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32화 (132/134)

132

“전하, 더클렌과 폐비가 저지른 죄 때문에 고뇌하신 줄은 알지만, 그렇다 하여 왕정 자체를 폐지한다니요. 이는 괸터스 왕국 대대로 내려오던 근간을 뒤흔들고 그 뿌리를 뽑는 일입니다. 엄연히 괸터스의 핏줄이신 대공 전하께서 계시는데 어찌…….”

“물론 지금 당장 왕정을 폐지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아마도 내 얘기를 들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후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겠지요.”

고작 왕이 없어지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테고, 그것은 헤이번이 결코 바라는 게 아니었다.

“서서히 바꾸어가자는 겁니다. 누군가의 사욕으로 인하여 내 형님께 벌어진 것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누군가의 탐욕이 이 나라를 뒤흔들고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왕국민의 손에 권력을 양도하고 그들의 손에 의하여 선출된 자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하.”

“나는 통치하지 않는 왕이 될 생각입니다. 대관식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형식상 존재하는, 마지막 왕이 되고자 합니다.”

헤이번은 후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후작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잠시 입만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본 헤이번이 피식 웃은 뒤, 가벼운 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왕이 되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게 꿈이라서요.”

“하하…….”

후작은 그의 농담에 같이 웃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대공비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사교계에 널리 퍼진 상황이었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대공 저에서 퍼져 나간 이야기였다.

헤이번은 굳이 제 아내의 병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수도 내의 유명한 치료사들이 모두 고개를 저으며 절망적으로 말했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분명 치료법이 있을 것이라 믿고 더 널리 사람을 찾고, 치료법을 구하고자 했다. 입에서 입으로 그녀의 병을 널리 알리고, 그 병을 낫게 할 방법을 아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대공 저의 정문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

후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속으로 혀를 찼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대공 저의 주치의뿐만 아니라 왕궁의 궁의들조차 고개를 젓는 마당이었다.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조차 어렵다고 하는 병을 그 누가 낫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후작의 자책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 자신이 선왕비와 동조하여 대공과 대공비를 떨어뜨려 놓지 않았더라면. 저렇듯 서로 좋아하는 젊은 두 남녀가 5년이란 시간을 헤어져 있지 않았어도 될 텐데.

삶의 끝이 보이는 지금, 그 5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애달프겠는가. 그 생각만 하면 후작은 대공과 대공비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늘만 하더라도 왕위 문제에 대한 건의를 위하여 대공 저를 찾기는 했지만, 이들 부부를 볼 걱정에 밤새 잠도 못 자고 꼬박 새웠을 정도였다.

“음, 그럼 저는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왕위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시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요.”

헤이번이 다시금 안경을 쓰고는 조금 전까지 읽던 책을 가리켰다. 약초에 대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책이었다. 아마도 아내를 위하여 공부하는 것일 터.

후작이 다시금 속으로 혀를 차고는 그를 향해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집무실 쪽으로 누군가가 급히 달려오는지 발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음에 후작이 인상을 쓴 것과 동시에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전하!”

예를 갖추지 않고 들어온 자는 페드윈이었다. 그는 후작에게 인사를 할 생각도 못 한 채, 아니, 후작의 존재 자체를 보지도 못한 듯이 곧바로 헤이번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찾았답니다!”

“……뭐?”

“그 병을 치료한 사람이 있답니다! 벨고든 왕국에…… 한 십여 년 전에, 그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페드윈의 말에 헤이번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후작조차 그 굉음에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페드윈에게 다가갔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 그 병에 걸렸다가 나았다고?”

“그렇습니다! 당시 그를 치료했던 자가 마침 이곳에 친척이 있어, 그의 집을 방문하였답니다.”

“……오호. 신께서, 도우시는 거로군. 하늘이 도우시는 게야.”

후작은 생전 찾은 적 없던 신을 입에 담으며 감탄했다. 그러나 헤이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두 손을 꽉 움켜쥐었을 뿐.

“……이곳에 와 있다고?”

헤이번은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린 뒤, 페드윈에게 물었다. 페드윈이 벅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잘했네. 정말 잘했어.”

그는 가까스로 제 호위 기사를 치하한 뒤,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 *

“흐음…….”

“어떤가? 치료할 수 있나?”

헤이번은 치료사가 로제를 살피자마자 급히 물었다. 치료사는 채근하듯 묻는 헤이번을 슬쩍 돌아보더니 미간을 긁적이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오오!”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베로니카가 동시에 감탄하더니 뒤이어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헤이번은 쉽사리 기뻐하지 못하고 다시금 확답을 듣기 위해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뭐, 병이 진행되어 조금 어렵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치료사는 다시금 로제의 몸 상태를 살피고는 대답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 말에 헤이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잡고 있던 로제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로제 역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게 이렇게 정말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치료법이 있을 것이라고는.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플리타가 폴짝폴짝 뛰더니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럼 엄마 이제 안 아파? 아빠, 엄마 이제 다 나아요?”

“그래. ……엄마, 이제 안 아파.”

헤이번의 대답을 들은 아이가 신나서 두 팔을 들고 방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늘 주눅 들어 얌전히 있던 아이가 이제는 뛰어다니기도 잘한다. 로제는 그런 플리타를 보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기뻐하는 아이를 보니까.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제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아이를 보니까.

“그럼 치료는 바로 할 수 있는 건가요?”

하녀장이 감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 부부를 대신해 치료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로제와 헤이번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치료사는 방 안의 시선이 전부 제게 집중되자 당혹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크흠!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일단 치료에 쓰일 약재를 구해야 하고, 아! 그중 일부는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벨고든에서만 자생하는 것들이 있어서…….”

“페드윈.”

“예, 당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헤이번이 치료사의 말을 듣다 말고 페드윈을 호명하자 그가 냉큼 앞으로 나섰다. 치료사는 과할 정도로 저를 쳐다보는 호위 기사의 시선에 재차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간병을 할 사람들에게도 주의할 점을 알려줘야 하고.”

“그건 저희가…….”

“아니, 내가 하지.”

하녀장과 베로니카가 나서려는 순간, 헤이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고용인들을 향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입을 열었다.

“내 아내의 간병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란 건가?”

“아……. 예.”

하녀장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비장하기까지 한 주인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 한 탓이었다.

결코 웃음이 나올 상황은 아니었다. 치료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병을 치료한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침실 안에 있는 이들 모두가 기뻐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희망.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건 희망이 있어서였다.

그 뒤에도 치료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묵묵히 그 얘기를 듣던 주치의가 끼어들어 치료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하기도 하고, 하녀장과 베로니카는 간병 외의 다른 일을 분담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헤이번과 로제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시선을 교환했다.

“당신이 간병을 할 거라고요?”

“응. 당연하지.”

“……왕 노릇도 못 하겠다는 사람이, 간병을 한다고요?”

로제가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그러자 헤이번이 흠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후작이 당신한테 앓는 소리라도 했나 보지?”

그렇게 로제를 보는 것을 죄스러워하더니 말이다. 치료법을 찾아냈다고 하니 그 죄책감을 조금 덜어낸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날 자신이 ‘왕정 폐지’를 말했던 게 꽤 충격이었든지.

“나, 정말 나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잖아.”

“진짜?”

“응. 만약 이번에 안 되면 또 찾아보자. 당신을 낫게 할 방법이 어딘가에는 있을 테니까.”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로제의 손을 잡은 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그 손등에 입술을 댔다.

“흠흠. ……자, 다들 나갑시다. 나눠야 할 얘기는 나가서 하고.”

그때 집사가 주인 부부를 흘끗 보곤 다른 이들을 전부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플리타조차 뭔가를 눈치챘는지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더니 살금살금 침실을 나섰다.

조용히 문이 닫혔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그들을 위해 모든 이들이 자리를 비켜준 줄도 모른 채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고마워, 로제.”

“뭐가요?”

“살아줘서. 포기하지 않아서.”

당신도, 그리고 우리도 전부 포기하지 않고 붙잡아주어서.

헤이번의 푸른 눈에 그녀가 가득 담겼다. 다갈색 머리를 땋아 내린, 녹색 눈동자의 아가씨가 푸른 눈동자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그렇게.

그는 그녀를 가득 담은 채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는 그녀와 함께 웃을 터였다.

에필로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