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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번이 로제의 손을 꽉 잡은 채 입을 열었다. 그녀의 녹색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저를 바라보는 로제의 시선이 흔들리는 걸 알아차렸다.
‘대체 무엇이 이 여자를 망설이게 하는 것일까.’
의문이 일었다. 기억을 되찾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감격한 터라 잠시 옆으로 치워두었던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5년 만에 저와 아이의 곁으로 돌아온 까닭이 무엇인지. 그리고 본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떠나려 한 까닭이 무엇인지.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자신이 알던 로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플리타가 기다리고 있어.”
헤이번은 거듭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로제에게 제 의문을 해결해 달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죄인이 아니니까.
그러니 추궁당할 이유가 없었다. 5년 만에 만난 제 여자, 제 아내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불안하게 흔들리던 로제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로제가 흠칫 놀라 몸을 움찔거리자, 헤이번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문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페드윈이었다. 페드윈이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로제를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과할 정도로 정중한 태도에 당황한 로제도 고개를 숙여 함께 인사했다.
저를 구해준 이는 페드윈이었다. 그는 지하실에 갇혀 있던 저를 구하고, 이 낯선 곳으로 자신을 데려왔다. 헤이번의 소유인 안전가옥이라는 설명까지 해 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치료사를 불러와 저를 치료해 주기도 했고, 여러모로 제게 유난히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 더욱 정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페드윈의 그런 태도에 당황한 로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헤이번이 그를 향해 덤덤한 투로 물었다.
“하녀장이 도착했나?”
“……!”
로제가 그 물음에 놀라서 헤이번을 돌아본 것과 동시에 페드윈이 대답했다.
“예, 전하. 다른 하녀 하나도 함께 왔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헤이번의 말에 페드윈이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로제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뭔가를 고민하듯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그녀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마치 헤이번에게 하듯.
그의 예를 받은 로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열려는 순간, 페드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마님의 호위를 맡을 페드윈 에반입니다.”
“……예? 마, 마님이라니요? 게다가 호위라니. 페드윈 경,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힘든 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당혹감을 느낀 로제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헤이번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고는 말을 꺼냈다.
“내가 설명할게, 로제. 경은 나가서 하녀장을 데려오도록 해.”
그의 말에 페드윈이 재차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시 단둘이 남은 상황에서 로제가 그의 팔을 잡고는 급히 물었다.
“헤이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페드윈 경이 왜 나더러 마님이라고……. 게다가 무슨, 내 호위를.”
“간단히 설명할게, 로제.”
헤이번은 놀란 토끼처럼 저를 보는 로제의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제 팔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맞잡은 채 천천히 말했다.
“혼인 신고를 했어.”
“……예? 뭐, 뭐라고요?”
제 귀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로제는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녀가 제대로 들었다는 듯 덤덤한 목소리로 반복하여 같은 대답을 했다.
“혼인 신고를 했다고. 아까 페드윈이 당신한테 서명을 받아 갔지? 그게 혼인 신고서였어.”
“……!”
로제의 눈이 커졌다. 헤이번이 한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기 힘든 건지 그녀의 눈이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하지만 서서히 그 말을 이해한 듯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하실에서 저를 구하러 온 페드윈이 채근하는 바람에 뭔지도 모르고 그냥 서명을 해야 했다. 하기야 그 상황에서 서류의 내용을 훑어보는 게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감금과 폭행으로 정신도 또렷하지 않았던 상황이니, 그저 페드윈이 하라는 대로 제 이름을 썼을 뿐이다.
헤이번이 신뢰하는 사람이니까. 그저 그 마음 하나로 저도 그를 믿고 서명한 것인데.
‘그런데 그게…… 혼인 신고서였다고?’
“당혹스럽겠지만 어쩔 수 없었어. 공작의 사저를 수색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타당한 명분이 있어야 해서…….”
당황해하는 로제를 본 헤이번이 서둘러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그런 건 핑계일 뿐이지. ……당신과 정식으로 부부가 되고 싶었어.”
“……헤이번.”
“원래대로라면 5년 전에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게다가 제대로 청혼도 하지 않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혼인 신고부터 했네. 당신 남편, 참 못났다.”
“…….”
“하지만 앞으로 잘할게. 돌아가서 결혼식 날짜부터 잡고, 그리고…….”
“자, 잠깐만요.”
로제가 다급하게 헤이번의 말을 중간에 가로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혹스러워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기뻐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로제?”
“이건…… 이건 아니에요.”
“아니라니?”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혼인이라니요. 내가 어떻게 당신이랑……. 지금 관청에 가서 취소하면 안 될까요?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절차도 제대로 지킨 게 아니잖아요. 직접 가서 혼인 신고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로제는 창백한 얼굴로 서둘러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헤이번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나는…….”
로제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까.’
기억이 돌아온 헤이번과 재회의 기쁨을 누릴 수조차 없는 제 처지에 환멸을 느꼈다. 혼인, 청혼, 결혼식. 그런 말들에 감격하고 기뻐할 수 없는 제 운명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니 당혹스러울 거야. 이해해, 로제.”
그 순간, 헤이번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흔들리던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푸른 눈으로 덤덤히 그녀를 보았다. 저와의 혼인을 반기지 않고 되레 꺼리는 기색을 내보였으니 서운할 법도 한데, 그의 시선은 따스하기만 했다.
“혼인 신고는 정상적으로 처리됐어. 절차상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청장의 재량으로 그냥 넘어가기로 한 것이고. 그러니 되돌리는 건 불가능해.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되돌리지는 않을 거지만.”
“헤이번, 하지만…….”
“진작 했어야 할 일이야. 나는 오히려 너무 늦어서 미안한걸.”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당신은 대공이고, 나는 그저 평범한…….”
“달라진 건 없어. 나는 당신의 남편이고, 당신은 내 아내야. 그때도, 지금도.”
헤이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로제는 곤혹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아뇨. 달라졌어요. 나는…… 이제 얼마 못 살아요. 당신 곁에 있어 주지 못한다고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울음이 되어 목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더 일찍 떠났어야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떠났어야 했는데.
미련이 남아 그러지 못했던 제 행동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헤이번과의 혼인이라니. 로제는 저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일 앞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다른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참, 하…… 할 말이 있어요.”
그녀는 그를 잡고 급히 입을 열었다. 혼인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가 알아야 할 문제였다.
“선왕 폐하의 죽음에 대해서요.”
헤이번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 로제는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선왕비가 관련되어 있어요. 더클렌 공작도……. 충격적인 얘기겠지만 그래도 내 말을 믿어줘요. 납치되었을 때, 내 귀로 직접 들었어요.”
“……직접 들었다고?”
헤이번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로제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당신도 해칠지 몰라요. 플리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부디 조심해요.”
로제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헤이번이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납치, 감금, 그리고 폭행. 그 험한 일을 다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염려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으니, 어쩐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덤덤한 투로 대답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야.”
“……짐작했다고요?”
“응. 그래서 몰래 그들의 뒤를 조사하던 중이었고.”
똑똑.
헤이번이 말을 계속 이으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와 로제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전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하녀장의 것이었다. 헤이번은 그제야 자신들이 계속 서서 대화를 나누던 중임을 깨닫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단 앉아 있어.”
“하지만…….”
로제는 헤이번에게 이끌려 소파에 앉았다. 그는 그녀를 편히 앉히고 나서야 하녀장을 향해 들어오란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고 하녀장이 들어왔다. 로제가 그녀를 보고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헤이번은 로제의 어깨를 살짝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냥 있어.”
“헤이…….”
로제가 저도 모르게 그를 이름으로 부르려다가 하녀장의 눈치를 살피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하녀장이라면 분명 자신이 하려던 말을 짐작했을 터였다.
헤이번, 이라고 부르려던 것을.
“저, 하녀장님…….”
로제는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하녀장이 그녀를 쳐다보더니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마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