려서. 어둠이 가려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이 아닌 그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들어야 할 사람은 이미 들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입을 열었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손안에 잡히는 묵직한 총구의 차가움을 쓰다듬었다.

“나쁜 짓을 하면 언젠가 밝혀진다는 말이지만.”

철컥. 철과 철이 움직이고.

“너만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하늘과 땅이 알아 봤자 뭐 할 건데.”

남자에게 총을 들이 밀었다.

“역사는 이긴 사람의 편. 그 진실도 정확히 모르잖아요. 하늘과 땅이 아는데.”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황금빛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늘. 천칭의 회장님은 자살한 거예요. 이유는 죄책감이 주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서라고 하죠. 이상하다고 느끼더라도 아무도 파헤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테니까. 천칭은 분해될 거고, 리블에 인수 합병 될 거예요. 사람 됨됨이 안 된 것들은 도망가거나 그 전에 잡혀가겠죠.”

“…….”

“…….”

침묵하는 이에린에게 더 이상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어딘가 조금 멍하고, 그냥, 그냥 그런 기분.

“…그때 그냥 죽일걸.”

나도 모르게 말이 툭 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둠에 묻혀도 이상하질 않을 아주 작은 말씨였다.

보랏빛, 하늘색이 뒤섞인 눈동자. 애시 브라운 머리. 새카맣고 화려한 나비 문신. 라일락의 향. 나비.

죽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보단, 나 스스로의 안위 때문에.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일어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남자는 왜 그날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다시 내 앞에 나타날 정도로 배짱 좋은 것일까, 아니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그도 아니면 무언가 노리는 것이 있는 걸까.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다음 날 모든 뉴스와 신문에는 천칭 회장의 부고가 실릴 것이다. 그리고 사안은 자살일 것이다. 누군가가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라 할지 모르지만.

결국 밝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시간에 흐름에 따라 이 사건은 묻힐 것이다.

“허무하죠?”

“…….”

“너무 쉽게 죽어서. 내가 겨우 이런 사람한테 질질 끌려다녔나 싶어서.”

“…….”

“원래 그래요. 그러니, 잊고 사는 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이제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결국은 묻고, 깜박하고, 망각할 테니까.

푸른 불이 빙빙 돌며 방 안에 피어올랐다. 불이 살라 먹어 뻥 뚫렸던 유리 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환상의 밤이 끝났다.

끝을 알리는 폭죽 소리가 탕, 하고 울리고 고약한 화약 냄새는 휘적거리는 손짓 몇 번에 저 멀리 날아갔다.

바닥에 총을 내려놓으려다가, 괜한 변덕심에 다시 들어 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상으로 끝나지 않았을 뜨거운 총구를 매만졌다.

총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을 맥없이 탁 풀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야 할 총은 살그머니 움직이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췄다. 어둠에 잡아먹히는 그것을 바라보다 이예린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예상대로 다음 날, 뉴스와 인터넷엔 온종일 천칭 회장의 부고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더는 제제와 압박을 할 사람이 없으니 천칭에 관련된 비리와 불법적 일들, 범죄에 관한 내용들이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모두가 눈치챘으면서, 잡아먹힐까 애써 모른 척했던 사실들. 죽은 이들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나온 이들에 대해서. 그런 일을 반년도 넘게 한 천칭에 대해서.

주가는 뚝 뚝 뚝, 떨어졌고 주세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인수 합병 기사를 훑어보다 시선을 끄는 다른 기사의 제목에 나는 비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자살인가.

총살로 판명된 천칭 회장의 죽음. 그런데 총은 어디 있는가. 그 기사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결국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조용히 묻혔다.

모두가 그 일을 잊었고, 이예린은 제 길드에 있던 이들 몇 명을 데리고 리블로 들어왔으며, 내 손안에 있는 총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천칭에 대한 기사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기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게 현실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