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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23화 (123/134)

123

“더클렌 쪽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갑자기 뭔가 서두르는 낌새도 보이고, 게다가 선왕비가 데자크 괸터스와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진 것도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그와 혼인 이야기가 오가는 듯합니다.”

“데자크?”

헤이번은 페드윈의 보고를 받으며 서류를 훑어보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웃었다.

데자크 괸터스는 그의 사촌이자 온갖 추문이란 추문은 죄다 끌고 다니는 자였다.

“확실히 급했군. 나라를 말아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지.”

헤이번이 피식거리며 중얼거리고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뜬 채 책상을 두드렸다. 페드윈은 제 주인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침묵하며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헤이번이 다시 시선을 들어 페드윈에게 지시했다.

“알핀 소백작에게 오늘, 적어도 내일까지는 그 일을 마무리 지으라 하게.”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페드윈이 미간을 좁히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나 헤이번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히 받아쳤다.

“촉박한 시간 안에 일을 끝내는 것도 능력이지. 무조건 해내야 한다고 전하게, 페드윈 경.”

“소백작께서 울상을 지으며 저를 붙들고 한참 하소연을 늘어놓겠군요.”

페드윈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헤이번은 투덜대는 페드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듯 불평하고 투덜대면서도 제 할 일을 다 할 거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페드윈도 그렇고, 알핀도 그렇고. 그 외에 제 수하들 모두가 그렇다.

“조금만 더 고생하게. ……선왕 폐하의 억울한 죽음만 밝히면 되니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물론입니다.”

페드윈이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헤이번이 다시 서류를 훑어보다가 깜빡 잊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그리고 포어킨 후작과도 이야기가 되었으니 귀족 회의를…….”

바로 그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무슨 일이지?”

헤이번이 미간을 모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페드윈 역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뒤편에서 창밖을 보더니 다급히 그를 불렀다.

“전하! 저택 밖에 왕실 기사단이…….”

“침착하게, 페드윈 경. 나도 내 눈으로 보고 있어.”

헤이번은 사색이 된 페드윈과 달리 차분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택을 에워싸고 있는 기사단과 그들이 들고 있는 왕실의 깃발을.

“서두르는 낌새가 보인다더니, 이거…… 우리가 한발 늦었는걸.”

“전하, 지금 이렇게 계실 때가 아닙니다.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페드윈이 낭패감에 젖어 헤이번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헤이번은 마치 바깥 풍경을 감상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왕실 기사단장이 저택 정문 앞으로 말을 몰고 와 멈춰 서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선왕비전하의 명을 받고 왔소! 대공께서는 선왕 폐하를 사고로 위장하여 암살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니, 당장 이 문을 열고 왕실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도록 하시오!

“젠장, 역시!”

페드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가 낌새가 수상하다 했더니, 역시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헤이번은 여유로움을 잃지 않은 채 되레 입꼬리를 올렸다.

“본인들이 저지른 죄를 내게 뒤집어씌우겠다, 그거로군. ……오히려 잘됐어. 이쪽에서 먼저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안 그런가, 페드윈 경?”

헤이번이 창밖으로 던졌던 시선을 돌려 페드윈을 보았다. 평정을 잃지 않은 차분한 시선에 페드윈은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혔다.

제 주인은 낭패감에 젖어 있지 않았다. 본래 계획과 어긋난 상황 앞에서도 되레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주인을 믿지 못하여 허둥대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페드윈이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아가는 걸 확인한 헤이번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

페드윈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왕실 기사단을 상대로 버티라는 말은 즉, 왕실에 항거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일을 피하고자 최대한 선왕의 암살에 대한 증거를 모아 귀족 회의에 정식으로 안건을 올리려 했던 것인데…….

그러나 페드윈은 곧 마음을 다잡고는 씩 웃었다. 제 주인이 계획을 변경했으니, 저 또한 그에 따르면 될 일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저런 애송이들을 상대로 뭘 버티기까지 하겠습니까. 반나절이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전하.”

“그런가?”

“물론이죠.”

“그럼 저들이 바라는 대로 반역자가 한 번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헤이번의 푸른 시선이 다시금 창밖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이는 냉혹한 시선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집무실 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를 들은 헤이번이 창가에서 몸을 돌린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헤이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밖에 있는 자들이 대체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발소리의 주인은 로제와 플리타였다. 로제는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 아내와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로제의 손을 맞잡은 채 놀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플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 말대로야. 말도 안 되는 짓을, 더클렌 공작과 선왕비가 저질렀어.”

“그럼…….”

로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에 대한 염려, 그리고 아이에 대한 걱정이 그녀의 시선 속에서 묻어났다.

“걱정하지 마, 로제. 생각보다 저들이 먼저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대처하지 못할 건 아니야.”

공작의 계획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클렌 공작의 주변에 심어 놓은 자들을 통해 그의 행적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선왕비의 독단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헤이번은 지난번에 보았던 선왕비를 떠올렸다. 제 아내를 불러놓고 온갖 모욕을 주었던 그 여자를. 그 여자가 품고 있던 독기를.

아마도 그날 제 행동이 그녀에게 촉발제가 된 듯싶었다.

헤이번은 로제를 보다가 허리를 숙여 그 옆에 있는 플리타와 시선을 맞췄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로제와 헤이번을 번갈아 쳐다보던 아이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로제를 닮은 연녹색 눈동자에 서린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당연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정확한 사정을 몰라도 눈치라는 게 있는 법이다. 더구나 플리타는 무심한 아비를 둔 탓에 일찌감치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법부터 배웠다. 그는 아이를 향한 미안함에 먹먹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른 뒤, 아이에게 다정히 미소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숨바꼭질을 할까?”

“……숨바꼭질요?”

플리타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호기심을 내보였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향해 거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숨바꼭질. 아빠가 술래 할 테니까 엄마랑 너랑 숨는 거야. 어때? 재미있겠지?”

“우움…….”

플리타는 대답 대신 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로제가 입꼬리를 올리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그럴까? 우리 숨바꼭질할까, 플리타? 그러고 보니 플리타랑 아빠랑 엄마랑, 이렇게 셋이 숨바꼭질 처음 해 보는 건데.”

“아빠 바쁜데…….”

플리타가 로제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흔쾌히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헤이번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 바빠.”

“진짜요?”

“응. 여기, 페드윈 경에게 물어봐.”

아이의 연녹색 눈이 페드윈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페드윈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서 오늘은 아주 한가하십니다, 공녀님.”

“정말?”

“그럼요. 공녀님이랑 숨바꼭질하고 놀 시간이 아주 많으세요. 오늘 저녁까지 숨바꼭질을 하셔도 될걸요?”

“우와.”

플리타의 작은 입이 벌어졌다. 저도 모르게 좋아서 나온 아이의 감탄사에 로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기뻐하는 모습과 현재 상황은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다.

“로제.”

그 순간, 헤이번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로제가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약속했잖아. 당신 남편, 약속 어기고 그러는 놈 아니야.”

헤이번은 로제의 눈앞에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을 꺼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

“……바닷가에 소풍 가자던 약속 말이죠?”

“당연하지. 그게 당신 소원인데 내가 꼭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

그는 자신의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겨 풀더니 로제의 손목에 감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떨다가 다시금 고개를 드는 헤이번의 손을 붙들었다.

“무사해야 해요.”

“응.”

떨려 나오는 로제의 목소리에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그녀가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당신, 나랑 한 약속 지켜요. 안 그러면 두고두고 화낼 거야.”

“그래.”

헤이번이 로제의 말에 웃으며 재차 대답했다. 그녀답지 않게 화를 내겠다며 소소한 협박까지 하는,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자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그를 잡았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러고는 제 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을 풀어 방금 그가 제게 해 주었던 것처럼 그의 손목에 묶어 주었다.

“나도! 엄마, 나도 아빠한테 리본!”

그 광경을 지켜보던 플리타가 냉큼 제 머리 리본을 풀더니 이내 낑낑대며 그의 다른 손목에 묶었다.

단정한 갈색 리본. 그리고 알록달록한 리본. 두 리본을 양쪽 손목에 묶으니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헤이번에게는 그것이 그 어떤 갑옷보다도, 방패보다도 더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헤이번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꾹 참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책장 옆의 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무엇을 하나 싶어 로제가 그를 쳐다본 순간, 헤이번이 벽 어딘가를 손끝으로 더듬더니 누르고 또다시 다른 곳을 눌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덜컹, 소리와 함께 벽 아래쪽이 열렸다.

“……!”

로제와 플리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무리 두들겨도 부서질 것 같지 않던 벽 안쪽에 텅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이쪽으로 와, 로제. 플리타 너도.”

“여기는…….”

로제가 플리타의 손을 쥔 채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헤이번이 씩 웃으며 마치 숙녀를 안내하듯 정중히 손을 뻗었다.

“우리의 숨바꼭질, 놀이터.”

벽 너머로 좁은 통로가 보였다.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 어두컴컴한 터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호기심을 보였던 플리타가 덜컥 겁을 먹고는 로제의 드레스 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깜깜해서 무서워.”

로제는 헤이번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려 아이를 보았다. 그러고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몸을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원래 숨바꼭질은 저런 데에서 하는 거야.”

“깜깜한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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