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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07화 (107/134)

107

그녀는 몸을 재차 꿈틀거리며 문 쪽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문 옆에 서 있는 자가 커다란 횃불을 들고 있는 탓에 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이 여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방금 들은 목소리로도 성별은 구별할 수 있으니 바보 같은 생각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그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오랜만이로구나. 아니지…… 5년 만이라고 해야 하나?”

“서…… 선왕비전하.”

사락사락,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다가왔다. 그러자 흐릿하게 보이던 형체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가슴 아래쪽까지 구불구불 흘러내린 붉은 머리였다. 그리고 조금 더 시선을 들자 저를 보고 있는 금색 눈과 마주쳤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아니, 고작 그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저를 죽일 듯 쏘아보고 있는.

“로제. 그 이름을 5년 전에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긴 천것의 이름을 들었다 해도 지금껏 기억할 일은 없었겠지. 그럴 필요도 없었을 테고. ……감히 비천한 계집 따위가 나를 농락할 거라 누가 생각했겠니? 안 그래?”

“저는…….”

“이렇게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주제에 말이야.”

선왕비, 이자벨라가 파랗게 질린 채 저를 보는 로제를 내려다보다가 뒤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를 따라온 사내들 두어 명이 냉큼 다가오더니 로제를 거칠게 붙잡아 일으켰다.

로제와 이자벨라의 눈높이가 비슷해진 순간, 이자벨라가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짜악.

그리고 다시 짜악.

로제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파랗게 질린 뺨에 금세 붉은 손자국이 생기더니 이내 부풀어 올랐다.

“너 따위가 감히 그를 욕심내?”

이자벨라는 로제의 머리칼을 움켜잡고는 저를 보게 했다. 머리칼뿐만 아니라 두피까지 뜯겨 나갈 것 같은 고통에 로제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신음을 내뱉지 않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스스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왕비의 앞에서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5년 전, 그녀에게 굴복하여 헤이번에게 기억을 지우는 차를 마시게끔 한 것으로 충분했다. 제가 낳은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더 이상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헤이번을 두고는 지고 싶지 않았다.

“뭐야? 그 시선은? 이게 진짜…….”

그런 로제의 시선이 건방지게 보인 것인지, 이자벨라가 파르르 떨더니 그녀의 머리칼을 쥐고 있던 손으로 재차 따귀를 때렸다.

한 대, 두 대, 세 대.

뺨이 검붉은 색으로 변하고 입술이 터졌다. 지켜보던 사내들조차 혀를 찰 정도로 잔혹한 광경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독한 계집이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이자벨라를 막지 않았다. 그만하라,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누가 더클렌 공작의 딸이자 선왕비인 그녀를 막을 수 있겠는가.

“이자벨라, 그쯤이면 됐다. 뭐 하나 알아보지도 않고 죽일 셈이냐?”

바로 그 순간, 더클렌 공작이 안으로 들어서다가 상황을 보고는 혀를 차며 선왕비를 저지시켰다. 이자벨라는 로제를 한 번 더 때리려다가 제 부친의 목소리에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자벨라.”

다시금 경고하듯 건넨 공작의 부름에, 이자벨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서면서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화려한 문양의 레이스 장갑이 어느새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쯧.”

공작은 그것을 보며 인상을 쓰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 로제의 양팔을 잡고 있던 사내들이 그 시선에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공작이 그 예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다가와 로제의 턱을 치켜들었다.

“……흐윽.”

로제가 억지로 붙들린 채 간신히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공작이 툭 던지듯 물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냐.”

“……바, 바라는 거라니요?”

로제는 공작의 물음에 신음을 삼키고는 간신히 되물었다. 그러자 이자벨라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발끈하여 다시 다가오며 외쳤다.

“바라는 게 있으니 쥐새끼처럼 몰래 대공 저에 들어간 거겠지! 대공의 부인이라도 되고 싶었니? 하! 그게 가당하기나 한…….”

“이자벨라.”

공작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딸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이자벨라가 그런 아비의 반응에 울컥하더니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공작은 얌전해진 딸을 힐끗 보고는 로제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로제가 바르르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잡혔던 턱이 얼얼했다. 하지만 여전히 손이 묶여 있는 터라 아픈 턱을 만질 수조차 없었다.

“앉도록 하지.”

공작이 로제의 녹색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명을 받은 사내들이 다시금 로제의 팔을 잡아끌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커다란 횃불에 비친 방의 풍경이 그제야 로제의 눈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자신이 갇혀 있었던 곳은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이었다. 게다가…….

로제는 사내들이 저를 끌고 간 자리에 피가 여기저기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핏기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본 공작이 마치 대답이라도 해 주듯 입을 열었다.

“더클렌에 감히 반기를 든 자들을 바로 이곳에 데려와 처단했지. 지난 수백 년 동안, 이곳에서 온전한 몸으로 나간 사람이 한두 명 정도 있었으려나. ……아, 물론 살아서 나갔다는 게 아니라 시신으로 나간 걸 말하는 거지만 말이다.”

“……!”

공작의 잔혹한 말을 듣던 로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사내들이 로제를 딱딱한 나무 의자에 거칠게 앉힌 뒤,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 대신 더클렌 공작이 느릿느릿 다가와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몸을 기울였다.

늙은 공작의 금안이 섬뜩한 빛을 머금은 채 로제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었다. 흡사 그 모습이 고위 귀족이 아닌, 도축을 업으로 하는 자를 닮아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로제의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 반응을 본 공작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주 둔한 계집은 아닌 모양이구나.”

“…….”

“하긴, 5년 전에도 그랬지. 과한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제 처지를 잘 알고 순응하였으니, 그 덕분에 네 목숨을 지금껏 부지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 그런데…….”

공작이 다시 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창백한 뺨을 쓸어내렸다. 축축한 뱀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를 밀쳐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결박된 몸으로는 그저 몸을 비트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5년이라는 세월이 제법 길었던 모양이야.”

공작은 그의 손길을 피하려고 몸을 비튼 로제의 턱을 다시금 잡아 저를 보게끔 했다.

“이렇게 헛된 욕심을 품고 수도까지 온 것을 보면 말이지.”

그는 마치 몇 번 가지고 놀다가 버릴 인형을 대하듯 로제의 턱을 잡은 채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다. 그 탓에 공작에게 붙들린 로제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공작을 쳐다보는 로제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저를 보는 공작의 매서운 시선에도, 그 뒤편에 서서 그녀를 죽일 듯 쏘아보고 있는 이자벨라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려 그 잔혹한 시선들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시선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공작의 흥미를 끌어낸 것일까.

공작이 이채 서린 눈으로 로제를 보다가 그녀의 턱을 잡았던 손을 내린 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수도에 온 까닭이 무엇이냐. 그때 분명히 죽은 듯 살아가라 경고하였는데.”

“……아이를, 보고 싶었습니다.”

로제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로서는 절반 정도의 진실이 담긴 대답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듣는 쪽에서는 그렇지 않았는지, 이자벨라가 냉큼 받아쳤다.

“웃기는 소리! 헤이번의 옆자리가 탐이 나서 온 주제에!”

적의를 드러낸 목소리에 로제가 공작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이자벨라를 보았다. 붉은 머리의 여자가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부들부들 떨며 로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를 헤이번에게서 억지로 갈라놓았던, 제게서 그를 떠나보내게 만들었던 여자였다.

당시에는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이라 여겨 스스로를 더욱 초라하게 여겼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자신에게 그저 남편과 아이를 빼앗아 간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로제는 아픈 와중에도 헛웃음을 삼켰다. 선왕비와 공작, 두 사람 모두 추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런 그들에게 짓눌려 헤이번의 기억을 지우는 데에 한몫 거들었던 제 모습이 한심하고 후회스러울 정도로.

게다가 이제는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납치하기까지 했으니, 이들을 범죄자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을 터였다.

어떻게 이들이 저에 대해 알아낸 건지 모른다. 하지만 선왕비나 공작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니 한낱 평민의 과거 따위야 알아내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제 그런 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떠나온 길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삶은 더 이상 제게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이들에게 빼앗길 것도 없었다.

로제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이자벨라를 쳐다보다가 덤덤한 투로 말했다.

“그의 옆을 탐낸 사람은, 제가 아니라 선왕비전하가 아니신가요?”

그래서 그녀는 이자벨라가 조금 전 제게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자벨라가 그 태도에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지금!”

“그렇기에 제게 기억을 지우는 약을 차에 타서 건네라 하셨고요. 헤이번, 그 남자에게 말이죠.”

“감히 너 따위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 앞에서 눈까지 똑바로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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