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10화 (110/134)

110

헤이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공작은 묘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하하. 뭐, 대공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원래는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지만, 대공의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요. 아마도 그런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일 겁니다.”

“글쎄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 혜택을 받는 것 같더군요. 원칙대로라면 본인이 직접 가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확인을 받아야 할 일도 이렇게 간단히 처리되어 그게 큰 사기 사건으로 이어진 경우도 여러 차례였다지요? 특히 선왕께서 돌아가신 이후 이런 일이 급증하였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찌 되었든 제가 이번에는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되겠습니다.”

헤이번은 아무렇지 않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뺨이 실룩였다. 저와 제 가문을 비꼬는 말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함께 웃어줄 여유가 없는 탓이었다. 뇌물을 받고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는 것 아니냐. 따지고 보면 그 말이었으니 말이다.

“험, 험험…….”

공작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헛기침을 뱉었다. 이자벨라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무슨 업무를 처리하셨기에 이렇듯 급히 호위 기사까지 부르신 건가요? 혹여 대공 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요. 만약 그렇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헤이번. 당신의 일이라면 제가 나서서 도와드릴 수 있는데.”

“아……. 도움, 말입니까.”

헤이번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서늘한 시선으로 공작과 이자벨라를 쳐다보았다.

“……!”

순식간에 분위기가 돌변했다. 의아할 정도로 태연자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금방이라도 주위의 모든 것을 찢어버릴 듯 날카로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 변화에 공작의 낯빛도 바뀌었다.

“대…….”

“두 분에게 굳이 도움을 청할 것은 없지만…… 용건은 있군요.”

공작이 입을 연 것과 동시에 헤이번이 이자벨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헤이번의 푸른 눈을 마주한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용건이라고요?”

이제야 본론을 꺼내는구나 싶어 공작의 입매가 비틀렸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에서 헤이번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터였다.

제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을 내놓으라, 그렇게 말한다면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명색이 대공이란 자가 공작의 사저까지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겨우 그런 것이라니 말이다.

게다가 공작이 대공 저의 고용인 따위를 납치했다고 주장한들,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외려 그런 헛소리를 하는 대공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우려하게 될 터.

“말씀해 보시지요, 대공.”

그렇기에 더클렌 공작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흔쾌히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헤이번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내 아내를 데리러 왔습니다.”

“……!”

“뭐, 뭐라고요?”

공작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한 것과 동시에 이자벨라가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공작과 이자벨라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내 아내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헤이번이 턱을 괸 채 말끝을 흐리며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자벨라는 제멋대로 뺨이 경련을 일으키려는 걸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아……. 아내라니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헤이번, 당신한테 무슨 아내가 있다고.”

이자벨라가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바람에 손톱이 툭, 부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에게 아내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헤이번의 아내가 될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선왕비의 말씀이 듣기 거북하군요.”

부들부들 떠는 이자벨라를 쳐다보던 헤이번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이자벨라와 공작, 그들 부녀의 금안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로제 괸터스.”

“……!”

“부디 내 아내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에 대한 모욕은 참지 않겠습니다.”

“헤, 헤이번. 당신…….”

이자벨라는 헤이번의 입에서 나온 ‘로제 괸터스’란 이름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를 바드득 갈며 다시금 말을 하려는데, 헤이번이 다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또한 내 아내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겁니다.”

헤이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더클렌 공작은 그의 차가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내라……. 대공께서 혼인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습니다만.”

“그러셨겠지요. 조금 전에 했으니까.”

헤이번이 언제 위협을 가했나 싶게 느긋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는 공작의 물음에 대꾸했다. 그러자 이자벨라와 공작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그게, 무슨…….”

“관청에 들를 일이 있다고 했지요. 그리고 급히 처리할 서류가 있다고 했고요.”

헤이번은 그때까지 제 손에 있던 서류를 만지작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이 뭔가 짐작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지금쯤이면 제 호위 기사가 관청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였겠군요. 이게 그 부본이지요.”

헤이번이 서류를 들어 보였다. 이자벨라가 덜덜 떨며 그 서류를 보았다. 청장의 직인이 찍힌 혼인 신고서가 맞았다. 게다가 서류 하단에 두 사람의 서명이 쓰여 있었다.

헤이번 괸터스.

그리고…….

“그 천것이랑 혼인을 했다고요? 그 계집이랑 정말 부부라도 될 생각이에요? 헤이번, 당신 미쳤어요? 지금 이 행동으로 당신이 뭘 잃게 될지 알…….”

“그건 선왕비께서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헤이번은 그들에게 보였던 서류를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작과 선왕비, 두 사람이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결코 그를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사실, 벌레만도 못한 이들에게 이해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헤이번이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손에 들린 서류를 보았다.

서류 끝에 서명한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아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서명부터 했을 것이다.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성질 급한 페드윈이 무조건 재촉했을 터.

제 아내를 구출하는 일에 이렇듯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성급히 굴어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공작은 제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 테지. 실제로 그게 사실이기는 했고.

로제가 ‘고용인’에 불과한 이상, 자신으로서는 공작의 사저를 함부로 침입하여 수색할 수 없었다. 자칫 공작으로부터 역공을 당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로제가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바로 행동하지 못했다. 눈이 뒤집힐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고 애써 냉정을 되찾아야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혼인 신고를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야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고용인이 아닌 ‘아내’를 찾기 위해서라면 공작의 사저라 할지라도 수색할 명분이 생기니 말이다.

“헤이번!”

이자벨라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는지 날카롭게 그를 불렀다. 헤이번의 입가에 번졌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냉담한 시선에 울컥한 이자벨라가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문밖에서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공작의 수하가 들어왔다.

“공작님! 지하실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전부 습격을 받아…….”

“뭐?”

공작이 눈을 부릅뜨고는 고개를 돌려 헤이번을 쳐다보았다.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 아내가 지하실에 있었나 보군요. ……감히 내 아내를 그곳에 감금했던 겁니까?”

“대, 대공! 도대체 무슨 짓이오! 대공께서 보낸 자들이 내 사저를 침입한 겁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내 아내를 데리러 왔다고.”

헤이번이 버럭 언성을 높이는 공작을 향해 차분히 대꾸했다. 뒤이어 응접실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급히 달려온 공작의 수하와는 다른, 침착하기 그지없는 발소리였다.

“전하.”

“페드윈 경, 로제는?”

헤이번은 다시 돌아와 예를 표하는 페드윈을 향해 조용히, 그리고 간단히 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의 무게를 아는 페드윈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사하십니다. ……조금 다치시기는 했지만.”

“다쳤다고?”

페드윈의 말을 들은 헤이번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섰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페드윈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이자벨라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그를 불렀다.

“헤이번!”

이자벨라가 그를 뒤쫓아 나가려는 순간, 공작이 그녀를 붙들었다.

“아버지, 놓으세요! 지금 헤이번이…….”

“정신 차려라, 이자벨라!”

공작은 제 딸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이자벨라가 그런 아비에게 대꾸하려다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공작의 금안이 섬뜩한 빛을 머금은 채 번득이고 있었다.

“이제 저자와 혼인할 생각은 버리거라.”

“아버지! 하지만…….”

이자벨라가 파르르 떨며 입을 열려 했다. 그러자 공작이 조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네가 첩이라도 될 셈이냐?”

“예?”

“네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저자가 내밀었던 서류 말이다.”

공작의 말에 이자벨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이 혀를 찼다.

“천한 계집을 부인으로 들인 마당에, 네가 그 밑에 들어가 정부라도 될 생각이라면 모를까.”

“저를 모욕하지 마세요! 저는 차기 왕을 결정할 수 있는…….”

“그래. 네 손에 달려 있지. 다음 왕위의 주인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