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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얏! 플리타, 이 녀석! 아빠 머리를 홀랑 다 뽑을 셈이야?”
바로 그때, 플리타의 장난에 헤이번이 너스레를 떨며 괜히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플리타가 겁을 먹기는커녕 까르르 웃었다. 예전 같으면 이보다 사소한 일에도 눈치를 보고 주눅 들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는 외려 배짱 좋게 더욱 짓궂은 장난을 칠 때도 있었다.
그 변화에 새삼 웃음이 나왔다. 로제가 헤이번과 플리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이번이 들었더라면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며 장난스럽게 로제의 코를 잡고 흔들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로제로서는 제가 누리는 이 행복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죽음을 앞에 두었다고 여겼는데, 가혹한 운명이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몸은 기적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치료사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삶을 향한 그녀의 강인한 의지도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힘든 치료 과정을 견딜 수 있도록 매 순간 로제의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그녀를 든든히 받쳐 준 헤이번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웃음을 안겨주는, 사랑스러운 아이 덕분이기도 했고.
로제가 새삼 감격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장이 은색 트레이를 가지고 다가온 것이다.
“새로 만든 디저트를 가져왔습니다.”
하녀장은 삐죽삐죽 이리저리 뻗친 헤이번의 머리를 보고 흠칫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트레이의 뚜껑을 열었다. 따끈따끈 구워낸 파이와 달콤한 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그때였다.
로제가 갑작스럽게 제 입을 틀어막은 것은.
“우욱!”
“로제?”
그리고 아이와 장난을 하던 헤이번이 새파랗게 질린 채 벌떡 일어난 건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 * *
“흠, 아무래도 이건…….”
“으음.”
대공 저의 주치의와 로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머무르는 중인 벨고든의 치료사가 나직한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헤이번이 로제의 손을 꽉 잡고 있다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갑자기 속을 게워내고…….”
“마님의 병세가 악화된 건 아닙니다, 전하.”
헤이번의 초조한 목소리에 일단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주치의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헤이번은 주치의의 말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제가 보는 앞에서 구역질을 하는 로제를 봤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구역질을 하고 속을 게워내는 건가! 상태가 나빠진 거라면…….”
“관계를 가지신 적이 있습니까?”
재차 다그쳐 묻던 헤이번을 향해 치료사가 불쑥 질문했다. 헤이번이 느닷없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침대에 누워 그들을 지켜보던 로제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치료사는 헤이번과 로제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달쯤 전에 잠자리를 같이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대략 그쯤으로 추정이 되는데.”
“……뭐, 뭐라고?”
“커흐흠!”
헤이번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는데, 주치의가 괜히 본인이 민망하여 얼굴이 벌게진 채 헛기침을 했다. 그 바람에 치료사를 쳐다보던 헤이번의 시선이 주치의에게로 옮겨갔다. 주치의는 저를 보는 대공의 시선에 재차 헛기침을 짧게 한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그리고 마님. ……둘째 아기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두, 둘째 아기?”
헤이번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주치의를 보다가 그대로 휙 시선을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그 말을 이해했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헤이번을 보았다.
둘째.
……둘째 아기.
“임신하셨습니다, 마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저…… 정말인가?”
로제가 몸을 일으키며 다시금 물었다. 주치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속에 휘몰아쳤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고개를 돌려 헤이번을 보았다.
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헤이번 역시 그런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재차 주치의와 치료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몸이 나빠진 건 아닌가? 혹시 임신하여 몸에 무리가 간다거나 병이 악화되는 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 여기, 이 사람의 생각도 저와 같고요. 병은 거의 다 나았기 때문에 딱히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마님의 몸이 워낙 가냘프고 연약하신 편이니, 다른 임신부보다는 건강 관리에 더욱 주의를 해야겠지만…….”
“어머나, 세상에!”
마침 물수건과 대야를 가지고 들어오던 베로니카와 하녀장이 그 얘기를 듣고는 환호했다. 집사 역시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문밖에서 기웃거리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름진 눈 가득 눈물을 글썽였다.
“집사 할아버지, 왜 그래요? 뭔데요? 엄마 또 아파요? 응?”
그 와중에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플리타만이 어리둥절하여 집사의 바짓자락을 잡아당겼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향해 손짓을 했다.
“플리타, 이리 오거라.”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거리며 그를 향해 타박타박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헤이번이 냉큼 플리타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로제의 옆에 아이를 앉혀 주었다.
“엄마, 또 아파?”
“아니.”
“근데 왜…….”
플리타는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치의와 치료사를 보는 아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로제가 아플 때마다 그들이 침실에 있었으니, 아이로서는 이번에도 또 엄마가 아픈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이가 훌쩍이며 냉큼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플리타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춘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플리타한테, 동생이 찾아왔어.”
“응?”
“엄마 배 속에…… 아가가 있대. 플리타 동생이.”
“……!”
플리타의 연녹색 눈이 접시처럼 동그래졌다. 아이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고개를 휙 돌려 제 아빠를 보았다. 헤이번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제 입 주변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엄마 배 속에 동생이 있다는구나.”
“……와아.”
아이는 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가 짧게 감탄했다. 그러더니 강아지처럼 엎드려 로제의 배를 뚫어져라 보았다.
“내 동생이 여기, 엄마 배 속에 있어?”
“응.”
“진짜?”
“응. ……기쁘니?”
“당연하지!”
플리타는 다시 자세를 똑바로 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엄마가 있는 애들도 부러웠지만, 동생이 있는 애들도 얼마나 부러웠는데! 이제 나도 다 있어! 엄마도! 동생도!”
우와아, 플리타는 침대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그 바람에 침대가 아이의 뜀박질에 맞추어 흔들렸다. 헤이번은 로제의 속이 다시 뒤집힐까 봐 서둘러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내려놓기 무섭게 아이가 침실 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에, 아이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모두가 그랬다. 헤이번과 로제뿐만 아니라 집사와 하녀장, 베로니카, 그리고 주치의까지.
……딱 한 사람, 벨고든 왕국 출신의 치료사를 제외하고.
“이런 짐승 같은 사내를 봤나.”
치료사는 기뻐하는 헤이번을 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임신 8주 정도로 추정이 되었다. 그렇다는 건, 병이 아직 낫지 않은 아내를 안았다는 의미가 됐다.
“전하.”
치료사가 헤이번을 불렀다. 모두가 기뻐하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 역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치료사가 눈을 찡그린 채 헤이번을 위아래로 보았다. 특히 복부 아래쪽을 중점적으로…….
“왜 그러지?”
“출산할 때까지는 안 됩니다.”
“……?”
“그사이에 병이 완치되어도, 출산할 때까지는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뭐가 안 된다는…….”
“뭐기는 뭐겠습니까. 잠자리죠.”
“……!”
헤이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로제 역시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다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민망한 표정으로 저마다 시선을 돌렸다.
“아니, 아무리 아내가 사랑스럽고 예뻐도 그렇죠. 아픈 이를 붙들고 그 짓을 하고 싶으셨습니까? 따져 보니 시기상으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을 때인 것 같은데.”
치료사는 그 뒤에도 잔소리를 꽤 오랫동안 늘어놓았다. 결국 보다 못한 주치의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침실 밖으로 끌어낼 때까지 말이다.
“커험. 그럼 저희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집사가 하녀장과 베로니카를 데리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침실 안에 남은 사람은 로제와 헤이번, 그리고 방 안을 뛰어다니다가 지쳐서 소파에 드러누워 잠든 플리타뿐이었다.
“……푸훗!”
잠시 침묵이 머무르는 듯싶더니 이내 로제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헤이번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무안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웃지 마.”
“……어쩌면 좋아요. 치료사한테 당신, 완전히 짐승으로 낙인찍힌 것 같은데.”
“짐승이 맞긴 했지. ……그날, 우리 아기가 생긴 거겠지?”
헤이번은 잠시 주저하다가 힐끗 그녀를 보고는 물었다. 로제는 그가 말한 ‘그날’이 언제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제 병에 대하여 헤이번이 알게 되었던 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이 남자가 울었던 날일 것이다.
그날 자신이 그에게 안아 달라고 하였으니…….
그 뒤로는 치료에 전념하였기에 깊은 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러니 그날 말고 다른 날은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당신이 억울하게 짐승이 됐네요.”
로제는 생글생글 웃으며 헤이번에게 말했다. 미안하단 말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짓궂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로제를 품에 끌어안았다.
로제가 언제 장난을 쳤나 싶게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다행이야. 당신이 아픈 게 아니라.”
그녀가 구역질을 하며 속을 게워내는 것을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헤이번에게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이 여자가 세상의 전부였다.
그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로제가 미소를 짓더니 이내 그의 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앞으로 계속 당신 옆에,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갈 거니까.”
“응.”
“플리타에게도, 그리고…… 우리 둘째에게도 정말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
로제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났다. 플리타에게 엄마 노릇을 해 주지 못했던 5년의 시간이 새삼 떠오른 것이다. 헤이번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고는 정수리에 입술을 꾹 눌렀다.
“당신은 이미 좋은 엄마야.”
“……하지만.”
“그리고 좋은 아내이고.”
헤이번은 그녀의 뺨을 감싼 채 저를 바라보는 녹색 눈을 응시했다. 맑은 녹색 눈 안에 제가 담겨 있었다.
기억이 없던 날에도 이 눈동자 안에는 언제나 제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자신과 아이를 놓아버린 적이 없으니까.
“……당신은, 나를 쥐고 있어.”
“……?”
“손가락 하나로도 나를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여자가 당신이라고.”
“뭐예요, 그게.”
로제는 헤이번의 농담 같은 말에 눈물을 짓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목숨까지도.
그는 로제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지만, 한숨 자고 일어나도 괜찮을 듯했다.
저와 로제, 그리고 플리타와…… 배 속의 둘째까지. 우리 네 식구가 함께 꾸는 꿈은 더없이 행복할 테니까.
헤이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리고 커튼 사이로 비치던 햇살이 그들의 곤한 잠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느릿느릿 흘러갔다.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