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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일단 미뤄두어야 했다. 하녀장의 말대로 자신은 그들을 지켜야 할 터였다. 저로 인하여 헤이번이 공격을 당하고 플리타가 못난 어미 때문에 모욕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로제는 입을 꾹 깨문 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하녀장을 향해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겠네.”
“감사합니다, 마님.”
하녀장이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 * *
“어머나, 정말 아름다우세요. 꾸미지 않았을 때도 피부가 하얗고 몸이 가냘파서 드레스를 입으면 정말 우아해 보일 것 같았는데,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니까요!”
베로니카가 호들갑을 떨었다. 로제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차분한 녹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노란색이 섞여 있어 화사함을 함께 보여주었다. 게다가 화려한 보석 장식이 아닌 리본이 달려 있어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떠신지요, 마님?”
“아……. 좋아. 고맙네. 저기, 그런데 내 얼굴에 상처가 보이지는 않겠지?”
로제가 거울 속 저를 보던 시선을 거두어 하녀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쁜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에 들떠 있기보다는, 아이가 혹여 제 얼굴의 상처를 보고 놀랄까 걱정하는 마음이 앞선 탓이었다.
하녀장이 그 물음에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마님. 멍이 든 부분에 화장을 더 신경 써서 했으니, 공녀님께서는 알아차리지 못하실 겁니다.”
“……어휴, 그래도 속상하네요. 마님의 얼굴에 그런 험한 상처가 나다니. 대체 어떤 미친 것들이 우리 마님을 납치했던 거예요?”
깊은 사정까지 알지 못하는 베로니카가 투덜거렸다. 로제는 하녀장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 그냥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레이스 장갑을 낀 손끝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베로니카의 말을 듣고 그 일을 되새긴 것만으로도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납치라는 큰일을 당하였던 것인데.
감금된 상태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은 건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구출되지 않았더라면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그럼 두 번 다시 제 소중한 이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로제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스스로 떠나려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또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하루하루 이별에 가까워지는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시니 참 다행……. 어머나, 마님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졌어요!”
“네가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한 탓이지 않니. 마님, 이쪽에 잠시 앉아 쉬시지요.”
하녀장은 로제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고는 혀를 찼다. 로제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헤이번, 아니, 대공께서는…….”
“곧 오실 겁니다. 마차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요.”
하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침 오셨나 봐요!”
베로니카가 반색을 하더니 냉큼 문 쪽으로 향했다. 로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준비는 다 되었나 해서…….”
안으로 들어온 헤이번이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늘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던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것을 본 하녀장이 그녀답지 않게 미소를 짓더니 베로니카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자리를 비키자는 의미가 담긴 눈짓이었다.
“예? 아아…….”
베로니카가 하녀장의 눈짓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입을 열려다가 뒤늦게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하녀장이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힌 뒤, 단둘이 남았다. 그러나 침묵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헤이번은 그저 말없이 로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괜히 민망해진 로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상하지 않아요?”
“누구, 당신이?”
로제의 질문에 그제야 헤이번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로제가 어색한 표정으로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드레스를 처음 입어서요.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물론 드레스 자체는 정말 예뻐요. 이 장갑도 그렇고요. 음, 그런데 나한테는 좀…….”
“흠……. 어디 볼까?”
헤이번은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더니 이내 뒷짐을 진 채 로제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진지한 그의 시선에 로제가 괜히 긴장이 되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를 본 헤이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계속 그녀의 주위를 돌며 나름대로 평가하는 척 행동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헤이번이 로제의 뒤쪽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거울에 비친 로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역시, 이상해요?”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헤이번의 태도에 로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등 뒤에 있는 그를 돌아보고 직접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거울에 비친 그를 향해서 건넨 질문이었다.
“글쎄. 예쁘기는 한데,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아쉬운 부분요? 아, 혹시 내 얼굴에 멍 자국이 보여요? 아니면 드레스가 안 어울려서.”
“그런 거 아니야, 로제. 얼굴에 멍 자국은 전혀 안 보이고, 드레스는 당신이랑 정말 잘 어울려.”
헤이번은 로제가 스스로 주눅이 들까 싶어 서둘러 해명한 뒤, 제 겉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보라색 벨벳 천으로 감싸인, 작은 상자였다.
“……?”
로제가 거울에 비친 상자를 보고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헤이번이 먼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서 꺼낸 것을 곧바로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
로제의 녹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헤이번이 제게 걸어준 목걸이를 보았다고 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당신의 눈 색깔과 비슷한 걸 나름대로 찾으려고 했는데, 급히 찾느라고 똑같은 건 못 구했어.”
“헤이번, 이건…….”
로제는 손을 들어 녹색 보석이 박힌 펜던트를 쥐었다. 그리고 제 뒤편에 서 있던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헤이번이 그녀를 쳐다보며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당신 눈 색깔이랑 똑같은 걸로 다시 구해올게. 오늘은 그냥 이 목걸이로…….”
“이것도 너무 과해요, 헤이번.”
로제가 고개를 숙여 펜던트를 보고는 살짝 인상을 썼다. 보석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그렇다 하여 볼 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보석의 투명도나 광채로 볼 때, 상당히 고가의 것임이 분명했다.
“설마 그사이에 목걸이를 사 온 거예요? 페드윈 경이 할 일도 많고 바쁠 텐데.”
“잠깐. 그런데 왜 갑자기 페드윈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야?”
헤이번이 흡족한 듯 미소를 짓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로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페드윈 경한테 사 오라고 한 거 아니에요?”
“뭐?”
“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시킨 거예요? 아무리 당신 밑에 있는 사람이어도 그렇죠. 이런 심부름을 함부로 시키고 그러지 말아요. 페드윈 경도 그렇고 당신 수하라면 분명 뛰어난 인재일 텐데, 이런 심부름을 하라고 하면 자존심도 상할지 모르고…….”
“로제, 잠깐만.”
헤이번이 재차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로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향해 몸을 살짝 숙인 뒤, 시선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보석상에 가서 목걸이를 골랐을 거란 선택지는 없는 거야?”
“……예?”
“내가 왜 내 아내한테 줄 선물을 다른 놈한테 맡기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헤이번이 당연하다는 듯 꺼낸 말에 로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전에 그와 함께 살던 때처럼, 그의 사소한 농담에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던 그때처럼 말이다.
로제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제 처지가 서글펐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헛된 바람이라는 걸 아는데, 기억을 되찾은 그와 마주하고 나니 그 헛된 바람이 자꾸만 울컥울컥 속에서 밀고 올라왔다.
제게 허락될 수 없는 바람이라는 걸 잘 아는데.
어쨌든 지금은 번복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약한 이기심에 기대어서라도 아주 잠시나마 그의 아내로서, 그리고 아이의 엄마로서 살고 싶었다.
“그럼 가실까요, 아가씨?”
헤이번이 로제를 향해 손을 내밀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예전에 항상 그녀에게 그러했듯이. 장난기 많은 소년을 닮은 미소와 함께.
……저로 인하여 그가 잃어버렸던 미소와 함께.
로제는 헤이번의 손을 잡는 대신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질문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요?”
“원망?”
“당신한테 기억을 없애는 약을 탄 차를 건넨 게 나였잖아요. 당신을 속이고. ……기억이 돌아왔으니까 당신도 그때 그 일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런데 왜 지금껏 원망 한마디 하지 않는 걸까. 차라리 그런 말이라도 해 준다면 이런 헛된 욕심을 품지 않을 텐데. 그녀는 그에게 건넬 수 없는 말을 삼킨 채 그저 그 질문만을 던졌다.
하지만 하지 못한 말 때문인지 로제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어쩌면 그에게서 원망한단 말을 들을까 두려운 탓인지도 몰랐다.
그 물음에 헤이번이 미소를 지우고는 진지한 시선으로 로제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물기 어린 눈으로 저를 보던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당신이 준 차를 마시고 기억을 잃었지.”
“그런데 왜…….”
“원망하지 않아.”
헤이번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당신은 지난 5년 동안 기억 없이 살았잖아요.”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든 셈이었다. 과거의 시간 중 일부가 까맣게 지워진 채 살아야 했던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제 잘못을 용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