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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21화 (12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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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라는 과장된 표정과 함께 로제에게 말을 건넸다. 그와 동시에 귀부인들 사이에서 작은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조아려 인사하던 ‘고용인’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로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선왕비전하. 당황스러우실 수 있지요. 제가 대공…… 아니, 헤이번과 혼인하고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자리이니까요.”

“……헤이번? 그를 이름으로 부르나 봐요?”

“예. 그는 제 남편이니까요. 제가 모시는 고용주가 아니라.”

로제는 이자벨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저를 죽이고 싶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가슴속이 선득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에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지하실에서도 그러하였듯이.

빠드득.

그 순간, 이자벨라에게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모두가 침묵한 채 그들의 대치를 구경하고 있던 터라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리고 귀부인들의 시선이 서로 바쁘게 오갔다. 먼저 감정을 드러낸 쪽이 지는 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선왕비의 패배라 할 수 있었다.

이자벨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이내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금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부인을 너무 오랫동안 서 있게 했네요. 이쪽에 앉아요. ……차를 내오려무나.”

시녀에게 지시하는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 선왕비의 눈치를 살피던 귀부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더클렌 공작가의 가신이라 할 수 있는 후벨 백작의 아내였다.

“그나저나 대공비의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신가 보네요.”

“……예?”

로제가 자리에 앉아 제 앞에 찻잔이 놓이는 걸 보다가 후벨 백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백작 부인이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일전에 초대장을 보냈는데 답장도 없어서, 저는 대공비께서 펜조차 들 수 없을 만큼 아프기라도 하신 건가 했거든요.”

“아……. 죄송해요. 제가, 미처 답신을 쓰지 못했네요.”

로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초대장이라니, 아예 보지도 못했다. 제게 초대장이 왔다는 얘기조차 집사나 하녀장에게서 들은 적 없었다.

그렇다면 중간에 헤이번이 차단을 했다는 건데…….

아마도 이런 상황을 맞닥뜨릴 게 뻔하니까 그가 본인의 선에서 초대장을 거절한 모양이었다. 백작 부인의 말을 들으니 거절 정도가 아니라 그냥 무시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일은 나중에 헤이번한테 따로 물어보기로 하고.’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려는 찰나, 또 다른 귀부인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웃음 섞인 투로 말했다.

“설마 글을 몰라서 답장을 못 쓴 건 아니겠죠?”

“어머나, 그럴 리가요. 다른 곳도 아니고 ‘대공 저’의 하녀였던 분인데, 설마 문맹이겠어요? 그건 대공비께 실례예요, 슬랙 자작 부인.”

과장된 투의 말과 함께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제의 편을 들어 주는 것처럼 말을 꺼낸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전부 그녀를 비웃었다.

로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를 향한 모욕적인 언사에 화를 내고 일어서야 할지, 아니면 이렇게 계속 침묵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만약 화를 내고 일어선다면 천박한 성정이라 그렇다며 뒷말이 돌 테고, 이대로 침묵하고 있는다면 그럴 줄 알았다며 조롱이 이어질 터였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가 뜬 뒤,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로제를 가만히 보고 있던 이자벨라가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참, 요즘 흉측한 소문이 돌더군요. 부인께서도 들었나요?”

“……소문이라고요?”

로제는 제게 향한 질문에 이자벨라를 쳐다보았다.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다른 귀부인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그 헛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밤에 잠마저 설쳤지 뭐예요.”

“어머나, 얼마나 흉측한 소문이기에 선왕비전하께서 잠까지 못 주무셨나요?”

조금 전 말을 꺼냈던 슬랙 자작 부인이 냉큼 호기심을 보이며 그 말을 받았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한숨을 내쉬는 척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차마 제 입에 담기도 민망한……. 휴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뜬소문일 뿐이니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겠죠. 안 그래요, 부인?”

“……저와 관련된 소문인가 보군요.”

로제는 이자벨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자벨라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가 내리더니 이내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사교계 최고의 화제가 바로 부인이잖아요. 대공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선왕비와 혼인을 해야 왕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스스로 내버린 헤이번을, 이자벨라가 언급했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 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자벨라가 헤이번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로 집착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죽은 남편의 동생에 대한 태도가 너무 지나치지 않냐는 말마저 귀족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였다.

그러니 이자벨라의 말을 들은 귀부인들이 입을 다물고 그녀의 눈치를 살핀 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빼앗아 간 것이나 다름없는 로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흥미도 일었다.

로제는 저를 향한 시선들 속에서 덤덤히 이자벨라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그가 저를 선택한 것입니다, 선왕비전하.”

“……헤이번, 아니, 대공이 부인을 선택했다고요?”

이자벨라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애써 미소 지으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대단한 자부심이로군요, 부인. 이 나라의 왕위보다 본인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건가요? 대공이 왕관을 버리고 당신을 선택했을 정도로?”

“누군가에게는 왕의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귀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을 듣고, 후회했다. 선왕비의 말에 굴복하여 헤이번이 마시는 차에 약을 탔던 것을. 갓난아기였던 플리타를 제 품에서 떠나보내며 그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 믿었던 것을.

그 바람에 헤이번은 기억을 잃은 채 살아야 했다. 쾌활하고 다정했던 남자가 아닌, 웃음을 잃고 제 아이를 사랑하는 법마저 알지 못하는 남자로 말이다.

그리고 플리타 역시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 채 외롭게 살아야 했다. 다섯 살 어린 나이에 남들의 눈치를 보는 법부터 배우고, 그리움도 외로움도 꾹꾹 눌러 그 조그만 가슴속에 담아두어야 했다.

그들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자신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던 것인지, 요 며칠 동안 생생히 알게 되었다.

헤이번과 플리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렇기에 로제는 더 이상 자신을 낮추고 싶지 않았다. 특히 선왕비의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조금도 보이기 싫었다.

“……하!”

그런 로제의 모습을 보던 이자벨라가 뺨을 실룩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전보다 더 음습한 악의가 깔린, 누구나 그 선명한 악의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참, 그런데 아까 제가 흉측한 소문을 들어 잠을 설쳤다고 했지요? 입에 담기가 좀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부인께서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해야겠네요. 대공도 본인이 선택한 부인 때문에 무슨 소문에 휘말렸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대체 무슨 소문인데 그러시는 건가요?”

로제는 저를 노려보는 이자벨라를 향해 물었다. 그에 이자벨라가 다시 한번 입꼬리를 비틀더니 말을 꺼냈다.

“대공과 결혼한 여자가 공녀의 생모라 하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로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반응을 본 이자벨라가 피식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대공이 공녀의 유모, 그전에는 하녀였던 여자를 부인으로 들이기 위하여 꾸며낸 것이다. 제 자식까지 속이고, 세상 모두를 속이면서까지.”

“그, 그게…….”

기가 막혀 말문마저 막혔다. 로제가 입을 달싹이는 사이에 귀부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 입에 담기에도 불결한 소문이로군요.”

“그러게요. 대체 어디서 어떻게 퍼져 나간 소문인지, 대공의 위명에 큰 오점이 남게 됐어요. ……한낱 여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인지.”

후벨 백작 부인이 들으라는 듯 말하며 부채를 흔들었다. 그러나 로제는 그들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오로지 이자벨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자벨라의 붉은 입술이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방금 하신 그 이야기…… 정말 소문이 맞나요?”

로제는 이자벨라를 쳐다보며 똑바로 물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되물었다.

“소문이 아니면요?”

“……선왕비전하께서 일부러.”

로제가 말을 하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선왕비가 일부러 꺼낸 말이 틀림없었다. 만약 그런 헛소문이 돌았다면 헤이번이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집사나 하녀장에게서 그런 낌새를 눈치챘어야 했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전혀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그것은 거짓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만약 그 소문이 실제로 퍼진다면 그건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될 터였다. 선왕비의 입을 통하여, 그리고 그 말을 전해 들은 귀부인들의 입을 통하여.

“설마 내가 일부러 소문을 지어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이자벨라가 로제의 말에 냉큼 반문했다. 그러자 다른 여인들이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한꺼번에 로제를 비난했다.

“대공비!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당장 선왕비전하께 사죄하세요!”

“그럼요! 선왕비전하께서는 대공비를 위하여 입에 담기도 힘든, 그런 소문까지 전해 주셨는데. 대공비는 어찌하여 그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건가요! 역시 천한 태생은……. 흠흠.”

슬랙 자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모두가 그 말을 들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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