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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22화 (1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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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태생.

로제는 저를 향한 말에도 불구하고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자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은 더없이 침착했다. 그건 이자벨라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수치심으로 얼룩지고, 분노하고, 좌절해야 했다.

이자벨라가 분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때 그 지하실에서 죽였어야 했다. 아니, 납치하자마자 저 얼굴을 전부 찢어놓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헤이번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를 갖기 위해서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자신이 갖지 못한다면 눈앞의 여자도, 그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된다. 이자벨라의 눈이 살기를 머금고 번득인 순간이었다.

“대, 대공 전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던 시녀장이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 소리에 이자벨라를 비롯하여 티타임에 참석한 여인들의 시선이 전부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로제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이번!”

로제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어떤 말에도 동요하지 않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보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돌아보지 못했다. 다들 그녀보다도 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허둥댔으니 말이다.

헤이번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여인들을 보고도 가벼운 묵례조차 건네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당한 귀부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대공께서 여인들의 티타임에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그런 헤이번의 앞을 가로막은 건 이자벨라였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히 그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의 푸른 눈이 이자벨라에게 향했다.

“내 아내가 이곳에 있다고 하여 데리러 왔습니다.”

“아무리 아내에게 푹 빠지셨어도 그렇죠. 여인들끼리 티타임을 즐기는 공간인데, 이렇듯 함부로 들어오셔서야 어디 신사라 할 수 있겠어요? 혼인을 하시더니 참 많이 변하셨네요.”

“글쎄요. 고작 이런 걸 가지고 변했다고 하는 건 좀 과한 표현일 듯싶군요. 냄새나는 오물 처리장에 소중한 이가 있으면 누구든 저처럼 행동할 테니 말입니다.”

“뭐라고요? 오, 오물 처리장?”

너무나 덤덤히 대답한 헤이번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물 처리장’이었다.

이자벨라는 기가 막혀서 입을 벙긋거리다가 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지금 우리를 보고 한 말인가요? 쓰레기 취급한 거예요, 대공?”

그녀의 말에 이어 다른 귀부인들이 술렁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귀족가의 여인이 어디서 이런 험한 말을 들었겠는가. 더구나 대부분의 여인들이 흠모하던 대공에게서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으니 더욱 흥분하는 게 당연했다.

그 소란 속에서 헤이번은 무심한 시선으로 이자벨라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 입에서 더러운 오물을 쏟아내는데, 그걸 보고도 사람으로 취급해야 합니까?”

“뭐요? 오물을 쏟아내?”

“본의 아니게 들었습니다. 당신들이 내 아내에게 쏟아낸 말들.”

헤이번의 푸른 눈이 모든 것을 얼릴 듯 차갑게 식었다. 그 시선이 닿은 여인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시선을 피한 건 아니었다. 머리가 의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마치 맹수를 마주한 초식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이 굳어버려서.

그 속에서 이자벨라만이 간신히 헤이번의 시선을 받아쳤다. 그녀는 손을 꽉 오므려 쥔 채 바들바들 떨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뭐, 없는 말을 지어냈나요? 소문이 그렇더라 한 것뿐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염려하는 마음에 대공비에게 언질을 준 것인데, 그게 이렇게 당신에게서 모욕과 비난을 받을 만큼 잘못한 건지 모르겠네요. 말해 봐요, 헤이번!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

“……뭘 잘못했냐고 물었습니까.”

헤이번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의 분위기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칼날을 두른 것처럼, 그래서 자칫 그 칼날에 베일 것만 같은 압박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로제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데에 동참했던 귀부인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들은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한쪽 구석에 모여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를 대공이 전부 들었단다. 게다가 선왕비를 몰아세우는 것을 보니 대공비에 대한 그의 애정도 진심인 듯하고…….

“어디 한번 말해볼까요. 선왕비께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아니, 당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헤이번의 말을 듣던 이자벨라의 금안이 흔들렸다. 분명 잘못이 아닌 ‘죄’라 했다.

‘아니야. 진정하자. 이 남자는 몰라. 설령 추측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증거가 없잖아.’

선왕의 죽음을 자신이 사고로 꾸며냈다는 증거가.

이자벨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그대로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시녀장이 황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선왕비전하?”

“아……. 아니, 어지럽구나. 조금 쉬어야겠어.”

이자벨라가 시녀장에게 기댄 채 처연한 모습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다시 힘겹게 눈을 뜨는 시늉을 하며 귀부인들에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몸 상태가 좋지 않네요. 오늘 티타임은 여기서 끝내도록 할게요. 나중에 다시 초대할 테니, 양해해 줘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선왕비전하. 몸이 좋지 않으시면 쉬셔야지요. 그, 그럼 저희는 이만…….”

그들도 선왕비가 하는 말이 전부 핑계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 동조하는 것이 지금 이 자리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이란 걸 알기에 냉큼 동조했다.

그러고는 헤이번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하나둘 그렇게 차례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헤이번은 이자벨라가 시녀장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앉는 것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로제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나가지.”

그는 로제의 어깨를 끌어안은 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로제가 머뭇거리며 이자벨라를 향해 예를 표하려 했지만, 그가 재촉하는 바람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헤이번!”

그 모습을 보던 이자벨라가 팔걸이를 움켜쥐고 그를 불렀다. 하지만 헤이번은 저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아악!”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자벨라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시녀장이 미친 듯한 선왕비의 모습에 놀라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이자벨라가 눈을 번득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에게 연락해야겠어.”

“예?”

“……계획을 앞당기자고. 그래, 하나를 죽였는데 둘은 못 죽일까.”

그렇게 그리워하던 형을 보러 가라 해야지. 그 소중한 아내와 아이가 반역자란 이름으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걸 지켜보게 한 뒤, 제일 마지막으로…….

제 혈육을 죽인 범인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이자벨라가 피식거리며 웃다가 이내 깔깔대며 크게 웃었다. 광인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 * *

“헤이번, 여기는 어떻게 온 거예요?”

로제는 선왕비의 궁에서 나오자마자 헤이번의 팔을 잡고 물었다. 헤이번이 제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집사가 사람을 보냈더라고.”

“그럼 당신 모임은 어떻게…….”

혹시 저로 인하여 그가 참석한 모임에 방해가 되었을까 싶어 로제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런 일을 방지하고자 미리 헤이번에게 사람을 보내지 않고 저 홀로 왕궁에 온 것인데 말이다.

“중요한 일은 다 처리했어. 어차피 모임 자체는 연막용이라서.”

“……연막용이라니요?”

로제의 의아한 표정에 헤이번이 가만히 웃은 뒤, 그녀의 어깨를 다시 감싸 안고는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로제는 무슨 얘기냐며 캐묻지 않았다. 그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질문 하나를 던졌을 뿐이다.

“당신이 위험해지는 일이에요?”

“……아니.”

그는 한 박자 늦게 대꾸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약간의 망설임을 로제도 분명 눈치챘을 텐데, 그녀는 그의 말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제 어깨를 감싼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위로하듯. 힘을 내라 응원하듯.

헤이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아마도 로제는 뭔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선왕비가 저지른 죄를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선왕비와 공작을 내치기 위하여 뭔가를 계획하고 있으리라 짐작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무관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제는 저를 염려하고, 또 염려하고 있었다. 제 손등을 가만히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이 식은땀으로 젖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단지, 저를 믿는 것이다.

조금 전 대답에 앞서 망설였는데도. 위험해지는 일이 아니란 말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우리, ……다음에 바닷가로 여행 가자.”

헤이번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기다가 입을 열었다. 로제가 그와 보조를 맞추어 걷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바닷가요?”

“응. 당신 소원이었잖아. 바다 구경하는 거.”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당연하지. 누구 소원인데.”

헤이번의 말에 로제가 가만히 웃었다. 오래전 그에게 바다를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홀로 떠돌아다니면서도 희한하게 바닷가 쪽은 가 보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그냥 무심코 했던 말인데,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지워졌다가 되살아났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이제는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 크지는 않다. 헤이번과 플리타, 그들이 곁에 있는 이상 더 바랄 게 없으니까.

하지만…….

“정말이죠? 약속하는 거예요?”

로제는 그를 돌아보며 다짐을 받았다. 바닷가로 소풍을 가자는 약속은, 그가 무사할 거라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그가 계획하는 모든 일을 끝내고, 어디 한 군데 다치지 않고 무사할 것이라는.

그녀는 조금 전 그의 손등을 감싸 잡았던 제 손의 새끼손가락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헤이번이 로제의 손가락을 가만히 보다가 웃더니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응, 약속해.”

그러고는 어린아이들이 하듯 로제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로제가 그 손을 잠시 보다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조금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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