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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05화 (105/134)

105

헤이번이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자 집사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이번과 집사의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이내 뛰기 시작한 그를 늙은 집사가 따라잡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아, 페드윈 경! 전하를 어서 따라가게!”

뒤쪽에서 집사가 페드윈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헉헉대는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헉, 전하,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는 겁니까?”

“로제를 찾아야 해.”

“전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냥 지시만 하셔도 될…….”

“페드윈 경.”

헤이번은 저택 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춰 서서 제 호위 기사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을 마주한 페드윈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제 주인이 그렇듯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처음 본 탓이었다.

아니, 기억을 잃은 채 돌아왔을 때 이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가.

“내 아내를 찾는 일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나.”

“……예, 아내를 찾는, 예엑??”

페드윈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헤이번이 손을 내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게, 페드윈 경. 다른 사람이 들을 수도 있으니까.”

“하, 하지만 전하. 방금…… 그러니까 아, 아내…….”

“그래. 내 아내. ……로제가 내 아낼세. 한심하게도 이제야 기억이 났어.”

헤이번이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페드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럼, 고, 공녀님을 낳으신 분이……. 그러고 보니 공녀님과 로제 양, 아니, 마, 마님의 눈 색깔이 비슷했지요.”

페드윈은 큰 충격을 받아 말을 더듬는 와중에도 로제에 대한 호칭을 냉큼 바꾸었다. 그 말에 헤이번이 잠시 미소를 짓는 듯싶더니 다시금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거야, 당신.’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5년 만에 제 앞에 나타났던 건지, 그리고 왜 지금 갑자기 사라져버린 건지, 그 어느 것 하나 짐작이 되지 않았다.

로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이제는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그만큼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아. 로제를 찾는 게 급선무지.’

헤이번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의문을 애써 묻어둔 뒤, 다시 페드윈을 향해 지시했다.

“로제가 어디로 갔는지 지금 바로 행방을 찾아보도록 하게. 혹시 수도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르니 관문마다 사람을 보내도록 하고.”

“예, 전하!”

페드윈이 한 손을 들어 제 가슴팍에 대고는 예를 표했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뛰어갔다. ‘마님’의 행방을 수소문해야 하니 저절로 마음이 급해진 탓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헤이번 역시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렇다 해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로제, 당신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무작정 저택을 빠져나갔다.

* * *

땅은 젖어 있었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였지만, 그 내린 양이 적지는 않았던 듯했다.

“……또 비를 맞으면서 걸어간 건 아니겠지?”

헤이번은 거리를 걷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에 비에 흠뻑 젖은 채 위태롭게 길을 걷고 있었던 로제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호되게 앓았던 일도 기억났다.

로제는 몸이 약한 편이었다. 함께 살던 시절에도 종종 몸살을 앓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열이 나면 그 곁에 자리한 채 밤을 꼬박 새우고는 했다.

「당신, 안 잤어요? 피곤할 텐데.」

「난 괜찮아. 당신 얼굴 마음껏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걸.」

「뭐예요. ……푸훗. 하긴 내가 좀 예쁘긴 하죠?」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대고 농담을 덧붙이면 민망해하며 얼굴을 붉히면서도 냉큼 받아치던 로제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웃음이 많은 여자였다. 늘 밝고 씩씩하던…….

“……로제, 그랬던 당신이.”

헤이번의 발걸음이 멈췄다. 행인 하나가 느닷없이 멈춰선 그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고 느꼈는지 뭐라 하려다가 그의 차림새를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 자리를 피했다.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고고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귀족이니 말이다.

하지만 헤이번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체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의 로제는 5년 전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 그녀를 제가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라 할 수는 없겠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로제에게서 웃음을 앗아간 것인지, 헤이번은 그것을 알고 싶었다.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그늘, 그리고 가끔씩 내비치던 처연한 미소. 그런 것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로제에게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물론 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졸지에 남편과 아이를 한꺼번에 빼앗겼던 그녀가 어찌 아무렇지 않게 행복하게 살았겠는가.

본래도 혼자였던 사람인데, 처음으로 가졌던 가족을 전부 잃었으니…….

“나를 더 빨리 찾아왔어야지. 아니, 지금이라도 왔으면, 그럼 나한테 솔직히 말이라도 했어야지.”

헤이번이 혼잣말을 하다가 주먹을 쥔 손으로 제 가슴팍을 때렸다. 가슴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당신 속은 이보다 더 문드러졌겠지.’

남편이란 사람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제가 낳은 아이에게 어미라 말하지도 못하던 상황에서 얼마나 가슴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아파했을까.

‘그래서였나. 당신이 웃음을 잃어버린 건. 그렇듯 아프게 웃게 된 건.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나와 플리타의 곁에서 떠나겠다고 결심한 걸까.’

헤이번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그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페드윈이었다. 헤이번은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페드윈이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찾았, 후욱, 찾았습니다!”

“로제를 찾았단 건가? 어디에 있지?”

그새 로제를 찾은 건가 싶어 헤이번의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그러자 페드윈이 고개를 내저은 뒤, 다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목격자 말입니다. 마님을 본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헤이번이 굳은 표정으로 페드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예감대로 페드윈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납치되신 것 같습니다, 전하.”

“뭐?”

뜻밖의 말에 헤이번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비가 다시 오려는 건지 바람이 서늘하면서도 축축했다.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와중에도 어느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럴 만한 자리도 아니었다. 참혹하게 죽은 청년의 시신, 그리고 그 곁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는 소년이 있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제 주인이 침묵하고 있기에 함부로 나서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 순간, 페드윈이 시신의 벌어진 목 부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냥 눈으로 봐도 끔찍하여 비명을 지를 법한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벌려 보이는 모습이 냉정하게만 느껴졌다.

“여기 보시면 경동맥과 기도가 한 번에 잘린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칼로 목을 벤 즉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소년의 말로도 그러했고요.”

“……전문가의 솜씨로군.”

헤이번 역시 피로 범벅이 된 시신을 무심한 눈으로 살피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페드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예.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깔끔하게 살인을 하기는 힘들지요.”

“그런데 이자가 로제를 본 목격자였다, 그건가?”

“저 녀석의 말로는 그렇답니다.”

페드윈은 지금도 훌쩍이며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는 소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마주친 소년이 제풀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혀, 형이…… 제프 형이 그 누, 누나가 어떤 남자한테 납치되는 걸 보고 도망갔는데. 흐으……. 그 누나를 마차에 태워 떠난 뒤에 다, 다른 사람들이 형을 찾아내서, 끄윽…….”

소년은 말을 하다 말고 딸꾹질을 했다. 희게 질린 얼굴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헤이번이 그 모습을 무심히 쳐다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 가족이냐.”

“끅,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동네 형인데, 좀 가볍고 겁이 많기는 해도 조, 좋은 형이었어요. 아까도 도, 도망가기는 했어도 그냥 도망간 게 아니라 분명 도움을 청하려고 해, 했을 거예요.”

소년은 억울하게 죽은 이를 떠올렸는지 눈물을 펑펑 쏟다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낡은 소매, 그리고 지저분한 손이 헤이번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잠시 미간을 좁히고 있다가 손을 뻗었다.

“죽은 사람을 살릴 방법은 없지. 하지만 복수는 해 줄 수 있다.”

“……예, 예에?”

소년은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뒤이어 들려온 ‘복수’란 단어에 목소리를 높였다. 헤이번이 소년을 향해 허리를 살짝 숙인 뒤, 눈을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다오. 기억나는 게 있다면 최대한 말하거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목격자 하나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남아 있었다. 로제를 납치한 자들이 이 소년의 존재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 이 소년에게서 시작해야 할 터였다. 그녀를 찾기 위한 추적은.

“어……. 그러니까, 으음……. 아!”

소년은 헤이번의 말에 기억을 되새기려는 듯 인상을 쓰더니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가방요! 가방을 버린 곳을 알아요!”

“뭐?”

“그 누나가 들고 있던 가방인데, 그걸 근처에 버리고 갔어요. 아직 있을 거예요!”

소년의 말을 듣던 헤이번의 낯빛이 변했다. 그는 두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그곳이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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