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헤이번이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을 잊고 살았던 시간만큼은 솔직히 아깝다.”
“…….”
“그렇지만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로제. 당신이 준 거였어. 나는 당신이 주는 거라면 설령 독약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마실 수 있어. 그런 내가 왜 당신을 원망하겠어?”
“독……. 그런 무서운 농담은 하지 말아요!”
독약이라니. 말만 들어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로제는 그를 떠밀며 타박했다. 그러자 헤이번이 웃으며 다시금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푸른 눈에 서린 것은 장난기 짙은 웃음이었지만, 그 깊숙한 곳에 담겨 있는 것은 뜨거운 불꽃처럼 넘실대는 짙은 열망이었다. 로제는 저를 향한 푸른 불꽃에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헤이번이 그런 그녀를 응시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 아니야, 로제.”
“……헤이번.”
“난 이미 오래전에 내 목숨을 당신에게 줬어.”
“……당신 목숨을요? 난, 받은 기억이 없는데요?”
로제는 괜히 울컥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감출 겸 농담처럼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자 헤이번이 피식 웃더니 로제를 제 품으로 더욱 당겨 안고는 마찬가지로 농담을 건넸다.
“우리 처음 마주쳤던 날 줬잖아. 당신이 약초 바구니 뒤집어썼던 날 말이야.”
“뭐라고요?”
“그날, 약초를 뒤집어쓴 당신을 보며 생각했거든. 이 여자로구나.”
“…….”
“말갛게 웃는 얼굴이 예쁜 이 아가씨가 내 목숨을 쥐었구나. 내 심장을 가져갔구나.”
남들이 들으면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도 있고, 식상한 말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제는 그럴 수 없었다. 저를 보는 남자의 진심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뭐든 해도 돼.”
“…….”
“아! 물론 내 곁에서 떠나는 것만 빼고.”
헤이번이 덧붙이듯 말했다. 농담조로 건넨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건 진심이었다. 로제는 헤이번의 말에 눈을 내리깔고는 슬쩍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허리를 안았던 팔을 풀던 헤이번의 푸른 눈이 어두워졌다. 그녀와 저 사이에 분명 여전히 뭔가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저를 떠나게 하려 했을 터.
‘난 두 번 다시 당신을 놓을 생각 없어.’
헤이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로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만 가자, 로제.”
로제는 저를 향해 내민 그의 손을 보았다. 녹색 시선이 바람이 불어 일렁이는 수면처럼 그렇게 흔들렸다. 그녀가 잠시 주저하는 동안에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없었다. 로제는 망설임을 접고 그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 그러자 헤이번이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신사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자를 놓칠 수 없는 사내의 간절한 모습이었다.
* * *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의 작은 창으로 대공 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제는 창밖으로 보이는 저택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헤이번이 로제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고는 입을 열었다.
“긴장할 것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
“플리타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것뿐이야, 로제.”
헤이번이 거듭 그녀를 안심시킨 덕분일까. 어쩌면 ‘플리타’를 언급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바짝 긴장해 있던 로제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빼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플리타가 많이 울었어요?”
“응.”
헤이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더니 이내 피식 웃고는 덧붙여 말했다.
“내가 밉다더라고. 아이한테 맞은 데가 아직까지 아프네.”
“……뭐라고요?”
“내가 당신을 내쫓았다고, 플리타가 화를 냈어. 온순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 조그만 주먹으로 아빠를 때릴 줄도 알고. 그만큼 우리 아이가 많이 자란 걸까?”
헤이번이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을 잇다가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도망간 바람에.”
“……아.”
로제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자신이 집사에게 거짓말을 했던 게 생각난 것이다.
“난 허락한 적도 없는데, 당신은 내 허락을 받고 일을 그만뒀다고 하고. 플리타는 그런 나더러 밉다며 토라져서 엉엉 울어대고.”
“…….”
그의 말을 듣던 로제의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귀까지 새빨개졌다. 어쨌든 자신이 거짓말을 한 건 맞았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되레 아이를 속였으니 어떤 변명도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플리타에게 약속했어. 당신을 데려오겠다고.”
헤이번의 말과 동시에 마차가 멈춰 섰다. 로제가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 두 번 다시 아이한테 거짓말을 하는 부모는 되지 말자.”
“…….”
로제의 눈이 흔들렸다. 헤이번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플리타한테 말할 거야. 당신에 대해서. 로제, 당신이 엄마라는 걸.”
“헤이번.”
“당신은 아이한테 끝까지 숨기다가 떠날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당신 못 보내, 로제. 그리고 그건 플리타도 마찬가지일 거야.”
헤이번은 단호한 투로 말했다. 결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로제는 입술을 깨물고는 시선을 돌렸다. 내리깐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일렁였다.
그 순간, 헤이번이 마차 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마차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려다가 제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입고 있었던 겉옷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그 온기 덕분일까.
망설임 끝에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여전히 머릿속은 갈피를 잡지 못하여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점점 더 강해졌다.
헤이번의 말대로 더는 거짓말을 하는 부모는 되고 싶지 않았다.
로제가 심호흡을 하고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헤이번이 미소를 지은 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로제가 헤이번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크흠.”
고용인들의 소란에 집사가 헛기침과 함께 나섰다. 그러자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나왔던 고용인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입만 다물었을 뿐, 그들의 눈까지 감으라 할 수는 없었다. 대공 저의 고용인들은 마차에서 함께 내린 두 남녀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공과 하녀, 아니, 이제는 공녀의 유모라 해야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 저택의 주인과 고용인이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것이다.
그 광경을 경악한 눈으로 지켜보던 고용인들 속에서 집사만이 침착하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전하. 그리고…….”
집사가 로제를 향해 다시금 예를 표하려는 순간이었다. 우다다다,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작은 아이가 로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로제!”
으아앙. 플리타가 로제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어디 갔었어! 흐앙.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나만 놔두고 떠나려던 거 아니지? 응? 나 버리는 거 아니지? 내가, 흐아앙……. 로제…….”
플리타는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계속 말을 이으려 했다. 로제가 그런 아이를 달래려는데, 헤이번이 다가오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플리타, 이제 로제라고 부르면 안 된다.”
“……왜, 왜요?”
플리타의 연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이가 겁을 잔뜩 먹고 울먹였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를 쳐다보다가 로제에게 시선을 던졌다. 로제가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다시금 아이를 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는 ‘엄마’라고 불러야 해.”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침묵하던 고용인들이 또다시 수군댔다. 그 와중에 플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로제를 보았다.
“엄…… 엄마라고?”
플리타가 눈을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로제가 황급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 바람에 하녀장과 베로니카가 열심히 단장시켜 주었던 드레스가 흙먼지에 더럽혀졌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아이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러나 플리타는 로제의 다정한 손길에도 배시시 웃는 대신, 혼란스러운 눈으로 다시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엄마요?”
“너를 낳아준, 네 엄마다. 로제가.”
헤이번의 말은 모든 이들의 말문을 닫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리 얘기를 들은 집사만이 평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다른 마차를 타고 뒤따라온 하녀장과 베로니카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용히 그들 뒤에 시립했다.
“로제가, 엄…….”
플리타는 그의 말을 따라 하듯 중얼거리다가 로제를 쳐다보았다. 저와 닮은 녹색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엄마?”
아이의 연녹색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다. 로제는 저를 부르는 플리타의 목소리에 입을 달싹여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속에서부터 울컥거리며 나오려는 울음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탓에 대답이 쉽지 않았다.
“진짜, 진짜 엄마야?”
플리타가 조급한 마음에 로제의 팔을 잡고 재차 물었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응, 아가. 엄마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엄, 엄…… 엄마?”
플리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꾸 로제를 불렀다. 로제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아이의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