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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눈이 더욱 번들거렸다. 번득이는 안광이 흡사 미치광이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자벨라는 제 아비임에도 어쩐지 섬뜩한 느낌에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자는 스스로 그 자리를 버린 거다. 한낱 계집에 눈이 멀어서, 너를 마다했다는 뜻이다. 네가 그토록 매달리고, 또 매달렸는데도.”
공작의 적나라한 말에 이자벨라가 자존심이 상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아니,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를 갖기 위해 자신이 어떤 짓까지 저질렀는데.
‘그런데 당신은 내가 아닌 그 천한 여자를 택했다고?’
이자벨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공작이 그제야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이자벨라가 다시금 눈을 떴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죠?”
나직하게 묻는 이자벨라의 금안은 조금 전 제 아비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또한 제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 때와 닮아 있었다.
‘내가 갖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을 갖지 못해. 하물며 그 여자라면 더더욱.’
그녀는 제 아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 * *
“예상대로 로제 양, 아니, 마님께서는 지하실에 감금된 상태였습니다. 멍청한 놈들이 지하실만 지키고 있으니 누가 봐도 그곳이 수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쨌든 덕분에 다른 데를 수색하는 수고를 덜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페드윈이 그 특유의 수다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수고했다, 그런 치하의 말조차 건넬 정신이 없었다.
이미 충분히 참았다. 직접 달려가 그녀를 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공작과 선왕비를 상대하며 시간을 끌어야 했다. 혼인 신고를 완료하고 그녀를 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문제 없이 로제를 구해내는 것이었기에.
그렇기 때문에 구출 작전은 신중히, 그리고 조용히 이루어졌다. 헤이번은 페드윈과 다른 수하들을 믿었다. 그들은 그의 믿음대로 그녀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다. 공작이 눈치를 채기도 전에 모두 제압한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한 공작의 얼굴이 제법 볼 만했을 터.
헤이번이 걷는 속도를 살짝 늦추며 페드윈을 돌아보고는 질문을 건넸다.
“더클렌 쪽의 움직임은?”
“아직 눈에 띄게 움직이는 건 없습니다. 일단 선왕비도 왕궁으로 돌아갔고요.”
페드윈이 기다렸다는 듯 보고했다. 헤이번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금 당부조로 입을 열었다.
“공작가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파악하도록 해야 하네. 선왕비 쪽도 마찬가지고.”
“예, 전하. 염려 마십시오.”
“쉴라트 자작 쪽을 파헤치던 것도 조금 더 속도를 내라 하고.”
헤이번이 페드윈에게 몇 가지를 더 지시하다가 문득 눈앞에 들어온 문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페드윈이 그것을 깨닫고 옆으로 비켜섰다.
“안에 계십니다.”
“…….”
“치료사에게 간단한 치료를 받으신 뒤,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페드윈은 침묵하는 헤이번에게 재차 보고하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그는 제 호위 기사가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제 앞의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할 뿐.
……이 문 너머에, 그녀가 있다.
헤이번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저 문 하나만 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문을 여는 게 어쩐지 쉽지 않았다.
5년 만이었다.
아니, 그로서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넘어온 것만 같았다. 기억을 잃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당신 혼자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내 기억을 지우고 나와 아이를 떠나보낸 뒤, 당신은 그곳에 남아 어떻게 지냈을까.’
외로움을 많이 타던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홀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긴데, 이제는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았던 건지 모르겠다며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로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른 건지, 그저 속으로 부른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헤이번은 문고리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구겨진 채 손에 쥐여 있는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혼인 신고서 부본을 여태껏 가지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기억했다.
그것을 보던 헤이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5년 전, 그러니까 아직 기억을 잃기 전, 그게 마음에 걸렸더랬다. 로제와 함께 살면서 정식으로 부부가 되지 못한 것이.
물론 그녀는 단 한 번도 제게 그 점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거나 내색한 적 없지만, 그래도 내심 바랐을 것이다. 더구나 아이까지 태어났으니 법적으로도 인정받는, 온전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게 당연했다.
저 또한 그랬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약해진 몸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 나면 함께 수도로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대공이라는 제 지위, 왕위 계승 문제, 그런 골치 아픈 일들을 외면한 채 로제와 정식으로 부부가 되고 싶었다. 태어난 아이, 플리타를 사생아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에 대해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청혼도 하고 결혼식도 올리고…….
‘그러고 싶었는데.’
헤이번은 다시금 심호흡을 한 뒤, 혼인 신고서를 겉옷 안주머니에 넣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어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
로제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헤이번을 보고 깜짝 놀라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대공 전…….”
“로제.”
헤이번은 로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그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전하? 어디 편찮으신지요.”
그 와중에 그런 헤이번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로제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는 울고 싶었다. 또한 웃고 싶었다.
지금 당신 모습이 어떤지 알고, 내 걱정을 하는 거야?
그는 묻고 싶었다. 엉망이 된 로제의 얼굴에 화가 났다. 그녀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녀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또한 그녀를 이렇게 될 때까지 알아보지도 못하고 지켜주지도 못한, 한심한 제게 화가 났다.
“전…….”
로제가 재차 그를 부르려고 입을 연 순간,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헤이번이 그대로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냘픈 몸은 그저 약간 힘을 주어 끌어당겼음에도 불구하고 제 품에 들어왔다.
“전하……. 어, 저기, 저 좀 놓아주…….”
당황한 로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헤이번은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고는 토해내듯 말을 건넸다.
“미안해, 로제. 내가 너무 늦었지.”
그 순간, 바르작거리던 로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방금, 뭐라고…….”
로제가 그의 품에서 살짝 벗어난 채 그를 쳐다보았다. 특별한 말은 아닐 거다. 구출이 늦어졌다며 사과하는 것일 터였다. 물론 그 사과도 제가 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의미로 건넨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섣불리 기대해서도 안 되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저를 끌어안고 미안하다 말한 남자가 예전에 자신이 알았던, 그 남자 같아서.
그래서.
“……설마.”
로제는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헤이번이 그녀를 안았던 팔을 느슨히 했다. 그러나 언제든 다시 끌어안을 수 있도록 그녀를 온전히 놓아주지는 않았다.
물론 로제는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그럴 정신도 없었다.
섣부른 기대가 제게 상처가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설마…… 헤이번?”
로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언제나 ‘대공 전하’였던 그를, 오래전 그렇게 불렀듯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헤이번이 그녀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야. 당신 남편.”
아마 계속 기다렸던 모양이다. 멍청해서 기억은 못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저를 불러주기를 기다린 게 틀림없었다. 그는 북받쳐 올라오는 속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로제.”
헤이번이 로제를 부른 것과 동시에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다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치료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로제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빨갛게 부어오르고 여기저기 멍이 든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그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공작의 사저에서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을지 예상이 갔다.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나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헤이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본 로제가 제 뺨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을 잡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애써 입꼬리를 올린 뒤, 그녀의 손을 깍지 끼워 잡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이랑 할 얘기가 정말 많아. 묻고 싶은 것도 많고.”
“…….”
그 말에 로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고치고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당신, 기억이…… 전부 돌아온 거예요? 언제요? 어떻게?”
“당신이 두고 간 손수건.”
“……예?”
“손수건을 보다가 기억이 돌아왔어.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손수건마다 우리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아아…….”
로제는 입을 벌렸다가 다문 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그 손수건을 보고 기억을 회복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제 이기심의 흔적이었다.
그와 아이의 곁에 잠시나마 머물렀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에 두고 온 것인데…….
‘그러고 보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들의 곁을 떠나려 했는데, 이렇듯 다시 돌아가게 생겼다. 더구나 그의 기억까지 돌아왔으니 무슨 핑계를 대고 떠나야 할지 당장은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로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