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리석은 불나비 (6/34)

#어리석은 불나비

“닉네임을 알면 뭔가 알 수 있어요?”

어이없는 것은 어이없는 것이고 중요한 걸 잊으면 안 된다. 애써 억울한 마음을 누르고 주세진에게 물었다. 주세진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며 내 말에 대답해 줬다.

“원래는 알 수 없지.”

“원래는?”

“원래는.”

“…….”

“불법 같은 합법이야.”

합법으로 만들어 버린 불법이 아니라?

주세진은 내 시선을 피했다. 뭐. 사실 상관없었다. 주세진이 불법을 저질러 봤자 진짜로 불법 같지만 따지고 보면 합법인 법의 테두리일 테니까. 법 안 말고 테두리.

법 밖이 아니면 어긴 거 아니다.

주세진은 나와 이호연을 데리고 연구실 안쪽으로 이동했다. 안쪽에는 누가 봐도 비밀 실험실 같은 입구가 있었다.

주세진의 사원증 코드를 인식한 문이 열렸다. 그 안을 둘러본 나의 감상평은 짧았다.

“에이.”

뭔가 더 수상하고 비밀스러운 실험실이 나올 줄 알았는데.

“뭘 기대한 거야?”

“…….”

주세진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실험실을 둘러봤다. 삑삑 소리를 내는 기계. 커다란 화면과 보조하는 듯한 작은 화면 여러 개.

과학자의 실험실보단 정부 비밀 요원들의 작전 회의실 같은 곳이었다.

“어. 길드장님.”

냠냠 컵라면을 먹고 있던 연구원 하나가 우리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세진은 연구원을 보며 잔소리했다.

“컵라면으로 대충 때우지 말고 사내 식당에서 식사하라고 했을 텐데요.”

“또 불시 검문인가요?”

눈치를 보며 남은 국물을 원샷한 연구원은 히히 웃으며 슬금슬금 걸어왔다.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불량 식품이 땡기는 심리인가?

“오늘은 아닙니다. 알아봐 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그런데, 강유진 씨는 어딨죠?”

“이제 곧 올 건데….”

말을 흐리는 연구원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에 따라 주세진의 표정은 무서워졌다. 뭐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데 지잉―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나 왔다아아아… 아… 아.”

신나게 들어오던 여자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얌전히 두 손을 모았다. 그런 여자의 손엔 까만 봉투가 들려 있었다.

“길드장님….”

“제가―.”

“오늘만이에요! 어제랑 그저께랑 다 식당에서 먹었어요!! 오늘만 컵라면 먹는 거예요!!”

“…….”

“맞아요. 사실 어제도 먹었어요. 그저께도….”

자진 고백한 여자는 우는 소리를 내며 주세진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길드장님, 솔직히 사람이 어떻게 꼬박꼬박 그렇게 완벽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고 삽니까. 인간미가 없잖아요! 가끔은 몸에 안 좋은 것 좀 먹고 가끔은 해로운 것도 먹고.”

“가끔?”

“네! …니요.”

재밌는 사람이네. 딱 그 생각을 할 때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

강유진이라고 불린 여자는 참 해맑은 얼굴로 주세진에게 물었다.

“여기 아기 여우 같은 아가씨는 누군가요?”

아기 여우….

떨떠름한 기분으로 여자를 봤다. 동글동글한 눈에 새삼 발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얼굴에 발랄이라고 써 붙여 놓은 것 같이 생겼다.

이름이 강유진이라고 했지. 아. 그때 그 사람인가? 이름까지 들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내가 처음 하늘 조각을 돌려보냈을 때. 그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던 히든 전직자. 정보 전달 쪽 특기로 커넥터 제작에도 함께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아주 깨발랄한 사람이다.

“강유진 씨가 알아봐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유진아~ 라고 해 주시면 할게요.”

“…….”

“하겠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주세진의 얼굴에 피곤이 감돌았다. 저런 부류의 정신적 대미지는 스킬로도 못 막나 보다.

주세진에게서 설명을 듣는 강유진의 뒤를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커넥터 제작자가 나서면 최소한 위치 정보는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뭐라 하고 정보를 달라고 하려는 거지? 솔직히 이거 너무….

“아무리 길드장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이거 너무 불법 같은 일 아닌가요?”

주세진에게서 커넥터를 받아 든 강유진의 얼굴이 묘해졌다. 수상함을 느꼈는지 떨떠름한 얼굴로 커넥터에 띄워진 닉네임을 보고 있었다.

해맑은 바보처럼 마냥 발랄하지만 역시 똑똑하다.

“누군데요, 이 사람이?”

그건 말 못 하는데.

당신이 아기 여우라고 부른 제가요, 사실 류인데요, 석판의 해석본을 봤어요. 근데 그 석판에 나오는 게 저 아니면 제 전직관 같더라고요? 전직관을 털 수는 없으니 나비 쪽을 캐 보려고요.

라고 하면 퍽이나 들어주겠다. 그리고 내 정체는 나름 비밀이다.

주세진이 뭐라 하려나.

“뒷조사해도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정말요?”

“네.”

“누군데요?”

“…스…토커.”

넹?

강유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건 이호연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스토커요?”

설마 너 님이요? 딱 그런 표정이다.

강유진의 물음에 주세진이 머뭇거렸다.

“저요.”

그래서 내가 나섰다.

“어…. 학생이요?”

“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비는 날 알고 있는 눈치였고 굳이 굳이 게이트에서 만났다는 건 일단 걔가 따라왔다는 소리니까.

걔도 그랬다. 나한테 잡혔다고. 누가 봐도 수상하다. 응.

그리고 그 석판의 글귀. 자기는 ‘종’이라면서 푸른 불은 ‘왕’이라고 한다. 그거 말고도 다른 글귀가 푸른 불을 약간 찬양하는 느낌의 글이었다.

집착이 느껴져. 기승전결도 완벽해. 혼자 결론을 내고 강유진을 봤다. 거기 비밀이라는 닉네임은 가해자. 나는 피해자.

“어, 전직자가 민간인을 스토킹했을 경우 전직자의 계열에 따라 추적이 가능하긴 한데….”

그래서 주세진이 스토커라고 한 거구나. 그나저나….

“계열에 따라서요?”

“네. 신체 계열 전직자만 추적이 가능해요.”

법 참 이상하네. 힐러든 법사든 똑같이 추적해야지. 내 표정이 미묘해지는 것을 봤는지 강유진이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법이 좀 그렇죠?”

“네.”

진짜 좀 그렇다. 그럼 힐러라서 추적이 안 되나? 음…. 그건 곤란한데.

나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보는 강유진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융통성 없고 법 잘 지킬 것 같지 않다고. 애초에 주세진이 여기 왔다는 건 눈앞에 비글 언니가 들어줄 거라는 걸 예상해서겠지.

밑져야 본전.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강유진에게 말했다,

“탱커의 재능을 가진 힐러여도 안 돼요?”

“네?”

“탱커 같은 힐러요. 탱힐 가능한데.”

어그로가 장난 아니거든요.

방어? 맞으면서 치료하면 그것도 방어다. 원래 그냥 탱커보다 성기사가 질기잖아.

“대충 성기사 같은 사람이라고 쳐요.”

내 말에 깨발랄한 눈이 동그래지더니 요리조리 도르륵 굴러갔다.

“그럼 그냥 탱커라고 칠까요?”

“네.”

이래서 불법 같은 합법이구나?

자기 부하 직원의 성격 참 잘 파악한 주세진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쉬워졌다. 확실히 능력 있는지 강유진은 30분도 안 걸려 나비의 위치를 알아냈다. 근데 저 동네….

“일단 위치는 찾았어요.”

“…고맙습니다.”

우리 집 근처네?

이로써 정말 불법이 합법이 되었다.

딱딱하게 굳는 내 얼굴을 본 이호연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왜 그래요. 류?”

“…아니야. 아무것도.”

응.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 버리면 아무 일이 아닌 게 되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 거다. 내가.

“아!!”

나비처럼 날려 보내고 싶은 저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강유진이 큰 소리를 냈다. 뭔가 싶어 보니 커다랗게 뜬 눈이 날 향하고 있었다.

“그… 이제 와선 늦었는데….”

“?”

“민간인이죠?”

“…….”

아, 맞다. 나 민간인.

그제야 추적 조건이 생각났다. 신체 계열 전직자가 민간인을 스토킹할 경우. 민간인. 별 땅땅.

“네. 저 민간인.”

오늘은 류로 온 거 아니다. 길드장인 주세진도 자기 길드에 들어오는 거 반대했으니 오늘의 나는 민간인 유하연이다.

“…….”

“…….”

강유진과 나는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눈 가리고 아웅이다. 애초에 민간인이 왜 리블 연구실에 있겠어.

강유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어색하게 민간인, 민간인이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힐러도 탱커로 인정해 주는 넓은 마음과 탁 트인 시야를 가진 강유진은 역시나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녀는 이 일에 관하여 선을 그었다.

“전 이제 그만 실험하러 가겠습니다. 민간인을 위한 좋은 일을 했더니 기분이 좋네요. 안녕히 가세요, 길드장님. 항상 맛있는 밥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길드장님께 생일 때 주신 꽃 감사하다고 전해 달래요. 그럼 이만! 가자, 조수!”

강유진은 검정 봉지를 뒤지며 간식거리를 찾고 있던 연구원과 방을 뛰쳐나갔다.

정말 마음에 든다. 저 넓은 마음. 탁 트인 시야. 완벽한 사회생활.

“재밌는 사람이네요.”

“뭐…, 그렇지.”

내 짧은 평에 주세진은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 주세진이 왜 여기로 온 건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커넥터 제작자. 똑똑하지만 어딘가 어설픔. 덕분에 나비의 위치를 알았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어설퍼도 된다. 모든 길드에서 모셔가고 싶어 하는 커넥터 제작자 중 하나니까. 그거 외에도 본인 능력이 뛰어나겠지만.

그나저나 스토커라니. 주세진이 그런 핑계를 댈 줄은 몰랐다. 분명 내가 알기로는 고리타분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었는데.

도망간 강유진과 연구원들을 생각하는지 혀를 찬 주세진이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방 안에 가득하던 매콤하고 자극적인 향 대신 선선한 바람이 방 안을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방 안을 꽉 채우고 있던 향이 희미해졌다.

“…….”

반년이 넘는 시간이었지. 사람이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어찌 보면 주세진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까.

어쨌든 즐거운 리블 사옥 탐방으로 얻게 된 것이 많았다. 닉네임 하나로도 사람을 화나게 할 수 있다는 것. 다소 골 아프지만 중요한 정보일 것 같은 나비와 푸른 불꽃. 사람의 변화.

시간의 흐름.

그럼 이제 내 일상 지키기를 위해 움직여야지.

주세진에게 인사하고 비밀 연구실을 나왔다. 주세진은 더 알아볼 것이 있다며 그 자리에서 내게 인사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눌렀다. 바뀌는 층수를 보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내일 봐.”

기분 좋게 이리저리 살랑거리던 이호연의 꼬리가 툭 떨어졌다. 날카로운 눈매가 축 처졌다.

“벌써요?”

“오늘은 이만 가야 해. 할 일이 있거든.”

“그럼,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미안. 혼자 갈게.”

날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어 하는 이호연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오늘 반드시 혼자 집에 가야 했다. 이호연은 서운한지 꼬리에 여전히 힘이 없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 꼬리는 이호연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멋대로 움직이는 걸까. 힐끔 꼬리를 보다 이호연과 눈을 맞췄다.

“다음에 또 놀러 올게.”

“네….”

“우리 학교에서도 만나는 거 알지?”

“네….”

“서운해?”

“…네.”

솔직히 답한 이호연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안 물어봐서 못 봤으면 섭섭했을 정도로 사람 설레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

“다음에 데려다줘. 오늘은 안 돼.”

오늘은 내가 나비 새끼를 조져 버릴 거거든. 이놈은 왜 우리 집 근처에서 알짱거리는데. 어떻게 조질까 생각하는데 이호연이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다음부터는… 데려다드려도 되나요?”

“응.”

이호연의 눈 색이 예뻤다. 중간에 눈 아프다고 렌즈를 뺀 덕분에 회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원래도 눈길을 끄는 색인데 속눈썹까지 까맣게 염색하자 회색빛 눈동자가 더 눈에 띄었다.

웃는 것도 예뻐, 은근슬쩍 다음을 다음부터라고 한 건 넘어가기로 했다. 애처로운 얼굴로 나를 보는 이호연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고 리블의 사옥을 나왔다.

그런 내 품에는 예쁜 종이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집에 간다는 내 말에 다급하게 어딘가로 연락한다 싶었더니 조금 전 봤던 주세진의 비서님이 들고 온 봉투였다. 안에는 이호연이 깨끗하게 세탁해 돌려준 두루마기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안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햇빛 냄새, 향긋한 섬유 유연제 냄새. 갑옷이나 로브같이 나름 전직자의 장비인 두루마기에 섬유 유연제를 넣어서 빨아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조금 기분 좋아졌다.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우리 아이 한글 배우기 중급을 사고 편의점에서 팝콘도 샀다. 괜히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끌다 집으로 향했다. 그런 내 발밑으로 쪼개졌던 그림자가 조용히 돌아왔다.

오늘이 날인가 보다. 아빠는 야근, 엄마는 친구들과 모임.

열심히 돌아다닌 덕에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사 온 팝콘 봉지를 뜯어 바닥에 내려놓고 우리 아이 한글 배우기 중급 책을 펼쳤다.

그림자에서 뿅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저마다 제 손만 한 팝콘을 하나씩 들고 책을 읽었다.

그것을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포와 발목 부근이 낙낙한 하얀 바지로 갈아입고, 이호연에게서 받아 온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쳤다. 검은 꽃신을 챙겼다.

창틀에 앉아 손에 쥐곤 온 꽃신을 신었다. 먹먹한 검은색에 회색빛 꽃이 핀 신발. 신을 때마다 생긴 거랑 다르게 편해서 신기한 신발이었다.

“후….”

아주 오랜만에 풀 세트다. 맨날 귀찮아서 두루마기만 걸치고 다녔는데. 창틀에 발을 올리니 내 발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지붕까지 올라가는 길을 만들었다. 그것을 밟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옛날에 어디선가 그런 글귀를 보았다. 너무 푸르고 푸르기에 까맣게 보이는 것이 밤하늘의 색이라고.

원래 내가 알고 지냈던 존재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하늘이라고 불러야 할 저 조각들도 그런 색을 갖고 있었다. 까맣고 먹먹한, 보다 보면 무서움이라는 감정마저 드는 심해보다도 더 푸른색.

밤이 되면 조각의 균열 부분이나 빈 곳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하늘 조각 너머 괴물들이 기어 나왔던 그 어둠이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편했다.

낮이 되어 하늘빛을 담은 하늘 조각들이 밝아지고, 조각 너머 불덩어리가 해님 흉내를 내면 빈 조각 부분이 선명해지지만 밤은 그것들을 모두 가려 주었다.

그래서 한참 게이트를 닫아야 했던 시절. 밤이 새벽으로 넘어가는 여명의 시간대에 눈을 뜨곤 했다.

아무도 없는 적막 속 꿈이 깨지는 시간, 한여름 밤의 꿈보다 지독하고 달짝지근한 환상이 깨지는 시간.

회색빛 도시에서. 선명한 대비의 색을 갖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일상을 다시 손에 얻을 것이고 그 누구도 내 일상을 깨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설령 그 일상이 깨질지언정 그것을 눈에 보이게 하지 않을 거라고.

저 푸른 밤처럼.

하늘 조각이라고 부르는 저것들도 자신을 하늘이라 우리를 속였는데. 밤이라는 이름 아래 푸른 어둠이 빈 곳 너머 어둠을 가리는데. 내 어둠이 주변을 속이지 못할까.

새까만 옷. 까만 가면과 까만 너울. 까만 제등. 까만 그림자. 까만 머리카락. 선명한 색은 오로지 푸른 불. 그마저도 심해의 빛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흔들리는 애시 브라운 색의 머리카락. 새벽의 하늘 같은 보랏빛 섞인 하늘색 눈.

내가 밤이라면 너는 새벽이다.

내 일상, 한여름 밤의 꿈, 달콤한 환상을 깨 버릴 존재. 너무 소중해 영원히 숨기고픈 것들을 뺏을 존재.

이호연이나 주세진과 같은 경우와는 다르다. 그 둘은 내가 말하는 것 이상을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넌 여기 있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성스러워 보이는 얼굴의 남자가 나를 보며 웃었다. 야살 맞았다. 한 대 치고 싶게.

“안녕. 공주님.”

휘어지는 눈 아래 검은 나비 문신. 그 문신 아래 있을 흉터.

“진짜 왔네?”

내 물음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안 오면 죽여 버릴 거라고 공주님네 꼬마들이 5분 단위로 상소문을 주던데?”

응. 내가 시켰거든.

“이거나 받아. 배송 오류 났더라.”

“?”

남자가 내게 상소문 하나를 던졌다. 잡아서 펼쳐 보니 안에는 깜찍한 어린이 글씨체로 ‘호랑이랑 놀구 싶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깨비들이 연습용 용지를 넘겼나 보다.

“내 머리에 던지라고 공주님이 시킨 거야? 안 아픈데 기분은 나쁘더라.”

“그러게 왜 남의 집 근처에서 알짱거려? 짜증 나게.”

“어차피 반쯤은 나 잊고 있던 거 아니었어? 솔직히 놀랐어. 날 신경 썼다는 점에서.”

어둠 아래 남자의 눈은 기묘하게 빛났다. 보랏빛 부분에 야광 물질이라도 들었는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난 공주님이 나를 까맣게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인상 깊어서.”

너 같은 힐러는 처음이거든. 그리고 나한테서 살아서 도망간 것도 처음이다.

“호랑이한테 푹 빠져서 잊을 줄 알았지.”

역시 지켜봤구나. 이로써 강유진에게 전혀 안 미안해도 된다. 민간인이라고 한 건… 그건 넘어가자.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남자는 내게 대화를 청했다.

“공주님은 그런 쪽이 취향인가 봐?”

많이 시비조였지만.

“그런 쪽?”

무슨 쪽?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그가 말했다.

“호랑이 말이야. 낮져밤이? 그런 게 취향이야?”

낮져밤이…. 이호연이 낮져…는 맞는데 밤이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이라니. 어이없음에 한숨 내쉬는 내게 남자가 말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뭐?”

라일락 향. 어느새 내 코앞으로 다가온 남자에게서 라일락 향이 났다. 내게 얼굴을 들이민 남자가 내 눈 밑을 쓸며 말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공주님 취향. 난 어때?”

“…….”

무슨 생각이지? 유해한 눈빛을 하고 저런 말을 해 봤자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난 별로야?”

“어, 별로.”

“진짜?”

“그럼 뭐, ‘내 마음의 별로.’라고 할 줄 알았어?”

손을 뻗었다. 검은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류가 남자의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급작스러운 공격에도 남자는 웃는 낯으로 잘린 제 머리끝을 매만졌다.

두어 걸음 물러난 걸 보면 목숨 귀한 줄은 아는 것 같았다.

“난폭해, 공주님.”

“네가 내 취향인지는 모르겠고. 날 난폭하게 만들기는 하네.”

류를 손에 쥐었다. 손안에 딱딱하면서도 매끈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정말. 뜬금없는 달밤의 체조다.

“우린 상성이 나쁘다니까?”

“내가. 정말로 너 하나 잡을 능력이 없어서 보내 줬던 것 같아?”

“…아니. 공주님 능력은 내가 더 잘 알지.”

알아서 다행이네.

쿵. 쿵.

바닥을 두 번 찍은 제등을 타고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밤의 시간이다.

낮도 밤도 나의 세상. 그림자 없는 낮이 어디 있고 어둠 없는 밤이 어디 있을까. 빛이 초라한 순간은 있어도 어둠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니 내게 불리한 전장 같은 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곤란하네.”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던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굳었다. 내 발밑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달빛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엉켜 드는 어둠이 파르라니 날 서 있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 안에서 몽글몽글 맺힌 물방울이 길게 늘어지나 싶더니 창의 모습으로 변했다.

보랏빛 안광이 더 강해졌다. 이젠 하늘색이 보이지 않는 눈이다. 저 보랏빛은 떠오르는 해의 신기루를 닮아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에서 물의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의 창이 옅은 황금빛을 내뱉고 있었다. 색만 두고 보면 이쪽이 악당이고 저쪽이 용사인 것 같았다.

남자의 발밑에서도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남자의 바로 밑까지 늘어진 그림자를 빛이 야금야금 잡아먹었다. 잡아먹고자 한다고 내가 그것을 그저 둘 이유는 없었다.

제등 안에 푸른 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심해 같은 불그림자가 일렁인다. 어둠이 되레 빛을 잡아먹는다.

“날 잡았구나?”

“날 잡았지.”

네가 우리 집 근처를 맴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내 가족이 너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 망설일 시간 따위는 사라진 것과 같았다.

남자가 창을 휘둘렀다. 투명한 물의 창에서 방울방울 떨어진 물방울들이 그림자에 닿자 빛을 내뱉었다.

창을 피하며 나는 류를 휘둘렀다. 등에 달린 문이 열리고 새파란 불이 파도처럼 물방울을 휩쓸었다.

“내 앞에서 잔재주 부릴 생각하지 마.”

“…이런. 진짜 큰일 났네.”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물의 창이 형태를 잃는가 싶더니 수십 마리의 물의 나비로 모습을 바꿨다.

“난 몸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남자가 허공에 손을 저었다. 나비가 외벽을 만드는 그림자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불길에 잡아먹혔다. 반복되는 물과 불의 춤이 서로의 지휘자에게 이 춤은 헛짓거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비의 수가 너무 많았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저 물. 창이 아닌 나비를 택한 이유가 저거인 듯했다.

나비는 조금만 움직여도 물방울을 떨어트렸고 그건 다시 새로운 나비가 되었다. 초반에 다룰 수 있는 물의 양은 정해져 있지만, 그다음부터는 문제가 없는 건가 싶었다.

초반에 처리 못 하면 꽤나 사람 짜증 나게 할 것 같은 능력이다. 불에 잡아먹히는 수와 다시 만들어지는 수가 엇비슷했다.

“그럼 너부터 쳐야겠네.”

넌 몸 쓰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난 익숙하거든. 남자의 바로 앞으로 이동했다. 날 내뱉은 그림자가 참방이는 물처럼 주변에 퍼졌다.

류를 남자에게 휘둘렀다. 즉살? 아니다. 두들겨 팰 거다.

몸을 뒤로 물리는 것으로 머리카락 몇 가닥 잘리고 만 남자의 웃는 낯이 굳었다.

“마법사답게 원딜 할 생각은?”

“근딜이 취향이라.”

그림자를 오른손에 감았다.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쾅―!!

“피했네?”

“…안 피했으면 즉사인데?”

빗나갔다. 몸 쓰는 게 익숙하지 않다던 남자는 생각보다 몸놀림이 날랬다. 애꿎은 지붕을 깨부쉈잖아. 손을 탈탈 털었다. 손에서 돌 조각이 떨어졌다.

아쉬움에 튀어나온 내 말에 말대답하며 남자는 제 목을 쓰다듬었다.

“…마법사 맞지?”

“마법사야.”

“진짜 무슨 INT 대신 STR 찍기라도 했어?”

“INT 찍었어도 타고난 STR이 높아서.”

만약 진짜 게임처럼 INT니, STR이니 찍는 게 가능했으면 난 STR에 몰빵할 거다. 물리 법사가 취향이었다.

“전직을 잘못한 것 같은데?”

“나도 가끔 그 생각해.”

심지어 내 전직관인 랑도 가끔 심란한 얼굴을 한다.

“지금이라도 재전직하는 게 어때?”

“왜 내 전직관도 뭐라 안 하는 진로 찾기에 끼어들어?”

랑은 심란한 얼굴은 해도 뭐라 안 하거든?

다리에 감긴 그림자가 음산했다. 남자의 다리를 못 쓰게 해야겠다 싶어 다리 쪽으로 휘둘렀지만 남자는 이번에도 피했다. 맞았으면 깐족거리며 도망 다니는 짓은 못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나름대로 성과는 있는 공격이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발에 최대한 빛을 죽인 희미하게 빛나는 물이 감겨 있었다.

내가 그림자를 감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가? 이런 꼼수를 쓰다니.

내가 쓰는 주 스킬은 그림자와 푸른 도깨비불. 남자는 힐러의 고유 스킬인 치유와 저 이상한 빛나는 물이 주 스킬인 듯했다.

물을 감으면 신체 능력이 좋아지는 것 같고. 보아하니 물의 빛이 내 그림자를 없애는 역할도 하는 것 같고.

그럼… 물만 없으면 되겠네.

손에 쥔 류를 더 꽉 붙잡았다. 등이 내뱉는 불줄기가 굵어졌다. 모든 걸 녹여 버릴 것 같은 온도에 물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물 타입이 불 타입 이긴다는 건 옛말이다.

“…상성 무시가 심하네.”

무식하다고 할 법한 상황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공중에서 스멀스멀 뭉치는 물줄기가 보였다. 환한 빛을 머금은 물이 불줄기에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물을 잡아먹은 불은 더 타오를 뿐이었다.

물이 불을 이기는 것 같지? 기름 화재엔 물을 붓지 마세요. 마요네즈를 뿌리세요. 기본 상식이다. 물론 이건 기름 화재가 아니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본격적으로 싸우자 남자는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비네, 테오그라젠스의 종이네 있어 보이는 수식어는 다 갖고 있어서 조금 불안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건 마법의 주문이니까.

“상성만 안 좋을까.”

넌 물 하나지? 난 두 개다?

남자가 손이 먼저 나가는 마법사인 나를 상대하는 사이 벽도, 천장도, 이젠 바닥까지, 모두 까맣게 변해 있었다. 남자 또한 그것을 눈치챘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낭패 어린 얼굴을 하였다.

구의 형태로 외벽을 완성한 그림자 속 안은 그림자 안이라는 게 믿기지 않게 환했다. 푸른 불과 황금빛을 내뱉는 물이 어둠밖에 없어야 할 공간을 환하게 만들었다. 내 푸른 불과 남자의 빛의 물이 그림자에 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제 능력이 저 자신에게 해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가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런 남자를 흘겨보다 류를 손에서 놓았다. 바닥에 그림자와 연결된 류는 저 혼자 중심을 잡았다. 제등이 아닌 작은 가로등 같은 모습이었다.

매끈한 제등에 손을 올렸다. 나무의 결이 세세히 느껴졌다.

“후….”

오랜만에 하려니 나도 긴장된다. 침을 꼴깍 삼키고 이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굴리는 남자를 보았다. 살금살금. 그림자가 움직였다.

등이 흔들린다. 푸른 불에 귀기가 서린다. 그림자의 어둠이 살며시 자리를 비켜 주면, 귀밀레. 귀밀레.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귀교(鬼橋)를 타고 넘어오시오. 푸른 도깨비의 불을 따라. 그림자는 다리요. 불은 제등이니. 길 잃을 일이 뭐가 있소.

귀밀레. 귀밀레.

한 많은 이들아 이리 와라. 그 한을 풀 때가 어디 있으랴. 삿된 것들 끌려가기 전에. 어디 한번 놀아 보자.

“귀밀레. 귀밀레.”

사라진 것들이 돌아오는 소리. 제등이 피어나는 소리. 다리가 흔들거리는 소리.

무겁다. 무겁다.

넘어오는 것들 많아 다리가 흔들리니. 무게를 버려야지.

자아를 버리오, 생각을 버리오, 원한을 버리오.

그대들 부르는 내 뜻 따라 움직이시오. 내 길을 따라라 내 의지를 따라라. 꼭두각시 인형 놀음 한번 해 보자.

귀밀레, 귀밀레.

무게를 버리자. 가벼운 것들만 다리를 건너라. 헛된 생각하지 마라. 확 역신(疫神)을 불러 버릴 테니. 역신 따라다니는 처용 님이 너희도 데려간다.

그것들을 버리고 한만 오시오. 버린 것들이 억울하면 갈 때 새로 가지고 가시오.

다리 너머 세상엔 한가득하니.

도깨비들이 귀신 데리고 나들이 오는구나. 달아 저물어라. 어둠밖에 없는 이곳은 우리네의 것이니.

귀밀레. 귀밀레.

어둠이 찾아온다. 살그머니 피해 준 자리를 다시 채운다. 그 잠깐 새에 저 너머 어딘가에서 건너온 것들이 이 안에 그득했다.

새파란 불은 뜨겁고 황금빛 빛줄기를 내뱉는 물은 따스한데 입에서는 하이얀 입김이 나왔다.

남자의 다리부터 서리가 꼈다. 그림자가 스멀거렸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테오그라젠스.”

“…….”

“말해.”

처음부터 목표는 즉살이 아니었다. 이 남자를 죽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짜증 나서 두드려 패고 싶었을 뿐이다.

그림자가 웅성거린다. 줄기로 이어지던 푸른 불들이 쪼개졌다. 둥근 푸른 불이 빛난다. 푸른 불은 제등. 제등 따라 쫓아온 이들이 그림자에 담겼다.

귀신이 숨겨 준 장소. 귀신들이 노니는 곳.

오롯한 나의 영역.

처음으로 하늘로 돌려보낸 하늘 조각. 그 안에 있던, 인간은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아득한 괴물.

그것을 상대할 때 이후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능력이다.

“이건… 도망도 못 가겠네.”

술렁이는 그림자 줄기들이 인격이라도 얻은 듯 남자의 주변을 에워싸며 빙글빙글 돌았다. 어둠이 뾰족하다.

얇은 방어막처럼 남자의 몸 주변에 둥글게 감은 물이 그림자에 닿을 때마다 환한 빛을 내뱉었다. 사그라지는 그림자 줄기는 재처럼 흩어지는 제 모습에도 상관없다는 듯 남자의 물을 톡톡 건드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목을 잘라 저들이 갖고 놀 장난감으로 만들어 버릴 악의가 느껴졌다. 이래서 안 쓰는데. 정말 내 능력이지만 기분 별로다.

내 발목에 감기는 건방진 것들을 뭉개 밟았다. 어느새 무릎까지 서리가 낀 남자에게 말했다.

“나는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길 잃은 것들의 인도자, 신의 궤적을 좇는 자. 무릎 꿇고 빌어먹는 생을 탐하는 자.”

“…….”

“알지?”

내 물음에 남자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너는 푸른 불꽃.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의 왕. 길 잃은 것들의 구심점, 요람. 누가 그대를 무릎 꿇리리.”

역시 아는구나.

한 발을 내밀었다. 그림자들도 움직인다.

내 의지가 아닌, 제멋대로 목을 노린 그림자를 남자가 피한다. 물에 담긴 빛 파편이 모래알처럼 흩날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다.

“테오그라젠스. 푸른 불. 나비. 인도 북부에서 그것들을 알아 와 교단을 만든 한국인 의사.”

“…….”

“너는 알지?”

검은 줄기가 저들끼리 뭉쳐 형태를 만들었다. 덩어리진 그림자가 목을 조를 것처럼 남자에게 매달렸다.

어둠 속 빛을 내뱉는 투명한 물, 그 안에서 요사스레 빛나는 보라색. 그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고, 그의 입이 열렸다.

“…나는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

“그리고… 너는 푸른 불꽃. 아니, 정확히는 불티라고 해야 하나?”

“불티?”

“석판에 글귀를 본 거지? 그건 예언이야. 너랑 나. 공주님과 나에 대한 예언.”

물을 뚫고, 빛에 둘러싸인 체 그림자에 할퀴어진 손이 내게 뻗어졌다. 나는 그것을 그냥 두었다.

피가 떨어지는 손이 내 목에 닿았다. 그림자가 남자의 손을 감싼다.

“목이라도 조를 줄 알았는데.”

내 목을 살며시 감싸는 손에는 힘이 없었다. 내 말에 남자가 웃는다. 보랏빛 요요한 웃음이다.

“우리는 운명이야. 공주님.”

눈이 휘어진다. 꿈결 같은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눈 아래 있는 것은 흉을 지우지 못한 검은 나비였다.

“나는 운명 같은 소리 별로 안 좋아하는데.”

잘돼도 운명이야. 못돼도 운명이야. 이렇게 정리해 버리면 그 결과까지 가는 데 들인 모든 것이 운명이란 두 글자로 처리되잖아.

남자는 내 말에 소리 내서 웃었다. 그림자들은 이제 할퀴는 것이 아닌 거의 살점을 뭉개 버리고 있었다. 보기 싫은 꼴이었다. 적당히 하라고 발밑에 그림자를 잘근거리며 밟았다.

그나저나. 주세진에게는 내가 아니라 내 전직관이 왕이자 푸른 불꽃이라고 말했는데…. 본의 아니게 거짓말이 돼 버렸다.

내가 불티라. 공주와 불티. 왕과 불꽃. 이건 꼭… 왕위라도 계승하라는 것 같잖아.

헛소리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그럼 눈앞의 남자는 어떻게 본인이 나비라고 확신하는 거지? 내가 불티면 저 남자도 번데기여야 하는 거 아냐?

의문을 담아 남자를 쳐다보았다. 곱던 하얀 손은 여기저기 할퀴어져 있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온 어느 동화 속 이야기의 숨겨진 비극적 전말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제 상처가 신경 쓰이지 않는지 남자는 여상한 낯으로 말할 뿐이었다.

“내가 옛날에 말했지.”

“뭐를?”

“어디까지 구원할 거냐고.”

아, 그거.

“공주님은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림자가 또 남자의 손에 상처를 냈다. 피가 튀었다. 미적지근한 액체가 뺨에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모를 거야.”

“네가 왜 기분이 좋은데?”

“테오그라젠스가 틀렸으니까?”

갑자기 왜 테오그라젠스를….

“테오그라젠스가 그랬어. 공주님과 나는 운명이라고.”

“그놈의 운명.”

“…생은 다르나 그 끝은 함께할 것이니. 푸른 불의 재가 될지라도 그 불에 홀리는 나비가 돼라.”

테오그라젠스가 검은 마법사야? 왜 어리석은 불나방 역할을 시켜?

어이없어하는 내 반응에도 남자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조용한 달밤을 속인 귀신의 공간에 스치듯 울렸다.

“시작은 둘이요, 갈라졌으나 다시 하나가 되리라. 종과 왕. 끝과 끝. 우리는 가림막. 그리고 인도자. 기원과 종말의 페이지. 하나는 눈을 감고 하나는 눈을 감지 아니하였다. 방종한 것들을 어찌 두고 보리.”

“…….”

사이비 같아….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사이비 같다는 얼굴이네.”

“잘 아네.”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 내 웃었다.

“맞아. 사이비야. 테오그라젠스도, 그 ‘자식’도, 내 아버지도, 나도, 다 사이비야.”

남자는 제 눈가를 매만졌다. 나비 문신이 있는 자리였다.

“공주님은 좋겠다. 내 말을 그냥 사이비 광신도의 말 정도로 취급할 수 있어서. 난 그게 안 되는데.”

“…….”

기다린다. 필요에 의해 실존하지만, 필요로 인해 존재를 부정당해 실존하지 않는 달을. 허상의 날 아래. 시작과 무한의 기원을 담은 삶을 바친다. 테오그라젠스에게.

그것을 바치는 것은 주교의 아들.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나비를 새긴 소년.

나비를 새긴 소년. 눈앞의 남자.

그럼 그 ‘자식’은 누구지?

“오늘 이렇게 싸워 보니 알겠어. 나는 공주님을 이기지 못해. 나는 나비고 공주님은 아직 불티인데.”

“네 신이 잡신인가 보지.”

“신성 모독이야, 공주님. 하지만… 진짜 약하네. 테오그라젠스의 종이라는 거….”

“내가 구원자가 아닌 게 왜 네가 기뻐할 일인지나 말해. 그거 말고도 네가 말해야 할 것은 많아.”

손을 한번 휘저었다. 내 목을 매만지던 남자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남자에게 엉겨 붙던 그림자들이 조금 물러났다.

웅성웅성. 불만스러운 소음을 내는 것들이 건방졌다.

“우리는 운명이야.”

“그놈의 운명만 몇 번째 말하는 거야.”

“하지만 사실인걸. 우린 운명이야. 나비와 푸른 불. 낙원의 문을 열 존재.”

“낙원?”

“그런데 공주님은 구원자가 될 생각이 없잖아. 지켜보니까 알겠더라. 일상이 더 중요하지? 눈앞에서 죽을 것 같으면 살려는 주지만 굳이 멀리 있는 것들까지 살려 주려고 나서지는 않아.”

“…내가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맞아. 그럴 이유는 없지. 앞으로도 그러면 좋겠지만… 말했잖아. 운명이라고.”

“그놈의 운명―.”

“불티가 타오르려면. 몸집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삐삑삐삑삐삑― 삐삑삐삑삐삑―

“…….”

커넥터?

손목에 채워 둔 커넥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커넥터는 때에 따라 울리는 방식이 다르다. 주변에 하늘 조각이 떨어지면 가볍게 삐삑. 게이트가 터질 것 같으면 길게 삑―.

이렇게 계속 울리는 건….

“기름을 부어야지. 태울 것을 마련해야지.”

“…….”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것을 제공해야지.”

남자가 웃었다. 입꼬리가 휘영청 떠오르다 누군가에게 갉아 먹힌 초승달을 흉내 낸다.

“…어서 와.”

“…너.”

“새로운 지옥에 온 걸 환영해.”

“…….”

“…테오그라젠스가 전해 달래. 공주님이… 까먹은 것 같다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귓속이 뜨겁다? 속이 근지러운 것 같고, 손에 뭐라도 쥐고 싶다. 아니, 던지고 싶은 건가?

어쨌든.

기분이 매우 더럽다.

“야.”

“…….”

“그냥 죽어.”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검은 그림자의 줄기가 곧바로 남자의 팔을 꿰뚫었다. 피가 튀었다. 미적지근하다고 하기엔 너무 뜨거웠다.

하얀빛이 남자의 팔을 감쌌다. 뚫고 치료하고 뚫고 치료하고. 그 헛짓거리를 지켜보다 손에 얼굴을 묻었다. 커넥터는 시끄럽게 계속 울렸다. 머리가 아프다.

얼마 만에 듣는 거지? 반년이 넘게, 거의 일 년 가까이 듣지 않았던 소리. 게이트에서 기어 나오던 괴물들. 무너지던 안전 지역.

머리가 아파.

뭐부터 해야 하지. 뭐부터 해야 할까. 지금 제일 급한 건…. 엄마, 아빠는 지금 어디 있지. 아빠 회사가 어디더라. 엄마가 오늘 어디로 간다고 했지.

뭐부터 해야 하지. 머리가 아파. 어디서부터. 나 지금. 뭐부터 해야 하는 거야. 지금 당장 뭘 해야. 뭐든 해야. 뭐부터. 뭘 했었지. 옛날엔…. 어떻게 했었더라. 하지만. 지금은. 아. 머리가 아파. 일단. 뭐든 해야 하는데. 뭐부터. 그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 지금 일단 뭐든 해야 하는데.

뭐부터 해야 하지?

아.

모르겠다.

살금살금. 그림자가 내 발을 타고 올라왔다. 푸른 불이 저지했던 것도 같고, 오히려 안내했던 것도 같다.

그냥. 생각하는 것이 귀찮다. 아닌가. 생각하는 중인가. 아무것도 모르겠어.

외벽이 무너졌다. 그림자가 사그라지고 푸른 불이 깜박였다. 삿된 것들이 도망갔다. 저들 숨겨 줄 그림자가 없으니 무서운 처용 님이 자신을 잡아갈까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중심을 잡아 주고 지탱해 주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제등에 달려 있던 구슬 장식 굴러가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안녕, 공주님. 오늘은 날이 아니었나 봐.”

제 팔을 치료한 남자가 여상한 낯으로 내게 인사했다. 빙글거리며 웃지는 않았다. 그저 여상할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 일어났음을 아는 이의 얼굴. 어찌 보면 신의 말씀을 전하러 온 성자 같은 얼굴이었다.

남자의 눈동자에 보랏빛이 사그라들고 하늘빛이 드러났다. 새벽 어스름한 눈부처에 막막한 검은빛이 스쳤다.

남자가 등을 보였다. 커넥터가 울렸다. 뭘 해야 하더라. 아.

생각났다.

“서.”

“뭐….”

손을 뻗었다. 사그라졌던 그림자 줄기가 내 팔에 감겼다. 남자의 뒤통수를 잡고 지붕 위로 찍어 눌렀다.

몸은 기억한다. 그건 사람의 생각이 따라가지 않는 범위에 있는 어떤 버릇 같은 행위다. 여러 번 반복한 피아노곡을 생각 없이 치면 잘 쳐지고 생각을 오래 하면 오히려 헷갈리는 것처럼.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머리를 비우면 된다.

지옥도에서 살아남은 내 몸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위험 분자는 다 죽여 버리던 내가. 위험할 상황 같은 건 생기지 않도록 다 죽여 버리던 내가. 그게 사람이든 괴물이든.

다 죽여 봤던 내가.

생각을 비우고. 그저 몸에 맡기면.

이것 봐. 해결되잖아.

지붕에 머리를 찍으면서 다친 것인지 남자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손에 잡힌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했다.

이대로 죽이면. 적어도.

삐삑삐삑삐삑― 삐삑삐삑삐삑―

적어도.

삐삑삐삑삐삑― 삐삑삐삑삐삑―

“…….”

“…….”

삐삑삐삑삐삑― 삐삑삐삑삐삑―

죽이면.

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옥도도 아닌 지금. 이 남자를. 오롯한 내 의지로 죽이고 난 다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엄마의 얼굴을 보고 아빠의 얼굴을 보고, 함께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삐삑삐삑삐삑― 삐삑삐삑삐삑―

커넥터가 경고음처럼 울렸다. 잠시 바르작거리는가 싶었던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피곤한 날이다.

“내가.”

“…….”

“내가 불이든 불티든. 네가 나비든 번데기든.”

“나빈데….”

“닥쳐.”

쾅―!

“윽….”

다시 한번 지붕에 머리를 찍은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운명이네, 뭐네, X같은 소리만 내뱉는 네 신한테 가서 전해.”

괴물을 죽이는 건 괜찮다. 사람을 죽이면 괜찮아지는 데 오래 걸린다. 내 일상은 언제나 가까이 있어야 한다.

단지 그뿐이다.

“한 번만 더 내 앞에 너 같은 새끼 보내면 다신 신 소리 듣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

“신이든 귀신이든 직접적인 영향은 끼치지도 못하는 허상 주제에.”

남자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지붕에 다시 한번 세게 찍어 눌렀다. 큰 소리가 나고 남자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그걸 나는 알았다.

“…….”

“꺼져.”

알면서도 손에서 힘을 뺐다. 얇은 머리카락이 손을 스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아팠다. 내 손에 묻은 피를 검은 옷에 문질러 닦았다.

그 일련의 과정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류를 잡았다. 손안에 익숙한 나무의 결이 느껴졌다. 한숨 한 번, 두 번. 내뱉는 숨결엔 더 이상 한기가 없었다. 자리를 벗어나며 생각했다.

후회할 거야.

여기서 저 남자를 죽이지 않은 것을.

그리고 안심할 거야.

죽이지 않은 자신에게.

전직자는 괴물을 상대로 할 때만 사람.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여전히 괴물인 존재.

마법사와 힐러가 많은 법에서 민간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 건 신체적 한계 때문에. 신체 계열 전직자들이 더 법에 얽혀 있는 건 숨길 수 없는 힘 때문에.

여기서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손에 힘만 더 주면 된다. 그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괴물이 되기 싫었다.

단지 그랬을 뿐이다.

가면을 썼다. 가면에 왼쪽 눈 부분이 깨져 있었다. 저번 변형 게이트 안에서 깨졌던 그 가면이었다. 바꾸는 걸 깜박했다.

잠시 그 빈 부분을 매만지다 너울을 정리하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림자 속 세상이 깜깜했다. 어둠이 낯설었다.

커넥터를 확인했다. 가까운 곳부터. 급한 곳부터.

가족이 있는 곳부터.

“…….”

굳이 나서서 구해 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리 매정히 모른 척하고 웃을 수 있는 괴물은 아니었다.

삐삑삐삑삐삑― 삐삑삐삑삐삑―

커넥터의 소음이 나를 재촉했다. 하늘 조각에서 괴물들이 기어 나왔다는 경고음. 커넥터의 지도가 새빨갰다.

저 빨간 것들이 모두 괴물이었다.

‘어서 와. 새로운 지옥에 온 걸 환영해.’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시X.”

뭐 이런 X같은 일이 다 있지?

테오그라젠스가 정말 신일까? 인간을 죽이고 싶은 건가? 그럼 전직자들은? 희망 고문? 왜 죽음과 희망을 함께 준 거지?

푸른 불은 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맞다고 한다. 불이 아닌 불티. 아직 불티인 불이 될 존재라고.

운명, 운명, 노래를 부르던 그 나비 새끼랑 같이 낙원의 문을 열 거라고. 그런데 그 자식은 테오그라젠스의 종이라며. 그럼 테오그라젠스가 우릴 낙원으로 이끄는 존재라는 거야? 그럼 왜.

왜.

우리를 지옥에 처넣었는데?

낙원과 지옥. 지옥과 낙원.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팠다.

아냐. 지금은 그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 더 급해. 부모님은 지금 어디 있지?

가까운 곳부터 일단 해결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러다 부모님이 잘못되면…. 아…. 진짜…. 기분 X같다.

삑― 삑― 삑― . 삑― 삑― 삑―.

“?”

커넥터의 신호음이 바뀌었다.

[문자 왔어요. ٩(ˊᗜˋ*)و ]

“문자?”

이 상황에 무슨….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내 목소리를 확인 요청으로 인식한 커넥터가 강제로 문자 메시지를 내게 보여 줬다. 메시지의 수신인은 전혀 예상 못 한 사람이었다.

“주세진….”

[보낸 이: 닉네임

주세진이다. 호연이한테 커넥터 빌렸어.]

[보낸 이: 닉네임

전직자는 민간인을 구해 줘야 할 의무가 없어.]

“…….”

[보내는 이: 닉네임

하지만 굳이 그 의무를 찾아야 한다면 길드 소속 전직자들에게 있지.]

[보내는 이: 닉네임

그러니까 넌 너희 부모님 찾으러 가.]

[보내는 이: 닉네임

옛날처럼 너 없으면 죽어 나가는 전직자들 만들려고 길드를 만든 게 아니야.]

[보내는 이: 닉네임

너 혼자 다 싸워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만든 게 길드야.]

[보내는 이: 닉네임

그러니까 너는 너희 부모님 먼저 찾아.]

[보내는 이: 닉네임

누가 욕하면 내가 그러라고 했다고 해.

[보내는 이: 닉네임

류.]

[보내는 이: 닉네임

지휘자로서의 명령이야. 넌 너희 부모님 먼저 찾아. 두 분의 안전을 먼저 보장한 다음에.]

[보내는 이: 닉네임

네가 원하면 그때 다른 사람들을 도와.]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상대도 그걸 예상했는지 가타부타 말없이 연락이 끊겼다. 어둠 속에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 대신 가면이 손에 느껴졌다.

나조차도 내 얼굴을 알 수 없게 가리는 가면의 감촉. 그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

항상.

항상 주세진은 내게 부탁을 하지 않는다. 항상 명령을 내린다. 부탁받아 잘못하면 그건 내 잘못.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실패하면 그건 지휘자의 잘못이니까.

그건… 생각보다 더 큰 면죄부다. 언제나.

***

“진정해.”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주세진의 말에도 이호연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학교 간다고 까맣게 염색했던 머리가 다시 하얗게 변해 있었다. 회색 눈동자에 담긴 동공이 작게 축소되었다. 사람보단 호랑이, 그 자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짐승에 가까운 송곳니가 언뜻언뜻 입술 사이로 보였다. 나름 진정하려는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신체 계열 전직자들이 가장 까다로운 법의 제약을 받는 이유였다. 어느 정도 감정의 선을 넘으면 스스로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건 그들뿐이었다.

“뛰쳐나갈 생각하지 마. 네가 다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너 없다고 다 죽어 나가던 시대가 아니야.”

“…….”

“그런 시대에서 벗어나려고 만든 게 길드야.”

주세진의 말에 이호연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래 봤자 일반인들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졸도하게 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거였다.

변형 게이트 안에서 이호연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름 깨달았던 박상호도 지금 이호연의 모습은 무서웠다.

그건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더 오래 알았고 더 익숙하기에, 어리고 전직하진 얼마 안 된 박상호와 달리 대부분 지옥도에서 전직자로서 살아남은 이들이기에 티를 덜 낼 뿐이었다.

애초에.

애초에 지옥도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살인 한번 안 저질러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게 전직자라면 확률은 더 희박해진다.

최소한의 욕구 충족을 만족하기 위해서도 무력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전직자들에겐 그 무력이 있었다. 무력을 얻기 가장 쉬운 수단이 전직이었다.

그런 전직자들에게서 살아남고 싶은 이들도 전직자가 되었고, 그런 전직자가 부러운 이들도 전직자가 되었다. 지옥도의 전직자란 그런 거였다.

모두가 주홍 글씨가 새겨졌지만, 모두가 암묵적 합의하에 그 사실을 묻은 살인자들.

또한 살인이란 그런 것이었다. 필요로 했든 자의로 했든 타의로 했든 한번 저지르고 나면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 그리고 그 선을 넘어 본 이들은 서로를 알아봤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끼리 뭉쳤고,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졌다. 길드란 그런 이들의 모임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민간인을 살리고 돕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의무가 있었다.

그때. 내가 죽였거나, 살리지 못했거나, 죽여야만 했던 사람의 가족, 혹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주세진은 그런 이들의 구심점이었다. 그가 입을 열면 모두가 집중했다.

“상호는 민간인들부터 찾아. 건물 아래 깔렸거나 도망치지 못하고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정인이랑 같이 인명 구조부터 해.”

히든 전직자인 박상호와 오정인은 인명 구조에 특화된 전직자들이었다. 탐색자와 어디든 공간을 오고 갈 수 있는 전직자는 이런 상황에서 제일 귀한 인재들이었다.

“나연이, 민호, 민경이는 괴물들을 상대한다. 천칭이랑 협력할 거야. 수혁이는 이미 그쪽과 합류했어. 나연이와 민경이는 후방 쪽에서 괴물들을 해치우며 발견하는 민간인의 보호 및 치료를 1순위로 둬. 민호는―.”

“저는 말 안 해 줘도 알아요. 제가 할 일.”

손민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스갯소리로 아군이 다치기 전에 적을 처치하는 힐러라고 놀림 받지만, 손민호는 귀한 인재였다.

힐러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 힐러. 지옥도 당시 괴물들에게서 환자를 지키려고 어설프게 무기를 들던 의대생은 귀하디귀한 전투 힐러로 전직했다.

“다들 연락 잘 받아.”

주세진의 말에 그의 뒤에 서 있었던 강유진이 손을 흔들었다.

“연락 잘 안 받으면 너희 창피하라고 오색 빛깔 무지개 뿌잉뿌잉, 뾰잉뾰잉, 뾰로롱한 유니콘 구름을 보낼 거야.”

“…그게 대체 뭐야?”

“내가 열심히 개발한 구름 전서.”

강유진이 주먹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을 펼치자 그 안에서 튀어나온 구름은 정말 무지갯빛 유니콘 모양이었다. 심지어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연락 잘 받을게요. 그냥 구름 보내 주세요.”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손민호를 보며 강유진이 낄낄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이호연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보고 있었다. 그런 이호연의 어깨에 주세진이 손을 올렸다. 그는 단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마음대로 해도 돼. 가기 싫으면 여기 있고, 괴물을 죽이고 싶으면 죽이러 나가도 돼.”

“나갈 거야.”

“그럼, 사람을 발견하면 안전 지역으로만 옮겨 줘.”

“응.”

“…류는 부모님 먼저 찾으라고 했어. 너도 불안하면―.”

“우리 아버지가 어디 가서 쉽게 당할 분은 아니라서.”

“…….”

“걱정하지 마. 저 요란한 구름 봤더니 쪽팔려서라도 정신 차리고 돌아다닐 거야.”

“그럼 다행이고.”

주세진의 말에 결국 이호연은 살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 많고 걱정 많고. 책임감 강하고 항상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지휘자. 미워할 수가 없는 참 좋은 사람. 그럼에도….

애써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몽실몽실한 평범한 하얀 구름이 주세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구름 조각을 퐁퐁 내뱉으며 무언가 대화를 나눈 구름이 물에 녹는 솜사탕처럼 사라졌다.

“수혁이한테 연락 왔다. 이미 천칭과 함께 괴물과 대치를 시작했다고. 다들 조심하고, 연락 잘 받고.”

“네, 길드장님.”

“네, 보호자님.”

“네, 아빠.”

“넹, 엄마.”

제멋대로, 다루기 어렵고 고집 센 평균 나이가 어린 전직자들이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는 총사령관님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치지 말고.”

걱정스러운 소리도 들었고 잔소리도 들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박상호와 오정인이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간 이동이라는 스킬을 가진 오정인만 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 볼게요.”

이나연과 손민호, 손민경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으러 나섰다. 강유진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줬다. 남은 건 주세진과 이호연뿐이었다.

“이호연.”

“응.”

“너 혼자 안 해도 돼.”

“알아.”

“…무리하지 마.”

“응.”

“그러라고 만든 길드야. 너나 류, 둘만 무리하지 않게 하려고.”

“…응.”

남들이 강한 전직자들을 모아 길드를 만들 때 혼자 이상한 기준을 내세우며 길드를 만든 주세진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직자. 제 동료를 버리고 가지 않을 사람.

바깥의 풍경은 과거의 지옥도와 다를 게 없었다. 하늘만 무너지지 않았을 뿐 괴물이 돌아다니고 건물이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다.

다른 점은 하나였다.

저 살기 바빴던 전직자들이 민간인을 구해 주고 길드 소속 전직자들이 서로의 협력하에 움직였다.

주세진이 지휘 계열로 전직하기 전까진 이뤄지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혼자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 다치지 않아도 되고, 혼자 괴물들 사이에 있지 않아도 되는 세상.

같은 지옥이라도 달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숨통이 트였다. 이호연은 주세진에게 돌려받은 커넥터를 보며 생각했다.

그가 너무 좋아해, 주체하지 못하겠는 사람도 숨통이 트이면 좋겠다고.

“류….”

밤이 깊었다. 새벽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까진 아직 멀었다. 낮이 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악몽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우린 얼마나.

***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피해 달렸다. 괴물이 보이는 족족 푸른 불로 감아 불태워 버렸다. 꼬마 도깨비들이 내 그림자를 빠른 속도로 오고 갔다.

어디 있는 거야.

아빠는 찾았다. 회사에서 야근한다던 아빠는 다행히 회사 건물 아래 지하 벙커에 대피해 있었다.

지옥도 이후 모든 건물에 이럴 때를 대비한 전용 대피소를 만든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약속 장소 주변은 다 뒤졌다. 엄마도 친구분들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지하 시설에 대피해 있는 건가? 혹시 길이 엇갈렸나? 왜 꼬마 도깨비들은 엄마를 찾아내지 못하는 거지. 내가… 내가…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해서?

랑은 꼬마 도깨비들이 내 성장에 따라 함께 성장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 애들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가면이 답답했다. 오늘따라 너울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낚아채듯 너울을 잡아당겼다. 가면이 벗겨지고 땅에 떨어진 그것은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숨이 찼다.

“…….”

만약.

꼬마 도깨비들이 능력이 부족해서 엄마를 찾지 못하는 거라면, 그래서 그 못 찾는 사이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오롯한 나의 잘못이다.

누군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말해 준들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죄책감이란 그런 거였다. 진흙, 수렁, 개미지옥. 빠져나가고 싶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

“어디 있어….”

살금살금 밤이 가시는데, 어스름한 새벽빛이 세상에 도래하는데, 이제 곧 아침이 올 텐데.

왜 내 악몽은 끝나지 않지.

아, 차라리.

꿈이면 좋겠다.

걸음이 멈췄다. 다리가 떨렸다.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날 부르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류?”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나오는 건 이호연이었다. 지금 막 괴물과의 전투가 있었는지 입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옷소매로 닦아내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가볍게 뛰어넘어 내게 온 이호연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울어요?”

“…엄마를 못 찾겠어.”

못 찾겠어. 찾을 수가 없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버텼는데….

“…울지 말아요, 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갓 스무 살이었던 그때와 지금은 확연히 다른데, 왜 나는 그때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 모르겠다.

이호연이 내 어깨를 감쌌다.

몸을 숙여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어린아이의 체온을 확인하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회색 눈동자가 내 눈을 마주 보았다.

“류. 나를 봐요.”

“…….”

“당신은 강해요. 그리고 뭐든 해내죠.”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소곤소곤 말을 전했다.

“혼자서 처음으로 하늘 조각을 돌려보냈죠. 게이트 안에서 실종될 뻔한 사람도 찾아냈어요.”

“…….”

“누구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던 시기에도. 누군가를 지켜야 했던 시기에도. 당신은 언제나 강했죠. 그래서 예전에는 샘이 난 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샘…?”

“왜 나는 저렇게까지 못하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죽을 뻔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감사하고 질투하고… 당신을 좋아했죠.”

“…….”

“그리고 생각했어요. 내가.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당신이 덜 힘들었을까. 왜 나는 저렇게 강하지 않을까.”

“…….”

“당신이 내게 기대면 좋겠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어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당신은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스스로 이미 강하고 누구에게 기대야만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죠. 오히려 남을 기대고 싶게 만드는 강한 사람이에요.”

“…….”

“그래서 생각을 바꿨어요. 당신이 내게 기대는 게 아니라 내가. 내가 당신이 힘들지 않게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애초에 당신이 누구에게 기대야 할 정도로 힘들지 않게 곁에 서서 함께 짐을 들자고.”

눈이 휘었다. 회색 눈동자의 빛은 묵색에 가까운데 왜 이리 예쁜지 알 수가 없었다.

“류.”

“…….”

“류.”

류. 귀한 보물인 양 이호연은 그 이름은 조심스레 불렀다.

“당신은 강하고 충분히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요. 당신의 강함은 굳건하죠.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성공하죠. 그런 당신께 제가 감히.”

“…….”

“도와드리고 싶다고 말해도 되나요?”

이호연이 제게 기대라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 답은 ‘아니다’. 고마워도 내심 속이 상했을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와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그 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치졸한 감정이 응어리졌을 것이다. 그건 고마워도 생기는 감정이다. 이호연이 내게 목숨을 구원받으면서도 질투하고 샘이 난 것과 같은 심리였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찬 이호연은, 서슴없이 저 자신을 낮추는 이호연은.

내 자존심 지켜 주는 게 먼저인 이 호랑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도와줘.”

“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지만, 남들과 어울려 살려면 남들보다 너무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그건 안정된 세상이든 지옥도의 세상이든 통용되는 진리였다.

나는 강했고, 제일 강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구하고 싶으면 구하고 지키고 싶으면 지키고.

한계를 모르는 힘은 지옥도에서 내 정신을 지탱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상황은 애초에 만들지 않을 테니까.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건 지옥도에서 나를 지탱하는 것. 내 정신이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리블의 사옥에서 이호연 몰래 내게 심리 상담을 제안하던 주세진의 말을 거절했다. 나의 강함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내가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까. 누가 나를 이겨. 누가, 감히, 나를.

호언장담했다. 나도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

이호연은 내가 기대지 않아도 되는 강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틀렸다. 나는 기댈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강해야 했다. 나의 무너짐은 나 혼자만의 무너짐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괜찮으나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

“류?”

“…아냐.”

두통이 가셨다. 머리가 맑아졌다. 조급함. 초조함. 나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아득함.

커넥터로 어딘가에 연락을 넣는 이호연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왜 변형 게이트 안에서 리블의 길드원들을 보고 부럽다고 생각했더라.

“…….”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지. 강하든 약하든. 그냥 기대도 되니까. 어려우니까 도와달라고 해도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류. 이 근방 사람들이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대요.”

“…….”

“류?”

“지하철역은 못 찾아봤어. 거기로 가 보자.”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홀로 전선에 서던 지옥도. 그때 나는.

조금, 아니, 많이 외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가까이 오는 이호연의 옷소매를 쥐었다. 이호연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이호연의 시선을 받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왜 이호연이 툭하면 내 옷소매를 잡았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내게 항상 말을 걸었지. 나를 신경 썼지. 나 혼자 잘난 것처럼 굴던 내게, 너는. 그때의 너는.

그 당시의 나는 정말 나의 강함만을 믿고 굳건했던 것일까. 유일하게 내게 말 걸어 주던 하얀 호랑이는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같은 색이었다. 나와 대조되던 색.

멍하니 밤과 낮의 사이, 새벽 어스름한 하늘을 보면서 밤이 가시고. 새벽도 가시면 찾아오는 낮과 잘 어울리던 새하얀 호랑이가. 내 정적을 깨고. 아침을 알렸다.

‘잘 잤어요?’

그렇게 말했다. 항상. 매일 아침. 낮이 찾아오고, 꿈이 끝나던 시간. 그런 그의 뒤로 보이던 하늘은 아름답지 않음에도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가자.”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나의 행동을 조용히 기다려 주던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지하철 역사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건 사람이 아닌 괴물이었다.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것들을 보며 손을 뻗었다. 내 손안에는 등을 달랑거리는 까만 제등이 쥐여 있었다.

그림자가 심장을 찔렀다. 멋도, 보여 주기식도 없는 실용성에 치중한 공격이었다.

쓰러진 괴물을 뛰어넘으며 꼬마 도깨비들을 풀었다. 이호연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공사장에서나 맡을 수 있는 먼지 냄새와 옅은 시멘트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피 냄새.

꿈틀거리는 괴물의 심장에 류를 찔러넣으며 이호연에게 물었다.

“지하철에도 벙커가 있을까?”

“아마 있는 곳보다 없는 곳이 더 많을 거예요. 건물 아래 벙커를 만들고 그다음 지하철 역에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

신도림이나 구로, 부평 같은 유동 인구가 많은 역에는 지하 벙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 지하철역은 말 그대로 랜덤. 운이었다.

역사 안은 처참했다. 창백한 빛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지옥도 이후 새로 단장했던 깔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깨진 유리 조각. 무너진 벽. 사람들이 앉았을 의자. 자판기였던 고철.

사람은….

이런 곳에서 전직자가 아닌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류.”

“…….”

“괜찮을 거예요.”

“응.”

괜찮을 거야.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이상한 것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현란한 무지갯빛 유니콘 모양에 폴짝폴짝 뛰는… 구름? 솜사탕?

공격해야 하나?

요상한 것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손을 움찔거리는데 이호연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뭔지 알아?”

“…….”

“?”

머리가 아프다는 듯 제 이마를 짚은 이호연이 해탈한 얼굴로 구름을 낚아챘다. 유니콘 모양 구름은 손안에서 바르작거리더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입 부분이 빠끔거릴 때마다 구름 조각이 퐁퐁 떨어졌다.

저게 뭐야….

어린이 장난감 같은 유니콘 구름에서 생긴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이거 진짜 목소리 전달돼요?”

“된다니까. 빨리 말해.”

“아! 알겠으니까 밀지 마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내뱉는 구름은 녹음본을 보내는 게 아닌 실시간인지 살짝 정신이 없었다.

“호연 형. 형이 지금 있는 지하철역에 벙커가 있어요. 거기 지금 대략 열다섯, 여섯?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 정도 수의 사람이 있어요. 멀리 있어서 벙커의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 수 없는데….”

들어 본 목소리였다. 박…상호였나. 리블의 병아리 꼬마였다. 탐색이 능력인 전직자.

“그런데… 벙커 근처에 괴물이 둘…, 셋? 다섯인가…. 정확히 모르겠네. 어쨌든 빨리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그쪽으로 가면 더 정확히 알 수 있기는 한데 이쪽도 지금 급해서….”

“그거면 됐어.”

꼬마한테 도움을 받았다. 다음에 맛난 거라도 사 줘야겠다.

내 목소리를 들은 그는 흥분한 듯 말소리가 빨라졌다. 불쌍한 유니콘 구름도 덩달아 빠르게 입을 움직였다.

“어!! 류? 류죠? 호연 형, 류랑 같이 있어요?”

“류인 줄 네가 어떻게 알아?”

이호연의 물음에 구름 너머 박상호가 빽 소리쳤다.

“길드원이나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 아니면 호연 형은 자진해서 여자 만나러 안 가니까!!”

와. TMI.

이호연의 질문에 신나서 답한 박상호의 목소리가 발랄했다.

덕분에 긴장은 풀린다만….

이호연이 구름을 손으로 쳤다. 몽실몽실 무지갯빛 솜덩이가 퐁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

“일단 사람들부터 찾을까?”

“네….”

때마침 꼬마 도깨비 쪽에서 신호가 왔다. 눈을 감고 그쪽으로 시야를 연결했다. 이족 보행 하는 괴물이 둘. 사족 보행 셋.

정확히 다섯.

꼬마의 능력이 제법이었다.

“찾았어. 이동하자.”

찝찝한 얼굴로 구름을 쳐낸 제 손을 보던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다리에는 검은 그림자가 감겼고 이호연의 다리는 호랑이의 다리로 변형되었다.

“…….”

“?”

“아니야.”

지그시 보는 내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호연에게 고개를 저었다.

“…….”

과거와는 다르다.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그때와는.

주세진이 주던 면죄부와는 다른 안도감이었다.

***

지하철 승강장 문 안을 서성이는 괴물의 미간에 류를 던졌다. 눈과 눈 사이. 팔을 허우적거리던 이족 보행 괴물이 뒤로 쓰러졌다. 먼지가 나풀거렸다.

친구인지, 가족인지. 똑같이 생긴 다른 이족 보행 괴물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손으로 머리를 으깨 버리려고 했지만 내가 나서기 전에 이호연이 먼저 나섰다.

손을 변형시킨 이호연이 가볍게 휘젓는 것만으로 괴물의 안면이 박살 났다. 베거나 갈기는 게 아니라 박살 내는 거였다.

이호연과 순수하게 힘 대 힘으로 싸우면 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먼저 죽인 괴물 쪽으로 손을 뻗었다. 괴물의 미간에 꽂혀 있던 류가 그림자를 타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쿵. 쿵.

까만 제등을 바닥에 두 번 찍었다. 그림자가 늘어졌다. 길게, 더 길게.

눈치 보며 숨어 있던 것들이 그림자에 꿰였다. 쿵. 다시 한번 제등을 바닥에 찍자 바르작거리는 것들이 고슴도치의 모습으로 변했다. 겉을 둘러싼 가시가 아니라 속에서 꿰뚫고 나온 가시였다.

“지하철 벙커는 터널 쪽에 있지?”

“네. 괴물이 주변에 있는 것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고 터널 안쪽에 있는 벙커로 들어갈 수 있게 돼요.”

“그럼….”

괴물은 죽였고. 위치도 알았고. 지하철은 운행 중단되었을 테니….

지하철을 타고 있던 사람들과 역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스크린 도어 너머 벙커 안에 있을 것이다.

마침 터널 쪽으로 보냈던 깨비들이 돌아왔다. 내가 원하던 정보를 들고.

“후….”

긴장이 풀린다. 엄마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무사했다.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묵직하게 몸을 짓눌렀다. 눈을 한번 질끈 감고 스크린 도어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이호연 옆으로 갔다.

아까 그 괴물들이 부숴 놓은 건가?

스크린 도어는 무너진 천장과 함께 엉켜 버린 실타래 꼴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고 싶지만….

“…….”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 귀교(鬼橋)를 연 후유증이었다. 실용성에 치중한 공격을 하는 건 상황이 다급한 탓도 있지만, 지친 탓이 컸다.

꼬마 도깨비들이 그림자를 오고 가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를 다루는 것이 점점 버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푸른 불은….

류에 매달린 제등 안에 호롱불처럼 흔들리는 푸른 불이 보였다. 아직은 괜찮다.

“부수자.”

“네.”

공공시설 파괴범이 되는 기분이었지만 어차피 이건 이미 부서졌다. 괜히 여기서 시간 끄는 것보단 빨리 지나갈 수 있게 부숴서 벙커 안에 있는 사람을 구조하는 게 더 나았다.

이럴 때 딱 오정인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인명 구조 특화 능력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리에 그림자를 감아 그대로 돌과 함께 뒤엉켜 있는 스크린 도어 쪽으로 발을 휘둘렀다. 요란한 소리가 나고 돌 조각과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포의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유리 조각이 옷자락에 부딪혀 떨어졌다.

“들어가자.”

뻥 뚫린 스크린 도어였던 것을 지나 터널로 들어왔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 하나가 류의 등 부분에 매달렸다. 꼬마 도깨비가 이끄는 대로 푸른 불이 일렁였다.

처음으로 꼬마 도깨비를 본 이호연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그…, 이 꼬마? 이건 뭐예요?”

“아…, 처음 보나?”

꼬마 도깨비를 본 이호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꼬마 도깨비는 반갑다며 손을 흔들었다. 이쪽은 너한테 이미 내적 친밀감 MAX 찍은 것 같은데.

저번 게이트를 포함한 지금까지의 만남은 모두 꼬마 도깨비의 개인적 만남이었다. 이호연이 놀랄 만하긴 했다.

손 흔드는 꼬마 도깨비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호연에게 꼬마 도깨비를 소개해 줬다.

“꼬마 도깨비야.”

“네?”

“꼬마 도깨비.”

“…….”

“진짜야. 가끔 사역마? 정령? 소환수라고도 하나, 그거 부리는 마법사들 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네 닉네임이 닉네임인 것처럼 얘들도 꼬마 도깨비란다.

내 말을 들은 이호연은 호기심이 생겼는지 꼬마 도깨비를 손끝으로 콕콕 눌러 보고 있었다. 말랑말랑 짜리몽땅 꼬맹이는 호랑이가 저랑 놀아 준다고 좋아했다.

“귀…엽네요?”

“그러게.”

귀엽네.

유독 감정 표현이 뚜렷한 까만 가면의 꼬마 도깨비가 이호연의 손목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처음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 꼬마 도깨비라 그런가? 다른 깨비들에 비해 자아가 뚜렷하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맨날 호랑이와 놀고 싶다고 조르고 배송 오류 상소문에 호랑이랑 놀고 싶다고 써 놓은 만큼 꼬마 도깨비는 호랑이와의 만남에 행복해 보였다.

커다란 민들레 홀씨 타고 다니는 깨비들은 몸무게 또한 거의 나가지 않았다. 이호연은 그런 깨비가 신기한지 저한테 매달린 깨비를 콕콕 찔러도 보고 매달려 있는 손목 쪽도 위아래로 흔들어 보고 있었다.

“인형 같네요….”

“그래서 우리 엄만 내가 도깨비 인형 모으는 게 취미인 줄 알아.”

걔들 취미가 내 침대에서 인형인 척하기거든. 한 깨비, 두 깨비, 열 깨비가 그러고 있으면 솔직히 귀엽기는 한데… 침대가 비좁았다.

손목에 찰싹 붙어 있는 꼬마 도깨비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놀고 다시 안내―.”

“류!”

앗.

다리에 힘 풀렸다.

“…….”

“…….”

무릎이 꺾인 나도 얼떨결에 내 팔을 붙잡은 이호연도 입을 다물었다.

난 쪽팔려서 그런 거고 이호연은 왜 침묵하는지 모르겠다. 아무 말이나 해 주면 좋겠다.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챈 것인지 이호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응. 그냥 선로에 걸린 거야.”

내 팔을 붙잡은 손이 단단했다. 손목에 매달려 있던 깨비가 내 어깨로 넘어와 내 뺨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런 깨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리에 힘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

“…….”

아, 망했어요….

한번 힘이 풀린 다리는 영 말을 안 들었다. 그런 나를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낮은 목소리가 터널의 울림을 담고 내 귓가에 도착했다.

“류.”

“응?”

“손이 떨리고 있어요.”

“…….”

이건 좀 곤란한데.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면….”

“…….”

“대답해 주지 않겠죠?”

내 침묵 속에서 알아서 긍정을 찾아낸 이호연이 얕게 숨을 내뱉었다. 한숨인 듯 아닌 듯 아주 얕은 숨을.

무슨 일이 있었냐라…. 솔직하게 말할까.

내가. 위험 분자가 될 남자를 죽이지 못했어. 내 알량한 양심과 일상을 버리기 싫은 이기심으로, 라고 말하면 넌….

신경 안 쓰겠지.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그 나비 새끼를 죽이고 싶었는지 말해도.

이호연의 반응이 예상 가는 만큼 다른 사람의 반응도 예상이 가능했다. 위험 분자를 놓친 것에 대한 비난.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를 보는 두려움. 하지만 이호연은 아니다.

이해자라 해야 할지 동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호연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이해도 해 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호연을 올려다봤다. 묵빛의 회색 눈동자는 혐오도, 한심함도 없이 여전히 반짝반짝 예쁘게 날 보고 있었다. 그 눈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류가 말하지 않으니 저도 마음대로 하겠다고 말하면 싫어할 건가요?”

“보통 그런 건 실천하고 싫어하지 말라고 통보하지 않아?”

“류가 싫어하면 어떻게 해요.”

웃는다. 눈이 휘어졌다. 몸이 가까이 붙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느껴졌다.

먼지 냄새, 그리고 피 냄새. 낭만적이지 못한 장소에서 낭만적인 짓을 하는 호랑이가 하나. 그런 호랑이에게 얌전히 안기는 공주님이 하나. 무슨 전래 동화도 아니고.

싫은가요? 묻는 말에 나는 아니, 라고 답했다.

팔을 들어 이호연의 목에 걸었다. 다른 손은 제등을 들고 있어 매우 불안정한 자세였지만 나를 받친 팔의 단단함이 그만큼 안정적이었다. 꼬마 도깨비가 그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다 다시 등에 매달렸다.

조금 전보다 더 옅어진 푸른 불이 길을 안내했다.

“…….”

“…….”

발걸음 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소리. 얕은 숨소리. 빛이라곤 심해빛 제등 하나.

어둠이 넘실거리는 이곳에선 시각보다 청각이 더 예민해졌다.

바짝 붙은 상대의 심장 소리는 청각을 넘어 마주 닿은 촉각을 타고 내게로 넘어왔다. 넘어오고, 섞이고, 결국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아.

상대에게도 들리는구나. 그 사실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늦고, 이 어둠은 내가 만든 오롯한 내 영역도 아니고, 귀신들이 숨겨 준 장소도 아니었다. 청각도, 촉각도, 그 너머에 요란스레 뛰는 심장도 제멋대로인지라.

어둠 속에서 우린 침묵하고. 조용히. 조용히.

숨소리와 발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아득한 물소리를 들으며. 호롱호롱거리는 푸른 불그림자를 따라 발을 떼고. 눈이 마주치면.

“…….”

“…….”

“빨리 가자.”

“네….”

기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꼬마 도깨비 눈치를 주고. 다 알면서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걸음을 옮겼다. 간질거리는 꽃가루 흠뻑 묻힌 나비의 날갯짓처럼. 흔들리는 제등보다 더 흔들리는 마음을 품고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움찔거린 호랑이가 다시 똑바로 걸었다. 하얀 머리칼이 닿을 듯 말 듯 내 머리 위에서 노니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를 찾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뒤, 이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아니면 화마가 모든 걸 불태울 듯 사납게 굴어 나 스스로 제어가 안 되면.

그때 말해야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제등에 등이 환해졌다. 규칙적인 선로 위를 걷는 규칙적인 걸음의 주인에게 안겨. 불규칙한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 다짐했다. 그때 말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다고 무슨 일이 생겨 어떻게 되는 클리셰에 질 정도로 이호연이 약하고 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그런 뻔한 이야기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웃었고 내 뜬금없는 웃음에 이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얀 꼬리는 이리저리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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