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는 만남의 장인가요
시선이 참 부담스럽다.
빨간 머리가 강렬한 친구가 참 열렬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시끌시끌 떠드는 다른 길드원들과 대조되는 시선이었다. 호의인지 그 반대인지 모호했다.
오정인과 이나연, 그리고 손민경 모두 신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박상호는 차마 말은 못 걸겠는지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손민호는 빨간 머리가 강렬한 친구, 김수혁을 보며 고개를 저었고 이호연은 내 옆에 앉아 꼬리를 살랑거렸다.
“수혁이 빼고 다 한 번씩은 봤지?”
주세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세진이 멀찍이 서서 삐죽거리는 김수혁의 등을 밀어, 내 앞에 세웠다.
“모두 다 알겠지만 류다.”
“본명은 유하연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김수혁.”
“…….”
“인사해야지.”
주세진의 재촉에 골난 표정을 짓던 김수혁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날 싫어하나? 그런데 싫어한다기엔 뭔가… 느낌이 다른데. 짐작 가는 구석은 있었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주세진은 그런 김수혁의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숨만 내쉬고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나연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공주님, 이제 진짜 우리 길드예요?”
“네…. 그리고 그 공주님 소리―.”
“호연이랑 사귀나요?”
“어…. 네, 근데….”
“잘 어울려요!”
텐션을 못 따라잡겠어. 차례대로 이나연, 손민경, 오정인의 질문이었다.
“그럼 류 님도 이제 닉네임 우리처럼 바꾸나요?”
그거 못 바꾸지 않나? 오정인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바꾸면 좋겠어요?”
“아뇨! 류가 더 멋져요! 하지만 만약 바꾼다면 제가 지어 드리겠습니다!”
오정인 닉네임이 뭐였지. ‘사람을화나게하는방법중하나는’이었지.
“뭐라고 지을 거예요?”
“닉네임을지어주세요.”
“네?”
“닉네임을지어주세요.”
“…….”
리블 입사 기준에 닉네임 장인이 있나. 참 다들… 개성 넘치네.
분명 처음 이 만남의 의도는 길드원들, 그중에서도 하늘 조각을 공략하는 공략대들과의 인사치레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친목 도모가 돼 버렸다. 미친 하이 텐션이었다.
유일하게 이 상황과 동떨어진 김수혁은 혼자 씩씩거리나 싶더니 갑자기 내 옆에 앉아 있던 이호연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야! 너는 친구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눈을 깜박이며 이호연을 봤지만, 이호연은 귀찮음과 나른함을 담을 얼굴로 시큰둥하게 김수혁을 볼 뿐이었다.
다른 길드원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그런 그 둘을 구경했다. 오정인과 이나연이 ‘싸워라, 싸워라’ 손뼉을 치는 것을 애써 못 본 척하고 김수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너는, 내가 우리 집 비번도 알려 줬는데 어떻게!”
“비번?”
그걸 왜 알려 줘? 그런 눈으로 이호연을 보니 이호연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영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전 안 알려 줬어요. 비번.”
아니, 그게 무슨 뜻인데. 나만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인지 다른 길드원들은 이호연의 말에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김수혁은 바닥을 쾅쾅 밟으며 소리쳤다.
“넌 내가…, 내가!”
검붉은 눈동자가 날 향했다. 씩씩거리던 김수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류랑 사귈 생각을 해!!”
원인은 나인가요? 치정 싸움에 끼어든 기분으로 이호연에게 물었다.
“혹시 나 삼각관계에 끼어 있어?”
내 말에 김수혁이 붉은 불티를 흩뿌리며 달려나갔다. 길드원들은 거의 눈물을 흐느끼는 수준으로 웃기 시작했다. 이호연은 불만스레 꼬리를 탁탁 치며 내 손을 잡았다. 주세진은 한숨을 내뱉곤 김수혁 잡아 오겠다며 나갔다.
내 손에 깍지를 끼는 이호연을 보다 주저앉아 낄낄거리는 오정인에게 물었다.
“김수혁이 이호연 좋아해요?”
“그게 무슨….”
이호연이 굉장히 당황스럽고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봤다. 오정인과 이나연은 이제 거의 호흡곤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웃었다.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손민경이 내게 말했다.
“헉…. 끕…. 그게, 흡, 삼각관계가 맞긴 맞는데, 작대기 방향이 틀렸어요.”
“김수혁이 이호연한테 자기 집 비번 알려 줬다길래.”
드라마급 전개가 있었나 했지. 이호연이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절대 아니에요! 걔는 그냥 친구예요!”
그거참, 전형적인 바람피우는 드라마 주인공 같은 대사다.
“수혁이가 좋아하는 쪽은, 호연이가 아니라 그쪽이랍니다.”
손민호가 소파에 손을 얹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이호연이 신경질적인 손길로 그런 손민호를 밀어냈다.
“저 못된 호랑이.”
손민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좋아하는 쪽이 내 쪽이라고? 의문을 담아 손민호를 보니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본인은 인정 안 하지만. 그리고 수혁이에게 류 님은 라이벌이자…, 연적?”
“그게 뭔….”
“수혁이가 그쪽을 좋아하긴 하는데, 호연이도 참 좋아하거든요. 물론 친구의 의미긴 합니다.”
그래서 비번 알려 줬다는 건가? 근데 이호연은….
“?”
“너는 비번 안 알려 줬어?”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호연이 내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53719.”
김수혁에게 미안하게도 호랑이는 특정 사람에게만 참 쉬운 개냥이였다.
***
주세진에게 질질 끌려온 김수혁은 억울함을 가득 담은 울망이는 눈으로 이호연에게 말했다.
“너는… 진짜…. 어떻게 나랑 친구면서…. 내가 류…. 끄읍… .”
울어?
놀란 마음으로 김수혁을 봤는데 놀란 건 나뿐인지 이호연은 태연했고 나머지 길드원들은 옆에서 “야, 우냐? 울어?” 하며 깐족거리고 있었다. 주세진은 포기한 얼굴이었다. 피곤해 보였다.
“저기.”
내 부름에 저를 놀리는 길드원들 머리를 밀치고 있던 김수혁이 나를 돌아봤다. ‘화염의’ 마법사라는 전직 명에 잘 어울리는 붉은 계열의 외모였다. 검붉은 눈동자가 도르륵 도르륵 굴러가다 나와 눈을 맞췄다.
“저 싫어요?”
“…….”
“응?”
“몰라요!”
삼각관계의 작대기가 내 쪽이라는 손민경과 손민호 남매의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스스로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한다는 건 그렇다 치고, 제일 좋아하는 친구를 빼앗긴 마음으로 나를 적대하는 것도 그렇다 치고.
우리 초면 아닌가? 어디서 보고 날 좋아한다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수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옛날에 본 적이 있…나? 그런 나를 이호연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을 꾹 잡아 시선을 끌었다.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질투 나?”
“네.”
고민 없는 즉답이었다. 몇몇 길드원들은 야유를 보냈고 몇몇은 환호를 보냈다. 왜 주세진이 공략대 멤버로 회의 안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만들 하고. 류랑 호연이는 나 따라와.”
손을 붕붕 흔드는 공략대 멤버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 주세진을 따라갔다. 솔직히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다들 친절하네요.”
정신이 없긴 했지만. 뭐. 재미도 있고.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나 좋은 것도 같고. 오랜만에 친구를 사귀는 기분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소파에 이호연과 자리를 잡았다. 주세진이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계약금이랑 월급, 공략대로 하늘 조각에 들어갔을 경우 그 안에서 발생하는 수익에 대한 비율, 그 외 길드에서 지원해 주는 책정 지원금. 4대 보험이랑, 복지 시스템 설명. 그리고… .”
계약서를 짚으며 설명해 주는 주세진의 손끝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실 다 흘려들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주세진이 한숨을 내쉬곤 내게 계약서를 안겨 주었다.
“들고 가서 부모님이랑 천천히 보고 갖고 와.”
“네.”
“부모님은 별말씀 없었어? 휴학이랑 길드에 소속된 것에 대해서.”
휴학과 동시에 리블 길드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보받은 부모님은 의외로 별 반응이 없으셨다. 취업난인 요즘 일찍 취직해서 좋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다. 애써 가볍게 말하면서도 걱정의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시는지 대강 알고 계시거든요.”
더는 평범한 민간인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두 분도 모르진 않았다. 평범한 딸로 남고 싶었는데. 나도 부모님도 더 이상의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이미 판이 돌아가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죠, 뭐. 이렇게 된 거 돈이나 많이 벌어 호강시켜드려야지.”
“…….”
주세진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전혀 잘못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주세진을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월급 많이 주세요.”
행복 팔아 돈 벌고, 돈 써서 행복 사는 시대인데, 돈 버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주세진은 그런 내 말에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계약서가 구겨지지 않게 따로 파일에 넣어 돌려준 주세진이 우리 앞에 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뭐야?”
“판을 키우고 싶어요.”
내 말에 내 옆에 앉아 있던 이호연도 내 앞에 앉은 주세진도 멈칫거렸다. 그런 둘을 보면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미국의 학자가 날 데리고 와 달라고 했죠. 나는 본격적인 활동을 할 것이라는 걸 길드에 소속되는 것으로 알렸고요. 미국의 정부는 한국의 정부가 아닌 리블 길드 자체에 접촉하려고 들 거예요. 그렇죠?”
“맞아. 네가 신데렐라 찾는다는 글에 댓글 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로 연락이 왔지.”
신데렐라….
“어쨌든, 원래 힘의 차이는 돈과 정보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세계의 비밀이라는 스케일 큰 정보를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의 수뇌부와 나누고 싶을 리가 없어요. 차라리 국가 대 길드 차원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 낫지.”
주세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국가 대 국가보단 국가 대 길드가 그들에겐 더 쉬워 보일 것이다. 거래 상대가 국가가 아닌 길드라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할 수는 있지만, 더 압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주세진이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도 한국의 정부를 완전히 이겨 먹지는 못했다. 상대가 미국의 정부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다. 그들이 주세진에게 일방적으로 나를 보내라고 요구한다면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미국 학자의 입이 열리는 순간 정보 독식을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세계적 위기를 대처하겠다며 전 세계에 알리는 도덕적 인사들이 아닐 테니까. 남의 나라 망하는 게 중요하겠는가, 본인들 나라 살리는 게 중요하겠는가.
정보란 그런 거였다. 위기 속에서 그나마 살기 편한 방도를 찾을 수 있는 것. 전 세계가 물에 잠긴다는 정보를 갖게 된다면 식량과 구호 물품을 먼저 챙길 수 있는 것.
아무리 잘나가도 일개 길드. 상대가 국가면 져 주는 게 아니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런 치사한 방법을 사용하는 대상을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예 판을 키워야 한다. 찍어 누를 수 있는 일개 길드가 아니라 국가라 해도 찍어 누를 수 없는 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정보는 독점적일 때 가치가 있죠. 하지만 이번 정보의 가치는 독점하지 못한다고 버릴 수 있는 그저 그런 정보가 아니에요.”
무려 세계의 비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타났는걸.
“판을 키워요. 미국의 학자를 만날 거예요. 단. 학자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를 전 세계 모든 국가에게 알릴 것. 내가 미국 학자와 만나는 것은 모든 나라의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일 것.”
“미국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거예요. 처음 말한 것은 제안. 그리고 이제 거래에 대해 말해야죠.”
제안의 의도는 미국이 나를 포함한 리블 길드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거였다. 그럼 그들이 내 제안, 안전장치를 받아들일 거래도 제시해야지.
“내가 보기에는 말이죠. 테오그라젠스보다 중요한 정보가 나비와 푸른 불꽃인 것 같거든요.”
나비와 푸른 불꽃은 테오그라젠스의 낙원을 열 존재. 어찌 보면 테오그라젠스 이전에 먼저 풀어야 할 숙제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겐 남들은 모르는 정보가 하나 더 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정보가 있죠. 테오그라젠스와 동급의 또 다른 존재.”
랑. 나의 전직관. 그리고 높은 확률로 나에게만 왔을 또 다른 하나, 테오그라젠스가 아닌 존재가 보낸 시스템 메시지 창.
“전 세계에 알리는 것과 알리지 않을 것에 대한 정보의 양에 대한 차이를 두면 돼요. 미국 학자가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푸른 불꽃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죠.”
그렇지 않으면 나를 불러 달라고 한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머리 좋기로 유명한 총사령관님은 내 의도를 금세 알아차렸다.
“미국의 학자가 푸른 불꽃만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끼리만 아는 것으로 만들고.”
“대신 테오그라젠스에 대한 정보를 넘기겠다는 거군. 전 세계에 알리는 정보로.”
“만약 둘 다 알고 있다면 그땐 또 다른 ‘하나’에 대한 정보를 던져 주면 돼요.”
그것까지는 알지 못할 테니까. 아주 어쩌면 상대가 그 정보마저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테오그라젠스가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까지는 모를 거다.
“가능한가요?”
내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했던 주세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안심되면서도 조금 미안했다. 판을 벌이는데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미국만이 아닐 테니까. 당장 정부랑도 합의를 봐야 할 테고.
괜히 이야기했나.
머뭇거리는 나를 본 주세진이 내 손과 이호연의 손을 잡더니 서로 잡게 했다. 얼떨결에 잡은 이호연의 손을 보다 주세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
“애들은 이제 나가서 놀아. 이제 어른들이 해결할 문제니까.”
“저 성인….”
“나가.”
어라.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문밖으로 쫓겨났다. 황당함에 이호연을 돌아봤지만, 이호연은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원래 이래?”
“복잡한 일로 본격적으로 넘어가면 원래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
“…….”
참 주세진답다. 한 손에는 이호연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계약서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일을 벌인 건 나인데 그 뒷수습을 해 주는 건 주세진이었다. 힘들면 안 해도 되는데.
“힘들겠지?”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어요.”
“?”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답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이호연이 ‘혼자 살아가요’ 타입인 나는 알 수 없었던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몇 번 얘기가 나온 적은 있어요. 전직자는 이제 각국의 새로운 경제의 기폭제이자 군사력이기도 하잖아요. 국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나라에 어떤 전직자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있었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저 말을 하는 이들의 생각의 기반에는 전직자를 사람이 아닌 ‘무기’로 보는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 국력, 군사력. 사람에게 쓰기엔 적절한 단어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각국의 대표 격인 전직자들은 대부분 평화를 원하지 본인들이 나서서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싸우는 게 이젠 싫을 테니까.”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들은 싸울 의사가 없다는 의미로 타국의 전직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이들도 생겼어요. 하지만 그건 나라의 불안감을 조성했죠. 강한 전직자를 타국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경매도 하겠네.
“세진이 형은 아마… 한국의 정부도 미국의 정부도 아닌 아예 제삼자인 다른 국가에 먼저 이야기를 흘릴 거예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내가 말한 판을 벌이는 방식은 전 세계 모든 대표들을 불러 그 앞에서 미국 학자의 입을 여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인사들을 끌어들이면서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방법.
생각할 줄 알고 이미 싸우는 것에 질린 전직자들은 타국의 전직자들과 평화의 의미로 친분을 다지고, 각국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타국 전직자와의 끈을 만들어 두면서도 자국의 전직자들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지 않게 감시할 수도 있었다.
감시 대상이자 친선, 혹은 기선제압용의 의미로겠지만 동시에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좋게 받아들일까?
걱정을 담아 이호연에게 물었다.
“그래도 돼?”
“될 거예요. 미국의 학자 이야기는 빼고. 모든 국가가 만족스러워할 제의를 하겠죠. 미국이 류가 말한 제의와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응.”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하나였다. 주세진의 행태에 불만을 품은 미국이 암살자라도 보내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 시대에 안 맞는 발상이었지만 지금 시대에 불가능한 발상도 아니었다.
내 걱정거리가 무엇인지 눈치챘는지 이호연이 내게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세진이 형은 후방, 지휘 계열이지만 약하진 않아요. 형의 전직관은 중세 시대 총사령관이거든요.”
“?”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의아함을 담아 그를 보자 이호연은 부가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중세 시대 전장의 지휘자잖아요. 기본적으로 자기 몸 지킬 정도로 강하기도 하고…. 그리고 원래 군의 상사는 기합 주는 사람이라 약하지 않아요.”
라고 제대한 이호연이 말했다.
“그럼… 다행이지만.”
적어도 암살당할 걱정은 없겠네. 이호연이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저번에 못 했던 사옥 구경을 마저 해도 되고.”
그의 말에서 지금 당장의 고민을 머릿속에서 지우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끼 부리는 고양이처럼 구는 이호연과 눈을 맞췄다. 깍지 낀 손을 휙 잡아당기니 이호연이 쭉 끌려왔다. 시야에 하얀 머리칼과 호랑이 귀가 보였다.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이호연의 뺨을 잡고 반대쪽 뺨에 입을 맞췄다.
“너랑 놀래.”
“…….”
“나랑 놀자.”
나는 답정너지. 이호연이 해야 할 대답은 하나다.
“…네.
***
리블의 자랑인 사내 식당을 처음 본 내 소감은 딱 하나였다.
미쳤다.
이호연과 실컷 놀고 사옥 내 옥상 정원이며 직원 전용 기숙사 구경도 질리게 한 다음 우리는 사내 식당으로 내려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슬슬 배가 고팠다.
아직도 열감이 남아 불그스름한 귀를 한 번, 그와 대조되는 새하얀 호랑이 귀를 한 번 보고 웃음을 흘렸다. 내 웃음소리에 이호연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을 담은 눈을 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리블의 사내 식당은 식당이 아니라 어느 호텔의 뷔페에 가까웠다. 테이블과 의자는 초중고 급식실과 비슷했지만.
접시를 들고 이호연과 함께 음식을 담았다. 젓가락 갈 곳이 없어 고민했던 과거의 급식이 아닌 어디부터 젓가락질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음식들이었다.
간신히 음식을 골라 앉아 냠냠 먹었다. 그림자에서 뿅뿅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들이 음식이 놓인 테이블 위를 걸어 다니며 하나씩 꺼내 먹는 것이 보였다.
지나가던 리블 사원들이 그런 깨비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꼬마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른 깨비들과 달리 내 옆에 찰싹 붙은 검은 가면의 깨비에게 고기 조각을 쥐여 주며 말했다.
“맛있다. 천칭 길드가 와서 먹고 간다는 소문 진짜인가 싶을 정도야.”
“그거 진짜예요.”
응?
의문을 담아 이호연을 보니 이호연은 내 입 속으로 고기 조각을 넣어 주며 내 뒤쪽을 가리켰다. 입 안에 들어온 음식을 삼키며 뒤를 보니 왜 못 봤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병아리 빛깔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보였다.
“…천칭 길마 아니야?”
“맞아요.”
다시 뒤를 돌아 여자를 확인했다. 굽실거리는 화려한 병아리색 머리. 옆에 앉은 리블의 사원인지 천칭의 길드원인지 모르겠는 남자의 등을 짝짝 때리며 깔깔거리는 여자는 아무리 봐도 이예린이 맞았다.
닉네임은몇글자까지되는줄알아열아홉글자. 글자 수를 어떻게 맞췄는지 궁금한 닉네임을 가진 천칭의 길마. 마법 계열의 끝판왕. 별명이 전체 연령 불가 마법 소녀신 분이 왜 여기 있는 걸까.
“왜 여기 있어?”
“원래 자주 와요. 본인들 사내 식당 음식 별로면 여기 와서 먹고 가거든요.”
그게 뭐야. 우리 학교 급식 맛없어서 남에 학교 가서 급식 먹는 학생도 아니고.
어이없어하는 나를 본 이호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제 접시에 있던 음식을 또 먹여 주었다. 치즈를 돌돌 만 감자 요리였다. 맛있었다.
“샐러드?”
“야채는 별로.”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이호연은 부드러운 달걀 요리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나는 이호연을 흘겨보았다. 계란 안에 야채가 있었다.
“편식은 나빠요.”
“…….”
음식을 삼키며 생각했다. 천칭과 리블은 경쟁 길드긴 한데 생각해 보면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저번 사태 때 협력도 하고 이예린 자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깐. 문제는 천칭을 운영하는 그쪽 회사지.
천칭은 리블처럼 하나의 기업이 아니었다. 일종의 계열사로, 모회사가 있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길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회사의 높으신 분이 리블을 이기고 싶어 혈안이 되었지.
내가 생각하는 와중에도 이호연은 내 입으로 열심히 음식을 나르는 중이었다. 자세히 보니 접시의 음식이 이호연의 취향이 아니라 내 취향이었다.
“나는 그만 먹이고 너도 먹어.”
“먹고 있어요.”
또. 예쁘게 돌돌 만 파스타를 받아먹으며 포크를 들었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를 콕 찍어 이호연에게 내밀었다. 그런 내 행동에 잠시 멈칫거리더니 조심히 받아먹는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하얀 꼬리가 살랑이는 것을 보며 이호연에게 계속 음식을 내밀었다. 주는 족족 잘 받아먹으면서 이호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류, 저는 그만 주고….”
“먹고 있어.”
“…….”
자기가 한 말을 따라 하는 나를 밉지 않게 흘겨보는 호랑이에게 웃어 주었다. 그런 우리를 멀뚱멀뚱 구경하던 꼬마 도깨비가 내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너도 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깨비가 소리를 냈다면 앗! 소리를 냈을 것처럼 폴짝 뛰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작은 손을 파닥이며 뒤쪽을 가리키는 손짓에 이호연과 함께 그곳을 돌아보았다. 이예린에게 등을 맞고 있었던 남자가 김수혁과 멱살을 사이좋게 잡고 있었다.
응?
“뭐야?”
왜 싸워? 당황하는 내게 답을 준 것은 내 옆에 음식을 가득 담은 접시를 내려놓으며 앉은 이나연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가끔 저래요. 아, 여기 앉아도 되나요, 공주님?”
“앉으세요. 공주님이라고 부르지는 말고. 그런데 원래 저런다고요?”
내 말에 입 안 가득 볶음밥을 넣으며 이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즈들이 을래 자즈 그르는데―.”
“다 씹고 말하세요.”
이나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공략대 멤버들도 음식을 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신기한 것은 아무도 안 말린다는 거였다. 불을 뿜어내기 시작한 김수혁도, 검을 뽑는 남자도,
“…….”
별일 아닌가 보네. 생각해 보니까 전직자끼리 싸울 수도 있지, 뭐.
나는 그들에게 빠르게 관심을 끊고 역시나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이호연에게 음식을 다시 내밀었다. 제 친구가 싸우는 것을 봤을 때보다 내 행동에 더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재미있었다.
“연애는 나가서 해 주세요.”
손민호가 이호연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의 뒤로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에 자리를 잡은 공략대들은 금세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류 님, 음식 맛있죠!”
“디저트도 맛있어요.”
“호연아, 내숭 떨지 마. 평소처럼 하렴.”
“형, 낯설다. 평소처럼 해. 소름 돋아.”
“조용히 해.”
깐족거리는 손민호와 박상호의 입에 빵을 넣어 주는 이호연을 보며 오정인에게 물었다.
“내숭?”
내 말에 세 남자를 쭉 훑어본 오정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차별.”
김수혁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던 비번 같은 건가. 수긍하며 이호연에게 다시 음식을 내밀었다. 빵에 입이 막혔음에도 손민호와 박상호가 옆에서 온몸으로 깐족거렸다.
그런 그들을 짜증스레 보던 이호연이 내가 내민 것을 받아먹었다. 남들 보는 앞이라고 안 받아먹을 줄 알았는데.
“연애하니까 좋냐? 좋아? 어?”
“형이 그러니까 연애 못 하는 거야.”
“…….”
깐족거리던 손민호를 패배 시킨 이호연이 내게 음식을 내밀었다. 사이좋게 받아먹는 우리의 모습에 박상호가 굉장히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자리 비켜 드릴까요?”
“응.”
“?”
지금 대답은 내가 한 거 아닌데. 이호연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내 위쪽으로 향했다. 가느다란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내 눈앞에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위로 올리니 내 머리 위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예린의 황금색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차양 막처럼 드리워진 노란 실타래를 한 손으로 잡아 치우며 말했다.
“왜요?”
“안녕.”
황금색 눈이 번뜩였다.
“…….”
얼굴을 마주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천칭의 길마 이예린의 마법사적 육감은, 그날그날 사내 식당 메뉴가 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리고.
“13개의 별이 내게 말했어.”
이것은 커넥터 자게에 떠돌던 찌라시. 천칭의 길마 이예린은 예언가이다. 그 찌라시를 증명하듯 기이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을 들이밀며 이예린이 말했다.
“너, 상실을 겪겠구나.”
“저주?”
“아니, 예언.”
트릴로니 교수 같으신데요.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눈을 깜박였다. 계속 마주 보고 있으려니 눈이 아팠다.
이예린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호연이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멱살잡이하며 놀고 있던 김수혁과 이름 모를 남자. 리블의 공략대를 비롯한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예린에게서 시작된 황금빛 기류가 번쩍거리며 우리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 효과가 장난 아니었다.
“…….”
내 인생. 왜 잠잠하지 못하는 걸까.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예린이 어깨에 올린 손 중 하나를 움직였다. 어깨를 타고 팔을 쭉 이어 내려온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깍지 껴 내 손을 얽어매더니 손을 끌고 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이호연급 플러팅이었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기요. 뭐 하는 거예요?”
우리 호랑이 눈 뒤집혔어요, 언니. 우득거리며 테이블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연이 쥐고 있던 부분이 박살 나는 소리였다.
저에게 향하는 살기를 느꼈음에도 이예린은 눈을 휘며 웃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지켜보고 있으려니 김수혁과 놀고 있던 남자가 뛰어와 이예린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길마님, 왜 그래요! 여기서 사고 안 치는 조건으로 밥 먹으러 와도 된다고 허락받은 거잖아요!”
멱살 잡는 건 사고 치는 게 아닌가?
“이거 놔 봐.”
“길마님!”
“놓으렴.”
이예린이 손을 휘저었다. 황금빛 기류가 뭉쳐지더니 반짝반짝 별님 모형이 튀어나왔다. 천칭의 길드원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언제 매달렸냐는 듯 다섯 발자국 하고도 일곱 발자국 더 멀어진 남자가 멀리서 소심하게 외쳤다.
“사고 치지 마세요.”
퍽이나. 둥실거리는 별님 모형을 붙잡으려는 손을 잡아챘다. 이걸로 쎄쎄쎄 양손 다 마주 잡은 것이 되었다.
“뭐 하는 건지 이제 대답 좀 해 주실래요?”
톡. 손등을 두들기는 작은 소리를 신호로 푸른 도깨비불이 피어올랐다. 푸른 불꽃이 별을 잡아먹었다. 황금빛 기류를 불태워 버렸다.
기름을 따라가듯 길게 이어지는 푸름을 훑어본 황금색 눈동자가 웃음기를 담았다.
“불장난 좋아해요?”
“안 좋아하는데요.”
“그래?”
“네.”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앗!”
“힘쓰는 걸 더 좋아해서요.”
테이블 위로 엎어치기 당한 이예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포크와 수저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접시를 들고 벌떡 일어난 공략대들이 아니었다면 골 아파졌을 것이다.
음식을 입에 넣으며 오정인이 말했다.
“와.”
“‘와.’가 아니잖아!”
그런 오정인을 타박하며 손민호가 제 접시 안에 음식을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엔 둘이 똑같았다.
테이블 위로 널브러진 이예린은 눈을 끔벅거리다 깔깔 웃기 시작했다. 천칭의 길드원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그런 이예린을 보며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망했어! 이제 여기 못 와!”
길마보다 맛있는 밥이 더 중요한 듯했다.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던 이예린이 머리를 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략대가 아닌 일반 사원인 리블의 직원이 어딘가로 연락을 넣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다 엎어지면서도 끝까지 놓치지 않은 손 한쪽을 흔들며 물었다.
“그래서. 뭐 하는 건가요.”
“예언.”
이예린 또한 마주 잡은 손을 흔들거렸다. 예언가라는 찌라시가 진짜였나 보다. 그런 종류의 전직자도 있었나. 신기하네. 하긴 학자도 있는데 그럴 수 있지.
“안 놀라네? 예언가 본 적 있어요?”
“저보다 특이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요. 동양 판타지 본 적 있으세요?”
“놉.”
단호하게 말하며 이예린이 웃었다. 그런 그녀의 뒤쪽에서 이호연이 사나운 눈빛으로 이예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적의였다.
제 뒤를 살피는 나를 본 이예린이 말했다.
“호랑이가 나를 좀 싫어하거든. 내가 옛날에 조금 안 좋은 예언을 해서.”
“검은 개를 만난다고 했어요?”
“아뇨, 아뇨. 죽을 거라고 안 했어. 너 한번 죽었다고는 했지.”
“…….”
그게 더 기분 나쁜데요.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예린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상실의 겪는다고 하던데. 안 좋은 예언이에요?”
“예언 중에 좋은 예언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것도 그렇네.
“예언을 들으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피할 수 있나요?”
“아뇨. 그럼 예언이 아니지. 예언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을 미리 말하는 것뿐이랍니다. 공주님.”
“그럼.”
탁, 소리가 나며 이예린릐 손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빛이 사그라지는 황금색 눈을 보며 웃었다.
“나는 매는 나중에 맞자는 주의라서. 지금도 골 아픈 인생 더 머리 아파지고 싶지는 않네요.”
쳐 내진 제 손을 끔벅거리며 보던 이예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뉘 집 호랑이랑 똑같네.”
이호연도 같은 선택을 했나? 의문을 담아 이호연을 보니 그는 노골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고자 했다. 이호연은 나중에 살살 꼬셔서 물어보면 되고.
저 멀리서 걸어오는 주세진을 구원자 보듯 쳐다보는 리블의 일반 사원들을 보며 이예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하려던 예언은 뭐였어요?”
“안 듣는다면서요?”
“난 안 들을 건데 걱정 많아 사서 고생하시는 분은 들으려고 할 거라서.”
“아하.”
테이블에서 낑낑거리며 내려온 이예린이 내게 말했다.
“몰라요.”
“?”
“진짜 몰라요. 연결 끊기기 전에 말해야 세이프라. 이렇게 끊어지면 하려던 예언은 까먹어요.”
“전부 다?”
“예언은 꿈 같은 거라서. 원래 아무리 선명한 꿈을 꿔도 계속 되뇌지 않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잖아요.”
결국 이예린 본인도 하려던 예언이 뭔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럼 됐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사람이 더 골치 아플 일 없으면.
“근데 왜 그쪽 길드원이 멱살 잡을 땐 아무도 안 말리는데 그쪽이 나한테 말 거는 건 기겁을 해요?”
내 질문에 이예린이 빙그레 웃으며 제 길드원을 가르쳤다.
“저기는 쪼렙.”
그리고 나와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는 고렙. 똑같이 사고 쳐도 수준이 다르죠.”
주먹질 한 번에 벽에 구멍 하나를 내냐 벽 전체를 무너트리냐에 차이인가. 얼떨결에 쪼렙 취급을 당한 길드원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잡담을 나누는 사이 우리 앞에 당도한 주세진이 이예린에게 말했다.
“사고 치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을 텐데요.”
“사고 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사고가 날 쫓아온 거죠. 알다시피 예언이 발동하면 내 몸은 반쯤은 내 몸이 아니라서.”
“…….”
“한 번만 봐주세요, 리블의 길드장님. 우리 자주 봐야 할 사이인데 겨우 이런 일로 얼굴 붉히기는 그렇잖아요.”
자주 봐야 할 사이? 의문을 담아 주세진을 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공략대 길드원 모두에게.
어디선가 새로 갖고 온 포크로 음식을 찍어 먹던 길드원들이 의문을 담아 주세진을 봤지만 주세진은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접시를 두고 주세진을 쫓아가는 공략대 멤버들 뒤로 드디어 평화롭게 식사할 수 있게 된 리블의 일반 사원들이 환호성을 내뱉었다. 이호연은 여전히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 있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뭐려나.
주세진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응접실처럼 꾸며진 아늑한 방 안이었다. 리블의 길드장인 주세진과 천칭의 길드장인 이예린이 1인용 소파에 마주 보는 상태로 앉고 나머지는 긴 소파에 앉았다.
유일하게 남의 길드인 남자는 얼떨결에 김수혁 옆에 앉게 됐는데, 하필이면 아까 멱살잡이하면 놀아서 그런지 둘이 굉장히 어색한 모습으로 서로를 불편해했다.
일부러 그렇게 앉혔을 다른 공략대들은 진지한 척하는 얼굴로 주세진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그런 그들 중 손민호가 대표로 주세진에게 물었다.
“왜 천칭 길마님과 자주 보는 사이인가요, 길드장님. 혹시 두분이 사귀나요?”
손민경이 제 오빠의 옆구리를 때렸다. 공격형 힐러라면서 방어력은 평범한지 손민호는 바들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남매의 헛짓거리를 지켜보던 주세진이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 게이트 안에서 나오는 괴물들이 전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걸 다들 느꼈을 거야. 너희가 변형 게이트 안에 들어가고 난 다음부터 생긴 변화지.”
확실히. 저번 사태에서 이호연과 함께 돌아다니며 괴물들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한테는 그게 그거이긴 했지만 평범한 전직자들에게는 그 변화가 극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에게는 병아리와 중닭의 차이라면 남들에게는 병아리와 고추장 먹은 쌈닭의 차이 정도?
그 차이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있는데 이예린이 손뼉을 짝 치며 시선을 끌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말할게요.”
여러 쌍의 눈동자가 저에게 향함에도 이예린은 긴장감 하나 없이 생글생글 웃었다. 너무 티 없는 웃음이라 그런가. 웃는 낯이 묘하게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이예린이 하는 말은 그런 그녀의 웃음만큼이나 뭐 하나 숨기는 것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솔직함을 가장한 얕은 거짓이 섞여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솔직하게 말하면요. 더 강해진 괴물들을 상대하는데 우리 길드의 전략은 부족해요. 우린 질보다 양을 선택한 길드라서 강한 전직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슬 한계점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예린의 말을 들으며 의문이 생겼다. 이예린의 말은 천칭과 리블이 상호 협의 간에 함께 공략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어조였다. 하지만. 천칭이 리블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텐데.
내부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나도 아는 것을 원래부터 내부인이었던 공략대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이나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예린에게 물었다.
“천칭에서 그 사실을 수긍했어요? 그러니까 길드장님 말고…, 그….”
이예린은 천칭의 길드장이지만 경영권이 없었다. 즉, 얼굴마담 겸 바지 사장이었다. 경영을 하는 것은 이예린이 아닌 천칭을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의 수뇌부들. 그리고 그들은 절대 리블에게, 주세진에게 먼저 고개 숙일 사람들이 아니었다.
“높으신 분들이야, 뭐. 본인들 자존심이 중요하지 우리 목숨이 중요하겠어요. 그리고 우리 애들이 그렇게 구하기 힘든 상품도 아니니….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용케 여기 왔네요. 이런 제안 하는 걸 알면 여기 못 오게 했을 텐데.”
내 말에 이예린이 자랑하듯 말했다.
“여기 밥 먹으러 많이 왔다 갔다 했더니 또 밥 먹으러 가는 줄 알고 안 잡았거든요.”
얼마나 많이 왔었던 거야. 이예린은 히히 웃으며 주세진에게 말했다.
“아무튼,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 우리 애들이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걸 원하지 않거든요. 이름뿐이지만 나름 내가 길드장인데, 이런 거라도 해야죠.”
“…이런 제안을 한 것에 대해 본인에게는 해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쪽 어르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생글생글 웃는 이예린에게 주세진이 물었다. 이예린을 볼 때의 주세진의 얼굴은 뭐랄까, 나나 이호연을 볼 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정확히는 지옥도 당시의 나를 보던 그의 얼굴.
몹쓸 짓 하는 아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얼굴 말이다. 그런 내 감상과는 별개로 이예린의 어조는 상당히 밝았다.
“그럼요. 괜찮아요. 그 어르신들에겐 저는 오래오래 사용할 명품이거든요. 잘 싸워, 강해, 거기다가 예언으로 주식 투자도 가능해. 겨우 한 번 멋대로 굴었다고 뭐라 하지는 못한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천칭 소속의 남자가 밝게 웃는 이예린을 불편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참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게이트 안에 들어가는 장본인인 여러분께 제가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따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본의 아니게 공주님과 사고를 쳤지만요.”
“괜찮아요. 재미있었어요,”
“고마워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하는 이예린에게 마주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류’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
“사진을 봤다고 해도 그렇게 바로 알아볼 정도는 아닌데.”
“아. 들켰다.”
이예린이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 웃으며 말했다.
“그것에 대해선, 우리 둘이서 대화를 하면 안 될까요?”
“안 돼요.”
대답은 한 것은 내가 아닌 이호연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단둘이 있으면 안 돼요. 류.”
“…왜?”
솔직히 이예린이 내게 위협되는 존재는 아닌 것 같은데. 아까 식당에서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녀를 테이블 위로 엎어 쳤다.
힘 대 힘으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이예린이 사용하는 마법? 그것도 이기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예언가이기 때문에?
이예린은 웃고 있었고 이호연은 날 간절하게 보았다. 슬쩍 주세진을 보니 그는 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호연이 말리는 건 그가 이예린을 싫어하는 이유와 같은 건가? 뭔가 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단둘이 만나는 건 이번에는 안 되겠네요.”
“그러게요. 아쉬워라. 꼭 단둘이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이예린은 미련 없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주세진에게 인사하고 길드원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좋게 생각해 주시기를 바라요.”
휘어지는 눈이 정확히 내게 향했다. 이호연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웃는 낯의 별에서 온 예언가를 노려보았다. 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집에 가서 부모님과 계약서를 보라며 주세진이 내게 빠른 귀가를 제안했다.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가 주세진에게 호출당한 이호연이 노골적으로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또한 주세진 쪽을 노려보는 것이 무언가 그들 사이에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다.
뭘 숨기는 거려나.
잠시 고민하다 여전히 미적거리는 그의 뺨에 키스했다. 이호연은 꼬리를 살랑이다 주세진이 뒤를 도는 순간 잽싸게 내 입에 키스했다. 갈수록 하는 짓이 요망해진다.
생각해 보면 항상 뒤로 빼는 것 같아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은근히….
묘하게 변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냥. 너 좀 은근 밝히는 것 같아서.”
“…네?”
“내일 봐.”
당황하는 이호연을 두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새까만 암흑 속 꼬마 불 도깨비를 품에 안은 꼬마 도깨비가 내게 길을 안내했다.
호롱불 같은 작은 불이 암흑뿐인 세계 안에서 푸르게 빛났다. 길 안내하는 꼬마 도깨비 따라 걸으면 다른 꼬마 도깨비들이 줄지어 내 뒤를 따랐다.
“여기?”
내 물음에 꼬마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지던 공간이 내 팔을 삼켰다. 손을 흔드는 깨비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 내 팔을 삼킨 암흑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림자 진 벽에서 튀어나오는 날 발견한 이예린이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런 그녀의 품 안에는 꼬마 도깨비가 바동거리며 안겨 있었다.
“이 꼬마 도깨비, 진짜 귀엽네요. 많아 보이는데, 하나만 데려가면 안 되나요?”
“안 되죠. 걔네는 열 깨비 같이 있어야 세트라.”
손가락을 맞대고 딱 소리를 내자 꼬마 도깨비를 붙잡은 이예린의 손에서 푸른 불티가 튀었다. 뜨겁지는 않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불티에 본능적으로 놀란 이예린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밑으로 떨어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꼬마 도깨비를 확인하며 이예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둘이서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제가 성격이 좀 꼬이고 꼬여서 둘이서 하는 대화에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원래라면 이런 으스스한 골목에서 만나지 않아요.”
“…….”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다.
“공주님의 호랑이가 왜 저랑 둘이 못 만나게 하려고 했는지 알아요?”
“모르죠.”
말 안 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 말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예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두고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예린을 간절히 찾는 천칭 길드원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쪽 길드원이 간절히 찾는 것 같은데 빨리 대화 끝내죠.”
“대화…. 네. 빨리 끝내야죠. 그럼 일단 장소부터 옮길까요?”
이예린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요즘 따라 눈에 형광 물질 넣은 사람 자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바닥에 발을 쾅 찍었다.
“이건 좀 신기하네. 이런 거 하는 사람이 한국에는 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이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명백하게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이예린으로부터 시작되던 황금빛 기류가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온 검은 그림자에 잡아먹혔다. 공중에 떠 있던 커다란 별의 조각에는 푸른 불이 붙었다.
“어떻게….”
그림자에 잡아먹히는 제 빛의 기류를 보며 이예린이 중얼거렸다. 기류 속에서 일그러지던 공간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둘이 만나지 말라고 했던 이호연의 말. 장소를 옮기자고 한 이예린의 말. 황금빛 기류 사이로 일그러지던 공간.
귀신이 숨겨 준 공간. 그중에서도 암흑뿐인 세상, 한여름에도 하이얀 입김 나는 삿된 것들 가득한 곳. 귀교(鬼橋)의 도착지. 온전한 나의 공간.
“말했잖아요. 이런 거 하는 사람 나뿐인 줄 알았다고.”
“…공주님도, 만들 줄 아나 보네요…. 영역.”
“보다시피.”
이예린이 한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명품. 단순히 예언을 갖고 한 말이 아니었다. 나 이외에 영역을 다루는 마법 계열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인생 꼬인 것 같은 사람을 보는 것도.
“이호연도 몰랐나 보네요. 자기 공주님이 영역을 다룰 줄 안다는 거. 알았으면 둘이 대화하자는 말에 그렇게 기겁 안 하지.”
“그렇게 흔한 능력은 아니잖아요.”
나도 나 말고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영역이란 말 그대로 영역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 내 능력이 더 강해지는 일종의 마이 홈. 불을 다룬다면 그 불의 화력이 더 강해지고 나처럼 귀신을 다룬다면 그 귀신의 힘이 강해지는 곳이 영역이었다.
이예린의 경우엔….
“그쪽 영역은 어떤 기능이 있나요?”
“궁금하면 들어올래요? 언제나 환영인데.”
“남의 영역에 관광 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서요.”
온전히 열지는 못했지만, 시도만으로도 페널티가 있는지 이예린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평범한 마법사의 신체인지 빠르게 지친 것이 눈에 보였다.
“후유증이 빨리 오네요?”
“그쪽처럼 힘법사는 아니라서. 내 신체는 일반인과 비슷하거든요.”
내가 특이 케이스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 쳐도 이예린의 후유증은 너무 빠르다.
“어떻게 할래요? 그쪽 길드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이대로 있으면 단둘이서 하는 즐거운 대화 못 하지 않아요?”
“…….”
“아. 그렇다고 내 영역에 데리고 간다는 건 아니고.”
내 영역 속 귀신들이 그렇게 내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예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게 아닌데. 내 영역에 데리고 가서 멋지게 폼 잡고 말해야 하는 건데.”
“굳이?”
“공주님은 강해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대화를 할 때 본인에게 더 익숙한 장소, 내가 우위라는 확신을 하고 대화에 임하고 싶어 하거든요.”
“천칭 길마님의 영역 들어간다고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
솔직한 내 대답에 입을 삐죽거린 그녀는 비척거리며 걸어와 내게 매달렸다.
“우리 애 피해서 아무 데나 둘만의 대화를 나눌 곳으로 출발해 주세요.”
“…….”
이 사람도 성격 참 특이하네. 원래 본인 성격인지 만들어진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엉겨 붙은 몸을 안아 들고 벽 쪽에 등을 기댔다. 그림자가 나와 이예린을 삼켰다. 암흑 속 유일한 빛이라고 할 수 있는 창백한 푸른 불을 보며 이예린이 내게 물었다.
“공주님의 영역?”
“영역은 아니에요. 그냥 그림자 안.”
손을 까닥이자 암흑이 의자 두 개를 만들었다. 새카만 의자를 콕콕 찔러 본 뒤에야 이예린은 그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거 느낌이…. 그냥 의자네요.”
“그림자로 의자를 흉내 낸 거라서요.”
랑이 만들었던 그림자 다리처럼 섬세하게는 불가능하지만. 저 정도면 됐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예린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의자 말고 침대도 되나요?”
“…….”
그림자이자 암흑으로 만들어졌던 의자가 침대로 재구성되었다. 그 위에 흐물거리며 누운 이예린이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는 존과 같은 모습으로 나를 불렀다.
“가까이….”
난 이 정도는 아닌데.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간병하는 기분으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나 또한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영역을 열고 난 뒤 이예린처럼 앓아누웠을까. 역시 힘법사가 진리였다. 잡생각을 지우고 이예린에게 물었다.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날 어떻게 바로 알아봤는지부터 말해 줘요.”
내 물음에 허옇게 질린 낯임에도 빙그레 웃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전직관이 보여 줬어요.”
“전직관?”
이예린의 전직 명이 뭐였더라. 별… 별….
“별…. 별, 별….”
“별의 관측자.”
“네 그거. 아무튼 당신 전직관이 날 어떻게 알고 당신한테 내 모습을 보여 줘요?”
내 물음에 그녀는 여상한 낯으로 말했다. 내 손에 잡힌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표정을 꽤나 잘 숨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거야 내 전직관도 예언가라 그렇죠. 나처럼 야매가 아니라 더 전문적인. 솔직히 나는 스킬 배워서 예언가 된 거지 그쪽은 찐이거든요. 그런 예언가가 당신을 만나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길 원했고.”
예언. 마법사의 감과 얼핏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더 넓은 범위의 무언가였다. 마법사의 감은 어떻게 보면 예언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언이라는 것이 영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민에 빠진 내 얼굴을 보며 이예린이 시선을 끌 듯 아이고, 아이고.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장난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마주 보는 눈은 그리 해맑지 않았다.
멀리서 볼 때는 마냥 반짝이는 줄 알았던 금색의 눈동자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저 깊은 구덩이 속으로 숨어든 별. 그런 느낌의 눈이었다. 묘한 사람이다.
“솔직히 나도 그쪽을 보자마자 내가 예언할 줄은 몰랐거든요. 예언하고 싶다고 마음먹고 스킬 써 봤자 식당 메뉴나 주식 뭐가 오르는지 같은 것만 보였거든요.”
식당 메뉴 맞히기도 마법사의 육감이 아니라 예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그걸 식당 메뉴 훔쳐보는 데 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떨떠름한 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예린은 말을 이었다.
“아까처럼 제멋대로 예언 능력이 발동할 땐 내 전직관 수준의 예언을 할 수 있거든요. 그것도 접촉이 있어야만 가능하지만….”
“그럼 이호연이 당신을 싫어하는 건….”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럴 때는 몸이 내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되거든요. 자기 손 잡은 거로도 질색하는 호랑이를 실수로 영역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거 납치 아니야? 그래 놓고 너 죽었다! 하고 예언하고? 내 얼굴을 본 이예린이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헷.”
잡고 있던 손을 쳐 내고 손끝을 까닥였다. 침대가 사라지고 바닥으로 떨어진 이예린이 끄앙 소리를 냈다.
“왜 남의 호랑이를 괴롭혀요.”
“…그땐 남의 호랑이 아니었는데요.”
꿍얼거리는 이예린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죽었다는 과거형인데 그게 예언이라고 할 수 있나?”
“…예언이라는 게 꼭 미래 지향적인 게 아니라서요. 옛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 말할 때도 있어요.”
“윤회설?”
“모르죠.”
봤다면서 왜 몰라? 바닥에 엎어진 이예린이 의문 서린 내 얼굴을 보고는 말했다.
“공주님처럼 안 듣는다고 내 손 쳐 버렸거든요. 그래서 죽었다, 그다음은 몰라요.”
전생 체험 같은 건가. 팔짱을 낀 상태로 손끝을 톡톡 두들겼다.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거 나도 돼요? 전생 체험?”
“글쎄요.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공주님은 꽤나 미래 지향적인 것 같은 사람이라 과거를 되뇔 것 같지는 않은데. 믿는 눈치도 아니고. 왜 알고 싶은 거예요?”
“타로점을 보는 심리라고 하죠, 뭐.”
나는 점을 그렇게 진지하게 믿는 타입은 아니었다. 물론 눈앞에 계신 분은 진짜 예언가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예린이 나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호연이 왜 그렇게 경계했는지 알게 되었다. 천칭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도 알 것 같고.
그 외엔 따로 얘기까지 나누면서 묻고 싶은 것도, 할 대화도 없었다. 저쪽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상태가 메롱이라 대화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눈으로 보기에도 아까보다 상태가 안 좋아진 이예린에게 물었다.
“대화 가능해요?”
“토 쏠려요. 아씨…. 영역 열고 나선 원래 우리 집 침대에 누워서 몇날 며칠 안 나오는데….”
“안 됐네요. 난 그 정도는 아닌데.”
“…쫌 짜증 나네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휘적였다. 이예린이 누워 있던 곳에 암흑이 다시 침대로 만들어졌다. 골골거리는 이예린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 이외에 영역을 다루는 사람은 이예린이 처음이라 이 정도의 페널티가 평범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지나치게 건강한 건가 싶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이예린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거나.
양손을 활짝 펴며 말했다.
“짠. 침대.”
그런 내 행동에 침대 위에 엎어져 있던 이예린이 묘한 얼굴을 했다.
“…되게. 상상했던 거랑 다른 성격이네요, 도깨비 공주님은.”
“원래 사람은 내가 상상하는 것과 다르답니다. 천칭의 길마님. 저도 그쪽이 이렇게….”
“예쁠 줄 몰랐죠?”
“이상한 줄 몰랐죠.”
내 말에 히히 웃은 이예린이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순순히 옆으로 가자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 가장 진지한 얼굴로 이예린이 말했다.
“계약서에 도장 찍을 때는 신중해야 해요.”
“갑자기요?”
“내가 도장 찍어서 인생 날린 케이스거든요.”
“…….”
유명한 일화라서 알고 있기는 한데. 별 반응 없는 내 얼굴을 보며 이예린이 웃었다. 웃는 낯으로 할 말이 아닌 말들을 늘어트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서 있었다.
“계약서를 찍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옆에서 도와주고 충고해 줄 어른은 없었고. 그냥 다 지원해 준다, 날 길드장으로 만들어 준다, 지옥도를 벗어나는 데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 하니까 홀랑 넘어가 도장을 찍었어요.”
“…….”
“물론 리블의 길드장님이 계약서에 장난치는 사람이 아니긴 하죠. 그냥 하는 소리예요. 도장 한번, 종이 쪼가리 몇 장에 인생 날릴 수도 있다는 충고랍니다.”
“…계약 취소는 안 되나요?”
“글쎄요. 탈주 각을 재고 있기는 한데. 알잖아요, 쉽게 놔줄 리가 없다는 거. 심지어 그 계약서, 평범한 종이도 아니거든요. 그리고 사실… 천칭을 나온 다음부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든요.”
“…….”
“그냥. 다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흘러가는 대로 있는 거죠. 그 와중에 불쌍한 우리 애들은 소모품으로 쓰이다가 죽고…. 그래서 조금 후회돼요.”
이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기껏해야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을 것 같은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흐릿한 웃음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녀의 모습 중 가장 진실되어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모른다고 놔두지 말고 좀 지랄 맞게 굴걸, 그럼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적어도 유가족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고, 조금이라도 안전성을 확보받고. 통보받는 결정들에 반항할 수 있는 경영권만이라도 있었다면.”
“…….”
“내가 이런 말 해서 기분 별로죠? 어차피 남의 일이고, 들어 봤자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분만 찜찜해지니까.”
황금색 눈동자는 덜덜 떨리는 손과 달리 흔들림이 없었다.
“일부러 말한 거예요. 이 얘기 듣고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갖고 우리 애들 도와주길 바라서. 리블 길드장님이 명령해도 결국 하늘 조각에 함께 들어가는 것은 당신을 포함한 공략대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요.”
내 말에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활짝, 올라갔다. 우울함을 찾을 수 없는 밝음이 인위적이었다.
“살려 주세요. 저희 애들 좀. 오늘 따로 만나길 원했던 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예요.”
“굳이 그 말을 따로 만나서 할 필요가 있나요?”
“당신이 제일 강하니까요. 류, 당신만 설득하면 우리 애들, 전원 사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난 얼굴마담이고, 바지 사장이지만 우리 애들 참 좋아하거든요.”
“…….”
“리블 길드장처럼 좋은 대우 받고 많은 혜택 누리게 해 주지는 못해도 죽지는 않게 해 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게 이젠 내 힘만으론 안 돼요.”
이예린은 주세진에게 몰래 도움을 요청한 것에 대해 기업의 수뇌부들이 제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일까?
길드원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조차 먼저 제안하지 못하는 사람이? 직접 게이트 안에 들어가는 선두 주자면서 모든 결정을 통보받는 사람이?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속이 불편했다. 꺼끌거리는 속내는 내 입을 열었다. 그냥 알겠다, 한마디 하고 돌아서면 될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했네요. 리블에 협력 요청한 걸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모른 척해 주세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 참 당당했다.
“다 아는 상황에서 모른 척하는 게―.”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예요. 원래 그래요. 대학 졸업하고 사회생활 한번 안 해 본 어린애 등쳐 먹어도 당한 애가 잘못인 게 세상이에요. 그놈들보다 강하면 뭐 해요? 법은 힘없는 것들 편인데. 계약서 잘 안 읽은 내 잘못이고, 계약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도장 찍은 내 잘못인데.”
“…….”
“…그냥 모른 척해 줘요. 그냥 알겠다고 한 번만 말해 줘요. 부탁해요.”
무언가, 닳고 닳아 마모되어 버린 사람. 그게 내가 내린 이예린이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였다. 입을 열었다. 그녀가 원하는 답이었다.
“…알겠어요.”
내 말에 이예린이 흐리게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미소만큼 흐린 목소리가 들렸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만약 그때 전직자가 되지 않았다면…. 의미 없는 생각이죠. 나는 죽기 싫었어요. 살고 싶었어요. 그리고 외로웠어요. 그래서 전직했고, 그래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어요. 나는, 내 길드원들이 좋아요. 미안해요. 부탁드려요.”
웃고 미소 짓고. 이예린은 말하는 내내 웃기만 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화하고자 했다. 누군가에겐 친근해 보이려는 거지만, 내가 보기엔 이예린의 웃음은 버릇이었다. 제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버릇.
저보다 약한 것들에게 자신은 위협이 아니라고 인식시키는 듯한 웃음. 혹은 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위협.
법은 약한 것들의 편이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옥도가 끝난 지 이제 겨우 1년. 그 1년을 포함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들어 낸 세상은 그 이전과는 너무나 달랐다. 우리는 전과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법을 새로 개정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이 어떻게 지켜졌을까. 약한 이들이 간절하게 그 법에 매달리고 그 약한 이들과 어울려 살고 싶은 강한 것들이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은 안정을 되찾고 다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법이 목줄이 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 목줄을 순순히 착용했기에 빠르게 안정되었다. 아이러니였다.
“있잖아요.”
내 부름에 이예린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도대로 속이 불편해져서 그런가. 자꾸만 말을 걸게 된다.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이 살그머니 흘러나왔다. 어쩐지 말을 할수록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사실 전직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가만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전직한 거지, 특별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어요. 얽히기 싫어서 아무하고도 대화하지 않았고, 스카우트라면서 접근하는 사람들 다 따돌리고 바로 잠적해 버렸어요.”
내 말에 이예린이 자신의 긴 머리 끝자락을 손끝에 감았다.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빙글빙글.
“…나도 그래야 했던 건데…. 눈앞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사실 지금도 반쯤은 꿈에 빠져 있는 기분이에요.”
“이게 꿈이면 그건 악몽이죠.”
내 말에 이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난 우리 애들이 참 좋아요. 같이 있으면 정신없고, 혼자가 아니잖아요. 난 이제 혼자일 수밖에 없는데…. 날 이용하는 것도 좋아요. 감시 목적으로 날 따라다녀도 좋아요. 그냥 그 애들도 안 죽으면 좋겠어요.”
“…….”
눈을 감았다. 그림자의 세계 밖에서 간절하게 이예린을 찾는 천칭의 길드원이 보였다. 영역을 여는 것에 있어 이예린은 속도만큼은 나보다 훨씬 앞질러 있었다. 그건 타고난 능력의 종류가 아니었다. 반복 학습의 결과물이었다. 대체 몇 번이나 반복했길래.
이제 알겠다. 이예린이 왜 이렇게 영역 한번 여는 것에 비실거리는지. 영역을 여는 것은 공간과 공간을 비집고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거였다. 세계의 섭리 같은 것을 모조리 무시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영역이었다.
그것을 지나치게 반복하는 사람의 몸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일종의 틈. 영역은 그 틈을 비집어 꺼내는 작은 선물. 이예린의 틈은 더 이상 틈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균열일 것이다.
“…….”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소모품. 그 글자가 단순히 게이트 안에 들어가는 공략대들에게만 붙인 호칭일까. 명품이네, 뭐네 해도 결국은 같은 소모품이다. 소모품이라는 호칭에는 이예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입 밖으로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하면 거북해진 속이 조금이나마 편해지기라고 하듯이. 그러나 내 속은 여전히 거북했다. 그런 나를 보며 이예린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인제 그만 내보내 주세요. 우리 애가 나 간절하게 찾는다.”
“…그래요.”
이예린이 정말 도망 못 가서 안 간 걸까. 소모품. 사람이, 저렇게, 살짝 맛 간 것처럼 되려면…. 소모품.
소모품.
천칭의 길드원들은. 정말 게이트 안에서만 죽었을까. 질보다 양이라고 해도, 아니, 애초에. 나는 왜 천칭의 길드원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지?
소모품.
이예린에 관한 생각을 할 때면 자꾸만 그 단어가 떠올랐다. 죽든 말든 상관없이 막 쓰는 용도라는 의미로 소모품이라 부르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그런 비꼼의 의미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이예린과 만남이 있었던 날 며칠 후 커넥터 친구 찾기 기능을 처음으로 써 봤다. 이호연을 기절시켰을 때 박상호가 올렸던 자게 글. 그 글에서 리블의 길드원들과 즐겁게 놀던 천칭 길드원들의 닉네임을 입력했다.
“…….”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 (천칭)]
이름 옆에 빨간 십자 마크. 난 손으로 눈을 덮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 닉네임 옆에 붙는 마크는 원래 저게 아니었다.
“…소모품.”
소모품은 쓰는 대로 닳거나 줄기에 다 쓰면 언제든 새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