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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17화 (11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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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담요를 봤어요? 어떻게?”

로제가 그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담요’ 이야기에 깜짝 놀라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당신 가방을 찾았거든. 당신이 그만두고 떠났단 얘기를 듣고, 당신을 찾는 과정에서.”

“……아, 그랬군요.”

로제는 입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저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면 험한 꼴을 당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목숨마저 위험했을 것이다.

지하실에서의 일을 떠올린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 변화를 눈치챈 헤이번이 다시 로제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달랬다.

“이제 괜찮아, 로제. 가방도 담요도 전부 잘 보관해 뒀고.”

가방이나 담요 걱정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란 걸 알 텐데도 그는 그렇게 저를 달래주었다. 지하실에서 겪었던 일을 상기시키지 않으려는 그의 배려였다.

로제는 헤이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헤이번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로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문득 자신들이 있는 이곳이 침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새삼스러워할 일은 아니었다. 5년 전만 하더라도 매일 이렇게 밤마다 침대 위에서 몸을 섞었다. 법적으로 부부만 아니었을 뿐, 실제로는 아이까지 낳은 사이였다. 게다가 이제는 혼인 신고까지 하여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하지만 5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일까.

그의 손길이 닿은 어깨에 열이 올랐다. 마치 열꽃이 핀 것처럼. 오래전 헤이번과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던, 어느 수줍은 밤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 떨림을 알아차린 것인지, 헤이번의 숨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로제.”

저를 부르는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에 로제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푸른 시선이 짙은 열망으로 일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제는 저를 끌어안는 헤이번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뒤이어 헤이번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마에 입을 맞추던 헤이번에게서 열기를 억누르는 듯한 숨이 새어 나왔다.

“당신을, 아프게 하면 어쩌지? 자제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뒤, 입을 열었다. 꽉 잠긴 목소리가 그의 들끓는 욕망을 대신하는 듯했다.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눈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지난 세월 동안 그리워했던 남자의 열망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것이 헤이번이 방금 건넨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헤이번이 그에 화답하듯 로제의 뒷머리를 감싸 안고는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숨이 코와 뺨에 닿았다. 그 직후, 인내심이 끊어졌다. 하지만 누구의 인내심이 먼저 끊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잃어버린 지난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그들의 몸짓은 거침없었다. 고용인들이 그들 부부를 위하여 준비했던 잠자리가 흐트러졌다.

부드럽게 그들의 몸을 감쌌던 이불은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침대 시트는 마구 구겨졌다. 헤이번은 심해처럼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젖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로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녹색 눈동자에 서린 열기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는 다시금 로제의 뺨을 감싸고 마치 그녀를 옭아맬 것처럼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 안 놓쳐.”

“……헤이번.”

“당신도 두 번 다시 놓지 마.”

약속이라도 받겠다는 듯 건네는 헤이번의 말에 로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그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겨운 몸짓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헤이번은 재차 로제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날카로운 콧대가 그녀의 뺨을 짓눌렀다. 동시에 그녀에게서 달뜬 숨이 새어 나왔다.

단 하나뿐인 제 여자의 숨결이었다.

그는 온전히 기억을 되찾았다. 5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로제의 모든 것은 그의 기억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주인이었다.

헤이번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 소유권이 제게 없다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아니, 단순히 좋다고 표현하기에는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온 쾌감의 크기가 너무나 컸다.

“로제. 로제……. 로제.”

헤이번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며 끊임없이 이름을 불렀다.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던 그 이름을 마음껏 부르겠다는 듯. 로제는 저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입술에 닿았던 그의 입술이 귓불로, 그리고 목덜미로 이어졌다. 뒤이어 그녀의 뒷머리를 감쌌던 손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엄마아…….”

침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로제가 화들짝 놀라 헤이번의 가슴팍을 떠밀고는 몸을 일으켰다.

“엄마아아, 나 엄마랑 잘래…….”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는 당연히 플리타였다. 로제는 흐트러진 잠옷을 여미고는 서둘러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플리타가 한 손에는 베개를 들고 다른 손에는 토끼 헝겊 인형을 쥔 채 타박타박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베개가 아이가 걸어오는 대로 바닥에 질질 끌렸다.

“플리타, 잠이 안 오니?”

로제가 냉큼 아이에게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플리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려고 했는데, 우웅, 자꾸 엄마가 보고 싶어서. 꿈 같기도 하고. 로제가, 응, 엄마라는 게 안 믿어져서.”

플리타의 뺨은 여전히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저를 낳아준 엄마와 만났다는 감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계속 로제를 쳐다보는 바람에 수프를 죄다 흘렸던 아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도 같이 자면 안 돼? ……안 돼요, 아빠?”

플리타가 로제에게 묻고는 뒤이어 헤이번을 올려다보며 같은 질문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혹여 저를 귀찮아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는 아이의 모습에 헤이번이 피식 웃고는 냉큼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안 되기는. 당연히 되지.”

“진짜요?”

“그래.”

헤이번은 아랫배 쪽의 뻐근한 사정을 애써 외면하며 플리타를 향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로제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의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그녀가 얼굴을 붉히더니 그의 옆구리를 가볍게 꼬집었다.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웠다.

“푸훗!”

헤이번이 플리타를 품에 안은 채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아이가 제 아빠의 목을 안고 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으응? 방금 아빠 웃었어요?”

“아니.”

“웃었는데…….”

플리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헤이번이 침대로 향하자 신이 난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헤이번이 침대 위에 아이를 내려주자마자 엉금엉금 기어가 침대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자, 여기는 아빠! 그리고 여기는 엄마!”

플리타가 신나서 제 양쪽 옆을 손바닥으로 팡팡 때렸다. 로제가 그런 아이의 모습에 웃으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헤이번 역시 반대편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헤헤. 같이 잔다아아……. 엄마, 나 자기 전에 옛날이야기 해 줘! 해적왕 토끼 이야기…… 어?”

아이는 눈까지 반짝이며 말을 하다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불이 없어졌어? 침대가 막 구겨졌는데.”

“……어?”

플리타의 물음에 헤이번과 로제가 동시에 당황하여 숨을 들이쉬었다. 당황한 부모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빠, 엄마랑 베개 싸움하고 논 거예요? 재미있었겠다! 나도 하고 싶은데. 베개도 갖고 왔는데…….”

“크흠, 플리타.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다음에 하자.”

헤이번이 난감한 표정으로 턱을 쓸다가 말을 돌렸다. 그러자 플리타가 입을 삐죽 내밀며 잠시 불만을 표시하더니 이내 로제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쨌든 아이의 관심이 바뀐 것에 안도한 로제가 웃으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바로 그때, 플리타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엄마, 왜 지금까지 나 안 찾아왔어? 나 안 보고 싶었어?”

“……!”

로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플리타는 그런 로제를 보며 서운한 마음을 슬쩍 내보였다.

“그리고 왜 엄마라고 말 안 했어? 왜 로제라고만 했어? 나는…… 난 엄마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는데.”

“어, 그건……. 플리타, 그건 말이야.”

로제는 아이의 연이은 물음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말을 더듬었다. 그 순간, 헤이번이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들고 침대로 다가오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아빠가 바보라서 그랬어.”

“……어?”

플리타가 로제를 빤히 쳐다보다가 헤이번에게 시선을 돌렸다. 헤이번은 이불을 펼쳐 로제와 플리타에게 덮어준 뒤, 그들을 가만히 보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기억을 잃어서, 엄마를 잊고 있었어. 그래서 엄마가 못 찾아온 거야. 아빠 때문에.”

“……헤이번.”

로제는 그의 말에 놀라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녀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은 뒤, 다시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너를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했어. 플리타, 네가 엄마를 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그리워했어.”

“…….”

“그런데 아빠가 못 알아보니까, 엄마가 많이 힘들었어. 아빠가 너를 기억 못 하면 어떨 것 같아?”

“……막 울 거예요. 속상해서.”

“그래. 그런데 엄마는 울지 않고 네 곁에 있었지. 엄마라고 말하지도 못하면서. ……그만큼 너를 보고 싶어 한 거고, 그만큼 너를 사랑한 거야.”

헤이번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던 플리타가 눈을 깜빡였다. 로제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아이가 주는 온기가 가슴속을 따스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그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탓이라고 돌린 남자의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따지고 보면 그가 기억을 잃게 된 건 자신 때문인데.

그런데도 원망 한 번 하지 않고 되레 제 탓이라 한다. 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이라 한다.

“……그럼, 이제는 다 기억나요?”

플리타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헤이번에게 물었다. 아이의 물음에 그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 기억나. 그래서 엄마도 돌아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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