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신데렐라를 찾습니다 (8/34)

나만 장르가 달라 2권

#신데렐라를 찾습니다

[세계를 구해 주세요.]

그 시스템 창을 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호수에서 나를 건져 낸 랑은 피곤한 낯으로 내게 그만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좀 더 캐묻고 싶었지만, 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입 안에서 맴돌던 말들은 단어가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지침. 아득한 과거의 존재가 처음으로 지쳐 보였다. 내 손을 꽉 쥐고 다시 류를 돌려준 랑은 내게 딱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죗값을 청산하려는 것뿐이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했길래. 그리고 그 잘못과 시스템 창, 이 지옥의 시발점일 테오그라젠스가 무슨 상관인지. 그리고 시스템 창은 내게 왜 세상을 구해 달라고 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그건 선이었다. 처음으로 랑에게서 제대로 느껴 본 선명한 선.

물에 흠뻑 젖은 꼴로 하늘 조각 안에서 나오는 나를 본 이호연은 당연히 기겁했다. 그런 이호연에게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물에 빠졌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요란을 떨 필요는 없었다.

물기 정도는 손짓 한 번으로 말릴 수 있었다. 다친 곳 없나 꼬마 도깨비랑 같이 나를 살펴보는 이호연의 하얀 호랑이 귀를 보며 생각했다.

어서 와, 새로운 지옥에 온 걸 환영해. 세계를 구해 주세요.

테오그라젠스가 이중인격이거나, 미쳤거나, 그도 아니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이 둘은 모순되었다. 아니, 자기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구해 달라니.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니라 병 준 자식이 약 달라고 조르는 꼴이었다. 그도 아니면. 애초에 구해 달란 시스템 창을 보낸 게 테오그라젠스가 아니던가.

시스템 창이. 테오그라젠스와 같은 신격의 존재가 둘이라면?

“정보가 부족한데.”

“네?”

내게 되묻는 이호연에게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끌어모으고 생각해 볼 시간이. 그러기 위해선 이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괴물 사냥에 임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옥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 이후 일반 게이트의 난이도도 올랐다더니 확실히 같은 괴물이라도 전보다 더 까다로워졌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전직자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나는 아니다. 병아리나, 중닭이나, 거기서 거기지.

후퇴 따위는 없는 내 직진 사냥법에 익숙한 이호연은 나를 아주 잘 따라와 줬다. 새하얀 백호가 괴물의 목을 물어뜯고 검은 그림자가 괴물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흑백의 잔상, 피 냄새. 생각했던 것보단 양호한 건물들. 약 5일간의 시간 동안 본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주일을 예상했던 사태를 이틀이나 줄여 버린 나는 우리 집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시스템 메시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5일 동안 호랑이랑 실컷 논 열 깨비들이 이젠 눈치도 안 보고 내 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방방 뛰는 깨비를 구경하다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가 접시 한가득 깎은 사과를 들고 들어왔다. 침대 위 도롱이 벌레가 된 나와 꾸벅꾸벅 인사하는 꼬마 도깨비들을 본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아주 숨길 생각도 안 하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엄마도 익숙해진 것 같은데….

겨우 이틀 같이 지냈으면서 엄마는 꼬마 도깨비들에게 빠르게 적응했다. 줄 서서 기다리는 꼬마 도깨비들에게 사과 하나씩 쥐여 주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누가 보면 엄마가 쟤들을 업어 키운 줄 알겠네.

“아주 하루 종일 누워 있지.”

“나 5일 동안 고생했는데….”

“그렇겠지. 5일 동안 한 번을 안 들렀는데. 네 아빠 징징거리는 거 듣느라 머리가 다 아팠어.”

“…….”

그건 빨리 끝내 버리려고…. 솔직히 안전 구역에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괴물을 죽이는 게 실용적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매정하다고 할지 모르나 내겐 빠른 안전 확보가 더 중요했다.

딸을 너무 잘 알아 안 올 줄 알았던 엄마와 달리 아빠는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빠에겐 관심 있다는 남자애와의 5일 동안 외박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엄마가 내 다리를 톡톡 때렸다. 꼬마 도깨비가 입에 물려 준 사과를 먹으며 그런 엄마를 보았다.

“그래서. 걔 얘기 좀 해 봐. 이호연 맞지?”

“엄마가 이호연도 알아?”

“동물 귀 달고 다니는 애가 걔 말고 또 있어?”

없지. 일단 우리나라에선. 엄마한텐 이호연 이미지가 동물 귀 달고 다니는 걔구나. 사과가 달다.

“걔랑 사귀는 거야?”

“글쎄.”

“둘이 무슨 사이인데?”

꼬치꼬치 캐묻는 엄마를 보다 눈을 굴렸다. 그러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고백 듣고 거절한 뒤 썸부터 시작하는 사이? 물론….

“뭐 별일 없었어?”

“…별일이 있어야 해?”

“있을 수도 있지. 둘 다 성인인데.”

“뭘 기대하는 거야?”

세상에. 지나치게 관대하고 개방적인 엄마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아빠는 무슨 일 있었다고 하면 기절하거나 울 텐데.

“애초에 단둘이 함께하는 여행이 아니지. 얘들도 있었는데.”

내가 제 몸만 한 사과를 냠냠 먹는 꼬마 도깨비들을 가리키자 엄마의 얼굴에 실망감이 감돌았다. 진짜 뭘 기대한 거야?

“그럼 아무 일도 없었어?”

“…….”

그건 아니고. 아무 일 없었으면 사귀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했겠지.

내 침묵에 엄마가 무언가를 더 물으려고 했지만, 그림자를 이용해 엄마를 곱게 문밖으로 모셔다드렸다.

숨길 생각 없다고 능력을 남발한다는 엄마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능력은 사용하라고 있는 겁니다, 어머니.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꼬마 도깨비들을 보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 씨….”

겨우 잊고 있었는데. 아무 일 없었냐고? 있었다. 일이.

“…….”

어쩌다 그렇게 됐더라?

5일 중 마지막 밤에 일어난 일종의 사고 같은 일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왜 그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더라. 아니, 어쩌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지?

분명. 처음에는 매우 건전한 분위기였다.

일반 전직자들은 물론 제법 관록 있는 전직자들에게도 까다로운 구역인 바닷가. 바닷속에 빠져 있던 하늘 조각에서 튀어나온 수중 생물과 비슷한 괴물들을 죽이고 휴식을 취할 때였다.

바다에서 싸웠으니 옷이 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손가락 한번 까닥이는 것으로 물기 정도야 금세 말릴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내가 매우 개인적인 솔플 추구자라는 것에 있었다.

불을 다루는 모든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제 불에 자신은 불타지 않는 신체를 갖게 된다. 같은 불이라도 자신의 소유면 손 위에 올리든 머리에 붙이든 옷에 붙이든 매우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푸른 도깨비불이라면 불 속에 뛰어들어도 따끈따끈할 뿐이지 조금의 피해도 없었다. 하지만 이호연은 아니었다. 내 옷은 말려도 이호연 옷은 말릴 줄 모른다는 뜻이었다.

진짜. 왜 그렇게 됐더라.

시작은 그거였다. 여분의 옷 부족. 주세진이 챙겨 줬던 옷은 진작에 헤지고 더러워져 버린 지 오래였고 물에 쫄딱 젖은 옷이 마지막 옷이었다.

몸에 들러붙는 옷을 꾹꾹 짜내는 이호연과 달리 혼자 보송보송한 상태인 게 미안했다. 그리고 문제의 시작도 거기서부터였다. 내가 매우, 개인적으로 움직이던 사람이라는 것.

내 모든 기준이 나였다. 난… 옷이 그렇게 잘 타는지 몰랐지.

남한테 불붙여 본 적 없어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재빨리 불을 껐지만, 얇은 나일론 재질의 상의는 이미 다 타고 난 뒤였다. 다행히 이호연은 다치지 않았다.

다만 그을음 가득한 옷 조각이 된 제 옷이었던 것을 허망하게 보던 이호연의 얼굴이 새빨개진 뒤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어이없고 엄청난 짓을 벌였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진짜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그 와중에 보게 된 이호연의 몸은. 음, 대단했다. 처음 보는 순간 그거 말고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참 대단한 몸이라고 생각한다.

왼쪽 옆구리에 깊게 새겨진 흉터가 흠이 되지 않는 몸이었다. 아니, 그 흉터마저 너무 잘 어울리는 매우… 육감적인 몸이었다. 그 흉이 생기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

“…….”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를 각자 고민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기 전까지의 침묵이 어찌나 무겁던지. 난 내가 한 짓이 쪽팔리고, 미안해서였고. 이호연은 창피해서였다.

애써 팔로 제 상의를 가리는데 소용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바닷가 근처 암석 동굴에는 이호연의 몸을 가려 줄 물건도 없었다.

“미안.”

“…….”

내 사과에 이호연이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그런 이호연을 보다 내 어깨에 걸쳤던 두루마기를 벗어 그에게 내밀었다.

“감기 걸려. 이거라도 입어.”

가을에 가까운 계절. 밤바다에 저런 차림이면 감기 걸린다. 차림은 아닌가. 옷이 없으니까. 어쨌든 신체 계열 전직자가 튼튼해도 그건 신체적으로 튼튼한 거지 면역력까지 튼튼한 건 아니었다.

내가 입었을 땐 손끝이 보일락 말락 했던 옷이 이호연이 입으니까 작았다. 그냥 작았다. 손목이 훤히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어깨선도 맞지 않았다.

그나마 한복이 앞섶을 묶는 형식의 디자인이라서 다행이었다. 제일 겉에 입는 두루마기라 벌어진 앞섶으로 다 보였지만….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어색하고 서로가 멋쩍었지만 그렇게, 그렇게, 그러니까, 막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고.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의 동굴. 인적 드문 그곳은 깜깜한 밤이 되자 별이 떠올랐다.

저게 하늘 조각이 보여 주는 환상인지 실제 별의 모습을 투명한 유리 조각 너머로 보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보기에는 예뻤고,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었다.

별하늘 아래 하얀 머리카락이 참 예뻐서. 살짝 내리뜬 회색 눈이 별을 흉내 낸 것 같아서. 그 눈이 나를 봐서, 그렇게 홀려서.

푸른 불 자락에 얼굴이 푸르게도, 창백하게도 보이는 이호연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은 그런 별에게 홀려서일 수도 있고 파도 소리가 내게 속삭여서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였던 건가.

그 행동에 바탕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내 푸른 불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 안 좋아서 낯빛이 푸르게 보이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행동의 정당성에 걱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호연은 제게 가까이 오는 나를 무구한 낯으로 올려다보았다. 조금 물기가 남은 하얀 머리카락을 만지다 약간 차가운 듯한 뺨에 손을 올렸다.

살짝 내리깐 눈으로 그런 내 손을 보던 이호연이 손을 들어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구하다는 건 그냥 내 착각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안 추워?”

이호연은 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운 것 같아요.”

“같아?”

“추워요.”

너무 티 났다.

“…손잡아도 되나요?”

“왜?”

“추워서….”

그럴 리가. 푸른 불이 동굴 안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추울 수가 없는 온기였다.

“진짜로 추우면 손잡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 않아?”

다만 내가 이호연의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싶었다. 그의 옆으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열 깨비들이 그림자 속에서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잠든 것이 느껴졌다.

그 밤. 그 공간 안에 눈을 뜨고, 불을 쬐고. 그 불에 홀려 별빛을 탐하고, 포말이 터질 때마다 내지르는 비명을 귓가에 담는 것은 우리뿐이었다.

“추워?”

“…….”

“응?”

“네. 추워요.”

누가 먼저 시작했더라. 아니, 어쩌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지?

누구긴 누구야. 내가 범인이지. 분위기 그것도 내가 원인이지. 이호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준 게 나였다.

그의 양 뺨에 손을 올렸다. 이마를 맞댔다.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추운데?”

“아주 많…이?”

거짓말. 난 거짓말쟁이는 싫은데. 하지만 그날 밤은 아니었다.

이호연과 봤던 영화가 생각났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온전한 하늘, 눈이 아린 노을의 눈부심. 황금빛 세상으로 변하던 바닷가.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탁 트인 해변에서 행해지던 애정 행위.

그와 대조되는 검은 밤 아래, 별님들 시선 피해 숨은 동굴 안. 흑백 논리만큼 대조적인 색의 우리. 그날 먼저 손버릇이 나빴던 건 나였나? 아니면 너였나. 어쨌든 둘 다 못된 손이었다.

맞붙어 있던 이마가 떨어졌다. 아,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더라. 회색 눈 속에 나는 어떤 모습이었더라, 하고 생각하다 코끝이 닿고. 숨결이 뒤섞이고, 뺨 위에 손이 툭 떨어지다 어깨를 붙잡았다.

춥다는 말은 거짓말. 추우면 맞닿은 입술이 그렇게 뜨거울 리가 없었다. 맞닿은 몸이, 그렇게. 내 허리를 붙잡던 손이, 내 귓가를 매만지던 손이 전부, 다. 춥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빨이 부딪혔던가. 내가 이호연의 어깨를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지. 잡아먹을 듯 굴던 상대는 내 꿈이 아니었을까. 날 보던 눈에 담겼던, 노골적인 애정은.

혀가 닿았다. 입천장이 간지러웠다. 조금 혀끝이 아릿했던 것도 같다. 숨이 차고, 잠시 떨어져 숨을 내쉬다가, 다시 맞붙고.

내 시야에 어느새 동굴의 천장이 보였다. 내 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내가 먼저였나. 네가 먼저였나. 상대의 숨결을 더 욕심낸 쪽은.

“추워?”

“…네.”

둘 다였나.

동굴 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운데 날 꽉 껴안는 몸은 아니었다. 그래서 춥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다음은 안 나갔다. 아슬아슬했던 것도 같지만.

이호연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의 옷깃을 쥐고 있던 내 손에 힘이 빠지고, 그런데도 뭐 하나 붙잡고 싶은 마음에 손을 휘적이다 간신히 묶어 놓은 옷고름을 붙잡았다.

옷고름은 힘없이 풀렸고 두루마기의 앞섶은 활짝 열렸다. 근육으로 꽉 차 있는 하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노골적인 살색 향연에 오히려 정신이 확 깼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살짝 발긋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이호연은 제가 타고 오른 나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물러났다. 색색. 밭은 숨을 내쉬며 진정하려 애썼다.

그것을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났다. 어느새 하나로 묶어 놨던 머리가 풀어져 있었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새까만 색의 머리를 흘겨보다 두루마기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회색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붙잡은 까만 옷자락을 놓지 않았고 이호연은 뿌리치지 않았다. 더웠다.

“안 물어봐?”

“…뭐를요?”

“왜 키스했는지?”

내 질문에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저가 입고 있는 두루마기의 옷소매를 붙잡은 내 손을 떨어트리곤 움켜쥐듯 깍지를 꼈다. 손이 뜨거웠다.

“물어보기 무서워서요.”

“왜?”

“꿈일까 봐.”

“…….”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봐.”

“…….”

“착각이라면―.”

이호연이 깍지 낀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손끝에, 손바닥에. 그리고 손목 안쪽에.

입이 벌어지고 손목 안쪽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따끔했다. 살짝 움찔거리는 손끝을 달래듯 다시 입 맞춘 뒤에야 이호연의 말은 이어졌다.

“그 착각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요.”

“착각이라도?”

“착각이라도.”

그 순간의 감정은 진심이니까. 후회할지라도, 착각하는 동안은 행복할 테니까. 듣지 않아도 뒷말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라면.

이호연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노골적인 애정. 그리고 욕심이었다. 그건, 진득한 감정이었다.

그에게서 손을 빼려 하자 잠시 내 손을 꽉 쥐며 안 놔주려고 하다가도 결국 천천히 힘을 빼는 체념, 그러면서도 눈은 못 떼는 그런 감정.

물린 손목을 봤다. 약간의 잇자국이 남았다. 그것을 보다 손을 뻗어 이호연의 어깨를 잡아채고 그가 그리했던 것처럼 타고 올라갔다.

까만 밤의 한 자락을 베어 와 만든 것 같은 두루마기가 넓게 펼쳐지고 새하얀 호랑이가 무방비하게 쓰러졌다. 놀라 동그래진 눈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회색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별하늘이었다. 오직 나만 보는, 날 위한 별하늘,

“난 남을 착각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닌데. 착각하게 행동하지 않아.”

“…….”

“착각이 아니면 어떨 것 같아?”

“…착각이, 아닌가요?”

“이미 대답은 충분하잖아.”

“직접 말해 줘요. 직접.”

내 팔을 붙잡고 그리 말하는 이호연은 간절해 보였다.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눈을 마주 보다 손을 뻗어 깊게 흉이 진 옆구리를 매만졌다. 단단한 몸이 움찔 떨렸다.

“왜 나를 좋아해?”

카페에선 이유를 듣지 못했다. 욕심쟁이이자 이기적이기까지 한 나는, 남보다 아래인 것은 못 참아서. 이런 애정에 기반한 관계의 시작점마저 우위를 원했다. 상대가 더 간절하기를 바랐다. 못됐다, 참.

그런 못된 나를 좋아하는 이 호랑이는 그런 내 못된 점까지 좋은 것인지. 제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발긋해진 얼굴로 더운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흉터를 만지니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는데도 말이다.

커다란 손이 내 못된 손을 붙잡았다.

“좋…아요. 전부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붙잡힌 손에 또 입술이 닿았다.

“당신의 손이 좋아요.”

손목에 닿았다.

“당신의 손목도.”

반대쪽 손이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몸을 일으켜 귓가에 입을 맞췄다.

“귓가도.”

목에 닿고. 턱에. 코끝에. 이마에. 그리고 입술에, 다른 곳보다 더 깊고 노골적인 입맞춤 끝에 밭은 숨을 내쉬는 입이 말을 내뱉었다.

“전부 다.”

“…….”

“당신이라서. 류.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나는 몰라요. 왜 좋아하냐는 당신의 질문은 사실 할 필요도 없어요. 이미….”

“아….”

“나 스스로가 주체가 안 되고, 미쳐 버린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전부 다, 좋아서.”

별이 예쁜 밤. 파도 소리마저 내 등을 떠미는 그런 밤.

손을 뻗어 이호연이 날 볼 수 있게,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도록 고정시켰다. 제멋대로 굴다 못해 내 속까지 헤집는 입에 입을 맞췄다. 주체가 안 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네가 좋아.”

“…….”

“너처럼. 좋아하는 ‘이상’으로.”

“…읏.”

고개를 숙여 목을 꽉 깨물었다. 이호연이 내 손목에 그리했던 것처럼. 아주 진득하고 끈적거리는 소유욕이었다. 산뜻 발랄하게 시작하기엔 내가 그렇게 순진하지가 못했다.

상대도. 그리 순진한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

“더?”

“오늘은 그만….”

내 질문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고개를 푹 숙였다. 순순히 자리에서 비켜 주자 이호연은 기다렸다는 듯 허둥거리며 두루마기 끈을 다시 묶으려 했다.

기다란 끈이 꼬여 상당히 버벅거리기는 했지만, 기어이 제 몸을 최대한 가리고 동굴 벽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런 이호연을 보며 생각했다.

아,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물론 어느 정도 사태 수습을 하면 내 감정에 대해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처럼 진도를 뺄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그 뒤로 어색하게 있다가 날이 밝았고, 이호연과 함께 안전 구역으로 이동했다. 난 부모님 손 잡고 집에 왔고 이호연은 주세진한테 끌려갔다.

내 두루마기를 입은, 그것도 흐트러진 옷차림에 목엔 빨간 잇자국을 달고 온 이호연을 발견한 주세진의 표정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이틀.

나는 애써 그 불장난과도 같았던 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이호연은 모르겠다. 그쪽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을지 되새기고 있을지. 후자이려나.

“왜 그랬지.”

진짜 왜 그랬지. 별에 취했나, 밤에 취했나. 이호연은 왜 그렇게 쉽게 넘어왔을까. 왜긴 왜야. 뻔히 다 아는데 뭘 모르는 척해.

고백하고 차이고 썸 타다가 키스. 와! 순서 다 꼬였어.

“천천히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나마 학교에 안 가는 게 다행이었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뭐라 해야 할지. 이래서 CC는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 봤자 내일은 가야 하지만. 참 다행이고 묘하게 슬프게도 학교는 무사하다고 했다. 좋은 일인데 뭔가 기분이 그랬다. 학교 폭발의 꿈이 이뤄지지 않아서 그런가. 튼튼하면 좋은 일이지, 뭐.

“…학교 가기 전까지 알아내려고 했는데.”

시스템 메시지 창. 분명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생각이 거기로 튀었는지. 홧홧한 낯은 베개에 문지르다 벌떡 일어났다.

물이나 마셔야지.

이호연과는. 내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우리 사귀는 사이냐고.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사귀자고는 안 했다. 그럼 사귀지도 않으면서 키스한 건가?

“…….”

내가 쓰레기인 거 같은데….

자기 객관화를 하며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게 된 것은 투닥거리며 싸우는 부모님이었다. 엄마가 아빠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다. 다시 들어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며 싸우는 두 사람을 구경했다. 아픈 척하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때리는 엄마를 멍하니 보았다. 뭐, 나름 행복해 보였다.

***

다음 날 비척비척 나갈 준비를 하고 밥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학교 가기 싫다.”

엄마는 대답조차 해 주지 않았다. 그런 엄마에게 삐쭉거리다 집 밖으로 나왔다. 이렇든 저렇든 어차피 학교는 가야 했다.

휴강했으면.

사람은 발전과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 것인지 옛날과는 달리 이번 사태를 빠르게 수습했다. 물론 그 바탕에는 하늘 조각 안에서 발견되는 우수한 자원과 길드의 기술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바로 며칠 전에 하늘 조각에서 괴물이 쏟아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늘 아침은 평소처럼 사람이 많았다. 직장인, 학생, 누구를 가릴 것 없이 그들은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지하철은 여전히 사람으로 빼곡했다. 자리에 앉은 채 그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수능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지하철에 타는 학생을 발견했다. 절로 안쓰러움이 밀려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괴물 나오는 지옥보단 입시 지옥이 더 나으니까. 앉은 내 자리 바로 앞에 서서 공부하는 학생의 사문 도표 특강 문제집을 구경했다.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일상이었다.

학교 건물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주변에 하늘 조각이 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등록금을 죄다 건물에 때려 박는다는 소문이 사실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저번에 서정은이 벽을 부쉈던 걸 보면 외벽만 튼튼하고 내벽은 평범한 것 같았다. 외부에서는 힘들겠지만, 내부에서는 세게 치면 벽에 구멍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서정은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이라는 가정하에.

건물의 벽을 한번 두들겨 보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오고 가며 인사하는 과 동기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호연은 3학년이니까. 문제의 조별 과제를 낸 타과 교양 수업이 아닌 이상 만나기 힘들겠네.

어디 과는 내일부터 대면 강의다. 어제부터 학교에 와야 했다는 과가 있다. 어느 교수님은 휴강을 했다. 온갖 잡다하고 부러운 남의 과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과연 이호연은 내게 먼저 찾아올 것인가 최대한 미루며 도망 다닐 것인가. 조교님이 들어오기를 바랐지만 교수님이 들어왔다. 늘어지는 몸을 책상에 기댔다. 빨리 수업 끝나면 좋겠다. 호랑이 만나러 가게.

과제를 줄까 말까 밀당하더니 결국 과제를 주고 교수님이 떠났다. 수많은 학생들의 한탄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가 상소문을 펼쳤다.

「본관 3층!」

내가 있는 곳은 본관 2층. 내 시간표는 공강. 그리고 점심시간. 이호연은 우주 공강. 시간은 많았다. 뭐, 찾을 필요도 없었지만.

이틀 내내 연락 안 하길래 생겼던 약간의 불안감이 살그머니 사라졌다. 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전에 이호연이 먼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까맣게 염색한 머리와 까만 렌즈가 익숙하면서도 약간 아쉬웠다. 날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이호연은 눈을 한번 질끈 감더니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섰다.

떠들고, 웃고, 소리 지르는 온갖 소음들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같이―.”

“점심 먹자.”

“…네.”

함께 계단을 내려오고 건물 밖을 나왔다. 날이 좋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햇빛은 아직 온기가 있었다.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잠시 움찔거리고 꼼지락거리던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밥 먹기 전에. 이것부터.”

“?”

걸음을 멈췄다. 온순한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이호연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한다고는 했는데 이건 얘기 안 했거든.”

날 마주 보는 눈이 깜빡, 깜빡 움직였다. 뭐라 말하고 싶은지 달싹거리던 입이 다물어졌다. 약간의 기대와 혹시 모를 불안감을 담은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랑 사귀자.”

“…….”

“네가 좋아.”

너는 대답만 해. 그 대답에 거절은 없어.

내가 랑에게 그랬듯. 그 동굴 안에서 이호연이 내게 그랬듯. 답을 알면서도 직접 듣고 싶은 사람의 심리가 내 손과 입을 움직였다. 꽉 맞잡은 손을 내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입 맞췄다.

눈을 휘며 웃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의미로 몇 번 더 손등에 입 맞췄다. 어물거리던 입이 열리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들렸다.

“좋아요. 정말, 너무. 좋아요.”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들겼다. 그림자가 우리의 주변을 감쌌다. 검은 것들이 일렁이자 사람들은 못 보는 귀신이 숨겨 준 공간이 완성되었다.

이호연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한 번, 뭐에 홀린 듯 이쪽을 피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한 번 보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이호연이 확인할 시간을 준 뒤, 손을 잡지 않은 반대 손을 뻗어 단정한 옷차림을 잡아챘다. 순순히 내 쪽으로 끌려 온 남자에게 말했다.

“추워?”

“…놀리지 말아요.”

“그래? 나는 조금 추운 것 같은데.”

“…….”

“날이 차다.”

유혹에 약한 호랑이는 제 앞에서 살랑이는 먹이를 놓치지 않았다. 몸을 숙였다. 고개가 기울어졌다. 장난치듯 내 이마에 한 번, 뺨에 한 번. 그리고.

눈을 감았다. 마주 닿는 입술 사이로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

“혼났어?”

내 질문에 메뉴판을 보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깨무는 바람에 조금 부은 입술을 한번 보고 의문을 담아 나를 보는 이호연에게 웃어 주었다.

“주세진한테 말이야. 그날 끌려갔잖아.”

“아….”

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는지 이호연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손이 무의식적으로 입가를 더듬다 평소보다 도톰한 제 입술을 느꼈는지 손짓을 멈추었다. 어색하게 움찔거리던 손이 책상 아래로 도망갔다.

“그냥, 뭐…. 조금요.”

주세진은 제일 유교적으로 입으면서 하는 짓은 제일 자유분방한다고 나를 놀렸었다. 근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자기 객관화 잘 되는 내가 봤을 때 주세진은 그렇게 자유분방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 유교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고백했다가 차이고 썸부터 시작하는 것을 그러려니 받아들인다고는 해도 안 사귀는데 키스, 혹은 그 이상부터 시작하는 것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날 이호연의 차림새는 누가 봐도. 손뼉을 치면서 보든 물구나무서서 보든 키스 그 이상의 차림이었다. 물론 그 이상은 안 나갔지만.

유교맨 주세진이 봤을 때, 둘 중 누가 먼저 상대를 덮쳤냐. 당연히 범인은 3살 많은 이호연이었을 것이다. 나이 많은 쪽이 더 책임감 있게 굴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을 거고. 그래서 이호연은 끌려가서 혼났을 거다.

사실 범인은 나였던 것 같지만 일단 이호연 본인이 둘 다 동시라고 했으니 그렇다고 치고.

주세진의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랑 이호연이 순수하게 힘 대 힘으로 겨룬다면 엇비슷하거나 내가 조금 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건 순순하게 힘 대 힘인 경우고 내가 그림자를 팔에 감으면 이호연은 나를 절대 이기지 못한다.

총사령관님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못 버린 거겠지. 거의 우리 아빠 같은 생각이었다.

“만나면 나도 혼날 것 같아?”

이호연은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테오그라젠스와 시스템 메시지에 대해 말하러 가려 했는데.

그날 우리는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나는 강의를 들었고 우주 공강 이호연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자마자 간 리블의 사옥에서 나는 주세진한테 혼났다. 조금. 많이.

성인이니까 알아서 한다는 되바라진 말에 몇 번 더 꼬집힘을 당한 뒤에야 주세진은 날 놔주었다. 옆에서 같이 혼난 이호연도 얼얼한지 제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혼나러 온 게 아니라 할 말 있어서 온 건데….”

“다 혼났으니까 이제 말해 봐.”

“…….”

치사한 어른 주세진을 흘겨봤지만, 총사령관님의 정신력은 굳건했다. 입을 삐죽거려 봤자 소용없는 것을 알기에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히든 게이트 안에 들어갔다가 좀, 이상한 걸 많이 알게 되어서요.”

내 말에 이호연의 볼을 또 꼬집고 있던 손이 멈추었다. 이호연도 나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심각해진 낯의 주세진의 눈도 나를 향했다. 그 눈들을 보며 말해야 할 것을 정리해 보았다.

나비와 푸른 불의 운명. 내 전직관의 정체. 내게 직접적 영향을 끼쳤던 테오그라젠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스템 메시지.

랑에 관한 것은 일단 보류. 꼭 필요한 내용도 아니며, 사실을 알게 된 주세진과 이호연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두 사람에겐 서슴없이 제 전직자를 구해 줄 전직관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인 전직관이 존재하면 모를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이호연에게로 향했다.

“일단 나비와 푸른 불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내 질문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원래라면 이런 고민은 혼자 해결했을 테니까. 최대한의 정보를 끌어모으고 혼자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이 고리가 되어 이어지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것들을 반복해서 생각하다 보면 무한의 고리를 빠져나올 생각의 고리 하나가 보인다.

그것을 붙잡고 이어진 띠를 끊어 버리든 다른 길을 찾아내든 하면, 정답이 나온다.

난 항상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알아냈다. 랑의 정체 또한.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며칠 전에 나비를 만났어요. 강유진 씨가 찾아낸 위치가 우리 집 근처더라고요. 진짜 스토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잡아서 털어 보려고 했어요.”

“…….”

“안 죽였어요. 처음부터 죽일 생각도 없었고. 중간에 한 번 죽일 뻔하기는 했는데…. 안 죽였어요.”

“…일단. 그래.”

“아무튼 나비를 털어서 알아낸 것이 있어요.”

“순순히 불어?”

“아뇨. 그래서 합법 아닌 불법으로 알아냈어요. 주먹은 언제나 대화보다 가깝죠.”

내 말에 주세진이 매우 심란한 얼굴을 했다. 내 옆에 앉은 이호연을 보니 그는 눈 마주친 게 좋은지 그냥 웃었다. 내가 사람을 팼다는 건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그럴 줄 알았다.

“나비가 그러더라고요. 생은 다르나 그 끝은 함께할 것이니. 푸른 불의 재가 될지라도 그 불에 홀리는 나비가 돼라.”

“…….”

“그땐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나비와 푸른 불꽃은 운명이래요. 내 전직관도 그런 말을 했고. 비슷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고.”

그리고.

“나비와 푸른 불꽃은 낙원의 문을 열 존재들이라고 했어요.”

잠시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문 주세진을 기다리며 나 또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운명과 낙원. 그 문을 열 존재들. 생은 다르나 끝은 함께. 무슨 의미일까.

“저….”

“?”

이호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 그를 보자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낙원의 문을 여는 방법이 푸른 불꽃이 나비를 태워야 열린다는 거 아닐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와 주세진이 쳐다보자 이호연이 제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해 줬다.

“생은 다르나 끝은 함께할 것이다. 나비는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이자 낙원의 문을 열 존재죠. 그리고… 푸른 불의 재가 될지라도, 라는 이 말은 푸른 불이 나비를 불태운다는 뜻 아닌가요?”

“…더 말해 봐.”

“보통 성서같은 걸 보면 신의 종들은 희생을 상징하고 종의 끝은 신의 곁을 의미하잖아요. 푸른 불꽃과 나비가 함께하기 위해선 나비가 푸른 불에 타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 순간만큼은 함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낙원의 문을 열 방법은… 나비가, 푸른 불꽃에게 죽는….”

이호연이 말을 흐렸지만, 그 뒤의 말은 알 수 있었다. 푸른 불꽃은 나. 그러니 테오그라젠스의 낙원을 열 방법은…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인 나비를 내가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내 살인이 낙원의 열쇠라는.

“사이비인 건 알았는데 진짜 사이비네.”

푸른 불의 재가 될지라도, 그 불에 홀리는 나비가 되어라. 이거 그냥 내 손에 죽더라도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였어? 낙원을 열기 위해?

“미쳤네.”

그럼 그 남자는 순순히 내 손에 죽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테오그라젠스도 그 ‘자식’도 내 아버지도, 나도, 다 사이비야.’

남자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게 신실한 종교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

뭐, 사람의 속내를 남이 어떻게 짐작하겠는가. 본인만 알 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추측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일차원적이지 않으니까.

“안 죽이기를 잘했네.”

그때 죽였으면 바로 낙원이 열리는 건가? 그럼 정말 안 죽인 게 다행이었다. 그때, 혹여나 손에 조금만 더 힘줬으면.

“…….”

여전히 조금은 후회되는데.

애써 속내를 숨기며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나를 보는 시선들을 느끼며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아, 테오그라젠스가 직접적으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랑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빼고 히든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던 몸. 그 상황에서 나와 달리 움직이는 게 가능했던 내 전직관.

왜 갑자기 공격당했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중간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지만 이호연도 주세진도 그에 대한 것은 묻지 않았다. 다만 내 얘기를 듣고 둘 다 심각해졌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네. 마비라고 해야 하나.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신이든 귀신이든 직접적인 영향은 끼치지도 못하는 허상 주제라고 한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의 범위 안에는 랑 또한 있었다. 내 팔을 붙잡았던 손에 힘이 풀린 것을 보면 전직관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었다. 랑은 그걸 이겨 낸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나도, 나를 포함한 다른 전직자들도 가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제일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앞에 말들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게 놀랍네.”

피곤해 보이는 주세진에게는 미안했지만 이게 제일 머리 아픈 이야기였다.

“시스템 창이… 그러니까 테오그라젠스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처음 전직할 때. 조금 이상한 시스템 창이 하나 나타났어요. 온갖 문자들로 뒤덮인 메시지였는데. 이번에 그 메시지를 다시 받았어요. 제대로 된 뜻도 봤고.”

사그라지는 푸른 불 사이로 드러났던 글자들.

“세계를 구해 주세요.”

“…….”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주세진이 소파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괴물들이 쏟아지는 사태를 겪었으면서 며칠 만에 사람들이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주세진은 피곤한 낯을 차마 가리지 못했다.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옛날에 말해 줬었지. 테오그라젠스 교단의 말.”

「나는 신을 보았다. 감히 우리가 내려다볼 수 없는 하나. 다른 하나와는 다른 하나. 군림과 신앙. 절대적 우위. 신이요, 세계이자 우러러보아야 할 하나. 그것의 이름은 테오그라젠스.」

“…다른 하나와는 다른 하나.”

“맞아. 네 말대로라면 정말 하나가 더 있을 수도 있어.”

“…….”

다른 하나와는 다른 하나. 둘. 그리고 하나와 하나. 테오그라젠스와 다른 하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또 물었다. 반복되는 생각들이 앞뒤를 맞추고, 나열시켰다. 부족하면, 새로운 정보를 더 끌어모아서.

나비. 그 남자가 했던 말.

“…하나는 눈을 감고 하나는 눈을 감지 아니하였다. 방종한 것들을 어찌 두고 보리.”

“…….”

“방종한 것들을 두고 보지 못했다. 감히 자신을 내려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군림과 신앙. 절대적 우위로. 신이자, 세계이자 우러러보아야 할 존재로서. 눈을 감은 하나와는 다른 하나. 그것의 이름은―.”

테오그라젠스.

지옥의 시작이 뭐였지? 괴물이 나타났다.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있었던 것. 그건 하늘의 무너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세 면의 벽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된 방에선 하늘이 아주 잘 보였다. 군데군데 이물질이 묻은 것처럼 까만 것들이 담긴, 아니, 그것들을 가린 하늘 조각들이.

“…있잖아요.”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걸까.

“보통. 내려다보지 못하게,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건 아주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잖아요.”

“…….”

“하늘이 무너졌어요. 그냥,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게 하늘이 아니라 이상한 조각들이었어요. 유리창 같은 거였어요. 그럼. 내가 원래 알던 하늘이 사라진 걸까요, 아니면 원래부터 하늘이 유리 조각으로 이루어졌던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테오그라젠스는 지옥의 시작으로, 어떻게 하늘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걸까요.”

누구도 자신을 내려다보지 못하게. 감히 방종한 것들을 두고 보지 못한. 신이요, 세계이자 우러러보아야 할. 하늘을 무너트린.

고개를 들면 천장이 보인다. 그 너머, 어디서나 고개를 들어야만. 내려다보아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무너져 버려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복잡함을 버리고 일차원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지옥이 시작됐어요. 하늘 조각 안에서 괴물들이 나왔어요. 하늘은… 내려다볼 수 없는 위치에 존재해요.”

내가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지, 아니,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일까? 사람들이 마법을 쓰고 검을 들고 돌아다니는, 괴물이 존재하는 이 세상은 이미 충분히 비현실적인데.

오히려 지금껏 생각하지 못한 것이 이상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그 안에서 괴물이 나왔다. 하늘은 인간의 죽음을 원한다. 내려다보아서는 볼 수 없는 가장 높은 우러러보아야 하는 장소에서. 방종한 것들을 두고 보지 못하는 존재로서.

나는 신을 보았다. 감히 우리가 내려다볼 수 없는 하나. 다른 하나와는 다른 하나. 군림과 신앙. 절대적 우위. 신이요, 세계이자 우러러보아야 할 하나. 그것의 이름은 테오그라젠스.

그것은 하늘, 그 자체였다.

주세진도 이호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인지. 누구라도 좋으니 이런 내 생각을 비웃어 줬으면 싶었지만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주세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세진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웬 서류를 꺼내오더니 내게 내밀었다.

갑자기 웬 서류인가 싶어 그를 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호연을 돌아봤지만, 그 또한 모르는 것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까슬까슬한 황토색 서류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종이 서너 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 본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영어였다.

“이게 뭐예요?”

내 질문에 주세진이 첫 번째 장에 기재된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에는 순박한 외모를 가진 외국인 남자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밀짚모자가 참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사진 끄트머리에 나온 오리의 머리는 덤이었다. 귀엽네.

“그 서류는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다며 미국에서 온 서류야. 그 사람이 세상의 비밀을 엿봤다고 주장했다고 하더군.”

세상의 비밀?

“사진의 남자는 원래 평범한 농부였다고 해. 그러다 전직을 하게 됐는데, 특이하게도 비전투 계열, 그중에서도 학자로 전직했어.”

“학자?”

학자로 전직하는 경우도 있나? 학자는 처음 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주세진이 말했다.

“학자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아뇨.”

“나라에서 반대하더라도 본인이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기어이 알아낸다는 거야. 그리고 그것들은 금서 취급을 받지.”

“설마….”

“남자의 전직관 또한 학자. 학자들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지식을 탐구하지. 그리고 그 결과물을 세상에 알리고자 해. 전직관들은 우리에게 일정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아. 하지만 사진 속 남자의 전직관은 조금 달랐지.”

“…….”

“제 전직자에게 모든 정보를 넘겼다. 덕분에 남자는 세상의 비밀을 엿보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사라…졌다고요?”

“그래. 사라졌어. 히든 게이트 안에 들어가도 더 이상 전직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어.”

전직관이… 사라진다고? 그런 게 가능해?

“그런데 갑자기 이 남자는 왜?”

“미국 정부에서 남자에게 알아낸 것들을 물었는데, 남자가 기이한 부탁을 했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입을 열지 않겠다고.”

“무슨 부탁인데요?”

“…이 서류는 어제 온 거야. 사진의 남자가 너를 불러 달라고 요구했어. ‘류’를 불러 줘야만 입을 열겠다고.”

“…….”

왜 하필 나를 불러 달라고 했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세상의 비밀. 테오그라젠스. 나비와 푸른 불꽃. 손끝이 서류 위를 톡톡, 쳤다. 매끄러운 종이의 질감을 더듬으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도박이야. 너를 콕 집어 불렀다는 점에서 정말 뭘 알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만 믿고 행동하기엔… 네가 잃을 게 너무 많아.”

“…….”

“이 서류는 나에게만 온 게 아니야. 정부 측에도 같은 서류가 도착했어. 네가 이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해도 사람들은 널 찾으려고 할 거야. 네가 만나겠다고 하면 그땐 널 옭아매려 하겠지.”

잃는 것이 많다. 버려야 하는 것이 많다.

이 부탁의 핵심은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길드 차원의 문제도 아니었다. 일단 일차적으로 미국이 엮여 있었다. 세상의 비밀이라는 이름 아래 전 세계 국가를 전부 엮을 수도 있었다.

이미 시작부터가 국가 대 국가로 시작되는 문제였다. 여기서 개인인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큰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다.

일상도 자유도 다 버려야 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좋은 패를 버리는, 손해 볼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얻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의 비밀. 나를 콕 집어 불러 달라 한 미국의 학자. 제 전직관에게 모든 것을 이어받은 남자의 정보.

어쩌면 테오그라젠스와 또 하나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도박. 과연 그 남자가 주는 정보의 가치가 내 일상과 자유를 걸 정도가 될까? 거창하게 말해 놓고 사실 별거 아니면?

결국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였다. 상자를 열기 전까진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알 수 없는. 상자를 열지 않고 고양이의 존재를 잊을 것인가, 결과물의 결괏값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상자를 열 것인가.

그리고 과연 내가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나를 가만 놔둘 것인가. 상자를 열기를 원하는 주변의 시선을 나는 외면하고 도망칠 수 있을까.

뒤늦게 이걸 보여 준 주세진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원래는 보여 주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조용히 묻어 버리려고 했겠지.

그걸 내가 다시 파헤친 거다. 테오그라젠스와 또 하나의 존재. 낙원의 문을 열 나비와 푸른 불꽃 중 하나기에.

내가 푸른 불꽃인 이상 내 자유는 불안정하고 언제든 무너지는 모래성과 다를 게 없었다. 무너진 성의 잔해를 손으로 헤집으며 몇 번을 다시 쌓아도 무너지고 마는 그런 모래성.

“…….”

온전한 성을 갖고 싶으면. 아예 재료를 바꿔야 한다. 백날 모래로 만든다고 해서 굳건한 성이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모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성 자체를 허물어야겠지. 뭐 하나 버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결국 뭐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온전한 성을, 모래 같은 불안정함이 아닌 굳건한 자유와 일상을 원한다면 지금의 모래성을 버릴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예 그 모래를 쓸어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게 싫어 어영부영 모래만 쌓을 수는 없었다.

“만날래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단,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정부도, 미국도 끼어들지 않게.”

모래를 허무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하다. 주변의 재촉에 성을 부숴 버릴 생각은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내 인생을 이래라저래라 해.

“가능할까요?”

내 말에 주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노력해 봐야지.”

느슨하게 웃는 모습에 나도 따라 웃었다. 몸에 힘을 풀고 소파에 늘어졌다. 소파 등받이에 올라간 하얀 꼬리를 끌고 와 만지작거렸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 긴 이야기 속에서 실질적으로 해결된 것은 없었다. 나비와 푸른 불꽃. 내가 그 남자를 죽이는 것이 낙원의 문을 여는 것이란 확신도 없었고, 솔직히 내 눈앞에서 깝죽거리면 입 닥쳐 소리를 내며 주먹이 먼저 나갈 것 같았다.

대화? 내 주먹의 이름이 대화였다.

테오그라젠스의 정체가 정말 저 무너진 하늘 그 자체라면 상대가 너무 아득한 존재였다. 또 다른 하나에 대한 정체는 힌트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 내게 슈뢰딩거의 상자를 내미는 학자가 하나. 해결은커녕 혹만 하나 더 붙인 꼴이었다. 물론 내 모래성을 무너트릴 조짐이 보이면 모래를 눈에 뿌려 주는 수준으로 열심히 대항하기는 하겠지만.

그냥. 인생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 온 우주의 힘이 모여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는 조금 편했다. 얕은 물살 같은 휴식을 맞는 것 같았다. 내 손안에 꼬리는 부드러워서 만질수록 기분이 좋았고 내 옆에 앉은 호랑이는 귀여웠다. 나 하나 도와주겠다고 영어 서류를 꼼꼼하게 훑어보는 주세진은 믿음직스러웠다.

그냥 그랬을 뿐이다. 고민한다고 해도 당장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만 해결하고 답을 찾던 때가 아니니까.

꼬리를 손에서 통통 튕겼다. 평소에는 잘만 움직이던 꼬리가 죽은 척을 하고 내 손에서 놀아났다. 그냥 다 잘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내 예상을 빗나가지.

내가 바라는 대로 됐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나는 그게 얼마나 이루어지기 힘든 소망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다시 되새김질하게 될 줄은 몰랐다.

***

이상 조짐을 눈치챈 것은 학교 가는 길 지하철 안에서부터였다. 저번에 봤던 학생이 이번에는 아랍어 문제집을 보고 있어 신기한 마음에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내 앞자리에 앉은 여자가 날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고개를 돌린 여자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아랍어 수능 문제집에 정신 팔려 못 느꼈던 시선들이 그제야 느껴졌다. 조금 전의 여자처럼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명백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만 굴려 그런 그들을 확인했다. 누군가는 직장인이고 누군가는 나처럼 대학생인 것 같았다. 또 누군가는 아직 교복을 입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들의 공통점은 핸드폰의 화면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는 거다.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OMR 카드에 마지막 마킹 숫자와 시험지의 마지막 문제 숫자가 다를 때의 그런 기분이었다.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저들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뺏을 수도, 다짜고짜 말을 걸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찝찝한 기분을 안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학교로 가는 길. 캠퍼스 안. 건물 안. 그리고 강의실에서까지. 몇몇 사람들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누구는 삿대질까지 했다.

자리에 앉아 책상 위를 톡톡 두들기며 생각했다. 핸드폰을 뺏어 올까. 답답함이 이제 짜증에 가까워졌다.

꼬마 도깨비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직전, 강의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이호연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강의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호연을 쳐다보았다. 그중엔 나도 있었다. 열심히 뛰었는지 다시 검게 염색한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강의실 안을 쭉 훑어보던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이호연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잠깐, 잠깐 좀….”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내 팔을 잡아 강의실 밖으로 나가는 이호연에게 순순히 끌려가며, 그런 우리를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 뭔가 잘못됐다.

나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강의실로 들어온 이호연이 문을 잠갔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내뱉고 내게 말했다.

“전화는 왜 안 받아요?”

“전화?”

그의 말에 핸드폰을 꺼내니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전원 버튼을 꾹 누르자 깜빡거리다가 다시 꺼졌다. 어젯밤에 충전하면서 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배터리가 없어서 꺼졌나 봐.”

“그럼 커넥터는!”

“그거… 내 방 침대 옆에 있어.”

이호연의 얼굴은 다급해 보였다. 그런 그의 표정과 아침 내내 날 향했던 시선들, 그리고 핸드폰. 그 세 가지만으로도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호연에게 물었다. 내 생각이 틀리길 바라면서.

“무슨 일인데.”

“오늘 아침에… 사진이 하나 올라왔어요.”

“무슨 사진.”

“지하철 벙커 안, 검은 한복을 입을 류의 사진이요.”

이호연에게 확답을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기 전에 대충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다만. 매우 짜증 나고 기분이 더러웠을 뿐이다.

“그 사진, 지금 있어?”

“일단 세진이 형이 사진을 내리고 있긴 한데―.”

“사진. 있냐고.”

“…….”

잠시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내게 자신의 핸드폰을 넘겼다. 검은 도포. 어깨에 걸친 두루마기.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그림자에 의해 옮겨지는 바위에 가까운 돌덩이들.

그런 돌덩어리들을 멀거니 쳐다보며 앉아 있는 나. 사진은 내가 벙커에 들어가자마자 있었던 일을 찍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진에 대해 깔끔하게 평가했다.

“죽어도 폰 안 놓지.”

인증에 미쳤나. 그 와중에 이딴 사진을 찍어? 그걸 또 올려?

“이거 올린 놈은 누구야?”

“최초 유포자는 글을 지웠어요. 찾고 있기는 한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

그럼 지금 돌고 있는 사진은 최초 유포자가 올린 사진을 퍼 나르는 것들의 작품이라는 거네. 가면을 썼어야 하는 건데. 벙커에 들어가지 말아야 했던 건데.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그냥 둘 걸 그랬나.”

아니다. 어차피 엄마를 찾으러 갔던 것이니, 이제 와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이럴 때면 회의감이 들었다. 구해 주면 뭐 하나. 솔직하게 튀어나온 내 속내에 이호연이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길드 차원에서 글을 내리고 있고, 또….”

“괜찮아. 어차피 해결 못 하는 거 아니까 위로하려고 안 해도 돼.”

나는 희망찬 말에 안도할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최초 유포자 잡고 최대한 사진을 내려 봤자 이미 저장할 사람은 다 저장하고 난 뒤일 거다.

“…….”

“학교에는 못 있겠다.”

일단. 알아봐야겠지. 어느 정도로 퍼진 것인지. 신상 털기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직접적인 결과물을 보니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괜찮아.”

“류….”

“정말이야. 그냥 좀 짜증 나고 성가셔서 최초 유포자를 죽이고 싶은 정도? 그 정도밖에 화 안 났어.”

날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생각났다. 날 힐끔거리던 시선만 생각났다. 그 안에 담겼을 감정은 모르겠다. 수많은 시선 하나하나에 담겼을 감정이 뭐 그리 중요할까.

어차피 일방적이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데. 난 모르는 상대가 날 안다는 듯, 제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 흘겨보는 시선.

언제든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못하게 만들 힘이 있음에도 정작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속이 꼬인다.

“리블로 가야 하나?”

“네. 일단 그쪽으로 가는 게. 그나마….”

“수업엔 안 가도 돼?”

기껏 복학까지 해 놓고. 내 질문에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같이 갈래요.”

“…그래.”

우리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빈 강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내가 듣는 수업의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은 수업 안 들어가고 뭐 하냐고 물었고 그런 교수님에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불법 촬영 피해자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수업을 듣지 못할 것 같습니다.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거든요.”

올린 놈도 짜증 나지만 그걸 또 퍼 나른 놈들도, 그걸 보고 날 구경하는 시선들도. 모두 다. 매우 짜증 났다.

내 말에 당황하는 교수님을 두고 걸음을 서둘렀다.

***

“최초 유포자 먼저 잡아 주세요.”

당당한 내 요구에 주세진도 이호연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멈칫한 주세진이 내게 물었다.

“죽이려고?”

“제 이미지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 그렇게 사람 쉽게 안 죽이는데요. 나름 인류애가 넘쳐서.”

“…….”

“진짠데?”

없는 인류애를 끌어모으지 않았으면 꽤나 많이 죽었겠지. 주세진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은 사실이었다. 난 인류애가 넘쳤고 지옥도 당시에 꼭 죽여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죽이지 않았다.

살인을 쉽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저지선이 없을 테니까. 그건 남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냥… 인생이 쉬운 줄 아는 것 같아서 인생의 고달픔을 알려 주려는 것뿐이에요.”

나는 웬만해선 민간인 안 건드리거든요.

매우 의심스러운 듯 나를 보는 주세진에게 어깨를 으쓱이곤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내 입가로 가져가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내 눈치 한 번, 주세진 눈치 한 번 보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못 숨기는 호랑이를 잔뜩 놀려 준 뒤에야 좀 기분이 풀렸다.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는 주세진에게 웃어 주었다. 주세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가 줄까?”

“방 주인이시잖아요.”

“그걸 알면 애정 행각은 딴 데 가서 해.”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주세진의 뒷모습을 보다 이호연에게 기댔다. 호랑이 꼬리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어떻게 인생의 고달픔을 알려 주는 것이 좋을까.

사진 찍는 놈도, 그걸 또 유포하는 놈도, 퍼 나르는 자식들도. 좋다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사진이 어떤 종류냐는 상관없었다. 그 사진을 찍고 올리고 퍼 나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 사진으로 남의 인생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모르겠지. 알면서도 상관없었겠지. 안 걸릴 자신 있고 걸려 봤자니까.

불법에는 불법. 똑같이 불법적으로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린다. 법? 법으로 해결하고 싶으면 애초에 법 안에서 놀았어야지.

어긴 자식이 법을 왜 찾아.

“류….”

“아. 미안. 아팠어?”

꼬리를 너무 세게 잡았다. 손에서 힘을 풀려고 하니 이호연이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요.”

안 아플 리가 없는데…. 나 지금 엄청 세게 쥐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꼬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런 내게 뭐라 말하고 싶은지 입을 달싹이던 이호연이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러나 싶어 그런 이호연을 봤지만, 이호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그러고선 제 꼬리를 쥐고 있는 내 손 위로 손을 얹었다.

“그냥… 류가 너무 좋아서요.”

“갑자기?”

“네…. 그리고 꼬리는 정말로 안 아파요.”

“그래…. 그리고 나도 네가 참 좋아.”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호연은 내 말에 또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손안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며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기분 좋아 보이니까 됐다.

한참 이호연의 꼬리로 놀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주세진이 나를 불렀다. 그에게 시선을 주자 주세진은 심각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일단 안 죽인다고 약속해.”

“…….”

“죽이고 싶은 것도 알고, 말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안 돼.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안 죽인다고요.

하루도 안 지나 유포자를 잡는 능력은 있으면서 왜 내 말을 들어주는 능력은 없는 건지. 내가 그렇게 사람 쉽게 죽이는 이미지인가?

“…….”

저세상 블랙 패션이 생각났다. 죽이는 건 모르겠고 많이 데려갈 것 같은 차림새기는 했다.

“안 죽여요. 말했잖아요. 그냥 인생의 고달픔을 알게 해 주려는 것뿐이라고.”

“…….”

“진짜인데. 마음 같아선 똑같이 불법으로 처리해 주고 싶지만…. 민간인이니까 봐줬다. 합법 같은 불법 정도로만 할게요.”

불법 같은 합법 아니다. 합법 같은 불법이다. 불법 같은 불법이 아닌 게 어디야.

“…여기로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주세진의 말 대로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요란스러운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아, 쫌! 이것 좀 놔요!”

몇 살이려나. 이십 대 중반. 아니면 후반?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남자를 끌고 온 것은 강유진과 그녀의 조수였다. 나를 발견한 강유진이 반갑다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와! 오랜만이에요!”

“네.”

여전히 파워 넘치는 비글 타입이었다.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최초 유포자를 잡았나 했더니, 강유진의 능력이었나 보다.

정보 수집, 전달, 퍼트리기에 그야말로 특화된 전직자. 하늘이 무너지기 전엔 뭘 했는지 모르겠으나 새로운 자신의 직업에 무척이나 잘 적응하신 분이 웃는 얼굴로 내 쪽으로 남자를 밀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벙커 안에 같이 있었던 사람 같기도 하고, 길을 가다 본 것 같기도 한 그냥 그런 외모의 남자였다.

남자는 처음에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자,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뭐 잘한 게 있다고 오히려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무슨 화장실 몰카를 올렸어. 옷 벗은 사진을 올렸어! 어차피 공인이잖아! 이상한 사진을 올린 것도 아닌데 사람을 무슨 범죄자 취급을 해!”

더 해 보라는 식으로 남자를 봤다. 남자는 그런 내 시선에 부응하듯 입을 나불거렸다.

“솔직히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거기 있던 아저씨랑 싸운 거 올린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잘 나온 사진 올려 줬는데! 그리고 너희, 나 찾은 거 불법이지! 이거 내가 다 불어 버리면 리블이고, 뭐고―.”

“네가.”

입을 열었다. 남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물론 자의는 아니고. 남자의 발밑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살금살금 남자의 몸을 조여 매고 입을 막았다.

놀라 크게 떠진 눈을 마주 보았다.

“네가 불법인지 아닌지를 왜 따져. 여기서 너 죽으면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데.”

“읍! 으읍!”

“법을 너무 믿지 마. 너도 그거 안 믿으니까 인생 쉬운 줄 아는 거잖아.”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림자가 남자를 내 앞으로 대령했다.

“난 나름 인류애가 넘쳐서 죽이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내 인류애가 개복치라 네가 말할 때 죽어 버렸어.”

발을 뻗어 내 앞에 무릎 꿇려진 남자의 손등에 올렸다. 남자가 발버둥 쳤지만 그런 남자를 그림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옭아맸다.

“남의 인생 조지려고 할 땐 본인 인생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놀랍게도 방 안에 누구도 내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강유진도, 그녀의 조수도, 이호연도. 심지어 내게 죽이지는 말라고 했던 주세진조차.

“하지만 죽이지는 않을게. 솔직히 그거 뒤처리하는 거 귀찮을 것 같아. 특별히 선택권도 줄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만약 이 남자가 찍은 사진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빨리 남자를 붙잡고 무릎 꿇릴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셋 중 골라. 다신 그런 짓 못 하게 손 하나 자른다. 앞으로 살면서 생각하는 걸 포기한다. 아, 이건 내가 직접 해 줄게. 내가 정신 계열 마법사라서, 그거 잘해. 사람 정신 나가게 만드는 거.”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뭐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그걸 내가 왜 들어줘야 할까.

“마지막은 꽤나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이야. 사진을 찍어. 올려. 네가 직접. 너를.”

당해 봐야 알지.

“저는 불법 촬영을 한 범죄자입니다. 절 보면 욕을 해 주세요. 남의 인생 조지는 놈인 저는 저 스스로 인생을 조지겠습니다. 제 인생 제가 조져 봐야 제가 한 짓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

“똑같이 써서, 네 얼굴 아주 잘 나오게 찍어서 올려. 매일 올려. 사람들이 길 가다 널 봐도 알아볼 수 있게. 내 기분 풀릴 때까지. 내가 널 잊어도 매일 올려.”

그림자가 남자를 놔주었다. 주저앉은 남자에게 웃어 주었다.

“너, 전에도 남의 사진 찍어서 올렸다며? 이참에 그때 못 받은 벌 다 받는다고 생각해. 내가 말한 거 외에 쓸데없는 말 올리거나 어디 가서 입 나불대면.”

손을 뻗어 남자의 목을 낚아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의 몸이 질질 끌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남자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너 하나 죽이는 게 어려울까.”

그러니까 우리.

“쉽게 쉽게 가자. 응? 합법적으로 좋잖아. 내가 이상한 사진을 올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잘 나온 네 얼굴이잖아.”

네가 그랬잖아.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고. 불법 아니라는 듯이. 뭐가 문제야.

짓밟고 있던 남자의 손등에서 발을 치웠다. 이호연에게 기대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본 강유진의 조수가 남자를 질질 끌고 나갔다.

그것을 흘겨보다 이호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깐 머뭇거리던 이호연이 내 손을 잡았다. 그런 이호연의 손을 마주 잡으며 생각했다.

이거 참 일 꼬였다고. 강제로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게 생겼다. 그럼 적어도 내 모래성은 나 스스로 치울 수 있게 해야겠지.

예전에도 한번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정부에서 전직자를 관리하는 정부 기관을 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그때 생각했었다.

아예. 정부조차 건드릴 수 없는 길드에 들어가 버리자고. 내 목줄을 못 잡게 하려는 게 아니다. 난 애초에 순순히 목줄을 걸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진도 퍼졌고. 이제 정부를 비롯한 미국에서까지 날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니, 이미 찾아냈겠지. 내가 뭐, 무도회장에 구두 잃어버리고 온 신데렐라도 아니고 찾아내는 데 국가가 움직이네.

이러다 진짜 잃어버린 내 꽃신 들고 찾아오는 건 아닌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있잖아요.”

내 목소리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강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호연은 조심스레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주세진은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설명 안 해도 돼서 편하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길드장님.”

정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오히려 한 수 접어 줘야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었다. 주세진은 상황에 휩쓸려 길드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이번에도 상황에 휩쓸렸다는 것은 맞지만 저번이 자잘한 물결이면 이번에 파도였다. 기다리면 쓰나미가 몰려올 것이다. 쓰나미일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이미 망한 거 미리 편해지기라도 해야지.

난 신데렐라도 아니고 귀찮은 것도 싫으니 국가가 날 찾아 오기 전에 알아서 피난처를 찾아야지.

“학교는 휴학할래요.”

“그건―.”

“이미 망했어요. 내가 학교를 다닌 건 그게 그냥 일상이어서인데. 이제 다녀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 시선들 틈에서 내가 버텨야 할 필요도 없고.

“자퇴 아니고 휴학. 나중에 다시 복학하죠, 뭐.”

아, 그럼 이호연이랑은 만나기 힘들어지려나. 힐끔 이호연을 올려다보니 이호연은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나도 휴학할래.”

이호연의 말에 인내심 끊긴 보호자님이 결국 입을 열었다.

“넌 복학한 지 한 달도 안 지났어!”

패기 넘치는 호랑이는 그런 보호자님에게 태연한 낯으로 말했다.

“그럼 취업계를 내지, 뭐.”

이야. 패기 봐. 주세진이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차피 리블 길드원은 리블이라는 기업에 입사한 거랑 똑같은 거니까 상관없나 싶기도 하고.

잔소리할 준비가 된 보호자님과 그런 보호자에게 앞발 들고 대들 준비까지 된 호랑이를 두고 강유진과 방을 나왔다.

강유진은 해맑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나는 그런 강유진을 아연한 얼굴로 보다가 재촉 어린 눈빛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호연이요.”

부모 이기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

다음 날 학교에 가자마자 과 사무실에서 휴학 신청을 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휴학 신청 기간이었다. 이호연은 어떻게 했으려나. 취업계 내려나. 잠시 고민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주세진이 어련히 잘해 줬을까.

마음 같아선 나 또한 휴학 말고 취업계를 내고 싶었지만 1학년은 취업계가 불가능했다. 조금 아쉬웠다. 이미 대학 생활 글러 먹은 거 차라리 빨리 졸업하는 게 나을 텐데.

캡 모자를 깊이 눌러 쓰며 복도를 걸었다. 색색이 물든 단풍나무들이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가을의 정점이었다.

“1년도 못 다니고 휴학이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옥도가 수습되고, 부모님을 찾고. 나는 입학한 대학에 다니면서 그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파묻혀 살다 죽을 줄 알았는데.

“…….”

차가운 유리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팔짱을 꼈다. 대학교. 이미 옛날에 미련을 버렸었다.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는 수단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조별 과제, 그냥 과제, 시험, 과 행사. 피곤하고, 재미없고, 짜증 났는데. 일부러 친구도 열심히 안 사귀었다. 사귀고 싶지 않았다.

지옥도 이후 많은 이들과 강제로 연락이 끊기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다시 볼 수 있는 몇 명은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모이면 빈자리가 너무 선명해서였다.

“빨리 졸업이나 하고 싶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인생도 감정도 마음대로다. 내 선택대로 된 것은 내 인생의 지분 중 얼마나 될까. 어쩌다가, 주변 상황에 이끌려, 그냥 그래야 했으니까. 그것들로 이루어진 내 인생의 지분은 얼마나 많을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면, 아직도 건물에선 새집 냄새가 난다. 약품 같기도 한 그런 냄새가. 복학할 때면 이런 냄새가 사라진 상태일까? 이왕이면 그 전에 돌아오고 싶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이 지루한 일상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담긴 이름을 보고 웃었다. 지분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오롯한 내 선택 중 하나가 형체를 갖고 나를 불렀다. 그거면 됐다.

“어디야?”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화면 너머 낮은 목소리가, 목소리만으로도 애정이 흘러넘치는 게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그럼 나름 성공한 인생이었다.

이호연과 만나기로 한 정자에서 멍하니 발을 까닥거리며 하늘을 봤다.

미국의 학자는 과연 얼만큼의 정보를 갖고 있을까. 미국은 정보 독점의 욕심을 내보일까, 아니면 모두와 나누려 할까. 우리나라 높으신 분들이 주세진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들까.

생각이 이어졌다. 재수 없게 일이 꼬였지만 질질 끌려다닐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내게 유리할까. 상대는 국가였다. 국가급에게 반발할 수 있는 건.

역시 같은 국가인가?

“…….”

그럼. 아예 차라리….

“저기요!”

“…….”

날 부르는 목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턱을 괴고 호기심이 담긴 얼굴을 보았다.

“그, 경영 1학년 유하연, 맞죠?”

“…….”

“아,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 조금 궁금하게 있어서요.”

초면에 궁금한 거 묻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상한데.

“진짜 류예요?”

질문 참 뻔하다. 과 사무실에 가는 길에 저 질문을 몇 번 받았더라. 과 사무실에서도 몇 번 들었더라. 참, 사진이 빨리도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글쎄요.”

심드렁한 내 대답에 남자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귀찮았다. 남의 일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 건지….

“아, 그러지 말고 제대로 좀 말해 줘요. 진짜 류예요?”

“저기요.”

남자의 손을 쳐 내며 말했다.

“그쪽이 류면 대학 다닐 거예요?”

“…네?”

“하늘 조각 돌면서 돈 잘 벌고 언제든 길드에 들어갈 수 있는 몸값이 백지 수표인 사람이 굳이 조별 과제와 시험이 넘쳐나는 대학에 다닐 것 같아요?”

“아…뇨.”

“그렇죠?”

난 다녔지만. 어물거리는 남자를 보다 자리를 떠났다. 이호연에게는 먼저 리블의 사옥으로 가 있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시험 대체 과제냐 최소 점수를 받을 것이냐로 열심히 교수와 합의 보고 있을 이호연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사람 많은 곳에 있는 것이 슬슬 피곤했다.

난 MBTI E가 아니라 I인가 보다. 집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서정은이랑 인사라도 하고 가려고 했는데. 다음에 따로 연락해서 만나든가 해야겠다.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인적 드문 건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건물의 벽으로 걸어가자 그림자가 날 삼켰다.

마법의 기차가 있는 기차역으로는 가지 못하지만, 실용성은 더 좋은 그림자 이동기였다. 리블의 사옥 그중에서도 주세진의 방으로 이동해 소파에 몸을 던졌다.

벗겨진 캡 모자를 낚아챈 깨비들이 낑낑거리며 테이블 위로 모자를 올리는 것을 구경했다. 방 주인은 안 보이고 이호연도 없고. 심심하다.

몸을 빙글 돌려 천장을 바라보다 손목의 커넥터를 켰다. 이호연이든 주세진이든 둘 중 하나가 올 때까지 시간이나 때울 생각이었다.

[로딩 중~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로 ᕕ( ᐛ )ᕗ 딩٩( ᐛ )و중 (૭ ᐕ)૭]

[접속 확인. 닉네임 류. 전직 명 도깨비 공주]

여전한 깜찍 깨발랄한 이모티콘을 멍하니 눈으로 훑었다. 내 앞에 나타난 홀로그램을 톡톡 치며 중고 거래에 올라온 물건도 구경하고 오랜만에 자유 게시판도 들어가 보았다.

커넥터 자게는 오늘도 대학교 대나무 숲 수준으로 잡다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

뭐지.

[제목: 신데렐라를 찾습니다.]

이상한 제목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것을 클릭했다.

[제목: 신데렐라를 찾습니다.

글쓴이: 호잇이둘이면둘리죠 (무소속)

다들 안녕하세요! 제가 신발 하나를 주웠는데요. 이 신발의 주인을 찾고 싶어 글을 올렸답니다. 신데렐라를 찾는 법 다들 아시죠?

왕자가 자기 나라를 아주 뒤집어 놓는 수준으로 찾았잖아요. 그걸 보고 느낀 게 있어서요. 사람은 저렇게 찾아야 하는구나. 나라를 뒤집는 수준이면 찾거나 제 발로 나타나거나 하잖아요.

지금 우리나라에도 신데렐라 한 분이 계시죠? 그런데 제가 딱 신데렐라를 찾을 신발을 찾았지 뭐예요.

(사진)

자. 저 검은 꽃신. 요즘 시대에 저거 신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참고로 지하철역에서 주웠답니다. 최근 한창 돌고 있는 사진도 배경이 지하철역 벙커였죠?

공주님. 진짜 공주님이 되어 버렸네요. 그럼 제가 왕자인가요?

신발을 들고 찾아가겠습니다. 그때 만나요.]

“…하.”

이건 또 어떤 또라이지? 그 돌무더기에서 저걸 찾았다고?

“누가 신데렐라야.”

국가적 공개 고백 당한 공주님 될 생각 없었다.

[<댓글>

류(리블): 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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