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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게 지금 무슨 꼴이냐. 아비의 앞에서, 사내와 뒹군 흔적을 가득 단 채. 적당히 해라. 이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소문이 나면 어때서요? 그래도 왕위를 탐내는 사내들은 내 발이라도 핥으려 할 텐데.”
이자벨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거리며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흐트러진 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공작이 거듭 혀를 찼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녀장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머리를 맡겼다.
시녀장이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끄응.”
공작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요 며칠 그녀의 행동이 더욱 거리낌 없어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헤이번의 혼인 소식이 사교계 전반에 퍼지고 난 뒤의 일이었다.
‘화를 풀 데가 마땅하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풀려는 것 같은데.’
공작은 제 딸의 방종한 행태를 더 지적하느니 그냥 외면하기로 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 말이다.
눈엣가시였던 대공을 제거하고, 이 왕국을 더클렌의 손에 거머쥐는 것.
그를 위해서라면 딸의 천박한 행동 따위야 자신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어쨌든 조심하거라. 괜한 짓 하지 말고.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당부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듣는 둥 마는 둥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모습에 공작이 다시금 혀를 차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아무리 부녀 사이라고는 하지만 선왕비에게 할 법한 예는 아니었다.
“흥.”
이자벨라가 그런 아비의 모습에 시선도 주지 않고 콧방귀를 뀌더니 시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티 파티가 있던가?”
“예, 선왕비전하. 오늘 오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시녀장이 이자벨라의 물음에 냉큼 대답했다. 이자벨라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궁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비슷한 시간에 왕실 모임이 있다고 했지? 남자들 모임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그럼…… 헤이번도 그 모임에 참석하느라 집을 비우겠네?”
이자벨라의 눈이 번득였다. 그녀의 아비가 괜한 짓 하지 말라던 말을 금세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 * *
“나는 해적왕 토끼다! 약한 여자를 괴롭히다니, 내 검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플리타는 로제가 만들어준 헝겊 인형을 들고 용감하게 말했다. 로제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해적왕’이 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악당들을 처단한다니.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용감하고 정의로운 해적왕도 어딘가에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아이의 상상력에 그 어떤 방해되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플리타의 소꿉놀이에 맞장구를 쳐 주던 중의 일이었다. 노크 소리가 나더니 하녀장이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
평소 덤덤하던 하녀장의 안색이 변할 일이 뭔가 싶어 로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하녀장이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마님, 왕궁에서 마차가 왔습니다.”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로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하녀장의 뒤를 따라온 것인지 집사가 은쟁반을 든 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왕비전하께서 티타임에 초대하신다고, 여기 초대장까지 보내셨습니다.”
로제는 집사의 말을 들으며 손을 뻗어 은쟁반 위에 놓인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초대장은 왕실의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추스르며 초대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초대장에 적힌 날짜를 본 로제의 녹색 눈이 흔들렸다.
바로 오늘 오후의 티타임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식으로 초대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신이 왕실이나 귀족가의 예법에 정통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대공 저에서 일하며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초대장을 보내 그 일정을 미리 확인하고 의향을 묻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였다. 그런데 선왕비는 느닷없이 당일에 초대를 한 것이다.
더구나…….
“……마차가 왔다고 했나?”
“예. 마님을 왕궁까지 모셔 가겠다고.”
하녀장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리웠다. 집사 또한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는 로제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님?”
“……아닐세.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다고 하셨어. 내가 이런 일로 방해할 수는 없지.”
로제는 집사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은 뒤,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 순간 드레스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인형을 품에 안은 플리타가 다른 손으로 로제의 드레스를 잡아당기며 걱정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플리타가 걱정하지 않도록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는 아이를 향해 몸을 숙였다.
“어쩌지, 플리타? 엄마가 오늘 종일 놀아준다고 했던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큰엄마가 불러서?”
“응.”
플리타는 영특했다. 그렇기에 하녀장과 집사가 한 이야기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는 로제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떼를 쓰는 대신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울한 표정의 아이를 토닥이던 로제가 한숨을 삼켰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왕궁에서 보낸 초대장이든 뭐든 다 거절하고 싶었다. 제게 남은 시간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하지만 왕궁에서 마차까지 직접 보냈는데 그것을 거절하면 그야말로 큰 무례가 될 터였다. 그러니 로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마도 선왕비도 그 점을 노리고 일부러 마차를 보낸 것 같지만 말이다.
‘대체 왜 갑자기…….’
로제는 선왕비를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적의 어린 시선으로 저를 보던 그녀의 금안이 생생히 떠올랐다. 좋지 않은 인연이었다. 차라리 악연이라 하는 편이 나았다.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더구나 헤이번의 혈육을 죽인 여자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쉰 뒤, 하녀장을 돌아보았다.
“준비를 서둘러야겠네. 하녀장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예, 마님. 일단 목욕부터 하셔야지요? 그사이에 드레스를 준비하겠습니다.”
하녀장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로제가 대공의 아내로서 처음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니, 하녀장의 입장에서도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 * *
선왕비가 머무르는 궁으로 안내되어 가는 길 양쪽으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로제는 그런 꽃에 시선 한 번 주지 못했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과 수군거림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똑바로 든 채 걸음을 옮기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저 여자가, 그 대공의…….’
‘세상에.’
‘어떻게 왕궁에 저런 여자를.’
띄엄띄엄 귓속에 들려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천한 평민 여자가 어떻게 감히. 누군가가 화단에 핀 꽃을 구경하는 시늉을 하다가 부채질을 하며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순간적으로 로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저 덤덤히 정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저것 좀 봐요. 대공의 아내가 되었다고 오만하게 굴고.’
비굴한 것보다는 차라리 오만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 나을 터였다. 로제는 제 남편과 아이가 저로 인하여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죽고 없어도 그들이 저 때문에 사람들의 조롱을 받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턱에 힘을 주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서.
헤이번 괸터스의 당당한 아내로서.
플리타 괸터스의 당당한 어미로서.
“……오셨습니까, 부인.”
궁에 다다르자마자 시녀장이 로제를 맞이했다. 안내를 맡았던 이는 냉큼 물러났다. 로제는 시녀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부인.”
로제가 건넨 덤덤한 투의 인사에 시녀장의 뺨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인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의례적으로 건넨 인사일 뿐이었다. 다만, 시녀장이 그 인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시녀장은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로제의 시선이 무심코 그 손으로 향했다. 언젠가 그녀의 뺨을 때렸던…….
그 일을 상기한 것인지 시녀장 역시 흠칫하더니 제 손을 뒤로 감췄다. 그러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건넸다.
“선왕비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로제는 굳이 시녀장에게 그때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시녀장 역시 그러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혹여 그녀가 말이라도 꺼낼까 싶어 겁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시녀장을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문 앞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여인들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선왕비전하, 대공 부인이 도착했습니다.”
시녀장이 문을 두드리고는 안쪽에 고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시녀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시녀장은 로제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부인.”
로제가 시녀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다가 멈칫했다. 시녀장의 입꼬리가 비틀려 있는 것을 본 탓이었다. 굳이 악의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뭔가 좋지 않은 의도로 저를 부른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은 뒤, 그대로 시녀장을 지나쳐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는 선왕비를 비롯하여 여러 귀부인들이 이미 자리한 상태였다. 선왕비, 이자벨라가 로제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어서 와요, 부인.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갑작스러운 초대라 당황하였을 텐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왕비전하.”
로제는 이자벨라를 향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아아, 깜짝 놀랐네요.”
“왜요, 선왕비전하?”
귀부인들 중 하나가 이자벨라의 말에 냉큼 끼어들었다. 이자벨라가 로제를 쳐다보고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공 부인의 인사가 낯설어서 말이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개를 조아려서……. 아! 설마 불쾌한 건 아니죠? 내가 항상 그렇게 인사를 받았는데, 갑자기 인사법이 바뀌니까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