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별 빌런과 이 구역의 힘숨찐 (4/34)

#조별 빌런과 이 구역의 힘숨찐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 변형 게이트 연결에 시민들은 공포….

똑.

-게이트 안에 들어갔던 헌터들은 모두 기이한 시스템 창을….

똑.

-일반 게이트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 길드에선….

똑.

-새로운 지옥도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말….

“아….”

아프다. 시선을 내려 손을 보았다. 거스러미가 뜯겨 나간 자리에 피가 맺혀 있었다. 한겨울에 밖에 하루 종일 서 있는 것처럼 몸이 떨렸다.

변형 게이트 연결 현상이 터진 그 날. 기이한 시스템 창을 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호연도, 리블의 길드원들도 모두 시스템 창을 봤다.

전직할 때 말고는 본 적 없는 시스템 창을.

살 방도를 알려 줬으니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나타나지 않던 시스템 메시지가 지옥을 끌고 다시 나타났다.

손이 떨렸다. 불안했다.

다시 지옥도가 펼쳐지면? 사람이 죽고, 건물이 무너지고, 가족과 헤어지고, 또 서로를 죽이고 죽여야 하면.

나를 부르는 이호연과 주세진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와 주변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근처에 하늘 조각이 없는지. 조각에서 기어 나온 괴물은 없는지.

혹시 땅에 묻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맨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힘이 풀린 다리는 주저앉은 상태였다. 손끝이 까지고 피가 맺힐 때까지 그 짓을 했다.

그때처럼 무력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면서도 불안했다. 내가 무력하지 않다고 내 가족까지 그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장을 보고 돌아온 엄마가 마당에서 헛짓을 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계속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손을 꽉 잡고 집으로 들어가 손을 치료해 줬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나를 방에 밀어 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방에 들어가, 전신 거울이 비치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두루마기는 이호연에게 씌웠지만 가면은 벗지 않았다는 걸.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니 밴드로 칭칭 감긴 열 손가락이 불편했다. 몇 번 꼼지락거리다 그것을 불로 태웠다. 불이 지나간 자리엔,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자잘한 상처 정도는 자체 치유가 가능했다.

밥을 먹으면서 내 손을 힐끔 쳐다보는 엄마를 알았지만, 그런 엄마를 눈치챈 나를 엄마도 알았지만, 우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엄마는 생선의 살을 발라 내 숟가락 위에 올려 줬고 나는 그걸 받아먹었다. 일상이었다. 평소처럼. 씻고, 옷을 갈아입고 엄마의 배웅을 받았다. 다시 지옥이 올지도 몰랐지만, 학교에 갈 시간이었다. 그래, 일상이니까.

지하철을 타며 핸드폰으로 기사를 봤다. 변형 게이트 연결 현상에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나온 리블의 헌터들에 관한 기사였다.

그런데 이상한 기사 하나가 껴 있었다. 헤드라인이 그거였다. 류의 두루마기를 뒤집어쓰고 나온 이호연.

“…….”

왜 저런 거에 초점을 잡아…?

어이없는 것은 나뿐인 듯했다. 댓글에는 이딴 걸 기사라고 쓰냐는 비난은 하나도 없었다. 참. 사람 심리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터졌음에도 사람들은 일상을 이어 갔다. 내가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건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위험이 다시 오나 안 오나의 상황에서도 교수님은 수업을 진행했고, 내게 엿을 줬다.

“이번 과제는 조별 과제입니다.”

교수님…? 조별 과제 안 한다면서요…. 제가 왜 이 수업 들으려고 그 노력을 했는데….

홀홀홀 웃으며 폭탄을 던지고 나간 교수님. 미워.

허망하게 교수님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도비가 될 수 없는 대학생이 그렇지, 뭐. 누구랑 하지.

슬프게도 이 수업에 난 친구가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삼삼오오 모여 조를 짜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적당히 남은 사람들이랑 같이 하게 될 것이다.

“…….”

빌런만 안 걸리게 해 주세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갖춘 것까진 안 바라니 툭하면 인륜지대사를 들먹이고 패드립 치는 놈만 아니면 돼요.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인의예지신과 인륜지대사를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던 랑의 말이 생각났다.

랑. 요즘 사람은 인의예지신도 없고, 없는 인륜지대사도 만들어요.

현대의 패드립을 모르는 고아한 선비님의 가르침은 조별 과제 앞에서 무너졌다. 차마 랑에게 말하지 못한 것을 속으로 꽁알거리며 누군가 내게 말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저기….”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혹시, 조별 과제 같이하는 사람 없으면….”

“아, 네….”

새 학기 짝꿍과 인사할 때의 어색함이었다. 하지만 착해 보였다. 잠수 탈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저쪽에 조원들이 모여 있어요.”

여자가 가리킨 쪽에는 까만 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가 하나. 건들건들 의자를 흔드는, 누가 봐도 나를 골 아프게 할 것 같은 불길한 남자가 하나. 핸드폰을 두들기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음…. 모르겠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이 있다. 그 오랜 명언을 바탕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네가 왜 여기 있어…?

이호연을 봤다. 하얀 머리카락을 까맣게 염색하고 눈엔 까만 렌즈를 낀 이호연을. 시선을 느꼈는지 이호연이 나를 쳐다봤다.

와. 검은색이… 잘 어울리네.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내게 말을 걸었던 여자가 어색한 얼굴로 통성명을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조장이 되겠군. 그리고 울 거야….

“저는 서정은이라고 해요. 세무 회계과 2학년이에요.”

“유하연이에요. 경영학과 1학년입니다.”

서정은의 뒤를 이어 내 소개를 했다.

“이호연입니다. 경영학과 3학년이에요.”

“?”

“?”

“이호연이요?”

“동명이인이에요.”

그런 말을 누가 믿어…?

“아, 그렇구나.”

믿네?

아이덴티티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흰 머리가 검은 머리 됐다고 못 알아보다니. 핸드폰을 두들기던 여자와 복학생도 자기소개를 했다.

“김시연이에요. 패디과 1학년.”

“박진후. 경제학과 4학년.”

“그럼 우리… 일단 회의를 할까요?”

서정은의 말에 빌런들이 난입했다.

“아―. 저 오늘 바빠서. 회의 결과랑 뭐 해야 하는지 알려 주면 해 올게요. 어차피 저 1학년이라 회의해 봤자 아는 게 없어서 도움 안 돼요.”

나는 뭐 4학년이니?

“귀찮게 뭔 조별 과제야. 적당히 너희끼리 회의해. 이런 건 원래 후배들이 해서 결과만 딱딱 선배한테 전달해 주는 거야. 1인분은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 0.5인분 같은 1인분, 알지? 나 4학년이다? 바빠.”

0.5인분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서정은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호연은 책상 아래에서 펜을 박살 내고 있었다.

아, 망한 것 같아.

빌런들이 떠나고 주먹을 꽉 쥐고 울상을 짓던 서정은이 입을 열었다.

“회의를… 아니, 일단 조장부터 정할까요?”

“…….”

“…….”

미안. 조장이라는 말에 나도 이호연도 입을 꾹 다물었다. 서정은에게 미안하지만 나도, 이호연도 이미 떠난 빌런들과 비교도 안 되게 바빴다.

딱 보니 이호연의 생활 패턴이 예상됐다. 아침에는 학생. 저녁에는 헌터. 새벽에는 과제를 하겠지. 그래서 어제도 저녁에 게이트 공략에 들어간 건가?

문제는 나도 비슷했다. 아침에는 학생. 저녁에는 과제. 새벽에는 게이트 처리하러 밤 나들이한다.

다섯 명 중에 둘은 빌런이고 둘은 조장 불가능이라니.

“제가… 할게요.”

우리 둘의 침묵에 서정은이 해탈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미안해서 속이 쓰릴 정도였다. 이호연도 같은 마음인지 회의 내내 서정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하나하나 대답하는 성의를 보였다.

빌런이 빠진 회의는 괜찮게 끝났다. 주제도 확실하게 정했고 각자 분담해야 할 일도 깔끔하게 나눴으니까. 빌런이 시킨 것만이라도 제대로만 해 오면, 안 해 오겠지. 평소에는 있지도 않던 육감이 이런 걸까. 미래가 뻔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다음 수업이 있어서.”

회의하는 동안 그나마 남은 우리 둘에게서 희망을 느꼈는지 표정이 밝아진 서정은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래 다섯 중에 셋이 멀쩡한 게 어디야. 원래 조별 과제는 나 빼고 다 포기한다는 생각을 하고 임해야 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돌리니 이호연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낙낙한 검은 후드티가 잘 어울렸다. 저런 옷을 입은 건 처음 봤다.

“?”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이호연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이번에 복학했어?”

“…….”

“…요?”

아, 맞다. 존댓말. 이호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들켰나?

“…네. 복학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대답하는 어조가 무미건조했다. 평소의 개냥이 같은 모습이 아닌, 선을 긋는 예의 바름이 느껴졌다. 조금 낯선 기분이었다.

“아, 그렇구나…. 음…. 다음에 봐요.”

더 할 말도 없고 낯선 모습이 어색해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런 내게 이호연이 말을 걸었다.

“저기.”

“네?”

“혹시 전직자세요?”

“…아뇨. 민간인인데요.”

뭐야. 짐승의 감이야?

이호연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 렌즈로는 차마 다 가리지 못한 회색빛이 엿보였다.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느낌이…. 아닙니다. 제가 착각을 한 것 같네요.”

“네…착각이에요.”

나는 짐을 후다닥 챙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우와 들킨 줄 알았네! 심장이 도근도근 뛰었다.

***

“류.”

떠난 유하연의 자리를 보며 이호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키가 비슷했다. 유난히 까만 머리카락 색도, 체향도, 작고 하얀 손도, 목소리, 그리고 눈매.

깨진 도깨비 가면 사이로 보이던 약간 쳐진 눈매가 똑같았다. 새초롬하고 순한데 묘하게 장난기가 느껴지는 아기 여우 같은 눈이었다.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고민할 때 그의 버릇이었다.

복학했냐고 물어볼 때 자연스럽게 나온 반말도 마음에 걸렸다. 류가 몇 살이지? 나보다 어린 건 아는데….

1학년이라고 했으니 가능성은 있었다.

“설마….”

반년이 넘도록 생사를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만날 리가. 그래도….

“진짜면 좋겠다.”

아니, 사실 이미 절반 정도는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류였다. 그가 류를 착각할 리가 없었다.

류.

짧은 음절이 그의 입에 맴돌았다. 류, 류, 류.

만약 진짜 류면, 그가 알아본 게 맞으면 류는 화를 낼까? 지키고 싶던 일상에 끼어든 자신의 존재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건 싫은데.”

어떻게 할까. 그가 먼저 밝히는 게 아니면….

류의 성격상 친해지면 먼저 자폭할 가능성이 컸다. 당황하면 여전히 손부터 나가는 모습에, 버벅거리다 그냥 맞아 기절한 그에게 굳이 사과까지 하는 성격이니까. 반쯤은 일부러 맞기는 했지만, 기절은 그도 예상 못 하기는 했다.

“류.”

부르기만 해도 속이 간질거리는 이름. 일부 변형한 상태였으면 꼬리가 미친 듯이 파닥거렸을 거다.

조별 과제는 짜증 나고 조원은 0.5인분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작은 여우가 헤집고 간 속내가 기분이 좋았다.

진동이 주머니 안에서 느껴졌다. 주세진이었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응. 형.”

“학교는 어때.”

잔정 많은 길드장은 오랜만에 복학한 그가 어지간히 걱정됐나 보다. 생긴 거랑 참 따로 논다는 생각을 하며 강의실을 나왔다.

“반으로 접어 버리고 싶은 조원이 있어.”

“안 돼.”

“알아.”

그래서 펜을 부러뜨렸다. 괜한 화풀이였지만 그거라도 안 하면 그 둘의 허리를 대신 반으로 접어 버렸을 것이다.

“형. 나 옷 사 줘.”

“저번에 싫다고 했잖아?”

복학 기념으로 옷 사 준다는 주세진의 말을 거절한 것은 그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너 연애해?”

“아니.”

류와 그가 연애라니. 그런 사이가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물론 좋지만. 상상만 해도 너무 좋지만. 진짜 너무 좋지만.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예뻐 보이고 싶어서?”

예쁘게 봐 주면 좋겠다. 싫어하지 않으면 좋겠다.

…좋아해 주면 좋겠어.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상관없었다. 주세진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은 제가 책임져야 할 몫이 아니니까.

통화를 끝냈다. 복도에 설치된 커다란 거울에 뺨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검은 후드티의 청년이 비쳤다.

“…딴 거 입을걸.”

괜히 편하게 입고 왔다.

***

연락 두절.

훗. 난 이미 예상했지. 그래서 더 빡치지. 힘숨찐이 언제 흔들리는지 아는가. 언제 제힘을 선보이고 싶은지 아는가. 바로 지금이다.

―전원이 꺼져 있어….

우득.

팔걸이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호연이 나를 보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진정하자. 민간인은 화난다고 팔걸이를 조각내지 않아.

“안 받네요. 시연 씨도…. 하…. 하하. 하. 하. 하.”

서정은이 무표정한 얼굴로 웃었다.

사람 좋고 여린 사람을 저렇게 만들다니. 두 사람의 인성이 참 대단했다. 만나면 인성 안녕하냐고 묻고 싶었다.

“죽여 버릴 거야….”

“하하. 하. 하하. 전 이만 가 볼게요. 두 분 다 수고 많으셨어요. 자료도 잘 준비해 오셨고, 다른 두 사람만 하면… 되는데….”

“…….”

“…….”

침묵하는 나와 이호연을 두고 서정은은 떠났다. 나는 박진후와 김시연에 대한 분풀이를 애꿎은 빨대에 했다. 잘근잘근. 그리고 그런 나를 이호연이 말렸다.

커다란 손이 내게서 빨대를 비롯한 컵 자체를 뺏어 갔다.

“치아에 안 좋아요.”

“…네.”

이호연이 내 앞으로 뺏은 컵 대신인지 케이크를 내밀었다. 하얀 생크림과 빨간 딸기. 깜찍한 토끼 과자가 꽂혀 있었다. 눈을 휘며 웃은 이호연은 친절하게 내 손에 포크까지 쥐여 줬다.

이거 너 먹으려고 사 온 거 아니었어?

어. 어. 하는 사이 내 앞에는 케이크가. 내 손에는 포크가. 내 입에는 딸기가 있었다. 맛있다. 욤욤 케이크를 먹는데, 이호연은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내게 익숙한 얼굴, ‘류’를 볼 때의 얼굴이었다.

“…….”

케이크를 꼴깍 삼키며 생각했다.

…들켰나?

친해져서 자폭한 내가 스스로 류라는 걸 밝히게 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인가? 근데 이호연이 그렇게 계략남주 같은 타입은 아닌데.

뇸뇸.

케이크는 맛있었고 이호연은 이상했다. 이호연이 이상해진 게 아마, 두 번째 만남부터였다.

첫 수업 시간에 만난 편한 후드티의 청년은 옷부터 행동까지 확 달라진 상태로 두 번째 회의에 나타났다.

전부 내렸던 첫날과 달리 내게 익숙한 반 깐 머리에, 누가 봐도 꾸민 옷차림이었다. 단정하고 차분하지만 묘하게 멋을 부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태도. 예의 바르지만, 선이 느껴졌던 첫날과 달리 그 선이 없어졌다. 내게 먼저 말을 걸고, 눈이 마주칠 때면 꼭 눈을 휘며 웃었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생긴 애가, 그렇게 웃으면서, 그렇게 티 나게 다른 사람 대하는 거랑 다른 태도를 보이면….

아, 눈 마주쳤다.

정면으로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지그시 쳐다보자 이호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결국은 다시 웃었다. 눈가가 약간 발긋해져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그러면….

케이크를 입 안에 넣었다. 맛있고 달았다. 달짝지근한 것들은 그걸 숨기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저….”

이제 집에 가야징, 하고 가방을 챙기는데 이호연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나를 불렀다. 시선을 아래로 둔 이호연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게….”

어, 빨갛다. 점점 달아오르나 싶더니 새빨개졌다. 귀도, 목도, 내 소매를 조심스레 붙잡은 손의 손등도.

“혹시, 오늘 바빠요?”

이거. 그러니까. 네가 이러면 괜히 나까지. 기분이….

“아뇨.”

내 말에 얼굴이 환해진 이호연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뜨렸다.

“그게, 아는 형이 표를 줬는데. 그, 이번에 영화관이 완공돼서 다시 영화를 상영한다고 해서요. 근데 표가 두 장이라….”

“…….”

“혹시 안 바쁘면… 같이… 보러 갈래요?”

이거. 누가 봐도.

“…….”

“아, 그 바쁘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아니. 네 얼굴 누가 봐도 안 괜찮은 표정인데. 그리고 아까 안 바쁘다고 이미 말했는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호연의 낯빛이 안 좋아졌다.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막 완공된 영화관의 티켓을 두 개나 구해 준 능력 있는 아는 형 주세진이 울망이는 호랑이를 달래 주려나.

음.

“지금요?”

상관없나.

“네!”

“영화 언제인데요?”

“다섯 시예요!”

확신이 섰다. 들켰네. 류인 거.

다섯 시 예매라니. 누가 봐도 영화 보고 저녁 먹고 카페까지 갈 수 있는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잖아.

열심히 공부만 하다 대학 가고, 또 공부해서 장학금 받으면서 학교 다니다 군대 간, 취미는 운동이요, 과팅, 미팅, 소개팅. 모든 팅팅팅을 거절하며 ‘연애? 관심 없어요’의 삶을 살아온 이호연이 다섯 시 영화 같은 고단수를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는 형 주세진이 짜 준 데이트 코스겠지. 민간인과 데이트하는 걸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일은 없을 테고….

은근히 남한테 선 긋는 이호연이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내게 뜬금없는 호감을 가질 리도 없으니….

이호연의 태도가 바뀐 것은 두 번째 만남. 내가 가고 난 다음에 혼자 생각하다 내가 류인 것을 알았나?

두 번째 만남부터 옷차림도 바뀌었지. 차가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의 주세진은 오랜만에 일상을 맛보는 복학생 이호연에게 옷이라도 사 주고 싶어 했을 것이고, 아마 이호연은 처음에는 거절했을 거다.

그럼.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주세진한테 옷 사 달라고 졸랐나?

이호연과 대화를 했거나 아니면 태도에서 대충 눈치챈 주세진이 이호연한테 영화표를 주고….

각 섰다. 아마 이호연한테 놀라고 자기 카드까지 쥐여 줬을 거다.

“?”

“…….”

꼬리가 있다면 아주 바쁘게 파닥거렸을 얼굴. 이호연은 나름 나랑 친해지고 난 다음 내가 류인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거나 내가 자폭할 거라고 생각한 거 같은데….

그걸 주세진도 알았을 거고. 이호연이 날 보며 좋아 죽는 것을 못 숨길 것도 알았겠지. 그래서 그냥 데이트하라고 표를 줬구나.

뭐. 이호연이 정말 내가 류인 것을 모르는 상태로 친해졌으면 자폭했을 것 같기는 하다.

솔직히. 저렇게 날 좋아한다는 티를 내는 사람을 안 좋아하긴 힘드니까. 그래서 나도 그냥 웃었다. 아, 모르겠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곧장 영화관으로 갔다. 지옥도 당시에 무너졌던 영화관을 완공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완공된 첫날 보러 가게 될 줄은 몰랐다.

표 구하기도 힘들던데 주세진이 용케 두 장이나 구했구나 싶었다.

영화관은 카페 근처, 즉 대학가에 있었기에 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뜨거운 여름이 가시고 온 제법 선선한 날씨가 기분 좋았다.

완공 후 오늘 첫 개시를 한 영화관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그간 상황이 상황인지라 새로운 영화를 찍지 못해 옛날에 상영했던 영화밖에 없을 텐데도 그랬다.

오랜만에 맛보는 문화생활이라 그런 걸까. 가만히 앉아서 사람 구경만 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는 내게 이호연이 말을 걸었다.

“뭐 먹을래요?”

“음. 콜라?”

오랜만에 팝콘도 먹고 싶었지만. 이따 저녁도 먹자고 할 것 같으니까, 패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이호연은 수월하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이호연 뒤에 있는 나 또한 편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 내 꼼수를 눈치챘는지 이호연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런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인파를 벗어났다. 향수 냄새가 났다.

손을 올려 이호연의 등을 짚었다. 몸이 움찔 떨렸지만, 이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귀가 새빨갛다.

고소하면서 짭조름한 팝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림자 속 꼬마 도깨비들이 처음 보는 과자에 우왕 소리를 내는 게 느껴졌다. 나중에 사 주겠다고 애들을 달랬다. 가만 보면 고기산적이나 메밀묵보다 과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붉은 기를 지우지 못한 얼굴로 이호연이 콜라 두 개를 시켰다. 계산하는 직원이 블랙 카드를 보고 잠시 제 눈을 비비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내가 못 본 척하는 것으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나도 처음 봐. 블랙 카드.

이호연이 뒤늦게 눈치채고 나를 봤지만 난 이미 메뉴판 구경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본인의 카드를 꺼내 서둘러 계산을 끝냈다. 기껏 계산해 봤자 매번 소액 결제인 게 뻔한데도 블랙 카드를 주었다는 건 주세진이 이호연을 놀린 거거나….

내 쪽에 그 아는 형이 누군지 숨길 생각이 없다는 뜻일 거다.

콜라 두 개를 들고 있는 이호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호연은 한 손으로 잡은 콜라 컵을 나는 두 손으로 잡아야 했다.

그걸 본 이호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봤다.

“제가 들까요?”

“괜찮아요.”

내가 이것도 못 들까 봐.

그리고 못 들었다.

“…….”

“…….”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바글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가 내 팔을 쳤다. 하필이면 핸드폰에 문자가 와 확인하려고 컵을 한 손으로 들고 있을 때였다.

불안하게 들려 있던 컵은 툭 떨어졌다. 옷은 안 젖었지만….

원피스를 입어 드러난 다리에 콜라가 쏟아졌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사람이 많았고,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하니까. 그리고 컵을 한 손에 들고 있던 내 잘못도 있으니까.

근데 이건 아니지.

“어….”

남자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핸드폰도 꺼놓고 잠수를 탄 빌런이었다.

너 이 자식, 영화표 구하려고 연락 씹었냐. 이 정도면 인성에 문제 있는 수준이었다.

“우와. 이런. 우연이.”

“와. 정말. 이런. 우연이.”

우연 같은 소리 하는 박진후에게 똑같이 말해 줬다. 어쩜 이름도 박진후일까. ‘진’지하게 뒤통수 ‘후’려치고 싶은 이름이었다.

“하하하하하.”

“인성 안녕하세요?”

“…말이 사납네, 후배님.”

“그럼 다정할 줄 알았나?”

박진후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손을 뻗어 그런 박진후의 손목을 잡았다. 상대는 민간인. 민간인. 애써 화를 삭이는데 눈치 없는 박진후가 내 신경을 긁었다.

“아씨, 이거 안 놔? 뭔 힘이…. 지들도 놀러 왔으면서!”

나는 파이터 정신이 충만함으로 거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우린 할 일 다 하고 노는 거고. 넌 뭔데요. 혼자 즐거운 문화생활이 하고 싶어 잠수 탔어요?”

“너 방금 너랬냐?”

“어, 너랬다.”

유교 정신 따윈 갖다 버린 내 말에 박진후는 씩씩거렸다. 그는 잡힌 팔을 빼내려고 낑낑거리다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했다. 이왕이면 한 대 치면 좋겠다. 나도 쳐 버리게.

조금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로 향하던 손은 이호연이 잡았으니까. 힐끔 이호연을 올려다보니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버릇이 나쁘네.”

낮은 목소리였다.

박진후가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다 얼굴이 시뻘게졌다. 참 웃긴 꼴이기는 했다. 나란히 잡힌 손을 빼내려고 몸에 힘을 주던 박진후가 빽 소리쳤다.

“야이, 씨! 놔! 안 놔?”

“응. 안 놔.”

내 발밑의 그림자가 박진후의 그림자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상대는 민간인. 민간인.

안 다치고 안 죽으면 된다. 그리고 난 그거 전문이지.

박진후의 손목을 잡지 않은 손으로 이호연의 손을 잡았다. 이호연은 나를 한 번 보고는 순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호연이 풀어 준 걸 모르는지 박진후는 여전히 몸에 힘을 바짝 주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다. 놔줄게요.”

“엇!”

잡고 있던 손목을 놔주자 박진후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까 흘렸던 콜라 위였다. 사람들이 박진후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박진후가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대로 발로 찍어 눌렀다. 박진후의 다리 사이,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영화관의 대리석 바닥을.

“…….”

“그냥 갈래요. 아니면 나랑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래요?”

그 진지한 대화 중 내가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르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진후가 작게 또라이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그는 사람들 사이로 도망갔다. 난 그걸 그냥 두었다. 박진후의 그림자가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넌 어차피 나한테 잡혔어.

“저기….”

“아.”

이호연이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호연은 연신 콜라가 쏟아진 다리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걱정과 당혹, 박진후를 향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조금 미안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게 좋아했는데.

하지만 이호연은 자신의 기분보다 내 상태가 먼저인 듯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정작 나는 옷에 안 묻은 게 어딘가 싶었는데.

“일단 묻은 것부터 닦아요.”

나를 데리고 화장실 쪽으로 간 이호연이 내 손에 제 콜라를 쥐여 주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서둘러 화장실 쪽으로 들어가는 이호연을 보며 다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신발에도 안 묻었으니 다리만 닦으면 될 것 같았다.

“끈끈해….”

아슬아슬하게 원피스에는 안 묻었지만 달짝지근한 끈끈함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방울진 콜라가 다리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꼬마 도깨비의 시야를 공유했다. 짜증을 내며 옷에 묻은 콜라를 닦아 낸 박진후는 영화를 보러 상영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화난다고 그냥 집에 가기엔 지금의 영화표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거 하나 구하겠다고 조별 빌런이 된 박진후가 옷 좀 망가졌다고 집에 갈 리가 없었다.

물론 영화표 때문이 아니어도 빌런이 됐겠지만.

미련하긴. 물론 나에게는 환영할 일이었다.

박진후가 공포 영화 보는 거면 좋겠다. 하지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로맨스도 공포로 만들어 줄 테니까. 내 정신 계열 마법 특기가 환영과 사람 홀리는 거였다.

박진후가 들어간 상영관이 광고를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눈을 떴다. 꼬마 도깨비들에게 박진후를 잘 감시하라고 명하는 건 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이호연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직 영화 시작까진 시간이 있었다.

차라리 내가 화장실 들어가서 혼자 닦는 게 빨랐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타이밍 좋게 이호연이 돌아왔다. 커다란 손에는 물에 적신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손수건도 들고 다니나? 주세진이 들려줬구나.

의문과 동시에 답이 나왔다. 고급스러운 남색의 손수건은 물에 젖어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디자인이었다.

난 당연히 그 손수건을 나한테 쥐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양손 한가득 이호연의 콜라 컵을 들고 있었지만.

또 한 손으로 들었다가 쏟는 거 아닌가 고민하며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이호연이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 어? 하는 사이 손수건이 발목에 닿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방울져 흐르던 음료를 꾹꾹 눌러 닦은 손이 위로 움직였다. 정강이를 지나 종아리와 무릎을. 그리고 무릎 위쪽 허벅지, 그 안쪽까지. 손끝이 섬세했다.

“…….”

아니. 네가 아무 생각 없이 걱정밖에 없는 무해한 얼굴로 이러는 건 알겠는데….

네 얼굴이 유해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행인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제 일행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는 이들도 있었다.

영화 촬영 아니니깐 눈 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작 내 다리를 닦아 주고 있는 이호연의 표정은 진지했다. 로맨스 영화를 찍으면 손잡는 것만으로 19금을 넘나들 것 같은 육식계 짐승 같은 미인의 머릿속은 전체 연령가였다.

이게 바로 남중, 남고, 연애 경험 제로인 상태로 군대까지 갔다 온 25살의 무자각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까매진 머리와 대조되는 하얀 목덜미, 단정한 옷으로도 가리지 못한 넓은 어깨, 팔의 근육, 내 다리를 매만지는 커다란 손.

평소에는 고개를 들고 봐야 하는 이가 내 앞에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고 있는 건 영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가 내 다리를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닦는 것도. 일단 수위적으로 문제인 것 같지만.

“?”

내 다리에 묻었던 음료를 다 닦은 뒤에야 시선을 느꼈는지 이호연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제 손을 보다가 주변을 보다가 다시 나를 보고. 내 손안의 컵 상표보다 시뻘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서 손수건이 툭 떨어졌다. 이호연과 눈이 마주친 행인들이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저들끼리 꺅꺅거리며 뭐라 떠들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나보다 청력이 더 좋은 이호연은 대화 내용까지 들었는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어, 그, 아니, 이건, 그런 생각이 아닌, 아니, 그, 전, 그게 아니라…!”

사람이, 저렇게까지 빨개질 수 있구나.

한참을 버벅거리던 이호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봤자 귀며 목이며, 심지어 손등까지 빨갛게 익어 숨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참 무해한데 유해한 호랑이다.

“영화.”

“네?”

“영화 시작할 것 같은데. 이만 갈까요?”

그런데 솔직히, 음…, 귀엽다.

그래서 이번만 도와주기로 했다. 내 말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 이호연은 내 손에서 컵을 받아 가더니 잽싸게 상영관을 찾아 움직였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이호연의 뒤를 쫓아가며 웃었다. 저렇게 반응하면 놀리고 싶어지는데.

“아.”

때마침 꼬마 도깨비에게서 신호가 왔다. 상영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이호연을 한번 보고 눈을 감았다.

운 좋게도 박진후는 공포 영화를 보고 있었다. 취향인지 남는 게 그것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야 좋지.

나는 친절하게도 영화 관람을 4D로 체험하게 해 주기로 했다. 혼자서만 4D 체험이라니. 박진후도 참 운이 좋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감 다 괴롭혀 주마.

작은 푸른 불을 그림자에 태워 보냈다. 박진후의 그림자 속에 있던 꼬마 도깨비가 푸른 불을 손에 쥐더니 “얍!” 하고 높이 들어 올렸다.

의자 밑에서 튀어나온 작은 푸른 불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박진후를 홀려 냈다.

지금, 잠들려고 누워 있는 주인공 위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입 안에도 들어갔다. 박진후가 제 입과 얼굴을 더듬었다.

미각까지 느끼게 해 주는 최첨단 4D 상영이다. 어디에서 이런 서비스를 맛볼 수 있겠는가.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웃으며 이호연을 따라갔다.

열심히 가는가 싶더니 내가 제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자 다시 내게 걸어오는 호랑이에게로.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내부가 깜깜해지고 10분 정도 광고를 보며 기다리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재밌었다. 다소 뻔하고 예전에 상영했던 것을 재상연하는 것이니만큼 약간 예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만석인 상영관 내부를 보니 구하기 힘든 영화표, 그중에서 제일 경쟁률 치열한 로맨스 영화다 싶었다. 주세진은 진짜 어떻게 구했을까. 이게 바로 권력인가.

다만 수위가 있는지라 중간중간 조금 그런 장면이 있었다. 뒤늦게 표를 확인해보니 청소년관람 불가였다. 이호연도 연령 확인을 안 했는지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청불이기는 해도 주제가 애틋한 사랑인 만큼 볼만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누구나 감탄할 예쁜 곳이었다. 어스름한 새벽에 황금빛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절대 볼 수 없는 완벽한 하늘이 영상 안에 있었다.

바닷가의 모래는 태양의 빛을 흉내 내고, 바다는 황금빛 가루가 쏟아진 듯 환하게 빛났다. 조금 눈이 아릴 정도였다.

갈색 곱슬머리가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남주인공이 그런 여주인공을 꽉 껴안았다.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입을 맞췄다.

보는 내내 생각했던 남주인공의 못된 손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남주인공이 여주인공 다리를 쓰다듬는 장면이 나왔다.

발목부터 시작해 종아리, 정강이, 무릎을 넘어 그 위로. 아까 이호연이 했던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대담했다.

딱 그때 콜라를 마시던 이호연이 사레에 걸려 켈록거렸다. 저 행동이 본인이 했던 짓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나 보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그런 이호연을 흘겨보았다. 이호연이 작게 죄송하다 사과하는 것이 들렸다. 장난삼아 그런 이호연의 손이라도 잡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할 때쯤 영화가 끝났다.

스크린에는 이제 더는 볼 수 없는 멀쩡한 하늘이 나왔다. 잃어버린 모든 것에는 미련이 생기기 마련이라더니, 오랜만에 보는 깨지지 않은 하늘의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내부가 환해지고 엔딩 크레디트가 나오는 것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즈음엔 이호연도 간신히 진정한 다음이었다. 우린 상영관을 나왔다. 그리고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 저녁… 같이 먹을래요?”

스킨십하는 장면 내내 고개를 숙이던 이호연이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차마 다 감출 수 없었는지 긴장한 것이 티가 났다. 내 대답은 하나다.

“좋아요.”

이호연은 활짝 웃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적당히 예쁘고,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식사 내내 이호연은 나를 챙기려 들었다.

음식이 맛있으면 내 앞으로 밀어주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내게 내밀었다. 정작 본인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 같은데 연신 웃고 행복해 보였다. 보는 나까지 웃음이 나게 하는 모습이었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저녁도 맛있었다. 우리 사이의 분위기는 조금 긴장감 있는 듯하면서도 온유했다.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늘 이미 카페에 갔으면서 또 카페에 가지 않겠냐는 이호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호연은 나와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인지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미련일지도 모른다.

음료를 마시니 입 안에 달콤함이 퍼졌다. 참 기분 좋은 단맛이라 생각하며 이호연에게 말했다.

“나 좋아해요?”

“……!”

난 노빠꾸다.

타이밍 좋게 커피를 마시던 이호연이 사레에 걸렸다. 아까 영화보다 걸린 사레보다 더 심했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신체 계열 전직자라도 기도까지 튼튼한 건 아닌가 보다.

격한 기침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를 주변에 둘렀다. 슬금슬금 바닥을 기는 그림자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알아챌 수도 있는 유일한 사람은 기침하느라 바쁘고.

그림자 속 푸른 불이 작게 일렁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음료를 마시며 조금 진정한 듯한 이호연을 봤다. 아직도 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호연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다 까자.

어차피 들킨 거. 류인 것도 까고 좋아 죽는 걸 숨기지도 못하는 호랑이의 태도에 대해서도 얘기 좀 나누고.

“날 대체 왜 좋아해?”

“…….”

그게 궁금했다. 왜 좋아할까? 단순한 동경심에서 시작된 감정?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오가는 게 있어야 성립되지.

우리의 관계는 그거였다. 한쪽의 일방적인 배려. 그리고 관심. 입 꾹 다물고 말 한마디 안 하는 내게 말을 걸던 이호연. 제 몫의 식사도 내게 주던 이호연. 얼마 없는 약품도 내게 사용하던 이호연.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주는 음식을 받지 않았고, 다친 팔을 치료하는 이호연의 손을 뿌리쳤다.

정들면 뭐 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내 생각이었다. 그 생각의 기반은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딱 한 번. 우리가 제대로 대화한 건 한 번뿐이었다. 무너진 하늘에 걸린 불덩어리. 거기서 튀어 오른 불티가 별똥별처럼 흐드러지던 밤.

그때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친절하기만 하던 이호연의 태도에 망설임과 불그스름한 감정이 섞이기 시작한 게.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일까. 이호연은 제 감정을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날 보면 꼬리를 흔들고 뺨을 붉히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내 옷소매를 잡았다. 속을 간지럽게 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하지만 절대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린 그 누구보다도 가장 죽음에 가까운 이들이었으니까. 고백은 무책임한 짓. 그래서 나도 이호연을 그냥 두었다.

설마 아직도 현재 진행일 줄 몰랐지만. 내가 잠적한 반년도 넘는 시간이면 사그라질 감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것 봐. 왜 좋아하냐는 질문에 빨개진 얼굴. 숨길 생각도 없지.

“내가 류인 건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눈치챈 거 같고. 어차피 들킨 거 난 질질 끌기 싫어.”

“…….”

“우린 어느 한쪽이 휴학하지 않는 이상, 같이 대학을 다녀야 하고 같은 수업을 들어야 해. 옛날처럼 어영부영 말 안 했으니 모른다는 태도를 보일 수가 없어.”

우릴 보는 서정은의 묘한 표정이 생각났다. 자꾸 우리 둘만 놔두고 먼저 가 버리는 것도. 숨길 생각도 안 하는 이 호랑이랑 같이 학교에 다니려면 정리가 필요했다.

내 얘기를 듣던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약간의 서러움을 담은 얼굴이었다.

“제가… 제가 류를 알아봐서 싫은 건가요?”

“…….”

솔직히 그건 별로 상관없는데. 하지만 이호연의 표정은 심각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라 이호연의 감정이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눈빛에 서글픔이 더 진해졌다. 내 못마땅함이 정체를 들킨 것보다 제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제가, 류를 좋아해서 싫은 건가요?”

“…일방적인 애정이 부담스러운 거야. 나랑 네 감정은 다르지. 내가 네게 줄 감정은 없고. 그러니까 나 좋아하지 마.”

“…….”

“어…?”

뚝. 뚝. 서늘한 눈매가 발긋해졌다. 예쁜 회색 눈동자에 물이 차오르더니 하얀 뺨을 타고 흘렀다. 뭐야, 지금 울어…?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이호연을 보는데 이호연이 제 눈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래 봤자 또 방울방울 눈물방울이 흘렀다.

“…안 좋아해 줘도 돼요. 그냥, 저 혼자 좋아하는 거예요. 뭘 바라거나 하지 않아요.”

“…….”

“좋아하면 안 되나요?”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솔직히 누가 흔들리지 않을까. 나 좋다고 구는 사람을 싫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게 지옥도에서 함께 살아남은 이라면 더욱더. 그 감정의 크기를 알기 때문이다.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감히, 내가 당신께 뭘 바란다거나 그러지 않아요. 그냥… 그냥… 난 당신이 좋아요, 류….”

“…….”

“날 싫어하지만 말아 주세요….”

좋아한다. 안 좋아해 줘도 된다. 그저 싫어하지만 말아 달라….

그러니까. 네가 그러면 내가 흔들린다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재밌게 영화도 보고,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달콤한 디저트와 음료까지 완벽한 데이트 코스였다.

너와 내 마음의 무게가 같았다면.

“널 싫어하지 않아.”

어떻게 싫어해, 널.

하늘의 불티가 별똥별처럼 떨어지던 그 날. 우리가 처음 대화한 그 날. 넌 내가 못 들은 줄 알겠지만 난 그날 들었다.

먼저 자리를 피했지만 혼자 있는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꼬마 도깨비 하나를 그림자에 숨겨 놨었다.

내가 떠나고 혼자 남은 붉은 별똥별 아래. 가장 뜨거운 별똥별이 네 마음에 불을 질러 버린 그 날. 불보다 새빨개진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던 네 말은 내 속까지 달구고 도망가 버렸다.

‘당신을 좋아하나 봐.’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림자를 통해 듣는 목소리가 그렇게 선명한 색을 가질 수 있다는 걸.

그래. 널 싫어하지 않아.

날 것 그대로여도 불에 탈 것 같은 감정을 싫어하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한겨울보다 추운 지옥도의 삶에서 네 감정은 너무 선명했다.

회색 도시에서, 검은 그림자에서, 그 붉음은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내가 그 붉음이 마음에 들어 가까이 가도, 불에 비쳐 붉음을 흉내 내고 속일 수 있다고 해도 붉음은 아니거든.

널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좋아해.”

“……!”

“근데 딱 거기까지야.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 하지만 너처럼 ‘좋아하는’ 이상은 아니야. 그리고… 좋아하는 이상이 되는 건 무서워.”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한쪽의 일방적인 감정은 상처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가 더 흔들릴 수도 있었다.

이호연은 누가 봐도 미인이고, 키도 크고, 몸도 좋다. 타고난 천성이 마냥 바르진 않을지 모르지만, 뭐가 옳은지 그른지 안다.

그리고 그저 나를 좋아한다. 내게 뭔가를 바라지 않고 좋아만 한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잠적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일방적 감정은 있을지언정 관계는 없었다. 날 보며 좋아 죽으려는 그보다 가족과의 일상이 내게 더 중요했다. 언제든 그가 아니라 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기분이었다.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호연이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옆구리를 통째로 뜯기는 상처에도, 팔 한쪽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는 부상에도 울지 않은 이호연이 내 말에 운다.

이호연이 입을 열었다. 난, 그가 마음을 접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이호연을 잘 몰랐나 보다.

“당신을 좋아해요. 앞으로도 좋아할 거예요.”

“…….”

“류. 당신의 마음이 이상이든 이하든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웃는다. 또.

“아주 만약에요. 당신의 마음이 제 마음에 조금 더 가까워져도, 당신은 전혀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

우리는 죽음을 곁에 둔 자들, 언제 죽을지 몰라 감정이 엮이는 건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옆구리가 뜯기고 팔을 잘라야 할 부상은 흔한 일.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를 좋아하는 게 쉬운가?

“누가 봐도, 내가 더 당신을 좋아하는걸.”

그 힘든 걸 하는 이를 싫어하는 게 가능한가.

붉은 별똥별 아래 있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있었다. 내 불이 붉음이 아닌 푸름이었을 뿐. 심해와 닮은 색을 지닌 불을 멀리하면 그 불은 차가워 보일 뿐이다.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하는 귀신이 숨겨 준 공간. 겁 없는 호랑이가 손을 뻗었다. 난 그것을 그냥 두었다.

불이 일렁인다.

크고 하얀 손이 내 손을 붙잡고 제게로 이끌었다. 불이 옮겨붙은 듯이 뜨겁고 빨간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나의 불을 푸름이라 한다면, 너의 불은 붉음을 가장한 하얀색일 거야. 눈으로 볼 수 없어 붉음으로 표현한 불.

뜨거웠다. 너무 많이.

“좋아해요, 류.”

휘어지는 눈. 긴 속눈썹 사이에 눈물이 조명의 빛을 반사하며 예쁘게 빛났다.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흔들면….

흔들린다고. 못된 호랑이.

“좋아해도 되나요?”

“…….”

“류.”

홀린 것인지. 뭔지.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연이 내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얇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

다음 날, 다시 만난 이호연은 벅벅 비빈 탓에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눈으로 날 보며 웃었다. 미리 와서 나와 노닥거리고 있던 서정은이 이호연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 서정은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고 빨리 회의하자고 재촉했다. 어제 박진후와 있었던 일을 들은 서정은이 하. 하. 하 웃었다. 어떻게든 박진후를 엿 먹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나는 만족스러웠다.

다만 조금 곤란한 것도 있었는데.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네. 좋아요.”

“그럼 이제―.”

“네….”

다름 아닌 이호연이었다. 그만 좀 봐! 서정은이 어색하게 네, 네만 하는 거 안 보여?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 옆에 앉은 이호연은 앞에 자료에 눈길도 안 주고 나만 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결국 좋아한다는 네 말에 부정 안 하고, 얼떨결에 좋아해도 되냐는 네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름 나 스스로도 감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지만!!

이렇게 대놓고 유혹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힐끔 옆을 보니 눈에 꿀이 떨어지다 못해 흘러내리는 눈으로 나를 보는 이호연이 보였다.

어제 울어서 그런지 약간 발긋한 눈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반달처럼 휘었다.

아, 낯 뜨거워. 여름은 끝나 가는데, 내 옆은 아닌 것 같았다. 중증이다.

점심은 이호연과 함께 먹었다. 서정은과도 함께 먹고 싶었지만, 이 언니는 오늘도 우리 둘만 놔두고 도망갔다. 맛집이라며 이호연이 데리고 간 곳은 과연 그 이름값을 했다.

계산은 주세진의 카드로 결제되었다. 내가 내려고 했지만 이호연이 고개를 저으며 주세진이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줬다고 했다. 역시 지난번에 준 블랙 카드는 놀리는 게 맞았는지, 이번에 꺼낸 건 평범한 카드였다.

“세진이 형이 어이없어하더라고요. 데이트 보냈더니 고백하고 차이고 좋아해도 된다는 허락 맡고 올 줄은 몰랐다고.”

그러게.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주세진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이호연은 마냥 기분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물었다.

“손잡아도 돼요?”

“너어….”

“안 돼요?”

그렇게 보지 마! 그냥 잡아!

손을 내밀었다. 이호연이 내 손을 잡았다.

“얼굴이 빨개요. 류.”

“목까지 빨간 네가 할 말은 아니야!”

진짜. 어제 울던 호랭이는 어디 간 거야.

“…너. 왜 안 하던 짓 해?”

“?”

고개 갸웃하지 마! 어울려!

“손잡고 이런 거 안 했잖아!”

“아.”

얼굴은 새빨개서. 뜨끈뜨끈한 열기가 손안에 고였다.

“류가….”

“……?”

“류가 언제든 날 좋아해도 불안하지 않게 더 좋아하는 티를 내려…고…?”

악!! 악!! 주세진이야! 무조건 주세진이야!! 내가 지 좋아할 방법이 저거라고 알려 준 거 100% 주세진이야!! 심지어 저 방법이 통해서 더 분해!

꽉 쥔 손을 타고 이호연이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너무 빨랐다. 심장이 도근도근 뛰었다.

“…….”

“…….”

남들이 보면 얼마나 웃길까. 손잡은 거로 둘 다 새빨개져선. 감정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아주 꽉꽉 묶으면 자제할 수 있는데 한번 불붙으면 자제가 안 된다.

슬쩍 이호연을 보니 제가 한 말에 제일 많이 공격받았는지 고개를 못 들었다. 뺨도, 이마도, 눈가도, 귀도, 목도, 맞잡은 이 손도 빨갛다.

여름이 아직 안 가셨는지, 나한테 그 붉음이 옮겨왔다.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이호연을 재촉했다.

“빨리 가자. 수업 늦겠다.”

발표하는 날인데 늦을 수는 없지. 오늘의 발표 담당인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앞 조의 발표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런 조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듣기 좋은 중저음 목소리가 발표를 시작했다. 이호연은 문제없이 준비한 발표를 마쳤다.

“이것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발표를 끝낸 이호연이 인사를 했다. 박수 소리가 울리고 교수가 흠흠 헛기침 소리를 냈다.

“정말 잘했어요, 3조. 그런데… 왜 셋이죠?”

박진후와 김시연은 이 자리에 없었다. 왜? 내가 장소를 다른 데로 알려 줬거든. 난 무임승차하는 꼴은 못 본다.

“무임승차하는 조원을 묵인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안 했으면 끝까지 하지 말라는 마음으로 다른 데 보냈습니다.”

이호연이 여상한 낯으로 교수에게 말했다. 서정은의 얼굴은 약간의 해탈함과 웃음이 담겨 있었다.

우린 이미 우리끼리 합의를 봤다. 교수님이 협동심 부족이라며 점수 안 줘도 상관없었다. 난 이 수업 드랍해도 상관없는 훌륭한 학점을 갖고 있었고 서정은도 마찬가지였다.

막 복학한 이호연은 주세진한테 부탁하면 수업 하나는 버려도 되는 명분이 생기는 몸값 높은 헌터였다. 대신 정부에서 부탁하는 자잘한 게이트를 좀 많이 공략해야 하지만 내가 도와주면 된다.

이 자리에 없는 박진후와 김시연은? 내가 왜 그 둘을 신경 써. 교수는 당돌한 이호연의 말에 홀홀 웃었다. 되게 덤블도어 같은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련을 준다는 점에서.

“그래요. 무임승차하는 학생들을 괜히 받아 줄 필요는 없긴 하죠. 나이가 몇인데 본인 일은 할 줄 알아야지.”

오. 성격은 안 덤블도어인가 봐.

“나머지 둘은… 알아서 하겠죠. 강의실 하나 못 찾아오는데. 잘했어요, 3조. 좋은 발표였습니다.”

이건… 정말 예상 못 했는데…. 근데 애초에 조별 과제를 안 냈으면 되잖아?

홀홀 웃는 교수는 안 덤블도어인 척하는 덤블도어였다. 우리에게 시련을 주면서 우리 편인 척을 하다니.

어쨌든 우린 기분이 좋았고 줄줄이 이어지는 발표 시간을 빙자한 빌런 고발을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참 마음 편하고 즐거운 순간이었다.

“야!!”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우다다다 뛰어오는 박진후가 보였다. 그의 뒤에는 씩씩거리는 얼굴로 뛰어오는 김시연도 있었다.

이야. 이제야 찾아오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강의실을 다른 데로 알려 줘?!”

못난 얼굴 들이밀지 마라.

“다른 문자는 다 씹으면서 그건 잘 봤나 봐요. 나도 진짜 낚일 줄은 몰랐는데.”

이건 진심이었다. 안 낚이면 푸른 불로 홀려 한강으로 보내려고 했다. 박진후는 흥분하여 시뻘게진 얼굴로 내 멱살이라도 잡으려는지 손을 뻗었다.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은 잊었는지 참 단세포적인 행동이었다.

두툼한 팔을 잡았다. 누가? 내가. 내가 바로 이 구역의 힘숨찐 힘법사야. 오늘도 내게 힘으로 진 박진후가 또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야! 이, 익! 뭔 힘이….”

발을 동동거리며 난리 쳐 봤자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리가. 그런 박진후를 비웃는데 크고 하얀 손이 박진후의 멱살을 잡았다. 뜨드득 하고 옷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박진후를 비웃는 동안 기분이 상한 야생의 호랑이가 한 짓이었다.

저기… 너까지 그러면 안 되는데…?

걸려도 난 마법 계열, 이호연은 신체 계열. 민간인을 쳤어요. 주먹으로. 마법 계열이면 민간인 대 민간인으로 처벌받지만. 신체 계열이면 민간인 대 국대 선수 취급받는 게 법이었다.

단번에 뜯어진 옷자락은 민간인이 아니라는 게 너무 티 났다. 이호연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는데―.

“잠깐―.”

쾅―!!

“…….”

“…….”

이건 우리가 한 거 아니다.

호랑이의 묵직한 기운에 굳어 있던 박진후가 결국 주저앉았다. 나한테 붙들린 팔과 이호연이 붙잡은 멱살 때문에 대롱대롱 흔들리는 꼴이었다.

움푹 팬 벽에서 돌 조각이 후드득 떨어졌다. 벽을 부순 범인은 울망울망한 여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엾은 우리 조의 조장 서정은이 빽 소리쳤다.

“그만 좀 해요! 민폐도 정도가 있지!!”

저기… 박진후, 기절한 거 같아요, 언니….

제 얼굴 바로 옆의 벽이 부서진 충격을 이기지 못한 민간인 박진후는 기절했고 뒤따라왔던 김시연은 도망갔다.

언니가 이 구역의 힘숨찐이었구나…? 진짜 몰랐다.

이호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연신 움푹 팬 벽과 서정은 번갈아 보고 있었다.

오늘 많은 것을 배웠다. 앞으로 힘숨찐을 할 거면 서정은처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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