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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24화 (12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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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야 우리가 꼭꼭 숨지.”

일부러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노력 덕분일까. 겁을 먹었던 아이가 다시금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로제는 그런 아이를 향해 말을 이었다.

“게다가 플리타 옆에는 엄마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응! 나 하나도 안 무서워!”

플리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크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제 말을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로제의 손을 잡아끌고 비밀 통로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다 말고 멈춰서 헤이번을 돌아보았다.

“아빠, 그럼 지금부터…….”

“지금부터 백까지 셀 테니까 숨는 거야. 아빠가 찾을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헤이번은 아이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플리타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그래.”

그가 아이를 향해 한 번 더 웃어준 뒤, 시선을 돌려 로제를 보았다. 로제 역시 그를 보고 있었던 터라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헤이번은 로제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뒤,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반대편 벽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일, 이, 삼…….”

숫자를 세는 목소리는 늘 그랬듯 덤덤했다. 그러나 로제는 시선을 내려 헤이번의 주먹 쥔 손을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전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주어 쥐고 있는, 그의 손을.

그녀는 차마 그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페드윈에게 말했다.

“그를…… 꼭 지켜주세요, 페드윈 경.”

“염려 마십시오, 마님. 곧 다시 뵙겠습니다.”

페드윈은 제 오른손을 가슴팍에 대고 예를 표했다. 로제가 그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플리타의 손을 잡고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는 좁기는 하지만, 그래도 로제와 플리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갈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통로 안쪽으로 들어간 그들의 모습이 작아지다가 이내 어둠 속에 사라졌다.

“구십팔, 구십구, ……백.”

그사이에 숫자를 다 센 헤이번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페드윈에게 물었다.

“들어갔나?”

“예, 전하.”

페드윈의 대답을 들은 헤이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쉰 뒤, 몸을 돌렸다. 이미 통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것인지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번의 시선은 비밀 통로 안쪽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그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밖에서 다시금 소란이 일었다. 저를 부르는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아예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있으니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은 통로 저편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천천히 벽을 눌렀다. 조금 전 통로를 열었을 때와 반대로. 그러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본래대로 벽이 닫혔다.

애당초 이곳에 비밀 통로 따위 존재한 적 없다는 듯.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누구도 벽 너머에서 대공비와 공녀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할 터였다.

“그럼, 이제 손님을 맞이하러 가야겠군.”

헤이번은 그제야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알아차렸다는 듯 미간을 모으고 몸을 돌렸다. 페드윈이 냉큼 따라가 문을 열자, 집사와 하녀장이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 문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저를 위하여 일해온 이들이었다.

“……반나절.”

헤이번이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반나절만 버티도록 하게. 할 수 있겠지?”

그의 물음에 집사와 하녀장이 각오를 단단히 한 표정으로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헤이번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집사를 불렀다.

“야닉.”

“예, 전하.”

“내 검을 가지고 오도록.”

“……예.”

집사가 한 박자 늦게 대답한 뒤,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왕실을 향하여 뽑을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검을 뽑아야 할 시간이었다.

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억울하게 죽은 제 혈육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 * *

로제가 플리타와 함께 들어온 비밀 통로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마치 개미굴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여기저기 작은 방들이 많았다. 씩씩한 척 안으로 들어왔지만 조금 겁을 먹었던 플리타조차 우와, 하며 신기해할 정도로 비밀 통로의 구조는 특이했다.

“엄마! 여기는 거울이 많아! 어, 저 방에는 책이 엄청 많아!”

플리타가 방마다 기웃기웃 구경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크게 외치고는 신이 나서 뛰어갔다. 로제가 그런 플리타의 뒤를 따라가 아이의 손을 잡고는 나직하게 물었다.

“플리타, 우리 지금 뭘 하는 거라고 했지?”

“숨바꼭질!”

“그렇지. 아빠가 술래고 우리가 숨어야 해. 그런데 이렇게 막 떠들고 그러면 어떻게 될까?”

“우웅……. 아빠가 금방 찾아낼 거야. 하압!”

플리타는 로제의 질문에 나름대로 눈을 굴리며 생각해 보더니 제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로제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입술에 검지를 가져갔다. 그러자 아이 역시 로제의 흉내를 내며 제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작게 말했다.

“쉬잇.”

“그래. 쉿.”

로제는 플리타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뒤,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아이가 책이 엄청 많다고 외치더니 그 말대로 방 안에는 책으로 가득했다.

딱 봐도 오래된 고서들이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하듯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들. 그 책들이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높은 책장에 빈틈 하나 없이 꽂혀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런데 대체 여기는 어떤 공간이지?’

외부로 통하는 통로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오래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 아니, 그보다는 박물관 같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켜켜이 쌓인 흔적은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어 보였다. 고서들도 전부 좋은 가죽으로 덮여 있고…….

로제가 책장을 둘러보는데, 플리타가 조용히 해야 한다는 걸 깜빡 잊고 다시금 재잘거렸다.

“이거 다 할머니 책인가 봐.”

“……할머니?”

로제는 플리타의 말에 목소리를 낮추어 작게 물었다. 그러자 플리타 역시 아차, 하더니 어깨를 옹송그리고는 나름대로 속삭이는 투로 작게 말을 이었다.

“응, 엄마. 예전에 집사 할아버지가 그랬어. 이 집이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결혼하기 전에 살던 곳이라고. 결혼한 다음에 왕궁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버려졌는데, 할머니가 아빠한테 물려줘서 다시 주인을 찾았대. 그리고 아빠랑 큰아빠가 어릴 때 여기 와서 가끔 놀았다고 했어. 이런 숨바꼭질 공간이 있다는 건 나한테 얘기 안 해 줬지만.”

플리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선왕의 모친, 그러니까 그 전대의 왕비가 혼인 전에 살았던 사저라는 얘기였다. 사적으로는 헤이번의 모친이자 제게는 시어머니가 되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자신이 있는 이곳이 더욱 남달라 보였다. 전대의 왕비가 제 아들에게 알려주었을 공간. 하지만 결코 쓰이지 않기를 바랐을 공간.

이곳에 왔다는 건 즉, 위급한 상황에서 몸을 피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지금 저와 플리타가 그러하듯이.

로제는 책장 한쪽에 기대어 서 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흐윽…….”

문득 속이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버텨야 해.’

로제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목구멍을 역류하여 올라왔던 피가 입 안에 고였다. 비릿한 맛에 다시금 속이 울렁거렸지만 꾹 참고 피를 삼켰다.

긴장한 탓일까. 체온이 평소보다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손과 발이 뻣뻣해져 뜻대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로제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던 손을 주무르며 가까스로 속을 달랜 뒤, 시선을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플리타가 쪼그려 앉아 책을 구경하는 게 보였다. 아이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밖은 결코 그렇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섣불리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헤이번이 말한 대로 그가 자신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게 그녀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헤이번이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사실 이미 그런 상황에 처한 게 맞지 않은가.

왕실 기사단이 저택을 에워싸고 선왕을 죽였다며 누명을 뒤집어씌웠으니.

반역이었다. 또한 패륜이었다. 둘 중 한 가지의 누명만 써도 끔찍한 일인데 그에게는 두 가지가 전부 씌워졌다. 그런데 그런 헤이번의 곁에 있어줄 수가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발목을 붙잡지 않도록 이렇게 숨어 있는 것밖에…….

그것마저도 이런 몸 상태로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아니야.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플리타만큼은 안전하게 지켜야 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약해지려던 마음을 꽉 붙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우웅?”

바로 그때, 플리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로제를 향해 손짓을 했다.

“엄마, 이리 와 봐! 여기 편지 있어!”

“응?”

로제는 플리타의 재촉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바로 아이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눈앞이 어두워지면서 현기증이 찾아든 탓이었다.

“엄마?”

“……응. 엄마, 갈게. 잠깐만.”

아이가 거듭 저를 부르는 소리에 로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어지러운 증세가 가라앉으면서, 어두워졌던 시야도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플리타의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시력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이에게 제 몸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가 쪼그려 앉아 있는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편지라니. 우리 플리타가 뭘 찾아낸 걸까?”

“여기, 이거. 이 책이랑 이 책 사이에 있었어.”

플리타는 로제의 말에 으쓱해진 표정으로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딱 봐도 오래된, 색이 바랜 봉투였다. 로제는 아이에게서 편지 봉투를 받아 들고는 겉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딱히 어떤 인장이 찍혀 있거나 문구가 쓰여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고는 봉투를 돌려 그 뒷면을 보았다. 특별한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무심코 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

그러나 로제의 눈은 금세 커졌다. 봉투의 뒷면 하단에 쓰여 있는 이름 때문이었다.

[헤이번에게]

그에게 쓴 편지였다. 누가 보낸 것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받아야 했던 사람은 헤이번이었다.

그런데 왜 헤이번에게 직접 보내지 않고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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