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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권, 반역.
그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나머지 귀족들은 대공의 반대편에 서고자 했다. 자칫 반역이란 이름에 휩쓸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모조리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역사 속에서 숱하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중에는 진짜로 반역을 꾀한 자도 있지만, 아닌 자도 많았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반역은 역사 속에 진실로 기록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러해야 할 터였다.
“다들 조용히 하시오.”
더클렌 공작이 입을 열자 신나게 떠들어대던 귀족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공작은 그런 귀족들을 느릿하게 훑어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선왕비전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소?”
“아! 그렇습니다! 이자벨, 흠흠, 선왕비전하의 말씀부터 들어야지요!”
왕실의 방계인 데자크 괸터스가 냉큼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은 마치 실수인 양 이자벨라의 이름을 입에 담은 데자크를 향해 피식 웃었다.
‘이자벨라가 몇 번 만나주었더니 눈앞에 왕위가 어른거리나 보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자리에서 제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낸 적도 없는 자인데 말이다. 공작은 턱을 슬쩍 매만지다가 고개를 돌려 제 딸을 쳐다보았다.
“선왕비전하,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이자벨라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아비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다. 붉은 와인이 유리 잔 안에서 출렁였다.
그녀와 그녀의 아비가 벌인 계획 아래에 흘러간 핏물처럼.
하지만 아직 더 많은 피가 필요했다. 헤이번 괸터스, 그 남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당연히 그를 처단해야지요.”
이자벨라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고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내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입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었고, 한때는 그를 내 남편이 남기고 간 왕의 자리에 앉히고자 했지만……. 그가 스스로 결백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나는 그와 단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며 살 수 없어요. 그것이 리비어스, 죽은 내 남편이 바라는 바일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추모식에서조차 죽은 남편에 대한 예우를 갖추지 않았던 그녀가 내보이기에는 과한 슬픔이고, 꾸며낸 비통함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대공의 결백을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더클렌 공작의 눈치를 살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데자크 괸터스가 다시금 과장된 몸짓과 함께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헐레벌떡 달려오는 발소리가 그 분위기를 깼다.
“서, 선왕비전하!”
왕궁의 홀 안으로 뛰어 들어온 자는 밖을 지키던 시종들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냐.”
이자벨라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시종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뭔가를 두 손으로 받쳐 그녀에게 올렸다.
“대공 저에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서신?”
“그 무도한 짓을 저질러 놓고 서신이라니! 허허, 참!”
누군가가 선왕비와 공작에게 잘 보일 심산으로 크게 외쳤다. 이자벨라는 싸늘한 시선으로 시종이 내민 것을 쏘아보다가 손을 뻗었다.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봉투를 찢었다. 나이프를 사용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조급한 행동이었다. 공작이 그런 딸을 보고는 혀를 찼다.
대공을 죽이겠노라 이를 갈더니 또다시 저렇듯 집착하는 꼴이라…….
‘이번 기회에 확실히 없애야 해. 어떤 식으로든 계속 방해가 될 놈이야.’
공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봉투를 찢어 안에 든 서신을 읽던 이자벨라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이게, 무슨…….”
“……왜 그러십니까, 선왕비전하?”
이자벨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을 본 공작이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들의 예상을 벗어난 뭔가가 쓰여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선왕비에 대한 예를 잊은 사람처럼 이자벨라에게서 서신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편…… 편지라니.”
공작의 잇새에서 알 수 없는 말이 새어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니 그들로서는 눈짓을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그때, 또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귀족 하나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 대공! 포어킨 후작!”
선왕을 죽였다 하여 왕실 기사단이 체포하러 갔던 남자가 너무나 당당히 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워런 포어킨 후작이 따르고 있었다. 왕실에 그보다 더 충성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맹목적인 후작이, 선왕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헤이번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이자벨라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금안이 심하게 일렁였다. 그에 비하여 헤이번의 푸른 눈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바다처럼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 속 깊은 심해에는 거대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제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여자에 대한 분노였다. 또한 제 아내와 아이를 위협하려 하는 적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당장 저자를 체포해! 어서! 선왕 폐하를 죽인 반역자다!”
이자벨라가 날카롭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홀 안에 있던 경비병들과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창과 검을 들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저를 향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서신을 먼저 보냈는데, 아직 받아보지 못하였나 봅니다. 아직까지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뭐, 뭐라고요? 헤이번, 당신…….”
“선왕비전하께 그 무슨 막말입니까! 아니, 무도한 죄인에게 예를 갖출 필요도 없겠지. 어서 체포하지 않고 뭘 하는 거냐!”
이자벨라가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공작이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헤이번이 그 말에 피식 웃더니 공작의 손에 들려 있는 서신을 가리켰다.
“이제 보니 더클렌 공작, 당신 손에 있었군. 그럼 내가 왜 찾아왔는지 잘 알 텐데.”
“그 입 다물…….”
“나 또한 무도한 죄인에게 예를 갖출 필요가 없겠지. 내 형을, 이 나라의 국왕 폐하를 사고로 위장하여 죽인 너희에게 말이지.”
헤이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단 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검조차 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를 에워싼 기사와 경비병들이 검과 창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압할 자는 찾을 수 없었다.
헤이번 괸터스, 그 자체가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선왕비와 더클렌 공작을 겨누고 있었다.
“이익! 어서, 저자를…….”
“마침 모두 모여 있으니 잘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 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 터라.”
헤이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족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대 회의라니.
그것은 보통 정례적으로 열리는 귀족 회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라가 급박한 위기에 당면하였거나 엄중히 살펴야 할 사안이 있을 때 열리는 회의였다.
그렇기에 수십 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한 것이 바로 그 대 회의였다.
그런데 대 회의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니.
“그럼 저 서신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공작의 손에 들린 서신에 집중되었다.
대체 그 서신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기에 대 회의를 요청한 것인지, 그들은 묻고 싶어 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공, 개인의 죄를 덮기 위한 용도로 대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다니. 정녕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죽은 선왕 폐하께 죄스럽…….”
“선왕 폐하께 죄스럽다, 글쎄, 그건 내가 공작과 선왕비…… 아니, 당신의 딸에게 묻고 싶은 건데.”
더 이상 이자벨라는 선왕비가 아니었다. 남편을 죽인 게 확실해진 이상, 그는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제 형과 엮어서 부르고 싶지 않았다. 경멸과 혐오 어린 시선을 눈치챈 이자벨라가 발끈하여 입을 열었다.
“무엄합니다, 대공! 나는 선왕 폐하의 아내예요! 선왕 폐하께서 살아 계실 적에 나를 어찌 대하셨는지 잊었습니까? 그분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지. 처음에는 그저 정략결혼이었을지 몰라도, 내 형님은 아내인 당신에게 충실한 남편이고자 했고, 당신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자 했어. 그건 누구보다도 동생이었던 내가 잘 알아.”
헤이번은 목구멍이 꽉 잠겨 나오지 않으려는 소리를 억지로 내뱉었다. 제 형이 남긴 편지를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로제가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정신이 나간 채 검을 들고 왕궁으로 무작정 쳐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막연히 의심하던 것과 형이 남긴 편지를 통해 확인한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본인이 죽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덤덤히 제게 조심하라는 편지를 남겼을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니기를. 자신이 아내를 오해한 것이기를. 그래서 이 편지가 동생의 손에 들어가지 않기를.
그는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을까.
하지만 결국 리비어스는 아내의 손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편지는 제 아내를 통하여 자신에게, 이렇게…….
“그렇기에 선왕 폐하께서는 끝까지 당신이 아니기를 바라셨지. 당신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고는 그런 스스로를 탓하고, 이 편지를 쓰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면서.”
헤이번은 제 형이 남긴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공작과 이자벨라의 앞에 들어 보였다.
“여기에 너희가 선왕 폐하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 전부 적혀 있다. 선왕 폐하께서 직접 쓰신 편지에. 설마 폐하의 필체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헤이번이 피식거리며 꺼낸 말에 사방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이자벨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가 들어 보인 편지를 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분명 제 남편의 필적이었다.
‘대체 저걸 언제 써서 헤이번한테 준 거야!’
죽은 남편에게 원망이 일었다. 하여간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는 자였다.
‘내가 죽일 거라고 예상했으면 그냥 얌전히 죽어줄 것이지, 도대체 왜 방해를 하는 거냐고!’
그녀는 죄책감은커녕 너무나 뻔뻔하게 리비어스를 탓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후우.”
그 순간, 공작의 긴 한숨 소리가 이자벨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무나 태연히 한숨을 쉬는 모습에 귀족들이 경악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공작이 그런 귀족들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사실은…… 내가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가려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밝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
느닷없는 공작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헤이번 역시 미간을 모으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공작의 입가에 조롱 같은 미소가 찰나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언제 미소를 지었느냐는 듯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선왕 폐하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