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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으아앙, 엄마아아!”
아이가 로제의 목을 꼭 끌어안더니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보다 더 큰 울음소리였다. 그리움과 서러움이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게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아이의 몸 어딘가에 그렇게 눈물이 많이 고여 있었던가 놀라울 만큼.
“미안해, 플리타. 엄마가…… 엄마가 미리 말 못 해서. 정말 미안해.”
로제는 두 팔 가득 아이를 끌어안고 흐느끼며 사과했다. 제 욕심만 앞세웠지, 아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에게도 저에 대해 밝히지 않고 헤이번과 플리타의 곁에 머무르다가 떠나려고만 했지,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난 5년 동안 그들을 그리워했으면서도, 그들 역시 저를 그리워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억을 잃은 헤이번이 상실감으로 보내야 했을 시간도. 엄마에 대한 기억 하나 없이 홀로 자라야 했을 아이의 외로움도.
자신은 그저 이기적이고 못난 아내였고, 엄마였다.
“엄마아, 흐엉, 엄마아아. 이제 같이 사는 거야? 이제 나랑 같이, 아빠랑 나랑 같이 살 거지? 응?”
플리타의 눈이 그새 퉁퉁 부었다. 아이는 반쯤 감긴 눈에 힘을 주고는 로제에게 확답을 듣겠다는 듯 물었다. 로제가 아이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제 어깨 부분을 꽉 움켜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아이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 순간, 헤이번이 다가오더니 로제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쥔 플리타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로제, 대답 안 해 줄 거야? 아이가 이렇게 기다리는데.”
헤이번이 그 상태로 로제에게 말을 건넸다. 로제는 제 어깨를 잡고 있는 그들 두 사람의 손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되는데.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별을 줄 것이냐고. 이들에게 괜한 희망을 주었다가 빼앗는 게 더 잔혹할 수도 있다고.
더구나 이번에는 ‘아내’이자 ‘엄마’와의 이별이 될 테니 더욱 아플 것이라고.
그러자 다른 한쪽에서 또 다른 제가 말했다.
이미 저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들을 다시 속이고 떠날 것이냐고. 이들이 지금껏 가졌을 외로움을 알았으면서 또다시 외면하려 하느냐고.
로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헤이번과 플리타를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절박해 보이는 남자, 그리고 제 입에서 나올 말을 두려워하면서도 기대하는 아이가 보였다.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인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수도로 무작정 왔을 때도 그것이 옳다고 여겨 선택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제 이기적인 마음이 원하는 대로, 이끄는 대로 그렇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러니 한 번만 더.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이기적으로 굴면 안 될까.
아이도 외롭지 않게. 제 남자도 외롭지 않게. ……얼마 안 남은 시간이라도, 그렇게 우리 셋이 함께.
“……그래.”
로제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헤이번의 손을, 그리고 플리타의 손을 잡았다.
“같이, 살게. 아빠랑 플리타랑 같이 살 거야.”
“정말?”
“……응.”
로제의 눈도 어느새 붓기 시작했다. 꼭 닮은 모녀가 퉁퉁 부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울음을 닮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헤이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 * *
밤이 깊어가면서 저택 안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늦은 시간까지 대공 저의 ‘첫’ 안주인에 대한 이야기로 수군대던 고용인들도 잠자리에 들었고, 그에 따라 저택 안을 밝히던 불빛도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침실을 밝히고 있는 램프의 불빛은 아직 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침실의 주인 부부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터였다.
침대에 나란히 앉은 그들은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때로는 웃음이, 그리고 눈물이 이어졌고, 가끔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가벼운 말 속에 지워지기도 했다.
“무작정 수도에 왔다니. 당신, 정말 무모했어.”
“……그래도 이렇게 만났잖아요.”
로제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불쑥 수도에 온 것은, 그저 지난 5년 동안 꾹꾹 참았던 그리움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절반의 진실. 그리고 절반의 거짓.
‘……미안해요, 헤이번. 나 아직, 당신한테 털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제 겨우 기억을 되찾은 남자에게,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라 불러준 아이에게 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게, 당신이 용기 낸 덕분에 만났네.”
로제가 복잡한 속을 애써 가라앉히려는데, 헤이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제 기억 속의 여자는 지금보다 더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환하게 소리 내어 웃을 때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모 없이 홀로 살아왔으면서도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상처 하나 없이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때 묻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헤이번의 손끝이 로제의 뺨에 닿았다. 화장을 지우고 난 로제의 뺨은 여전히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상처가 남아 있는 게 당연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려니 가슴속이 욱신거렸다.
“내 얼굴, 보기 흉하죠?”
헤이번이 제 얼굴의 상처를 더듬는 것을 알아차린 로제가 민망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은 뒤, 그녀의 양쪽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럴 리가. 당신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예뻤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거짓말.”
“정말이야.”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제 의식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제 무의식은 그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로제와 다시 마주쳤던 날, 그녀를 무심히 지나쳐놓고 뒤늦게 그녀가 자꾸 떠올랐던 게 아닐까.
헤이번은 당시의 로제를 떠올렸다. 국경 지대에서부터 수도까지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먼지투성이에 엉망이었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여인의 몸으로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남편과 아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떠나온 길, 어쩌면 너무나 힘들어 중간에 멈춰 서서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마음을 다잡고 수도에 당도하여 저를 마주쳤을 터였다. 그런데 자신은 로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그런 저를 보면서, 냉담하게 가버리는 제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서러웠을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저를 보던 그때 그 녹색 눈이 떠올랐다.
“미안.”
“……?”
로제가 그의 손에 뺨을 기댄 채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헤이번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신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아.”
“그런데…… 기억이 없는데도, 당신이 자꾸 눈에 들어오더라.”
변명처럼 하는 말이지만, 변명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러했으니 말이다. 아이의 곁에 있는 그녀가 자꾸만 시선에 들어왔다. 무심코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로제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런 제 모습이 당혹스러워 애써 그런 저를 외면하고 무시했는데.
“내 무의식은 당신을 알아봤나 봐.”
“…….”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헤이번이 말을 잇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은 가벼운 투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나 말이야. 나한테 질투도 했어.”
“질투라니요?”
로제가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번에 우리, 같이 술 한잔했던 날 말이야. 기억하지?”
헤이번의 질문에 로제가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요. 그날의 기억은 그녀에게 담요로 연결되었다.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면서까지 챙겼던 담요, 그러고 보니 그건 어디로 갔을까.
납치당하면서 잃어버린 가방과 그 안에 들어 있던 담요를 생각하는데, 헤이번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날 당신이 잠꼬대를 했거든.”
“……잠꼬대요?”
“응. 잠든 당신한테 담요를 덮어 주고 돌아서려는데, 당신이 잠에서 깨더니 내 목을 끌어안았어.”
“……!”
“나를 부르면서 왜 이제야 왔냐고 했지.”
“그, 그럴 리가……. 나 원래 잠꼬대 같은 거 안 해요. 당신도 알잖아요.”
로제가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새빨개진 얼굴로 반박했다. 헤이번이 그 모습에 짓궂게 웃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기억이 안 나는데.”
“헤이번!”
“하하! 하지만 정말이야. 당신 잠꼬대에 나 혼자 착각해서 질투까지 했는걸.”
다시 질투 이야기로 돌아왔다. 로제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의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자 헤이번이 멋쩍은 듯 미소를 짓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왜 이제 왔느냐, 보고 싶었다, 그런 말들을 했는데……. 그게 내가 아닌 당신 ‘남편’한테 잠결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내 이름을 부른 건 이해가 안 됐지만 말이야.”
“…….”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불쾌하더라고. ‘남편’이란 작자가 괜히 거슬리고.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도.”
“죽은 사람이라 생각했다고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와 플리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신 표정이 얼마나 슬퍼 보였는데.”
“…….”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는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눈앞에 본인을 두고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저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모든 건 그저 제 기억 속에서만 남았다고 여겼으니까.
죽는 순간까지 저 홀로 안고 가야 할 기억 속에서만…….
“이제는 그러지 마, 로제.”
“…….”
“당신 남편, 여기 있어. 우리 아이도 그렇고.”
“……헤이번.”
“고작 담요 하나 챙겨서 떠나는, 그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