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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별다른 일은 없겠지? 선왕비와 더클렌 공작이 저지른 죄에 대한 증거도 찾았고. 선왕 폐하의 친필 편지까지 손에 넣었으니까.’
로제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맞은편 소파에 앉은 플리타를 보았다.
아이는 자그마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공녀님을 침실로 모시고 갈까요?”
로제의 시선이 플리타에게로 향한 것을 알아차린 하녀장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하녀장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늦었으니 그러는 편이 좋겠어.”
“예, 그럼……. 공녀님, 침실로 가시지요. 가서 편히 누워 주무세요.”
“흐응…….”
플리타는 저를 조심스럽게 깨우는 하녀장의 손길에 잠투정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본 로제가 가만히 웃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플리타, 시간이 많이 늦었어. 이만 침실로 가자꾸나. 엄마가 자장가 불러줄게.”
“응? 아니이……. 나 아빠 오면 그때, 흐아암.”
아이는 저절로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버티는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싶었다. 자신이 정신없이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것과 똑같을 터였다.
로제는 플리타에게 침실로 돌아가란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녀장이 따라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차의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유난히 무겁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따스한 차를 마셨는데도 오한은 사라지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온몸이 물을 흠뻑 머금은 이불처럼 축 늘어지려 했다.
‘안 되는데. 헤이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로제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자세를 똑바로 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너무나 긴 하루를 보낸 탓일까.
그녀가 애써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이었다.
“어? 엄마, 코피 나!”
바로 그때,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비던 플리타가 갑자기 그녀를 가리키더니 외쳤다.
“응? 왜 그러는…….”
어째서일까. 맞은편의 아이가 흐릿하게 보였다. 희뿌옇게 변한 시야에 당황한 로제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플리타의 모습은 전혀 선명해지지 않았다.
주르륵.
그 순간, 코 밑으로 뜨끈한 뭔가가 흘러내렸다. 그제야 그녀는 코피가 난다며 외쳤던 아이의 말을 기억해냈다.
로제가 멍한 표정으로 제 코 아래를 손등으로 닦았다. 흐려진 눈으로도 손등에 묻어난 시뻘건 피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하녀장이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
“어머나, 마님! 코피가!”
“……어.”
로제의 코에서 쉴 새 없이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뒤늦게 코피가 나는 걸 막아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 되겠습니다, 마님! 주치의를 불러올게요! 밖에 누구 있니? 베로니카!”
하녀장이 로제의 블라우스가 피로 흠뻑 젖어든 것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 문 쪽으로 향했다. 로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녀장, 나는 괜찮…….”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를 보고 있을 아이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천장과 바닥이 뒤집히는 감각과 함께 그대로 그녀의 몸이 모로 기울었다.
“엄마!”
플리타가 저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아빠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많이 놀랐을 텐데.’
아직은 이래서는 안 되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말하지도 못했고, 이별을 준비하지도 못했다.
로제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플리타를 안아주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놀란 아이를 토닥여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 손을 움직인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암전이 찾아왔다.
꿈 같았던 시간이 어느새 그 끝을 알리고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아직…… 그래도 조금은 남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미 종막이었던 걸까. 의식을 잃은 로제의 눈가를 타고 눈물 한줄기가 뒤늦게 흘러내렸다.
* * *
대공 저 앞에 마차가 멈춰 서자, 헤이번은 마부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서둘러 온 터라 저택 안의 그 누구도 헤이번의 귀가를 알지 못했다.
“앗! 제가 안에 고하도록…….”
“됐어. 그냥 들어가지.”
그는 마부가 저택 안의 하인을 찾으려는 걸 마다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를 기다리고 있을 로제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아이는 자고 있을 테고…….
“……?”
1층 홀을 가로지르려던 헤이번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물론 늦은 시간이니 저택 안이 고요한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 평소와 달랐다.
왕실 기사단과 한바탕 격전을 벌이고 난 뒤라 그럴까. 크게 다친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부상자들이 있으니…….
“전하께서는 언제 돌아오시…….”
바로 그때였다. 왼편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작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이어졌다. 분명 집사와 하녀장의 목소리였다.
“……전하?”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헤이번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헤이번을 먼저 알아본 집사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도착하신 줄 미처 몰랐…….”
“무슨 얘기를 나누던 중인가?”
헤이번은 집사의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물었다. 어째서인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딱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저택 내부의 분위기도 그렇고, 집사와 하녀장의 심각한 표정도 그랬다.
“아, 저…….”
“마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전하.”
집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하녀장이 냉큼 헤이번에게 알렸다. 그는 집사를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하녀장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방금 뭐라고 했지? 누가 쓰러졌다고?”
“마님께서 좀 전에 쓰러지셨습니다. 갑자기 코피를 많이 흘리시더니 그대로 혼절하셔서, 지금은 주치의가 마님의 상태를 살피고 있…….”
헤이번은 하녀장의 말을 다 듣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집사와 하녀장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곧 그와 그들의 거리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두세 계단씩 한 번에 뛰어 올라간 탓이었다.
‘대체 로제가 왜!’
그는 침실까지 달리다시피 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핏기 없이 창백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왕궁으로 떠나기 직전,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진 것 같던 모습도.
‘로제가 괜찮다고 했어도 주치의에게 보였어야 했는데…….’
헤이번은 제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침실 앞까지 달려가 형식적인 노크조차 할 새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앗! 누구, 전하!”
주치의가 로제의 몸 상태를 살피다가 깜짝 놀라 시선을 들고는 서둘러 예를 표했다. 헤이번은 그런 주치의의 예를 받아줄 여유조차 없이 침대로 다가왔다.
“아빠아…….”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한 플리타가 침대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다가 헤이번을 보고는 훌쩍거렸다. 그는 로제에게 바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아이를 간신히 달랜 뒤, 주치의를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로제가 왜 쓰러진 거지? 지금 상태는 괜찮나?”
“……저, 그게.”
주치의는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그사이에 헤이번의 뒤를 따라온 집사와 하녀장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이 침대 가까이 다가오기 전, 헤이번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모두, 잠시 나가 있도록. 플리타도 이만 침실로 돌아가 자는 게 좋겠구나.”
“히잉, 여기 있을래요. 엄마 옆에.”
플리타가 헤이번의 말에 울먹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헤이번은 굳은 표정을 억지로 푼 뒤, 아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미 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니? 엄마가 늦게 자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네에.”
플리타는 헤이번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이 역시 그의 손가락을 꽉 쥐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 말을 들어야지. 늦게까지 이렇게 안 자고 있는 거 보면, 엄마가 얼마나 속상하겠어.”
“그치마안…… 엄마 잘 때 지켜줘야 되는데.”
아이는 입을 내민 채 머뭇거렸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차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 밤만 아빠한테 기회를 줄래? 아빠 없는 동안, 플리타가 엄마 지켜줬잖아. 그러니까 밤에는 아빠가 엄마 지킬게.”
“……우웅, 네.”
아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허락했다. 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 인형들은 여기 둘래요. 아빠랑 같이 엄마 지키라고.”
“인형? 아아…… 그렇구나.”
정신이 없어서 미처 보지 못했다. 헤이번은 로제가 누워 있는 침대에 아이의 인형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로제가 만들어준 헝겊 인형들도 전부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인형 있으면 무서운 꿈도 안 꿔요.”
“그럼 너는 어쩌려고? 인형 없이 잘 수 있니?”
“……으응. 난 이제 다 컸어요.”
플리타는 멈칫하다가 이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인형을 가지고 가고 싶은지 손가락을 꼬물거렸지만, 곧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헤이번이 미소를 지은 뒤, 다리를 펴고 일어서 하녀장을 쳐다보았다. 하녀장이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플리타에게 다가왔다.
“그럼 공녀님 가시지요.”
플리타가 하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로 다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고는 잠들어 있는 로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엄마, 잘 자. 내일 봐.”
제 인사에도 불구하고 대답 없는 로제의 모습에 잠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는 곧 씩씩한 모습으로 하녀장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집사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이제 말해 보게. 로제의 상태가 어떻지?”
헤이번은 주치의와 단둘이 남게 되자 그제야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치의가 한숨처럼 숨을 내쉬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병이라니? 아, 정기적으로 약을 사다가 먹는 걸 보기는 했네. 소화가 잘 안 돼서 그렇다고도 했고……. 저번에 코피를 흘렸다고도 들었는데. 혹시 그것과 관련된 병인가? 아까 흉통을 호소했던 것도 역시 관련이 있나?”
헤이번이 기억을 더듬으며 주치의에게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주치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망설임에 어쩐지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아니, 불안감이라고 해야 할까. 주치의의 입에서는 그저 ‘병’을 앓고 있었단 말이 나온 것뿐인데.
마치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하는 것처럼.
아니, 주치의의 입에서 나올 말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머리로는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는데, 본능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