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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09화 (109/134)

109

로제가 등 뒤로 묶인 손을 풀기 위해 손목을 비틀었다. 분명 헤이번이 와 있다고 했다. ……그가, 지금 이곳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어떻게든 나갈 거야.’

로제는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밧줄을 풀기 위해 손목을 비틀었다. 그 노력 덕분일까. 손목을 꽉 옭아매고 있던 밧줄이 조금 느슨해졌다.

“됐…….”

로제가 기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연 순간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사내들의 고함, 그리고 검을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지? 설마 그새 다시 돌아온 건가? 그런데 저 소리는…….’

더욱 조급한 마음에 밧줄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낯빛이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나가야 하는데.

무력한 자신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나가겠다고 결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되면 무조건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될지라도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곳에서 벗어날 기회를 찾아야 할 터였다. 로제가 각오를 다지며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문이 열렸다.

“로제 양, 거기에 있습니까?”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페드윈 경?”

로제의 녹색 눈이 커졌다. 어둑어둑한 와중에 건장한 사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헤이번의 곁을 항상 지키는, 호위 기사 페드윈이었으니 말이다.

“아이고…… 얼굴이 이게 뭡니까, 로제 양. 아니. 이제는 마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페드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넋이 나간 로제는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덧붙인 걸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달싹였다.

“대, 대공 전하께서 오셨다고…….”

“그렇죠.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

“페드윈 경, 저 좀 풀어주세요.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서, 선왕 폐하의 죽음에 관하여…….”

로제는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페드윈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저를 구해 달라 호소하는 대신, 헤이번에게 선왕의 죽음에 대하여 알리고자 했다.

그녀는 두려웠다. 혹여 자신이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죽을 경우, 헤이번이 제 혈육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에게 당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말이다.

제 안위 따위는 신경조차 쓸 틈이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페드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로제는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거듭 간절히 말을 이었다.

“선왕 폐하께서는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닌지도 몰라요, 페드윈 경. 제가…… 제가 들었어요. 그분을 돌아가시게 만든 장본인은.”

“저기, 로제 양.”

페드윈이 로제의 절박한 말을 끊었다. 로제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단검을 꺼내 로제의 손목과 발목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그러고는 핏물이 스며들어 묵직해진 밧줄을 바닥에 던지며 탄식했다.

“구하러 올 때까지 조금만 얌전히 계시지 그러셨어요. 살갗이 죄다 벗겨졌네. 전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난리가 날 텐데…….”

페드윈은 붉은 속살이 보이는 손목의 참혹한 상태를 재차 확인하며 뭐라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로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들을 정신이 없어 다시금 입을 열려 했다.

그 순간, 페드윈이 지금 이 상황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을 꺼냈다.

“일단 여기에 서명부터 하시죠.”

“……예?”

로제가 입을 열려다가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가 내민 건 모종의 서류와 펜 한 자루였다.

* * *

“하하, 이거, 정말 놀랐습니다. 대공께서 연락도 없이 이곳을 찾아주실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뭡니까. 아니, 애당초 이곳이 이 늙은이의 사저라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공작이 찻잔을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헤이번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피식 웃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테라벤, 아니, 괸터스 왕국 전체가 공작의 수중에 들어간 지 한두 해 지난 것도 아닌데. 이런 사저 정도야 곳곳에 널려 있는 게 당연하겠지요.”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대공께서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공작이 헤이번의 말에 재차 웃었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웃음이 나와 웃는 게 아니라는 걸 그도 헤이번도 잘 아는 바였다.

공작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순간, 헤이번이 다시금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공작이 아닌, 그의 옆에 앉아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자벨라를 향해서였다.

“그런데 선왕비께서도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친을 뵈러 오신 모양이군요.”

“아아……. 예, 아무래도 날씨도 추워지고 그래서요. 아버지께서 어찌 잘 지내시나 자식 된 마음에 염려도 되고.”

이자벨라가 헤이번의 말에 대꾸하다가 입이 마른 듯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녀가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들렸다.

공작은 미간을 좁힌 채 헤이번을 힐끗 쳐다보았다. 응접실에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에도 불구하고 헤이번은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는데.’

헤이번을 쳐다보던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도무지 헤이번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헤이번은 명목상으로 길 건너편의 관청에 들를 일이 있어 방문하였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공작이 순진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제 사저라는 걸 아는 것부터 ‘의도’가 있는 방문임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정말 우연히 들른 사람처럼, 태연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고 시답잖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분명히 그 계집을 찾으러 온 것일 텐데.’

사라진 여자의 행적을 추적하였기에 이곳의 위치를 알아냈을 터였다. 물론 고용인일 뿐인 여자를 찾겠다고 이렇게 제 사저를 방문한 건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억은 없어도, 품었던 계집이라 그건가.’

공작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렸다. 그렇게 고고한 척하던 대공도 어쩔 수 없는 사내였다.

‘하긴 그 정도 외모라면…….’

공작은 지하실에 두고 온 로제를 떠올렸다. 여러 번 뺨을 맞아 엉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꽤 고운 편이었다. 게다가 핏기 없이 창백한 모습은 어쩐지 괴롭히고 싶은 충동을 들게 했고…….

그러니 그녀에게 끌리는 헤이번을 이해 못 할 까닭은 없었다. 평소 여자에게 관심도 없던 자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예상 밖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목적으로 방문한 게 분명한데.’

공작이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헤이번이 로제를 찾기 위해 온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의 행동이 문제였다.

그는 응접실로 안내된 뒤,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의 존재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외려 너무나 태연하게,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방문한 사람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설마 이러고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을 시켜 내 집을 함부로 뒤지지는 않을 터.’

만약 그랬더라면 밖에서 소란이 일었을 것이다. 게다가 귀족도 아닌 그저 평민에 불과한 이를 납치하였다 하여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자신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으니 이렇듯 얌전히 있는 것일 터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공작이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 미간을 모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응접실 밖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공작의 수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공작은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던 찰나,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수하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수하가 머뭇거리다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대공 전하의 호위 기사가 급한 일이라며 전하를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뭐? 대공의 호위 기사?”

공작과 이자벨라의 시선이 교차했다. 공작이 불안해하는 딸을 향해 눈짓을 보낸 뒤, 애써 웃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호위 기사가…….”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페드윈이 공작의 수하를 밀치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이자벨라가 제 아비를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공작이 소파 팔걸이를 잡고 몸을 반쯤 일으키려는 순간, 헤이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이리로 오라고 했는데, 두 분이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집주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은 점, 사과드리지요.”

“아, 아닙니다. ……처리해야 할 서류, 말입니까?”

공작이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그를 쳐다보며 느릿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헤이번이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페드윈이 헤이번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수고했네, 페드윈 경.”

헤이번이 그에게서 서류를 받아든 뒤에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 모습을 본 공작과 선왕비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뒤이어 공작이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편히 묻으며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급한 일이었나 보군요. ……뭘 하느냐. 대공께 펜을 가져다드려라.”

“……아, 예.”

공작의 수하가 제 주인의 명을 받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펜을 건넸다. 헤이번이 그 펜을 받아들며 가볍게 미소를 지은 뒤, 서류 밑에 서명을 했다. 그러고는 서류 중 한 부는 그가 가지고, 다른 한 부는 페드윈에게 돌려주며 당부조로 말했다.

“지금 바로 가서 접수하게.”

“예, 전하.”

페드윈이 서류를 받아 챙기고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헤이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인사를 받은 뒤, 제 것을 챙기면서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공작이 언제 긴장했던가 싶게 느긋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어디, 관청에 내는 서류인가 봅니다?”

“예.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관청에 들를 일이 있었다고요. 마침 길 건너편이라 가까워서 좋군요. 지금 바로 처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관청의 수장이 더클렌의 방계라 하던데……. 그 수완이 좋아서, 이렇게 돈 몇 푼으로도 직접 갈 필요 없이 서명만으로 절차를 끝낼 수 있으니 참으로 편리하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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