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28화 (128/134)

128

“뭐라고요?”

“그게, 무슨…….”

귀족들이 저마다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공작이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피해망상증이라 해야 할지……. 폐하께서는 누군가가 폐하를 해치려 들 거라며 주변을 경계하셨습니다. 심할 때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밤새도록 두려움에 떠셨지요.”

“그게…… 사실입니까?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일인데.”

“사실입니다. 선왕 폐하의 망상증을 감추기 위하여 선왕비전하께서 마음고생을 참 많이 하셨지요. 안 그렇습니까, 선왕비전하?”

“예? 아, 아아……. 그랬지요.”

이자벨라가 제 아비의 말에 당황하여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이내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듯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증세가 점점 심해지셔서, 말을 타시면 안 된다, 위험하다, 그리 충언을 드렸는데 결국…… 낙마 사고로…….”

“아니지요. 폐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낙마는, 사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이자벨라의 말을 듣던 공작이 황급히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그 낙마 사고를 일으킨 범인이 그라는 것처럼.

헤이번은 묵묵히 그들 부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임기응변이 참 대단하군. 그나저나…… 지금, 선왕 폐하를 광인으로 몰고 가려는 건가?”

“몰고 가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일세. 선왕 폐하께서 정신 이상으로 진료를 받은 기록을 공개할 수도 있어!”

공작이 헤이번의 비웃음을 반박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헤이번은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가 아니라 조작이겠지. 그까짓 거, 금세 사람을 매수해 조작하면 그만이니까. 더클렌 공작, 당신이 지금껏 해 왔던 여러 일들처럼 말이야.”

“말이 심하군. 그럼 대공은 그 편지가 진실이란 증거가 있나? 고작 글 몇 줄 적힌 편지가 선왕 폐하의 것이 맞는지 증명할 수 있냔 말이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편지가 나와 선왕비전하, 그리고 우리 가문이 선왕 폐하를 암살한 증거라 말할 수 있다고 보나? 그저 개인적인 망상을 기록한 것을 가지고?”

“…….”

더클렌 공작의 말에 헤이번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택했다. 그러자 공작이 비릿하게 웃었다. 잠시 당황해하던 선왕비도 평정을 되찾고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의 침묵은 길어졌다. 또 다른 반박을 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헤이번을 본 귀족들이 다시금 웅성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공작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기사들을 향해 명을 내리려는 순간, 홀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헤이번의 호위 기사인 페드윈, 그리고 알핀 소백작이었다.

“전하.”

헤이번이 저를 부르는 소백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다른 이들의 시선 역시 알핀 소백작에게 집중되었다. 소백작은 평소 능청스럽던 모습이 아닌 진지한 모습으로 헤이번에게 뭔가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쉴라트 자작과 더클렌 공작 간의 거래 문서를 확보했습니다. 이게 그 문서입니다.”

“……!”

예상치 못한 말에 더클렌 공작의 얼굴이 변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한 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에 이어진 소백작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또한 자작이 그날 사냥터에 일꾼으로 위장한 자들을 몇 명 집어넣었다는 증언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왕 폐하를 암습한 것을 본 목격자도 찾아냈습니다.”

소백작이 말을 잇다가 중간에 참담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헤이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공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증거가 있다는군.”

그는 두 눈을 부릅뜬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작이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와 동시에 워런 포어킨 후작이 침묵을 깨고 분노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뭘 하는가! 저 반역자, 테오르반 더클렌을 당장 체포하라!”

헤이번을 향해 무기를 들이대고 있던 자들이 혼란스러운 듯 허둥대다가 뒤늦게 더클렌 공작을 향해 검과 창을 들이밀었다. 경악에 찬 고함 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공작을 체포하는 일을 포어킨 후작에게 맡긴 뒤, 이자벨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그를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헤, 헤이……. 꺄악!”

어느새 선왕비의 근처로 다가간 페드윈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제압했다. 그러고는 헤이번을 향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곧 귀가하셔야 할 텐데, 손을 더럽히시면 안 되죠.”

“과연 나의 충직한 호위 기사로군.”

헤이번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고는 페드윈의 손에 짓눌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한 이자벨라를 내려다보았다.

“헤이번, 제 얘기 좀 들어봐요. 그게 아버지가 시킨, 아니, 전부 다 오해…….”

“이자벨라 더클렌.”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몸만 살짝 숙였다. 제 이름을 부르는 헤이번의 목소리에 이자벨라가 끙끙대며 어떻게든 고개를 들려 했다. 하지만 뒷머리를 누르고 있는 페드윈에게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헤, 헤이번……. 이러지 말아요. 저는 당신 형의 아내였어요. 리비어스가 저를 얼마나…….”

“입 다물어.”

헤이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더러운 입에 리비어스를 다시 한번 담았다가는 혀부터 잘라주지.”

“헤…… 헤이번!”

잔인한 말에 이자벨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허사였다. 헤이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 손으로 이 여자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제 형의 복수를 대신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이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내가 아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당신이거든요.」

로제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복수를 하자고 제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힐 수는 없었다.

법대로 처벌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왕을 시해한 죄인이니 사형을 면할 수는 없을 터.

그것이 제 형을 위해서도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그의 억울한 죽음에 다른 사적인 복수가 개입되어서는 안 될 테니까.

헤이번은 이자벨라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공작도 체포되어 홀 한쪽에 무릎 꿇린 상태였다. 그는 포어킨 후작을 향해 다가갔다.

“더클렌가에 기사단을 보냈습니까?”

“물론입니다, 전하. 이제 명분은 선왕비와 더클렌 공작이 아닌, 전하께 있습니다. 괸터스의 모든 검이 전하의 명에 따를 것입니다. ……제가 너무 미련하여, 이제야 알았습니다. 송구합니다.”

후작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헤이번이 늙은 후작을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저 두 사람을 왕궁 지하 감옥에 투옥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 오늘은 여기서 일단 마무리를 짓지요.”

“예, 전하. 명에 따르겠습니다.”

후작이 헤이번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미 헤이번을 왕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런 후작을 보던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귀족들이 흠칫 떨더니 저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이득인가 계산만 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헤이번은 냉소를 머금은 채 홀의 출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제 아내와 아이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으니, 안심하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이제, 그저 행복하기만 하자고.

* * *

“……마님,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이러다가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마님께서 쓰러지실까 염려됩니다.”

로제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가다가 문득 들려온 하녀장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자신이 부산스럽게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신경 써 줘서 고맙네.”

하녀장에게 인사를 건네는 로제의 얼굴이 파리했다. 모든 일이 다 완벽하게 마무리된 건 아니지만, 일단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한데도 그녀의 안색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헤이번에 대한 걱정을 하느라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하녀장이 근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런 로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금 염려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니 일단 소파에 앉아서 쉬시지요. 마님의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주치의를 불러…….”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되네. 아까도 말했지만 주치의를 부를 필요 없어. 그냥…… 마음이 불안해서 그럴 뿐이야. 헤이번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믿는 것과 별개로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그녀는 하녀장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아 쉬라는 말마저 거절했다가 자칫 주치의를 또 불러올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푹신한 소파에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편하지는 않았다. 왕궁에 간 헤이번에 대한 걱정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탓도 있었다. 비밀 통로에서 나온 직후 느꼈던 통증이 가라앉은 대신, 으슬으슬 오한이 찾아든 것이다.

로제는 뼛속까지 시린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겸 하녀장에게 차를 부탁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주겠나?”

“예, 마님.”

하녀장이 냉큼 다가와 찻주전자를 들었다. 로제의 앞에 놓인 찻잔에 금세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그녀는 하녀장에게 고맙단 의미로 눈인사를 건넨 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그러나 어째서인지 로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마신 차를 보았다. 분명 자신이 종종 마시던 차가 맞았다.

‘그런데 왜…….’

“왜 그러시는지요, 마님?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다른 차를 올릴까요?”

“아니, 괜찮네. 이걸로 됐어.”

로제는 하녀장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차를 마셨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

그녀는 한 번 더 마셨는데도 여전히 맹물처럼 느껴지는 걸 확인한 뒤, 미간을 모았다.

‘헤이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입맛이 사라진 걸까.’

로제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차를 음미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