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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13화 (113/134)

113

“……!”

로제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파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어 제 곁에 있던 헤이번을 올려다보았다. 헤이번이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그녀에게 설명조로 말을 건넸다.

“하녀장에게도 미리 말해두라 했어. 당신에 대해서.”

아마도 페드윈에게 그렇게 지시를 했던 모양이다. 로제는 그의 빠른 행동력에 감탄을 해야 하는 건가 하다가 다시금 하녀장을 슬쩍 보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님’이라니.

페드윈에 이어 두 번째로 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나타났다. 더구나 하녀장은 제 상급자였던 이였다. 그런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불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불편했다.

하지만 하녀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의문을 품지도 않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힐끔거리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마님’을 모시기라도 하듯 공손한 태도로 임할 뿐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자리를 비우도록 하지.”

“……예?”

“돌아가야 하잖아. 그러려면 당신, 몸단장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상처를 치료하기는 했지만…… 플리타가 보면 놀라기도 할 것 같고. 더구나 이제는 내 아내로서 돌아가는 건데 제대로 갖춰 입어야지.”

“저, 헤이번, 나는…….”

“플리타가 많이 울었어, 로제.”

헤이번은 그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아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로제의 녹색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애틋한 아이를 두고 왜 떠나려 했던 건지, 잠시 묻어두었던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의문을 접고 말을 이었다.

“돌아가자. 플리타에게.”

“…….”

로제의 눈 가득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이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몸을 돌렸다.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써서 단장해 주게.”

“예, 전하.”

헤이번은 하녀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갔다.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다른 하녀 하나와 마주쳤다. 하녀 하나를 더 부른다고 하더니 하녀장과 함께 온 모양이었다.

“……저, 전하.”

하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고 보니 눈에 익은 하녀였다. 로제가 가끔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웃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로제와 친했던 하녀를 데려온 모양이군.’

사소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하녀장의 섬세한 배려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조금은 안도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아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로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제야 겨우 찾은 제 아내를, 그는 결코 놓칠 수 없었다.

* * *

“세상에, 정말이었네요! 로제가…….”

베로니카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녀장이 그런 베로니카를 단속하기 위해 엄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저는……. 그냥 너무 놀라워서요. 그렇잖아요. 로제가 공녀님을 낳은…….”

“마님께 예를 갖추거라, 베로니카.”

하녀장은 수다스럽게 계속 말을 늘어놓으려던 베로니카의 입을 막았다. 매서운 야단에 베로니카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하녀장은 그런 하녀를 보다가 한숨을 삼킨 뒤, 로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님. 시중을 받으시기에 베로니카가 편하실 듯하여 데려왔는데 이 아이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어서 사과드려라, 베로니카.”

“……죄, 죄송합니다. 마님.”

베로니카가 하녀장의 야단을 듣고 살짝 주눅이 들어 고개를 조아렸다. 로제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 하녀장님.”

“마님.”

하녀장이 로제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로제가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하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드려도 되겠는지요.”

“예, 물론이에요.”

로제는 다소 허둥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녀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는 마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어찌 아랫것들에게 공대를 하십니까.”

“……하지만.”

“페드윈 경을 통하여 전해 들었습니다. 마님을 미처 알아뵙지 못하였던 점, 사죄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로제가 하녀장의 사과에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혔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녀장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엄연히 대공 저의 안주인이 되시지 않았는지요. 혼인 신고까지 끝냈으니 법적으로도 대공 전하와 부부가 되셨는데, 그럼 마땅히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셔야 하고 또한 그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

로제는 하녀장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 혼인은 무효라 할 수도 없고, 어차피 자신은 곧 떠나야 한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그런 침묵을 제 말에 대한 수긍이라 여겼는지, 하녀장이 다시금 입을 열어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일단 목욕물부터 준비할까요? 아니면 일단 입고 가실 드레스부터 고르시겠는지요.”

“……예?”

“대공 저에 안주인이 계시지 않았던 터라 급히 드레스를 준비하느라고 기성복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도 최고의 의상실에서 가져온 것이니 마님의 품위를 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 저기.”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하녀장은 당황하여 입을 달싹이는 로제를 향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제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렇듯 침착할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황당해하지도 않고, 그냥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받아들이다니 말이다.

“하녀장님, 저는…….”

“마님.”

하녀장은 로제의 말투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를 부르는 그 호칭에 담긴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로제는 입을 꾹 다문 채 망설이다가 작게 소리 내어 대답했다.

“……목욕부터.”

말을 얼버무린 것이 그나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공대도 하대도 할 수 없는 터였다. 하녀장이 로제의 대답을 듣고는 곧바로 준비하겠다며 베로니카에게 지시를 했다.

베로니카가 로제를 힐끔 쳐다보다가 목욕물을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난 뒤, 하녀장이 다시금 로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난감하시겠지요. 당혹스러우실 테고요. ……솔직히 듣는 제 입장에서도 그러했으니까요.”

“…….”

로제가 하녀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조용히 있다가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하녀장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하녀장은 곧바로 미소를 지운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전하의 부름을 받고 일단 대공 저를 나서기는 했는데, 저 또한 마님을 어찌 대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습니다.”

“……죄송해요. 저,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로제는 하녀장의 말을 듣다가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하녀장이 그런 로제를 바라보았다.

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님’의 모습은, 불경스러운 표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랑스러웠다. 본래도 그 성정이 온순하고 얌전하던 이였다. 그런 이의 성격이 갑자기 바뀔 리 없었다.

하지만 바뀌어야 할 터였다. ‘대공 부인’의 자리는 응당 그러해야 했다. 본인을 위해서도 그렇고, 대공과 공녀를 위해서도 그러해야 했다.

하녀장은 그 점을 로제에게 말하고 싶었다. 대공 저에 들어가기 전, 로제는 그 점을 확실히 알아야 할 터였다.

“과거에 대공 전하와 마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저는 모릅니다.”

하녀장의 입에서 나온 ‘과거’란 말에 로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제가 아는 것은 그저, 오랫동안 여행을 떠났던 전하께서 기억을 잃은 채 갓난아기와 함께 돌아오셨다는 것뿐이지요. 그때 전하의 표정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너무나 소중한 누군가를 두고 온 사람의 표정이었지요.”

로제가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천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스로 기억도 하지 못하시면서도, 그분은 때로는 애틋한 그리움이 담긴 시선으로 어딘가를 한참 바라보고는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계속 시간을 보내셨지요. 그러다가 결국 체념하신 듯 돌아섰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메마르게 살아오셨어요. 자식에게조차 사랑을 주는 법도 모르시고요.”

“…….”

“그러던 전하께서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변하시더군요. 그에 따라 공녀님과의 관계도 변했죠. 그 과정에 언제나 마님께서 계셨습니다.”

하녀장의 말에 로제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로제를 바라보는 하녀장의 눈매가 평소보다 온화했다.

“전하와 공녀님을 지키고 싶으셨던 거지요?”

“……!”

“그렇기에 두 분의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애쓰셨던 거지요?”

“아……. 저는.”

로제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녀장이 그런 로제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마님께서 두 분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변하셔야 하고요. 당장 대공 저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모두가 마님을 주시할 겁니다. 마님의 흠 하나라도 찾으면 그것으로 전하를 공격할 테고, 그 흠을 빌미로 공녀님을 모욕할 테지요.”

로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찌 들으면 압박감을 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지금 당장 왕실 예법을 배우시라 하는 게 아닙니다. 귀족으로서의 태도를 갖추시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님. 짧은 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 자리에서 바로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셔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어색하고 불편하시겠지만요.”

로제는 하녀장의 말뜻을 이해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헤이번과의 혼인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미 신고 절차가 마무리되어 그와 자신은 법적으로도 엄연히 부부가 되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대공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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