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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라는 로제의 말을 듣다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공작이 말릴 새도 없이 다시금 로제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다른 손으로 뺨을 때렸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어! 확실히 5년 전과는 달라. 그때는 내 눈조차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천한 것이, 감히……. 왜? 이제는 다르다고 누가 속살거리기라도 했니? 대공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너를 꾀기라도 했어?”
“이거, 놓으…….”
“도대체 누가 너 같은 것에게 그따위 바람을 집어넣은 거야? 말해 봐. 그때의 일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되는데. 설마 포어킨 후작? 아니야. 그자만큼 괸터스의 핏줄에 집착하는 이가 없는데, 그가 너처럼 천한 피가 괸터스에 섞이는 걸 용납할 리 없지. 그럼 대체 누구지? 누가…….”
이자벨라는 잔뜩 흥분했는지 빠르게 중얼거리며 로제의 머리칼을 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로제의 앞을 이리저리 오가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악! 내가 왜 이따위 천것과 말을 섞어야 하는 거야! 고작 이런 꼴을 당하려고 내가 리비어스를 죽인…….”
“이자벨라!”
공작이 딸의 히스테리를 방관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흥분한 딸이 선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저도 모르게 발설하려 한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로제는 이미 그 말을 들은 뒤였다.
리비어스.
예전, 그러니까 국경 지대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살던 때라면 그 이름이 누구를 뜻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 저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괸터스 왕실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리비어스가 죽은 선왕의 이름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로제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황급히 표정을 감췄다. 횃불 때문에 어둠이 가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햇살 아래에 있는 것처럼 환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등 뒤로 묶인 손끝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였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말이었다.
자신이 들은 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선왕비는 본인의 남편이자 이 나라의 국왕이었던, 또한 헤이번의 형제였던 이를 죽였다고 말하려 했다. 공작이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는 건 공작 역시 선왕비가 저지른 죄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혹은, 그에 가담하였다거나.
“……!”
로제는 저도 모르게 추측을 하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단단한, 그 누구도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의지가 서렸다.
……마음이 바뀌었다.
이 잔혹하고 무서운 여자가 혹여 제 아이의 새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헤이번의 곁에도 이런 여자가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을 죽인 여자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선왕비가 죽인 사람이 바로 헤이번의 형인데.
‘돌아가야 해.’
로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헤이번에게 이 무서운 사실을 알려야 할 터였다. 그녀는 뒤로 묶인 손을 꽉 움켜잡았다.
죽을 것이라 체념하고 받아들였을 때와 달리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반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두려움만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 이상 의지도 강해졌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갈 것이라는.
그래서 헤이번과 플리타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쯧, 선왕비를 밖으로 모셔라.”
그 순간 공작이 혀를 차며 누군가에게 지시했다. 여기에 더 딸을 놔두었다가는 크게 말실수를 할 거란 생각에 그가 내린 판단이었다.
“아버지, 저는 못 나가요! 저 계집을…….”
이자벨라는 그런 아비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그의 냉혹한 시선을 받고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다시금 멈춰 서서 짓씹어 뱉듯 공작을 향해 말했다.
“알아낼 걸 다 알아낸 뒤에는 저 계집의 머리를 왕궁으로 보내도록 하세요.”
죽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곱게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공작은 제 딸의 잔인한 말에 혀를 차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의 얼굴이 창백했다. 저에 대한 처분을 본인들 마음대로 결정하는 이들의 모습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 죽음을 한낱 짐승의 것보다도 가치 없이 여기는 그들의 태도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반드시 나갈 것이란 의지만으로는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끌어야 할까.’
로제는 조금 전 선왕비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알아낼 걸 다 알아낸 뒤에는.
그들이 저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아마도 뭔가 의도한 바가 있어 5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의도가 있기는 했지. ……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죽기 전에 남편과 아이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그런 바람 말이다. 그들은 저에 대해 알아냈지만,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로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이 오해하는 대로 놔둘 생각이다. 그래야 시간을 끌 수 있을 터였다. 그 과정 속에서 모진 일을 겪게 될지라도 말이다.
“자, 그럼…… 우리 이제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할까. 일단 가볍게, 손톱부터 뽑도록 하지.”
공작이 잔혹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커다란 집게를 들고 다가왔다. 로제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사내를 보고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선왕비가 그 광경을 확인한 뒤, 피식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계단을 급히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공작의 수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님! 아, 선왕비전하!”
“무슨 소란이냐?”
이자벨라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와 동시에 공작이 로제의 손톱을 뽑으려던 사내를 저지시킨 뒤,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하였거늘, 무슨 일이기에 이렇듯 소란을 피우는 게냐?”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러나 대, 대공 전하께서…….”
공작의 수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죄한 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공작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누구?”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공작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없다고 했어야지! 아니, 애당초 이곳이 내 사저인 것을 밝히지 말았어야지, 이런 미련한!”
공작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수도 내에 마련해 둔 사저의 위치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공개한 바 없었다. 특히 이곳은 더욱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곳은 더클렌의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가장 더럽고 추악한 부분을 처리하는.
그 과정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오늘, 로제도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헤이번이 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런…….”
공작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이자벨라가 그 얘기를 듣다가 와락 구겨진 얼굴로 그를 향해 물었다.
“헤이번이 지금 여기에 왔다는 거예요? 설마 저 계집을 찾으려고 온 건 아니겠죠? 천한 계집 하나 없어졌다고 그새…….”
“조용히 좀 하거라, 이자벨라.”
공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자벨라의 입을 닫게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로제가 있는 쪽을 보았다. 로제 역시 그들의 대화를 들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운이 좋은 계집이로군.”
벌써 손톱과 발톱이 모조리 뽑혀 나갔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저를 보고 있으니, 정말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그 운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일단 대공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곳으로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잘 지키도록 해라. 그가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테니.”
“예, 공작님.”
로제의 주변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공작은 그를 지나쳐 로제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공작의 금안을 마주하고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저 가볍게 건드린 것뿐인데도 벌써 여러 번 따귀를 맞아 검붉은 멍이 든 뺨은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오려는 걸 삼키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남편이 구해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한낱 하녀……. 아, 이제는 유모인가? 여하튼 대공이 유모를 위하여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로제의 뺨을 건드리던 공작의 손이 느릿하게 목덜미 쪽으로 움직였다. 늙은 사내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그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공작이 낮게 웃고는 애석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하얘서 만지는 맛이 있는데 말이야. 너무 일찍 망가뜨렸군. 하여간 성질 급한 딸 때문에…….”
“아버지, 뭘 하시는 거예요? 헤이번이 왔다고 하잖아요!”
이자벨라가 출입문 근처에서 그를 채근했다. 공작은 로제의 목을 지나 가슴 쪽으로 손을 내리려다가 딸의 재촉에 인상을 쓰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사내들 또한 공작과 선왕비의 뒤를 따라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나가고 난 뒤에도 로제는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낮게 뭐라 지시하는 소리.
그런 소리가 하나, 둘, 사라지고 적막이 찾아들고 나서야 로제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흐읍…….”
심호흡을 하던 로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 전 공작의 손이 지나간 곳을 박박 문질러 닦고 싶었다. 그러나 손이 묶여 자유롭지 않은 터라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손이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나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