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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19화 (119/134)

119

“당장 내보내도록.”

헤이번은 하녀장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로제가 난감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지 말아요, 헤이번. 이미 6개월 감봉 조치를 내렸고.”

“당신을 모욕한 자들이야. 그들을 이곳에 단 한 순간도 두고 싶지 않아.”

헤이번은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로제가 거듭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실수를 한 것뿐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함께 일했잖아요. 다들 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렇다 해도 지금은 다르지. 로제, 당신은 엄연히 이 집의 안주인이야. 제 주인도 몰라보는 자를 굳이 쓸 필요 없어. 사람은 새로 뽑으면 돼.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어.”

“헤이번.”

계속되는 대치에 로제의 표정 역시 헤이번의 표정처럼 굳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들은 다들 오랫동안 대공 저에서 일해 왔어요. 그만큼 일에 능숙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해고하고 새로 뽑으면…….”

“그 새로운 사람들이 일에 적응하겠지.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잖아? 청소든 빨래든, 그런 허드렛일을 할 사람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로제가 헤이번의 말에 정색했다.

“당신 눈에는 고용인들이 하는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있기에 대공 저가 무탈할 수 있는 거예요. 이곳에서 몇 년씩 일해 온 사람들이 있기에 원활하게 저택이 관리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런 이들의 일을 쉽게 대체할 수 있다고, 그냥 허드렛일이라고 말해서는 안 돼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아무리 유능하고 일을 잘해도 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렇듯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를 이곳에 둘 수는 없어.”

헤이번은 로제의 말을 딱 잘랐다. 그러고는 로제를 쳐다보며 다시금 단호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만큼은 당신이 내 뜻을 따라줘. 고용인에 대한 권한이 당신한테 있는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니지만, 부탁할게.”

로제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이번이 하녀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녀장이 그의 지시대로 하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는 침실에서 나갔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집사 역시 하녀장과 함께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고 나니 단둘이 남았다. 헤이번은 그제야 자신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던 고용인들에게 분노한 탓이었다.

“후우…….”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폈다. 저도 모르게 한참 힘을 주었던 건지 손이 뻐근했다. 그렇게 두어 번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다가 로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로제가 어쩐지 복잡한 표정으로 바닥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제 일방적인 태도에 혹시 불쾌감을 느낀 건가 싶어 헤이번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로제, 화났어?”

“아니요, 화나기는요. 그냥…….”

로제는 제 어깨를 감싼 헤이번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헤이번이 결정한 일에 다시 뭐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실, 저라고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착해서 그들에게 해고 대신 감봉 처분을 내리려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얼마 안 가 이곳에 ‘없을’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런 자신이 이곳의 일에 관여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게 옳은 건가 싶어서 한 행동일 뿐이었다.

단지 그래서였을 뿐이었다.

한 번 더 욕심을 부려 헤이번과 플리타의 곁에 아내로서 엄마로서 머무르게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끝’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저 그 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아직은 혼란스러워 스스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녀가 복잡한 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숨을 삼키는데,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헤이번이 로제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다시금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한 거 알아?”

“……?”

로제가 느닷없는 화제 전환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헤이번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남들은 사소한 일로도 잘 싸운다던데 우린 아니었잖아.”

“그거야 당신이 다 나한테 맞춰 줬으니까 그렇…….”

로제가 그의 말에 대꾸하다 말고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헤이번의 말대로 자신과 그는 다툰 적이 없었다. 시골 마을에 살던 시절, 그렇게 하루 종일 붙어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언제나 제 의견이 우선이었고, 무엇이든 제게 맞춰 주었던 이 남자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남자가 이 일만큼은 본인의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관철시켰다.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제가 모욕당했단 사실에 저를 대신하여 화를 낸 그 마음을.

로제는 복잡한 속내를 애써 깊숙한 곳에 묻어버린 뒤, 테이블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자 헤이번 역시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 뒤에는 늘 그랬듯 하녀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부부싸움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싱겁게 마무리된, 그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의 일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찻잔을 내려놓은 헤이번이 턱을 괴고는 나른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제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들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당신 유혹하는 중.”

“푸웁!”

헤이번에게 질문을 해 놓고 무심코 차를 마시려던 로제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그의 얼굴을 향해 차를 뿜을 뻔했다. 그녀는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는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헤이번이 턱을 괸 채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밤마다 플리타가 우리 침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여태껏 제대로 뭘 해 보지도 못했잖아. 그러니까 이 기회에 하는 게 어때?”

“하, 하기는 뭘 해요!”

로제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로제가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를 한 손으로 짚은 채 몸을 숙였다.

그의 서늘한 체향이 코끝에 전해졌다. 로제는 저를 내려다보는 헤이번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붉힌 채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대낮인데.”

“환한 대낮에도 사랑은 할 수 있지.”

헤이번은 기다렸다는 듯 로제의 말에 대답하고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더욱 얼굴이 빨개진 로제가 허둥대며 다시 말을 이었다.

“플리타가 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플리타는 그림 수업 중이야. 조금 전에 확인하고 왔어. 엄마 얼굴을 그린다며 오늘따라 수업에 집중해 있더라고.”

헤이번이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만지던 손으로 이번에는 귓불을 살살 건드렸다.

“그, 그럼…….”

로제는 뺨과 귓바퀴, 목까지 전부 빨갛게 열이 오른 채 다른 핑계를 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받은 몸은 그녀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오히려 달뜬 숨을 내뱉으며 그에게 안기려 할 뿐.

헤이번이 그런 로제를 향해 몸을 더욱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그는 입술을 포갠 채 로제의 허리를 손으로 받쳐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리면서 그 위에 놓인 찻잔이 달그락달그락 움직였다.

반쯤 쳐둔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며, 그 햇살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로 얽혀들었다.

* * *

이자벨라가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질 법도 하지만 그녀는 귀찮다는 듯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어디 가십니까. 조금 더 누워 계시지요.”

이자벨라의 침대에 함께 누워 있던 사내가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허리를 다시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냉정하게 그의 팔을 쳐냈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는 것이냐!”

방금 전까지 몸을 섞었던 사내에게 하는 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냉정했다. 그러나 늘 그랬듯 그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만 나가거라.”

이자벨라는 소파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고는 문 쪽을 가리켰다. 사내가 아쉬움이 짙게 남은 눈으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체념한 듯 몸을 일으켰다. 관계를 가졌던 흔적이 남은 몸을 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자벨라는 사내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 것을 보다가 이내 관심을 껐다. 사내가 갈아입는 옷은 왕궁의 시종이 입는 옷이었다. 그녀가 제 침대로 끌어들인 시종의 수가 벌써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의 침대를 두 번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건장하고 훤칠한 사내라 할지라도.

밤의 기교가 뛰어난 터라 저를 짙은 쾌감에 빠지게 했을지라도.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침실 밖으로 나간 뒤에도 이자벨라는 한참 동안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시녀장이 하녀들과 함께 들어왔다.

시녀장은 선왕비의 난잡한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더클렌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선왕비전하.”

“아버지께서?”

이자벨라가 시녀장의 말에 인상을 쓰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곤한 몸을 움직이기가 귀찮았다. 그러나 제 아비가 왔다는데 그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부녀 사이의 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진행 중인 일에 혹시 문제라도 생겨서 온 건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때까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던 하녀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왕비가 공작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침실을 치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죽고 없지만, 그녀의 침대는 언제나 낯 뜨거운 흔적으로 가득했다. 왕궁 내에서 쉬쉬하는 비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셨어요, 아버지?”

“……선왕비전하.”

이자벨라가 침실 옆에 붙어 있는 응접실로 들어가자 공작이 형식적으로 예를 표했다. 혹여 다른 사람이 볼까 싶어 행한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자벨라와 단둘이, 아니, 시녀장까지 셋이 남게 되자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는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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