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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18화 (11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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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플리타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로제의 품에 안기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안도한 헤이번과 로제가 서로 눈웃음을 주고받는 순간이었다.

“……으응?”

다시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놀란 듯 혹은 울먹이는 듯. 로제가 깜짝 놀라 플리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엄마, 얼굴…….”

‘아차.’

그녀는 낭패감에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장을 지운 터라 제 맨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침실 안이 어둑하기는 하지만 침대 머리맡의 램프는 켜둔 상태이니 말이다.

“흐잉, 엄마 얼굴…… 얼굴에 멍이, 흐아앙.”

아이가 로제의 얼굴에 있는 멍과 상처를 보고 놀랐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플리타, 엄마 괜찮아.”

로제는 냉큼 아이를 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플리타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빠 바보!”

그러더니 플리타가 로제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돌려 제 아비를 향해 외쳤다.

“엄마 기억도 못 하고, 지켜주지도 못하고, 으헝. 아빠 미워…….”

“플리타.”

아이를 토닥이던 로제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플리타는 움찔거리다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연녹색 눈 가득 고인 눈물에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야단쳐야 할 부분은 야단쳐야 했다.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 그치만. 엄마 이렇게 다쳤는데…….”

“아빠 잘못 아니야. 아빠가 다치게 한 것도 아닌걸.”

“그래도! 아빠가 나쁜 사람을 무찔렀어야 하잖아. 아빠인데. 아빠는…….”

“아빠는 뭐든지 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로제가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플리타는 입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빠는 강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지는 않아, 플리타.”

“흐잉…….”

아이는 로제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그러나 로제는 아이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도 플리타랑 똑같아. 그리움도 느끼고, 외로움도 느껴. 슬플 때도 있고, 울고 싶을 때도 있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밉다고 말하면 속상하기도 하고.”

플리타가 로제의 말을 듣다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멋쩍은 표정으로 제 턱을 매만졌다.

“아빠가 정말 밉니?”

“……아니.”

플리타는 다시 로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대답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로제가 재차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어?”

“…….”

“엄마 얼굴이 이래서 많이 놀라고 속상했으리란 거 알아. 하지만 그걸 아빠 탓으로 돌리면 안 돼. 아빠도 엄마 보고 많이 속상해했는걸.”

로제의 말에 플리타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이의 머리에 매달린 리본마저 축 늘어진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로제는 그런 아이의 겨드랑이에 제 손을 넣고는 다시 품에 안았다. 그러자 플리타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엄마.”

“엄마한테만?”

“아니. 아빠한테도…….”

아이는 귓속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로제의 목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헤이번을 돌아보고 머쓱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빠. 아빠 밉다고 한 거 거짓말이에요. 안 미워요.”

“…….”

“그러니까, 흐윽, 용서…….”

“우리 플리타, 알고 보니 울보였구나.”

헤이번이 피식 웃고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 들고 싱긋 웃었다.

“알고 있어.”

“……아빠.”

“엄마가 다친 게 놀라서,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는 거.”

헤이번의 말을 들은 플리타가 재차 울먹였다. 그는 아이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뱅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헤, 헤이번!”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플리타에게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헤이번에게 안겨 뱅글뱅글 돈 것이 아이에게는 재미난 놀이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돌고, 또 돌면서 아이와 놀아주었다. 그리고 로제는 헤이번과 플리타가 함께 웃으며 침실 안을 뱅글뱅글 도는 걸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이의 놀란 마음을 달래주려는 그의 배려였다. 아이가 야단을 맞고 혹시 주눅이라도 들까 싶어 일부러 더 놀아주는 것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자신이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이 알던 헤이번은 그런 남자였다. 무심하고 서늘하기보다는 자유롭고 짓궂던, 그런 남자. 저를 안을 때는 더없이 뜨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정하던 남자.

‘나, 정말 당신 곁으로 돌아왔네요.’

로제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글썽였다.

5년 만의 재회, 그리고 세 식구가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밤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었다.

* * *

헤이번 괸터스의 혼인 소식은 단 며칠 사이에 수도의 사교계에 퍼져 나갔다. 대부분의 귀족 여인들이 흠모하던 사내이기도 했던 대공이 평민과 결혼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결혼식을 올리기는커녕 혼인 신고부터 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와 혼인한 평민 여자가 공녀의 ‘생모’라는 점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저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대공의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대공 저로 날아든 초대장이 수십 통이었다. 고상한 척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쓴 초대장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 소문의 주인공을 보고 싶다는 것.

“전부 다 태워버리게, 야닉. 답장도 할 필요 없어.”

그렇기에 헤이번이 그 초대장을 일일이 확인할 까닭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로제에게 초대장이 전해지기도 전에 그의 선에서 처리하는 게 요 며칠 동안의 일상이라 할 수 있었다.

“예, 전하.”

집사는 초대장을 폐기하는 일에 가담한 공범의 입장에서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 안주인에게 전달했어야 할 초대장을 한 장도 남기지 않고 계속 소각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냉랭한 표정으로 폐기될 운명에 처한 초대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집사가 냉큼 그의 뒤를 따랐다. 제 주인이 어디로 향할지 뻔히 예상하는 모습이었다.

‘마님께 가시는 거겠지.’

집사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언제 불편한 표정을 지었던가 싶게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찌 되었든 제 주인이 행복하다면 그를 모시는 입장에서도 행복한 법이다. 비록 자신이 상상했던 고귀한 신분의 마님은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함부로 평가하는 것도 주제넘는 짓이지. 아무렴.’

주인이 택한 여인이다. 또한 이미 공녀님을 낳은 분이시지 않은가. 그분의 정체를 몰랐을 때도 온화한 성품을 좋게 보았다. 그러니…….

집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헤이번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로제의 침실 근처에 다다랐는지,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로제와 하녀장이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번이 집사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인 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하녀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무례인 줄 잘 압니다, 마님.”

무뚝뚝한 하녀장의 목소리에 헤이번이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집사가 표정을 구기며 한 걸음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모시는 분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야닉.”

헤이번이 작은 소리로 집사를 부르고는 제 입에 검지를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집사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굳게 다문 순간, 또다시 하녀장의 말이 들렸다.

“하지만 그들을 해고하셨어야 합니다.”

“이미 말했듯이 감봉으로 족하네.”

그리고 뒤이은 목소리의 주인은 로제였다. 해고. 감봉. 그런 말들을 들은 헤이번의 낯빛이 서늘해졌다. 고용인에 대한 처분은 전적으로 안주인의 몫인데, 하녀장이 감히 월권을 하는 건가 싶어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로 침실에 들어가지 않은 건, 지금껏 봐 왔던 하녀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그녀가 로제에게 아무 이유 없이 저런 행동을 할 리 없다는 믿음이 있기에 조금 더 지켜볼 수 있었다.

“다른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마님. 하지만 마님을 모욕한 이들을 고작 감봉 처분으로 계속 이곳에 둘 수는…….”

가만히 하녀장의 말을 듣던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더 이상 하녀장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노크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자 놀란 로제와 하녀장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낭패라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헤이번은 저도 모르게 굳은 표정으로 로제를 향해 질문했다.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듣게 됐어. 무슨 일이지?”

“아, 헤이번. 별것 아니에요. 그냥…….”

“당신을 모욕한 자들이 있다고 들었어. 듣자 하니 그들이 내 집에서 일하는 자들인 듯하던데.”

말을 얼버무리려던 로제를 향해 재차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대답을 추궁하는 대신, 헤이번은 하녀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녀장이 주저하다가 단단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야기하자면 간단했다. 아침에 벌어진 일이었고, 로제가 하녀장과 함께 저택 안을 살피던 중에 우연히 계단 청소를 하던 하녀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 대화의 내용이…….

“송구합니다, 전하. 차마 제 입으로 전부 말씀을 드리기가…….”

하녀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헤이번의 뒤편에 있던 집사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상 내연녀가 아니었냐는 식의 말을 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외에 하녀장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말은 그보다 더 심한 말이었을 것이다.

……제 여자가 그런 말을 직접 들었다는 뜻이었다.

“당장 내보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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