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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06화 (106/134)

106

“저기, 저쪽이에요.”

소년이 헤이번을 안내한 곳은 골목 안쪽의 후미진 장소였다. 그 근처의 쓰레기를 전부 모아놓는 곳인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부터 심한 악취가 진동했다.

“전하, 제가 가방을 가져오겠습니다.”

페드윈이 코를 찌르는 악취에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헤이번을 만류했다. 대공이 더러운 쓰레기장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헤이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오히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로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반드시 찾아내야 할 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어떤 위험에 빠져 있는지 모르는데…….

헤이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뼈마디가 구부러지면서 새하얗게 변했다.

‘정신 차려! 그녀를 구하기도 전에 이성을 잃어버릴 셈이야?’

그의 가슴속에서 또 다른 제가 외쳤다.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뒤, 천천히 주먹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마음만 조급하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로제를 납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를 쫓으라 수하들에게 명령해 둔 상황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낼 터였다.

어린 소년이 의외로 눈썰미가 좋았던 터라 마차 외관의 세세한 특징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흥분하여 자칫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가는 로제를 더욱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릴 수도 있기에.

‘누가 로제를 납치한 건지……. 무슨 목적으로 데려간 건지도 파악해야 해. 그래야 거기에 맞춰 대처할 수 있어.’

헤이번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내 다시 시선을 들자 마침 소년이 쓰레기가 산처럼 쌓인 곳을 뒤적이다가 가방을 찾았는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여기예요, 나리! 아니, 전하! 여기 가방이 있습니다!”

소년의 말에 헤이번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소년이 가리킨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물이 묻어 제 손이 더러워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가방이 맞냐?”

뒤따라온 페드윈이 소년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물음에 소년이 뭐라 대꾸하는 듯했지만, 헤이번은 굳이 그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가방이었다.

가방이 특이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어떤 표식을 해 둔 것도 아닌데, 로제의 가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헤이번은 망설임 없이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로제, 당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감정이 밀려 나왔다. 헤이번은 가방 안에 억지로 넣은 게 분명한 담요 한 장을 꺼냈다. 그러자 그 뒤에 옷가지 몇 벌 정도가 고작인, 초라한 짐이 보였다.

“겨우, 이걸……. 이따위 것이 뭐라고.”

헤이번은 짓씹어 뱉어내듯 중얼거리며 담요를 꽉 움켜쥐었다.

알아보았다. 그녀가 챙겨 넣은 담요가 무엇인지. 그래서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것까지 가져갈 거라면 애당초 왜 떠나려고 한 건데.”

그녀가 제게 덮어주었던, 그리고 잠에서 깬 자신이 다시 그녀에게 덮어주었던 담요였다. 저택 내의 담요가 이것 하나만은 아닐 테지만, 이 하나만이 자신과 로제에게 의미가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담겨 있기에.

그래 봤자 자신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녀는 제게 본인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시간이었지만…….

게다가 뭘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술 한잔을 나누며 대화를 하다가 잠이 든 것뿐이었다. 잠든 이에게 담요를 덮어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도 품고 가겠다는 듯 담요를 가방에 넣어간 것이다.

이게 뭐라고.

……제 아내도 기억하지 못하는 못난 남편이 뭐 대단하다고.

“……로제.”

헤이번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페드윈이 그런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 손을 뻗었지만 이내 거두었다.

언제나 대단한 남자였다. 왕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공의 지위에 있어서 대단하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이 남자 자체가 대단하단 뜻이었다.

기억을 잃고 돌아온 뒤,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져 공백 상태가 됐다면 누구든 혼란스러워할 텐데도, 헤이번은 그런 약점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을 잃기 전보다 더 냉정해졌다면 모를까.

그런데 그런 남자가 한 여자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사라진 기억 속 아내, 공녀를 낳은 생모라는 여자로 인해서.

……본인의 정체를 숨긴 채 대공 저에 들어온, 로제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인해서.

‘이게 과연 좋은 일인지 모르겠네.’

페드윈은 불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다. 그런 주군을 믿지 못하는 건 수하 된 자가 할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의 뜻에 따라 ‘마님’을 찾는 것이었다. 저렇듯 절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녀를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해야 할 판이 아니던가.

“페드윈 님! 마차의 행방을 찾, 아! 대공 전하!”

바로 그때, 마차를 추적하는 임무를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기사 하나가 달려왔다. 헤이번이 곧바로 일어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마차가 어디로 갔지? 수도를 빠져나갔나?”

“아니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사는 헤이번의 질문에 대답하려다 말고 주위를 힐끗거렸다. 그 모습에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페드윈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저하는 기사를 채근했다.

“어서 말하게. 전하께서 기다리시지 않나.”

“……더클렌 공작 소유의 사저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더클렌. 헤이번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스쳤다. 아니, 그것은 미소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살기가 형태를 갖게 된 것이라 한다면 모를까.

“선왕비의 짓이로군.”

헤이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더클렌’이란 이름을 들은 순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로제가 누구인지 알아낸 것이다. 자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선왕비가 먼저.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겠다.”

그는 그때까지도 움켜쥐고 있던 담요를 놓은 뒤, 입을 열었다.

* * *

“……흐윽.”

로제는 목 뒤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내뱉으며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정신만 들었을 뿐, 몸은 자유롭지 못했다.

“으윽, 으…….”

그녀는 제 손과 발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단단히 묶여 있는 듯 손목조차 비틀 수가 없었다. 되레 손목과 발목을 묶은 밧줄에 피부가 벗겨진 것인지 통증이 느껴졌다. 다 낫지 않은 상처에 소금물이라도 부은 것처럼 말이다.

“……으흑.”

하지만 로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몸을 꿈틀거렸다. 저를 묶은 밧줄을 풀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단 일어나 앉기라도 해야겠단 생각에서였다.

하늘이 그 노력을 안쓰럽게 여긴 덕분일까.

그녀는 두 손과 발이 모두 묶인 상태에서도 가까스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 대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말이다.

“후우…….”

로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잠시 벽에 등을 기댔다. 차디찬 돌벽에서 전해진 냉기에 몸이 떨렸지만, 반대로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어디야?’

로제의 녹색 눈이 제가 갇혀 있는 공간을 살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지하실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아마도 밖으로 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는 곳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손과 발을 이렇듯 결박해둔 자들이 제 입에 재갈조차 물리지 않았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던 입을 꾹 다문 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워낙 놀랐던 탓인지 머릿속이 전부 뒤죽박죽이었다.

‘침착해야 해. 하나씩 생각해 보자. 그래, ……일을 그만둔다고 말하고, 가방을 챙겼어.’

로제는 제 자신을 다독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떠올리기에는 아픈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무조건 기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대공 저를 나서야 했던 제 처지를 떠올리다 보니 저절로 납치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제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던 사내의 손. 그리고 목 뒤쪽에 강한 타격을 입고 마차에 강제로 태워졌던 상황까지.

“도대체 누가…….”

인신매매단이었던 걸까. 로제는 불안과 두려움을 애써 떨쳐내며 다시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작은 횃불을 제외하면 그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손과 발이 묶인 상태에서는 일어서는 것조차 어려웠다. 더구나 그녀의 몸 상태도 건강한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벽에 기대어 몸을 지탱한 채 일어서는 데에 성공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여기에 가두어 놓았, 젠장! 이 계집이 지금 뭘 하는 거야!”

누군가를 안내해 온 듯 사내가 말을 하다 말고 로제를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로제의 몸이 나동그라지면서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콜록!”

뺨을 얻어맞은 것도 아팠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생긴 통증이 더욱 극심했다. 로제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하다가 이내 입 속의 뭔가를 토해냈다.

다름 아닌, 피였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비릿한 냄새만 맡고도 자신이 각혈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 들어 몸이 더욱 악화되면서 코피를 쏟고 각혈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기에 로제로서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그렇지 않았는지 짜증스러운 투로 소리를 질렀다.

“드레스에 피가 튀었잖아! 도대체 왜 쓸데없이 때려서 피를 토하게 만들어?”

“소, 송구합니다! 선왕…….”

그렇듯 우악스럽게 제 뺨을 때린 사내가 쩔쩔매며 사죄를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로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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