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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군.”
헤이번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광장에 모여든 인파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알핀 소백작이 냉큼 다가와 곁에 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모여들었다더군요. 지금도 계속 모이고 있는 중이고요.”
“자칫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더욱 전념해야 하네.”
“예, 전하.”
소백작이 그의 명에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뒤쪽에 서 있던 치안대장에게 방금 헤이번이 당부한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사이에 헤이번은 처형대가 설치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먼저 와 있던 포어킨 후작과 다른 귀족들 몇 명이 그를 보고는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대공 전하.”
그는 그들에게 간단히 묵례로 인사를 대신한 뒤, 서늘한 시선으로 처형대 위를 보았다. 두 사람이 비참한 몰골로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헤이번의 시선이 그들 중 더클렌 공작에게로 움직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사이에 살이 빠진 것인지 그가 입고 있는 회색 죄수복이 헐렁했다.
그 틈새로 진물이 흐르는 어깨가 보였다. 짐승만도 못한 죄인을 뜻하는 낙인이 찍힌 자리였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으니 뜨거운 인두로 지진 상처가 덧났으리란 건 너무나 당연했다.
냉랭한 시선으로 공작을 보던 헤이번이 이번에는 그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는 여인, 이자벨라를 보았다. 그녀는 제 아비보다도 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반쯤 찢어져 가슴 윗부분이 드러난 죄수복 차림, 게다가 배설물까지 묻은 건지 몸에서 악취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그녀를 한때 이 나라의 왕비였던 여자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헤이번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이자벨라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정확히 그가 서 있는 방향을 보았다.
“……헤, 헤이번!”
그녀는 헤이번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미친 사람처럼 그를 향해 달려오고자 했다. 물론 처형대의 기둥과 연결된 발목의 족쇄 때문에 얼마 못 가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헤이번!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요!”
이자벨라는 오랫동안 감지 못하여 가닥가닥 뭉친 머리 사이로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그를 향해 간절히 외쳤다. 헤이번은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고는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까지 그를 향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감옥 안에서 물어뜯고 또 물어뜯었는지, 그녀의 손톱은 남아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벌겋게 드러난 손톱 밑의 속살이 저절로 눈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흉했다.
“모, 목숨만 살려줘요. 나는…… 나는 당신 형의 아내잖아요. 리비어스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데.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가, 그가 나를…….”
“…….”
이자벨라의 간절한 말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의 시선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을 본 이자벨라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는 결백해요! 나는 억울해요! 이 모든 건, 내 아버지…… 아니, 저 반역자가 꾸민 일이었어요! 나는, 나는 그저…….”
이용당하였노라. 아비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죄악을 보고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노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던 헤이번조차 헛웃음을 뱉을 정도로, 어이없는 거짓말이었다.
“이자벨라! 네가 어찌, 그런 말을……. 내가 너를 어찌 키웠는데! 너를 왕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는데! 사내에 미친 계집을 왕의 곁에 밀어 넣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결국 그 음탕함을 버리지 못하여 스스로 죄를 지어놓고 이제 와서 누구에게 덮어씌우려는 게냐!”
더클렌 공작이 숱 없는 백발을 흔들며 제 딸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에 맞서 이자벨라가 모든 게 그의 탓이라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죽음을 앞두고, 두 사람 모두 미쳐 날뛰는 모습이 흡사 짐승 같았다.
그렇듯 오만하게 세상 모두를 낮추어 보던 자들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추악하고 천하게 굴었다.
“우우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군중에게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빨리 사형을 집행하라 외치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
그 소란 속에서 헤이번은 홀로 침묵을 지켰다.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고, 그들을 저주하거나 비난하는 말도 퍼붓지 않았다. 그저 공작 부녀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무심한 시선으로 지켜보았을 뿐.
저를 향하여 이자벨라가 내뱉는 말도, 공작의 원한 가득한 시선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억울하게 죽은 선왕을 대신하여 복수를 했다는 후련함조차 없었다.
그들에 대한 원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들을 향한 증오를 접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존재가 그에게 딱히 의미가 되지 않아서였다. 제 삶에 티끌만큼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였다.
그저 그뿐이었다.
헤이번은 처형 집행인이 환호하는 군중 앞에 서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통을 흔들어 보이는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십니까, 전하?”
“그래야지.”
알핀 소백작이 건넨 말에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사방에 진동하는 짙은 피비린내와 광기 어린 군중의 환호,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안온한 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소백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마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화창했다.
* * *
“전하.”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집사가 그를 맞이했다. 헤이번은 걸음을 옮기며 늘 그랬듯 같은 질문을 꺼냈다.
“로제와 플리타는?”
“정원에 계십니다.”
“……정원?”
헤이번이 집사의 대답을 듣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날씨가 아직 쌀쌀한데.”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혀를 찼다. 하지만 집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설령 못마땅한 기색을 보인다 해도 그건 전적으로 아내와 딸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정원으로 가시겠습니까, 전하?”
“음…….”
집사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헤이번에게 물었다. 그리고 헤이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으로 다시 나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제자리에 섰다.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집사가 눈을 크게 떴다.
“……목욕부터 하지.”
“아……. 예,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집사는 헤이번의 말에 숨겨진 속내를 알아차렸다. 그가 지금 어디에 다녀왔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클렌 공작과 이자벨라의 처형을 참관하기 위해 외출했던 것이 아니던가.
직접 그들의 목숨을 거두고 피를 묻힌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죽는 현장에 다녀왔으니 그 상태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보는 게 꺼림칙할 터였다.
“……야닉?”
그 모습이 흐뭇하여 저도 모르게 너무 오랫동안 본 모양이었다. 헤이번이 그런 집사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허험!”
집사가 헤이번의 시선에 헛기침을 하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돌아선 늙은 집사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진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 * *
“엄마, 이것 봐! 내가 만든 거야. 예쁘지?”
아이의 웃음소리가 맑게 퍼져 나갔다. 헤이번은 정원으로 들어서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원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로제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웃으며 바라보는 곳에서는 플리타가 한창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봤다면 공녀답지 못한 모습이라며 깜짝 놀랐을 테지만, 로제와 헤이번 둘 다 전혀 개의치 않았다.
“멍멍!”
플리타의 근처에서 땅을 파며 놀던 강아지가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헤이번은 헥헥거리며 제게 매달리는 강아지를 한 손으로 가볍게 안아 들고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헤이번, 이제 왔…….”
그를 보고 반갑게 맞이하던 로제의 녹색 눈이 깜짝 놀란 듯이 동그래졌다.
“……?”
헤이번은 덩달아 눈을 크게 뜨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단 들고 있던 강아지는 내려놓아야겠기에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로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더니 타박하듯 외쳤다.
“목욕하고 온 거예요? 그럼 제대로 말리고 왔어야죠! 머리가 다 젖었잖아요. 날씨가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푸훗.”
그 순간, 헤이번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로제의 눈이 뾰족해졌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하하! 미안. 미안해, 로제. 그런데…… 당신이랑 플리타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야말로 뭐라 하려고 했단 말이야.”
“뭐라고요?”
“날씨가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정원에 나온 거냐, 하고 말이지. ……어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아?”
헤이번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로제를 쳐다보았다. 로제가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당신이 잘못했어요. 젖은 머리로 이렇게 밖에 나오면 어떡해요. 지금 당장 수건도 없는데.”
“괜찮아, 금방 말라.”
헤이번은 로제를 달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플리타가 강아지와 함께 그 광경을 빤히 쳐다보다가 헤이번이 자리에 앉자 냉큼 일어나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아주세요, 아빠.”
“잠깐, 플리타. 손이 흙투성이라 좀 닦아야…….”
로제가 손수건을 꺼내 들고는 아이의 손을 닦으려는 순간, 헤이번이 냉큼 아이를 안아 들어 제 다리 위에 앉혔다. 그 바람에 그가 갈아입은 옷에 자그마한 손자국이 꾹꾹 도장처럼 찍혔다.
“……뭐, 본인이 괜찮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녀는 아이가 흙 묻은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데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아 하는 헤이번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플리타의 손에 머리와 옷이 전부 엉망이 된 헤이번이 그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다녀왔어요?
응.
무언의 인사였다. 직접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충분히 눈빛만으로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헤이번은 플리타를 한쪽 팔로 끌어안은 채 다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제가 그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다정한 온기가 그를 감쌌다.
그래서일까.
더클렌 공작과 이자벨라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가슴속이 갑자기 후련해진 것은.
“……이제, 다 끝났어.”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로제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의 죽음이 남기고 간 가슴속 상처가 깨끗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헤이번의 말대로 상처 가득했던 과거는 이제 끝맺음을 한 셈이었다. 삶을 구성하는 여러 장(章)이 존재한다면, 그중 하나의 장이 지금 이 순간 마무리된 것이었다.
또한, 새롭게 펼쳐질 장에서는 행복할 일만 남아 있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