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을 잘못한 마법사
히든 게이트란 히든 전직자들의 특권으로 전직관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게이트를 말한다.
나한테 히든 게이트는 랑이 있는 오색구름으로 뒤덮인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집 안에 정원 있고 비단잉어가 사는 연못에 좀 더 들어가면 호수까지 있는 그곳.
이호연은 백호가 사는 울창한 산이라고 했다.
장소에 상관없이 히든 전직자라면 언제든 오고 갈 수 있는 곳. 그야말로 특권. 그럼 뭐 해, 정작 필요할 땐 생각이 안 나는데.
나는 가면을 벗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다음에 보면 사과해야지.”
놀라서 기절시켰지만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상대가 이호연이었으니까.
가족을 찾은 반년 전을 기준으로 나는 공식적인 헌터 활동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있어 나는 지옥도를 끝낼 방법을 찾아낸 의문의 히든 전직자였으며, 수백 명이 몰려들어 겨우 공략한 가장 큰 하늘의 조각을 홀로 공략한 또 다른 괴물이었다.
공식적인 최초 히든 전직자인 이호연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였고, 그런 내가 뜬금없이 잠적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변호한 것은 이호연이었다. 그리고 내 빈자리를 대신해 더 많은 게이트에 들어가고 하늘 조각을 돌려보낸 것도 이호연이었다.
이호연이 기자들 앞에서 한 말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책임감 없이 사라진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었다.
이호연은 그 질문을 한 기자를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책임감 없이 그런 말을 내뱉는 기자님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지친 사람’이라고. 나는 하루 종일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던 그 영상을 본 그날, 조금 울었다.
기자 회견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편을 든 건 이호연뿐이었다. 내 편을 들어 주고 싶어도 어른들의 사정으로 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내 편을 들어 준 전직자인 이호연을 기절시켰다?
망했네.
당장 리포트를 작성하지 않으면 내일의 내가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도저히 키보드를 두들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상태론 결코 좋은 과제물이 나오지 않으므로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내일의 내가 해결할 것이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손목의 커넥터를 활성화했다.
[로딩 중~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D]
[로 ᕕ( ᐛ )ᕗ 딩٩( ᐛ )و중 (૭ ᐕ)૭]
[접속 확인. 닉네임 류. 전직 명 도깨비 공주.]
비전투 계열 히든 전직자들과 정부의 노력의 산물인 커넥터는 일종의 헌터 전용 핸드폰이었다.
게이트 위치 꼬박꼬박 알려 주고, 하늘 조각에서 괴물 튀어나오면 소집령을 내리고, 온갖 물건 사고파는 일종의 홈 쇼핑 역할에, 헌터들의 소통의 매개체 역할도 했다.
내가 커넥터에 들어가 확인한 것은 하루에도 온갖 잡다한 소식이 올라오는 자유 게시판이었다.
정부는 너무 게임 같은 이름이라고 했지만, 커넥터를 만들던 히든 전직자 중 한 명이 게임 폐인이었기에 다른 이름으로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대체할 만한 마땅한 이름도 없었고.
연령층 낮은 헌터들에게는 환영할 일이기도 했다. 솔직히 나도 자게란 이름이 더 편했다.
그리고 슬프게도 자게에는 예상했던 글이 올라와 있었다.
[제목: 우리 호랑이 실려 옴!
글쓴이: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 (리블)
오늘 내가 뭐 봤는지 알아? 리블 마스코트이자 우리우리 멋있는 호랑이 형아를 길드장님이 업고 왔다!
<댓글>
내이름은머다(나비): ㅇㅎㅇ??
꿀벌(천칭): 쟤네 길드장은 저거 관리 안 하는 거야? 저런 거 자게에 올려도 돼?
닉네임나중에바꿀수있나요(리블): 우리 길드장님은 자유롭지!!
빵먹고싶다(천칭): 그래서 리블 소속 헌터들 닉네임이 다 그따위임?
사람을화나게하는방법중하나는(리블): 천칭이 할 말은 아닌데. 네들 길마 닉네임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와라
우리강아쥐귀여움(무소속): 서로 뼈 때리네ㅋㅋㅋㅋ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천칭): 우리 길드장님 닉네임이 어때서!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리블): 왜 여기서 싸우는데! 내 글에서 싸우지 마!
닉네임나중에바꿀수있나요(리블): 따우지 마! 따우지 마! 에베베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리블): 아;; 싫다 진짜…이러지 마요...
베타피쉬(리블): 내려
닉네임(리블): 내려
ㅁㄴㅇㄹ(리블): 내려라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리블): 넵…;;( •́ ̯•̀ )
닉네임나중에바꿀수있나요(리블): ㅋㅋㅋㅋㅋㅋㅋ
사람을화나게하는방법중하나는(리블): ㅋㅋㅋㅋㅋㅋㅋㅋ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천칭): ㅋㅋㅋㅋㅋㅋㅋ]
아, 정신 차렸나 보다. 닉네임 닉네임. 본명 이호연. 전직 명 마지막 호랑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보였다.
닉네임이 뭐예요? 물으면 닉네임이요. 라고 답해서 기자들을 네? 하고 반문하게 만드는 닉네임. 무기 이름을 내 닉네임으로 정한 나만큼이나 심플 이즈 베스트 닉네임이었다.
본인도 내리라고 했고 리블의 길드장도 내리라고 했으니 이제 저 글은 금방 삭제되겠지.
나는 머뭇거리다 댓글을 달았다.
[<댓글>
류(무소속): 미안
닉네임나중에바꿀수있나요(리블): ??!!??!!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천칭): 엇ㅇ어ㅓ서ㅓ어
사람을화나게하는방법중하나는(리블): 글 지우지 마 징밈지ㅏ 지우미자!]
[삭제된 글입니다!◝(⁰▿⁰)◜짜―잔―! ]
반년이 넘게 두문불출했던 지옥도의 영웅의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나는 삭제된 타이밍 참 끝내줬다 만족하며 잠들었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사과해야지.
***
많은 사람이 이호연하면 생각하는 이미지는 최초(공식)의 히든 전직자. 호랑이. 그리고 안쓰러움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지옥도가 끝난 뒤 현재. 전직자, 그중에서도 헌터는 군 면제였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호연은 제대 한 달 전, 지옥도 시작 하루 전 히든 게이트로 끌려간 특이 케이스였다.
더 슬픈 것은 그는 내가 전직하기 전까지 전직 퀘가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마지막 전직 퀘의 조건이 누군가가 히든 전직을 하는 거였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나와 전직관인 마지막 호랑이에게 사정을 들은 이호연뿐이다.
대중에게 알려진 사실은 그 부분을 쏙 뺀, 전직 퀘가 끝날 때까지, 즉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산속에서 홀로 호랑이의 스파르타식 군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덤으로 산속에서 살아남기 서바이벌도 겪었다고 한다. 잠자리를 찾는 것부터 물을 구하는 것까지. 야생 동물과 함께하는 자연인의 삶 체험기.
세상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고 슬슬 사람들이 유명 전직자의 사생활을 궁금해할 때 퍼진 정보였다. 해당 글을 올린 기사의 댓글 중 가장 많이 올라온 댓글은 이거였다. 아….
나도 그 글을 보며 말했다.
“아….”
그런 이호연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최초로 하늘 조각을 다시 돌려보낸 뒤 한참 사람들이 게이트를 공략할 방법을 찾을 때였다. 많은 사람이 내게 기대를 거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 당시 다른 나라는 모르겠으나, 한국은 게이트 공략 계획을 짤 때 항상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나를 가운데에 두고.
여차하면.
모두의 눈 안엔 그런 생각이 박혀 있었다.
까만 너울 달린 도깨비 가면과 손끝만 보이는 검은 도포를 입은 나는 사람들이 뭐라 하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몇 살인지 어린지 성인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커넥터도 없던 시기였으니 그들이 내 전직 명을 알 방법도 없었다.
대화하지 않을 뿐, 그들이 시키는 일까지 안 한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나를 일종의 최종 병기? 그런 거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나는 저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든 사용 가능한 치트키 같은 거였다. 살아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미 문제 되는 가장 큰 하늘 조각은 내가 단신으로 돌려보낸 뒤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마음 편했을지는 예상이 간다.
물론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말 한마디 안 한 것은 나였고 그들에게 벽을 친 것도 나였으니까.
내가 아무 말 않고 얌전히 말 잘 듣는 병기 역할을 해 준 이유는 최대한 빨리 가족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늘 조각을 돌려보내야 제대로 된 시스템이 구축되기 때문에, 괴물에게 죽을까 봐 겁먹을 시간에 내 가족을 찾는 데 도움 될 것들을 만들라고.
그날도 그랬다.
제법 큰 하늘 조각. 지금은 A-23이라고 부르는 게이트 안에서 함께 들어간 공략 대원들이 중간에 도망갔다. 어차피 뒤처리해 줄 사람이 있으니 참 편한 마음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다른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었던 이호연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내게 사과했다. 그런 사람들과 보내서 미안하다고.
류를 타고 흐른 피로 흠뻑 젖어 있는 내 팔을 붙잡으면서. 그제야 나는 그 피가 내 피인 것을 알았다.
그 뒤로 이호연은 무조건 나와 같은 게이트에 들어갔다. 우리의 시작점이 분명 좋지만은 않았음에도, 그는 그때의 일을 없던 일로 치부하듯 행동했다.
나는 그의 행동에 기묘함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고, 그런 내 태도에도 그는 친절하게 굴었다. 도망가는 공략 대원들의 뒷덜미를 붙잡고 내가 하는 노력을 보기라도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이호연의 행동이 귀찮고 성가셨다. 혼자 싸우는 게 편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이 께름칙했다. 우리의 첫 만남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던 만큼 그가 내게 친절히 구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참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나중에 가족을 되찾고 내 마음의 여유가 생긴 뒤에야 알았다.
갑자기 사라진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 틈에서, 우습게도 나와 같은 게이트를 들어간 사람들이 이호연을 필두로 내 편에 섰으니까.
이호연처럼 공식적으로 내 편을 든 것은 아니었지만 온갖 추측 글을 올리며 물타기 하는 여론에 댓글을 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애는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 그만 그 애를 놔줘요.
그 애. 그들은 그 당시의 내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스무 살 어린애라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비록 내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어른의 눈에 나는 어린 티가 났던 모양이다.
자신들이 그런 어린애한테 매달렸다는 점이 죄책감이 되었을까.
덕분에 나에 대한 여론의 물타기는 금세 끝났다. 기사를 올리는 족족 그런 기사를 올리는 기자를 비난하는 댓글이 달리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마음 편하게 가족과의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어제까지는.
“아….”
이호연의 슬픈 군대 비하인드 스토리를 봤을 때의 한탄이 입 밖으로 나왔다. 커넥터 자게가 시끄러웠다.
[제목: 우리 호랭이 미움받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죠.
글쓴이: 호잇이둘이면둘리죠(무소속)
어제 리블 막내가 올린 글 다들 봤을 겁니다. 오지는 어그로였죠. 그 길드는 길드원들 모두가 닉네임으로 어그로 끄는데 글도 어그로 장인이더군요.
쨌든 어제 리블의 막내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가 올린 글 삭제 바로 직전에 올라왔던 댓글!
실종된 거 아니냐 죽은 거 아니냐, 외국에 스카우트 된 거 아니냐. 온갖 추측 글의 주인공이던 바로 지옥도의 영웅 류!!!!
반년 넘게 사라졌던 류가 뜬금없이 리블 막내 글에 사과 댓글을 올렸습니다. 그럼 이걸로 추측 가능한 것은 총 세 가지죠.
류가 리블 막내한테 뭘 잘못한 게 있다. 류가 리블에 뭘 잘못한 게 있다. 어제 호랑이 기절시킨 게 류다.
우리 공주님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이제 막 들어온 신입 헌터한테 공식적으로 사과할 사람은 아니죠.
커넥터가 막 나온 시절 전직 명이 밝혀진 류가 여자라는 걸 알고 무시하던 놈들은 다 혀 잘릴 뻔하고 시작했는데. 우리 공주님, 다정한 성격 아닙니다. 주먹의 이름이 다정이죠.
길드급한테 잘못 좀 저질러야 공식 사과하려나? 근데 뜬금없이 리블한테 잘못할 일은 읎죠.
그럼 남은 것은 한 가지!
신체 계열 전직자의 끝판왕 호랑이!!
호랑이는 왜 기절한 채 돌아왔을까? 돌쇠한테만 쌀밥을 준 마님의 심리만큼 궁금한 내용이죠.
만약 기절시킨 게 류면? 우리 호랑이 아주 불쌍해지는 겁니다;;
종적 감춘 류 대신 온갖 게이트 들어갔던 우리 호랭이. 류가 책임감 없다는 기자한테 버럭한 우리 호랭이.
공주님, 이제 호랭이 싫어요?
ʅʕ´•ﻌ•`ʔʃ ?
<댓글>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리블): 글 내려 ㄱㅅㄲ야!!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천칭): ㅋㅋㅋㅋㅋㅋㅋㅋ
닉네임나중에바꿀수있나요(리블): 안 돼요 공주님!! 우리 호랭이가 공주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사람을화나게하는방법중하나는(리블): 뭔 듣보 자식이 우리 호랭이를 놀려
ㅁㄴㅇㄹ(리블): 글 내려 ㅁㅊ놈아
빵먹고싶다(천칭): 글 내료 ㅁㅊ짜시갸!!!에베베
꿀벌(천칭): 글 내료 ㅁㅊ때끼야!!!에베부붸베
ㅁㄴㅇㄹ(리블): 아;;천칭 ㅈㄴ시름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천칭): 존네쉬름? 에붸베벱
별님달님(로운): 근데 류 전직 명이 머임?
모자(고앵이): 님 다른 세상에서 왔음?
별님달님(로운): 모를수도 있지…. 꼭 그렇게 기죽여야 함…?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천칭): 어, 이건 기죽어야 함;;
우리강아쥐귀엽징(타타타): 류 전직 명, 그거자나, 도깨비 공주
우리강아쥐귀여움(무소속): 아, 내 짭 나옴
우리강아쥐귀엽징(타타타): 네가 내 짭임 시비 ㄴㄴ
우리고앵이넘귀엽(고앵이): 고양이가 귀여움
우리강아쥐귀엽징(타타타): 월월!! 컹컹!!
우리강아쥐귀여움(무소속): 으르릉!! 월워우엉!!
우리고앵이넘귀엽(고앵이): 왜 저럼;;
닉네임은몇글자까지되는줄알아열아홉글자(천칭): 싸우지 마요, 다 귀여우니까
빵먹고싶다(천칭): 길장님!!
꿀벌(천칭): 길마님!!
국가장학금언제나오지(천칭): 길드장님!!!
ㅁㄴㅇㄹ(리블): 아…
사람을화나게하는방법중하나는(리블): 아…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리블): 아…]
나도 아…. 다.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
길드원들 노는데 등장한 길드장 덕분에 댓글 싸움은 끝났다. 나는 글 올린 놈의 닉네임을 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이 자식 만나면 죽여 버릴 거야.
호잇이둘이면둘리라는 놈을 어떻게 찾아낼까 고민하는데 창 너머로 콩콩거리는 깜찍한 소리가 들렸다.
“빨리 왔네?”
나는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15cm는 될까 싶은 꼬마 도깨비들이 커다란 민들레를 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쓰는 도깨비 가면의 미니 버전을 뒤집어쓴 꼬마 도깨비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짧은 팔을 파닥거렸다.
미리 준비했던 메밀묵을 내밀자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뇸뇸 먹었다.
내 흑색 가면과 디자인은 똑같지만, 알록달록 색을 칠한 꼬마 도깨비들의 가면 중 유일하게 나와 같은 색의 가면을 쓴 꼬마 도깨비가 내게 상소문을 건넸다.
얘는 다른 애들 색동옷 입을 때도 혼자 나처럼 까만 한복을 고집하는 아이였다. 꼬마 도깨비가 건네준 상소문을 펼치자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다. 다행히 알아볼 정도는 됐다.
「호랑이가 하늘 조각! 쏙!」
랑은 말했다. 꼬마 도깨비들은 일종의 나의 스킬로, 내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제 한몫을 할 존재로 자라난다고. 나는 인간이니 점점 사람처럼 바뀔 거고 소통도 가능해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꼬마 도깨비들은 처음 소환됐던 1년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고 자라지도 못했다. 결국,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위해 내게서 한글을 배웠다.
그마저도 한계가 있는지 어린아이 수준을 넘어서질 못했지만.
내게 상소문을 건네준 꼬마 도깨비는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리 좋아하는 메밀묵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꼬마 도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그렇게 좋은지 방방 뛴 꼬마 도깨비는 그제야 제 친구들 옆으로 가 메밀묵을 먹었다.
상소문을 다시 펼쳐 보며 생각했다. 호랑이는 이호연일 거고. 하늘 조각에 들어가는 거면….
“리블에서 공략 들어가나?”
커넥터를 꺼내 찾아봤지만, 공식적으로 올라온 정보는 없었다. 꼬마 도깨비들이 이번에도 내부 회의에 몰래 들어가 알아 온 정보인 듯했다.
직접 만나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반년 만에 만나서 하는 첫인사가 기절인 건 역시 너무했다.
나는 이호연에게 걸린 이후 밤 산책을 중단했다. 나갔다가 또 걸릴까 봐. 물론 정신 계열 마법으로 요로케 조로케 하면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었다.
전직 잘못한 마법사. 전사의 재능으로 STR이 아닌 INT를 찍어 버린 나는 못 한다. 끽해야 환상 마법이지, 뭐.
그런데 환상 마법은….
“…….”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눈을 깜박여 정신을 차리고 커넥터를 비활성화시켰다. 배부르게 먹은 꼬마 도깨비들은 살금살금 내 침대로 올라오더니 인형인 척 얌전을 떨었다. 돌려보내지 마용. 일종의 시위였다.
그 때문에 우리 엄만 내가 도깨비 덕후인 줄 안다.
말랑말랑 짜리몽땅 꼬마들 사이로 쏙 들어간 나는 창 너머, 얼룩덜룩한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실시간 게이트 알람도 있으니 나중에 찾아가야지.
***
마법사들은 대부분 감이 좋았다.
이호연이 신체 계열의 끝판왕이라면 마법 계열 끝판왕은 닉네임은몇글자까지되는줄알아열아홉글자, 천칭의 길마 이예린이었다.
나는 편의상 마법 계열이라 하는 거지, 애초에 장르가 다르니까 제외.
뜬금없이 이 생각이 난 건 마법 계열의 특징 때문이었다. 전직자들의 능력 중 가장 판타지적인 능력은 누가 뭐래도 마법이었다.
그래서인지 마법 계열들은 육감까지 판타스틱했다. 탱커 없으면 죽는 마법사? 그런 건 없었다. 탱커가 막기 전에 알아서 피한다.
피지컬이 딸려? 육감으로 먼저 예상하고 피해. 이게 현대의 법사였다. 생존 회피 기술 부동의 1위. 2위는 힐러였다.
마법 계열의 끝판왕 이예린은 그날그날 사내 식당 메뉴가 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예언에 가까운 육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럼 지구에서 제일 강하다고 추정되는 일단은 마법 계열인 도깨비 공주, 류는? 육감, 그딴 거 없다.
교수님이 휴강인지, 아닌지 몰라 매일 학교에 가야 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내가 마법사다운 육감을 가졌다면 애초에 여기 안 왔을 테니까….
게이트 연결 현상.
주변의 가장 큰 하늘 조각을 기준으로 게이트도 되지 못한 규격 이하 하늘 조각이 몰려드는 현상이다. 규격 이하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몰려들면 조각은 커지고, 커지고, 계속 커져서 C가 B가 되고 A가 된다.
그런데 이 현상의 제일 거지 같은 점은 꼭 헌터가 공략하러 들어가야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헌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는데요. 글쎄 A급 몬스터가 나오더라고요. 나와 보니까 내가 들어간 조각이 하필이면 딱 게이트 연결을 했네? 하하, 하고 가볍게 넘길 수가 없다는 거다.
가볍게 들어가서 묵직해진 마음으로라도 나오면 다행이었다. 재수 없으면 아예 못 나오니까.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딱, 지금까지 한국에선 1년 동안 2번밖에 안 일어난 현상이 지금 일어났네?
그것도 이호연이 들어간 게이트에서? 그것도 하필 내가 구경 온 날에?
…난 그냥 이호연 보이면 몰래 사과하고 튀려고 한 거였는데.
초상집 분위기인 리블 길드원들을 보니 양심이 찔렸다. 도와줘야 하나.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호연도 들어갔는데 알아서 잘….
“길드장님! 큰일 났어요!! 하늘 조각이 계속 연결되고 있어요! 규격 이하 말고도 주변에 D급 3개, C급 2개가 연결됐어요! 변형 게이트 연결입니다!”
우왕. 아주 가끔 일어나는 게이트 연결 현상에, 세계에서 딱 3번 일어났다는 변형 게이트 연결이?
이 정도면 게이트가 나를 초대하는 수준이었다.
원래 리블이 공략하려 했던 건 B급. 이호연이 들어갈 급은 아니지만 리블의 신입을 위한 일종의 체험판 공략이었다.
근데 연결됐네? B+C+C+D+D+D+α=?
나는 곧바로 장비를 챙겼다. 갈아입을 시간 없으니 도포는 패스. 원래라면 어깨에 걸쳤을 두루마기에 팔을 끼워 넣고 도깨비 가면을 뒤집어썼다.
류를 들고 스르륵 리블 길드원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디서? 그림자를 타고 바닥에서.
“엄마야!! ㅆ….”
날 보고 깜짝 놀란 심약한 길드원 중 하나가 끄앙 소리를 냈지만 나는 무시했다.
“류? 네가 왜….”
리블의 길드장인 주세진이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년 넘게 본 적 없음에도 못 알아보는 인간이 없었다. 오늘도 내 장르는 아이덴티티가 뚜렷했다.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시선들 때문에 뻘쭘했다. 빨리빨리 지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손에 쥔 제등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제 자리를 찾은 등이 내 손짓에 따라 한들한들 움직였다.
등 안에서 미약하게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리블의 길드원, 뭐 하나 기삿거리 없나 찾아온 기자들, 주변에 구경 온 민간인들.
뱅글뱅글 등 안에서 돌던 불꽃이 등의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푸른 불이 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꼬마 여우를 흉내 낸 푸른 불이 허공을 폴짝폴짝 날아다녔다. 모두 홀린 듯 여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제일 잘하는 정신계 마법이 바로 환상과 사람을 홀리는 거였다.
좋아. 이제 막는 사람 없다. 붙잡고 질문할 사람도 없다.
나는 빠르고 조용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리블의 길드장, 주세진이 내 팔을 붙잡지만 않았으면.
맞다. 주세진…, 정신력 만렙이지.
전직 명 전장의 머리. 한국에선 유일하게 지휘 계열로 히든 전직한 총사령관님은 무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능력이 좋으면 뭐 하나. 상성이 안 맞는데.
기껏 사용한 정신계 마법은 철벽같은 정신력을 자랑하는 총사령관님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최고일 거라고 했잖아요. 랑!
랑이 들었다면 INT 대신 STR이 더 높은 것 같은, 마법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경우가 더 많은 제 전직자에게 한탄했을 소리였다.
주세진은 여우에 홀린 사람들을 한 번. 나를 한 번 보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딱딱한 표정은 안 그래도 무서운 그의 얼굴을 더 무섭게 만들었다. 참 차갑게 생겼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차피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나름 눈치 보고 있다는 나름의 내 표현법이었다.
“후….”
주세진의 입에서 피로에 젖은 직장인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나는 양심이 찔렸다. 물론 주세진은 길드장인만큼 일반 사원이 아니라 회장님 쪽이지만….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고 말을 고르지 못하는 그를 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려 주면 계속 시간만 갈 것이다.
“도와줄게요.”
주세진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보지만 여전히 고집스러운 얼굴이었다. 질끈 감는 눈에서 그의 고민이 엿보였다.
하지만 나는 고민하는 지금도 주세진의 머리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듯, 내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비상한 그의 머리는 항상 가장 나은 전략을 내놓았다. 그리고 매번 그 전략의 핵심은 나였다. 그것이 설령 본인의 도덕관과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해도.
그에게서 무언가 말하고 싶은 기색을 느꼈음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잽싸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주세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끝까지 부탁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
주세진과 나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대부분을 우린 한국 유일한 지휘 계열 전직자와 인류 최종 병기로 만났다.
전장의 지휘는 감정이 아닌 이성. 사람은 숫자와 통계가 되는 세계였다. 훌륭한 지휘자는 사상자를 가장 적게 내는 전략을 내세우고 그것을 성공시키는 자였다.
주세진은 훌륭한 지휘자였다. 그래서 그는 나를 항상 맨 앞에 내세웠다. 내 바로 뒤는 이호연이었다. 그의 전략은 실패하지 않았다.
실패하지 않는 전략을 거부하는 멍청한 지휘관은 없었다. 그는 항상 앞에서는 나를 앞세우고, 정작 뒤에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옥도에서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이 PTSD 증상을 호소한다. 정부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도 이호연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커넥터가 막 만들어지고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에 열을 올리던 시절 우리는 기절한 듯 자다가도 삑삑거리는 작은 소리를 들으면 기겁해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넥터를 확인했다,
괴물이 안전지대에 기어들어 왔을까 봐. 폭주하기 직전인 게이트가 있을까 봐. 내 바로 옆에 사람이 죽을까 봐.
당시 이호연은 23살이었고 나는 20살이었다. 우린 어렸다. 22살이 된 지금도 나는 꼬박꼬박 우리 집 근처에 하늘 조각이 없는지 확인한다. 나 스스로도 언제쯤 고칠 수 있는지 모를 버릇이었다.
지휘자이자 어른이었던 주세진은 당시 30살이었다. 어리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젊은 청년이었다. 자신의 정신을 수습하기 바빠 우리를 돌볼 여유는 없었다.
지옥도라 불리는 그 시절, 가장 많은 PTSD를 호소한 건 주세진이었다. 그는 불면증을 앓았고, 하루하루 살이 내렸다. 펜을 들 때면 손이 덜덜 떨렸고, 지도를 볼 때면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러다 스킬을 얻었다. 세 번 정도 쓰러진 뒤였다. 지휘자 전용 스킬. 그의 정신력은 철벽처럼 단단해졌다. 그는 자신의 전략을 설명할 때 더 이상 쓰러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아 돌아올 때까지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던 모습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죄책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결코 내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부탁이라는 이름 아래 작전이 실패하면 내 탓.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작전이 실패하면 지휘관의 탓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을 수습하기도 바빴던 청년이 저보다 어린애를 사지로 몰아넣어야 했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그거였다. 적어도 실패 시 욕을 먹는 것은 자신일 것.
겉보기에 말짱해도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누구보다 바른 인생관과 건강한 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호연도 지옥도 당시의 모습을 버리지 못했다.
힘숨찐을 추구하며 일상에 섞이려고 몸부림치는 나도.
정신 계열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귀해진 이유도 PTSD 때문이었다. 정신과 치료에 탁월했으니까.
슬프게도 전직 잘못한 마법사인 내겐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게이트나 공략하고 하늘 조각이나 돌려보내야지. 단순한 것이 좋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생하는 것은 나였다.
게이트의 내부는 화려한 스펙만큼이나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것저것 다 잡아먹으며 연결했다더니 과연 그 이름값을 했다.
하늘은 딱딱한 돌과 흙으로 막혀 있었다. 동굴 타입이었다. 그런데 동굴 안에 숲이랑 바다가 있네? 딱 봐도 혼종이었다.
톡톡.
내 키만 한 제등의 끝으로 그림자를 두들겼다. 창백한 푸른빛을 내는 제등 아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흐물흐물한 검은 줄기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그림자가 내 다리를 감았다. 랑에게 가장 먼저 배운 응용 방법이었다. 그는 내게 싸우는 법보다 도망가는 법을 먼저 가르쳤다.
그림자를 감은 내 발걸음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 없이, 조용하고 어딘가 음산한 걸음걸음.
산속 나그네를 추격해 장난치는 도깨비처럼. 원한을 품은 상대를 놓치지 않는 귀신처럼.
걸음 한 번에 바다를 넘고 숲을 건넜다. 발이 땅에 닿을 때면 그림자들이 잘게 쪼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두운 내부를 밝히는 것은 류 하나면 충분했다. 등 하나의 불꽃은 작으나 결코 약하지 않았다.
어쭙잖은 것들은 제등의 빛만 보고도 도망을 쳤다.
“깨비깨비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그림자를 타고 사방으로 퍼진 꼬마 도깨비들의 시야가 눈꺼풀 아래 펼쳐졌다.
거대한 새 모습을 한 괴물. 지렁이의 모습을 한 괴물. 물고기의 모습을 한 괴물. 이호연과 리블의 길드원들은 어디 있지?
이 넓은 던전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엔 잡스러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걸음을 멈추고 넘실거리는 그림자를 밟으며 제등을 흔들었다. 등 안에 불이 차올랐다. 새파란 불꽃. 푸른 도깨비불.
타이밍 좋게 흩어진 꼬마 도깨비들이 그림자를 타고 돌아왔다. 그림자 줄기 하나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 어깨 위에 안착했다. 그것은 곧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꼬마 도깨비들 중에서 이호연을 본 적이 가장 많은, 내가 제일 먼저 소환했던 까만 가면을 쓴 꼬마 도깨비였다.
앙증맞은 팔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잘했어.”
류를 흔들었다. 꼬마 도깨비가 내 가면의 너울을 붙잡았다.
새파란 불이 끝없는 파도의 물줄기처럼 등의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심해 같은 불꽃이 게걸스럽게 괴물들을 잡아먹었다. 숲을 덮고 바다를 삼켰다. 동굴의 천장을 뱀처럼 타고 올라갔다. 모든 것을 태웠다.
“이제 좀 마법사 같네.”
나는 한들한들 떨어지는 푸른 불꽃의 불티를 밟으며 허공을 걸었다. 내 앞을 막는 것은 전부 불태우며.
하늘을 날던 괴물들은 추락하지 않았다. 이미 추락할 몸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찾았다.”
불의 장막 너머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한 호랑이 하나가 보였다.
갈기갈기 찢긴 괴물들이 널브러져 있는 평원의 한가운데. 이제 막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보이는 이호연이 귀와 꼬리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피만큼이나 새빨간 혀가 제 입가를 핥았다.
리블은 게이트를 공략하면 으레 다른 길드가 하는 기사 뿌리기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호연 때문이었다. 바른 생활의 표본. 건강한 정신에 건장한 신체를 가진 이 시대 참 보기 드문 청년이란 이미지 탓이었다.
지옥도를 겪으며 이호연은 이상한 강박증이 생겼다. 그의 아이덴티티 스킬인 변형. 호랑이로 변할 수 있는 그 스킬은 몸 일부만 변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 일부의 변형만으로도 괴물의 목을 뜯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전체 변형을 고집했다.
집채만 한 호랑이로 변해 괴물의 목을 물어뜯었다. 목의 절반은 뜯어 버려야 그는 만족했다. 전투 직후 그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동공은 작게 축소되고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지금처럼.
흥분을 잠재우듯 그는 손끝을 움찔거리며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때 죽은 척하고 있던 괴물 하나가 그의 뒤를 노렸다.
호랑이의 앞발로 손을 변형시킨 이호연이 곰을 닮은 괴물의 안면을 으깼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호연은 괴물의 입을 위아래로 잡아 쭉 찢어 버렸다.
완전히 변형하지 않은 것은 그 나름의 자제였다.
먹이를 가지고 노는 느른한 맹수 같은 얼굴을 하던 이호연은 파란 불티가 제 앞에 떨어지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귀가 쫑긋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회색빛 눈동자 덕분에 축소되었던 동공이 빠르게 돌아오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리블의 길드원들은 턱이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무례한 손가락들이 날 향했지만 나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것처럼 불티를 밟고 내려온 나는 이호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
이호연은 목이 졸린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에게 말을 거는 게 어렵지 않았다.
“류….”
내 어깨에 앉아 있던 꼬마 도깨비는 저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았는지 아주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너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발이 바닥에 닿자 푸른 불꽃이 등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열기의 잔재를 느끼며 유일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길드원을 내려다보았다.
“헉…. 흐으…. 엄마…. 아빠….”
앳된 얼굴. 갑옷도 로브도 아닌 옷. 서포트를 담당하는 비전투 계열 전직자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 이호연이 급에 안 맞는 게이트에 들어왔던 이유이기도 했다.
갓 전직해 헌터 일을 시작하는 전직자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트라우마가 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지옥도에서 살아남아 전직까지 한 사람의 정신이 정상일까? 그런 케이스는 거의 없었다. 크든 작든 다들 지뢰가 있었다.
그럼 자신도 몰랐던 공포심에 패닉 상태가 된 헌터가 첫 게이트 공략에 들어가게 되면? 만약 그 헌터가 광역 딜러면 그 파티는 끝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정신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모든 길드가 제 소속 병아리들이 첫 게이트 공략에 들어가면 게이트의 등급과 관련 없이 가장 강한 헌터를 보호자로 딸려 보낸다.
병아리가 트롤 짓 하지 못하게 하는 보모 역할. 여차하면 빨리 쓸어 버리고 게이트에서 나오라는 보험.
오늘의 병아리는 사용중아닌닉네임이뭐야. 히든 전직 ‘탐색자’로 전직한 박상호였다. 수학여행에서 보물찾기를 하다가 히든 게이트를 찾았다고 화제가 됐던 19살 고딩.
지옥도 당시 눈앞에서 부모님이 괴물에게 먹히는 것을 봐야 했던 생존자.
“류.”
이호연이 조심스럽게 내 두루마기 소매를 붙잡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원래 색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류를 톡톡 바닥에 두들겼다. 등을 한 바퀴 감은 얇은 불줄기가 박상호의 시선을 빼앗았다. 불을 홀린 듯 보던 꼬마는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잠이 들었다.
정신 계열 마법 중 하나인 수면이었다. 불의 따스함에 흠뻑 젖은 정신은 긴장을 풀고 느물느물 늘어져 깊은 잠에 빠졌다.
솔직히 수면인지 홀려서 재우는 것인지 사용하는 나도 긴가민가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뭐.
“고마워요.”
꼬리를 살랑거린 이호연이 눈을 휘며 말했다. 참…, 육식 계열 맹수처럼 생겼으면서 하는 짓은 꼭….
나는 생각을 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앉은 꼬마 도깨비가 내 행동을 따라 했다.
리블의 길드원들은 저들의 병아리를 챙기면서 반짝반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그 눈빛에 부담감을 느끼며, 가면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이호연을 봤다.
“변형 게이트 연결이야.”
이호연은 내 말을 듣고 예상했던 건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이호연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과연 총사령관 주세진이 만든 파티답게 정교한 구성이었다.
탱커 하나, 서포터 둘, 힐러 둘, 일반 딜러와 비교 자체를 하면 안 되는 호랑이 하나.
비록 서포터 하나가 기절하긴 했다만 파티 구성은 화려했다. 힐러 둘은 일반 전직자가 아닌 상위 호환 전직자. 나머지는 전원 히든 전직자.
일반적인 공략대의 평균 인원과 비교도 안 되는 소수 인원이지만 웬만한 게이트는 모두 공략 가능할 것 같았다. 전략을 모르는 내가 봐도 이게 얼마나 대단할지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소수 정예인가.
혼자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지만 역시 이런 공략 팀을 보면 감탄을 하게 된다. 내심 부럽기도 하고.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는 그들을 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이호연을 찾기 위해 꼬마 도깨비들을 사방으로 보냈을 때,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웬 까만 바위.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였다.
단순히 내가 본 적 없는 하늘 조각 안의 자원일 수도 있지만 꼬마 도깨비들이 그 바위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지금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림자 줄기 하나가 내 발로 돌아왔다. 까만 바위로 보냈던 깨비였다. 강렬한 거부감. 미지의 것을 날것 상태로 마주 볼 때의 거부감이 꼬마 도깨비에게서 느껴졌다.
대체 뭐지? 변형 게이트 안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인가?
어쨌든 기분이 안 좋았다. 뒷목이 서늘했다.
“류?”
섬뜩한 기분에 목을 쓰다듬는데 이호연이 나를 불렀다. 걱정을 담은 눈은 날카로운 눈매답지 않게 다정했다. 어쩐지 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호연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가면을 써서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일 텐데 눈치가 참 빨랐다.
리블의 길드원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막내를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이호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꼬마 도깨비가 그런 내 행동에 서둘러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손짓을 하자 이호연이 허리를 숙여 주었다. 보들보들해 보이는 호랑이 귀에 속삭였다.
“누가 있어.”
“…누구죠?”
“나도 몰라. 남자야. 젊고…신체 계열은 아니야.”
이상한 것 중 다른 하나. 변형 연결 게이트 안에 웬 남자가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은 못 봤지만 일단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수상했다.
“빨리 공략해서 나가는 게 좋겠어.”
내 말에 이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길드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틈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동굴 안. 바다와 숲이 어우러져 있는 비현실적인 곳. 숲은 소름 끼치게 울창했고 바다는 거칠어 보였다.
조금 전 태웠던 것이 무색하게 빠르게 수복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법사의 감 같은 게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위험해.
내가 처음으로 돌려보냈던 하늘 조각. 다른 나라에선 수십 명, 수백 명이 몰려들어 공략했던 그곳.
그곳에서 느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압박감이 이 안에서 느껴졌다. 대신 그 당시 느낀 압박의 크기가 10이라면 이 안은 3 정도?
적은 숫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런 압박을 조금도 느껴 보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심각한 상황이 맞았다.
어서 빨리 나가야 할 텐데. 위험한 것도 위험한 거지만 내일 학교 가야 한다. 출석 점수….
비운의 대학생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으어….”
앓는 소리에 그쪽을 쳐다보니 낑낑거리며 꼬마가 일어나고 있었다. 리블의 길드원들이 그런 꼬마의 옆에서 손뼉을 쳐 주고 있었다. 꼬마가 성질냈다.
“뺙뺙거리지 말고 감사 인사부터 하자, 상호야.”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박상호가 홀로 새까만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어!!”
반응이 참 격렬했다. 한참 혼자 난리를 치다 정신을 차린 리블의 병아리는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옷 사이로 숨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모두가 그런 그의 손을 모르는 척해 주었기에 나도 별말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합격이었다. 헌터를 그만두지는 않겠네.
둥글게 모인 우린 통성명을 했다. 원래는 빨리 공략해서 나가 버릴 생각이었지만, 반짝이는 눈으로 날 보는 리블의 길드원들과 간절한 이호연의 눈에 결국 져 버렸다. 꼬마 도깨비 같은 눈을 어찌 이기나.
가장 먼저 자기소개를 한 건 병아리였다. 박상호. 나이는 19살. 히든 직업 탐색자. 지금처럼 익숙하지 않은 게이트에 강제 입장한 경우에 최고의 전략이 될 헌터였다.
차례차례 자기소개하는 리블의 헌터들은 하나같이 아이덴티티가 뚜렷했다. 물론 최고는 혼자 동양 현판을 찍는 나였지만.
“제 이름은 손민호예요. 이쪽은 제 동생 손민경. 저희는 둘 다 힐러입니다. 저는 전방, 얘는 후방.”
“안녕하세요.”
오빠 쪽이 상당히 유명한 힐러 남매였다. 듣기론 손민호 쪽이 전형적인 내 아군이 다치기 전에 적을 처치하는 타입이라고 했다.
“저는 오정인이에요! 공간 계열 히든 전직자입니다. 이동기와 아이템 창을 담당하고 있고요! 닉네임은 ‘사람을화나게하는방법은’입니다!”
발랄한 인사를 한 오정인은 나도 아는 전직자였다. 특이한 헌터 능력을 다룬 특집 방송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방송 1위는 나였다.
주 내용은 내가 마법 계열인가 신체 계열인가를 두고 나누는 토론이었다.
“이나연이라고 해요. 공략대의 탱커 담당이고,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공주님!”
날 공주님이라 부른 이나연은 듣지 않아도 닉네임 추측이 가능했다. 리블 길드원들 중 유독 자게에서 나를 공주님이라 부르는 헌터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닉네임이, ‘닉네임나중에바꿀수있나요’였지….
닉네임은 나중에 바꿀 수 없더라.
“혹시 궁금한 게 있나요?”
이호연이 눈을 휘며 물었다. 얘들아, 우리 빨리 나가야 하는 거 아니니? 라고 묻기엔 모두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제일 궁금한 것만 묻고 어서 빨리 공략을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이런 여유를 부리는 건 박상호 덕이었는데, 그의 능력으로 이 게이트의 공략 조건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 몹이라면 레이더 역할도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제일 궁금하고 다른 사람도 제일 궁금해하는 것을 묻기로 했다.
“리블은… 왜 다들 닉네임이 그래요?”
내 말에 이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머지는 웃음보가 터졌다. 이호연은 멋쩍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세진이 형이 시켰어요.”
“…?”
주세진이? 그 철벽의 총사령관님이? 진지함과 어른스러움의 끝판왕이?
혼란스러운 내 기색을 읽었는지 이호연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근데 너 왜 나만 보면 웃어? 내가 너 얼마 전에 기절시켰었는데….
기절하면서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일반인에게 전직자는 위험스러운 존재니까요. 동시에 세상을 지켜 줄 무기죠. 세진이 형은 우리가 일반인들에게 친근한 존재가 돼야 한다고 했어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아, 뭔지 알 것 같다.
리블의 길드원들은 내게 차례차례 주세진에 관한 것을 말했다.
“그래서 유독 저희 길드가 탱커, 힐러, 딜러. 아이템 창, 이동기 같은 말을 많이 사용하는 거예요. 익숙하고 벽이 낮아 보이니까. 일부러 자유롭게 풀어 두고 공식 장소에서 장난을 쳐도 뭐라 안 하죠.”
“근데 나, 저번에 밥 먹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게임 그만하라고 하더라….”
“다치고 공략에 실패해도 실패한 무기들이 아닌 살아 돌아와서 다행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길마님의 노력이죠.”
리블의 사내 복지가 최고라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지는 않았다. 후방이되 누구보다 전방의 압박감을 많이 느끼는 것이 주세진이니까. 실패한 작전에 비난받는 전직자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 그니까.
“…….”
그때가 언제더라. 지옥도의 깜깜한 어느 날 밤. 기절했다 깬 주세진이 내 손을 붙잡고 했던 말이 있었다.
‘아무도 너희를 욕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게. 너희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게.’
그때 그는 울었던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을 넘겨들었다. 그리 말하는 주세진의 진심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이 기꺼웠던 것도 아니고.
내가 잠적하고 얼마 안 있어 그가 길드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적성에 맞겠네. 딱 그 정도였다.
그 말을 한 바로 다음 날, 그는 스킬을 얻었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정신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울며 말하던 모습이 꿈결의 착각처럼 느껴졌다.
이호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날 주세진이 붙잡았던 또 다른 손의 주인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게 무어라 말하고 싶어 했던 주세진의 모습이 생각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나는 여전히 주세진이라는 사람을 피하고 싶었다.
애써 그 생각을 털어 내고 박상호를 재촉했다. 내 재촉에 허둥거리던 박상호의 눈에 마법진 같은 것이 생겼다.
그는 게이트 안을 쭉 훑어보더니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노란빛의 마법진과 나침반이 생겼다.
나침반이 돌아갔다. 나침반이 향하는 곳은 내가 조금 전 발견한 검은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오정인이 손뼉을 짝, 하고 크게 치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향했다.
“자. 모두 사이좋게 손을 잡아 주세요. 둥글게 둥글게!”
이호연이 내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흘겨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다른 리블의 길드원들도 설렁설렁 움직여 서로의 손을 잡았다.
“자, 그럼. 뿅.”
그게 끝이었다. 눈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우린 순식간에 검은 바위 앞에 서 있었다. 이게 그건가. 끈의 끝에서 끝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직진이 아닌 끝과 끝을 맞붙이는 거라는 거.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동기였다. 속으로 내심 감탄하며 음산한 검은 바위를 보았다.
“정말 저게 공략 조건이에요?”
내 말에 병아리 박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공략 조건이었을 줄은 몰랐다.
가까이에서 실물로 보니 강렬했던 거부감이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꼬마 도깨비를 통해 보았을 때보다 더 거북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 다른 사람들도 바위에 다가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이호연의 동공이 다시 축소되었다. 그는 공략대의 리더이자 저들의 보호자이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곤두선 그의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류를 질질 끌며 바위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나를 이호연이 말리려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의심스러운 것과 별개로 검은 바위에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가까이에서 본 검은 바위는 정말 까맸는데, 말로만 듣던 반타 블랙 같은 색이었다. 겉면은 매끄러웠다.
류로 바위를 툭툭 건드렸지만, 변화는 없었다.
이게 정말 공략 조건이라고? 부숴야 하나?
바위 앞을 서성이며 고민하던 그때, 섬뜩함이 다시 목 뒤를 스쳐 지나갔다.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류!”
순식간에 날 붙잡은 이호연이 오른쪽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그에게 안겨 끌려가는 동안 내 왼쪽 눈가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도깨비 가면을 부수고 너울을 헤집다 공중으로 뻗어 나간 무언가.
가면의 조각과 너울, 너울 사이로 삐져나온 내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가면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뭐였지.
이호연의 품에 안겨 바닥을 구른 뒤에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지금 내가, 공격당할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이건 단순히 육감의 문제 같은 게 아니었다. 내 시야와 청각. 살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 체계와 반사 신경이 못 느꼈다는 것이다.
그건 이호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신경이 인간과 비교하면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껴안고 있는 상대의 몸이 긴장으로 굳은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시야를 돌리자 뒤쪽에 이상한 검은 가시를 막아 낸 이나연이 보였다. 방벽이라는 전직 명이 아깝지 않은 완벽한 방어막이었다.
“아.”
이번에는 느꼈다.
“막아!”
이나연에게 소리친 나는 이호연을 꽉 껴안고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이나연 또한 뭔가를 느낀 듯 전방만을 막아 내던 방어벽을 길들원들을 전부 감싸는 구의 형태로 변경했다.
사방이 까만 그림자 속에서 바깥의 상황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색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암흑도.
내 눈을 노린 가시, 길드원들은 노린 가시가 그대로 다시 수백 개의 가시를 내뿜었다. 그것들은 땅에 박히고 서로 얽혔다. 빽빽하게 박힌 가시 사이에는 우리가 서 있을 공간이 없었다.
그림자 속으로 숨지 않았다면, 이나연이 구의 형태로 방어벽을 세우는 법을 몰랐다면.
이호연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이었다.
가시는 흐물흐물하게 녹는가 싶더니 땅을 기어 검은 바위로 돌아갔다.
언제 저가 위협했냐는 듯 공격 전과 다를 게 없는 모습에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를 타고 이나연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일렁이는 그림자에 낯을 굳히던 이나연은 그림자 속에서 우리가 튀어나오자 안심한 얼굴을 했다.
이나연의 방벽 안으로 들어간 우리 중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느낀 것이다.
저건 위험해.
손을 올려 왼쪽 눈가를 더듬었다. 부서진 가면 사이로 맨얼굴이 만져졌다.
“저건, 대체 뭘까요…?”
오정인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답을 준 건 의외로 박상호였다.
“뭔가 이상해요.”
박상호의 눈동자 속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탐색의 눈이 향하는 곳은 검은 바위였다.
“아까 저 바위가 공격할 때 봤는데, 누가 저 바위에 스킬을 걸었던 흔적이 있었어요.”
“스킬?”
내 되물음에 박상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 적 있는 스킬이에요. 힐러들이 흔히 갖는 스킬인데 상대를 먼저 건들 때까지 나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버프예요. 그래서 저 바위가 공격하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요”
들어 본 적 있는 스킬이었다. 공격기가 없는 힐러들이 쉽게 얻는 스킬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공격당할 때까지 몰랐던 건가.
의심 가는 사람은 있었다. 검은 바위와 함께 발견한 이상한 것.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게이트를 타고 하늘 조각 안으로 들어왔다는 건 전직자, 그중에서도 헌터라는 뜻인데, 왜? 목적이 뭐지?
현재로선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쨌든 저 바위는 나를 건드렸다. 이제 내가 저 바위의 공격을 눈치 못 챌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류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등 부분이 방벽 밖에서 흔들거렸다.
푸른 도깨비불.
등에서 튀어나온 푸른 불꽃이 검은 바위를 뒤덮었다. 커다랗고 강렬한 불이 시야를 가렸다.
길들원들이 감탄의 소리를 냈지만 내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불이 잦아들고 마침내 앞이 보였을 때.
우리의 눈에 보인 것은 새카맣게 그을리고 녹아내린 주변. 그리고 멀쩡한 검은 바위였다. 당황스럽다기보다 기분이 나빴다. 재질이 뭐기에 저렇게 멀쩡한가 싶었다.
나는 제등의 등 쪽을 뒤로 돌리고 자세를 취했다. 그림자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팔을 감았다. 도깨비와 같은 묵직한 힘이 내 팔에 담겼다.
왼발을 내밀었다. 등이 당겨지는 느낌과 함께 류를 던졌다. 내 팔을 휘감던 그림자는 꼬리처럼 류의 뒤를 따르며 잔상을 남겼다.
칼의 단면과 비슷한 류의 끄트머리가 바위에 꽂혔다. 등이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손을 내밀자 류는 그림자로 흩어졌다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바위에는 류가 꽂혔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돌멩이면서 물리 방어가 딸리네.”
검은 바위의 공략 방법. 그건 물리 공격이었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데 통하는 공격이 물리적 공격이라니.
“이호연.”
검은 바위에 남은 흔적을 훑어보던 이호연이 나를 돌아봤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았다.
원딜 마법 공격이 안 통하면 물리 공격 근딜을 데리고 가면 된다.
***
박상호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는 두 달 전만 해도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학생이 되었다.
귀한 히든 전직자가 되었고 리블의 길드원이 되었다. 비록 괴물을 보고 패닉 상태가 왔지만 빠르게 회복했다.
그리고 지금. 지옥도의 영웅. 모든 전직자들이 선망하는 공주님과 그가 제일 믿고 따르는 형이 함께 싸우는 것을 보고 있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모든 것을 태우는 것이 아닌 녹여 버릴 것 같은 불꽃이었다.
푸른 불꽃과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작은 집 모양의 등을 떼고 막대기만 남은 제등을 창처럼 휘두르며 가시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는 류는 누가 봐도 신체 계열 최상급 전직자였다.
저 움직임이 마법 계열이면 신체 계열 전직자들은 다 나가 죽어야 했다.
그림자를 오가고 불꽃의 틈에서 피어오르고 제등의 날카로운 면으로 가시를 전부 베어 낸다.
다리와 팔에 감기는 그림자는 검은 가시만큼 위험스럽고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귀신같은 움직임에 도깨비 같은 힘. 언젠가 길드장님이 류를 그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마법 계열과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지만 지금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류의 움직임은 귀신같았고 가시를 베어 내는 힘은 도깨비였다.
완전한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형한 이호연은 그런 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피에 젖었지만 새하얀 백호의 털가죽이 푸른 불꽃과 함께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류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검은 바위 바로 앞이었다.
가시가 두 사람을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류의 발끝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아지랑이가 쏟아지는 가시를 꿰뚫었다.
창과 방패가 아니었다. 창과 창의 싸움이었다.
형태가 있되 끝없는 변형이 가능한 가시. 형태가 없되 무엇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되는 그림자.
두 개의 검정이 서로를 찌르고 찌르며 일대를 덮을 것처럼 퍼져 나갔다. 새카만 두루마기와 너울로 덮인 류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하얀 호랑이뿐이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가시가 흐물거리며 녹았다. 그림자가 흩어졌다.
어둠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가시에 꿰뚫린 호랑이와 작은 인영.
“형!”
뛰쳐나가려는 그를 이나연이 붙잡았다. 고개를 붙잡고 앞을 보게 했다.
길드 내 최고의 탱커다운 묵직한 힘이 그의 고개를 고정시켰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는 곧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푸른 불꽃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가시 사이에 둥실거리며 떠 있는 것은 원래 제등에 매달려 있던 작은 집 모양의 등이었다.
등이 푸른 불을 내뱉었다. 등에 장식된 매끄러운 구슬 장식이 푸른 불의 빛을 반사하며 음산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홀린 듯 푸른 불을 보다 이마에 딱밤을 때리는 이나연의 거센 힘에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그제야 생각났다. 류의 불꽃은 애초에 공격형이 아닌 정신 계열 마법을 위한 매개체라는 것이.
길드 내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는 김수혁이 류를 싫어하면서 존경하는 이유였다. 저 푸른 불은 애초에 공격 마법이 아니라 정신 계열 마법이었다.
사라진 환상의 잔해를 보며 생각했다. 그럼 두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런 박상호의 의문을 풀어 주듯 검은 바위 뒤쪽에서 류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늘어지듯 류의 몸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돌아갔다. 도깨비 공주님은 귀신같은 걸음으로 바위에 다가갔다.
비유가 아니었다. 그건 정말 귀신의 걸음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걸음.
소리 하나 없는 한들거리는 몸이 제등을 들었다. 등이 없는 그것을 제등이라 부르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 외에 뭐라 불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중에 떠 있던 등이 다시 한번 푸른 불꽃을 내뱉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그 불의 춤이 예쁘게만 느껴졌다. 검은 가시는 애꿎은 불을 가를 뿐 류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하얀 손이 까만 제등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나무의 단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날카로움이 바위를 찍어 내렸다.
곧바로 가시가 류를 공격했지만, 류는 이미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가시는 미련이라도 남은 듯 일렁거리는 그림자를 계속해서 찔렀다. 살아 있는 대상이 저 공격의 대상이었다면 형체를 잃고 살점 조각밖에 안 남을 공격이었다.
그런 가시의 공격 시야 밖, 바위 바로 옆. 그림자를 타고, 그림자를 감고 튀어나온 집채만 한 호랑이가 앞발을 휘둘렀다.
웬만한 괴물의 이빨보다 단단한 날카로운 발톱이 바위를 갈랐다. 물리 공격이 답이라는 류의 말이 맞았다.
조각조각 난 바위가 반들거리는 안쪽을 내보이며 무너졌다. 뭐든 꿰뚫을 것 같던 가시가 흐물거리더니 불에 녹은 철처럼 형태를 잃었다.
기다란 꼬리로 바위를 휘감듯 주변을 걷던 이호연이 곧이어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새하얀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남자는 평소에 보여 주던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모습이 아니었다.
호랑이라는 본질에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축소된 동공. 나른하지만 그 안에 담긴 흉포함을 감추지 못하는 먹이 사슬 정점의 사냥꾼.
박상호는 막 리블에 들어왔을 때, 길드장님과의 일대일 상담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그 유명한 이호연을 봤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병아리 헌터에게 친절하게 인사해 준 그의 모습을 곱씹고 있었다.
그런 박상호에게 길드장님은 묘한 말을 했다.
‘친절하다고 착한 것은 아니야.’
그 말이,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사회와 도덕이 만들어 낸 교육된 짐승. 스스로 교육받기를 선택한 사냥꾼.
류에게 꼬리를 살랑이며 개냥이처럼 굴던 호랑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바짝 굳어 있는 그와 다르게 다른 리블의 길드원들은 그런 이호연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사나운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모습으로 이호연은 일행에게 돌아왔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냥꾼이라는 뜻의 헌터. 괴물과 직접적으로 싸우는 전직자들에게 붙이는 호칭의 의미가 생각났다. 진짜 사냥꾼이 눈앞에 있었다.
“공주님은요?”
이나연의 질문에 이호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지 하얀 꼬리가 바닥을 탁탁 쳤다.
“원인을 잡으러.”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남자의 입술 사이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
나는 류로 바위를 내리찍는 순간 곧바로 그림자를 타고 이동했다.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빠르게.
그림자 속 시야로 남자가 보였다. 곧바로 그림자 속에서 튀어 나가 후드를 잡아챘다. 후드가 벗겨지고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나비가 담겨 있었다.
화려한 문신이 시선을 먼저 끌었고 그다음에 내 눈길은 끈 건 눈에 띄는 색감들이었다. 애시 브라운 색의 머리. 맑은 하늘색에 라일락 꽃물을 떨어트린 것 같은 눈동자.
왼쪽 눈 바로 아래 검은 나비 문신만큼 화려한 색이었다.
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 정도. 혼혈인가? 남자는 동서양의 미를 한데 합쳐 놓은 미인이었다.
“안녕, 공주님.”
나른한 목소리가 웃음기를 담았다. 휘어지는 눈매가 야살스러웠다.
류의 날카로운 단면이 남자의 목을 찔렀다. 제 목에 흉기가 닿았음에도 남자는 생글생글 웃었다.
이건 또 뭐야.
남자는 겁도 없이 맨손으로 류를 잡았다. 주인을 가리는 무기답게 남자의 손에 푸른 불이 붙었다. 불에 타오르는 제 손을 보면서도 남자는 웃었다.
“놔.”
내 말에 남자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다. 류를 잡고 있던 남자의 오른손은 멀쩡했다. 불에 그을린 옷자락만이 불이 붙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너, 누구야.”
“글쎄. 난 누굴까.”
남자는 양손을 든 상태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런 남자의 행동을 눈으로만 좇았다. 섬섬옥수라는 말이 어울리는 하얀 손이 내 왼뺨을 감쌌다. 체온이 낮았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 아래를 쓸었다. 따끔함이 느껴졌다. 가시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였다.
“그대로 두면 예쁜 얼굴에 흉이 질 거야, 공주님. 나처럼.”
“…….”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눈 색이 참 예뻤다. 보랏빛과 하늘색. 그 둘이 적절히 뒤섞여 마치 새벽 같은 색이었다.
날 마주 보는 눈동자에서 그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나비 문신은 정교하고 섬세했다. 흉터만 아니었다면 더 완벽했을 것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반대였다. 흉터가 문신을 망친 것이 아닌 문신으로 흉터를 가린 것이었다. 가로로 길게 나 있는 흉터가 깊었다. 제 흉터를 훑어보는 나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한번 직접 만나 보고 싶었어. 유명하잖아. 인류의 희망, 지옥도의 영웅.”
남자의 손끝이 상처 난 눈 밑을 꾹 눌렀다. 따끔거림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 하자는 걸까.
“있잖아, 상처도 치료해 줬는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아니.”
“그럼 물어볼게.”
진짜 뭘까, 얘는. 흘겨보는 내 시선에도 남자는 생글생글 잘만 웃었다.
“공주님은, 어디까지 구원할 거야?”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라도 할 것 같은 자세였다. 류를 잡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내 뺨에 올려져 있던 손을 강제로 떼어 내, 내 눈앞으로 끌고 왔다. 하얀빛이 맴돌고 있었다. 역시 힐러군.
“내가 왜 구원해야 하는데? 눈에 보이면 살려는 주지만 굳이 나서서 구원할 생각은 없어.”
빛이 사그라지는 손끝을 보며 말했다.
“정말?”
“난 구원자 같은 게 아냐.”
굳이 따지자면 괴물이지.
나를 포함한 지옥도에서 살아남은 모두가 괴물이다. 누군가를 죽여 음식을 얻고 누군가를 죽여 안전한 보금자리를 얻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주 활짝, 정말 예쁘게도 웃었다.
“너라서 다행이야.”
“뭐가?”
남자가 내게서 떨어졌다. 낭창낭창한 몸짓이 시선을 끌었다. 분위기가 참 특이했다.
“난 이만 가 볼게, 공주님.”
“보내 준다고 안 했는데?”
“그런 것 같네.”
남자의 발은 이미 그림자에 붙잡혀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검은 바위, 네 짓이야?”
“으음. 굳이 따지면 아니? 나는 바위에 작은 장난은 쳤지만, 바위를 거기 둔 건 내가 아닌걸.”
“그럼 왜 나를 방해했어?”
내 물음에 그는 그림자를 보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그리곤 웃었다, 예쁘게.
“그냥?”
“뭐?”
“심심해서?”
예쁘게 웃었다는 말 취소. 저 자식, 힐러 아닐지도 몰라. 어그로가 예술이었다. 전직을 나만 잘못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제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눈 밑의 상처를 치료한 새하얀 빛이 그림자를 덮었다.
“공주님. 우린 상성이 안 맞아. 원래 빛 타입이 악 타입에 이기는 거 몰라? 어릴 때 포X몬 안 봤어?”
“누가 악 타입이야. 그리고 포X몬에 빛 타입은 없거든.”
푸른 불꽃으로 주변을 막았다. 둥근 막을 형상화한 푸른 불을 보면서도 남자의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 있었다.
“말했잖아. 우린 상성이 맞지 않아.”
남자의 손이 불의 장막에 닿았다. 살 익는 소리와 수증기가 감각을 괴롭혔다.
상성이 안 맞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남자의 손끝에서 투명한 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성스러워지는 황금빛을 뿜어내는 물이었다.
뭐야, 저거. 성수야? 아니, 무슨 진짜 판타지도 아니고….
어이없는 마음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너, 무슨 성직자야? 게임도 아니고, 웬 성수?”
“공주님이 그런 말 하니까 진짜 웃기다. 그럼 공주님은 혼자 무협 찍어? 아, 주술사인가?”
남자는 제가 한 말이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웃음이 헤픈 것인지 웃는 낯을 버리지 않았다. 얼굴 근육이 웃는 모습으로 박제된 것 같았다. 류를 던져 힘법사의 정의를 보여 주고 싶을 만큼 약 오르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다가도 다시 멀어졌다.
“아직 우리는 만나면 안 되는 사이야. 공주님한테 잡혀 버렸지만.”
“…….”
“공주님. 내가 충고 하나 할까? 공주님의 전직관을 너무 믿지 마.”
어떻게 하면 잡힐까.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불도 안 되고 그림자도 통하지 않으면.
“허튼짓은 하지 말고.”
“…….”
류를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게 바로 마법사의 육감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를 붙잡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 마치 누군가 내 귓가에 속닥이는 것 같았다. ‘지금은 아니야.’라고.
“공주님. 내 충고는 들은 거지?”
“…애초에, 그리 믿은 적 없어.”
나는 수상쩍었던 시스템 창을 잊은 적 없었다. 전직하던 그때도 지금도. 최소한의 경계심은 항상 갖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현명해, 공주님, 이라고. 그놈에 공주님 소리.
“대답해 줬으니 너도 내 질문에 답해. 넌 누구야?”
“비밀.”
“이름이라도 말해.”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가볍던 얼굴은 성스러운 성자의 얼굴로 변했다. 진중한 목소리로 남자는 느릿느릿 말했다.
“비밀이야.”
저놈은 탱커다.
***
“류!”
나를 발견한 이호연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잠깐 다녀온 사이에 괴물의 습격이 있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뒤쪽에 쌓여 있는 목이 뜯긴 사체를 보다 다정스러운 미소를 짓는 눈앞에 호랑이를 봤다. 피에 흠뻑 젖은 모습이 기사 나기 딱 좋아 보였다.
주세진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변형 게이트 연결 현상 소식을 들은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달려들 거다.
이호연은 기사 나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예의 바르고 친절한 바른 생활 청년의 숨겨진 잔인성’ 같은 제목이려나.
공략 성공을 축하하듯 빛무리를 내뱉는 게이트를 쳐다봤다가 다시 이호연을 봤다. 호랑이는 마냥 기분 좋은지 꼬리만 살랑거렸다.
정체불명의 남자를 잡았는지, 아닌지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
애초에 사과하러 온 거였으니까.
“류?”
두루마기를 벗어 이호연의 머리에 씌워 줬다. 꼭 장옷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어쨌든 피에 흠뻑 젖은 모습은 가려졌다.
“사과. 원래 사과하러 온 거였어. 기절시켜서 미안.”
어색하게 두루마기를 만지작거리던 이호연은 내 말에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약간 발긋해진 눈가로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떴다.
기분 좋아 보이네.
꼬리가 빠르게 파닥거렸다.
“이제 나가요.”
리블의 길드원들을 보며 말했다.
조금 전만 해도 동경심으로 가득했던 박상호는 이호연을 보며 ‘우웩’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교 부리는 호적 메이트를 보는 얼굴이었다.
“소름 돋아.”
“쉿.”
저들끼리 속닥거린 길드원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빛무리를 내뱉는 게이트에 다가간 순간 시스템 창이 뜨지 않았다면 기분 좋게 집에 갔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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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ㄴ⑇#ᅟᅧ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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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저거.
[어서ㅇㅘ]
[새로운 지옥에 온 ㄱᅟᅥᆯ 환ㅇᅟᅧᆼ해.]
[ 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