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이해 (7/34)

#몰이해

“이제 내려 줘.”

이호연은 내 요구에 순순히 날 내려 줬다. 우리 앞에 벙커의 입구‘였던’ 것이 보였다.

“이래서 괴물들이 스크린 도어 밖에 있었구나.”

지하철의 벙커는 선로 안, 맨홀 뚜껑처럼 보이는 곳이 입구였다. 지하철보다 더 지하인 곳.

하지만 지금 그 입구는 무너진 천장에서 떨어진 돌무더기에 깔려 보이지도 않았다. 천장에선 아직도 돌조각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깨에 떨어진 회색 가루를 손으로 털었다.

“전직자가 같이 있었나 봐요.”

이호연의 말에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진 천장의 모습이 인위적이었다.

천장을 무너트리는 게 목표였다는 듯, 주변은 제법 온전한 것에 비해 입구 근처의 천장만 폭탄 맞은 꼴이었다.

누가 봐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모양새였다. 괴물들이 아예 입구 자체를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듯했다.

그 의도대로 입구를 찾지 못한 괴물들이 스크린 도어 밖까지 기어 나온 것 같고. 문제는 따로 있는데.

내 시선이 벙커의 입구였던 돌무더기에서 그보다 더 뒤에 있는 것으로 향했다. 그것은 이 어두운 터널 안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위험해 보여?”

“글쎄요. 지금 상황에선 이미 늦은 것 같네요.”

하필이면 지하철 선로, 그것도 벙커의 입구 근처로 떨어진 하늘 조각. 이미 괴물들을 다 토해냈는지 눈으로 보기엔 예쁘기 그지없는 하늘 조각은 이 지옥 같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얌전히 빛나고만 있었다.

바닥에 꽂힌 그것을 툭툭 쳐 봤지만,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이 경우엔 밖으로 토해낸 괴물을 다 없애야 공략된다는 의미였다.

이 난리 통을 만든 원인 중 추가로 떨어진 하늘 조각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아마 기존에 떨어져 있다 아직 공략되지 않은 모든 하늘 조각이 이 상황에 원인일 것이다.

얌전히 있던 조각들에서 뜬금없이 괴물이 쏟아져 나왔을 거고. 게이트가 터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민간인들과 미숙한 전직자들이 얼마나 잘 대처를 했을지….

아마 벙커에 들어간 사람들은 평생의 운을 다 쓴 사람들일 거다.

벙커 근처에서 괴물을 토해내는 게이트를 피해, 괴물 여럿은 상대 못 해도 천장을 무너뜨릴 정도의 재능은 있는 전직자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그리고 그중에 엄마가 있었다. 무사한 것을 알아도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차가운 돌무더기에 손을 올렸다. 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모래알 같은 것들이 내 손에 들러붙었다. 누군가의 비석 같기도 한 그 감촉을 느끼며 류를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돌무더기의 틈새.

괴물은 들어가지 못하지만, 사람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틈새가 보였다. 아직도 살짝 떨리는 팔에 힘을 주고 다리를 돌무더기에 올렸다.

“난 일단 벙커 안으로 들어가 볼게. 오정인 좀 여기로 불러 줘.”

“…조심해야 해요. 류.”

“걱정하지 마.”

걱정할 필요도, 위험할 것도 없었다.

이호연이 오정인을 부르면 공간 이동 스킬로 저 벙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에 구조할 수 있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굳이 사서 고생하는 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그저 엄마를 걱정하는 자식의 마음이 이성을 이기고 실용성을 버리게 한 결과물이 뿐이었다.

탁. 탁. 작은 돌조각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암흑뿐인 틈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돌무더기의 틈새를 파고드는 건 고역이었다. 안은 좁았고 어두웠다. 까슬한 돌무더기에 쓸린 손바닥과 뺨이 쓰라렸다.

도중에 신 한쪽이 벗겨졌는지 오른쪽 발이 휑했다. 얼마나 내려왔는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잃어버린 신 한쪽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랑한테 나중에 사과해야겠네.”

기껏 신경 써서 챙겨 준 걸 잃어버렸으니.

발바닥이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발톱 끝이 아렸다. 손끝은 떨렸다.

슬슬 정신적으로 지칠 때쯤이 돼서야 틈새가 넓어졌다. 수월하게 돌무더기를 타고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것이 아닌 입구 도중에 돌 하나가 걸려 완성된 돌탑은 밟는 족족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가기 쉬워진 만큼 안전성이 떨어졌다.

“뭐 이렇게 중간이 없어….”

좁거나, 위험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짜증 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심조심 돌무더기에 발을 옮겼다. 하늘 조각 안에서 암벽 타기는 해 봤지만, 그 반대인 내려가기는 처음이었다. 이게 더 힘들었다.

“아…!”

불안 불안하게 쌓여 있던 돌이 우르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밟은 돌 하나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다 돌탑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결국 무너졌다.

재수도 없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돌은 피해도 무너지는 돌무더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요란스러운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리고 돌무더기와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간간이 등으로 떨어지는 돌멩이들이 꽤 아팠다.

내가 진짜. 안 쓰려고 했는데.

과정이 어떻든 일단 벙커까지 직진 통행이기는 했다. 입구 쪽에 걸려 있던 커다란 바위에 가까운 돌이 안쪽으로 빠지고, 제법 넓은 벙커가 보이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도중 확인한 사다리는 이미 박살이 나 있었다. 내 머리 위에는 아직도 많은 돌이 떨어지고 있었다. 맞으면 죽을 거 같은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매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돌무더기를 지켜보다 바닥과의 거리가 대략 5m쯤 됐을 때쯤 손을 휘저었다. 우중충한 회색 시멘트 바닥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나를 감쌌다.

돌을 떨어트린 수면의 움직임처럼 넓게 펼쳐진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노리는 돌무더기를 낚아챘다.

날 조심히 바닥에 내려 준 그림자가 점점 작아지더니 내 그림자 속으로 쏙 사라졌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내 주위에는 바위 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벙커의 입구인 천장 한쪽을 보는데, 또 중간에 돌이 걸렸는지 더는 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후….”

와. 확 지치네.

피로가 몸에 묵직하게 매달렸다. MP가 없어 HP까지 쓴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란한 소리와 입구에서 떨어지는 돌무더기에 기겁하고 피해 있던 벙커 속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 또한 그들을 둘러보며 엄마를 찾았다. 누군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봤고 누군가는 희망을 담아 나를 봤다. 마주치는 눈 중엔 경계심을 담은 눈도 있었다.

그런 다양한 시선을 전부 무시하고 두리번거리던 내 시야에 드디어 원하던 사람이 잡혔다.

하얀 쇼핑백 하나를 들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제일 예쁜 우리 엄마. 나는 엄마를 향해 활짝 웃었다.

“너…, 너!”

“엄마.”

엄마는 더듬더듬 말하며, 나보다 더 지친 걸음으로 내게 오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나는 달려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보다 키가 작아진 따뜻한 몸을 꼭 껴안았다.

그런 내 행동에 나처럼 나를 꽉 안아 주던 엄마가 갑자기 나를 떼어 놓더니 뺨이며 머리며 매만지다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 이 피는 또 뭐고!”

“그거… 내 피 아닌데….”

내 뺨에 말라붙어 있는 피를 옷소매로 닦는 엄마를 말리며 말했다. 걱정하는 엄마에겐 미안했지만, 그거 정말 내 피가 아니라 딴 새끼 피였다.

“네 피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도, 지금도 이렇게…….”

“어…. 그거 그냥 쓸린 거….”

내 입장에선 상처 축에도 못 드는 상처를 보며 엄마는 울었다. 깨진 손톱. 갈라진 손끝. 잔 상처 그득한 손등과 여기저기 돌에 쓸린 자국들.

힐러한테 갈 필요도 없이 나 스스로 자가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자잘한 상처였다. 물론 지금은 사용 불가능이지만.

따끔거리는 상처들을 훑어보다 엄마에게 말했다.

“괜찮아, 엄마. 이 정도는 힐러들의 힐 한 번이면 다 나아.”

“치료하기 전에 아픈 건 똑같잖아!”

“…….”

그건 그렇지….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치료받기 전에 아픈 건 똑같지. 하지만 나는 전직자라 이런 상처는 아무렇지 않은데….

옛날에는 이런 상처 하나도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났는데. 랑과 만나기 직전에도 넘어지면서 까진 무릎이 너무 아팠었다.

언제부터 상처에 대한 내 기준이 바뀌었더라.

“…….”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걱정. 그 단어의 뚜렷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렇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통각의 기준이 다르고, 상처를 입은 대상이 다르니. 만약 나도 엄마가 나와 똑같은 상처가 있었다면 지금의 엄마보다 더 걱정하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엄마 옷에 묻은 흙 조금도 이렇게 속이 상하는데. 내 손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엄마를 보며 나는 느릿느릿 말했다.

“응…. 아프다. 우리 빨리 나가자.”

어차피 오정인이 올 때까지 못 나간다. 그 사실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내 손을 매만지다 옷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어 주는 손길이 따스해서인지. 안도감에 신경 줄이 흠뻑 젖은 것인지. 나는 히히 웃으며 엄마의 손을 꽉 쥐었다.

“왜 웃어.”

“히….”

“하여간…. 신발은 또 어쨌어.”

“잃어버렸어.”

엄마가 ‘어휴’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목소리엔 여전히 울음기가 그득했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모르는 척을 했다.

마주 잡은 손이 따듯했다.

“저기….”

“?”

한참 그 손을 매만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사방이 꽉 막힌 벙커의 특성상 그 목소리는 울리듯 이 공간에 퍼져 나갔다. 듣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연이 맞구나….”

“어!”

날 부른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순한 얼굴. 갈색 단발머리. 여기저기 흙이 묻었지만 제법 양호한 모습의 여자는 서정은이었다.

천장을 무너뜨린 전직자가 이 언니였구나.

안도감과 반가움을 담은 눈이 나를 보며 예쁘게 휘었다.

“역시 너도 전직자였구나.”

“어떻게 알았어요?”

“맨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부수길래….”

아, 그거.

머쓱한 기분에 괜히 머리끝을 매만졌다. 엄마와 인사를 주고받는 서정은을 보며 고마움이라는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만약 서정은이 아니었으면, 저 언니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엄마를 비롯한 다른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감정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고마워요. 언니.”

“아냐. 내가 뭘 했다고.”

서정은이 손을 저었다, 웃는 모습이 순해 보였다. 내 시선은 그런 서정은의 손으로 향했다. 피가 말라붙어 손등에 딱지처럼 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괴물 여럿은 못 죽이지만 간신히 천장은 부술 힘이 있던, 그리고 그걸 실천할 용기가 있던 손이었다.

자기 자신만 챙겼다면 생기지 않았을 상처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고맙지 않을 수 있겠어.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얼마 안 남은 힘을 쥐어짜 푸른 불을 일으켰다. 작은 불덩어리가 서정은의 손등을 덮었다.

일렁거리며 움직이는 푸른 불을 본 서정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이 사그라지고, 드러난 손등에는 작은 잔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참으며 서정은과 눈을 맞췄다. 본인이 한 일의 가치를 알면서도 스스로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다정한 사람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

고마워요. 몇 번을 말해도 부족했다.

“우리 엄마 살려 줘서. 다른 사람 두고 도망가지 않아 줘서.”

“…응.”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걱정거리가 다 쓸데없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누가 봐도 남들과는 다른 동양풍 옷을 입은 내 모습이라든가. 내가 그 모든 게 베일에 싸인 도깨비 공주 ‘류’라는 걸 들킬 상황이라든가.

지옥도 이후. 죽어도 전직자랑은 같이 못 산다는 일부의 사람이 보내는 부정적 시선이라든가.

“…….”

벙커의 벽에 바짝 붙어 나와 서정은을 경계 어린 눈으로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거부감을 감출 생각을 안 하는 몸짓. 원망과 분함. 왜 이제야 왔냐는 질책의 감정을 담은 눈빛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괜찮아.

내 눈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확인한 엄마는 내 손을 꽉 잡았고 서정은의 표정은 조금 굳었다.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봤음에도 나는 웃었다.

괜찮아, 정말로.

나를 이해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나 또한 저들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사람 사는 게 원래 다 그런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만 안 한다면. 우린 모두 쓸데없는 감정싸움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

날 걱정스레 쳐다보는 엄마에게 말했다. 유독 나를 노려보는, 헛생각하고 있을 남자와 눈을 맞추면서.

빨리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 좀 앉아 봐.”

나를 이끌고 바위에 가까운 돌덩어리 쪽으로 간 엄마가 내 어깨를 꾹 눌렀다. 깜찍한 소형견이 앞발로 꾹 누르고 도망갈 때의 힘 정도였지만 나는 얌전히 돌 위에 앉았다.

연신 내 옷자락에 묻은 흙은 털던 엄마의 손끝이 내 오른쪽 바짓단에서 멈췄다. 하얀 바지 아래 상처투성이의 발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이래서 신발이 필요하구나, 같은 가벼운 생각을 했다.

발을 슬쩍 뒤로 뺐다. 내 생각은 내 생각이고 엄마의 생각은 다를 테니까. 한 끼 굶으면 죽는 줄 아는 손자를 보는 할머니의 고운 심정처럼 내 발을 볼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음…. 아프…다?”

“칠칠맞게 신발이나 잃어버리고.”

“히….”

“웃음이 나와?”

괜찮다고 하면 싫어할 것은 알기에 일부러 엄살을 부려 봤지만, 안 하느니만 못했나 보다. 나를 흘겨본 엄마가 나를 핀잔했다.

서정은은 그런 우리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쭈뼛쭈뼛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벙커 안에 있더라도 전직자 근처에 있어야 더 안정감을 느끼는 심리인 걸까.

몇몇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묘한 기대감을 품는 그들과 달리 나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 적대적이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만.

꼬마 도깨비 하나를 이호연에게 보냈다. 일단 여길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꼭 이럴 때 쓸데없는 짓 하는 사람이 하나둘 있거든.

작은 그림자 조각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엄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엄마는 손목에 걸고 있던 하얀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내느라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

“오늘따라 사고 싶더라니. 네가 칠칠맞게 신발 잃어버릴 걸 알았나 보네.”

“그러게. 나한테 없는 감이 엄마한테 있나 보다.”

실없는 소리. 내게 그리 말한 엄마가 손수 내게 운동화를 신겨 줬다. 꼼질 거리는 손끝에서 리본 모양이 완성되었다. 상처투성이던 오른발이 하얀 운동화 밑으로 가려졌다.

“짝짝이네.”

“왼쪽도 신어야지.”

왼발에 신고 있던 꽃신을 벗겨 다른 쪽 운동화까지 신긴 엄마가 내 발 위에 올린 손에 힘을 줬다. 가벼운데 묵직했다.

숙인 고개를 들지 않는 엄마를 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새벽만 되면 맨날 없더만.”

“…….”

“인형인 줄 알았던 것들이 움직이다 눈이 마주치면 아닌 척하고.”

아, 깨비들….

“어린애가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의심 한 번을 안 하겠어.”

“…그렇지.”

티가 안 날 리가.

“아빠도 알아?”

“글쎄다. 네 아빠는 눈치 없잖아.”

너무해. 매정한 엄마의 말에 또 웃음이 났다.

“집에 가서 물어봐.”

“응. 집에 가서 물어봐야겠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깨비가 손을 흔들었다. 상소문에 적힌 숫자는 15. 최소 15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호연에게 갔다가 답을 받아 오는 데만 2분? 3분? 그럼 일단 12분 정도 남았나.

슬쩍 손가락을 까닥거려 봤지만 조금 전에 무리해서 사용해서인지 그림자가 영 맥이 없었다. 이동은 무리다.

오정인 같은 공간 쪽 히든 전직자가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분함? 원망? 그쪽은 아니다.

비웃듯 올라간 입꼬리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뜻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귀찮아질 것이란 게 예상 가능했다.

남자를 발견한 서정은의 표정이 굳었다. 이래서. 이러니까 힘숨찐 같은 게 많은 거다.

벗어 놓은 왼쪽 신을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걸쳐진 두루마기가 부드럽게 하느작거렸다.

푹신한 운동화의 감촉을 느끼며 엄마와 서정은 앞으로 나섰다. 날 붙잡고자 하는 손을 피했다. 웃는 낯의 나를 보며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가 고압적으로 보이는 것이 목적인지 나를 사납게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내 질문에 남자가 벙커 구석을 향해 삿대질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저 구석에 있어.”

“왜요?”

“몰라서 물어?”

“몰라서 묻겠어요?”

괴물을 상대할 때는 사람, 사람 대 사람일 때는 괴물. 그것 말고도 이런 시선도 있었다.

괴물이든 사람이든 구별이 필요 없는 살인마 자식들, 혹은 예비 살인마. 같은 사람이라는 선에 두면 안 되는 것들.

시간은 흐른다.

12분. 그다지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사람은 많은 짓을 할 수 있다.

그중 이렇게 고조된 상황에서 목소리 큰 이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짓이 바로 선동질이다. 매우 짜증 나고 성가신 짓거리다.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살인마 자식들…. 너희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아?”

“그럼 벙커에는 왜 들어와요. 딱 보니 전직자가 괴물 상대해 주는 시간에 벙커에 제일 먼저 기어들어 왔구먼.”

양호하다 못해 깨끗한 옷. 상처 하나 없는 몸. 천장이 무너지기 전, 괴물과 대면하기 전에 벙커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눈에 훤했다.

“그렇게 전직자가 싫으면 도움도 받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가 선동질을 할 때 가만있으면 안 된다. 무논리도 논리가 되는 것이 선동질이었다. 심지어 가만 보면 비논리적인 것에 사람들은 더 흔들렸다. 참 알 수 없는 심리다.

“닥―!”

“닥치라고 할 거면 식상하고.”

“이―!”

쾅!!

법보다 가까운 게 주먹이라고들 말한다. 물론 법을 따라야 하지만 때론 주먹질 한 번으로 모든 게 해결될 때도 있었다.

돌 하나 부수는 데에는 그림자를 감을 필요도 없었다. 박살 난 돌덩어리를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역시 나는 마법사보단 전사 쪽이라니까.

“그쪽 같은 사람은 우릴 사람 취급 안 하죠. 그러면서 괴물을 죽이고 하늘 조각을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굴고. 기회다 싶으면 한번 털어먹어 보고 싶어 하고.”

“…….”

“솔직히. 그러는 거 보면 짜증 나는데.”

대응하면 피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얼마나 걸려 도착하는지 모르는 비전직자 구조대를 기다리긴 싫죠? 여기서 나가려고 전직자의 도움을 받겠지. 그렇게 나가면 또 우리를 욕하고.”

“…….”

주변을 둘러보니 어색하게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경계하며 벽에 붙어 움직이지 않던 이들이 그런 사람들 사이에 쏙쏙 껴 있었다.

눈앞에 남자의 무리였다. 조금 전에 자기들끼리 속닥거린다 싶더니 겨우 이런 일 꾸미려고 그 짓을 한 건가?

누구 하나가 선동질했겠지. 어차피 우리 다 무사하니까 저 어려 보이는 전직자들 살살 굴려 합의금 짭짤하게 벌어 보자고.

서정은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치 빠른 조장님은 엄마를 데리고 좀 더 물러났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다시 남자에게 말했다.

“그렇게 싫으면 애초에 도움을 받지 마.”

“…….”

“그쪽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우리도 생각하고 말할 줄 알아.”

싫으면 싫어할 권리도 있어.

“우리도 선호도라는 게 있어서 그쪽 같은 사람, 별로 구해 주고 싶지 않아요.”

벌벌 떠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내렸다. 우드득― 하고 옷자락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닥거렸다.

“어쭙잖은 선동질할 생각하지 마.”

“…….”

“내가 한 대 치기라도 원하나 본데… 내가 원래 마법사라 힘 조절이 잘 안 돼. 잘못하면 한 번에 훅 간다? 신체 계열 전직자 전용 법률이라도 믿고 깝치나 본데 난 마법 계열이라서 한 대 맞고 어디 한군데 잘못돼도 평생 놀고먹을 합의금 안 나온다?”

한 대 치기라도 해 봐. 그게 신체 계열이라면 법적으로 합의금이 짭짤하고 신체 계열 아니라도 곤란해지기 싫어 돈으로 해결하려 드니. 일종의 신종 돈벌이였다.

그게 전직자와 민간인의 차이였다. 똑같이 사람을 패도 사회적 지탄의 수준이 달랐다. 어떻게든 맞은쪽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 하고, 앞뒤 상황이 어떻든 사람들은 민간인의 편을 들어 준다.

뭐. 선동질하는 인간 중에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내 눈앞에 남자는 맞는 듯했다. 벌벌 떨던 남자가 손에서 힘을 풀자 기다렸다는 듯 도망갔다.

어차피 안전성도 확보되겠다, 이참에 돈이나 벌어 보자 생각했겠지.

진짜 전직자가 싫은 사람은 애초에 말 안 걸거든. 어쭙잖은 선동질하는 것들과 달리.

대부분의 선동질하는 것들은 전직자를 적당히 싫어하고 잘만 하면 돈벌이 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전직자가 싫으면 근처에도 안 온다. 저기 저 할아버지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어르신은 이 상황에 관심 없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분위기 타며 슬금슬금 움직이던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고 어물쩍 선동질에 휘말리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몇 명은 멀어졌고 몇 명은 여전히 내 주위를 알짱거렸다.

침묵과 어색함.

짜증과 성가심. 꼬이는 속.

그림자에서 살며시 나온 팝콘만 한 작은 손이 내 바지 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시간 됐다.

허공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곧이어 두 개의 인영이 물을 부은 수채화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이곳에 나타났다. 오정인과 이호연이었다.

눈이 마주친 오정인이 내게 눈인사를 보냈고 나도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다. 가면이 없어도 알아보는 언제나 뚜렷한 아이덴티티적 옷이었다.

특이한 능력을 갖춘 전직자들을 다룬 프로를 봤는지 오정인을 본 사람들이 살았다며 울고, 서로를 껴안았다.

오정인은 그런 사람들이 익숙한지 차분하면서도 발랄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한곳으로 모이라며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부산스러운 사람들을 바라보다 내 쪽으로 다가온 이호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표정이 굳었다. 회색 눈동자가 바쁘게 내 뺨이며 내 손이며 상처가 있는 곳을 훑고 있었다.

“많이 다친 건 아닌데.”

“그래도요.”

걱정도 많지. 이호연도, 엄마도.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에 선동질 때문인지 엄마와 서정은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날 걱정스레 보는 둘에게 웃어 주었다.

이 정도는 선동질 축에도 못 드는 수준인데.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가라 손짓으로 가리킨 뒤에야 엄마와 서정은은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아직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어르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정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어르신을 설득하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어르신. 지금 나가셔야 해요.”

“…….”

“어르신….”

말대답조차 해 주지 않는 태도에서 절대 꺾을 수 없는 고집과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졌다.

“빨리빨리 갑시다!!”

조금 전 선동질을 하던 남자가 사람들 틈에서 소리 질렀다. 몇몇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재촉 어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

정말로 전직자가 싫은 사람은 우릴 상대조차 해 주지 않는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

그때.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그때. 우릴 구해 주지 않았어. 그때. 내 가족의 죽음을 방관했어. 그때 충분히 도와줄 힘이 있었음에도. 그때, 우리를 수탈하고. 그때, 우리를 협박하고. 그때, 우리를 쉽게 죽이던.

그때, 그때, 그때. 누구보다 강하던 너희.

그때, 그 지옥을 끝낸 것도 너희.

저들에게 우린 어떤 존재일까. 아득한 바다의 심해 같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결코 풀 수 없는 미궁에 갇힌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빨리 나가자고. 그 재촉조차 익숙한지 오정인의 얼굴엔 당혹감이란 감정 한 자락 드러나지 않았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맛보고 싶다면 밑바닥까지 떨어져 보면 된다. 가식도, 동정도, 내숭도 없는 온전한 사람의 면모를 느껴 볼 수 있으니까.

오정인이 움직였다. 사람들에게로 돌아왔다. 소란스럽게 굴던 이들의 입이 만족감으로 다물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다 다시 어르신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눈이 마주쳤다.

분함? 원망? 아니, 그보다 더 아연한 감정. 어떤 언어를 갖다 붙이든,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한들 결코 표현하지 못할 감정의 눈이었다.

“…….”

손가락 끝을 까닥거렸다. 꼬마 깨비를 태운 그림자 조각 하나가 조용히 어르신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유일하게 그것을 눈치챈 이호연이 내 손을 잡고 오정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밤이 끝났다.

***

오정인의 이동 능력이 최고인 이유는 나처럼 접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공간과 공간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저번에 둥글게 둥글게 손잡으라고 했던 것은 장난이었는지 이번에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정인은 나와 이호연이 합류하자마자 곧바로 공간 이동을 전개했다. 말 그대로 눈 한 번 깜박이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안전 구역으로 이동했다.

나라에서 지정한 안전 구역은 결계 쪽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전직자들이 관리하는 곳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칭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빽빽한 선과 선, 도형과 문자들로 이루어진 불투명한 막이 이 근방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요한 보랏빛 감도는 결계를 보며 내가 컨디션 좋은 상태로 세게 치면 저게 무너질까 고민해 보았다. 전력으로 치면 무너질 것 같기도 했다.

내게로 걸어오는 오정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관두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번 게이트 안에서 보았던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아! 그게… 치료받지 않으실래요? 길드장님이 시키셨는데.”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오정인은 내게 치료받을 것을 권했다. 주세진의 명령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길드장님이 치료받고 여기 있으면 곧 오겠다고 기다려달래요.”

울고 웃고 살았다며 소리치는 사람들을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는 다행히 별달리 다친 곳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엄마에게 치료받을 것을 권했지만 빨리 가 보라고 내 등을 때리는 재촉만 돌아왔다.

아야, 아야. 대충 아픈 척을 하며 오정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뒤를 이호연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엄마의 시선이 그런 이호연에게 향했지만, 따로 물어보지 않았기에 나도 별다른 말 하지 않았다.

물어보면 그때 소개해 주지, 뭐. 오정인을 따라 걸으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구조대는?”

“아마 금방 도착할 거예요. 전직자랑 함께 갔으니 돌무더기 없애는 것도 빠를 거고.”

“…응.”

다행이네. 내 중얼거림을 들은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르신도 전직자가 아닌 사람의 도움은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 생각해?”

“?”

“그 어르신 말이야.”

내 질문에 이호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류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먼저 물었는데.”

“사실 알고 있잖아요.”

뭐, 그렇지.

나를 핍박하고 나를 구원한 존재.

그들과 우리의 감정의 골은 몰이해적이라, 이해하려 애쓰고 애쓰면 오히려 꼬인다.

그때, 너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니 나는 너를 받아들이겠다. 그때, 나도 살고 싶어 그랬지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나를 싫어하는 너를 이해한다.

그러니 우리 서로를 받아들이자. 이런 꿈같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었다.

말 몇 마디와 몇 번의 대면으로 정리될 감정이 아니었다. 결국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서로서로 받아들일 시간. 아니면 아예 바스러지고 없어질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 편승한 결론은 결국 후자일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그때까지 우린 그냥 살아가야 하는 거다.

어느새 안전 구역의 힐러들이 모인 곳에 도착했다. 오정인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한 뒤 누군가를 찾으러 쪼르르 달려갔다.

“리블 길드원들 닉네임이 왜 그런지 잘 알겠네. 확실히 받아들이기 쉬워.”

“역효과도 있지만요. 가끔 우리를 게임 중독에 걸린 자식처럼 보는 시선도 있거든요.”

저번 게이트 안에서도 흘려들었던 내용이었다. 음. 이건 주세진도 생각지 못한 역효과일 것 같은데.

“세진이 형이 감탄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다양하고 이상한 닉네임을 지어 오냐고.”

“너희 닉네임이 재밌기는 하지.”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몸은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전날 회식하고 숙취 난 상태로 몸살감기 걸린 것처럼 끔찍했지만 정신적으론 아주 편했다.

이호연은 표정이 풀린 나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예뻤다.

그런 우리에게 오정인이 누군가를 질질 끌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손민경으로 저번에 게이트에서 함께 봤던 손민호의 동생이었다.

“짠! 우리 길드 최고 힐러입니다. 공주님!”

오정인이 발랄하게 말하며 내 쪽으로 손민경을 떠밀었다. 자신의 오빠와는 달리 평범하게 치료에 전념하는 힐러인지 손민경은 으아아― 작위적인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힘없는 몸짓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만났던 손민경이에요.”

“오랜만이에요.”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끄덕한 손민경이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뭐지?

“?”

“얍.”

“?”

“끝.”

응?

놀랍게도 진짜 끝이었다. 원래 힐러 치유 스킬이 이렇게 빠른가? 아닌데?

오정인도 그러더니 손민경도 ‘빨리빨리’였다. 어떻게 다 이렇게 전형적인 한국 스타일이지?

혼란스러워하는 내 모습에 옆에 서 있다가 얼떨결에 같이 치료 당한 이호연이 매끈해진 얼굴로 설명을 해 줬다.

“치료 쪽으로 발달한 상위 호환 전직자예요.”

“아.”

어쩐지. 너무 빨리 치료한다 했다.

손민호처럼 특이하거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순수하게 치유 스킬만 두고 본다면 내가 본 힐러 중 최고였다.

심지어 귀교(鬼橋)를 연 후유증도 없어졌다. 손끝을 살짝 까닥거려 보니 아까의 맥없던 그림자가 다시 말을 잘 듣기 시작했다.

그럼 같이 다니면 계속 귀교(鬼橋)를 열어도 HP, MP가 - + - + 되는 건가? 그거 좋다.

딱 그 생각을 할 때 그런 내 속내를 눈치챘는지 이호연이 슬픈 소식을 전했다.

“단점은 한 명 기준 하루 한 번 치료 가능하지만요.”

“아쉽네.”

진짜.

한 번이라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상처 하나 남지 않은 손을 살펴보는데 이호연이 내게 물었다.

“이제 어쩔 건가요?”

“일단 아빠를 모셔 와야지. 회사 건물 내 벙커에 계시거든.”

그다음엔. 집에 가고는 싶지만, 위험할 수도 있고. 일단 괴물들을 다 해결해야 집에 갈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주세진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지. 오정인이랑 함께 갔다 오면 눈 깜빡깜빡 정도밖에 안 걸릴 것 같은데….

“너희 길마님은 언제쯤 올 것 같아?”

내 질문에 이호연이 커넥터의 시계를 확인했다.

“한… 20분? 30분?”

그 정도면 갔다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너는 뭐 해야 해?”

“아뇨. 정해진 일은 없어요. 괴물을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싫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고. 나갔다가 사람 발견하면 안전 지역으로만 옮겨 주고.”

“그럼 나랑 같이 가자.”

“네?”

“같이 가자고. 치료받았더니 괜찮아졌어. 아빠부터 모셔 오고. 일단 주세진도 만나고. 그리고 괴물부터 해결해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 너, 어차피 나가서 괴물 죽일 거잖아.”

뭐, 겸사겸사하는 거다. 괴물도 죽이고, 나는 빨리 집에 가고.

“저는 좋아요. 같이 가는 거.”

꼬리가 살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깐 정신없어서 생각 안 난 건데.

“머리 색이 돌아왔네?”

“아. 이거….”

제 머리끝을 매만진 이호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염색해도 전체 변형을 하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신기하다.”

손을 뻗어 곱슬기 있는 하얀 머리카락을 만졌다. 편히 만지라고 이호연이 몸을 낮춰 주었다. 귀도 만져도 되나?

“왜 그런 건지 말 안 해 줘?”

“누가요?”

“네 전직관.”

“?”

“?”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이호연이 말했다.

“원래 전직관은 친절한 성격이 아니잖아요. 그런 사소한 걸 일일이 말해 줄 성격도 아니고… 그리고 원래 대화도 잘 안 하고….”

“하던데?”

심지어 자기 심심하면 악기 한번 배워 보지 않겠냐며 날 앞에 앉혀 놓고 악기 시범도 보여 준다. 그렇게 가야금을 배웠지. 대금은 때려치웠다. 소리 안 나더라.

“대화…를 해요?”

“많이. 나 앞에 앉혀 놓고 잔소리도 해. 선인의 가르침 같은 것도 가르치고. 악기도 가르치고. 같이 차도 마시면서 소소하게 대화 많이 하는데.”

다 그런 거 아니었나?

일반 전직관들이야 원래 전직 여부와 재능 관련해서만 대화하는 건 유명하고. 딱 한 명만 전직시키는 히든 게이트의 전직관들이 자기 전직자에게 나름 친절한 것도 유명했다.

물론 사람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그래도 왜 머리 색 바뀌냐는 질문에 답은 다 해 주지 않나? 내 말에 묘한 표정이 된 이호연이 말했다.

“그 호랑이는 절 거의 싫어하는 수준이라.”

“응? 싫어한다고?”

이건 또 처음 듣는데.

내 의문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이호연이 제 전직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꼬리가 불만스럽다는 듯 바닥을 탁탁 치고 있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살아남아 보라며 산속 한가운데 버리고 가고. 간신히 찾아냈더니 아직 때가 아니라며 다시 산속에 버리고 가고. 겨우 전직시켜 주나 싶었더니 스킬 하나 알려 주고 사라졌어요.”

“그 뒤로 대화는?”

“저 보면 맨날 으르렁거리다가 산속으로 사라져서….”

뭐야, 그거.

“다른 히든 전직관들도 그래?”

“아뇨…. 그건 아닌데. 세진이 형 같은 경우엔 사적인 대화는 불가능하고 공적인 대화에 한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좋아하는 음식은 대답 안 해 주고 좋은 전략은 말해 주는 식이래요.”

“나처럼 사담을 넘어 손녀 보듯, 보기만 하면 아이, 잘한다, 잘한다, 하는 행동은 안 한다는 거구나.”

“…네.”

이건 진짜 몰랐다. 커넥터에 친구 신청 기능이 있는지 몰랐을 만큼 전직자와의 교류가 없었던 나는 모를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네 전직관은 널 왜 싫어하는데?”

“글쎄요. 처음 봤을 때부터 싫어하는 티를 내서…. 이름도 아직 모르는걸요.”

나는 이름에 노이즈가 껴서 안 들렸는데. 어쨌든 우리 둘 다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그 예로 주세진은 자기 전직관의 이름이 이헤른이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

안 그래도 랑한테 한번 가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석판의 글귀도 그렇고. 여간 이상하고 수상한 게 아니었다.

랑. 이름도, 정확한 별칭도 알 수 없는 내 전직관.

항상 버드나무 아래 멍하니 호수만 지켜보는 수묵화 같은 존재.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랑은 내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었다. 항상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 귀한 비단옷을 입히고 예쁜 꽃신을 신겨 준다. 한이라도 맺힌 것처럼. 어딘가 강박적일 정도였다.

그리고. 죽지 않을 방법을 가르친다.

“수상하네.”

이번에 찾아가면 최선을 다해 그 의뭉스러운 남자를 털어 봐야겠다. 그래 봤자 또 약과나 쥐여 주고 친절한 어른 흉내를 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단.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하자.”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저들끼리 노닥거리고 있던 오정인과 손민경이 내 손짓에 쪼르르 달려왔다.

“나랑 인명 구조 가실래요?”

“네.”

오정인은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남에 길드 길드원이랑 이렇게 개인 행동해도 되나 싶었지만, 본인이 된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순식간에 아빠가 있는 회사 건물 벙커로 이동한 오정인은 빠르게 사람들을 모으더니 다시 순식간에 안전 지역으로 돌아왔다.

일단 따라는 갔는데 이 정도면 나와 이호연은 병풍이었다. 날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빠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왜 너도, 너희 엄마도, 전화를 안 받아!”

“어, 집에 있는데 핸드폰….”

“집에 두고 다닐 거면 왜 샀어!”

“엄마는 여기 있는데, 엄마한테 가실래요?”

내 말에 아빠는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그런 아빠를 엄마에게 데려다주고 엄마의 못마땅한 눈빛을 받으며 괴물 사냥을 나가겠다 말했다.

“꼭 가야 해? 너 없어도….”

“맞아. 나 없어도 길드 소속 전직자들이 다 해결할 수 있어. 길어야 일주일?”

“그럼―.”

“대신 내가 나서면 더 빠르겠지.”

“…….”

엄마의 손을 꽉 붙잡았다. 크고, 조금 거칠고, 손끝은 단단한 그런 손이었다.

“아빠랑 손잡고 기다리고 있으면 빨리 돌아올게요. 어차피 길드의 전직자들이 거의 다 해결해서 내가 할 것도 별로 없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리블. 천칭. 그 외 다양한 길드의 전직자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예전의 지옥도와는 달랐다.

커넥터를 슬쩍 보니 지금도 빠르게 빨간 점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같은 경우도 초반에 수습 못 한 곳만 무너졌지 대부분 무사하다고 했다. 게이트 안에 자원을 섞어서 그런 건지 참 튼튼했다.

“안 가면 안 돼?”

엄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엄마의 옆에 서 있는 아빠의 표정도 엄마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난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뭐?”

“걱정돼서 같이 가게. 내가 걜 좀 많이 좋아하는 것 같거든. 옛날에는 괜찮았는데. 이젠 걔 다치면 울 것 같아.”

내 말에 엄마는 묘한 얼굴이 됐고 아빠는 대체 누구냐며 내게 물었다. 물론 안 알려 줬다. 엄마는 상관없는데 아빠는 알면 좀… 이호연이 피곤해질 거 같았다.

걔가 대체 누구냐고 재촉하는 아빠의 손을 엄마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그리고 빨리 엄마랑 아빠 손잡고 우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

“…….”

“다녀오겠습니다.”

날 한참 바라보던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 아빠 닮아서 말도 지지리 안 듣지.”

“그렇게 말하면 아빠 울어, 엄마.”

“울든가 말든가.”

옆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아빠를 무시하며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았다가 놔주었다.

“빨리 와.”

“응.”

“네가 남자애랑 오래 외박하면 네 아빠 운다.”

“…넵.”

그게 또 그렇게 되네.

아빠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아빠에게 말했다.

“중간중간 들를 거예요.”

“잠은 여기서 자면….”

“멀어요.”

그리고 귀찮아. 그나저나 아빠도 내가 전직자란 걸 알고 있었나? 안 놀라네….

그런 생각을 하다 익숙한 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서 이호연과 대화 중인 주세진이 보였다.

최대 30분은 걸린다더니 빨리 왔네. 그 생각을 하며 엄마의 눈을 한번, 아빠의 눈을 한번 맞추고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빠 울기 전에 빨리 돌아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세진과 이호연에게로 갔다. 나를 발견한 주세진이 손짓을 했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이호연과 함께 주세진은 졸졸 쫓아가니 안전 지역의 건물 안, 그중에서도 비밀 회담이 일어날 것 같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소파에 앉으라는 주세진의 말에 이호연과 나란히 앉았다. 그런 우리의 앞에 앉은 주세진은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지옥도 당시를 생각해 보면 훨씬 양호한 모습이었다.

내 입장에선 생경한 모습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주세진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아빠가 엄마와 함께해서 행복해 보이세요.”

“?”

내 말에 주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 설명은 끝이었다.

“호연이는.”

“우리 집도 뭐…. 문자는 왔는데 무사하니까 안부 인사 안 와도 된다고 왔어.”

“…….”

뭐지. 부모님과 사이가 안 좋은가. 해탈한 표정을 짓는 주세진을 보다 이호연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호연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나 눈치챘는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전직자예요.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여전히 신혼이라서 다 큰 아들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독립시키신 분이라….”

“아….”

난 또. 안심하고 주세진이 테이블에 놔준 과자를 냠냠 먹었다. 그런 내 앞으로 이호연이 주스를 내밀었다.

주세진이 그런 나와 이호연을 보다 내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 봤던 석판의 나비. 그 문제로 보자고 한 거야.”

“…….”

설마 싸운 거 알고 있나?

“왜…요?”

“?”

“…….”

“뭐 찔리는 일이라도 있어?”

넵.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던 주세진은 포기했는지 별말 없이 하던 이야기를 이었다.

“네가 가고 난 뒤 강유진 씨가 추가로 알아낸 것이 있어.”

“합법 같은 불법?”

“불법 같은 합법.”

어쨌든 그거.

“전직 명을 알아냈더라고.”

그거 진짜 불법 아닌가.

그런 의미의 내 시선을 느꼈는지 주세진은 내 시선을 피했다. 뭐 물론 불법이라도 상관없지만.

“뭔데요?”

“전직 명이 좀 이상해서.”

“?”

뭐길래 그러지. 재촉의 시선을 보내자 주세진이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나비의 전직 명은 정말 예상 못 한 단어가 중간에 끼어 있었다.

“신을 배반한 성자.”

“배반? 배신했다고요?”

그놈이 성자라는 것도 이상한데 중간에 껴 있는 단어는 더 이상했다.

신을 배반했다니. 그 자식의 신은 테오그라젠스 아니었어?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이라며. 나한테 그 신의 말을 전하고 갔잖아.

“원래 종교 개종하고 테오그라젠스한테 간 거래요? 왜 신을 배반한 성자가 전직 명이에요?”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지.”

“…….”

창밖으로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룻밤 꿈 같던 어제의 만남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나비 관련으로 나도 할 말이 있었지.

조금 어물거리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푸른 불꽃. 나 맞대요. 정확히는 불티.”

“불티?”

“…….”

불티.

‘불티가 타오르려면, 몸짓을 키우려면.’

‘기름을 부어야지. 태울 것을 마련해야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것을 제공해야지.’

‘어서 와, 새로운 지옥에 온 걸 환영해.’

“…….”

계속되는 내 침묵을 주세진은 기다려 줬다. 나는 그것이 고마웠고 내심 이대로 묻어 주기를 바랐으며 한편으론 캐물어 주기를 바랐다. 아니, 역시 묻지 않기를 바랐다.

그 말이 날 옭아매는 것 같았다. 마치. 나 때문에 이 지옥을 만들었다는 듯.

그 말을 할 때, 그 남자의 표정이 어땠더라. 즐거움? 희열? 원망? 동질감, 그리고 분노. 누구를 향한?

“나도 설명하고 싶지만, 아는 게 없어서 말할 수가 없어요.”

“…….”

“그러니까….”

기다려 줘요. 내가 마음 편히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모든 지옥의 시발점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 설령 이 급박한 상황에 불을 지른 것이 내가 맞다 해도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말을 어물거렸다. 그런 나를 보던 주세진의 입이 열렸을 때, 꾹 움켜쥔 주먹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그럼. 나중에 알게 되면 말해 줘.”

“…….”

“아니면 네 전직관한테 한번 가 보는 것도 괜찮고. 호연이한테 들었는데 너랑 대화 자주 한다며. 뭐라도 알려 줄지도 모르지.”

“…….”

“호연이랑 같이 나간다며. 굳이 너희가 나서지 않아도 사태는 금방 진정되는데―.”

“…….”

“류, 듣고 있는 거지?”

“아뇨.”

내 대답에 주세진이 입을 다물었다. 나를 보았다. 나 또한 그런 주세진을 마주 보았다.

“왜 안 물어봐요?”

“뭐를.”

“내가 불티라고 했잖아요. 푸른 불 맞다고, 내가, 내가 이 사태에 원인은 아닌지 물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안 물어봐?

조금 전까지는 주세진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막상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 몸속을 채웠다. 잘못을 숨기고 눈치 보는 어린아이처럼.

그런 나를 보며 주세진은 여상한 낯으로, 너무 아무렇지 않아 내 기분마저 이상하게 만드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네가 왜 원인이야.”

“…….”

“너 평범한 사람이야. 물론 전직자 중에 제일 강할 거라고 추정되기는 하는데. 그래 봤자 이제 22살 어린애라고. 네가 어떻게 원인이 돼. 너, 하늘 무너트릴 수 있어?”

“…아뇨.”

“그럼 사이비 교단 신 노릇을 하는 게 꿈이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됐지. 네가 어떻게 원인이 돼. 불꽃이든 불티든. 지금 이 사태가 우리나라에만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전 세계가 다 똑같은 사태를 맞이했어. 원인이 있다면 네가 아니라 신이라는 테오그라젠스겠지.”

“…….”

“석판에 글귀 때문인가 본데. 그 글귀 중 푸른 불이 테오그라젠스와 관련 있다는 말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어.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네.”

궤변이다. 정말 관련 없으면 애초에 푸른 불에 대한 글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조심스레 내 손을 잡는 이호연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주세진은 헛생각하지 말고 안전 구역 나가서 다치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커넥터의 지도를 보여 주며 급한 곳부터 알려 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 기분은 나도 알 수 없는 영역으로 기어들어 갔다.

자신의 커넥터에 주세진이 알려 준 곳을 표시하는 이호연을 보며 생각했다. 랑을 만나야겠다고.

우리는 곧바로 필요한 것들을 챙겨 안전 구역을 벗어났다. 항상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아공간 반지에 주세진이 챙겨 준 생필품을 쓸어 담았다.

이호연의 손을 잡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한숨도 못 잤지만,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손민경의 치료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할 게 많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세진이 알려 준 구역 중 가장 가까운 곳, 얼마나 튼튼한지 조금 금이 갔지만 무너지지 않은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튀어나왔다.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을 노렸는지 꼬마 도깨비가 이호연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이호연은 제 귀를 만지작거리는 작은 손길에 어색한 표정은 지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호연을 보며 말했다.

“같이 이동하자마자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나 잠시 히든 게이트 좀 다녀올게.”

“전직관을 만나려고요?”

“응. 대화 좀 해 보게.”

얼마나 말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호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행동에 정수리에 앉아 있던 꼬마 도깨비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공간 반지에서 작은 유리 조각을 꺼냈다. 히든 전직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전직관에게 갈 수 있는 하늘 조각이었다. 작은 조각 안에는 오색구름을 품은 새파란 하늘이 담겨 있었다.

조각을 허공에 던지자 사람 하나 오고 갈 수 있는 크기로 변했다.

“다녀올게. 꼬마 도깨비랑 같이 다니면 내가 찾을 수 있으니까, 나 나올 때까지 안 기다려도 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그럼.”

손을 흔들어 주는 이호연에게 나도 마주 흔들어 주고 조각 안으로 들어갔다.

오색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얕은 물안개 낀 호수가 나오면, 그 호숫가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하나. 그 아래 언제나 같은 자세로 멍하니 호수만 바라보는 남자가 하나.

발을 옮기고, 신발에 짓뭉개진 풀잎이 소리를 내면 수묵화는 생명을 얻은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를 본 랑의 눈이 휘었다.

복사꽃이 피어난 듯 발그스름한 눈매가 묘하다. 곱고 하얀 섬섬옥수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입이 열렸다.

“이리 오렴. 아가.”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랑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아가’였다. 너무 자연스럽게 불러서 언제 호칭이 바뀌었는지 눈치도 못 챘다. 뭐라 부르든 사실 상관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랑의 곁으로 걸어갔다. 나와는 달리 매 순간 도포와 두루마기를 잘 갖춰 입는 내 전직관. 느슨하게 묶어 한쪽으로 흘러내리게 한 까만 머리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호연이 전직 이후 머리 색과 눈 색이 변한 것처럼 나 또한 색이 변했다. 평범한 한국인의 고동색에 가까운 검은색에서 염색한 것처럼 새까만 색으로.

운치 있는 버드나무의 나뭇잎들이 서로를 요란스럽게 맞이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 아래, 홀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남자의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에요, 랑.”

“그래. 오늘은 어인 일로 왔을까.”

“원래 자주 오잖아요.”

“날 찾아온 이유가 있잖니. 평소처럼 다과를 들고 노닥거리자 온 것은 아니잖아.”

“…….”

까만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그의 머리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왜 왔는지 이미 아시잖아요.”

언제나. 내가 말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내 말에 랑이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휘어지지 않았다.

“그래. 알고 있지. 어찌 모를까.”

“…….”

“그럼 어디, 내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해 보거라.”

“…….”

“낮의 시간을 길고 무료하지. 오래된 것들은 헛소리하곤 하거든.”

차가운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랑이 그제야 눈을 휘며 웃었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어디 한번, 내가 실수하여 헛말을 내뱉도록.”

“…….”

“나를 흔들어 보렴. 아가.”

“흔들려 주실 건가요?”

“너 하기 나름이지.”

“아이, 예쁘다. 하며 아이 취급하다 쫓아내지 않을 거죠?”

“내가 널 언제 쫓아냈다고 그러니.”

“얼마나 알려 주실 거죠?”

“글쎄다.”

의뭉스럽긴.

내 뺨에 올려진 손을 내 손으로 덮었다. 랑은 꼭 가끔가다 이런 식으로 굴고는 했다. 장난스러우면서 위험스러운, 나그네를 놀리는 도깨비, 어린것들 울리는 귀신처럼.

나와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비와 푸른 불꽃.”

“그리고 테오그라젠스?”

“역시 알고 있네요.”

“그것 또한, 글쎄다.”

랑의 손등을 덮고 있던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쓸어내렸다.

붉은 실로 만든 공예품이 손에 걸렸다. 쭉 잡아당기니 맥없는 끈은 쉽게 풀렸다.

그런 내 손끝을 보며 랑은 온유하기 그지없는 낯으로 말했다.

“왜. 불이라도 지르려고?”

“설마요. 저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아요.”

내 말에 랑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묘하게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니 그런 것으로 하자.”

“…….”

내가 뭐 어쨌다고.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그를 보았다. 랑은 내 손에 걸린 제 머리끈을 다시 가져갈 뿐이었다. 살짝 기울어진 그의 고갯짓을 따라 부드러운 검은 실타래가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한 번,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귀고리를 한 번 보다 그의 머리칼을 놔주었다.

화려하고도 섬세한 금빛이 검은 장막 안에서도 눈이 부셨다. 섬세한 세공. 푸르고도 하얀 옥.

“그렇게 의뭉만 떨면 평소와 다를 게 없지 않아요?”

“뭘 기대한 거니, 아가.”

“맨날 모른다, 글쎄다 하던 것들 전부 알려 주는 거?”

랑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몸을 일으키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검은 도포의 긴 옷자락이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냈다. 내가 멋대로 풀어 버린 머리칼이 길었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버드나무의 무성한 잎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 부셔서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장막 아래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할까.”

“그래요.”

내 긍정에 랑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얌전히 그런 그를 기다렸다. 커다란 손이 내 옆구리를 잡고 한번에 일으켰다. 손을 뻗어 랑의 어깨를 짚었다. 도포 아래 선비님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팔이 나를 받쳤다.

바람이 불고 오랜만에 걸음 하는 랑을 배웅하듯 버드나무 잎사귀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듯한데 어찌 들으면 운치 있는 것도 같은 소음이었다.

비슷한 촉감, 같은 색, 닮은 무늬의 긴 옷자락이 바람에 서로 얽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바라보다 랑을 보았다. 새까만 눈부처에 담긴 것이 정말 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나는 알 수 없는 그런 곳.

“벌써 포기한 거니?”

랑의 물음에 나는 웃었다.

“설마요. 제가 그렇게 포기가 빠른 아이는 아니라서요.”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바로 앞에 호수가 있었다. 랑의 발밑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내가 다룰 때보다 더 얌전 떠는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형체를 갖기 시작했다. 나무의 결을 흉내 내고 손잡이를 만들고 섬세한 조각마저 만들어 장식했다. 색은 오로지 검정.

새까만 다리가 호수 위에 만들어졌다. 다리의 시작점은 랑의 발밑이었다.

랑이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그림자 다리를 훑어보았다. 나는 저렇게까지 만들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저 정도로 섬세하게는.

“…랑은 어디까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묻고 싶은 것이 많은가 보구나.”

“그럼요. 아주 많죠.”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랑이 나를 내려 줬다. 다리에 발이 닿자마자 슬쩍 그림자를 움직여 보려 했지만, 다리를 흉내 낸 그림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랑이 곤란한 얼굴로 보았다.

“의문을 해결하는 것보다 승부욕이 더 강한 것 같구나.”

“랑이 대답을 안 해 주니까 제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새는 거예요.”

되바라진 말을 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랑이 톡톡, 다리의 손잡이를 두들기더니 김 서방에게 내기 거는 도깨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장난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아주 묘한 얼굴이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 서로 한 번씩. 물어보는 것에 답해 주기로.”

“아뇨.”

내 단호한 말에 랑이 고개를 기울였다. 수묵화 같은 옷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금귀고리가 그런 그의 귓가에서 빛났다.

“랑은 어른이니까 봐주면 안 돼요?”

“맹랑하긴.”

나를 가볍게 타박한 랑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몸을 숙인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이호연이 내게 그리했던 것처럼. 그럼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어차피 다 알잖아요.”

“이 작은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 않느냐.”

코끝이 부딪쳤다. 새까만 눈동자에 빠질 것 같았다. 한순간의 실수로 늪에 빠질 것 같은 아득함이 느껴졌다.

“저부터 질문할게요.”

“그러렴.”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왜 평소에 하지도 않던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거지. 뭘 물어보려고.

고민은 깊었지만, 지금이 다신 없을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랑이 언제 이렇게 내 질문에 답해 주겠다 확답한 적이 있었나.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달래거나 다른 먹잇감을 내밀어 혼을 쏙 빼놓아 다시 돌려보냈다.

랑이 내게 궁금한 게 얼마나 될까. 랑은 ‘주고받는’ 것이라 했다. 즉 그가 더는 물어볼 게 없으면 내 질문에 답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기회는 최소 한 번.

내가 가장 묻고 싶은 것. 어린 전직자를 가엽게 여긴 랑이 묻지도 않는 것을 털어놓을 질문은?

자신의 전직자가 얼마나 약은지 잘 모르는 전직관을 보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아마 랑이 짓는 미소와 비슷했을 것이다.

“나비와 푸른 불꽃. 나비를 만났어요. 저보고 불티라 하더군요. 그리고 불티를 불꽃으로 만들기 위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랑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세상의 무너짐은 네 잘못이 아니란다.”

“나 때문이라는 듯 말하던데요.”

“못된 말을 들었구나.”

랑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의 머리카락이 스치고 지나가는 뺨이 간지러웠다.

“…….”

랑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나를 마냥 귀애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어딘가 불안정한 아이처럼 바라보곤 했다.

지금처럼. 내게 해가 될 성격의 말을 들었다 하면 묻지 않는 것도 알려 주었다.

“그 아이는… 속이 꼬였지. 가여운 아이야. 자신의 삶을 살면서 온전하게 자신의 자아를 성립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거든.”

“…….”

“나비와 푸른 불꽃. 비슷한 운명을 쥐고 태어났음에도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너를 봤으니 속이 꼬였겠지.”

“잘 아는 사이에요?”

“…글쎄.”

랑이 호수 너머 어딘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갔지만, 그곳에는 시선을 끌 무엇도 없었다.

검은 그림자를 피해 달아나는 물안개. 어스름했던 호수에 반짝이는 물결이 드러나고 있었다. 윤슬이었다.

“잘 안다고 해야 할지.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할지.”

“…….”

“어쨌든 세상의 불행은 너 때문이 아니란다. 그건, 사람이 원인일 수 없는 격의 재앙이지.”

랑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내 탓이 아니야.

속에 응어리지던 감정이 한숨을 통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나를 보던 랑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온유했던 눈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내가 물을 차례구나.”

“…뭐가 궁금한데요?”

그에게 되물으며 뒷걸음쳤다. 조금 전부터 생각했다. 랑은 왜, 굳이 자신의 그림자로 다리를 만들었지. 그가 내 앞에서 능력을 사용한 적이 나를 가르칠 때 말고 있었나? 아니, 없다.

조금 전부터 들었던 불안감이 살금살금 내 발을 타고 올라왔다. 제게서 멀어지는 나를 봤음에도 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텅 빈 것 같은 눈동자를 보며 나 또한 헛된 걸음을 멈추었다.

멀어져 봤자 다리 위. 다리는 그의 그림자가 흉내 낸 모습. 어차피 이 위에 서 있는 이상 랑에게서 못 벗어난다. 그럼 이제 다른 것을 생각해야지.

랑이 내게 해를 가할까?

침을 꼴깍 삼켰다. 랑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님에도 내 그림자가 멋대로 랑을 향해 길게 늘어졌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제등이 머리를 내밀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간 류는 내가 들 때와 달리 그리 길지도, 무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아가. 네 작은 머릿속엔 항상 생각이 가득하지. 너는 아주 영리해.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흐름을 보는 것. 그리고 눈치. 그쪽으론 타고났다 싶은 아이지.”

“…….”

“하여 궁금하구나. 너는.”

한 발자국. 걸음 한 번으로 바로 앞에 랑이 있었다. 내게 가까이 온 랑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아냈니? 알면 안 되는 것을 어디까지 파고들었지?”

한 발자국. 이번엔 내가 움직였다. 발끝이 닿고 서로의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였다. 손을 뻗어 그가 들고 있는 류를 잡았다.

“랑이 누구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정도?”

“…어리석을 정도로 영리한 아이구나. 옛날이었으면 왕이 너를 두려워했을 것이야.”

“…….”

“그리고 네 가느다란 목을 벴겠지.”

“랑은 안 그럴 테니까요.”

“글세…. 왜 확신하지?”

“당신이 나를 선택했으니까.”

“…….”

솔직히 조사하고 알아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이호연과의 대화는 또 다른 힌트였을 뿐이다. 남들과는 너무 다른 내 전직관.

남들이 마법 쓰고, 검 쓰고, 갑옷 입고, 로브 입을 때 혼자 고아한 선비 노릇을 하는 랑.

“당신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어요.”

“그리 쉬울 리가 없는데….”

“현대에는 인터넷이라는 게 있어요, 랑.”

“인터넷?”

인터넷이 뭔지 모르는 옛 어르신께선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랑한테는 안 됐지만, 인터넷과 교수님이라는 고급 인력이면 모르기도 힘들었다.

“내 전직 명은 도깨비 공주예요. 하지만 랑은 공주님 아니잖아요.”

“그렇지.”

“여기 사는 귀신 언니가 당신을 왕이라고 부르는데 모르기도 힘든 것 아닌가요?”

“그렇다 하여도 서책만 보고는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인터넷….”

랑이 저러니까 내가 치트키를 쓴 기분이었다.

“사실 알아낸 결과물을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어요. 없는 인맥, 정보 다 끌어모아도 당신 같은 경우는 없었거든요.”

“그러하겠지.”

“모든 전직관은, 내가 사는 이 세계와 조금도 관련 없는 이들이에요. 당신과 달리.”

“…….”

“역사에도, 설화에도. 어느 나라의 민담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괴물들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존재죠. 하지만 랑은 아니더라고요.”

도깨비, 귀신, 그리고 랑. 삼국유사에 유난히 남들과 달리 기록된 남자가 있었다. 신라 시대 남자의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은 ‘랑’이었다. 도깨비와 귀신을 다루던 귀신의 아이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요?”

“이미 알면서 왜 물을까.”

“알면서도 본인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거든요.”

“…….”

“당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 줘요.”

“…….”

“랑.”

느리게, 느리게. 눈이 깜박거리고, 홀로 옛 시간을 살아가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나는….”

“…….”

“도⑇#⑆의 ▇. ㅱ#랑.”

역시. 예상했던 데로 이번에도 랑의 목소리는 깨진 음질처럼 들렸다. 랑 또한 예상했다는 듯 여상한 낯이었다.

“알면서도 말하게 하는구나.”

“본인한테 듣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예요.”

류를 쥐고 있던 손을 좀 더 올렸다. 랑의 손이 닿았다. 그의 손등을 덮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불러도 되나요?”

“그리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러지 않을 거니?”

“설마요.”

“고집 세긴. 네 부모가 너를 키울 때 꽤나 힘을 들였겠구나.”

“…….”

못된 말 하는 랑을 흘겨봤다. 한없이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류를 잡은 랑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내 손 아래에서도 느껴졌다.

왜. 랑만 다른 전직관과 다른 걸까. 왜 그의 별칭과 이름을 모르게 하려 한 걸까.

그걸 내가 밝혀내면 어떻게 되는 걸까.

호기심과 불안함이 내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 입은 움직였다.

“신라의 진지왕(眞智王)이 사량부(沙梁部)에 살던 도화랑(桃花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월성 북쪽에 있는 절 신원사(神元寺)에 돌다리를 놓으라는 진평왕(眞平王)의 명령을 하룻밤 사이에 완수한 기이한 능력을 다루던 사내.”

쿵쿵. 랑이 류를 바닥에 두들겼다. 불티와 불꽃. 그 단어의 차이를 보여 주는 것 같은 거대한 푸른 불길이 호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성제의 혼이 낳으신 아들. 오색구름이 지붕을 덮고, 향기 가득한 방에서 태어난 귀신의 아이.”

그림자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짐은 내가 서 있던 곳부터였다. 랑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당신의 이름은 비형(鼻荊). 도깨비들의 왕 비형랑(鼻荊郞)!”

[⑆ㅱ⸎#?!⸎▇]

[⑆ㅱ⸎#?!⸎▇]

[ㄴㅓ는 ㄱ걸 아ㄹ!어]

[나쁜 아이]

[ᐧᐨᐧ]

몸이 굳는다. 날아다니는 괴물들의 몸을 짓밟으며 공중전까지 하던 몸이 무력해진다. 땅이 울렸다. 물살이 거세지고 랑의 그림자 다리가 그림자로 돌아갔다.

랑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등 뒤로 물의 수면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보는 랑의 표정은…….

차가운 물이 나를 잡아먹었다. 뽀글거리는 기포 소리가 물과 함께 고막을 채웠다. 반짝이는 햇빛을 투과시키는 물의 수면 너머. 나를 내려다보는 인영이 하나. 내게 내밀어지는 손이 하나.

나는 그것을 보며 웃음이 났다. 랑이 나에게 해를 가할까? 아니, 나는 그가 내 편을 들 줄 알았다. 그의 말대로 나는 아주 영리하고도 약은 아이라. 그가 날 선택할 것을 알았다.

물속에서도 타오르는 심해 빛 새파란 불이 수면을 뚫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불이 나를 감쌌다. 내 앞에서 깜박이는 시스템 창을 잡아먹었다.

불의 뒤를 이어 수면을 통과해 들어온 하얀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단단한 힘에 순순히 끌려가는 내 눈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세계ㄹ 구#ㅅp?!]

그것은 내가 전직을 했을 당시 받았던 시스템 창의 문구였다.

사그라지지 않은 푸른 불이 이번에도 시스템 창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푸른 불이 잡아먹은 것은 시스템 창 자체가 아닌, 읽을 수 없는 기호들이었다.

불이 사그라진다. 글자가 드러났다.

[세계를 구해 주세요]

나만 장르가 달라 1

* 이 전자책의 전부 또는 일부 내용을 재사용하려면 사전에 저작권자와 (주)위즈덤하우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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