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루수가 누구야
“리블의 사옥?”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이호연이 냅킨으로 내 입가를 닦아줬다. 달짝지근 생크림이 묻었나 보다. 훅 들어오네. 입가를 만지며 생각했다.
리블의 사옥이라….
“그때 류가 빌려준 두루마기가 회사에 있어서요. 물론 제가 갖다 드리면 되지만 이번 기회에 세진이 형이랑 만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음… 확실히 그건 그렇지. 뻔히 서로 어디 있는지 알면서, 심지어 주세진이 준 카드로 매일 점심에 후식까지 먹으면서 ‘몰라용’ 하고 지내는 것도 좀 그랬다.
“…….”
노린 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해한 낯의 이호연이 보였다.
허…. 노렸네. 이게 바로 큰 그림이구나….
해탈한 마음으로 주스만 쪽쪽 빨아 먹으니 이호연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혹시, 세진이 형이 싫어서 그런 거면….”
“응? 안 싫어하는데?”
내가 주세진을 왜? 눈을 깜박거리며 의문을 담아 이호연을 보니 이호연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류가… 형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형도 그렇게 생각하고.”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내가 싫어할 이유가 있었나?”
“…형이 공략 작전을 짤 때면 항상 류를 전선에 세웠으니까….”
그건….
그 당시에 가장 완벽한 작전이었고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걸 주세진도 나도 이호연도 안다. 주세진이 죄책감을 느낀 것은 알았지만 내가 자신을 싫어할 거라고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싫어하지 않아.”
내가 왜 싫어하겠어. 싫어하면 안 되는 거였다.
“주세진은 그 당시에 가장 옳은 선택을 했고, 그 옳은 선택을 해야만 했던 무게감도 알아.”
지휘 계열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최전선에 서야 했던 것처럼. 주세진도 지휘 계열이란 이유만으로 내게 명령을 내려야 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래야 했기에 그랬을 뿐, 그 안에 우리의 개인적 감정은 없었다.
빨대를 휘적휘적 저었다. 카페의 창밖에는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야 했던 우리가 그리했기에 만들어진 세상. 법이 없으면 무법 지대가 됐을 이곳.
주세진은 변호사였던 자신의 장점을 살려 법의 체계화에 가속도를 높였다. 권력 있고 법을 잘 아는 사람들 중 선함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 입맛대로 법을 만들고 싶어 하는 높으신 분들은 명줄도 길어 지옥도에서도 살아남았고 법을 만드는 이들의 옆구리를 콕콕 쑤시곤 했다.
하지만 주세진은 한번을 흔들리지 않았다. 참, 싫어하기 힘든 타입이다.
“류가 떠나고 얼마 안 돼서 세진이 형이 길드를 만들었어요.”
“…….”
“법을 만들고,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모았죠. 전직자가 무기가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법이 우리를 옭아매는 목줄이 되지 않는 방법을 찾았어요.”
“…대단하네.”
내 말에 이호연은 미소를 지었다.
“네. 정말로 대단해요.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공략했느냐에서 ‘공략했느냐’가 아닌 ‘어떻게’에 관심을 가져 줘요. 공략에 실패해도 ‘어떻게’를 생각해 줘요.”
“…….”
“아무도 우리를 욕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이라고 해 주는 세상.”
귀속이 뜨겁다.
“형이 류를 보면 하나만 물어봐 달라고 했어요.”
“뭐를….”
이호연이 내 손을 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이 내 손을 꽉 쥐었다.
“이 정도면… 이 정도면 그때 자신이 말했던 세상과 조금은 비슷하냐고.”
아, 진짜 주세진…. 뜨거움이, 눈까지 전염되는 것 같았다.
“류. 비슷한가요?”
이호연이 물었다.
나는 가방을 챙겨 벌떡 일어났다.
“앞장서. 리블 사옥으로 갈 거야.”
이호연은 웃었고,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울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호연에게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전하게 했어도 된다.
그럼에도 답지 않는 짓을 하는 건, 벽을 부순 서정은이 보험처리 했다며 걱정 말라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이호연이 제법 좋았고, 주세진이 싫지 않으니까.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거 외엔 없었다.
리블의 사옥은 주세진의 블랙 카드를 증명하듯 크고 세련된, 누가 봐도 ‘나 잘나가요’ 하는 느낌의 커다란 건물이었다.
건물에 들어와서 도리도리 주변을 둘러보다 이호연을 세 번 정도 놓친 뒤에야 주세진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놓쳐도 상관은 없었다. 서울에서 땅끝 마을까지라도 금방 찾아내 따라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 손을 꼭 잡고 걷는 이호연의 새빨간 귀와 건물에 들어온 뒤 긴장이 풀렸는지 드러낸 꼬리가 기분 좋은 듯 살랑거리는 걸 보니 그냥 놔두자 싶었다.
하얀 머리에 호랑이 귀도 어울렸지만 까만 머리에 하얀 호랑이 귀도 귀여웠다.
사옥 맨 꼭대기에 있는 주세진의 방은 주인의 성격을 닮았는지 깔끔하고 세련된 모던 스타일이었다.
방 한쪽에는 커다란 책꽂이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법 관련 서적이었다. 심지어 장식용이 아닌 진짜 읽는. 그것도 꽤나 자주 읽었는지 손때가 타 있었다. 그게 제일 놀라웠다.
“형은 조금 있다가 올 거예요. 아직 회의할 시간이라.”
“회의?”
길드 회의인가? 근데 이 길드 회의를… 하나? 그 발랄한 길드원들을 데리고? 안 될 것 같은데…?
“공략대 사람들이랑 길드 회의도 해?”
“아뇨. 그쪽 회의는 옛날에 몇 번 하긴 했는데…. 형이 초등학생 학급 회의도 이것보단 집중 잘할 거라고 한 이후로 안 해요.”
그럴 것 같기는 하다.
“다른 사람들도 형이 짜 준 대로 하는 게 편하다고 하고….”
방학 숙제를 대신 해 주는 학부모님의 마음인가 싶었다. 자연스럽게 방구석에 있는 찬장에서 쿠키와 차를 꺼내 온 이호연이 테이블에 그것들을 차곡차곡 세팅했다.
“코코아?”
“우유에다가 타 줘.”
내 주문대로 코코아를 만들어 준 이호연이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그럼 무슨 회의를 하러 간 거야?”
“형이 하는 회의는 많아요. 공략대하고만 안 하는 거지 길드 경영이나 생산 라인 쪽은 회의는 자주 하고. 오늘은 아마 정부 쪽이랑 회의하러 갔을 거예요.”
“정부?”
따끈따끈하고 달짝지근한 코코아를 마셨다. 맛있당.
“지옥도 이후로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슬슬 얘기가 나올 때가 됐거든요.”
“?”
“전직자의 목줄을 잡고 싶어 하는 정부의 욕심.”
아하.
“지금 전직자들을 관리할 수 있는 건 길드밖에 없고 심지어 무소속 전직자들은 마음먹고 숨으면 민간인과 다를 게 없죠.”
맞아. 서정은도. 나, 그 언니가 전직자인 줄 몰랐잖아.
“무소속 전직자가 사고를 치지 않게 관리할 집단이 없는 게 문제구나.”
이호연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부가 바라는 건 나라에서 전직자를 관리하는 거예요. 일종의… 정부 기관을 만들려는 거죠.”
“…무소속 전직자들한테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필요한 일이기는 하네.”
평범하게 살고 싶은 전직자들에게는 날벼락이다. 하지만 민간인인 척하고 살다 범죄를 저지르는 전직자를 막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다.
욕심만 안 내면.
“그것 때문에 형이 요새 바쁘더라고요. 자칫 잘못하면 신상 정보가 정부에 모두 들어가게 되고, 그건 나라에서 언제든지 필요하면 전직자들을 끌고 올 수 있는 게 되니까.”
“바쁘겠네.”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일이다. 최고의 무기를 욕심내지 않는 것. 자유를 버리는 것.
그 중간 타협점이란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인식을 사람으로 바꿔도 전직자의 힘은 사람의 힘이 아니니까. 상대가 괴물이면 사람이지만 상대가 사람이면 아직은 무기 혹은 괴물인 게 전직자다.
골치 아프겠다.
딱 그 생각을 할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앞으로 쿠키 접시를 밀어주던 이호연이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이호연 몰래 그림자에서 쏙 튀어나온 꼬마 도깨비들이 쿠키를 들고 도망가는 것을 보다 나도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
언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주세진에 관한 글.
리블 길드장은 나중에 후회 남주, 계략 남주, 집착 남주 될 것 같이 생겨서 하는 짓이 꼭 희생해서 죽는 서브남 같다고 했나? 진짜, 완벽한 비유였다.
내가 기억하는 주세진은 눈 밑이 까맣고, 언제나 피곤함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근데 여기 그 사람이 없네여.
뉴스에 나올 때는 일부러 제대로 안 봤고 저번에 게이트 앞에서 만났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밝은 곳에서, 느긋하게 마주 볼 여유가 생긴 상태에서 본 주세진은….
와. 정말 와… 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주세진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그 잠깐의 머뭇거림이 환상이었다는 듯 곧은 자세로 내게 걸어왔다.
슈트가 잘 어울리고 섹시한 얼굴에 얼굴보다 머리가 더 섹시하다고 평가받는 남자는 차가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눈을 갖고 있었다.
왜 인기 많은지 알겠네. 얼굴 잘났고, 능력 있고, 인성 좋은. 잔정 많고, 책임감은 큰데 책임질 일도 많은 사람. 그런 사람에겐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묘하게 사람 끌리게 하는 분위기.
“…류.”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참 신기하다. 이호연도 주세진도 어떻게 저렇게 확신을 하고 나를 류라고 부르는 걸까.
아이덴티티인 동양 옷도 도깨비 가면도 제등도 없는데.
사람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지옥도의 영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을 한 작은 여자애를 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세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다시 열렸다가 결국 닫았다. 이번에도 내게 먼저 말 걸지 못하는 남자를 지켜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리블의 사옥에 오는 내내 고민했었다. 우린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고, 그와 이호연처럼 지속된 관계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내린 답은 하나다. 그냥 대하자. 난 노빠꾸라 질질 끄는 거 못 한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웃었다. 지휘자와 최종 무기가 아니라. 죄책감이 오가는 사이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원래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인사부터 하는 거다.
눈치 빠른 주세진은 내 인사에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왜 서브남 같다는지 알겠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미소였다.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서슴없이 이것저것 묻기에는 조심스러운 관계였다. 소소하게 각자의 안부를 주고받는 것만 해도 많은 발전을 했다고 보아야 했다.
“잘 지냈어요. 부모님이랑도 만나고, 학교도 다시 다니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았어요.”
타르트를 꼴깍 삼키며 말했다.
갑자기 사라진 쿠키에 당황하는 이호연을 두고 주세진이 갖고 온 타르트였다. 오늘 리블 사내 식당에 나온 점심 디저트라고 했다. 진짜 맛있다.
“힘든 점은?”
이 정도면 천칭 길드원들이 와서 밥 먹고 간다는 소문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주세진의 질문에 답했다.
“힘든 게 뭐가 있겠어요.”
기껏 만나서 하는 질문이 다 저런 거라니. 주세진이 내게 주로 물었던 건 잘 지냈는지였다. 내심 길드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하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다.
게다가 ‘어디서’, ‘어떻게’는 묻지 않았다. 그저 잘 지냈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나도 편한 마음으로 답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봤을 땐 미처 몰랐지만, 예전과 달리 주세진은… 여유가 생겼다.
옛날, 스킬이 생기기 전에 보여 주던 불안한 모습이 아니었다. 스킬이 생긴 뒤로 한결같던 강박적인 모습도 아니었다. 여유 있는 완벽주의자 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지금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근데. 내가 류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내 질문에 주세진은 묘한 표정으로 이호연을 봤다.
아, 알겠다. 이호연이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겠는가. 물론 주세진 나름 개인적으로 알아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주된 이유는 이호연이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세진도 별다른 말 없이 넘겼다. 뇸뇸 타르트를 먹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누굴까 싶어 문 쪽을 쳐다보았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 커피를 마시는 주세진이 익숙한지 상대는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드라마에서 보던 수행 비서 같은 남자의 손엔 서류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그것을 흘겨본 주세진이 한숨을 내뱉는 게 느껴졌다. 단정한 차림에 퀭한 얼굴을 한 비서님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주세진을 불렀다.
“길드장님. 정부 기관 설립 관련으로 전화가….”
“씹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재촉 전화 계속 받았더니 스트레스로 쓰러졌다고 하세요.”
“…네.”
노빠꾸 주세진은 간단하게 재촉 전화를 해결하고 비서가 전해 준 서류를 훑어보았다. 개복치도 아니고 스트레스로 쓰러졌다고 하라니.
시무룩해진 비서님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신경 쓰기를 포기했는지 해탈한 얼굴로 나갔다.
새 타르트 한 조각을 내 접시에 올려 주는 주세진에게 물었다.
“협회가 꼭 필요해요?”
필요하기는 하다. 물어보긴 했지만 나 역시 알고 있기는 했다. 길드가 관리하지 않는 무소속 헌터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하지만 만약 정말 정부에서 관리에 들어간다면 앞으로는 꽤나 골치 아플 거라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전직관이 있는 장소도 관리할 거고 하늘 조각도 하나하나 관리에 들어가겠지. 사람들은 마음대로 전직을 할 수 없게 될 거고.
“무소속 전직자들이 문제가 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부에 소속된다는 건 역시 거북하다.
“단순히 무소속 전직자들의 문제 때문이 아니야.”
“?”
뭐가 더 있나?
“최근에 전 세계에 퍼졌던 변형 게이트 연결 현상과 이상한 시스템 메시지.”
아, 그거.
“정부에선 그에 대한 대책을 원해. 그리고 그 대책은 전직자들이지.”
“…….”
“일이 터졌을 때 전직자들의 구심점이 필요해. 예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론 한계가 있지.”
“길드가―.”
“그리고 그건 길드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
“…구심점 역할로 끝내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만들게 해야지.”
골치 아프네. 솔직히 협회 같은 정부 기관이 생기면 나도 곤란하다.
정부는 모든 전직자들이 정부 기관에 이름과 커넥터 닉네임을 등록하기를 바랄 거고 그럼 나를, ‘류’를 블랙리스트로 삼아 감시하고 싶어 할 거다.
정부의 역할은 딱 구심점. 그리고 법의 테두리에 전직자들을 넣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안 된다. 무조건 거기서 멈춰야 한다.
왜 그거 있잖아. 메X플의 에레브.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
정부의 헌터 협회가 에레브고 리블이나 천칭 같은 길드들이 모험가 연합, 레지스탕스면 무소속 헌터들은 그란디스의 영웅인가?
남들 노바일 때 나 혼자 아니마족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연합은 망한 성공 케이스지만…. 어쨌든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는 거다.
만약, 정말 전직자를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 만들어진다면….
차라리 길드에 들어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정부에서 한 수 접어 줘야 하는 길드. 그리고 내 앞에 그런 길드의 길드장이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주세진이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 미리 정하지는 마.”
“…내가 길드에 들어간다고 하면 좋은 거 아니에요?”
“길드장으로선 좋겠지. 하지만 주변 상황에 어영부영 떠밀리듯 들어오면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지 않아.”
“…….”
“천천히 생각해.”
다른 길드였다면 두 손이 뭐야, 두 발까지 들고 환영했을 일을 주세진은 거절했다. 정확히는 거절이 아니라 내게 생각할 시간과 결정권을 주는 거였지만….
과연 천천히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 싶었지만 주세진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길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길드장님….”
울먹거리며 다시 방에 들어온 비서님의 부름으로 그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주세진은 귀찮음을 담은 얼굴로 놀다 가라며 내게 임시 사원증을 줬다.
“그걸로 못 들어가는 곳은 이호연 데리고 가.”
“네.”
코드 번호가 찍힌 사원증을 훑어보는데 문 쪽으로 향하던 주세진이 걸음을 멈췄다.
“아.”
“?”
“궁금한 게 있는데.”
나와 이호연을 번갈아 본 주세진이 입을 열었다.
“둘이 세 살 차이 맞지?”
“네.”
“호연이가 나이 더 많고.”
왜 저런 걸 묻지?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왜….”
“?”
“호연이가 존댓말하고….”
네가 반말하는 거야? 라는 뒷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예상할 수 있었다.
어…. 진짜 그렇…네?
너무 자연스럽게 반말하고 존댓말 듣다 보니 그쪽으론 생각을 못 했다. 그건 이호연도 마찬가지인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평생을 연장자를 우대하는 유교 국가에서 산 것 치곤 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호연에게 말을 놓았다.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게요?”
내 되물음에 주세진이 어이없어하는 게 느껴졌다.
“옷은 제일 유교적으로 입고 다니면서 하는 짓은 제일 자유분방하네.”
“…….”
나를 놀린 주세진은 미련 없다는 듯 문밖으로 쏙 나가 버렸다. 이호연과 나는 말똥말똥 서로를 바라보았다.
“존댓말 쓸까…요?”
내 말에 이호연이 웃었다.
“원래 하던 대로가 좋아요.”
본인이 그렇다면야 뭐. 음 그럼….
“호연 오빠?”
“…훅 치고 들어오지 말아요.”
그치만… 그렇게 반응이 귀여우면 놀리고 싶은걸….
얼굴이 새빨개진 이호연은 식은 차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간식을 새로 가져오겠다면서 방을 나가 버렸다.
근데 우리… 쿠키 한 접시에 타르트까지 먹었는데? 물론 쿠키는 우리가 아니라 꼬마 도깨비들이 먹었지만. 그리고 간식 창고는 방에 있잖아.
문틈으로 빠져나가며 바쁘게 살랑거리던 꼬리를 생각하며 결심했다. 기분이 안 좋으면 이호연한테 오빠라고 불러야지. 물론 내 기분.
너는 슬플 때 힙합을 춰? 나는 슬플 때 호랭이를 놀려.
깨비들이 내 생각에 동의하듯 그림자 안에서 방방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얘들은 호랑이 꼬리 살랑거리는 걸 되게 좋아하더라. 매달려 보고 싶어 하는 건가?
꼬마 도깨비들의 심리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이호연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뒤늦게 간식을 많이 먹었다는 게 생각났는지 멋쩍은 얼굴이었다.
“간식은?”
“놀리지 말아요.”
저를 놀리는 게 살짝 불만스러운 것인지 꼬리가 바닥을 탁탁 쳤다. 그래 봤자 금세 살랑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제 꼬리만 멀거니 보는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이호연이 내게 리블의 사옥 탐방을 제안했다. 딱딱한 법전과 서류밖에 없는 주인 없는 방에 놀 건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승낙했다.
우리는 주세진의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수상한 G-124라는 버튼을 누른 이호연이 깜박거리는 인식기에 제 사원증을 내밀었다.
―확인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쭉 내려가더니 한층 자체를 전부 방으로 사용한 듯한 곳에서 멈추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깔끔했고 차례차례 방 안에 진열된 것들은 하나같이 신기했다.
“여기는 생산 라인의 중심이에요. 하늘 조각 안에서 채집한 자원을 갖고 만든 물건의 샘플을 놔둔 곳이죠.”
이호연의 말을 듣고 물건들을 자세히 보니 그제야 익숙한 것들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커넥터 중고 나라나 홈 쇼핑으로만 보던 물건들이었다. 하늘 조각 안에 자원을 가공해 만든 상품.
소형 길드는 가공할 엄두도 못 내는 것들을 저렇게 진열해 놓다니. ‘리블이 대형 길드이긴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드는 기술력과 완성된 상품의 질에 감탄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 아공간 반지도 리블에서 나온 거였네.
하늘 조각 안의 요상한 식물로 만든 주머니를 손에 쥐고 생각했다. 이래서 기술이 중요하다고. 내가 쥔 식물로 만든 주머니는 예쁜 소다 색이었다.
“차갑네?”
“얼음초로 만든 주머니라 그래요.”
아, 그 북극 남극 게이트에 파란 풀.
북극 남극 게이트란 가끔가다 나오는 하늘 조각으로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끔찍한 괴물이 돌아다니는 게이트다.
재수 없으면 절반은 얼고 절반은 살아 움직이는 괴물을 만날 수 있었다. 제 몸을 질질 끌면서 한쪽만 흐느적거리는 게 얼마나 기괴한데.
“여름에 아이스크림 넣고 다니면 딱이겠다.”
“길드원 몇 명이 몰래 훔쳐 가서 그러고 다니다가 형한테 걸려서 혼났어요.”
“…….”
참. 사람 생각하는 거 똑같단 말이야….
얌전히 주머니를 내려놓고 다른 물건을 구경했다. 원래라면 외부인은 들어오지 못하는 생산 라인의 중심이지만 나에게는 주세진이 준 임시 사원증과 프리 패스 이호연이 있었다.
아공간 반지 외에는 별 관심이 없던 내게 이곳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건 뭐야? 목걸이?”
은으로 만든 것 같은 작은 꽃이 들어간 유리 목걸이였다. 예쁘네.
“미아 찾기 목걸이요.”
“이게?”
“네, 두 개가 한 세트인데 둘이 나눠 끼면 고유한 색을 갖게 돼요. 그리고 거기 작은 보석을 세 번 치면 안에 있는 꽃잎이 길을 안내해 줘요.”
뭐야. 무슨 로맨스 영화 소품 같아.
“이번에 새로 찍는 영화에 협찬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로맨스?”
“네.”
미아 찾기 목걸이보다 커플 목걸이로 더 인기 많을 것 같다.
“거리 제한이 있기는 한데…. 그래도 지금까지 만든 미아 찾기 물건 중에 제일 좋대요.”
기술 진짜 좋아졌다. 나 때는 말이야. 끽해야 핸드폰 위치추적이었는데.
진짜 별게 다 있네. 인형, 반지, 모자, 머리띠에 장식품. 향초도 있네?
“이건 무슨 효과가 있어?”
“아…, 그거….”
이호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괜히 옆에 있는 몰랑몰랑한 인형을 잡아 뜯으며 시간을 끌더니 내키지 않는 얼굴로 향초를 설명했다.
“꿈을…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주는… 향초인데….”
인제 보니 물건 옆에 빨간 십자 마크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의료용 물품인가 보다. 근데 이호연 반응이 꼭… 몰래 써 본 사람 같았다.
“써 봤어?”
“…….”
“응?”
“네…. 옛날에 한 번….”
수상한데.
“무슨 꿈 꿨는데?”
“…….”
“호연 오빠 말해 주면 안 돼요?”
“말할 테니까 그거 하지 마세요….”
얼굴이 달아오른 이호연이 어물어물 말하기 시작했다.
“그거,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재생하는 거예요.”
아, 원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다시 보기 역할이구나. 그래서 뭘 꾼 건데? 멀뚱멀뚱 이호연을 보자 아까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이호연이 말했다.
“…류.”
“응.”
“…류요.”
“응, 나.”
“아니…. 그… 류 꿈을….”
아.
“…어떤 꿈인데…?”
우리가 다시 보기 하고 싶을 정도의 장면을 찍은 적이 있나?
“그때… 그 불로 된 별똥별이 떨어지던 날….”
“…….”
훅 치고 들어온다 진짜. 이호연에게는 제 마음에 불 질러진 날이요, 내게는 남의 고백을 실시간으로 들은 날이다. 물론 고백한 본인은 모르지만.
“…….”
“…….”
“나, 다른 데 구경할래.”
“연구실에 재밌는 거 많아요!”
연구실에 재밌는 게 왜 있어….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이호연을 따라갔다. 재밌고 신기한 물건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태연하게 구경 못 하겠다.
***
와, 생각보다 재밌잖아?
이호연이 둘러대느라 한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연구실은 정말 재밌는 게 많았다. 괜히 누르고 싶어지는 빨간 버튼의 유혹을 참으며 연구실의 물건들을 설명해 주는 이호연의 말을 경청했다.
“저건 일종의 측정기인데, 파…를…로니아? 게이트에서 얻은 특별한 약초를 담가서 사용해요. 능력 계열에 따라 색이 변하죠.”
연구자가 아니기에 설명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그 대신 경험을 토대로 한 실속 있는 설명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어차피 전문 지식 나오면 들어 봤자 모른다.
“넌 무슨 색인데?”
“일반적인 색이랑은 다른데, 일단은 붉은 계열이라서 신체 계열로 분류됐어요.”
“다른 계열들은?”
“마법 쪽은 푸른색. 치유 쪽은 하얀색. 가끔 색이 섞이는 일도 있는데 더 색이 강한 쪽으로 계열을 정해요. 예를 들면 연분홍이지만 흰색이 더 강해 치유 계열로 구분된 손민호처럼요.”
아, 그 우리 아군이 다치기 전에 적을 처치한다는 힐러.
“나도 해 봐도 돼?”
“그럼요.”
일단 마법 계열이니까 푸른색이려나. 사실 정확한 계열은 모른다. 랑한테 물어봤더니―.
‘음…. 마법?’
이라고 해서 대충 마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마법 계열이 아닐지도 몰라.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난 마법사치곤 너무 손이 먼저 나갔다.
장르에 이어 계열까지 찾을지 모르는 순간이었다.
“여기 이 통 안에 손을 넣으면 돼요.”
사람 하나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랗고 투명한 통에 반짝이는 풀을 넣어 나무 막대로 휘저은 이호연이 날 안내했다.
괜히 도근도근했다. 이런 거 너무 오랜만이야. 초등학생 때 했던 과학 실험 같았다. 산과 염기를 구별하는 지시약 실험을 하는 기분이다.
생각보다 차가운 물의 수면 위를 몇 번 퐁당이다가 손을 쏙 집어넣었다.
“오. 색 변한다.”
물 위에서 찰랑찰랑 흔들리던 파를로니아? 에서 염료가 녹듯 색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푸른색에서 시작해 점점 짙어지더니 어느새 심해와 같은 색으로, 가장 까만 밤의 색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온전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응? 검은색?
“까만색은 무슨 계열이야?”
“어…. 이런 색은 나온 적이 없는데?”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호연이 제가 가져온 풀이 제대로 된 것이 맞는지 상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플레로니아 맞는데.”
너 아까 파를로니아라고 하지 않았어? 원래 이름이 플레로니아였나 보다.
“연구원을 불러올까요?”
“아냐. 됐어. 뭘 그렇게까지.”
장르가 달라서 그런가 보지.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언제 남들이랑 그렇게 똑같았다고. 이거 말고도 구경할 건 많았기에 까만 물은 내 관심을 길게 끌지 못했다. 애초에 계열로 나누는 것도 그냥 편의에 따른 이름표 같은 것이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저건 뭐야? 석판?”
내가 가리킨 쪽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 까만 석판이 전시되어 있었다. 반타 블랙 색. 그때 그 검은 바위 같은 매끄럽고 까만 석판이었다.
“아…, 저거. 그때 그 변형 게이트 안에서 발견한 거예요.”
석판 옆에 책상에는 종이 한 무더기와 책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석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뭐라고 잔뜩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걸 해석하는 거야?”
그게 돼? 게이트 안에서 나온 물건이다. 그곳에서 나온 물건의 문자는 괴물이나 전직관들처럼 알 수 없는 곳의 언어라는 뜻이다. 근데 해석한다고?
“음…. 되나 봐요.”
이호연도 자세히는 모르는지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어, 근데. 이 석판에 있는 글자 꼭….
“여기서 놀고 있었어?”
“형.”
석판의 글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일이 끝났는지 주세진이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보던 주세진의 시선이 옆에 검은 석판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 뭉치를 내게 건넨 주세진이 여상한 낯으로 말했다.
“궁금하면 해석본을 봐.”
봐도 되는지에 대한 여부도 궁금하지만 이게 해석 가능한 건지가 더 궁금한데….
“이거… 해석이 가능한 문자예요? 솔직히 문자라기보단….”
“문자라기보단?”
“특수 문자 이모티콘?”
아니, 그렇잖아. 저 석판에 있는 글자 ᐕ, ᐙ, ᐟᐫ, ᐧᑘ 이런 건데….
“문자 맞아.”
내 의문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은 주세진이 책 한 권을 내게 내밀었다. 책 제목은….
“통합 캐나다 원주민 문자?”
“석판에 쓰여 있는 문자는 정확히는 캐나다 원주민 문자가 아니라 인도 북부에서 쓰이는 데바나가리 문자지만. 그건 참고 도서야.”
…그게 뭔데?
“너희가 봤던 시스템 메시지. 그걸 알아본 직원이 있었거든.”
설마 ‘ ᐕ ’ 이거?
“그거 그냥 비웃는 이모티콘 아니었어요?”
“그건 비웃는 이모티콘 맞아.”
“…….”
네?
“비웃는 겸 힌트도 준 거지. 석판에 장치가 되어 있었어. 비웃는 이모티콘이 어느 문자인지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글자로 인식되지 않는 장치.”
뭐 그딴 것도 힌트라고…. 심지어 그걸 알아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안 그래도 너 오면 물어보려 했는데 잘됐네. 해석본 봐 봐.”
나? 나 왜?
궁금증을 담아 주세진을 봤지만 주세진은 해석본을 내밀 뿐이었다. 깜찍 발랄 약 오르는 이모티콘 해석본의 글을 읽으면서 난 왜 주세진이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나는 나비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길 잃은 것들의 인도자, 신의 궤적을 좇는 자
무릎 꿇고 빌어먹는 생을 탐하는 자
너는 푸른 불꽃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의 왕
길 잃은 것들의 구심점, 요람
누가 그대를 무릎 꿇리리
우리는…
“푸른 불꽃….”
푸른 불 하면 누가 생각나요? 하고 물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류, 즉 나를 말한다. 수많은 불을 다루는 마법 계열 중 푸른 불은 단 한 명이니까.
그리고 저 괴이한 것들의 왕이라는 표현. 괴이하다는 건 뭘까. 낯설고 이상한 것들. 사람에게 있어선 귀신같은 것들.
나는 도깨비를 다루고 그네들과 같은 힘을 쓴다. 귀신같은 걸음을 걷고 홀릴 수도 있다.
누가 봐도 저건 날 저격한 글인데?
“누가 봐도 내 얘긴데?”
“뒷부분은 석판이 훼손돼서 알 수가 없는 상태야. 일단, 석판에 해석본은 외부에 알리지 않았어. 외국에 다른 게이트에서 석판이 나왔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
이거 잘못하면… 내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겠다.
혼자서 유독 튀는 능력을 갖춘 전직자가 게이트 안에서 발굴된 석판에 언급이 되었다? 진짜 누가 봐도 수상하다.
주세진이 이걸 비밀로 하지 않았다면 언론이 시끄러웠을 것이다. 신상을 터는 건 물론이고 날 찾아내려고 난리가 났겠지.
“우리 쪽에서는 석판의 글이 나비가 푸른 불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혹시 나비라고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
있다. 그때 게이트에서 만난 남자. 눈 밑에 나비 문신을 하고 있었던 탱커의 재능을 가진 힐러.
“게이트에서 어떤 힐러를 본 적이 있어요. 얼굴에 나비 문신을 한.”
“누가 있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놓쳤어요. 나랑 상성이 너무 안 맞아서.”
그리고 알 수 없는 예감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누군가 내게 속닥이는 것 같던 그 기이한 감각. 상성 문제도 있었지만, 그 예감을 믿은 것도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무리해서라도 붙잡아야 했나? 껄끄러운 기분으로 다시 석판의 해석본을 보았다.
나비. 푸른 불. 괴이한 것들의 왕.
그리고…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저 글에 나오는 테오그라젠스는 뭐예요?”
“사이비야.”
“네?”
사이비?
“옛날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의 이름이 테오그라젠스야. 인도 북부에 봉사 활동을 나갔다가 돌아온 한국인 의사가 만든 종교지.”
“인도 북부면….”
석판에 있는 문자의 지역이다.
“나는 신을 보았다. 감히 우리가 내려다볼 수 없는 하나. 다른 하나와는 다른 하나. 군림과 신앙. 절대적 우위. 신이요, 세계이자 우러러보아야 할 하나. 그것의 이름은 테오그라젠스.”
“…….”
“예전에 이혼 소송 담당 변호를 맡은 적이 있어. 그때 남편이 사이비에 빠졌다면서 부인이 내게 건네준 자료에 테오그라젠스라는 종교의 정보가 있었지.”
주세진이 변호사 활동을 할 때면 하늘이 무너지기 전인데, 그때 이미 있었던 종교라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사이비에 빠진 배우자와 이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으니까. 그런데….”
“뭔가 달랐군요.”
“…고등학교 동창 중에 형사가 있었어. 그 친구가 그 종교를 수사한다고 한 적이 있었지. 흘려들었던 대화가 이혼 의뢰를 받으며 생각났어. 그 친구에게 연락해 종교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려 했는데…. 묻기도 전에 친구에게서 USB 하나가 배달 왔지.”
말을 멈춘 주세진은 한숨을 내뱉었다. 탄식에 가까운 숨이었다. 답답한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은 주세진이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USB 안에는 자신이 왜 조사를 하게 됐는지. 무엇을 알게 됐는지에 대해 정리되어 있었어.”
“…….”
“테오그라젠스는 신도의 시신을 본인들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유가족들에게서 강탈해 간다. USB 안에 담긴 파일의 첫 문장이 그거야.”
“시신을 강탈한다고요?”
“주교를 비롯한 몇몇 신도들이 장례식 중간에 난입해 가족의 시신을 관째로 가져갔다며 신고가 들어왔어. 문제는 자신의 몸을 테오그라젠스에게 바치겠다는 몸 주인의 각서가 있었다는 거야.”
단순 사이비 종교라기엔 하는 짓이 너무 괴이하다. 유가족이 보는 앞에서 관째로 시신을 가져간다니.
“뭔가 뒤가 구린 일이 엮여 있을 거라고 생각한 친구는 잠입 수사를 시작했고…. 시신 강탈보다 더 말도 안 되는 것을 보게 돼.”
“…….”
“장기 매매. 마약. 불법 장기 기증 정도를 생각했어. 그런데 그 종교는….”
주세진의 말이 뚝 끊겼다. 나는 그가 왜 말을 멈췄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
“푸른 불이 정말 나라면, 난 누구보다 테오그라젠스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야 해요. 말해 주세요.”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듣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종교에 대해 알고 싶어 하겠는가.
근데 어떻게 해. 누가 봐도 날 저격한 글인걸.
내 고집을 꺾지 못한 주세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한 음절, 음절, 단어가 섞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말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맛봐야 했다. 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시신에서 뜯어낸 심장에 숫자를 적는다. 그건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자, 무한의 궤적을 뜻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기다린다. 필요하기에 실존하나, 또한 동시에 필요에 따라 존재를 부정당한, 실존하되 실존하지 않는 달을.
“그리고 그 심장을 바치는 건 주교의 아들이자,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나비를 새긴 소년.”
그 소년의 손에서 시작된 주술은 신을 부른다. 신에게 바쳐진 심장은 한때는 힘차게 박동했을, 차갑게 식은 생명력을 다 뱉을 때까지 제단에서 내려올 수 없다.
“…….”
듣지 말 걸 그랬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쳤다. 그딴 게, 그런 일이 진짜 가능했다고? 무슨 고대의 무법 지대도 아니고, 한국에서 그런 광신도적인 행위가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기이했다.
이호연은 알고 있었는지 나처럼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주세진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내가 테오그라젠스라는 종교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하늘이 무너졌어.”
“친구분은요?”
“사라졌어. USB를 내게 보낸 날.”
“…….”
“그래서 너를 한번은 제대로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네가 정말 푸른 불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주세진이 걱정할 만했다. 솔직히 전해 듣기만 한 지금도 소름 돋는데 저 이상한 석판에 쓰인 푸른 불이 진짜 나면….
다음에 사라지는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검지의 손톱으로 엄지 손톱 위를 틱틱, 긁었다. 손톱 옆 거스러미가 일어났다. 그것을 손끝으로 긁으며 생각했다.
너는 푸른 불꽃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의 왕
길 잃은 것들의 구심점, 요람
근데….
“그 푸른 불…, 저 아닐지도 몰라요.”
“뭐?”
“네?”
두 남자가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부담스럽다. 나도 처음에 나인 줄 알았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석판의 글자 중 나와 관련 없는 글자가 있어요.”
“글자?”
“왕.”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의 왕
“난 공주지, 왕은 아니거든요.”
내 전직 명은 도깨비 공주다. 그리고 왕은 아마….
“…….”
“속인 건 아닌데.”
진짜 나도 푸른 불이 나인 줄 알았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주세진이 내게 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뻗었다.
“앗! 진짜, 진짜 늦게 깨달은 건데!”
억울해! 잉크 냄새나는 큰 손이 내 양 뺨을 꼬집었다. 아파!!
뺨을 양쪽으로 쭉쭉 늘린 주세진은 내가 으앙 소리를 내고 옆에서 이호연이 말릴 때까지 내 뺨을 꼬집었다. 엄청 얼얼하고 뺨이 후끈후끈했다.
“진짜… 늦게 안 건데요.”
억울함이 담긴 내 말에 주세진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알아.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하기 전에 깨달았겠지.”
“…….”
어떻게 알았지? 도르륵 눈을 굴려 그의 시선을 피하니 주세진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어른을 놀리는 못된 건 어디서 배웠는지.”
“우리, 10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요?”
어른, 애 하기엔 나이 차가 애매하다. 그런 내 말에 주세진은 여상한 낯으로 말했다.
“네가 수학여행 가는 4학년 언니 오빠 부러워할 때 난 성인이었어.”
엇.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갑자기 확 느껴지는 나이 차를 느끼며 한 번 더 내 뺨을 꼬집는 주세진의 훈계를 받아야 했다. 볼이 빨개질 때까지 따끔하게 혼난 뒤에야 우린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럼 왕이 누군지도 알아?”
“아마 내 전직관일 거예요.”
그때 그 시스템 메시지.
[당신의 전직 명은 ‘도⑇#⑆의 ▇’입니다.]
분명 처음에는 이렇게 나왔다. 그래 놓고 에러, 에러, 이러더니 갑자기 전직 명이 도깨비 공주로 바뀌었지.
깨진 글자가 도라X몽의 친구는 아닐 거 아냐. 요즘에는 잘 안 보이지만 내가 처음 랑의 히든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만난 귀신 언니가 랑을 왕이라고 불렀었고.
석판의 푸른 불은… 역시 랑인가? 그렇다고 확신하기엔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원래 보통은 전직자의 전직 명은 전직관이랑 같죠?”
“그렇지.”
내 질문에 주세진은 긍정의 답을 줬고 이호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 명은 전직관의 별칭이다. 이호연의 전직관, 본명은 모르는 호랑이의 별칭이 마지막 호랑이라 이호연의 전직 명이 마지막 호랑이가 된 것처럼.
“내 전직관 이헤른은 별칭이 전장의 머리였기에 내 전직 명도 전장의 머리가 됐지.”
중세 군부 사령관을 전직관으로 둔 주세진도 전직관의 별칭과 전직 명이 똑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었다.
“난 아니에요. 전직관 별칭이랑 내 전직 명이 같을 수가 없어요.”
그도 그럴 게….
랑은 남자다. 물구나무서서 봐도 남자다.
공주님 못 한다.
“같을 수가 없다고?”
주세진의 물음에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전직관 남자예요.”
“……?”
“네?”
주세진의 표정은 이상해졌고 이호연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내 전직관이 여자인 줄 안다. 내 전직 명이 도깨비 공주라서….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랑이 복숭아꽃처럼 예쁘지만 남자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럼 왜 전직 명이….”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으니까…?”
사극 보면 그러던데. 물론 랑이 피 튀기는 형제의 난을 일으킬 것 같은 성격은 아니었다. 허허로이 웃으며 “그럼 왕 네가 해.” 이러는 신선님 스타일이지.
“어쨌든, 저 석판이 말하는 푸른 불이 왕이라면 내가 아니라 내 전직관일 거예요.”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데.”
주세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히든 게이트의 전직관들은 단 한 명의 전직자를 두고 그들을 제법 귀애하며 친근감을 느끼지만 선이 있었다.
일반 전직관처럼 전직과 관련된 말 이외에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비밀을 말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랑의 경우 나를 제법 귀여워한다. 약간 ‘아이, 잘한다. 아이, 잘한다. 우리 손녀’ 이런 느낌이지만 어쨌든 날 예뻐라 한다.
그런 랑도 비밀은 알려 주지 않는다.
지금 당장 랑에게 가서 ‘나비가 절절매는 푸른 불이 당신이에요?’ 하고 물으면 또 의뭉스러운 미소나 지을 것이다.
그리고 군것질거리를 손에 쥐여 주겠지. RPG 게임의 보스 몹도 아니고 매번 패턴이 똑같았다. 문제는 그 게임이 공략 불가능이라는 거였다.
“…….”
푸른 불 쪽을 못 털면 나비를 털면 되지 않나? 생각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불 쪽은 글렀으니 나비를 터는 게 어때요?”
“나비?”
“주교의 아들. 테오그라젠스의 첫 번째 종.”
그 남자.
“아마 게이트에서 본 남자와 주교의 아들은 동일 인물일 거예요.”
포X몬 드립이나 치며 자기가 빛 타입이라고 했다. 성직자는 빛 속성에 성 타입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쪽은 캐고 싶어도 정보가 없어. 이름도 모르고 전직자라고 해도 커넥터 닉네임조차 알 수 없으니까.”
그때 보내더라도 이름은 알아냈어야 하는 건데. 아쉬움을 담아 당시의 상황을 주세진에게 말했다.
“열심히 물어봤는데 비밀이래요.”
“비밀?”
“네.”
내 말을 듣던 주세진이 갑자기 커넥터를 꺼냈다. 갑자기 그건 왜?
“커넥터는 왜 꺼내요?”
“비밀이라며.”
“네.”
“?”
“?”
우리 지금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거 맞지?
“네가 비밀이라며.”
“네. 비밀이라고 했다니까요.”
“그래. 비밀.”
“네. 비밀.”
뭐지? 이 이상한 대화?
날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 주세진은 무언가 알겠다는 얼굴을 하더니 커넥터를 조작했다. 슬쩍 그의 커넥터를 훔쳐보니 친구 찾기 기능을 누르고 있었다.
친구 찾기? 저런 기능도 있어?
“그런 것도 돼요?”
“안 해 봤어?”
네. 제가 전직자계의 아싸여서요. 커넥터 친구 하나 없어 지금까지 친구는 코드 교환으로만 가능한 줄 알았다.
“친구 찾기 해서 신청한 뒤 상대가 받으면 친구가 돼요.”
이호연이 내 옆으로 와 제 커넥터로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은근슬쩍 내게 친구 신청을 하는 것은 덤이었다.
커넥터를 활성화하니 메인 화면에 친구 신청 메시지 알림이 떴다.
와, 난 커넥터 자게랑 중고 거래랑 홈 쇼핑으로만 써 봤는데….
신기한 마음으로 신청을 받았다.
[닉네임과 친구가 됐어요! 축(۶•౪•)۶하 ]
[전직 명 공개를 하시겠어요? 두 사람 다 동의해야 상대의 전직 명을 보실 수 있답니다.]
[예.]
예.
오. 친구 됐어.
“이런 것도 되는구나. 진짜….”
“게임 같죠?”
“응.”
속닥속닥, 바빠 보이는 주세진을 두고 우리끼리 노닥거렸다. 아무도 나한테 친구 신청 안 해서 이런 기능이 있는지 몰랐다.
나 전직자계의 왕따인가? 슬픈 진실을 알락 말락 하는데 주세진이 우리를 불렀다.
“있네, 비밀.”
“?”
내 앞으로 내민 커넥터를 봤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힐러 계열을 뜻하는 빨간 십자 마크. 그리고 그 옆에 달린 이름.
“비밀?”
“그래. 비밀.”
“…….”
1루수가 누구야? 응. 응? 응. 응? 응.
주세진과의 비밀 타령한 이상한 대화가 생각났다. 아니, 누가 그 타이밍에 그딴 말한 걸 닉네임이라고 생각해?
내 눈앞에 있네.
“이게 닉네임인 줄 어떻게 알아요? 이런 이상한 닉네임을?”
“리블에는 더 다양한 닉네임도 있는데. 뭘 새삼.”
라고 어그로 닉네임으로 유명한 전직자들의 사령관님이 말했다. 뭔가 억울한 마음에 이호연을 봤지만, 그쪽도 만만치 않은 닉네임이었다.
닉네임이 뭐예요? 닉네임이요. 네? 네. 네? 네.
내가 이상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